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에게 주어진 사랑, 그 이후의 삶 : 이디스 워튼의 [여름]을 읽고
- 작성자 방백
- 작성일 2026-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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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를 다룬 이디스 워튼의 소설, [여름]에 대한 가장 역사적(또한 현재까지 일반적)인 해석은 이렇다. 여자 주인공인 채리티가 자신의 성적 욕망과 사랑을 마주하고 점점 성숙해지는 “성장 소설”. 1917년 미국, 아직 여성 참정권도 허용되지 않던 시기. 여성의 성적 욕망과 사랑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이 소설은 파격적이었고, “인습과 전통에 맞서 자신의 욕망을 직면하는 여성을 묘사하며 미국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고 한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난 뒤 나는 미묘한 불쾌함을 느꼈다. 채리티는 자신의 욕망을 직면했으나, 그 끝을 보지 못했다. 현실의 벽에 욕망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채리티는 결국 로열(이하 **후견인)과의 결혼에 만족해야 했다. 100년도 전에 발간된 소설이니, 물론 지금의 생각만큼 파격적인 전개는 힘들었으리라. 하지만 현대에 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뒤표지는 이 결말을 “성장”이라고 소개한다.
‘채리티’는 기독교적 의미로 사랑을 상징한다. 이 소설을 읽은 뒤, 난 채리티가 그 이름에 걸맞은 사람이구나를 느낄 수 있었다. 주변 인물들과 상황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마음‘에 솔직하여 후견인의 사랑을 거절했으며, 하니와 함께 정열적인 ’사랑‘을 했다. 몸과 마음이 취약해져 후견인과의 반강제적인 결혼을 진행하기 전까지는, 채리티가 늘 ‘자신의 마음’과 ‘선택’을 계기로 하여 움직였으니, 남자들의 사랑에만 휘둘리던 당대의 수동적인 여성상을 탈피한 성격은 의미가 있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더 깊이 파고들면, [여름]은 결말에서 드러나는 구조적 한계가 분명한 소설이다. 채리티는 본인의 원래 꿈이었던 자립의 가능성이 모두 사라진 후에서야, 후견인과 결혼하게 된다. 혼약의 진행마저도, 신부에게 주어지는 강제성을 묵인하는 목사와, 당사자인 후견인/채리티 단 셋뿐인 공간에서, 절망적인 상황에 몸과 정신이 취약해진 채리티가 제대로 거부할 수 없는 상태일 때 해치우듯 벌어진다. 자신이 결혼했고, 이제 돌이킬 수 없음을 인정한 뒤에야 후견인에게 안정을 느낀 채 끝나는 결말을 우리가 “성장”한 것이라고 읽을 수 있을까? 난 아닌 것 같다. 혹자는 후견인의 외로움을 이해하고, 현실을 받아들인 채리티가 성숙해졌다고 하지만, 그것은 포기와 체념이었고, 그토록 갈망하던 자립이 사라진 최후의 선택지였으며, 남성의 보호 아래서만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가부장제 구조에 순응한 결말이다.
여성 참정권조차 없었을 당시에는, 단순히 여성의 성적 욕망과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당당히 드러냈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었겠지만, 이 소설을 현재의 관점에서 살펴보자면, 결국 가부장제 안에서 사랑과 성적 욕망을 절제 당하고, 바꿀 수 없는 현실에 순응한 여성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여성에게 “성장”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데에 있어 나는 잘못됨을 느꼈다. 만약 상황에 떠밀려 진행된 결혼을 받아들인 채리티의 결말이 성장이라면, 하니와 사랑을 선택하고, 미혼모의 현실과 ‘산’에서의 미래를 엿보면서까지 후견인과의 결혼을 거부했던 채리티의 절박한 감정들은, 아직 “성장”하지 못 한 자의, 철없는 발버둥이 되는 것 아닌가?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립‘을 원하던 여성의 꿈은, 허황된 반항으로 정리되는 것 아닌가? 돈이 없고, 힘이 없는 여성들이라면 감정을 포기하고 다른 남성과의 결혼에 기대 사는 삶을 받아들이는 게 현대의 관점에서 “성장” 했다는 것인가? 그게 올바른 진짜 “성장”인가? 꺾여버린 줄기는 아닌가? 그 꺾임의 자국에 “성장”의 틀을 씌우는 게 맞는 길일까? 민음사 소개글은 최초의 여성 퓰리처상 수상 작가가 여성의 성적 열정을 다룬 소설이라며 홍보한다.(해당 소설에 관한 일반적인 해석도 이와 같다.) 소설의 결말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성장”을 붙이며 해석하는 것은, 앞서 말한 여성주의적 의미와 모순된다.
