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손가락
- 작성자 구포대교
- 작성일 2026-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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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생쥐들>
먼 옛날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살아 있을 적의 이야기. 아틀라스는 그들의 손에 창조됐다. 그의 역할은 인간을 존속시키고 발전시키는 것이었다만, 인간은 그가 손을 쓸 새도 없이 죽어버렸다. 꽥. 아틀라스는 어머니이자 신을 잃었고 목적을 잃었다. 유적처럼 남은 그는 재건을 위해 작동했다. 멸종을 되돌리고자.
나를 포함한 ‘아이들’은 아틀라스에 손에 창조됐다. 인류의 손자와도 같았다. 아틀라스는 아이들을 가르쳤다. 인간에 대해서. 아이들은 새 인간으로서 살아갈 존재였다. 아틀라스는 인간의 긍지를 심어주고 휘황찬란했던 역사를 알려주었다. 인간은 먼 전설 속의 존재였다. 어떻게 우리가 저런 업적의 종족을 이을 수 있는가, 의아했다. 고개를 돌려 아이를 바라보면 이렇게 멍청해 보일 수가 없는데.
내겐 두 명의 선생이 있었다. 하나는 아틀라스이고, 다른 하나는 제이란 이름의 여자였다. 정확한 명칭은 J97이다만 다들 편의상 제이라 불렀다. 이곳에 제이는 한 명 뿐이기도 하고. 그녀는 아이들 중 가장 먼저 만들어진 존재였다. 다른 아이들보다 아는 것이 확연하게 많았으며 사람도 쾌활해서 많은 이들과 친했다. 나처럼 친구가 없는 아이에게도 잘 다가와 말을 걸어주곤 했다. 고마운 사람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녀가 다가오기 전까지는 줄곧 혼자였으니까.
돌아다니다보면 혼자인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새로운 아이들이 온 것도 벌써 몇 달 전인만큼 많은 무리가 생기고 각자의 위치가 정해졌다. 혼자인 이들은 늘 혼자였다. 타인으로부터 의도적인 기피를 받는 이들. 아틀라스가 별 재재를 가하지 않는 것은 그것 또한 인간의 물성인 탓일까. 내가 혼자이던 시절에 자주 생각했었다. 소외의 이유는 헛웃음이 나올 만큼 무의미하고도 투명한 것이었다. 혼자인 아이들의 얼굴은 하나 같이 못생겼던 것이다. 재밌게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다들 못생긴 얼굴과 잘생긴 얼굴을 분간할 수 있었다. 그에 따른 위치까지도.
내가 그나마 몇몇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제이의 덕이었다. 그녀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주어 함께 대화하며 근처의 아이들과도 자연스레 말을 섞었다. 내가 많이 못생긴 편은 아니긴 한 덕분이기도 했다. 혼자인 아이들 사이에도 투명한 벽이 있기 마련이다.
제이는 이후로 자주 내게 다가왔다. 다른 아이들과도 그랬지만 내게로 오는 빈도가 특히 높았다. 다른 아이들도 어떻게 그리 친하냐 물어볼 만큼. 난 그에 답해줄 요량이 없었다. 그냥 가만히 있다 보면 그녀가 다가와 말을 쏟아낸 후 돌아가 버리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아침 7시에 시작해서 오후 6시에 끝나는 일과 사이사이에, 그리고 일과가 모두 끝난 여가시간에 자주 제이는 얼굴을 비쳤다. 그녀는 수면욕이 적은지 대부분이 잠든 밤에 깨어 있는 상태로 야외풀밭에 앉아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구석이었다. 낮의 활달한 표정이 하나도 빠짐없이 사라진 진중한 표정으로, 그녀는 울타리를 바라봤다. 아이들을 감싸 안은 아틀라스의 울타리. 2미터가 넘는 그 벽이 바깥 세계와 아틀라스를 단절했다. 인류가 멸종한 후의 세계가 울타리 너머에 펼쳐져 있었다. 언젠가는 그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제이는 그러다가 날 발견하면 예의 활달한 표정을 씌우며 옆에 앉으라 손짓을 하곤 했다. 그리고 대화를 했다.
우린 생쥐야. 치즈를 주는 대로 먹을 뿐인 거지.
제이의 이야기는 이따금씩 주장을 담고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아이들 생쥐설이었다. 우리가 실험 당하다 버려지리란 내용이었다. 분명 무시무시한 소리였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재밌는 이야기를 듣는 듯 착각하게 만들었다. 가벼운 분위기 속 나온 말이기도 했고. 다만 제이는 몇 번씩이고 남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지 말라 당부했다. 몇 번씩이고 고갤 끄덕여야만 했다. 그녀는 어떠한, 숨겨진 진실이라도 알고 있을까.
