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성
- 작성자 listener J
- 작성일 2026-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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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유
암센터 1층 접수 데스크 앞, 3년 전과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직원은 나를 단박에 알아봤다. 그새 살이 좀 빠지고 목에 닿지 않도록 머리를 짧게 잘랐는데도 그랬다. 의아한 얼굴로 차트 기록을 몇 차례 클릭하던 직원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이내 입술은 다시 살짝 올라간 모양으로 돌아왔지만, 눈에 담긴 빛은 여전했다.
완치 후 전이나 재발은 흔한 경우였으므로 냉정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상황 역시 유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나를 기억하는 건 아마도 3년 전 같은 자리에 앉아 비슷한 문답을 이어가던 때에 실신할 정도로 울었기 때문이겠지. 그때는 곧 죽을 사람처럼 누워있던 엄마가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울지 않을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여전히 엄마의 과거 병력을 적어 넣어야 하는 칸은 한없이 모자랐으므로.
“여긴 참 똑같다. 그치.”
엄마도 같은 날을 떠올리고 있는지 코를 훌쩍이며 부지런히 볼펜을 놀리는 내게 슬며시 물어왔다. 엄마는 내가 당신 때문에 우는 걸 정말 싫어하는데, 이젠 그런 걸로 잔소리할 기운도 없는 건지 별말이 없었다. 평소라면 “내가 이래서….” 로 시작하는 익숙한 반복을 흘려들으며 더 많은 눈물을 쏟아야 하는데, 엄마가 조용해서 나도 더 울 수가 없었다.
마지막 줄을 적고 볼펜을 내려놓았다. 전보다 두세 줄 늘어 난 병명이 종이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었다. 엄마가 보지 못하도록 손을 움직이면서도 소용없으리라는 걸 알았다. 구태여 읽지 않아도 나보다 훨씬 잘 알고 있겠지. 겪어봤다는 건 그런 거니까.
엄마는 꼭 봄에 아팠다. 새롭게 피는 것들이 쉬이 도드라지는 계절에 오는 끝을 생각하면서.
나는 그때마다 지겨울 정도로 우는 새벽을 보내야 했다. 눈물이 하도 쏟아져서, 도무지 멈추질 않아서 울면서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될 때까지. 흐르는 것들을 닦아가며 밀린 일을 하다 머쓱해하고, 다시 울기를 반복하다 보면 아침은 여지없이 밝아왔다. ‘죽고 싶어'가 ‘죽을 거야'로 바뀌는 그 시간도 흘렀다. 엄마가 아픈데도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그럼에도 시간은 흐른다는 것. 그리고 어느 순간 아무렇지도 않은 양 구는 나를 마주치는 것. 가장 잔인한 건 언제나 그런 종류였다.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늘 바쁘게 움직였다. 엄마와 함께, 아니면 엄마에게 무언가를 권하는 방식으로. 때로는 그것보다, 더 열심히 혼자.
엄마의 손을 잡은 채 몇 시간씩 황톳길을 걷고 병원에 있거나 퇴원한 엄마에게 아침저녁으로 전화하고 일기 쓰기를 제안하고…. 그 와중에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독립 서점을 열고 매일 거기로 출근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자조적인 웃음을 짓자, 제이는 내 앞에서 한 번도 짓지 않았던 표정을 했다. 입술을 일자로 구기는, 웃는 것도 찌푸리는 것도 아닌. 거기에 담긴 말을 읽어낼 수 없는 것 역시 처음이었다. 분명하게 지나와서 알고 있는 시절의 얼굴인데도. 그러니까 나도 언젠가 꼭 그런 표정을 지은 적이 있었을 텐데도 그랬다.
간호사의 표정을 보면서, 3년 전 이맘때와 제이까지 떠올리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엄마는 꼭 봄에 아팠다. 엄마는 꼭 봄에 환했다. 그러니까 엄마는, 당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에 대부분을 좁은 6인실에서 보내야만 했다. 내게 필요한 것들을 요구하는 데에는 영 재능이 없었지만, 엄마가 누릴 것들에는 쉽게 진상이 되었다. 덕분에 엄마는 길고 짧은 입원과 수술을 반복하는 동안 중환자실과 회복실을 제외한 병실에서 내내 가장 전망 좋은 창가 자리를 썼다.
“엄마, 엄마”
어릴 때부터 있던 버릇 같은 거였다. 엄마를 꼭 두 번씩 부르고 대답이 돌아와도 눈이 마주치기 전까지는 다음 말을 하지 않는 것. 엄마는 꼭 봄에 아팠다. 엄마는 꼭 아팠다.
그렇게 나는 눈을 뜨고 기도하는 아이가 됐다. 막을 수 없이 향해오는 무언가가 너무 무서워서 똑바로 봤다. 눈을 부릅뜨고도 깜빡이지 않으려고 잔뜩 힘을 줬다. 그렇게 컸다.
