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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프란츠 요제프에게  

  • 작성자 서벽
  • 작성일 2026-08-17
  • 조회수 336

멸망

요제프. 마침내 그대가 실종된 지 100년이다. 그리고 그 말은, 멸망을 선언하고도 100년이 지났다는 거다.

 

날카로운 쇠바퀴 소리와 함께 철로 위로 기관차의 육중한 자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증기기관이 내뿜은 흰 증기에 승강장은 서서히 부옇게 뒤덮였다. 뮐러는 인파 속에 파묻힌 채 옅은 입김을 내뱉었다. 이내 텁텁한 공기가 그의 폐부를 가볍게 감싸 올렸다. 그는 두꺼운 외투를 여민 이들을 뚫고 가장 구석진 좌석에 가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승객들을 모두 실은 기관차는 느릿한 숨을 몰아쉬며 철길을 기어나갔다. 초겨울의 한기가 객차 안의 이들이 내뱉는 숨에 데워지고 있었다. 뮐러는 까끌거리는 코트를 벗어 선반 위에 올려놓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쾰른을 떠나는 건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사실은 그로서는 바라지 않던 것이었는데, 이방인의 감각을 느끼고 싶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서야 무료한 삶을 즐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는 언제나 요제프와의 일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예외였지만. 어느새 몇 장만을 남겨둔 노트를 펼치자 어젯밤 적어둔 문장이 나타났다. 그는 요제프에게 닿지 못할 편지를 쓸 때면 언제나 멸망이라는 단어를 쓰고는 했는데 이것보다 더욱이 적합한 단어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또 호라이즌 이야기인가?”

덜컹거리는 창문에 기대어 편지를 쓰고 있자니 맞은 편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뮐러가 고개를 들자 빼빼 마른 노인은 그가 관심을 가진다고 생각한 듯 비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백 년째 저 이야기더군.”

노인이 옆자리 청년이 펼친 신문을 턱짓했다. 뮐러는 그제야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뮐러를 훑어보며 답을 기다리던 노인은 그가 마땅한 반응을 주지 않자 입을 다물었다. 뮐러는 노인 옆에 앉은 청년을 흘겨봤다. 그는 창가 구석에 끼워진 신문을 펼치고 있었는데, 읽고 있다기보다는 그저 시간을 때우는 것으로 보였다.

[호라이즌 IV, 국제 분쟁으로 중단]

청년의 신문에서 그 익숙한 타이틀을 본 뮐러는 이내 노트를 덮어두고는 좌석 구석에서 신문을 꺼내 들었다. 지겨운 실패를 알리는 소식을 뒤로한 채 한 장을 넘기자 한면을 가득 채운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호라이즌 프로젝트] 프란츠 요제프 실종 100주년

 

노화 억제제 ACS(Aging Control System)를 개발한 과학자이자 우주비행사인 프란츠 요제프의 실종 사건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다. 프란츠 요제프는 전 인류의 화성 이주 계획인 호라이즌 프로젝트의 핵심 연구원으로 참여했으며, 우주비행사 디트리히 위버와 발터 크루거와 함께 호라이즌 유인 탐사선에 탑승한 후 교신 두절과 함께 정상 궤도 밖으로 사라졌다. 당시 사고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호라이즌 프로젝트. 뮐러는 그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자신의 몸 어딘가가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화성에 인공도시를 건설한다는 방대한 프로젝트가 시작된 건 멸망의 불씨가 막 고개를 들어 올릴 때였다. 치솟는 기온과 대기근, 도시를 집어삼키던 수십 미터의 쓰나미. 다만 이러한 전례 없는 피해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인류는 당연한 결과라는 듯 무심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그 태연자약한 얼굴은 마지막 종자보관소가 미사일과 함께 재가 되고서야 산산이 부서져 내렸지만.

“눈이 오고 있나 보군.”

