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할아버지
- 작성자 연꽃담비
- 작성일 2026-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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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엄마가 보던 드라마의 한 장면을 우연히 눈에 담게 된 적이 있었다. 밝은 머리에 화려한 옷차림을 한 여배우가 우는 장면이었다. 그걸 보자마자 ‘우는거야?’ 하고 물었었다. 엄마가 그렇다고 했다. 그러나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또 한번 ‘어른도 울어?’라고 물었었다. 엄마는 '그럼 당연하지'라며 다시 드라마에 몰입했다. 배우의 눈에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서러움이 가득 담긴 검은 눈물이 볼을 타고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때는 어른들도 우는 대신 검은 눈물이 나는구나 생각했다. 사실 반은 맞는 말이었다. 그 눈물이 왜 검은지 고작 아이가 해아리진 못할 테니까.
시간이 지나 조금 더 자란 나는 아마도 고학년쯤 되었을 터였다. 추석을 맞아 찾아간 할머니 집엔 놀거리는 없어도 밖이 뻥 뚫려있어 시원하게 소리를 원없이 지를 수 있었다. 년년생 터울인 동생과 시골 진돗개 복돌이까지 합세해 며칠동안 잔잔하지만 지루하지 않은 설이었다. 그보다 더 어릴 땐 할머니 집에서 우리 온가족이 살았기에 명절 때문이 아니더라도, 자주 오는 이 영동집은 나도 얼굴 모를 이웃 할머니, 할아버지 이름을 몇 알 정도였다. 명절의 마지막 날. 익숙한 절차대로 시작이었다. 집에 가기 전에 차로 5분 거리에 사는 왕할아버지께 인사하러 가는 코스만 끝나면, 다시 집이었다. 다시 학교를 가야해서 아쉬운 마음, 차로 한참을 또 달려야 해서 답답한 마음,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 등이 복잡했다. 노래 한곡을 마음 속으로 완곡할 때 즈음 차는 두번째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흔살이 훌쩍 넘으신 왕할아버지는 왕년에 열정적인 분이셨다고는 하지만, 우리 앞에서는 화를 내시거나 언성을 높히신적 없는 자상한 분이셨다. 사탕을 좋아하시기에 몇개 골라갔던 기억이 있는 작은 왕할아버지의 거처는 둘 이상이 살기에는 어려운 좁고 말린 곶감 냄새가 나는 단칸방이었다. 비록 낡은 집이었지만, 할머니집에서 살았을 때의 추억이 하나 있았다. 저학년 때 산책겸 홀로 왕할아버지네를 찾아 걸어갔던 경험. 혼자 왔던 나를 매우 기뻐하시며 반겨주셨던 왕할아버지는 두말 않고 오랜지 두개를 꺼내오셨다. 조금은 미지근하고 단 맛이 많진 않았지만 할아버지와의 단 둘뿐인 추억은 단순하고도 의외로 가장 오랜 잔상이 되어 가장 큰 기억으로 그 장소감에 스며들었다. 아빠가 작은 철문을 두드리며 할아버지를 찾았고, 왠일이신지 할아버지는 바닥에 앉아서 눈빛으로만 우릴 맞하시며 앉아계셨다.
틀니 때문에, 방언 때문에 할아버지가 하는 말은 뉘양스는 짐작이 갔으나 정확한 문장구성은 항상 알아듣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날은 달랐다. 할아버지의 눈빛이 이상했었다. 그냥 웅얼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아서 그때는 많이 충격이었다. 우리가 나가자 따라오시던 할아버지는 신발도 제대로 못 신으시고 바지 지퍼도 올리지 않으신 채 엉뚱한 곳을 쳐다보셨다. 우리는 차 안으로 도로 밀어 넣어졌고. 엄마 아빠가 그렇게 당황한 것도, 다시 집으로 올라가는데 차질이 생긴것도 처음이었다. 차창 너머에서도 알 수 있었다. 엄마의 코가 빨개지고 할머니께 전화하는 목소리가 떨렸다는 것을. 더럭 겁이나 오빠와 나 동생 모두 불 꺼진 전등처럼 고요하게 침묵을 지켰다. 다시 돌아온 할머니집에서 아까까지만 해도 작별인사를 하던 어른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모여있는 것을 보자 실감이 났다. 어딘가 이상해진 할아버지가 침을 주륵 흘리면, 그걸 닦는 할머니는 차마 본인의 투명한 눈물은 닦지 못하셨다. 드라마나 매체가 아닌 실제 어른의 눈물은 내 생각과 달리 까맣지 않고 투명한 색이었다. 뛰어놀던 마당도, 동생도. 119에 허겁지겁 올라타는 어른들의 모습만 한참 바라보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동네가 떠나가라 펑펑 울거나 맘을 다잡고 침착하거나, 그럴 순 없었다. 그저 쇳소리가 나는 그네 위에서 한참을 소리 없는 눈물 흘렸다.
