여성에게 주어진 사랑, 그 이후의 삶 : 이디스 워튼의 [여름]을 읽고
- 작성자 방백
- 작성일 2026-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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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를 다룬 이디스 워튼의 소설, [여름]에 대한 가장 역사적(또한 현재까지 일반적)인 해석은 이렇다. 여자 주인공인 채리티가 자신의 성적 욕망과 사랑을 마주하고 점점 성숙해지는 “성장 소설”. 1917년 미국, 아직 여성 참정권도 허용되지 않던 시기. 여성의 성적 욕망과 사랑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이 소설은 파격적이었고, “인습과 전통에 맞서 자신의 욕망을 직면하는 여성을 묘사하며 미국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고 한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난 뒤 나는 미묘한 불쾌함을 느꼈다. 채리티는 자신의 욕망을 직면했으나, 그 끝을 보지 못했다. 현실의 벽에 욕망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채리티는 결국 로열(이하 **후견인)과의 결혼에 만족해야 했다. 100년도 전에 발간된 소설이니, 물론 지금의 생각만큼 파격적인 전개는 힘들었으리라. 하지만 현대에 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뒤표지는 이 결말을 “성장”이라고 소개한다.
‘채리티’는 기독교적 의미로 사랑을 상징한다. 이 소설을 읽은 뒤, 난 채리티가 그 이름에 걸맞은 사람이구나를 느낄 수 있었다. 주변 인물들과 상황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마음‘에 솔직하여 후견인의 사랑을 거절했으며, 하니와 함께 정열적인 ’사랑‘을 했다. 몸과 마음이 취약해져 후견인과의 반강제적인 결혼을 진행하기 전까지는, 채리티가 늘 ‘자신의 마음’과 ‘선택’을 계기로 하여 움직였으니, 남자들의 사랑에만 휘둘리던 당대의 수동적인 여성상을 탈피한 성격은 의미가 있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더 깊이 파고들면, [여름]은 결말에서 드러나는 구조적 한계가 분명한 소설이다. 채리티는 본인의 원래 꿈이었던 자립의 가능성이 모두 사라진 후에서야, 후견인과 결혼하게 된다. 혼약의 진행마저도, 신부에게 주어지는 강제성을 묵인하는 목사와, 당사자인 후견인/채리티 단 셋뿐인 공간에서, 절망적인 상황에 몸과 정신이 취약해진 채리티가 제대로 거부할 수 없는 상태일 때 해치우듯 벌어진다. 자신이 결혼했고, 이제 돌이킬 수 없음을 인정한 뒤에야 후견인에게 안정을 느낀 채 끝나는 결말을 우리가 “성장”한 것이라고 읽을 수 있을까? 난 아닌 것 같다. 혹자는 후견인의 외로움을 이해하고, 현실을 받아들인 채리티가 성숙해졌다고 하지만, 그것은 포기와 체념이었고, 그토록 갈망하던 자립이 사라진 최후의 선택지였으며, 남성의 보호 아래서만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가부장제 구조에 순응한 결말이다.
여성 참정권조차 없었을 당시에는, 단순히 여성의 성적 욕망과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당당히 드러냈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었겠지만, 이 소설을 현재의 관점에서 살펴보자면, 결국 가부장제 안에서 사랑과 성적 욕망을 절제 당하고, 바꿀 수 없는 현실에 순응한 여성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여성에게 “성장”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데에 있어 나는 잘못됨을 느꼈다. 만약 상황에 떠밀려 진행된 결혼을 받아들인 채리티의 결말이 성장이라면, 하니와 사랑을 선택하고, 미혼모의 현실과 ‘산’에서의 미래를 엿보면서까지 후견인과의 결혼을 거부했던 채리티의 절박한 감정들은, 아직 “성장”하지 못 한 자의, 철없는 발버둥이 되는 것 아닌가?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립‘을 원하던 여성의 꿈은, 허황된 반항으로 정리되는 것 아닌가? 돈이 없고, 힘이 없는 여성들이라면 감정을 포기하고 다른 남성과의 결혼에 기대 사는 삶을 받아들이는 게 현대의 관점에서 “성장” 했다는 것인가? 그게 올바른 진짜 “성장”인가? 꺾여버린 줄기는 아닌가? 그 꺾임의 자국에 “성장”의 틀을 씌우는 게 맞는 길일까? 민음사 소개글은 최초의 여성 퓰리처상 수상 작가가 여성의 성적 열정을 다룬 소설이라며 홍보한다.(해당 소설에 관한 일반적인 해석도 이와 같다.) 소설의 결말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성장”을 붙이며 해석하는 것은, 앞서 말한 여성주의적 의미와 모순된다.
따라서 나는 [여름]을 “성장 소설”로써 보지 않을 것이다. 사랑으로 그려진 이 소설을, ‘사랑 없이’ 읽어 보고자 한다.
1. 채리티가 원하는 것은 정말 '사랑'이었을까?
소설 중후반까지 채리티는 후견인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거부한다. 그러나 그것은 임시방편일 뿐. 후견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살고 있는 이상 그로부터 강간을 당할 수 있다는 위험이 채리티의 삶엔 존재한다. 때문에 도서관 사서 일을 하면서 "지긋지긋“한 마을을 떠나 대도시로 나가 사는 삶을 꿈꾸지만, 사서 월급으로는 사실 턱도 없는 일이다.
“모든 게 지긋지긋해!” 그녀가 중얼거렸다.
(중략)
“돈을 벌어서 어디에 쓰려고 하는데?” 그가 물었다.
“이곳을 떠나고 싶을 때 떠나려고요.”