뮐러가 과거의 한 시절에서 반추를 거듭할 무렵, 기침 소리와 함께 노인이 말했다. 그의 말대로 창밖에서는 서리가 얹힌 들판 위로 잿빛 눈발이 잔뜩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 어쩐지 축축한 석탄 냄새가 객차 안을 가득 에워싸는 듯했다. 뮐러는 그제야 타이틀에서 시선을 옮겨 신문의 마지막 기사로 향했다.

[호라이즌 프로젝트 잇따른 실패…, 제6차 대멸종 우려 확산]

뮐러는 지구의 6번째 대멸종은 이미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아주 한참 전에. 그러나 멸망이라는 것은 단번에, 그러니 정말로 해일처럼 몰려와 모두를 쓸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조금씩 적셔오는 어떤 물살 같은 것이라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인류가 여전히 생존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칙칙한 창밖을 바라보던 그는 이윽고 두 눈을 감았다. 이따금 덜컹거리는 진동이 늙지 않는 몸을 뒤흔들어 댔다.

희미한 햇빛이 새어들어오던 시간을 지나 씁쓸한 한기가 온 몸을 감싸올 무렵, 기관차는 시끄러운 비명소리와 함께 기나긴 걸음을 멈췄다. 창문은 온통 성에로 뒤덮여 바깥의 풍경을 알아볼 수 없었다. 뮐러는 객차에 있는 사람들이 거의 사라지고 난 후에야 무심히 채워나간 편지를 접어 노트 사이에 끼워넣었다. 승강장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석탄을 이리저리 퍼붓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뮐러는 속속히 대합실로 몰려가는 군중 사이에 잠시 우뚝 멈춰선 채, 길을 잃은 듯 헤메이는 조금 전의 노인을 바라보다가는 걸음을 내딛었다. 코트위로 잿빛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역시나 그대가 걱정해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여기서의 죽음은 오직 인류뿐이고 지구라는 행성은 그대가 돌아올 때까지 여전히 남아있을 테니. 그러니 적어도 이름만큼은 남겨둘 곳이 있을 테지. 그러길 바란다. 요제프. 이만.

 

 

공멸

요제프가 실종되고도 한 세기가 지날 때까지, 두 차례의 전쟁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전쟁은 아주 비참하게 막을 내렸는데, 그 핏물로 가득한 전쟁터 속에서 뮐러는 차라리 핵무기로 가득한 창고를 열어 이들이 화려한 공멸을 택하기를 바랐으나 미련하게도, 인류에서 공멸을 택하는 이는 여전히 소수였다.

대낮의 포츠담 광장은 과거의 명성을 잃어버린 채 고요했다. 갈라진 아스팔트와 메워지지 못한 구멍의 흔적. 장벽이 무너지고도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어쩐지 보이지 않는 벽들이 광장 곳곳에 세워져 있는 듯했다. 베를린에서 열리는 추모식에는 언제나 인류의 혁신을 이끈—스스로를 그렇게 칭하기를 낯설어하는 이 따위는 없는—사람들로 붐볐다. 물론 그로서는 단 한 번도 바라지 않던 일이었는데, 특히나 연설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뮐러는 도무지 알지 못했다.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뮐러는 과학자란 자고로 침묵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특히나 그와 요제프의 경우에서는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그러나 이마저도 요제프의 사망선고를 유예하기 위해서라면 그는 어떤 말이든 동시에 할 수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호라이즌 프로젝트의 생존자라는 이름으로.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ACS는 인류의 혁신이었네.”

추모식이 시작되기 전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서 있던 뮐러를 향해 누군가 말을 걸었다.

“그렇습니까?”
“그렇고말고. 나는 말이지, 뭘러 당신이 요제프보다 더 나은 인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국회의원은 ACS가 상용화된 지 오래임에도 여전히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뮐러는 잠시 깃발이 펄럭거리는 연단 위를 올려다보았다가는 고개를 돌렸다.