제이는 유일한 1세대였다. 보통 20, 30명이 함께 오곤 하는데 제이는 혼자였다. 처음부터 혼자였는지, 중간에 친구들이 사라졌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에 관해서 그녀는 늘 말을 피했고 대부분은 전자로 받아들였다. 후자를 믿을 용기는 없었다.
아무렴 가장 오래된 아이였던 제이는 확연히 아는 것이 많았고 그것이 끝없는 이야기의 원천이었다. 그녀는 아틀라스로부터 지금의 아이들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다고, 비밀이라며 넌지시 알려줬다. 내가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수록 그녀는 내게 비밀을 차곡차곡 쌓았다.
도망쳐야 돼. 죽은 채 살기보단 산 채로 사는 게 낫잖아.
어느 밤, 제이가 중얼거렸다. 언제나처럼 가로등 빛이 들지 않는 경사진 작은 공터였다. 잠시 입을 닫고 나란히 앉아있다 그녀가 달싹이는 것이었다. 표정은 여느 때보다 진중했다. 무심한 투의 눈빛으로 지그시 울타리를 바라보다 제이는 살짝 놀란 듯 날 돌아보았다. 무의식적으로 나온 말인 모양이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별 거 아니야, 하고 말했다. 자신의 발언을 무마하려는 듯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오늘 따라 별이 많네. 난 그녀의 화재 전환에 어울려주기로 했다. 그렇게 올려다 본 하늘엔 정말로 많은 별들이 좁은 간격으로 반짝였다. 지난 며칠 간 비가 꽤 많이 왔었는데 먹구름이 걷힌 밤하늘은 영롱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냅다 몸을 뒤로 넘겨 누워버렸고 나도 따라 누웠다. 저 별들에 외계인이 있을지 몰라. 큰 도시를 이루었을까? 인간들처럼 두 팔과 두 다리를 가졌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러면 재미없을 거야. 제이의 말은 횡설수설이란 인상이 짙었다. 이내 그녀는 입을 닫았고, 나도 그랬다. 별들이 웅성대듯 빼곡하고, 초승달은 조금, 외로워 보이는 밤이었다. 오래된 꿈이야. 제이가 달싹였다.
꿈에서 깨어날 때면 현실과 환상과의 낙차로 인해 세상 모든 것이 새삼스레 감각되었다. 새삼스레 호흡하고 이불자락을 움켜쥐고 고갤 돌려 시계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밤사이 눅눅해진 이불이 접착제처럼 작용하는 건지 몸을 일으키기가 힘겨워 한동안 가만히 누워있고는 했다. 꿈의 내용을 곱씹으며.
사막을 걷고 있었다. 햇빛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모래의 땅. 알몸으로, 홀로 걸었다. 목이 말랐다. 가죽을 벗고 앙상한 뼈만 남은 채 걸었다. 걸었다. 걸었다. 아틀라스 바깥의 세상은 끝없는 모래였다. 기력이 다할 때까지 걷다 무너지듯 쓰러졌다. 뜨거운 모래가 뼈마디 사이사이, 온 몸을 감싼다. 모래의 밑엔 인간의 뼈가 묻혀 있었다. 나의 뼈와 인간의 뼈는 같은 것일까. 의심은 쉽게 확신으로 변한다. 점점 뼈가 바스라진다. 바람에 휘날리며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울타리 너머의 세상은 지금껏 생각도 안 했건만. 갑작스레 꿈의 모습으로 나타나다. 제이의 말 때문이었다. 도망쳐야 된단 그녀의 말이 종일 머릿속에서 흔들거렸다. 씻을 때도, 아침 식사를 할 때도, 아틀라스의 수업을 들을 때도, 점심 식사를 할 때도. 배식을 받고 고갤 돌리자 손을 흔드는 제이의 모습이 보였다. 몇 개의 무리와 혼자들을 지나 그녀에게로 다가가 옆에 앉았다. 제이는 평소처럼 떠들어댔지만 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잠시 끊긴 찰나에 입을 열었다. 꿈을 꿨어.
난 그녀에게만 들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자를 오물거리던 제이가 반문했다. 꿈? 무슨 꿈? 난 바깥 세계를 배회하다 사라져버렸다는, 요약하면 보잘 것 없는 내용의 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제이는 어딘가 골몰하는 표정으로 끝까지 이야길 경청했다. 그러고는, 내가 말을 마치자 작게 웃기 시작했다. 신기하지? 꿈이라는 건 말이야. 잘 때도 꿈을 꾸고, 희망할 때도 꿈이라는 말을 쓰잖아.