“왜 떠나고 싶지?“
채리티의 경멸감이 불쑥 고개를 쳐들고 튀어나왔다.”떠날 수만 있다면 누군들 이 노스도머에 남으려고 하겠어요? 사람들 말로는 아저씨도 그렇다던데요!“ -[여름] 중
이처럼 ’스스로의 삶(자립)'을 이룰 수 없다는 절망으로 가득 찬 채리티의 삶 속에, 하니는 혜성처럼 등장한다. 갑자기 나타나 여태껏 겪어본 적 없던 새로운 세계(문화, 예술, 도시, 부)를 경험하게 해 주는 하니는 단순히 ‘사랑에 빠질 만한 매력적인 남자'가 아니라, 바로 그 ’새로운 세계'로 자신을 데려다줄, 채리티 혼자서는 영영 이룰 수 없는 '스스로의 삶'을 이루어 줄, 어떤 황금 티켓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채리티가 정말 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마을에서 억압된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줄 무언가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채리티가 ‘사랑’만을 원했다면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소설 전반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임신하기 전이라고 할지라도) 하니를 향한 채리티의 사랑은 눈에 띄게 맹목적이며, 삶을 전부 바칠 듯이 집착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구도가 너무 익숙하다. 남성에 비해서 가볍지 않은 여성의 사랑. 여성의 삶은 언제나 ‘사랑’을 빼놓곤 말할 수 없고, 당신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집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째서일까? 채리티가 정말 ‘사랑’만을 원한 것이었는지, 이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서 현실을 한 번 바라보자.
2. 여성은 왜 사랑에 집착하는가?
우리 사회에서 각종 미디어로 보여지는 여성들, 그리고 내 주위의 여성들에게 사랑이란 어떻게 다가오는가? 그들에게 사랑이란 남성에 비하여 과도하게 의무적이거나, 여성 스스로 집착/맹목적인 형태를 띠고 있진 않은가?
그렇다. 꼭 생물학적 차이가 다는 아닐 것이다. 나는 일차적으로, 사회 구조적인 가부장제의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이에 더해, 아주 근본적인, 생존에 근접한 이유가.
여성은 왜 사랑에 집착하는가? 그것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의 사랑'이 여성에겐 권력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이다. 왕에게 ‘총애 받는' 후궁의 권력과 같은 의미 말이다.
길거리에서 번호를 물어보는 남성에게 ’싫어요‘ 가 아니라 '남자친구 있어요'라는 대답으로 거절하는 것이, 여성에겐 올바른 대처법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가부장제 구도 아래선 ’싫다'는 여성의 감정보다는, 실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상대 '남자'의 '소유권'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이는 여성들에게 생존/실존의 위협과 연관되는 불안을 심어준다.
그렇기에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으로 하여금 남편에게/남자친구에게/나아가 '남성들에게 사랑받는다‘는 건, 존중의 감각이자, 따뜻한 대우를 받고, 사람다운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생존 수단이 된다. ‘남성에게’ 사랑받아야만 ‘남성과 같은’ 사회적/지위적 권력(힘)을 쥘 수 있다는 감각은 여성으로 하여금 극단적인 꾸밈 노동의 형태로 드러났다.
밸 훅스의 저서 [사랑은 사치일까?]는, "일찍부터 스스로의 가치를 확신하기 위해 타인을 유혹하고 즐겁게 해줘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여자들은, 허용되고 승인되고 욕망되기 위한 노력을 하느라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라 말한다.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들에게 독립적인 힘과 권력을 쥐여주지 않기에, 힘과 권력은 남성을 통해야지만 내려온다.
2018년 즈음 한국에는 여성향 로맨스 판타지 웹소설상에서 #아기물 #육아물이 대 유행하였다. 대부분 폭군 아버지와 왕자인 오빠들 사이에서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아기로 태어난/입양된 여자 주인공이 그들의 사랑을 받고, 과거에는 상상도 못한 막대한 권력을 누리며, 영원히 행복하게 산다는 큰 플롯을 따라간다.
특이한 건, 이때 주인공의 삶을 바꿔줄 수 있는, ’권력을 쥔‘ 가족들이 모두 남성이라는 점이다. 권력은 오롯이 ’남성‘을 한 번 거쳐서만 여성에게 전해진다. 여성이 여성에게 권력을 전달하거나 힘을 전해주는 플롯은 이처럼 양산형(대량 생산)되지 않았다.
반대로 남성향 판타지는 남자 주인공 스스로 본인만의 힘을 키운다. 그 힘과 권력으로 사랑에 '빠지는'것이 아닌, 강함의 증명으로써, 승리자에게 돌아갈 행복의 요소 중 하나로써 여성을 '쟁취'한다. 주인공에게 호의를 보내며 ‘힘과 권력’을 넘겨주는 존재도, 주인공과 같은 성별인 ‘남성’이다.
여성향 #아기물 #육아물의 유행은 극적인 삶의 변화에서 오는 카타르시스와 욕망을 자극한다. 그러나 그 형태가 ‘남성의 사랑’을 통해서만 표출되는 것은, 가부장제 속에서 여전히 이어지는 여성들의 현실이 반영된 결과이다. 밑바닥에서 살다가, 남성의 사랑을 통해 한순간 힘과 권력을 쥐게 되는 여자 주인공들은, 예쁨 받을만한 행동을 하고, 애교를 부려서 그들의 사랑을 유지해야만 한다. ‘힘과 권력’ 없는 삶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가부장제를 기반으로한 여성향 웹소설의 구조는 페미니즘이 두드러지며, 또 작가 개인의 글이라는 특성을 살려, 가부장적 사회 구조를 전복시키는 소설도 나오는 등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는 추세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의 대중 미디어에서는 ’새로움‘이 주저스럽다. 여자는 수동적이게/아름답게, 남자는 진취적이게/강하게 그려낸다. 이것이 사회적 인식 속에서 통용되면, 여성이 힘을 가지기 위해선 남성의 예쁨의 받아야 한다는 가부장제 구조가 답습되는 것이다.