창에서 들어오는 햇볕에 인테리어 잡지를 읽던 엄마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엄마, 있지. 우리 책방에 자주 오던 친구가 있어”
제이와 나를 엮어 소개해야 할 때마다 우리는 자주 당황스러워졌다. 사장과 손님. 작가와 독자. 그런 말들 뒤로 넘쳐오는 기억을 모르는 척하는 데에 재주가 없는 건 피차 마찬가지였다.
친구라는 말로 제이를 묶어두기 시작한 건 얼마 전의 일이었다. 그 앞에 붙은 ‘어린'이라는 수식어를 될 수 있는 한 뒤로 미루기로 한 것도. 제이에게 알린 적은 없었지만 아마 제이도 내가 없는 어딘가에서 나를 다른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어쩌면 격식을 차리지 않는 형태로.
“오라고 할까? 엄마가 한번 만나보면 좋을 거 같아.”
엄마의 첫 암 투병 때, 첫 수술을 마치고 9번의 항암을 남겨둔 엄마 앞에서 덜컥 결혼도 하고 애도 낳을 거라고 약속했었다. 십 대 때부터 이어져 오던 미묘한 신경전의 마침표를 내 손으로 찍은 셈이다. 엄마가 건강하게 살아서 상견례도 하고, 나에게 예비 남편 품평도 할 수 있는 거라면 결혼 정도는. 어린 마음으로 바랐던 거 같다. 엄마는 그제야 안심한 듯 웃었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연인이 없었고 연애는 점점 더 뒷순위로 밀리는 중이었다. 엄마는 그렇게 혼자만 지내면 나이 들어 적적하다고 틈만 나면 독촉했지만 나는 연인 없이도 외롭지 않았다.
그런데 엄마 없이는.
엄마가 제이를 봤으면 싶었다. 내가 두세 살만 더 많았더라면 엄마의 손주뻘 될 법한 그 아이를. 아주 가끔 나보다 나이든 눈을 하고 나를 보는 나의 친구를. 더 이상 나중에 크면 의사가 되어서 아픈 엄마를 치료해 주겠다는 말 같은 건 할 수 없었지만, 아직 무엇도 되지 않은 아이가 내 삶에 끼어있다는 건 알려줄 수 있었다. 그게 엄마를 조금이라도 안심하게 하는 일이라면 못 할 것도 없었다. 그건 곧 나를 안심시키는 일이었으므로. 그렇다면 제이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제이가 나를 보는 눈은 그런 눈이었다. 내가 그 시절에, 그리고 지금까지 엄마를 보는 눈과 똑 닮아있었으니까.
제이를 보며 엄마는 나의 아이를 생각하겠지. 지금 엄마 손에 들린 인테리어 잡지가 나의 신혼집을 위한 것인 것처럼 말이다. 왜냐하면 제이가 나를 닮았기 때문에.
나는 엄마를 닮았다. 그러니까 제이도 엄마를 닮았다.
결국 제이는 비슷하게 자라고 그렇게 나이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일들을 이뤄내면서. 이미 그러고 있는 것처럼, 앞으로도.
잠든 엄마의 얼굴을 가만 내려다보다, 보호자 침대에 걸터앉아 핸드폰을 든다. SNS 다이렉트 메세지 창을 열고 아래로 스크롤 내리기를 몇 번, 한 달 전에 멈춰있는 제이와의 1대 1 대화방에 접속하자 ㅋㅋㅋ이 길게 이어진 말풍선이 눈에 들어온다.
제이가 좋아하는 과자 겉면에서 내 이름을 찾았다던 날이었다. 몇백 개는 족히 넘길 이름들 사이에서 그 애는 내 것을 잘도 골라 찾아냈고, 그때마다 증명이라도 하듯 사진을 보내왔다. 지난번 것과 미묘하게 달라진 모양과 각도 사이에서도 정자로 적힌 두 글자는 시종일관 선명했다. 신경 써서 찍은 티가 났다. 정작 제이는 “작가님 작가님” 지겹게 불러대면서도 그 앞에 이름을 덧붙이는 건 손에 꼽았는데.
제이는 여전히 그 과자를 즐길까. 내 입에는 지나치게 달았던 그 조그맣고 동그란 것들을 하나씩 입으로 가져간 뒤 볼이 부풀 정도가 돼서야 한 번에 씹어 삼키며 웃던 얼굴, 이내 고개를 돌리면 등 뒤에서 울리던 아작아작 소리가 선명했다. 어쩌면 기약 없이 길어지는 휴업에 인내심이 바닥나 책방 문을 열었는지도 몰랐다. 거기 혼자 앉아 열심히 과자봉지를 비우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러라고 비밀번호를 알려준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된 마당에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이,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다름이 아니라 혹시
거기까지 타이핑을 마치고 길게 생각할 새도 없이 삭제 버튼을 꾹 누른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될 것 같아서.