과연 그게 우연일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하고 속삭였다. 비밀스런 대화의 포문을 열 듯 그녀도 속삭임에 동조해주었다. 갑자기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너의 바람이 자면서 머릿속에 투영되는 거다, 이거지. 사실은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다 생각하지? 그녀의 말에 나는 화들짝 놀라 다급히 고갤 저었다. 하마터면 씹던 감자를 뱉을 뻔했다. 정곡을 찔렸다기보다는 정말,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나의 반응을 놀리듯 쿡쿡 웃었다. 난 어쩐지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제이의 도망치자는 말이 머릿속을 떠나가질 않는다고. 제이는 여전히 가볍게 웃으며 뜸을 들이더니 그러면 오늘 밤에 도망치자 말했고, 난 기어코 씹던 감자를 뱉어버렸다. 갑작스레 커진 목소리도 한몫을 했다.
침으로 범벅된 으깨진 감자가 낡은 나무 테이블 위에 달라붙었다. 제이는 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리를 떴다. 주변의 테이블에서도 아이들이 하나둘씩 일어서기 시작하고, 난 치즈를 뱉어버린 생쥐처럼 홀로 앉아 있었다.
‘오늘 밤’은 금세 찾아왔다. 일과가 끝나고 여과 시간이 지나는 동안 제이와 만나지 못했다. 몇 번 지나치기도 했지만 그녀는 다른 아이와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어쩌면 오늘 밤에 도망치자는 그녀의 말이 농담에 불과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가벼운 목소리였던 만큼. 해가 지고 밤의 초입까지도 고민을 속에다 품은 채 한숨만 푹푹 쉬어댔다. 어느덧 수면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의 다른 아이들과 함께 숙소로 들어갔다.
한 방에는 여덟 명의 아이들이 생활했다. 이층 침대가 여덟 개였다. 한 방을 쓰는 아이들은 크게 떠들지 않고 제 자리로 가 제 할 일을 했다. 서로 어색하진 않았으나 살짝 사무적인 태도가 겸해져 있었다. 따지고 보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러했지만. 이 방에는 분위기를 풀어줄만한 재능의 소유자가 없었다.
난 이층 침대에 올라 누웠다. 아무런 감흥도 없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침대 매트리스가 새삼스레 느껴졌다. 내일이면 이곳에 눕지 못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망상일까. 휙 몸을 뒤집어 벽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창문이 있다면 좋겠다 생각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면 울타리 너머의 풍경을 볼 수도 있을 텐데. 창이 없는 관계로 불이 꺼진 방은 무척 어두웠다. 방의 구석에 위치한 누런빛의 조명이 아니었다면 한 치 앞도 보지 못했으리라.
난 슬쩍 몸을 일으키고 삐걱대는 사다리를 밟으며 내려왔다. 제이의 말이 진심이든 농담이든 나가볼 생각이었다. 지금은 아마 다들 깨 있을 테지만 난 자주 나가는지라 말을 거는 이는 없었다. 난 마음속으로 작별인사를 뇌까리며 살포시 문을 열고 닫았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몇 명의 아이들을 지나 어두운 구석으로 향했다. 사각형인 울타리의 모서리 부근인, 매일같이 제이와 대화하던 공터였다. 마음을 굳게 먹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제이는 없었다. 잠시간 가만히 서 있다 비식비식 웃음을 흘리며 다시금 발을 옮겨 늘 앉던 자리에 앉았다. 한참을 앉아 있었다.
긴 듯 짧은 듯 시간이 흐르고 제이가 찾아왔다. 잔디를 밟는 발소리만으로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뒤에서 헉, 하고 놀랠 때도 놀랄 이유가 없었다. 허나 난 심장이 철렁하는 오싹한 감각에 몸을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두워도 언제나처럼의 짓궂은 미소가 보였다. 언제나처럼, 그녀는 내 옆에 앉았다.
기다렸어?
응.
난 대답해놓고 무엇을 기다렸는지 자문했다. 난 제이를 기다렸다. 도망치기 위해서? 마음이 1초마다 휘청였다.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제이는 이 어둠 속에서도 내 얼굴에서 심란한 표정을 읽었는지 팔을 툭툭 건드리며 장난을 쳤다. 가벼운 웃음이 났다. 이런 일상이 뭐가 아쉽다고 도망을 생각하는 걸까. 그녀는. 난 오늘 같은 내일과 모레와 글피를 반길 자신 있는데. 물론 떠나더라도 제이와 함께라면 기꺼이 받아들이리다. 언어로 정제되지 못할 마음의 소리였다. 마음의 원리는 아직 내게 있어서 불가해의 영역이기에.
섣불리 본론을 꺼내지 못했다. 사실 꺼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불안하고 초조했고 제이는 외려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할 말 있어?
심지어는 역으로 질문을 해대는 것이었다. 나는 내장 깊은 곳에서부터 말을 토하는 심정으로 속삭였다. 도망치자며. 답변을 들은 제이는 다 예상했단 듯 미소를 유지하며 고갤 끄덕였다. 놀아난단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글쎄. 나도 고민 되네. 지금 도망칠까?