사랑을 통한 여성상/남성상은 이 두 사례뿐만이 다가 아니다. 어린 시절 본 동화에서도,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구절로도,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왕자가 나타나 힘든 삶을 사는 여성을 구해주는 것. 사실상 왕자의 사랑이 떠난다면 여성은, 언제라도 '힘든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며, 이야기는 끝나 버린다. 여자로 하여금 사랑 다음의 세계를 상상할 수 없게끔 만든다.
사랑이 떠난 세계를 영원히 불안해하도록 만든다. 주위를 둘러싼 진짜 세상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는데, 남자가 사랑해 주니까 끝. ‘사랑이 유지되는 동안은 행복할 거야’라며, 권력자의 얄팍한 감정에 여성의 미래를 모두 맡기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남자들은 기사가 되고, 왕자가 되고, 히어로가 되며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바꿔나간다. 사랑은 싸움에 승리한 이후 얻어내는 것이다.
여성이 '스스로의 힘'을 키워 권력을 얻는 게 아니라. '가부장적 승인'을 통과해야만 권력을 얻을 수 있다는, 그 환상이자 질서가, 여성으로 하여금 남성의 사랑을 더욱 갈망하도록 한다.
그러나 그 욕망에는 여전히, 남성의 '사랑'이 아니라, 내 삶, '내 주위를 둘러싼 세계'를 바꿔줄, 힘과 권력을 향한 여성들의 근본적 갈망이 바탕되어 있다.
3. 남성의 ‘감정‘에 따라 미래가 달라지는 여성들
하니는 채리티와의 사랑을 속삭였지만, 그는 본래 약혼녀가 있는 남자였다. 그렇지만 진실이 밝혀지기 전, 하니가 채리티를 ‘사랑’하고 곁에 있던 동안에 채리티의 삶은 이전과 달라졌다. 채리티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고, 잠깐이지만 새로운 세계를 느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이 채리티의 마음처럼 무겁지 않고, 언제든지 자신을 떠날 수도 있음을 인지한 뒤부터는 조금씩, 본인이 꿈꿨던 미래에 금이 감을 느낀다. 꿈꿔 왔던 미래는 소설이 보여주는 대로, 하니와 함께 ‘사랑’하는 것이었겠지만, ‘대도시에서의 삶‘이 도달 가능할 희망이란 형태로 함께 부풀어 있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 자신을 억압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도록 제약하는 마을을 벗어난, ’제약이 없는‘ 삶 말이다.
하지만 채리티는 언제까지고 하니를 기다리면서 후견인의 집에 머무를 수 없었다. 후견인이 채리티와 결혼하기를 원했고, 그는 채리티를 강간할 뻔한 전적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채리티는 후견인이 권력을 쥐고 있는 ‘마을에서의 삶’을 믿을 수 없다. 그렇기에 자신의 출생지였던 산으로 도피하는 삶이 낫겠다 생각하며 그곳으로 간다.
산에서 마을보다 더 끔찍하고 처절한 무법지대의 현실을 마주하지만 않았더라면 마을을 벗어나 계속 그곳에서 살았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더하여 그보다 앞서 채리티는, 이미 미혼모의 삶이 어떤 것인지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채리티는 돈이 없었고, 의사는 집에 돌아갈 처지가 아닌 미혼모를 생각해 주는 척했지만 채리티가 가난한 상태라는 걸 깨닫자 눈 깜짝할 새 냉담해진다.
자립은 불가능하다. 마을을 벗어날 수는 없다. 하니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 벽에 가로막힌 채리티는 정신이 취약해진 상태에서 후견인과 반강제적인 결혼을 맺는다. 채리티는 결혼한 후에야, 이 상황에서 후견인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할 시간을 얻는다.
후견인은 이제, 미혼모였던 채리티의 열악한 지위를 벗어나게 해줄 완전한 보호자(남편)가 될 것이다. 채리티는 그의 보호 아래서 원하는 물건을 가질 수 있을 것이며, 집을 얻을 수 있다. 이미 결혼은 이뤄져 버렸다. 그래도 채리티는 당장의 절망적인 상황을 벗어난 것이다. 거기서 채리티는 안도를 얻는다.
함께 들여다보고 싶은 부분은, 그 안도 또한 결혼 이후에 바로 찾아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지막 장에서 후견인의 ‘사랑‘, 즉 자신을 ’아끼는 마음‘을 똑바로 인지한 뒤에야, 채리티의 마음에는 온전한 안도가 스민다.
두 사람의 눈이 서로 마주쳤고, 채리티가 일찍이 본 적 없는 무엇이 그의 두 눈에 떠올랐다. 그녀를 부끄럽게 하면서도 안전한 느낌을 주는 표정이었다.
“아저씨도 훌륭하세요.” 부끄러운 듯 채리티가 재빨리 말했다. -[여름] 중
이전까지는, 후견인이 자신을 배려하는 행동으로부터 잠깐씩 안정을 느꼈다면, 이 장면에서는 후견인의 눈을 바라보고 후견인의 마음을 채리티가 직접 깨닫는 순간이다. 채리티는 이제 완전히 안도한다. 후견인은 나를 ‘사랑’하는구나, 나는 이제 ‘안전’하겠구나, 하며. 사랑은 안전과 동의어가 아닌데도. 가부장제 안에서 남성이 가진 힘과 권력은 여성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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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하니가 채리티를 떠나는 지점부터, 채리티의 상황은 극도로 어두워진다. 그 절박함을 뒤집어엎을 한 수가, 바로 하니의 ’돌아옴‘임을 독자는 알 수 있다. 때문에 책을 읽는 동안 독자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하니의 마음(편지)에 기대어 그가 채리티의 곁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다만 이 시점부터 독자가 하니에게 원하는 것은 단순히 채리티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다가 아니다. ’그의 사랑‘은 티켓이다. 티켓으로 얻을 ‘새로운 미래’가 하니의 ‘돌아옴’을 바라도록 한다. 돌아온 하니가 채리티를 둘러싼 절망적 현실(미혼모를 향한 사회적 시선, 홀로 살기에 부족한 돈, 채리티를 덮칠지도 모를 후견인의 집, 채리티를 억압하는 마을 사람들과 ’산‘에서 왔다는 채리티의 신분)을 바꿔주길 원하다. 즉, ’힘‘과 ’권력‘을 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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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리티를 둘러싼 하니와 후견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남성의 ’호감‘은 여성에게 ’안정‘을 준다. 이 안정은 ’사랑‘에서 나오는 게 아닌, ’사랑‘을 통해 약속받는 ’그 남자‘의 ’힘과 권력’이다.