그 일이 있고나서 1년 동안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겪어야 했다. 왕할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시고 퇴원하시고 다시 추석이 지나 우리를 또 보시고 웃으실 때까지, 마음 한 구석에서는 불안감과 두려움. 그리고 막연한 준비가 자라고 있었다. 우리 모두가 겪어야 하지만, 그 무게는 아무 상관 없는 나에게 마저도 부담이 되는 압박이었다. 다시 어른들의 눈물을 보는게 두려웠다. 처음 겪는 타인의 죽음은 나를 포함해 남겨진 이들이 얼마나 울게할건지, 얼마나 아프게할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럴 수 없지만서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다는 말을 듣기엔 겁이 났다. 휘몰아치던 마음속과는 별개로 할아버지는 점점 나아지는 듯 했고 이별은 약 1년 뒤에 덤덤하게 찾아왔다.
빈소 안에서 우라 삼남매는 옆방이 쉬는 곳인 듯 그 안에서 종일 폰만 했다. 모두들 생각보다 울지 않았고 우울하지 않았다. 나의 불안과 달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오히려 그러면 안되는 거였지만 짓누르던 무언가가 사라져 후련한 기분도 들었다. 모두들 절차대로 울어야 할 때 울었고, 나는 그 감정선을 따라가지 못해 마지막 통곡 시간에 눈물 없이 절만 했다. 왕할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역시 중간중간 나도 모르게 울컥이며 터져나오는 눈물 또한 있었다. 그때가 되면 어린마음이라 해도 이 미운 꼬맹이는 온 맘을 다해 울어주시는 이모 할머니들을 속으로 미워했다. 옆에서 너무 크게 울어서 이미 갈무리한 내 눈물이 같이 나오니까. 긴긴 절차를 몇번이고 울고 진정하길 반복했다. 삼촌이 영정 사진을 들고 집이며 동네며 이곳저곳을 돌아서 낮선 산으로 올라았다. 그때쯤 되니 더이상 슬프지 않았다. 뒤돌아보면 안된다는 말에 꼿꼿이 앞을 보고 있었을 뿐, 편안히 별이된 이를 배웅하는 길은 내 생각만큼 상처가 아니었다. 그것이 정말 큰 위안이었다. 할머니들이 주는 귤은 왕할아버지네서 먹은 오랜지보다 달아서 생각없이 몇개를 까먹었다.
올라온 산 중턱엔 더 아래가 다 보이는 공기 좋고 햇빛이 잘 드는 곳이 있었다. 아주아주 어릴 때나 보았을, 이제는 풀이 무성하신 왕할머니 옆에 한 자리가 비어있었다.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이제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으로 왕할아버지를 보았을 땐 다시한번 이모할머니들의 울음소리에 살짝 눈가를 훔쳤다. 왼전히 끝났을 때. 모두가 다시 눈물을 거두고 식사를 했다. 삼일째라 나도 이 덤덤함에 적응이 되는 듯 했다. 철이 없는건지, 의젓한건지. 문득 그때 제일 노랗고 말랑한 귤을 집어 완성된 동그란 흙무덤 위에 하나 올렸다. 가는 길에 하나 드시라고. 삐쩍 마른 몸이었는데 이젠 산과 하나가 되어 왕 할머니랑 같이 계시라고. 내가 왕할아버지를 더 커서도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클 때까지 살아주셔서 감사하다고. 맘 속으로 몇번이고 작별을 고했다. 그날이 바람이 불었는지 쌀쌀했는지는 정확힌 기후는 희미하지만 할아버지가 보시는 시야엔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저 멀리 빨갛게 익은 감나무가 대여섯개씩 무성히 자라 았었다. 점으로 콕콕 찍어 놓은 듯한 커다란 감들에게 다시 생각 해보면 시선을 주어 다행이었다. 할아버지와 헤어진 날짜는 몰라도 계절은 언제든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잊어버리기엔, 그 감이 할아바지의 사탕통처럼 한아름 열려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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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망치를 쥔 목수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야 슬픈 일이니까 글루건이 잔뜩 붙어버려서 떼지 못하는 인생 같은 건 사실 그렇게 아프지는 않을지도 모르지 아우성을 내지른다고 해서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 아무렴 숨을 쉬기만 하면 된다고 누가 그렇게 말했던 것도 같은데 식탁을 만들어내는 일은 꽤나 어려운 일이겠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하면 인정하게 되는 거 아닐까 사포가 갈리는 소리 웅웅대는 그라인더와 함께 지워낼 수 있다고 여기는 거겠지 부서져도 남아있는 게 있다고 믿으면서 얼기설키 뭉친 톱밥 그러모으면 새로운 의자가 만들어졌으면 좋겠어 슬픔 없이도 말이야 조각내야만 하겠지만 그런데 목수는 사랑했을까 그의 작품을? 