그럼 도대체 어떤 식이어야 하는 걸까. 나를 보러 책방이 아니라 여기로 오라는 말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내 삶에서 가장 잘 가꿔져 있는 부분만을 줄곧 보아온 아이에게.
책방을 꾸려나가는 과정이 얼마나 품이 많이 들고 지난한지와는 별개로 묵직한 유리문을 밀어 연 곳은 구석구석 오롯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모든 게 제자리에 있는 풍경. 그러니 거기서의 나는 잔잔히 미소를 지을 수도, 때론 환하게 웃을 수도 있었다. 제이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까운 자리에 앉아 한순간에 근사해지는 마음 같은 것을 함께 누려온 것. 우리 사이의 옅은 유대의 이유였다.
책방에 제이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뒤통수를 간지럽히던 그 묘한 시선은 의아하면서도 즐거웠다. 동경과 기대감이 섞인 어린 눈. 그런 걸 마주할 수 있는 곳에 내 자리가 있다는 사실은, 결국 나를 한 걸음이라도 더 가보게 했다. 제이가 따라 걸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설령 그게 결국 또 다른 누군가의 주위를 맴도는 거라 할지라도 말이다. 제이가 내 뒷자리에 오래 머물듯이. 그러니까 결국 나도 제이와 다를 게 없었다.
책방이 있으니까 괜찮아요, 망설이다가도 흔들림이 없던 그런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알면서도 농담으로 넘겼다. 그래야 계속 말할 테니까, 들려줄 테니까. 그게 꼬박 삼 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제이, 나예요.
막 보내기 버튼을 누르려는데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재난 문자다.
[행정안전부] 긴급재난문자.
국제 공동 관측 결과 달 궤도 이상 현상이 확인되었으며 일부 해안 지역에서 비정상적 조위 상승이 관측되고 있습니다. 해안·하천·방파제 접근을 즉시 중단하시고 정부 발표를 지속 확인 바랍니다.
제이
혜유 선배.
저 대학 붙었어요. 이제 우리 선후배예요.
선배 안녕하세요.
지금 음성 인식 켜 놓고 말로 하는 중이에요. 그래도 반듯한 텍스트는 거의 몇 년 만이다, 그죠? 웬만한 편지는 직접 써서 전해드렸었는데, 이번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요. 어차피 저 글씨도 완전 악필인데, 잘 됐죠. 사실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겠지만.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산산이 부서질지도 모른다는데.
혹시 선배가 이걸 못 본다고 해도 전송 버튼을 누르면 기록이 남겠죠? 인류가 아주 망해버려서 사라질 때까지, 제가 선배한테 뭘 말하려고 했다는 건 어딘가에 남을 거예요. 그게 중요하죠.
그건 그렇고 제가 벌써 스물이라니. 진짜 안 믿기네요. 어쩌면 선배가 저보다 더 놀라실 수도 있겠다 싶어요. 아닌가, 열아홉이든 스물이든 선배한테는 그냥 어린 나이일 뿐이니까 그다지 상관도 없으려나요. 스무 살을 대하는 마음은 또 얼마나 다른지, 제가 이번엔 또 얼마나 어설프고 엉성한지 전부 다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일단 저는 되게 설레고 좋거든요. 괜히 막 어른 된 거 같고. 선배가 들으시면 “제이, 스무 살은 어른이 아니에요.” 하시겠죠?
이렇게 선배한테 말을 걸고 있으니까 꼭 그때 같아요. 왜,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있잖아요. 그때도 저 혼자만 엄청 떠들었는데.
사실 꽤 자주 그때 생각이 나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어요? 누가 봐도 앳된 애가 처음 보는 사람을 앞에 두고 모르겠다는 말을 몇 번이고 하면서 울고 웃는데, 아무 말도 안 하셨잖아요. 물론 선배는 그때 지금 저보다도 나이가 많았다지만 그렇다고 아주 많은 것도 아니었는데.
저 졸업식 날, 그날은 꼭 제가 계산한다는 걸 한참 말리고 나서 그러셨죠? 너는 내가 뭐가 그렇게 좋냐고, 왜 나 때문에 대학까지 바꿔 고르느냐고.
저한테 아무것도 설명하려고 들지 않는 어른은 선배가 처음이었어요. 고등학생이라는 말만 들으면 수험 생활의 모든 기억을 다 끌어와서 조언하고 충고하고 위로하려고 들지 않는 사람도요. 다들 앞자리가 1로 시작하는 나이에는 좀 유난스러워지는데. 저도 마찬가지고요.