하지만 감정은 단지 ‘감정’일뿐이다.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한순간의 변덕일지도 모르는 ‘감정’에 기대어 여성의 미래는 바람에 휩쓸린 연처럼 나부낀다. 여성을 존중하지 않는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여성이 스스로 가질 수 있는 힘과 권력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성의 그늘 없이 자립하는 여성은 있을 수 없고, 자립하는 여성에게 사회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정글과도 같다. 모든 순간이 존재를 향한 위협의 연속으로 다가온다. 여성은 나를 나로서 유지할 수 있는 힘, 권력을 갈망한다.
4. 사랑, 이후의 삶
우리는 [여름]에서 채리티가 ‘사랑’하는 텍스트만을 읽었지만, 가부장제 속 여성에겐 '남성의 사랑'이 곧 현실을 바꾸어줄 '권력'으로 작동함을 이제 안다.
그러한 관점에서 채리티를 바라보며, 채리티 안에 어쩌면 '사랑'보다 더 강하게 불타올랐을 무언가를 읽어본다. 지금의 현실을 '직접 바꾸어'줄 지도 모를 '힘과 권력‘을 향한 간절한 갈망이 언제나 내재되어 있었음을.
작은 바람을 담아 글을 쓴다. 백 년 전의 소설에 지금의 기준으로서 쉽게 가치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위에서 한 번 말했듯,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은 이에 “성장”을 붙이지 않았으면 바란다. 구조적 한계가 있는 [여름]을 통해 또 다른 의미를 찾았으면 좋겠다.
채리티라는 여성 안에서 사랑의 주체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실질적으로 변화시켜 줄 힘과 권력의 갈망을 읽어낸다면 [여름]은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그가 추구한 것은 사랑만이 아니라, 남성을 통해서 획득 가능했던 돈과 이동성, 그리고 안전이었다. 사랑은 목적이 아닌 생존을 위한 통로였다.
사랑을 외치며 100년 전 여성들에게 공감과 위안을 주었던 소설은, 지금 우리가 ‘어떻게 읽어보느냐’에 따라서 새로운 질문을 남길 수 있다. 여성을 억압하는 구조 속, 여성은 “왜 사랑을 욕망하는가?” 그건 '권력'을 향한 욕망은 아니었는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으로 하여금, 사랑은 곧 힘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는가? '사랑'이라는 서사에 가려졌던 여성들의 더 근본적인 욕망. 존엄을 지키며 생존하고자 하는 욕망.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고자 하는 간절한 욕망을 발견한 내게 [여름]은, 여성에겐 허락되지 않았던 힘의 차이를 암시하는, 일종의 처절한 다큐멘터리로 다가온다.
여성의 성적 욕망이 아니라, 여성의 ’생존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사랑이 아니라, ‘사랑 이후의 삶’을 갈망하는 움직임으로. 이디스 워튼의 [여름]을 다시 비평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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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이디스 워튼, [여름] 뒤표지 소개글 중.
**소설 상 로열은 채리티를 양녀로 들이지 않아, 사전적 정의로서의 법적 관계는 없으나, 이 비평 속에서 채리티와 로열의 기존 관계를 직관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후견인이라 표현함을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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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벽
- 2026-08-25
아깽이 새해가 지나고 또 해가 뜨는 날에, 길고양이를 주웠다. 점심을 먹으려고 막 밖을 나선 참이었다. 아파트 화단 앞에 자그만 솜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엄마가 말하기를 아침부터 저곳에서 꼼짝하나 안하고는 이따금 울어댔다는 것이었다. 갈색과 흰색이 섞인 흔한 고양이였다. 다만 지금까지 본 고양이 중에서 가장 새끼였다는 점이 눈에 띄기는 했지만, 결국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동물을 한 번쯤 키워본 사람이라면 더욱 그 끝을 잘 알고 있으니까. 안타까워도 어쩔 수 없다고, 내버려 두면 어미가 찾아올 거라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만 동물을 한 번 키워본 사람은 또다시 동물을 키우게 된다는 말도 우리는 알고 있었다. 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차 안은 분주했다. 아니 사실은 마음 놓고 먹지도 못했다. 그러니까 결국 결말을 알면서도 또다시 같은 책을 읽듯이, 허무한 결말일 거란 걸 알면서도 끝까지 읽어버리고야 마듯이. 그 중간중간의 행복을 도무지 놓칠 수가 없어서. 역시나 한 시간 뒤에 돌아온 아파트 화단 앞에 그 녀석은 여전히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쪼그려 앉아 그 녀석을 바라보고 있자니 엄마가 말했다. 내 손에 잡히면 데려갈게. 아니면 그냥 놔둬. 그리고 그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손을 뻗은 순간 고양이는 품에 안겼다. 빳빳한 빗자루 같은 촉감이었다. 한겨울의 추위를 한껏 머금어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몸이었다. 병원에 가자마자 수액을 맞았다. 의사 말로는 한쪽 다리가 부러졌다고 했다. 도대체 그 몸으로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길래. 4시간이 지나서야 집으로 들어온 고양이는 담요 안에 안겨서는 온종일 잠을 잤다. 그제서야 좀 살아있는 게 느껴졌다. 잠결에 꿈틀거리는 발도, 밝은 금색의 눈동자도 모두. 이름은 아깽이로 했다. 그러니까 아기고양이, 임시 보호만 해야지 하는 다짐이 담긴 이름이었다. 고양이는 키워본 적도 없으니까. 그냥 이 정도의 책임만 지자고, 네 다리가 나을 때까지만, 딱 그 정도의 정만 주자는 생각으로. 그런데 그 다리가 말썽이었다. 입양공고를 올리려면 적어도 붕대는 풀고 있어야 할 텐데 3개월이 지나도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진물이 터져 매일매일 소독해 주어야 했다. 도대체 검지만 한 다리가 뭐가 문제라고. 다만 아깽이는 그쯤 아주 날아다녔다. 분명 붕대를 감고 있어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텐데 오른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도 우다다 달리기 일쑤였다. 그 모습에 결국 속상해하다가도 웃음을 터트리고야 마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집안이 활기로 가득 차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쯤, 미래를 예견했던 듯하다. 저 고양이가 이곳을 종착점으로 삼게 될 거라는 걸, 그리고 우리는 이미 차고 넘칠 만큼 정을 주고야 말았다는 것을. 물론 1킬로였던 고양이가 그 두 배가 되고 결국은 반년 만에 4킬로가 될 것이라는 건 몰랐지만. 그렇게 어느덧 한겨울이 지나고, 더위로 가득한 계절이 다가온 지금까지도 여전히 아깽이는 집에 눌어붙어 있다. 아마도 앞으로 20년은 더 머물러있겠지. 그때가 되어도 여전히 아깽이일 테고.