“프란츠 요제프는 천재였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을 볼 줄 몰랐지. 안타까운 일이야.”

그리 말하던 국회의원은 어딘가 몸이 불편한 듯 짐짓 마른기침을 토해냈다. 뮐러는 그 모습이 마치 늙지 않는 몸에 갇힌 영혼이 발버둥 치고 있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뮐러는 추모사를 낭독하기 전 참석자들의 얼굴을 훑었다. 가장 앞줄에 앉은 이들은 대부분 눈에 익은 이들로, 몇십 년의 세월이 지나도 지겹도록 굳건한 수뇌부였다. 노병들은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숙인 채였다. 뮐러는 어딘가 찝찝한 기분으로 그곳을 빤히 바라보다가는 결국 입을 열었다.

“오늘 우리는 두 차례의 전쟁 끝에 희생된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고귀한 생명을 바친 전몰장병들의 희생으로….”

뮐러는 어젯밤 외워둔 추모사를 낭독하면서도 도무지 시선을 들지 못했다. 죽음과 숭고함. 뮐러는 그 두 단어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며, 양립해서도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선악을 논하고자 한다면.

“…부디, 그들의 이름을 기억해 주십시오. 인류의 평안을 위해 힘쓴 이들을, 숭고한 희생을 택한 이들을.”

말을 끝마치는 그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기침이 터져 나올 듯 메말라 있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고 나자 어느덧 땅거미가 내려앉아 있었다. 뮐러는 위태롭게 깜빡거리는 가스등을 지나 인적 없는 거리를 파고들었다. 19세기로의 회귀를 택한 인류임에도 여전히 밤이 되자 빛을 내는 것들이 조금씩 골목을 채워나갔다.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골목 모퉁이에 위치한 한 여관이었다. 허름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으나 그는 어디든 상관없으니 당장이라도 몸을 뉘고 싶었다. 느껴질 리 없는 두통이 자꾸만 뇌를 찔러대고 있는 탓이었다.

“하루.”

뮐러의 말에도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주인은 이윽고 그를 발견하고는 입을 뻐금거렸다. 침묵뿐인 그를 바라보던 뮐러는 뒤늦게 그가 농인임을 깨닫고는 어서 돈을 건네었다. 그는 그러한 시선이 익숙한 듯 열쇠를 손에 얹고는 손가락을 뻗어 2층을 가리켰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지나 2층으로 들어서자 세월을 머금은 탁한 공기가 몸을 에워쌌다. 그는 창문 하나 없는 방 안으로 걸음을 내딛고는 더는 버틸 힘을 잃어버린 듯 침대에 주저앉았다. 옆 방에서 웅웅거리는 말소리가 새어 나와 그의 심기를 자극했다. 뮐러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는 이상 징후임이 분명한 두통을 견디려 애썼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잠에 들기 직전이었던 그는 마룻바닥에 무언가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떨어진 것은 아주 오래전에 찍었던 폴라로이드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그와 요제프가 있었다. ACS의 효력을 인정받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고는 들떠있던 무렵의. 뮐러는 그 밤, 요제프와의 두 손에서 말미암아 새로운 세상이 태어난 직후를 기억했다. 그 꿈틀거림. 수십 번의 시도 끝에 살아남아 배양기에 담긴 세포를 바라보며 어떤 다짐을 했었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이제는 도무지 떠올려 보아도 알 수 없는 기억이었다. 다만 그날의 의문만이 남아 이따금 그를 옥죄어 올 뿐. 이 시스템은 과연 누구의 손에 들려질 것인가. 아니, 정녕 누구의 손에 들려져야만 하는가?

눈을 감자 어느덧 그는 다시 연단 위에 올라가 있었다. 뮐러는 허울뿐인 말을 멈출 수 없이 토해내다가는 어느 순간, 퓨즈가 끊기듯 의식을 잃었다. 초라한 밤이었다.