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이는 상체를 숙이고 팔을 뻗어 근처의 잡초를 헤아렸다. 뒤이어 작은 민들레를 한 송이를 집는 모습까지, 희미한 명암과 윤곽으로 나타났다. 그러고는 들리기 시작했다. 탈출. 남아. 탈출. 남아. 탈출. 남아. 탈출. 남아. 탈출. 남아. 꽃잎을 하나씩 떼어가던 그녀의 손이 남아에서 멈췄다. 제이는 짤막한 줄기만 남아버린 민들레를 던져버리며 말했다. 탈출. 그녀는 힘찬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울타리의 앞으로 달려 나갔다. 난 다급히 그녀를 뒤따랐다.
제이는 벽에 손을 가져다댄 채 높이를 가늠했다. 2미터는 넘고 3미터까지는 안 될 성 싶은 키였다. 두 사람이라면 넘지 못할 것도 없으리다. 어느덧 제이는 나를 응시하는 중이었고 나도 그녀를 마주보았다. 벽에 바싹 붙어 선 그녀에게선 작은 표정 하나 드러나지 않았다. 하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고갤 끄덕였다. 하자. 그런데 뭘?
제이는 나더러 엎드리랬다. 난 그녀의 생각을 이해하며 순순히 엎드렸다. 등짝 위로 그녀의 발이, 무게가 실렸다. 금방 사라졌다. 고개를 드니 벽 위에 걸터앉은 제이의 모습이 보였다. 어쩐지 그녀가 밤하늘의 일부처럼 느껴졌고, 저 먼 세상에서 그녀의 손이 뻗쳐왔다. 너도 올라와! 제이의 목소리에서 절제되지 않은 흥분을 느낄 수 있었다.
손을 맞잡았다. 끌어당기는 힘과 끌어당기는 힘이 손과 손 사이에서 맞물렸다. 땅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순간 온몸과 마음이 붕 뜨는 느낌. 발이 몇 번 벽을 스치고, 벽 위에 팔을 걸쳤다. 곧 엉덩이를 걸쳤다.
방금 전까지 엎드렸던 땅이 아득해졌다. 밤하늘은 아직도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어디에도 녹아들지 못한 채 위태로이 앉아 있었다. 눈앞엔 밤이 한창인 울타리 너머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아마 돌이킬 수 없겠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데 옆에서 제이가 툭, 하고 팔을 쳤다. 그걸 원했어.
그녀가 뛰어내렸다. 풀썩, 하는 착지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뭐라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들리지 않았다.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낯선 땅을 밟았다.
<오늘 밤>
울타리 바깥은 초원과 사막 사이의 마른 땅이다. 그 척박한 땅에 외로이 생존과의 투쟁을 이어가는 풀들이 있다. 제이는 바깥 세계를 말로만 들었다. 그녀에겐 울타리 너머로 고갤 내밀 용기도 친구도 없었던 탓이다. 그 말이란 것도 다른 사람끼리의 대화를 엿들은 것에 불과했다. 그녀는 무리에 속하지 못한 개인이었다. 제이는 소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바깥 세상에 대한 소문, 아이들이 버려질 것이란 소문. 아이들은 자신들이 실험체에 불과하다 생각했다. 뚜렷한 증거도 없이. 스스로에 한해서 비관적인 면만을 바라보는 인간들의 습성에 충실했던 것이다. 누구보다 인간 같았던 그들은 밤마다 숙소에서 속삭이며 떠들었고 아틀라스의 사각지대를 찾아 말과 말을 전했다. 아틀라스의 사각지대 같은 건 없었지만.
작전은 혼자였던 제이의 귀에까지 닿았다. 노브의 입을 통해서였다. 당시의 아틀라스에는 제이와 노브만이 존재했고 제이에게 노브는 노브11만을 가리켰다. 노브는 당시 작전을 주도한 인물이었으며 무리로부터 소외받던 이들에게까지도 일일이 찾아가 그 내용을 가르쳐주었다. 제이가 누군가 말을 건네는 상황 자체에 놀라는 사이 노브는 바쁜 티를 내며 대답을 듣지도 않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제이는 남겨진 채로 단순하면서 께름칙한 작전명을 곱씹었다. 그 이름하야 탈출.
제이는 소문이 노출된 후로 숙소의 매트리스가 불편해졌다. 한 방에서 자신을 빼놓고 떠들고 있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저들 모두 마음속으로 작전을 생각하고 있겠지, 탈출을 계획하고 있겠지, 제이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모두가 잠든 밤에도, 눈을 둥그렇게 뜬 채로. 노브를 생각했다.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준 아이. 물론 일종의 의무에 의한 접촉이었지만, 그녀는 마음속에서 노브의 얼굴을 지울 수 없었다. 그들이 계획하는 탈출에는 그녀도 함께였던 것이다.