따라서 나는 [여름]을 “성장 소설”로써 보지 않을 것이다. 사랑으로 그려진 이 소설을, ‘사랑 없이’ 읽어 보고자 한다.
1. 채리티가 원하는 것은 정말 '사랑'이었을까?
소설 중후반까지 채리티는 후견인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거부한다. 그러나 그것은 임시방편일 뿐. 후견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살고 있는 이상 그로부터 강간을 당할 수 있다는 위험이 채리티의 삶엔 존재한다. 때문에 도서관 사서 일을 하면서 "지긋지긋“한 마을을 떠나 대도시로 나가 사는 삶을 꿈꾸지만, 사서 월급으로는 사실 턱도 없는 일이다.
“모든 게 지긋지긋해!” 그녀가 중얼거렸다.
(중략)
“돈을 벌어서 어디에 쓰려고 하는데?” 그가 물었다.
“이곳을 떠나고 싶을 때 떠나려고요.”
“왜 떠나고 싶지?“
채리티의 경멸감이 불쑥 고개를 쳐들고 튀어나왔다.”떠날 수만 있다면 누군들 이 노스도머에 남으려고 하겠어요? 사람들 말로는 아저씨도 그렇다던데요!“ -[여름] 중
이처럼 ’스스로의 삶(자립)'을 이룰 수 없다는 절망으로 가득 찬 채리티의 삶 속에, 하니는 혜성처럼 등장한다. 갑자기 나타나 여태껏 겪어본 적 없던 새로운 세계(문화, 예술, 도시, 부)를 경험하게 해 주는 하니는 단순히 ‘사랑에 빠질 만한 매력적인 남자'가 아니라, 바로 그 ’새로운 세계'로 자신을 데려다줄, 채리티 혼자서는 영영 이룰 수 없는 '스스로의 삶'을 이루어 줄, 어떤 황금 티켓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채리티가 정말 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마을에서 억압된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줄 무언가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채리티가 ‘사랑’만을 원했다면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소설 전반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임신하기 전이라고 할지라도) 하니를 향한 채리티의 사랑은 눈에 띄게 맹목적이며, 삶을 전부 바칠 듯이 집착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구도가 너무 익숙하다. 남성에 비해서 가볍지 않은 여성의 사랑. 여성의 삶은 언제나 ‘사랑’을 빼놓곤 말할 수 없고, 당신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집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째서일까? 채리티가 정말 ‘사랑’만을 원한 것이었는지, 이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서 현실을 한 번 바라보자.
2. 여성은 왜 사랑에 집착하는가?
우리 사회에서 각종 미디어로 보여지는 여성들, 그리고 내 주위의 여성들에게 사랑이란 어떻게 다가오는가? 그들에게 사랑이란 남성에 비하여 과도하게 의무적이거나, 여성 스스로 집착/맹목적인 형태를 띠고 있진 않은가?
그렇다. 꼭 생물학적 차이가 다는 아닐 것이다. 나는 일차적으로, 사회 구조적인 가부장제의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이에 더해, 아주 근본적인, 생존에 근접한 이유가.
여성은 왜 사랑에 집착하는가? 그것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의 사랑'이 여성에겐 권력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이다. 왕에게 ‘총애 받는' 후궁의 권력과 같은 의미 말이다.
길거리에서 번호를 물어보는 남성에게 ’싫어요‘ 가 아니라 '남자친구 있어요'라는 대답으로 거절하는 것이, 여성에겐 올바른 대처법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가부장제 구도 아래선 ’싫다'는 여성의 감정보다는, 실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상대 '남자'의 '소유권'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이는 여성들에게 생존/실존의 위협과 연관되는 불안을 심어준다.
그렇기에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으로 하여금 남편에게/남자친구에게/나아가 '남성들에게 사랑받는다‘는 건, 존중의 감각이자, 따뜻한 대우를 받고, 사람다운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생존 수단이 된다. ‘남성에게’ 사랑받아야만 ‘남성과 같은’ 사회적/지위적 권력(힘)을 쥘 수 있다는 감각은 여성으로 하여금 극단적인 꾸밈 노동의 형태로 드러났다.