 

요제프, 그대라면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하겠지만. 인류는 과거도 지금도 지속을 목표로 한 생존을 한 적이 없다고, 단지 그 말밖에는 할 수가 없군. 남은 이들은 언제나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 마련이니.

 

속죄

뮐러는 오늘 한 여자를 만났다. 프랑크푸르트의 기차역이었던 그곳에 주저앉아 있는 그 여자는 요제프의 얼굴이 담긴 신문지를 깔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또한 개 한 마리가 뉘어져 있었는데, 이따금 숨이 넘어갈 듯 꼴딱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뮐러는 손끝을 발갛게 물들이는 시린 바람 속에서 그녀를 힐긋 보았다가는 이내 스쳐 지나갔다. 환호하던 군중들과 세기의 과학자라던 명망. 그것들은 모두 100년이 지나자 죽어버렸다. 물론 그의 이름은 여전히 신문지에 매일 같이 나타나 한구석을 단단히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요제프에게는 안타깝지만, 실종자 명단만을 바라보고 사는 인간은 더 이상 없다고, 뮐러는 생각했다.

3일간의 외출을 끝으로 돌아온 집은 그사이 온기를 잃어버린 채 식어있었다. 뮐러는 반쯤 녹은 양초에 불을 붙이고는 책상 위에 노트를 펼쳤다. 이제는 정말로 몇 장이 남아있지 않았는데, 뮐러는 편지를 처음 쓰기 시작했을 무렵, 이 노트를 모두 채우고 나면 자신은 무언가 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예측보다는 바람에 가까운 생각이었으나 역시 기다리는 것에 그는 아주 익숙해져 있었기에 역시나 못할 생각은 아니었다. 만년필의 촉을 허공에 둔 채 머뭇거리고 있자니 책상 구석의 광고지가 눈에 들어왔다. 언제부터 놓여있었는지 모를 로또 광고였다.

[당신의 인생을 바꿀 단 한 번의 기적]

뮐러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보았다. 광고지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당첨 확률이 적혀있었다.

입꼬리를 들어 알게 모를 웃음을 지은 뮐러는 이윽고 손을 움직였다.

 

기적과 비극의 확률은 비슷할지도 모르겠군. 단지 확률일 뿐이지만, 요제프, 난 그대에게 비극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만큼 비극적인 일은 없을 테니.

 

편지를 쓰던 뮐러는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꿈을 꾸고 있었다. 다만 꿈인 것을 자각하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꿈속의 그는 아주 익숙하고도 지겨운 곳에 서 있었는데, 마치 영화를 관람하듯 어딘가 동떨어진 시야였다. 빛으로 가득 찬 백색의 공간과 그의 머리 위에서 깜빡거리는 관계자 표시등. 호라이즌 프로젝트의 막바지에 다르러 환경오염에 관한 문제가 제기될 즈음의 기억이었다. 그는 기록 보관실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우주 비행의 후보자가 된 요제프와 달리 핵심 연구원으로만 참여한 그가 드나들 수 있는 곳은 이곳까지였다. 철제 캐비닛이 줄줄이 늘어선 공간.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던 꿈속의 그는 이윽고 시선이 닿은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에는 아직 채 정리되지 못한 서류들이 마구잡이로 쌓여있었다. 과거와 달리 뮐러는 그곳에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서류 뭉치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쯤에서 그는 꿈에서 깨어나려 발버둥 쳤으나 꿈은 여전히 멈출 수 없이 상영되며 이어졌다. 마치 멸망이 시작된 그날을 결코 잊어버리지 말라는 듯이. 현실과 달리 꿈은 눈을 감아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HORIZON PROJECT

- ARK DIRECTIVE

FINAL PASSENGER SELECTION

TOP SECRET / LEVEL-3 CLEARANCE

…

 


 