성이랑 호격조사 떼고 이름 두 글자로만 저를 부르는 사람도 지금까지 선배가 유일해요. 심지어 선배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내 존댓말을 썼잖아요. 열 몇 살은 더 어린 애한테.
그게 좋았어요.
선배는 한참 전에 졸업해서 같이 다닐 수도 없는 대학도 일부러 같은 데로 골랐는데, 심지어 붙었는데. 그 좋은 소식을 얼굴 보고 전해드릴 수도 없고.
억울해요.
입학식에 동문인 가족이나 지인 한 명 초대할 수 있다고 해서, 이번에 만나면 그 얘기를 하려고 했어요. 선배 성격에 달가워하실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서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되게 오래 고민했는데.
근데 선배 다 아셨죠? 솔직하게요.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요, 선배가 알면서 모르는 척할 만큼 어른이라서, 다행이었지만 가끔은 좀 야속했어요. 따라 걷는 거밖에는 안 된다는 거니까.
근데 선배도 이건 몰랐죠? 하기야,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테니까. 모르겠다는 말을 뱉는 쪽은 항상 제 쪽이었는데, 인류가 끝장날 정도는 되어야 나란해졌네요. 우리.
선배 지금 병원에 계신 거죠? 모르긴 몰라도 선배라면, 멸망의 미음만 들리면 바로 거기로 갔을 테니까.
저는 지금 어디 있을 거 같으세요? 한번 맞혀보실래요?
맞아요. 선배가 생각하시는 바로 거기 있어요. 저랑 선배가 늘 같이 있던 곳이요. 제가 3년 동안 지겨울 정도로 드나들었던. 선배 없는 여기를 생각하면 어쩐지 어색해서 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분명 익숙한 풍경인데, 오늘은 좀 달라 보이네요. 항상 앉던 자리가 아니라서 그런가. 제가 지금 선배 자리에 앉아 있거든요. 그 통유리창 바로 앞자리요.
이 정도는 해도 되죠? 저도 달만큼은 아니지만 선배 근처를 지겹게 돌았는데, 달도 지구로 오고 있는 마당에 선배도 없는 책방에서 자리 좀 바꿔 앉는 거 정도야. 여기 들어와 보는 거, 한 번도 허락 안 하셨잖아요. 제가 몇 번이나 궁금해했는데. 통유리 창문으로 비치는 풍경이 죄다 가려질 정도로 뭘 그렇게 붙여 놓으신 건지, 지금 어떤 글을 쓰고 계시는지.
거기에 가끔 저도 끼어 있는지.
선배가 이걸 읽으면서 어떤 표정을 짓고 계실까, 멋대로 그려봐요. 왠지 한 손을 이마에 댄 채로 보호자 침대 난간에 팔꿈치를 기대고 있을 것 같은데요. 입술을 한껏 구긴 채로 눈은 휘어지도록 웃으면서, 못 말린다며 고개를 젓고 계시겠죠. 제가 그다지도 좋아하는 그 표정으로요.
그러게, 제가 그때 여쭤봤잖아요. 감당되시겠냐고. 단순히 제가 선배보다 항상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거 하나만으로 덜컥 비밀번호를 알려주시면 어떡해요. 생각하시는 것보다 저 별로 안 착하고 겁도 없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는데.
사람을 함부로 믿은 대가로, 선배가 그다지도 좋아하는 공간은 인류의 마지막 순간까지 비어 있지 않아요. 한 사람이 내뱉는 숨으로 여기를 얼마나 채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차갑게 두지는 않을 거예요. 지구가 완전히 박살 나서 엉망인 게 여기뿐만이 아니게 될 때까지요.
선배가 그랬죠. “여기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없어요”라고.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배 말에 반박하고 싶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왜냐하면 그 말은 틀렸거든요. 선배가 여기를 얼마나 사랑하든 간에 제 마음이 적어도 두 배는 더 돼요. 선배가 이곳을 정말 많이 아끼고 믿지만 저는 지금 제가 앉아 있는 창가 자리에 항상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아 있던 사람까지 그렇게 여기니까요. 꼭 같은 크기로요.
결국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여기를 지키는 건 선배가 아니고 저니까, 이번엔 제가 맞아요.
아까부터 재난 문자 계속 오네요. 선배도 받았겠다.
저 어디 안 갈 거예요. 말리셔도 소용없어요. 그리고 어차피 선배도 마찬가지잖아요.
선배가 어머님 옆에 있는 거랑 제가 여기 있는 거랑 비슷하다고 하면 화내실 거예요? 음, 그건 싫긴 한데 여길 두고 조금이라도 더 살려고 떠나는 게 더 싫어요.