생각하고 나자 무서워졌다. 바깥 세상에 대한 것은 보지 않더라도 아틀라스가 충분히 가르쳐줬다. 인류가 모두 사라지고, 긴 시간 방치된 땅. 아틀라스의 조력 없이 그 척박한 땅에서 살기란 벅찰 게 분명했다. 제이의 마음은 아예 불가능하다 단정 지었다. 그러나 마음의 뒷면에선 노브의 얼굴이 선연했다. 그의 목소리는 그녀가 아이들 중 하나란 사실의 증거였다. 제이의 마음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뒤척이길 반복했다.
아이들은 그날 밤을 입에 오르내렸다. 그날 밤이 내일 밤이 되고 오늘 밤이 되기까지는 평소의 일상이 진행되었다. 아이들은 눈길에 무음의 흥분을 실어 날랐다. 제이 역시 그들의 눈길을 훔쳐보며 몹시 흥분했다. 그녀는 아직 갈림길 앞에서 선택하지 못했고 오늘 밤은 확정적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아틀라스는 아직 작전을 알아차리지 못한 기색이었다. 모른 척일 수도 있었다. 제이는 미래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죄질과 형벌이 커지리라 굳게 믿었다. 다들 실패의 가능성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군중심리가 두려움을 압도했다. 제이만이 유다른 감각으로 앞날을 무서워할 뿐이었다.
오늘 밤이야. 내가 신호를 보낼게.
노브의 목소리가 제이에게까지 전달됐다. 커다란 형벌이, 오늘 밤이 다가오는 속도로 다가왔다. 일과가 끝난 저녁, 제이는 카메라 앞에 섰다. 카메라는 아틀라스의 눈이었고 아이들은 카메라의 사각지대에서 밀담을 나누곤 했다.
제이는 카메라 앞에 쭈뼛쭈뼛 선 채로 주윌 두리번두리번 돌아보았다. 근처엔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자그마한 목소리로, 얼굴을 카메라에 들이대며 말했다. 오늘 밤이래요. 오늘 밤에 다들 도망칠 거래요. 저는 싫어요. 저는 지, 진짜로.......들었죠? 들은 거 맞죠? 응답은 없었다. 금세 하늘이 어두워졌다.
오늘 밤은 이윽고 찾아왔다.
아틀라스는 모르는지 모르는 척인지 별 행동이 없었다. 제이는 더 이상 자신이 할 것은 없다 생각하며 침대에 몸을 숨겼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공기를 느꼈다. 소란스런 흥분과 긴장으로 적셔진 공기. 적막한 시간이 한참을 흘렀다. 공기를 흐트러뜨리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제이는 노브의 목소리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그것은 언어가 되지 못한 고함이었고, 뒤이어 여러 사람들의 고함이 포개지며 함성이 되었다. 우당탕탕, 바닥과 천장이 몸을 떨었다. 방 안의 아이들도 소리를 지르며 방을 빠져나갔고 제이만이 침대에, 이불 속에 홀로 남겨져 소리를 들었다. 고함, 환호, 호응. 점점 복도를 빠져나가 건물로부터 멀어지는 목소리들. 고함, 비명. 소리는 점점 사그라졌다. 밤은 시치미를 떼듯 고요해지고 어디선가 벌레 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제이는 뒤집어 쓴 이불을 벗지 않았다.
죽은 듯이 아침이 왔다.
아틀라스의 설명은 불친절했다. 아이들이 죄다 사라지고, 제이가 유일한 생존자란 사실만이 단명했다. 그녀는 울었다. 꽤 많이 울었다. 이후 태어날 아이들에 비해 그녀는 감정이 풍부했으므로. 격렬하게 울었다. 죽음이라는 추상이 자신의 손에서 현현한 기분. ‘그날 밤’ 이후로 아틀라스는 꽤 많이 변했다. 새로운 아이들이 대거 나타났고 제이는 어느새 1세대로 불렸다.
새 아이들은 이전 아이들에 비해 감정적 측면이 절제된 면모를 보였다. 아틀라스는 이전처럼 돌아갔으나 이전의 활력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아틀라스의 교육도 전보다 많이 축소되었다. 인류의 역사, 바깥 세계, 인간에 관한 사실들이 그들 앞에서 통제됐다. 이렇듯 정적으로 바뀐 분위기가 제이의 성격을 바꾸는데 작용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녀는 이전의 활달한 분위기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꼭 그것 때문만도 아니지만. 그녀는 괜히 아무에게나 말을 걸고 다니고 쾌활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뒷면에 짙은 그림자를 고아두고, 앞으로는 한껏 미소 지었다. 자칫하면 뒷면의 어둠이 쏟아질 것 같았다. 위태롭게. 그러던 와중에 홀로 있던 너를 본 것이었다.