- 서벽
- 2026-08-21
은유게임이란, 아무 단어를 제시어로 던졌을 때 그 단어의 본질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유의어와 반의어를 말하는 것으로 최근 친구들과 하기 시작한 게임이다. 얼마 전, 혼자 은유게임을 하다가 ‘상실’을 제시어로 던졌다. 곰곰히 생각하다보니 삶이라는 단어가 툭 튀어나왔다. 이 단어는 분명 게임의 답이 맞는데, 유의어와 반의어 중 어느 쪽에 두어야 할지 한참이나 고민했다. 그러던 중 문득, 좋은 은유는 어느 쪽의 말이라도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지점이 찾아왔다. 삶은 상실과 유사한 말이 될 수도 있고, 상실과 반대인 말이 될 수도 있다. 그 이유는 바로 ‘같은 성질’과, ‘다른 성질’을 넘어선 본질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상실과 삶은 본질적인 ‘성질’을 공유하고 있다. 만질 수 없지만 존재하고, 보지 못하지만 느낄 수 있는 것. 잃음과 얻음이 한 판의 유리장처럼 서로 붙어 있어 떨어트릴 수 없는 것. 한 쪽을 바라볼 때 다른 쪽이 투명하게 비쳐 보이는 것. 그것이 바로 삶과 상실의 동일한 면이었다. 그렇기에 삶은 즉, 상실이 될 수 있다. 삶은 상실이라는 과정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 상실을 통해서 우리는 무언가를 또 얻어간다. 임선우 작가의 소설집, 을 읽고 나면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상실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햇빛에 비춰 보는 다각면의 보석처럼 여러 인물들과 상황 속에서, 환상적인 장치 속에서 세심하게 어루만지고 있는 것일까? 소설은, ‘상실’이라는 게 무엇인지, 명확히 정의내리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궁금증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비평을 쓰고자 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상실이 삶이고, 삶이 상실이라면, 결국 그게 무엇인지 정의내리는 건 큰 의미가 없지 않을까? 우리가 카페에 앉아 유리창의 얼룩을 바라보고 있더라도, 멀리 있는 사람에게 그것은 결국 반대편의 거리를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타인의 시선에서, 생의 목표하는 지점들은, 징검다리처럼 띄엄띄엄한 것이 아니라 사실 긴 터널과 같이 이어져 있다. 소설집에서 사용되는 환상적인 장치들은, 독자가 익숙하다고 여겼던 세상과 몰입하는 것을 계속해서 깨트리며, 독자로 하여금 소설 속 인물들과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독자를 타자화시키면서, 독자는 인물들이 목표하는 띄엄띄엄한 지점들이, 멀리서 보았을 때 전부 이어져 있다고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촉수에 닿으면 인간이고 동물이고 전부 해파리로 변”하는 “변종 해파리”의 출현은, 인물의 상황이 실화가 아닌, ‘지어낸 이야기’임을 끊임없이 자각하도록 만든다. 그 ‘지어낸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 ‘수’가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해 히키코모리가 된 사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도둑질을 하다가 해파리 변신 대행업체를 찾아간 사건은, 삶의 의미를 다시 깨닫는 소설의 마지막 결론을 위한 하나의 수순처럼 느껴진다. 즉, 이 소설집에서 나타나는 ‘상실’은 ‘환상’과 결합하는 순간 ‘잃었다’는 의미보다 ‘생겨남’의 의미로 연결되게 된다. “변종 해파리”의 출현 전까지, ‘수’의 ‘현실적인’ 상황들(히키코모리, 아버지의 돌아가심,
- 방백
- 2026-08-20
멸망요제프. 마침내 그대가 실종된 지 100년이다. 그리고 그 말은, 멸망을 선언하고도 100년이 지났다는 거다. 날카로운 쇠바퀴 소리와 함께 철로 위로 기관차의 육중한 자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증기기관이 내뿜은 흰 증기에 승강장은 서서히 부옇게 뒤덮였다. 뮐러는 인파 속에 파묻힌 채 옅은 입김을 내뱉었다. 이내 텁텁한 공기가 그의 폐부를 가볍게 감싸 올렸다. 그는 두꺼운 외투를 여민 이들을 뚫고 가장 구석진 좌석에 가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승객들을 모두 실은 기관차는 느릿한 숨을 몰아쉬며 철길을 기어나갔다. 초겨울의 한기가 객차 안의 이들이 내뱉는 숨에 데워지고 있었다. 뮐러는 까끌거리는 코트를 벗어 선반 위에 올려놓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쾰른을 떠나는 건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사실은 그로서는 바라지 않던 것이었는데, 이방인의 감각을 느끼고 싶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서야 무료한 삶을 즐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는 언제나 요제프와의 일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예외였지만. 어느새 몇 장만을 남겨둔 노트를 펼치자 어젯밤 적어둔 문장이 나타났다. 그는 요제프에게 닿지 못할 편지를 쓸 때면 언제나 멸망이라는 단어를 쓰고는 했는데 이것보다 더욱이 적합한 단어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또 호라이즌 이야기인가?”덜컹거리는 창문에 기대어 편지를 쓰고 있자니 맞은 편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뮐러가 고개를 들자 빼빼 마른 노인은 그가 관심을 가진다고 생각한 듯 비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백 년째 저 이야기더군.”