밸 훅스의 저서 [사랑은 사치일까?]는, "일찍부터 스스로의 가치를 확신하기 위해 타인을 유혹하고 즐겁게 해줘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여자들은, 허용되고 승인되고 욕망되기 위한 노력을 하느라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라 말한다.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들에게 독립적인 힘과 권력을 쥐여주지 않기에, 힘과 권력은 남성을 통해야지만 내려온다.
2018년 즈음 한국에는 여성향 로맨스 판타지 웹소설상에서 #아기물 #육아물이 대 유행하였다. 대부분 폭군 아버지와 왕자인 오빠들 사이에서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아기로 태어난/입양된 여자 주인공이 그들의 사랑을 받고, 과거에는 상상도 못한 막대한 권력을 누리며, 영원히 행복하게 산다는 큰 플롯을 따라간다.
특이한 건, 이때 주인공의 삶을 바꿔줄 수 있는, ’권력을 쥔‘ 가족들이 모두 남성이라는 점이다. 권력은 오롯이 ’남성‘을 한 번 거쳐서만 여성에게 전해진다. 여성이 여성에게 권력을 전달하거나 힘을 전해주는 플롯은 이처럼 양산형(대량 생산)되지 않았다.
반대로 남성향 판타지는 남자 주인공 스스로 본인만의 힘을 키운다. 그 힘과 권력으로 사랑에 '빠지는'것이 아닌, 강함의 증명으로써, 승리자에게 돌아갈 행복의 요소 중 하나로써 여성을 '쟁취'한다. 주인공에게 호의를 보내며 ‘힘과 권력’을 넘겨주는 존재도, 주인공과 같은 성별인 ‘남성’이다.
여성향 #아기물 #육아물의 유행은 극적인 삶의 변화에서 오는 카타르시스와 욕망을 자극한다. 그러나 그 형태가 ‘남성의 사랑’을 통해서만 표출되는 것은, 가부장제 속에서 여전히 이어지는 여성들의 현실이 반영된 결과이다. 밑바닥에서 살다가, 남성의 사랑을 통해 한순간 힘과 권력을 쥐게 되는 여자 주인공들은, 예쁨 받을만한 행동을 하고, 애교를 부려서 그들의 사랑을 유지해야만 한다. ‘힘과 권력’ 없는 삶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가부장제를 기반으로한 여성향 웹소설의 구조는 페미니즘이 두드러지며, 또 작가 개인의 글이라는 특성을 살려, 가부장적 사회 구조를 전복시키는 소설도 나오는 등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는 추세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의 대중 미디어에서는 ’새로움‘이 주저스럽다. 여자는 수동적이게/아름답게, 남자는 진취적이게/강하게 그려낸다. 이것이 사회적 인식 속에서 통용되면, 여성이 힘을 가지기 위해선 남성의 예쁨의 받아야 한다는 가부장제 구조가 답습되는 것이다.
사랑을 통한 여성상/남성상은 이 두 사례뿐만이 다가 아니다. 어린 시절 본 동화에서도,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구절로도,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왕자가 나타나 힘든 삶을 사는 여성을 구해주는 것. 사실상 왕자의 사랑이 떠난다면 여성은, 언제라도 '힘든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며, 이야기는 끝나 버린다. 여자로 하여금 사랑 다음의 세계를 상상할 수 없게끔 만든다.
사랑이 떠난 세계를 영원히 불안해하도록 만든다. 주위를 둘러싼 진짜 세상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는데, 남자가 사랑해 주니까 끝. ‘사랑이 유지되는 동안은 행복할 거야’라며, 권력자의 얄팍한 감정에 여성의 미래를 모두 맡기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남자들은 기사가 되고, 왕자가 되고, 히어로가 되며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바꿔나간다. 사랑은 싸움에 승리한 이후 얻어내는 것이다.
여성이 '스스로의 힘'을 키워 권력을 얻는 게 아니라. '가부장적 승인'을 통과해야만 권력을 얻을 수 있다는, 그 환상이자 질서가, 여성으로 하여금 남성의 사랑을 더욱 갈망하도록 한다.
