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멜라에 대한 단상 - 형용될 수 없는 것을 형용하기, 음악의 희망성에 대하여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6-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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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가 감각을 대체할 수 있을까? 또는, 감각이 텍스트를 대체할 수 있을까?
텍스트는 가시적이지만, 음악은 비가시적이라는 사실은 두 매체 사이의 물질성을 고발한다. 인간은 가시적인 것을 완전한 것으로 인식하지만, 비가시적인 것은 불완전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렇기에 텍스트는 기호의 영역에 종속되어 견고한 체계 시스템을 이룰 수 있지만, 비가시적인 음악은 언제 어디서든 흘러내릴 수 있는 불완전하고 액체적인 매체가 된다. 하지만 오히려 이 음악의 불완전성은 텍스트가 체계화/언어화 시켜내지 못한 것들, 다시 말해 체계화될 수 없는 세계의 풍경을 비가시적인 감각으로 구성하고 독자가 그것을 감지하도록 유도한다. 이런 음악성을 문학에 차용한 사람이 바로 김멜라다.
김멜라의 최근작「리듬 난바다」속 한 문장을 예시로 들어보면 그녀의 음악성을 더욱 쉽게 이해 가능하다.
“욕받이가 엉거주춤 일어나 버너의 불길을 조절한다. 젓가락으로 라면을 휘젓다가 뜨거운 김에 이맛살을 찌푸린다. 파에 손을 땠다가 달걀을 건드렸다가 버너의 불길을 다시 조절하며 허둥지둥한다.” - 김멜라,「리듬 난바다」
작가는 이곳에서 여러 추임새(‘엉거주춤’과 ‘허둥지둥’)를 사용하며 운문성을 강조하고, ‘손을 떼고 달걀을 건드렸다’는 문장에선, ‘가’라는 격조사를 연쇄적으로 덧붙이므로서 ‘ 땠다가 건드렸다가’라는 식으로 리듬감을 조성하고 있다. 소설 전문은 이러한 추임새와 격조사의 연쇄가 반복되며 텍스트를 감각적인 음율로 합화 한다.「리듬 난바다」뿐 아니라 대부분의 김멜라 소설은 이런 방식으로, 혹은 음악의 가사를 서술하는 방식으로 음악적인 물질성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문득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김멜라의 작품은 왜 음악적인 형태를 띠는 것일까? 김멜라가 음악의 도움을 받아 이루고자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선 그녀의 창작경향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김멜라의 소설에는 항상 사회로부터 버려지거나 유리된 사람들이 등장한다. 여기서 세계와 인물의 단절이라 함은 얼마간 인물을 구성한 작가와 세상의 단절을 뜻하기도 한다. 인물은 작가의 역사적 기억 데이터를 통해 구성된 허구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김멜라의 작품에서는 젠더 및 퀴어 문제가 인식될 수 있지만, 그 문제에 대한 작가의 체계화된 담론을 이끌어낼 수는 없다. 그녀의 인물들은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세상의 억압을 받지 않는다. 김멜라의 인물들은 저마다 사회적 문제(이 표현은 적합하지 않은 것 같으나, 본문에서는 '사회적 논의', '담론'의 영역으로서 이 단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 퀴어, 동성애, 여성주의, 돌봄 - 를 지니고 있지만, 그 문제를 파고 드려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자신의 문제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그 문제를 바탕 삼아 세계를 살아가려고 한다.
「제 꿈 꾸세요」속 화자는 뜬금없이 찾아온 자신의 죽음(정확히는 원치 않는 질식사)을 문제없이 받아들이며 사랑했던 이들을 찾아 떠나고,「나뭇잎이 마르고」속 체는 자신의 다름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꿋꿋이 살아나간다. 이 외 김멜라 소설의 무수한 등장인물들은 자신이 동성애자인 까닭, 혹은 자신에게 들이닥친 불행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김멜라와 그녀의 인물들은 자신의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문제에 대한 상념을 늘어놓기 바쁘다. 이러한 방기의 원인은 김멜라의 인물들을 둘러싼 고독에서 비롯된다. 고독은 자신을 유리시킨 근원을 샅샅이 훑고 진실을 뒤쫓기보단, 같은 자리에 머물며 감정의 만조에 빠져들 것을 요구한다. 고독의 알맹이는 생각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관념(이론)의 소산이 아니라 세상을 경험하며 겪게 되는 삶(경험)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김멜라의 소설에서 어떠한 문제가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아니라, 그저 문제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문제를 지닌 인물들이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김멜라는 최대한 자신의 인물을 존중하려고 한다.
특히 그녀의 소설에는 사회적 약자/소수자가 대거 등장하는데도 불구하고 한국문학에서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 경향 – 김지연이나 이미상처럼 사회에 유리된 이들을 향한 동정 어린 시선이나 연민이 – 존재하지 않는다.