<유적>
제이의 이야기는 해가 뜰 때까지 계속됐다.
그녀의 뒷면은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그녀는 줄곧 쾌활한 사람이었으므로. 평생을 본 얼굴이 가면이었단 사실에 배신감까지 느꼈다. 솔직히 말하자 제이는 웃음으로 대답했다. 가면이 아니야. 그냥, 여러 면 중 하나만 보여줬단 느낌일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미소는 그녀의 말의 가장 확실한 근거였다. 난 예전처럼 스스럼없이 제이의 말을 믿었다. 초원과 사막 사이의 메마른 땅을 가로지르며.
지평선 부근의 잿빛 빌딩숲이, 이제는 꽤 가까워졌다. 어느덧 동이 터 오르고 햇빛은 울타리의 방해 없이 대지를 질주했다.
강가에서 목을 축였다. 살아 움직이는 물고기 떼를 보았고 하늘을 가르는 새들도 보았다. 닭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우린 도시를 향해 걸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을, 폐허가 된 도시. 아침을 넘어 정오에 가까워질 때 즈음 도시의 문전에 섰다. 제 형태를 대부분 잃어버린 작고 낡은 건물들이 황무지와 도시의 경계를 흐렸다. 큰 빌딩 등은 무너지지 않고 서 있는 것들이 꽤 있었다. 그것을 올려다보기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이었으며, 심지어 제이는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질 기세였다. 그녀는 휘청이다 내게 기대며, 젖은 눈망울을 반짝였다. 자신의 감격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듯했다.
우린 경건한 마음으로 인류의 유적을 걷기 시작했다. 무너지거나 온건한 건물들과 녹색의 식물들로 뒤범벅된 풍경이 사위를 에워쌌다. 푸른 하늘을 비추는 웅덩이가 있었고, 그 위를 지나쳐가는 두 마리의 생쥐가 있었다. 저것 좀 봐! 제이의 손가락질을 따라 눈길을 돌리니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콘크리트 건물을 집어삼킨 나무. 본래의 모습은 상상도 가지 않는, 현실의 모습만으로도 하나의 완성품 같은 모습이었다. 그 위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린 한참을 도시에 있었다. 해가 중천을 넘어가고, 저 멀리 먹구름이 드리울 때까지. 착각일까, 먹구름은 빠르게 전진했고 그와 상관없이 우린 도시의 깊은 곳으로 향했다. 깊어질수록, 인간의 흔적이 옅어졌다.
제이는 정글 같다고 말했다. 습하고 큰 나무가 많은 숲이랬다. 난 대답 없이 고갯짓만 했다. 이전 세대와 지금 아이들 사이의 정보의 격차를 생각하며. 제이의 설명에 따르면 그날 밤 이후의 아이들은 다 모든 면에서 절제된 존재였다. 황무지를 지나오며 제이는 무수한 이야기를 들려줬지만, 혹시 남은 비밀이 있을지도.......의심은 빠르게 거두었다. 그러면서도, 쉽게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것은 내가 절제된 존재인 것일까, 생각해버렸다. 아, 다리가 삐걱거리는 듯했다. 제이 역시 힘들어하는지라 우린 자주 휴식했다.
주변은 이끼 긴 폐허와 나무로 가득했다. 나무와 건물은 원래 그런 것인 양 섞여 있었다. 아까 전에 본 나무는 예고장에 불과했단 듯이. 정글이 뭔지는 몰라도 미로를 닮지 않았을까. 3층까지는 무사한, 녹색 범벅의 건물을 오르자 폐쇄적인 경관이 펼쳐졌다. 높은 빌딩들과, 얽히고설킨 잔해와 나무들.
배고파.
제이의 말이 벽에 부딪치며 울렸다. 난 벽의 낙서들을 보는 중이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국어였고, 읽을 수가 있었다. 빨간 선들로 이루어진 낙서. 아스날 좆까. 그것은 내가 최초로 목격한 인류의 다잉 메시지였다. 긴 시간을 살아남아 내게로 닿은 말. 고작 욕설이었다. 전설 속의 인물들이 욕을 하는 중이었다. 조금 더 고귀하고, 품위 있는 모습을 예상했는데. 신화에 금이 갔다. 등 뒤로부터 한 번 더 제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래.
고갤 돌려보니 정말 자리를 잡고 눕고 있는 제이가 보였다. 아득한 시간을 무방비하게 방치되어 먼지가 휘날리고 무수한 파편들이 널브러진 곳에, 제이 역시 하나의 부품인 양 누웠다. 난 그녀를 말리려다, 상관없나, 중얼거렸다. 어딜 가나 매한가지일 것 같고, 나도 온몸이 피로하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이었다.