아니 연대기를? 그게 뭐든 이미 잃어버린 것들을 손에 쥔 것들을 그게 무슨 소용이야 손바닥을 보이지도 못하는데 그러나 여전히 북적이는 공방 설계도 하나 없이 만드는 커다란 식탁과 단 한 개의 의자 목수는 앉고야 말겠지 왼팔과 오른팔을 헤집으면서도 새하얀 망치가 부서지고도 내려앉지 않고서
- 서벽
- 2026-08-25
아깽이 새해가 지나고 또 해가 뜨는 날에, 길고양이를 주웠다. 점심을 먹으려고 막 밖을 나선 참이었다. 아파트 화단 앞에 자그만 솜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엄마가 말하기를 아침부터 저곳에서 꼼짝하나 안하고는 이따금 울어댔다는 것이었다. 갈색과 흰색이 섞인 흔한 고양이였다. 다만 지금까지 본 고양이 중에서 가장 새끼였다는 점이 눈에 띄기는 했지만, 결국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동물을 한 번쯤 키워본 사람이라면 더욱 그 끝을 잘 알고 있으니까. 안타까워도 어쩔 수 없다고, 내버려 두면 어미가 찾아올 거라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만 동물을 한 번 키워본 사람은 또다시 동물을 키우게 된다는 말도 우리는 알고 있었다. 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차 안은 분주했다. 아니 사실은 마음 놓고 먹지도 못했다. 그러니까 결국 결말을 알면서도 또다시 같은 책을 읽듯이, 허무한 결말일 거란 걸 알면서도 끝까지 읽어버리고야 마듯이. 그 중간중간의 행복을 도무지 놓칠 수가 없어서. 역시나 한 시간 뒤에 돌아온 아파트 화단 앞에 그 녀석은 여전히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쪼그려 앉아 그 녀석을 바라보고 있자니 엄마가 말했다. 내 손에 잡히면 데려갈게. 아니면 그냥 놔둬. 그리고 그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손을 뻗은 순간 고양이는 품에 안겼다. 빳빳한 빗자루 같은 촉감이었다. 한겨울의 추위를 한껏 머금어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몸이었다. 병원에 가자마자 수액을 맞았다. 의사 말로는 한쪽 다리가 부러졌다고 했다. 도대체 그 몸으로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길래. 4시간이 지나서야 집으로 들어온 고양이는 담요 안에 안겨서는 온종일 잠을 잤다. 그제서야 좀 살아있는 게 느껴졌다. 잠결에 꿈틀거리는 발도, 밝은 금색의 눈동자도 모두. 이름은 아깽이로 했다. 그러니까 아기고양이, 임시 보호만 해야지 하는 다짐이 담긴 이름이었다. 고양이는 키워본 적도 없으니까. 그냥 이 정도의 책임만 지자고, 네 다리가 나을 때까지만, 딱 그 정도의 정만 주자는 생각으로. 그런데 그 다리가 말썽이었다. 입양공고를 올리려면 적어도 붕대는 풀고 있어야 할 텐데 3개월이 지나도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진물이 터져 매일매일 소독해 주어야 했다. 도대체 검지만 한 다리가 뭐가 문제라고. 다만 아깽이는 그쯤 아주 날아다녔다. 분명 붕대를 감고 있어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텐데 오른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도 우다다 달리기 일쑤였다. 그 모습에 결국 속상해하다가도 웃음을 터트리고야 마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집안이 활기로 가득 차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쯤, 미래를 예견했던 듯하다. 저 고양이가 이곳을 종착점으로 삼게 될 거라는 걸, 그리고 우리는 이미 차고 넘칠 만큼 정을 주고야 말았다는 것을. 물론 1킬로였던 고양이가 그 두 배가 되고 결국은 반년 만에 4킬로가 될 것이라는 건 몰랐지만. 그렇게 어느덧 한겨울이 지나고, 더위로 가득한 계절이 다가온 지금까지도 여전히 아깽이는 집에 눌어붙어 있다. 아마도 앞으로 20년은 더 머물러있겠지. 그때가 되어도 여전히 아깽이일 테고.