김지연과 이미상의 문학이 특정 인물이 처한 사회적 환경과 계급을 해체하므로서 세상의 이면을 끄집어 올리는 작업이라면, 김멜라는 환경을 해체하거나 세상을 끌어올리지 않고 방치하는 편이다.
세상의 이면을 보여주는 것이 독자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시도라면, 세상을 놓아두는 것은 인물을 존중하기 위한 태도다.
그렇기에 김지연과 이미상의 소설은 세상을 향해 고독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의 존재를 알리고, 구명튜브를 던지는 소설이 될 수 있지만, 김멜라의 소설은 그런 것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반대로 김멜라는 자신의 인물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을 때,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가 인물을 꼭 껴앉고 위로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사랑은 타자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 그 자체만을 향해 맹목적으로 뻗어난 감정을 일컫는 말이다. 이곳에는 타자의 사회적 지위나 환경을 요구하지 않는 가장 순결하고 무고한 형태의 사랑이 존재한다. 김멜라가 특별한 이유는 그녀만이 우리 문학에서 가장 순결한 (동시에 위험한) 사랑을 행하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타자를 존중하고자 하는 김멜라의 태도는 인물이 그 어떤 험지에 놓여 있더라도 쉽사리 작가가 개입할 수 없도록 한다. 그녀의 소설은 항상 작가의 생각이 아니라, 고독 속에 방치된 인물(들)의 생각으로 시작한다. 요컨대 고독은 멈춤이다. 고독에 빠진 사람은 미래를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계속해서 자책과 상념에 꼬구라진다. 고독에 빠져있는 김멜라와 그녀의 인물들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크게 두 가지다. 그 자리에 계속 머물거나,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것.
「리듬 난바다」,「링고링」,「제 꿈 꾸세요」,「코끼리코」의 화자는 계속해서 과거를 떠올린다.「이응이응」에서 화자는 세상을 떠난 반려견과 할머니를 그리워하고,「설탕 더블더블」의 할머니는 과거 벌어졌던 사건을 후회한다.「저녁놀」과「물오리」에는 현재형 표현들이 주를 이룬다. 김멜라의 인물들은 나아가지 못하기에 계속해서 특정한 순간으로 돌아가려고 하거나, 아니면 현재에 머물기 위해 애쓴다. 이처럼 특정 시간대로 향하려는 발걸음은 김멜라의 소설에서 모종의 몸짓을 생산해 낸다.
요컨대 사람을 특정한 곳에 멈춰 서게 하는 고독은 종국에 생명의 운동 자체를 정지시키는 죽음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김멜라의 소설에서 감지되는 돌아감과 머무름의 몸짓은 사람을 방기하는 고독의 바다에서 살아나기 위한 필사의 헤엄이다.
김멜라의 소설에서 격렬한 헤엄의 몸짓은 음악적 사용을 통해서도 감지된다. 김멜라에게서 음악적인 순간들은 절망적인 상황에 불쑥 사용되곤 한다.「이응이응」에서 섹스기계 이응에 저항하는 포옹모임에서 만난 두 명의 친구 레인코트와 우유수염이 ‘나’를 쏙 빼놓고 이응에서 성관계를 맺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김멜라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1.“포옹하기도 전에 이응을 하다니. 아니, 포옹과 이응은 전혀 다른 것이지만, 그건 섹스와 임신만큼 분리된 거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레인코트가 우유수염과 같이 그걸 했다니.” - 김멜라,「이응이응」
이곳에는 나를 배척한 타자를 향해 응당 있을 법한 원망 어린 서술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 드러난 상황을 다시 설명하는 방식의 서술이 있을 뿐이다. 이런 서술 자체는 그 어떤 당위와 단서도 지니지 못한다. 이 서술은 인물의 사유를 보여주지 못하고, 이야기를 전개해나기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상황이나 사물의 상태가 운동하지 않기에, 그 무엇보다 차가운 정지가 감지된다. 김멜라는 이 정지의 세계에서 포옹과 위옹이라는 단어를 연쇄적으로 서술하면서 운율을 만들고 있고, ‘~이지만’, ‘~해도’를 반복하며 리듬감을 만들어내고 있다. 요컨대 정지는 사물의 상태를 희석시킨다. 김멜라의 운문성은 정지된 세계, 즉 ‘상태 없음’의 세계에서 일종의 비가시적인 운동성을 생산해내고 있는 것이다.
「코끼리코」에서 상태없음의 세계는 전면적으로 가시화되어 나타난다. 남성처럼 오줌을 싸도록 도와주는 변기 ‘코끼리코’를 구매한 화자는 남성의 배뇨 자세로 오줌을 싸지 못해 고생한다. 행위(운동) 하지 못하는 화자는 계속하여 상념에 휩싸인 채 과거를 회상한다. 오줌을 누지 못하는 현재에서 운문성은 더욱 강화된다.