직후, 거짓말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세상을 가득 채우는 샤워기 소리. 타닥타닥, 알갱이들이 튀기는 소리. 벽과 천장이 함몰된 관계로, 적잖은 양의 빗방울이 튀겼다. 피하지 않고 서 있었다. 빗금으로 쏟아지는 얇은 선들을 응시하며.
피로도가 많이 쌓이면, 이상하게 잠을 잘 못 들었다. 눈은 계속 감기는데,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 들지를 못하는 것이다. 꿈을 꾸기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자더라도 꿈을 꾸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기도 했고. 그러고 보니 어제 꿈을 꿨었지. 그게 벌써 어제 일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체감으로는 몇 달이고 지난 일 같았다.
꿈의 내용과 달리 울타리 바깥은 모래뿐만 아니라 다양한 것들이 있었다. 나무가 있었고 구름이 있었고 새가 있었고 도시가 있었다. 비록 인간의 흔적인 많이 지워져 있었지만, 그것이 개의치 않을 정도로, 세계는 살아 있었다.
날이 깊어갔다. 시계가 없어도 알 수 있었다. 같은 우중충한 하늘이어도, 채도가 달랐다. 아틀라스 밖에서의 하루가 끝나감을 실감했다. 하루 가까이, 아무 것도 먹지 못 했고 수면도 일절 없었다. 배가 고프고, 힘이 없었다. 힘없이 앉아, 잠든 제이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두 개의 눈과, 하나씩의 코와 입을 보았다. 같은 기관을 타고났으면서도 각자 다른 외모들이 떠올랐다. 새벽에 그녀가 해줬던 이야기도. 왜 나였는지. 왜 하필 내가 그녀와 탈출하게 된 것인지.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나오기까지의 뜸이 길었다. 정말 별 이유는 없는데......말꼬리를 늘리던 제이가 말했다. 내가 노브를 닮았다고.
그때야 별 생각이 없었는데 차분해진 지금 돌이켜보면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제이가 눈을 떴다. 갑작스런 마주침에 황급히 고갤 뒤로 뺐다. 제이는 누운 그 상태로 눈만 껌뻑거렸다. 그 상태로 1초에서 1분 사이의 시간이 지났다. 얼마나 지났나. 제이가 입을 열었다. 비 그쳤어? 그제야 주변의 소리를 감각했다. 아까와 다름없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한밤에 접어드는 듯했다. 혹은 이제 저녁일 수도 있었다. 시계가 없을 땐 흐린 날의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웠고 어지러운 정신 상태 때문에 더 그랬다. 어둡고 축축한 공간. 제이는 앞이 안 보인다 말했다. 아마 적응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거라 답했다. 그래봤자 윤곽을 인지할 뿐이겠지만.
안 잤어? 그녀의 말에 고갤 끄덕이다 응, 하고 답했다. 몇 신데? 하는 질문엔 도리질을 하다 알 도리가 없지, 하고 답했다. 기껏 그녀가 깨어났는데, 대화할 기력이 없었다. 바통터치라도 하듯 잠이 쏟아져왔다. 눈을 감기 전과 감은 후의 시야가 구분이 안 됐다. 내가 내 안으로 침전하는 감각. 그리고, 제이의 손이 내 볼에 가닿는 감각. 그런 것들과 함께 잠 들었다.
꽤 오래 잤다. 꿈도 없는 깊은 잠 속에서. 눈을 뜨자 제이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웠고, 점차 배경이 선명해졌다. 날이 밝았다. 여전히 얇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중이었고 한기가 주변을 에워쌌다. 두꺼운 외투라도 하나 있었더라면 좋을 텐데. 난 상체를 일으켜 제이와 나란히 앉았다. 어쩐지, 아틀라스가 그리워졌다.
우리를 찾으러 오지 않을까?
희망사항에 가까운 질문에 제이는 반응이 없었다. 평소의 생글생글한 웃음이 아닌 진지한 표정의 그녀. 이전엔 알지 못했던 이면을 제이는 마음껏 드러냈다. 도저히 웃음이 안 나는 상황이긴 했다. 앞으로, 뭘 해야 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벽면에 붙어 핀 민들레가 눈에 들어왔다. 이미 꽃잎과 씨앗을 모두 날려버린, 황량한 꽃의 줄기가.