노인이 옆자리 청년이 펼친 신문을 턱짓했다. 뮐러는 그제야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뮐러를 훑어보며 답을 기다리던 노인은 그가 마땅한 반응을 주지 않자 입을 다물었다. 뮐러는 노인 옆에 앉은 청년을 흘겨봤다. 그는 창가 구석에 끼워진 신문을 펼치고 있었는데, 읽고 있다기보다는 그저 시간을 때우는 것으로 보였다.[호라이즌 IV, 국제 분쟁으로 중단]청년의 신문에서 그 익숙한 타이틀을 본 뮐러는 이내 노트를 덮어두고는 좌석 구석에서 신문을 꺼내 들었다. 지겨운 실패를 알리는 소식을 뒤로한 채 한 장을 넘기자 한면을 가득 채운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호라이즌 프로젝트] 프란츠 요제프 실종 100주년 노화 억제제 ACS(Aging Control System)를 개발한 과학자이자 우주비행사인 프란츠 요제프의 실종 사건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다. 프란츠 요제프는 전 인류의 화성 이주 계획인 호라이즌 프로젝트의 핵심 연구원으로 참여했으며, 우주비행사 디트리히 위버와 발터 크루거와 함께 호라이즌 유인 탐사선에 탑승한 후 교신 두절과 함께 정상 궤도 밖으로 사라졌다. 당시 사고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호라이즌 프로젝트. 뮐러는 그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자신의 몸 어딘가가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화성에 인공도시를 건설한다는 방대한 프로젝트가 시작된 건 멸망의 불씨가 막 고개를 들어 올릴 때였다. 치솟는 기온과 대기근, 도시를 집어삼키던 수십 미터의 쓰나미. 다만 이러한 전례 없는 피해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 서벽
- 2026-08-17
사랑하면 잊지 못할 것 같다고 짖는 개 목줄을 의자에 둔 채로 영화관을 나왔다 함께 하얀 혼잣말을 키웠다 카페 사장님이 주인 없다며 주신 스카프는 다재다능하다 두 개의 목을 쥐는 한 줌의 손이거나 터그 놀이*에 쓰이기도 한다 영화는 둘을 위한 산책길 개의 발자국을 지우는 등 뒤의 그림자 언덕이 빙판처럼 얼어도 흰 바람이 옷 안으로 들이쳤고 틈 날 때마다 물던 꼬리에는 스카프를 둘렀다 스크린 속 배우가 눈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머리와 발이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검은 눈이 영화를 말끔하게 가렸다고 말했기에 상처 없이 흰 빛을 문 개가 돌아왔다 쓰다듬으면 더 놀자고 짖었다 물린 구멍마다 같은 혼잣말이 쏟아졌다 *반려견이 장난감이나 줄을 물고 있을 때 사람이 반대쪽을 잡고 서로 당기며 노는 줄다리기 형태의 놀이
- 양현서
- 2026-08-02
혜유암센터 1층 접수 데스크 앞, 3년 전과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직원은 나를 단박에 알아봤다. 그새 살이 좀 빠지고 목에 닿지 않도록 머리를 짧게 잘랐는데도 그랬다. 의아한 얼굴로 차트 기록을 몇 차례 클릭하던 직원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이내 입술은 다시 살짝 올라간 모양으로 돌아왔지만, 눈에 담긴 빛은 여전했다. 완치 후 전이나 재발은 흔한 경우였으므로 냉정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상황 역시 유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나를 기억하는 건 아마도 3년 전 같은 자리에 앉아 비슷한 문답을 이어가던 때에 실신할 정도로 울었기 때문이겠지. 그때는 곧 죽을 사람처럼 누워있던 엄마가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울지 않을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여전히 엄마의 과거 병력을 적어 넣어야 하는 칸은 한없이 모자랐으므로. “여긴 참 똑같다. 그치.” 엄마도 같은 날을 떠올리고 있는지 코를 훌쩍이며 부지런히 볼펜을 놀리는 내게 슬며시 물어왔다. 엄마는 내가 당신 때문에 우는 걸 정말 싫어하는데, 이젠 그런 걸로 잔소리할 기운도 없는 건지 별말이 없었다. 평소라면 “내가 이래서….” 로 시작하는 익숙한 반복을 흘려들으며 더 많은 눈물을 쏟아야 하는데, 엄마가 조용해서 나도 더 울 수가 없었다. 마지막 줄을 적고 볼펜을 내려놓았다. 전보다 두세 줄 늘어 난 병명이 종이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었다. 엄마가 보지 못하도록 손을 움직이면서도 소용없으리라는 걸 알았다. 구태여 읽지 않아도 나보다 훨씬 잘 알고 있겠지. 겪어봤다는 건 그런 거니까. 엄마는 꼭 봄에 아팠다. 새롭게 피는 것들이 쉬이 도드라지는 계절에 오는 끝을 생각하면서. 나는 그때마다 지겨울 정도로 우는 새벽을 보내야 했다. 눈물이 하도 쏟아져서, 도무지 멈추질 않아서 울면서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될 때까지. 흐르는 것들을 닦아가며 밀린 일을 하다 머쓱해하고, 다시 울기를 반복하다 보면 아침은 여지없이 밝아왔다. ‘죽고 싶어'가 ‘죽을 거야'로 바뀌는 그 시간도 흘렀다. 엄마가 아픈데도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그럼에도 시간은 흐른다는 것. 그리고 어느 순간 아무렇지도 않은 양 구는 나를 마주치는 것. 가장 잔인한 건 언제나 그런 종류였다.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늘 바쁘게 움직였다. 엄마와 함께, 아니면 엄마에게 무언가를 권하는 방식으로. 때로는 그것보다, 더 열심히 혼자. 엄마의 손을 잡은 채 몇 시간씩 황톳길을 걷고 병원에 있거나 퇴원한 엄마에게 아침저녁으로 전화하고 일기 쓰기를 제안하고…. 그 와중에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독립 서점을 열고 매일 거기로 출근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자조적인 웃음을 짓자, 제이는 내 앞에서 한 번도 짓지 않았던 표정을 했다. 입술을 일자로 구기는, 웃는 것도 찌푸리는 것도 아닌. 거기에 담긴 말을 읽어낼 수 없는 것 역시 처음이었다. 분명하게 지나와서 알고 있는 시절의 얼굴인데도. 그러니까 나도 언젠가 꼭 그런 표정을 지은 적이 있었을 텐데도 그랬다. 간호사의 표정을 보면서, 3년 전 이맘때와 제이까지 떠올리지 않을