선배는 원래라는 말을 싫어하시지만…. 원래부터 그랬어요. 처음 여기 왔을 때부터 선배 뒷모습이 좋았어요. 그 뒤로 비쳐 보이는 풍경 같은 것도요. 이유 같은 건 이제 중요하지 않겠죠? 그거 하난 좋네요.
사실 저 별로…. 안 무서워요. 왜, 저희 예전에 그런 얘기 했었잖아요. 비행기 사고 같은, 우리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재난이 오면 왠지 초연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요.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공포나 절망에 휩싸인 채로 삶을 마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라는 이야기요. 그만큼 사는 걸 좋아하니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었지만요, 저는 사실 그런 생각 잘 해본 적 없어요.
선배가 제가 잘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다 아는 척 고개를 끄덕였던 거 아세요? 그러다 문득, 시간이 좀 더 지나서 되돌아보면 어느새 알게 되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그리고 결국에는 그게 다 제 생각이 돼요. 선배가 했던 말들은 제 안에서 취향이 되고, 법칙이 되고, 정의가 되고 그래요.
그러니까 이것도 제가 선배한테 배운 수많은 것들 중의 하나인 거죠. 삶에 대한 미지근한 애정을 말하는 법. 제 안에 그런 게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아보는 거. 지금이 딱 그런 게 티가 나기 좋은 타이밍 아니에요? 인류는 망해가고, 어차피 죽을 거고.
혼자고.
지금 이런 마음을 가지고 여기 앉아 있는 거, 우습게 들리겠지만 꽤 좋아요.
선배도 그러셨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사랑보다 좋아하는 마음을 더 귀하게 여기니까, 그것도 선배가 가르쳐 주신 거니까…. 선배가 가장 좋아하는 마음을 품고 그 자리에 계시기를 바라요. 그게 어디든지요.
사실 이 말이 제일 하고 싶었어요. 해야 할 말은 아직 많지만, 마지막에 남는 건 결국 이런 말이거든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잘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사는 걸 좋아한다는 그 말이 저를 살게 했던 것처럼, 선배도 살게 하길 바라요. 좋아한다는 말이 앞으로도 영영 진심으로 남기를요.
저는 선배 덕에 그렇게 됐으니까요.
감사해요.
음성 인식을 종료하시겠습니까?
예
딸깍, 익숙한 기계음 뒤로 적막이 찾아왔다. 혼자 있을 때 이곳은 이런 소리로 채워지는구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목소리로 덮고 있던 탓에 몰랐다. 여태껏 작가님이 어떤 공기를 누리고 계셨는지. 여기에, 지금 바로 이 자리에 혼자 있는 기분이 이런 걸까.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일인 분의 숨소리만 들리는 책방은 예상을 훌쩍 뛰어넘을 만큼 고요했다. 내가 유리문을 밀어 열 때마다 바로 고개를 돌리고, 곧이어 동그란 눈이 휘어지도록 웃으셨던 건 그래서였을까? 창밖 풍경과 상관없이 외로울 수도 있을까, 혼자 매일 같은 자리를 지키다 보면.
메일을 처음으로 다시 밀어 올린다. 선배라니. 여태껏 한 번도 그런 호칭으로는 불러본 적 없었다.
“작가님 말고, 다른 말로 불러보고 싶었어요.”
이미 인식을 마친 화면에 대고 중얼거려본다.
작가님은 언제나 작가님이었다. 내가 되고 싶은 모습에 가장 가깝게 가닿아 있는 사람. 그래서 다른 모습을 그려본 적도, 다른 이름으로 불러본 적도 없는 사람. 우리는 서로의 단면만을 볼 수 있었다. 지구에서는 달의 앞면만을 볼 수 있고, 달 역시 그러하듯이. 그런데도, 앞으로 그렇게만 이어져도 더 바랄 게 없었다. 작가님을 생각하면 그렇게 됐다. 한 곳을 빙빙 돌아도 괜찮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영영 궤도를 반복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위성의 마음.
우습게도 그게 좋았다. 오픈 시간보다 먼저 도착했으면서, 비밀번호도 알고 있으면서 문을 먼저 열고 들어가지는 않는 것. 통유리벽에 살짝 기대서서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뒤늦게 출근한 작가님에게 몇 마디 잔소리를 듣는 것. 같은 타이밍에 스트레칭을 하고 작가님을 따라 허리를 곧게 세우는 것. 단호박 스프레드를 바른 식빵 같은 것들을 얻어먹고 마감 시간까지 자리를 지키는 것. 그렇게 하루를 보내는 것.
그걸 몇 번이고 반복하며 자라는 것.
이따금 책방을 비울 일이 생기면 작가님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렇게 말했다.
“제이, 잠깐 책방 좀 봐줄래요?"
좋았다.