2.“마음에 떠오르는 잡념을 떨쳐내고 우주의 에너지를 모아 조용히 읊조렸다.
코끼리코, 코끼리코.
202호는 회색 인도코끼리가 호숫가에서 시원하게 물을 뿜는 모습을 상상하며 일어섰다. 모퉁이에 서서 바지를 내리고 다시 코끼리코를 시도했다. 그러나 코끼리코를 다리 사이에 대고 있으면 오줌 대신 끝도 없는 상념이 밀려왔다. 집중, 집중, 오줌에만 집중하자. 그렇게 중얼거려 보기도 하고, 쉬- 쉬- 하는 배뇨를 종용하는 바람 소리도 내보았지만, 그럴수록 더 긴장해 소변은 나오지 않았다.” - 김멜라,「코끼리코」
이 문장 역시「이응이응」속 문장이 그러했듯, 배뇨를 할 수 없어 정지되어 있는 현실세계에서 ‘코끼리코’, ‘집중’, ‘쉬-쉬-’ 같은 단어들을 반복하며 일종의 꿈틀거리는 듯한 운율의 운동을 생산해내고 있다. 여기서 음악성은 모종의 운동하는 감각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는 ‘상태 없음’의 세계에서 음악을 끌어들이는 방식 자체는 김멜라만의 특수한 형식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음악을 사용하는 것일까?
「저녁놀」에서 섹스토이인 화자가 주인의 방치로 인해 책 속에 파묻혀서 쓸모를 잃어가고 있는 장면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섬짓 다가온다.
3.나는 말장난을 해보았다. 단어를 곱씹으며 내 이름을 스스로 지었다. 무쓸모의 쓸모, 무모? 무쓸모의 쓸모. 모모! 모모가 된나는 ‘쓸쓸’이란 단어를 오래 머금었다. 무쓸모의 쓸모. 쓸쓸한 존재, 그것이 나로구나. 시인지 노래인지 알 수 없는 운문이 절로 흘러 나왔다.
헤이 모모
도망쳐, 무시해, 뛰어넘어
두 개의 건전지로 두 방의 총을 쏴
랄랄라 타는 저녁놀
사이렌처럼 울려대는 쓰레기 수거차의 후진 음
아예, 아예, 흔한 플라스틱처럼 재활용되지 않아 - 김멜라,「저녁놀」
김멜라에게 음악은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할 때 곁으로 다가온다. 이것은 ‘절로 흘러’ 나오는 자연적인 것이지, 결코 인위적인 것이 아니다.
요컨대 모든 동물은 생존 본능을 지닌다. 숨을 쉬고, 몸을 꼼지락 거리고, 눈을 깜빡이는 것. 이와 같은 육체의 생존 반사는 인식조차 되지 못하고 반의도적으로 행위된다.
김멜라의 인물들은 막막한 현재/현실에서 운동하지 못한다. 하지만 음악은 끊임없이 진동한다. 그 진동이 생산하는 움직임은 무기력과 고독이라는 멈춤 속에서 타자를 운동하도록 만드는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삶의 감각이다. 모든 것을 멈춰 세우는 죽음의 얼굴이 현실에 도사리고 있을 때, 음악은 정지된 세계에서 삶의 몸짓을 격렬히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김멜라에게 있어 ‘절로 흘러’ 나오는 음악은 지극히 생존반사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김멜라에게 음악은 모든 것이 정지된 암울한 세계에서 뜬금없이 솟아올라 죽음의 전면에서 삶을 촉진시킨다. 이를 통해 정지되어 있어야 할 세계는 음악(성)을 통해 야금야금 지속된다. 김멜라에게 음악이란 삶을 살아내는 방식인 셈이다.
희망은 미래를 향해 뻗어 난 긍정의 감각이다. 긍정은 삶의 활기로 가득 차 있는 것들을 일컫는다. 정지해있어야 할 세계를 삶의 감각으로 지속시키고 있는 김멜라의 음악에는 희망이 드리워 있다.
특히 음악과 희망은 비슷한 물질성을 지니고 있다. 희망은 미래를 향해 뻗은 감각이지만, 미래는 늘 변칙적이다. 미래가 변칙적이기에 희망은 관측될 수 없다. 희망이 불확실하고 보이지 않듯이, 음악 역시 비가시적이고 모호하다. 그렇기에 오직 음악만이 가장 ‘희망적인 방식’으로 희망을 전해줄 수 있다. 김멜라의 글을 읽고 나서 감정의 만조에 빠져들었다면, 희망이 내게 다가왔음을 가장 희망적인 방식으로 느꼈기 때문은 아닐까. 음악이야말로 우리가 세상을 살아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동력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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