그리고 그곳에는 호라이즌 프로젝트의 실체이자 인류의 거대한 욕망이 있었다. 노아의 방주라는 명령 아래 선별된 이름들이. 벽돌처럼 쌓아 올려진 그것들이 겨우, 전 인류의 말로를 결정짓고 있었던 것이라고. 손을 떨며 서류를 바라보던 기억 속 그와 달리 꿈속의 뮐러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 안의 이름을 살폈다. 각국의 인사들과 수뇌부. 지겹도록 읽은 이름들이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펼쳐 이제는 서랍 구석에 놓아둔 한 장의 서류가, 본래의 모습으로 그곳에 있었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명단을 훑은 그는 이윽고 기억과 같이 서류의 가장 아래 한 장을 집어 들어 숨겼다. 기록 보관실을 떠나는 뒷모습에선 아무런 머뭇거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꿈속에서 깨어난 뮐러는 식은땀에 온통 젖어있었다. 헐떡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그는 서랍의 가장 아래 칸을 멍하니 응시하며 과거를 반추했다. 창밖으로 새어든 노을빛이 그의 한쪽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뮐러씨?”

그리고 그때 고요한 집안을 울리는 노크와 함께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뮐러는 비틀거리는 몸을 움직여 현관문을 열었다. 그의 앞에는 희뿌연 머리카락과 주름으로 가득한 노인이 있었다. 세월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빛바랜 푸른 눈동자가 뮐러와 맞닿았다.

“카를?”

카를. 카를 쾨르너. 그와의 첫 만남은 아주 갓난아기 때부터였다. 물론 이제는 그 시절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용케도 알아보시네요.”

그의 말에 뮐러는 오래전 보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엿한 청년의 모습을 하던 그는 어느새 이토록 늙어버린 것이었다. 자신과 달리.

“아직도 요제프씨를 기억하시나요?”

카를은 지팡이를 딛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한 발 한 발을 내딛는 그의 발걸음이 불안하게 휘청거렸다. 뮐러는 그를 부축하려 손을 뻗었으나 카를은 고개를 내저었다.

“참고로 전 잊어버렸어요. 거의 모든 것을 다. 아니 사실은 전부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카를은 그 말과 함께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단지 아무것도 아쉽지 않다는 듯이. 갑작스러운 만남에도 카를과의 대화는 이따금 침묵과 함께 끊어지는 듯 이어졌다. 뮐러는 진실을 강요하는 꿈을 기억의 저편에 던져둔 채 과거의 한순간에 빠져들었다. 식은땀을 흘렸던 기억은 노을과 함께 휩쓸려 무력하게도 흐릿해졌다. 결국 진실마저 그러한 것이었다.

“뮐러씨”

새빨간 노을이 물러간 하늘을 바라보던 카를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우리 모두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요.”

“모든 것에는 양면이 있는 법이야.”

뮐러는 검버섯이 자라난 카를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흐르는 세월을 두려움 하나 없이 마주한 이가 그의 앞에 있었다.

“뮐러씨는 후회하시나요?”

“그래. 뒷면을 보지 못하게 되어버렸거든.”

진실을 자백하지 못한 그 순간부터. 뮐러는 씁쓸한 뒷말을 애써 집어삼켰다. 카를은 그 말에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영락없이 어린 애 같은 웃음이었다.

“엘제 부인은, 어떻게 됐지?”
“돌아가셨어요. 40년 전쯤. 그러니 저도 늙어가고 있는 거죠.”

뮐러는 아, 하는 탄성을 터트렸다. 아무리 불멸의 시대를 만들었다고 외쳐대도 막을 수 없는 죽음은 언제나 닥치기 마련이었다. 어쩌면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뮐러는 주름으로 가득한 손등을 천천히 쓸며 물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나?”
“세월이 지나면 그런 건 아무렴 상관없어져요.”
“어른이 되어버렸군.”
“하하. 그래요. 그렇네요.”