지구의 자리에 앉아 있어도 마찬가지로.
달이 가까이 오고 있다고, 충돌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궤도가 일그러졌다고.
모든 전문가들은 내가 들어본 적도 없는 이론을 들먹이며 입을 모았다. 예측 불가한 현상이고 과학적 근거가 없어서 대비가 불가능했다고. 계속해서 쏟아지는 뉴스의 반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 말은 이해의 영역이 아니었다.
아, 그렇구나. 대비가 불가능하다는 건 대처도 불가능하다는 뜻이고, 그럼 인류가 망했다는 말이구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문득 파편적인 장면이 하나 떠올랐다. 멸망 옆에 가져다 놓기에는 지나치게 안온하고, 또 어딘가 날카로운.
“지구를 위해서 기후변화를 막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 제이는 어떤 거 같아요?”
시험기간이었다. 교실이나 독서실 공기에 숨이 막히는 여름. 무작정 야자를 째고 책방에 왔으면서 죄책감을 이기지 못한 나는 과학 부교재를 펼쳤다.
생태 다양성이었나, 아무튼 생명 단원에 곁다리로 끼어있는 환경 문제 부분 개념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가 들은 소리였다. 언제나처럼, 우리 둘 사이에서만 용인될 정도로 동떨어진 맥락.
나는 항상 고개만 들면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작가님의 뒷모습이 바로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언제든 마주 볼 수 있었다. 당신이 고개를 돌리기만 한다면.
한참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이 어느새 무릎 위에 얹어져 있었다. 몸은 앞으로 살짝 기울인 채로.
“아, 이거 보셨어요?"
“응, 시험 범위에요?"
“네….”
입술을 구기며 울상을 짓자 동그랗게 뜨고 있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등지고 내 앞자리에 앉기까지 두 걸음. 언제나 그 정도였다. 서로 한 걸음씩만 움직이면 충분한 거리.
“와…. 요즘 참 자세하게 나와 있네요. 하기야, 나 때도 다 배우긴 했구나.”
어지럽게 흩어진 형광펜 자국을 훑던 시선이 위로 천천히 올라오며 맞춰졌다.
“제이는 어때요? 지구를 위한다는 거.”
“잘 모르겠어요. 그게 지금 통하는 이야기인가 싶고.”
“그러게…. 나 어릴 때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고, 지금도 마찬가지고.”
모른다는 말에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어른도 작가님이 처음이었다. 정작 당신은 내 앞에서 모르겠다거나 무섭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으면서 그랬다. 언제나 불안하고 흔들리는 쪽은 나였다. 그걸 별스럽지 않게 넘길 이유는 차고 넘쳤다.
그랬으면 안 되는 거였나. 제때 안부를 물어야 했을까.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는 질문을 그대로 돌려줬더라면 어땠을까? 작가님도 잘 지내고 계시죠? 가 아니라 작가님은요? 라고. 그랬다면 메일을 보내는 게 아니라 전화를 걸 수도 있었을까.
“근데, 그런 거 같아. 지구를 위해서라고 하면 어차피 눈 하나 깜짝 안 할 것 같지 않아요? 인간을 위해서라고 해도 될까말까인데.”
우리의 시선이 동시에 아래로 떨어졌다. 부교재 한 귀퉁이 땀을 뻘뻘 흘리며 부채질을 하고 있는 지구 그림 쪽으로.
“나는요, 지구를 위하라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인류가 멸종하든 어쩌든 지구는 그대로일 텐데.”
“그럼, 결국 인간을 위한 거네요. 인간이 살 수 있는 지구를 위해서….”
“그렇죠. 아, 그럼 역효과가 나려나. 갑자기 환경보호고 뭐고 다 싫어지는데? 인간 보호는 별로 안 하고 싶어. 안 그래요?"
그때 우리가 웃었던가. 순간의 표정 같은 건 언제나 쉽게 지워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속으로 삼켰던 말이 선명하게 남는다. 꼭 무언가가 얹힌 것처럼.
그럼 우리 이렇게 할까요, 여기를 지키는 걸로 해요. 지구가 있어야, 여기도 있는 거니까. 그래야 우리도 있으니까.
결국 나는 그렇게 했다. 내가 자랄 수 있는 이곳을 위해서. 그러니까 이건 내 선택이다. 그토록 길어 보였던 삶이 바랐던 것보다도 일찍 끝나버린다면 그건 반드시 이런 모양이어야 한다. 옷을 갈아입으려는 지구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달리는 대신, 작은 방공호를 끌어안고 가라앉는 것. 앞으로도 괜찮을 거라는 말이 근거 없는 빈말로만 남지 않게 하는 것.
이곳에서의 나는 언제나 괜찮았으니까. 그러니 나의 지구는 여기고, 당신이다.