- 서벽
- 2026-08-21
은유게임이란, 아무 단어를 제시어로 던졌을 때 그 단어의 본질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유의어와 반의어를 말하는 것으로 최근 친구들과 하기 시작한 게임이다. 얼마 전, 혼자 은유게임을 하다가 ‘상실’을 제시어로 던졌다. 곰곰히 생각하다보니 삶이라는 단어가 툭 튀어나왔다. 이 단어는 분명 게임의 답이 맞는데, 유의어와 반의어 중 어느 쪽에 두어야 할지 한참이나 고민했다. 그러던 중 문득, 좋은 은유는 어느 쪽의 말이라도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지점이 찾아왔다. 삶은 상실과 유사한 말이 될 수도 있고, 상실과 반대인 말이 될 수도 있다. 그 이유는 바로 ‘같은 성질’과, ‘다른 성질’을 넘어선 본질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상실과 삶은 본질적인 ‘성질’을 공유하고 있다. 만질 수 없지만 존재하고, 보지 못하지만 느낄 수 있는 것. 잃음과 얻음이 한 판의 유리장처럼 서로 붙어 있어 떨어트릴 수 없는 것. 한 쪽을 바라볼 때 다른 쪽이 투명하게 비쳐 보이는 것. 그것이 바로 삶과 상실의 동일한 면이었다. 그렇기에 삶은 즉, 상실이 될 수 있다. 삶은 상실이라는 과정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 상실을 통해서 우리는 무언가를 또 얻어간다. 임선우 작가의 소설집, 을 읽고 나면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상실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햇빛에 비춰 보는 다각면의 보석처럼 여러 인물들과 상황 속에서, 환상적인 장치 속에서 세심하게 어루만지고 있는 것일까? 소설은, ‘상실’이라는 게 무엇인지, 명확히 정의내리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궁금증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비평을 쓰고자 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상실이 삶이고, 삶이 상실이라면, 결국 그게 무엇인지 정의내리는 건 큰 의미가 없지 않을까? 우리가 카페에 앉아 유리창의 얼룩을 바라보고 있더라도, 멀리 있는 사람에게 그것은 결국 반대편의 거리를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타인의 시선에서, 생의 목표하는 지점들은, 징검다리처럼 띄엄띄엄한 것이 아니라 사실 긴 터널과 같이 이어져 있다. 소설집에서 사용되는 환상적인 장치들은, 독자가 익숙하다고 여겼던 세상과 몰입하는 것을 계속해서 깨트리며, 독자로 하여금 소설 속 인물들과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독자를 타자화시키면서, 독자는 인물들이 목표하는 띄엄띄엄한 지점들이, 멀리서 보았을 때 전부 이어져 있다고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촉수에 닿으면 인간이고 동물이고 전부 해파리로 변”하는 “변종 해파리”의 출현은, 인물의 상황이 실화가 아닌, ‘지어낸 이야기’임을 끊임없이 자각하도록 만든다. 그 ‘지어낸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 ‘수’가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해 히키코모리가 된 사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도둑질을 하다가 해파리 변신 대행업체를 찾아간 사건은, 삶의 의미를 다시 깨닫는 소설의 마지막 결론을 위한 하나의 수순처럼 느껴진다. 즉, 이 소설집에서 나타나는 ‘상실’은 ‘환상’과 결합하는 순간 ‘잃었다’는 의미보다 ‘생겨남’의 의미로 연결되게 된다. “변종 해파리”의 출현 전까지, ‘수’의 ‘현실적인’ 상황들(히키코모리, 아버지의 돌아가심,
- 방백
- 202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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