그러나 그 욕망에는 여전히, 남성의 '사랑'이 아니라, 내 삶, '내 주위를 둘러싼 세계'를 바꿔줄, 힘과 권력을 향한 여성들의 근본적 갈망이 바탕되어 있다.
3. 남성의 ‘감정‘에 따라 미래가 달라지는 여성들
하니는 채리티와의 사랑을 속삭였지만, 그는 본래 약혼녀가 있는 남자였다. 그렇지만 진실이 밝혀지기 전, 하니가 채리티를 ‘사랑’하고 곁에 있던 동안에 채리티의 삶은 이전과 달라졌다. 채리티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고, 잠깐이지만 새로운 세계를 느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이 채리티의 마음처럼 무겁지 않고, 언제든지 자신을 떠날 수도 있음을 인지한 뒤부터는 조금씩, 본인이 꿈꿨던 미래에 금이 감을 느낀다. 꿈꿔 왔던 미래는 소설이 보여주는 대로, 하니와 함께 ‘사랑’하는 것이었겠지만, ‘대도시에서의 삶‘이 도달 가능할 희망이란 형태로 함께 부풀어 있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 자신을 억압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도록 제약하는 마을을 벗어난, ’제약이 없는‘ 삶 말이다.
하지만 채리티는 언제까지고 하니를 기다리면서 후견인의 집에 머무를 수 없었다. 후견인이 채리티와 결혼하기를 원했고, 그는 채리티를 강간할 뻔한 전적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채리티는 후견인이 권력을 쥐고 있는 ‘마을에서의 삶’을 믿을 수 없다. 그렇기에 자신의 출생지였던 산으로 도피하는 삶이 낫겠다 생각하며 그곳으로 간다.
산에서 마을보다 더 끔찍하고 처절한 무법지대의 현실을 마주하지만 않았더라면 마을을 벗어나 계속 그곳에서 살았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더하여 그보다 앞서 채리티는, 이미 미혼모의 삶이 어떤 것인지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채리티는 돈이 없었고, 의사는 집에 돌아갈 처지가 아닌 미혼모를 생각해 주는 척했지만 채리티가 가난한 상태라는 걸 깨닫자 눈 깜짝할 새 냉담해진다.
자립은 불가능하다. 마을을 벗어날 수는 없다. 하니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 벽에 가로막힌 채리티는 정신이 취약해진 상태에서 후견인과 반강제적인 결혼을 맺는다. 채리티는 결혼한 후에야, 이 상황에서 후견인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할 시간을 얻는다.
후견인은 이제, 미혼모였던 채리티의 열악한 지위를 벗어나게 해줄 완전한 보호자(남편)가 될 것이다. 채리티는 그의 보호 아래서 원하는 물건을 가질 수 있을 것이며, 집을 얻을 수 있다. 이미 결혼은 이뤄져 버렸다. 그래도 채리티는 당장의 절망적인 상황을 벗어난 것이다. 거기서 채리티는 안도를 얻는다.
함께 들여다보고 싶은 부분은, 그 안도 또한 결혼 이후에 바로 찾아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지막 장에서 후견인의 ‘사랑‘, 즉 자신을 ’아끼는 마음‘을 똑바로 인지한 뒤에야, 채리티의 마음에는 온전한 안도가 스민다.
두 사람의 눈이 서로 마주쳤고, 채리티가 일찍이 본 적 없는 무엇이 그의 두 눈에 떠올랐다. 그녀를 부끄럽게 하면서도 안전한 느낌을 주는 표정이었다.