전송 버튼을 누른다. 비행기 모양 아이콘이 깜빡거리고 이내 완료 안내와 함께 화면이 어두워진다.
엄마 엄마
응
엄마는 있지, 스무 살 엄마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나는, 엄마 나는
잘 지키라고 말해줄 거야. 지키면 지켜진다고, 비워두지만 않으면. 그리고 엄마
마지막에는 앞으로도, 라는 말을 들려줄 거야. 그 뒤는 걔가 채울 수 있게
앞으로도
응, 이렇게 계속 이어질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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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을 읽기 전 내가 알고 있던 것은 많지 않았다. 시인의 집이 화재로 전소되었고, 그 이후 이 시집이 출간되었다는 정도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시집 역시 화재 이후의 상실과 회복을 담은 기록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화재라는 사건이 시집의 중심에 놓여 있고, 그 경험을 어떻게 견디고 지나왔는지가 주된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다.가장 먼저 읽은 것은 자서였다.> 오래도록 어둡고> 우울한 음악을 들었다> 그러다 거대한 불에 휩쓸렸다> 올해 봄날은 잿더미> 암흑세계였다> 생체발광할 수 있다면> 차가운 빛을 만들 텐데> 더듬어 시를 켰다> 절벽이 보였다처음 자서를 읽었을 때는 화재를 겪은 시인의 절망과 그 이후의 다짐을 압축해 놓은 글처럼 느껴졌다. 특히 ‘시를 켰다’라는 표현은 어둠 속에서 불을 켜듯, 시를 통해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미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생체발광’이라는 표현 역시 스스로 빛을 내고 싶다는 바람 정도로 이해했고, 마지막의 ‘절벽이 보였다’는 문장은 막막한 현실을 비유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물론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왜 ‘시를 썼다’가 아니라 ‘시를 켰다’일까. 왜 절벽은 ‘보였다’에서 끝날까. 하지만 처음에는 그 표현들을 깊이 붙잡기보다, 앞으로 읽게 될 시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장을 넘겼다.1부 ― 바깥을 오래 바라보는 시선1부를 읽으며 가장 먼저 받은 인상은 시선이 바깥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인은 사람을 관찰하고, 일상적인 풍경을 오래 바라본다. 특별하거나 극적인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평범한 장면 하나를 붙잡고 그 안에서 천천히 사유를 이어 나간다. 읽기 전에는 화재라는 사건이 시집 전체를 이끌어 갈 것이라 예상했기에 이러한 전개는 다소 의외였다. 오히려 시인은 자신이 겪은 일을 서둘러 이야기하기보다, 먼저 타인과 세계를 바라보며 자신의 시선을 가다듬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그 과정에서 나는 1부가 단순히 바깥을 관찰하는 장이 아니라, 아직 자신의 상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기 전 스스로를 천천히 위로하고 마음을 정돈해 가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화재를 외면한다기보다는, 그것을 곧바로 언어로 옮기기에는 아직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 과정은 어쩌면 화재라는 사건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를 천천히 위로하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특히나 1부의 첫 시인 「이 세상에 없는 것」은 이후의 시집을 읽는 내내 계속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의 차이는 뭘까> 모두 끝났다고 말해도 될까> 이 세상에 원래 없었던 것 같은 그것을 찾아> 나는 어딜 이토록 떠도는 것인지이 구절을 읽으며 처음에는 상실을 겪은 사람이 스스로를 다독이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미 쓰여 없어졌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혹은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는 걸까. 시인은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고 계속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이 시는 화재 이후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이
- 미빈
- 2026-07-30