- listener J
- 2026-07-31
이 시집을 읽기 전 내가 알고 있던 것은 많지 않았다. 시인의 집이 화재로 전소되었고, 그 이후 이 시집이 출간되었다는 정도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시집 역시 화재 이후의 상실과 회복을 담은 기록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화재라는 사건이 시집의 중심에 놓여 있고, 그 경험을 어떻게 견디고 지나왔는지가 주된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다.가장 먼저 읽은 것은 자서였다.> 오래도록 어둡고> 우울한 음악을 들었다> 그러다 거대한 불에 휩쓸렸다> 올해 봄날은 잿더미> 암흑세계였다> 생체발광할 수 있다면> 차가운 빛을 만들 텐데> 더듬어 시를 켰다> 절벽이 보였다처음 자서를 읽었을 때는 화재를 겪은 시인의 절망과 그 이후의 다짐을 압축해 놓은 글처럼 느껴졌다. 특히 ‘시를 켰다’라는 표현은 어둠 속에서 불을 켜듯, 시를 통해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미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생체발광’이라는 표현 역시 스스로 빛을 내고 싶다는 바람 정도로 이해했고, 마지막의 ‘절벽이 보였다’는 문장은 막막한 현실을 비유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물론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왜 ‘시를 썼다’가 아니라 ‘시를 켰다’일까. 왜 절벽은 ‘보였다’에서 끝날까. 하지만 처음에는 그 표현들을 깊이 붙잡기보다, 앞으로 읽게 될 시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장을 넘겼다.1부 ― 바깥을 오래 바라보는 시선1부를 읽으며 가장 먼저 받은 인상은 시선이 바깥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인은 사람을 관찰하고, 일상적인 풍경을 오래 바라본다. 특별하거나 극적인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평범한 장면 하나를 붙잡고 그 안에서 천천히 사유를 이어 나간다. 읽기 전에는 화재라는 사건이 시집 전체를 이끌어 갈 것이라 예상했기에 이러한 전개는 다소 의외였다. 오히려 시인은 자신이 겪은 일을 서둘러 이야기하기보다, 먼저 타인과 세계를 바라보며 자신의 시선을 가다듬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그 과정에서 나는 1부가 단순히 바깥을 관찰하는 장이 아니라, 아직 자신의 상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기 전 스스로를 천천히 위로하고 마음을 정돈해 가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화재를 외면한다기보다는, 그것을 곧바로 언어로 옮기기에는 아직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 과정은 어쩌면 화재라는 사건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를 천천히 위로하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특히나 1부의 첫 시인 「이 세상에 없는 것」은 이후의 시집을 읽는 내내 계속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의 차이는 뭘까> 모두 끝났다고 말해도 될까> 이 세상에 원래 없었던 것 같은 그것을 찾아> 나는 어딜 이토록 떠도는 것인지이 구절을 읽으며 처음에는 상실을 겪은 사람이 스스로를 다독이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미 쓰여 없어졌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혹은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는 걸까. 시인은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고 계속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이 시는 화재 이후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이
- 미빈
- 2026-07-30
얼어붙은 호수의 경관은 새하얗고 텅 비어 보인다. 그러나 비었다는 것이 정말 텅 빈 것일까? 이 물음에서부터 김이듬 시인의 시집, 를 읽어볼 것이다. 여기 생활의 흔적이 남지 않은 빈 방이 하나 있다고 치자.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우리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방, 혹은 생활의 흔적이 남지 않은 방을 보며 흔히 ‘빈’이라는 묘사를 붙인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비어’ 있는 게 아니다. 사물의 관점에서 다시 방을 보았을 때, 주름 지지 않은 이불과 고요한 침대, 먼지 쌓인 책상과 마룻바닥, 잘 개어진 옷과 닫힌 옷장 등 많은 물건이 들어찬 방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처럼 일상적으로 말할 때 우리는 인간을 세계의 주체로 두고 본다. 인간은 사물과 달리 권력을 잡고 있으며, 주류라고 칭해지기 때문이다. 세상은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의 언어로 설명되며, 이때 인간 아닌 ‘그밖의 것’들은 ‘원래 없었던 것’ 같이 묻혀 버린다. ‘그밖의 것’들은 주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를 주류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그 안에 남아 있던 비주류는 ‘있으나 없는 것’처럼 지워진다. 