“아저씨도 훌륭하세요.” 부끄러운 듯 채리티가 재빨리 말했다. -[여름] 중
이전까지는, 후견인이 자신을 배려하는 행동으로부터 잠깐씩 안정을 느꼈다면, 이 장면에서는 후견인의 눈을 바라보고 후견인의 마음을 채리티가 직접 깨닫는 순간이다. 채리티는 이제 완전히 안도한다. 후견인은 나를 ‘사랑’하는구나, 나는 이제 ‘안전’하겠구나, 하며. 사랑은 안전과 동의어가 아닌데도. 가부장제 안에서 남성이 가진 힘과 권력은 여성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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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하니가 채리티를 떠나는 지점부터, 채리티의 상황은 극도로 어두워진다. 그 절박함을 뒤집어엎을 한 수가, 바로 하니의 ’돌아옴‘임을 독자는 알 수 있다. 때문에 책을 읽는 동안 독자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하니의 마음(편지)에 기대어 그가 채리티의 곁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다만 이 시점부터 독자가 하니에게 원하는 것은 단순히 채리티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다가 아니다. ’그의 사랑‘은 티켓이다. 티켓으로 얻을 ‘새로운 미래’가 하니의 ‘돌아옴’을 바라도록 한다. 돌아온 하니가 채리티를 둘러싼 절망적 현실(미혼모를 향한 사회적 시선, 홀로 살기에 부족한 돈, 채리티를 덮칠지도 모를 후견인의 집, 채리티를 억압하는 마을 사람들과 ’산‘에서 왔다는 채리티의 신분)을 바꿔주길 원하다. 즉, ’힘‘과 ’권력‘을 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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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리티를 둘러싼 하니와 후견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남성의 ’호감‘은 여성에게 ’안정‘을 준다. 이 안정은 ’사랑‘에서 나오는 게 아닌, ’사랑‘을 통해 약속받는 ’그 남자‘의 ’힘과 권력’이다.
하지만 감정은 단지 ‘감정’일뿐이다.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한순간의 변덕일지도 모르는 ‘감정’에 기대어 여성의 미래는 바람에 휩쓸린 연처럼 나부낀다. 여성을 존중하지 않는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여성이 스스로 가질 수 있는 힘과 권력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성의 그늘 없이 자립하는 여성은 있을 수 없고, 자립하는 여성에게 사회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정글과도 같다. 모든 순간이 존재를 향한 위협의 연속으로 다가온다. 여성은 나를 나로서 유지할 수 있는 힘, 권력을 갈망한다.
4. 사랑, 이후의 삶
우리는 [여름]에서 채리티가 ‘사랑’하는 텍스트만을 읽었지만, 가부장제 속 여성에겐 '남성의 사랑'이 곧 현실을 바꾸어줄 '권력'으로 작동함을 이제 안다.
그러한 관점에서 채리티를 바라보며, 채리티 안에 어쩌면 '사랑'보다 더 강하게 불타올랐을 무언가를 읽어본다. 지금의 현실을 '직접 바꾸어'줄 지도 모를 '힘과 권력‘을 향한 간절한 갈망이 언제나 내재되어 있었음을.
작은 바람을 담아 글을 쓴다. 백 년 전의 소설에 지금의 기준으로서 쉽게 가치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위에서 한 번 말했듯,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은 이에 “성장”을 붙이지 않았으면 바란다. 구조적 한계가 있는 [여름]을 통해 또 다른 의미를 찾았으면 좋겠다.
채리티라는 여성 안에서 사랑의 주체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실질적으로 변화시켜 줄 힘과 권력의 갈망을 읽어낸다면 [여름]은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그가 추구한 것은 사랑만이 아니라, 남성을 통해서 획득 가능했던 돈과 이동성, 그리고 안전이었다. 사랑은 목적이 아닌 생존을 위한 통로였다.
사랑을 외치며 100년 전 여성들에게 공감과 위안을 주었던 소설은, 지금 우리가 ‘어떻게 읽어보느냐’에 따라서 새로운 질문을 남길 수 있다. 여성을 억압하는 구조 속, 여성은 “왜 사랑을 욕망하는가?” 그건 '권력'을 향한 욕망은 아니었는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으로 하여금, 사랑은 곧 힘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는가? '사랑'이라는 서사에 가려졌던 여성들의 더 근본적인 욕망. 존엄을 지키며 생존하고자 하는 욕망.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고자 하는 간절한 욕망을 발견한 내게 [여름]은, 여성에겐 허락되지 않았던 힘의 차이를 암시하는, 일종의 처절한 다큐멘터리로 다가온다.
여성의 성적 욕망이 아니라, 여성의 ’생존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사랑이 아니라, ‘사랑 이후의 삶’을 갈망하는 움직임으로. 이디스 워튼의 [여름]을 다시 비평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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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이디스 워튼, [여름] 뒤표지 소개글 중.
**소설 상 로열은 채리티를 양녀로 들이지 않아, 사전적 정의로서의 법적 관계는 없으나, 이 비평 속에서 채리티와 로열의 기존 관계를 직관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후견인이라 표현함을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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