얼어붙은 호수의 경관은 새하얗고 텅 비어 보인다. 그러나 비었다는 것이 정말 텅 빈 것일까? 이 물음에서부터 김이듬 시인의 시집, 를 읽어볼 것이다. 여기 생활의 흔적이 남지 않은 빈 방이 하나 있다고 치자.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우리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방, 혹은 생활의 흔적이 남지 않은 방을 보며 흔히 ‘빈’이라는 묘사를 붙인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비어’ 있는 게 아니다. 사물의 관점에서 다시 방을 보았을 때, 주름 지지 않은 이불과 고요한 침대, 먼지 쌓인 책상과 마룻바닥, 잘 개어진 옷과 닫힌 옷장 등 많은 물건이 들어찬 방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처럼 일상적으로 말할 때 우리는 인간을 세계의 주체로 두고 본다. 인간은 사물과 달리 권력을 잡고 있으며, 주류라고 칭해지기 때문이다. 세상은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의 언어로 설명되며, 이때 인간 아닌 ‘그밖의 것’들은 ‘원래 없었던 것’ 같이 묻혀 버린다. ‘그밖의 것’들은 주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를 주류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그 안에 남아 있던 비주류는 ‘있으나 없는 것’처럼 지워진다. 이 시집에서는 등장 인물이 ‘너’, ‘나’, ‘친구’ 혹은 일상적인 직업, 화자와 가까운 특징을 지닌 인물 정도에 그치는 여타 시집들에 비해 더 다양한 사회적 위치나 직업, 특징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또한 재해의 상황들을 언급하며 그 속에서 피해를 입은 인물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도록 만들고, 특정 사물과 비슷한 처지의 인물들을 연상시키도록 한다. “폭풍”/“기근”/“역병”/“전쟁”, “동남아”에서 온 “가사도우미”, “생리대/초콜릿 바/담배/술”과 같이 값싼 물건과 생활 필수품을 훔쳐 곧 “감옥”으로 “떨어지”게 될 “도둑”, “사람”에게 죽은 “사람”과 “자기 혈육”에게 죽은 “가족”과 “마스크”가 “없”어 “승차를 거부”당한 “누추하게 젖은 사람”, “몽골인 노동자들”, “죽어 있”는 “식물”에서 떠오르는 방치된 사람들과 “태어났고 평범하게 성장했고 온순했으며 살해당한 소녀”와 “식물이 죽고 나서야” “그 식물의 이름을 알게 되”는 세상의 무관심함에 놓여 있는 사람들, “거리 곳곳의 무장군인들과 탱크”, “고독사”, 태어나
- 방백
- 2026-07-30
어떤 행동은 글로 적힐 수 있다. 혹은 글로 적히지 않을 수도 있다. 오렌지를 나무에서 딴 후 껍질을 까 입에 넣는다. 씹는다. 이것은 한 개인의 행위로 볼 수 있다. 주어가 없어도 문장이 된다. 규모가 큰 것을 적거나 역사를 기술할 때에는 반드시 관념적이게 되는 것일까? 예컨대 역사책들은 주로 '눈부시게 발전했다' 혹은 'OO국이 쇠퇴했다', '성장했다'. '번영을 누렸다' 라고 쓰지만 도대체 누가 번영을 누렸다는 것인가.. 한 나라 안에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쇠퇴'라는 것은 무엇인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눈부시게 발전했다'라고 쓴다면 그 '눈부신' 밝음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러나 한 거대한 공동체의 일대기를 쓸 때에 (그 공동체가 실은 개인들의 합이란 것을 감안하지 않고 주로 쓰인다.) 이런 '개인'의 행위를 서술하는 데에 적합한 단어들 말고 공동체 전용 단어는 없다. A나라가 번영했다는 사실은 어떤 한 개인( 아마 'A나라' 라는 이름을 가진)이 번영했다는 방식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그리고 쓰기도 어렵다. A나라에 세 사람이 살고 있었다면 세 사람의 이야기를 하나씩 (동시에 세 줄을 읽을 순 없으니 순서대로) 써야 할 것이고,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만연한 의인화는 어떤 문제를 야기하는가? 먼저 이것은 그 공동체가 실재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한 축구 팀은 단지 같은 유니폼을 입기로 약속한 것일 뿐이다. 만약 'A축구팀이 승리를 차지했다', 'A축구팀이 승승장구하고 있다' 라고 쓴다면 언어의 힘은 읽는 이에게 혹은 듣는 이에게 그 팀에 속해 있는 선수들을 'A축구팀'으로 단순화하게 한다. '우리 반', '우리 학교', '우리 나라'도 같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 나아가다 보면 (도대체 어디로 나는 '나아가고' 있단 말인가? 나는 강물 위를 떠다니는 나룻 사공이란 말인가?) '우리'라는 말마저 부정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정말 그러하다. 이것은 약속 혹은 확인이다. 우리는 언제라도 '그들' 혹은 '너와 나' 같은 다른 말로 바뀔 수 있다. 언어는 필요에 따라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것과 어떤 것을 구별지어야만 한다. 두 원숭이가 언어를 처음 만드는 선사 시대 환경을 가정해 본다면 그것을 주로 야생 동물이나 식물의 '특성'을 묘사해야 했을 것이다. 또한 '성별' 그리고 대화의 주가 되는 '사람'과 '그 외'의 구별이다. 고유 명사는 제외하고 형용사를 보면, 도마뱀은 '빠르다', 거북이는 '느리다', 저 돌은 '크다'. 나무가 '높다' 등이 있다. 성격에 관련된 것도 그러하다. '교활한', '나쁜', '친절한', '아름다운' 등도 진화의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유행어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렇듯 언어가 단지 목청이 내는 소리의 조합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유행하는 소리'는 같은 집단임을 확인하는 신호로 보인다. 오늘날 유행하는 '야르' (이것의 의미는 알지 못한다.)
- 드시코
- 202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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