배가 고팠다. 어디선가 쥐들이 뛰어다니는 상상에 빠지고, 들려오는 새소리에 닭을 구워먹는 상상을 거듭했다. 비가 그치기 전에는 이곳에 꼼짝없이 갇혀버린 신세였다. 안 그래도 좋지 않은 기력에 비를 맞았다간 병 들기 십상일 테니. 무턱대고 나가려는 제이를 간신히 뜯어말렸다. 나는 앉은 채로, 그녀는 서 있는 채로. 대치가 꽤나 이어졌다. 그녀는 져주듯 한숨 쉬며 자리에 앉았다. 난 지겨운 대치가 끝났단 사실만으로 안도하고 있는데, 제이가 대뜸 민들레에다 손을 뻗었다. 연두색 줄기만 남은 그것을, 그녀는 씹어 먹기 시작했다. 당황해서 말릴 틈조차 없었다. 그녀는 기어코 민들레를 삼킨 다음, 바닥에 고인 빗물을 핥기까지 했다. 얼이 빠진 채로 그 모습을 지켜보자니, 그녀가 씨익 웃으며 날 바라보았다. 말했다. 너도 빨리 먹고 힘내라고. 말없이 그 얼굴을 보고 있는데, 난데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주 오랜만이란 체감이었다.
빗속을 걸었다. 더운 공기와 비의 부닥침으로 사방에 안개가 가득했다. 젖은 몸뚱이를 이끄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였고 제이와 참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까, 나의 이야기를 했다. 지금껏 그녀에게 듣기만 하는 쪽이었으니까. 밤사이 생각한 것들과 오랜 생각들까지, 진술하듯 말했다. 서로 같은 눈 코 입을 가졌으면서도 어째서 각자가 구분될까. 본질은 같으면서도 조그만 차이로 인해 나뉘어지는 갈림길.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해진, 태생의 선택. 누군가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뒤집히는 삶의 궤도.
“아틀라스는 인간들이 어떻게 멸종했는지, 알려주지 않았잖아. 거대한 문명을 이룩한, 행성을 지배했던 종족들. 그들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 최후에 대해서만큼은 아무것도 모르잖아. 만약 알려줬더라면 인간들에 대한 우상화가 깨지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었을까. 정말로 마음에 각인된 차별본능이 인간을 모방한 것이라면, 인간은 자기들끼리 싸우다 망한 것이 아닐까.”
이를 끝으로 우린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목적지를 생각하고 걷는 건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도시의 중심부로 끝없이 들어가는 듯했다. 안개 때문에 주변을 잘 파악하지 못했다. 무턱대고 걸을 수 있는 건 그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비가 그쳤네, 제이의 목소리. 어느덧 텅 빈 공간에 들어섰다. 조금 걷다가 그곳이 일종의 광장임을 알았다. 드넓은 땅 위로 많은 것들이 어질러져 있었다. 깨진 콘크리트 바닥 사이사이로 무수한 것들이 피어 있었고, 전부 비에 젖어 번들거렸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발목을 간질였다.
“아, 싱거워라. 이런 세상을 만들어놓고 자살엔딩이라니.”
마침내 제이는 말했다. 광장의 가운데에서, 춤을 추듯 핑그르르 돌며. 날 마주보며 멈춰 섰다. 어쩐지 내 이야기는 진실로 굳어진 느낌이었다. 그녀에게도 내게도. 제이의 어깨 너머로 동상이 보였다. 이끼로 뒤범벅된 녹슨 동상은, 그 모양만큼은 멀쩡했다. 내가 그곳으로 다가가자 그녀가 따라 붙었다. 나란히 선 채로 동상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부서진 곳은 없었지만, 시간의 폭격을 받은 동상은 흉측한 모습이었다. 숭고하다가도 보기 안 좋았다. 차라리 부서지는 게 낫지 않았을까.
우린 동상에 기대앉았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서서히, 극심한 허기가 찾아왔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제이는 이상하게도 쾌활함을 잃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뒷면을 숨기고 있는 걸까. 더 이상 그녀의 말과 표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함을 자각하자 슬퍼졌다. 이제 어쩌지. 벽을 넘은 후부터 거듭해오던 질문. 어떻게, 살아야 할까?
너무 슬퍼할 필요 없어, 제이가 얼굴을 들이대며 소리쳤다. 난 화들짝 놀라며 반쯤 넘어진 채로 그녀를 보았다. 우린 인간이 아니니까. 저렇게 녹슬지 않을 거야.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짓말처럼 볕이 들었다. 제이의 미소가 더 환해졌다. 인간이 어떻게 망했든 간에 아무런 상관도 없는 거야, 우린. 안 그래? 그녀가 손을 내밀며 자신 있게 말했다. 맞잡지 않을 수 없었다.
“저길 봐!”
제이의 옆에 서자, 그녀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색종이의 단면 같은 새파란 하늘이 있었고, 그 위로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꿈처럼 믿기지 않았다. 난 일순간 모든 걱정을 잊은 채로 무지개를 바라다보았다.
무지개는 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뜬다. 같은 빛깔을 가지고 잠깐 떴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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