이 시집에서는 등장 인물이 ‘너’, ‘나’, ‘친구’ 혹은 일상적인 직업, 화자와 가까운 특징을 지닌 인물 정도에 그치는 여타 시집들에 비해 더 다양한 사회적 위치나 직업, 특징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또한 재해의 상황들을 언급하며 그 속에서 피해를 입은 인물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도록 만들고, 특정 사물과 비슷한 처지의 인물들을 연상시키도록 한다. “폭풍”/“기근”/“역병”/“전쟁”, “동남아”에서 온 “가사도우미”, “생리대/초콜릿 바/담배/술”과 같이 값싼 물건과 생활 필수품을 훔쳐 곧 “감옥”으로 “떨어지”게 될 “도둑”, “사람”에게 죽은 “사람”과 “자기 혈육”에게 죽은 “가족”과 “마스크”가 “없”어 “승차를 거부”당한 “누추하게 젖은 사람”, “몽골인 노동자들”, “죽어 있”는 “식물”에서 떠오르는 방치된 사람들과 “태어났고 평범하게 성장했고 온순했으며 살해당한 소녀”와 “식물이 죽고 나서야” “그 식물의 이름을 알게 되”는 세상의 무관심함에 놓여 있는 사람들, “거리 곳곳의 무장군인들과 탱크”, “고독사”, 태어나
- 방백
- 2026-07-30
어떤 행동은 글로 적힐 수 있다. 혹은 글로 적히지 않을 수도 있다. 오렌지를 나무에서 딴 후 껍질을 까 입에 넣는다. 씹는다. 이것은 한 개인의 행위로 볼 수 있다. 주어가 없어도 문장이 된다. 규모가 큰 것을 적거나 역사를 기술할 때에는 반드시 관념적이게 되는 것일까? 예컨대 역사책들은 주로 '눈부시게 발전했다' 혹은 'OO국이 쇠퇴했다', '성장했다'. '번영을 누렸다' 라고 쓰지만 도대체 누가 번영을 누렸다는 것인가.. 한 나라 안에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쇠퇴'라는 것은 무엇인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눈부시게 발전했다'라고 쓴다면 그 '눈부신' 밝음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러나 한 거대한 공동체의 일대기를 쓸 때에 (그 공동체가 실은 개인들의 합이란 것을 감안하지 않고 주로 쓰인다.) 이런 '개인'의 행위를 서술하는 데에 적합한 단어들 말고 공동체 전용 단어는 없다. A나라가 번영했다는 사실은 어떤 한 개인( 아마 'A나라' 라는 이름을 가진)이 번영했다는 방식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그리고 쓰기도 어렵다. A나라에 세 사람이 살고 있었다면 세 사람의 이야기를 하나씩 (동시에 세 줄을 읽을 순 없으니 순서대로) 써야 할 것이고,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만연한 의인화는 어떤 문제를 야기하는가? 먼저 이것은 그 공동체가 실재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한 축구 팀은 단지 같은 유니폼을 입기로 약속한 것일 뿐이다. 만약 'A축구팀이 승리를 차지했다', 'A축구팀이 승승장구하고 있다' 라고 쓴다면 언어의 힘은 읽는 이에게 혹은 듣는 이에게 그 팀에 속해 있는 선수들을 'A축구팀'으로 단순화하게 한다. '우리 반', '우리 학교', '우리 나라'도 같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 나아가다 보면 (도대체 어디로 나는 '나아가고' 있단 말인가? 나는 강물 위를 떠다니는 나룻 사공이란 말인가?) '우리'라는 말마저 부정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정말 그러하다. 이것은 약속 혹은 확인이다. 우리는 언제라도 '그들' 혹은 '너와 나' 같은 다른 말로 바뀔 수 있다. 언어는 필요에 따라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것과 어떤 것을 구별지어야만 한다. 두 원숭이가 언어를 처음 만드는 선사 시대 환경을 가정해 본다면 그것을 주로 야생 동물이나 식물의 '특성'을 묘사해야 했을 것이다. 또한 '성별' 그리고 대화의 주가 되는 '사람'과 '그 외'의 구별이다. 고유 명사는 제외하고 형용사를 보면, 도마뱀은 '빠르다', 거북이는 '느리다', 저 돌은 '크다'. 나무가 '높다' 등이 있다. 성격에 관련된 것도 그러하다. '교활한', '나쁜', '친절한', '아름다운' 등도 진화의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유행어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렇듯 언어가 단지 목청이 내는 소리의 조합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유행하는 소리'는 같은 집단임을 확인하는 신호로 보인다. 오늘날 유행하는 '야르' (이것의 의미는 알지 못한다.)
- 드시코
- 2026-07-29
울고 싶었어 그다지 기쁘지도 않았는데 슬프고 싶었지 아무려나 흔들리고 휘청이다 피곤에 못 이겨 쓰러지듯 자고 싶었어 잠은 천장에 얼씬대고 침대는 안 맞는 옷처럼 불편했지 투명한 손이 두 눈을 꾹꾹 눌러도 정신은 꺼지지 않고 찌그러지기만 할뿐 갑자기 사이렌이 울리고 창밖으로는 포탄이 비처럼 쏟아지거나 비행기와 비행기가 공중에서 맞부딪쳐 해보다 눈부신 불꽃을 흐트리면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불타는 양이 한 마리 눈물 흘리는 양이 한 마리 백 마리 천 마리 양들의 세계에 운석이 떨어져 모두 멸종해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포개진 양털 속에서 숨 막혀 풍선처럼 떠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고요한 밤 저 시계의 맥박을 부러뜨리고 내 가슴팍을 찔러야지
- 구포대교
- 2026-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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