카를은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겨울바람을 만끽하며 두 눈을 감았다. 졸음이 몰아치는 듯 자꾸만 고개를 꾸벅거리던 그는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 갈 때쯤 눈을 떴다. 푸른 눈은 어느새 깊게 잠겨있었다.

“뮐러씨. 줄 것이 있어요.”

카를은 헤진 코트 안주머니에서 구겨진 종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빛이 바래버린 편지 하나가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요제프씨가 남긴 편지예요. 어찌나 당부를 하던지, 100년이 지나도 도무지 잊을 수가 없었죠.”
“이걸 건네주러 온 거였군.”

뮐러는 헛웃음을 흘렸다. 분명 탐사선에 탈 즈음엔 아무런 인사도 남기지 않더만은. 요제프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그에게 놀라움을 주고는 했다.
“맞아요. 뮐러씨. 아마 이게 마지막 만남이 되겠죠.”
“좀 더 머물고 갈 생각은 없나?”
그는 오랜만에 살아있는 듯한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과거의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일이란 유일하게도 그런 것이었다. 마치 스스로가 한 세기 이전으로 돌아가 세월 따윈 잊어버린 채 그토록 웃음 짓는 일이었다.

“저는 죽음을 맞이하러 갈 거예요. 아무도 없는 한적한 마을에 녹아들어 아주 천천히 숨을 죽이겠죠. 그리고 그건, 아주 기대되는 일이에요. 그래요. 아주 기대돼요.”

그 말을 하는 카를은 후회 하나 없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뮐러는 그에게 다시 한번 요청하려 했으나 카를은 어느새 지팡이를 손에 쥔 후였다. 그는 구태여 인사를 건네지 않고는 현관문을 나섰다. 뮐러는 구부정한 노인이 골목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주 오랫동안 그를 배웅했다. 과거가 저물고 있었다.

뮐러가 그 편지를 연 건 카를이 떠나고도 일주일이 지난 날이었다. 그동안 그 편지는 테이블 위에 그대로 놓여있었는데 뮐러는 그 모습에 눈가를 찡그리면서도 손을 뻗지 못했다. 그러나 100년의 기다림이 그러했듯이, 결심도 한순간이었다. 창가에 앉은 뮐러는 편지를 집어 들었다. 점심 무렵의 옅은 햇빛이 온몸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눈에 익은 필기체가 눈에 담겼다. 이윽고 뮐러는 수천 번의 발신 끝에 돌아온 단 하나의 수신을 읽어내렸다.

 

친애하는 존 뮐러에게

 

뮐러. 그대가 이 편지를 읽을 때는 한 세기가 지나고 난 후겠지. 카를에게 약속했으니 말이야. 그 조그마한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어찌나 상냥하던지. 도무지 잊을 수가 없을 거야. 아무렴, 도무지.

100년. 자그마치 100년이겠군. 사실 난 그리 먼 미래라고 생각하진 않는다네. 이제 그대는 늙지 않을 테니, 어쩌면 지루함으로 가득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 비록 내가 사라지고야 말았을 테지만. 그대가 그것에 아주 그리움을 느끼진 않기를 바라. 그럴 수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지만. 그러나 난 그대에게 고백을 하려 한다네. 아마 평생 용서받지 못하겠지. 이건 확신이라네. 우린 서로를 아주 잘 알고 있으니. 그대가 놀라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 명단이 어째서 자네의 집에 있었는지는 묻지 않겠네. 애초부터 자네의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모를 수가 없었으니 말이야. 날이 갈수록 수척해지는 모습이 마음이 아프더군. 그리고 자네가 나와는 다른 결정을 내렸다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지. 정말이지 안타까운 일이야. 어쩌면 우린 언제나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어. 때로는 그게 양면을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이번엔 아니었더군.

내가 자네의 집에서 그 명단을 읽은 건 겨우 일주일을 남겨둔 날이었다네. 정확히 말하자면 그대가 디트리히의 집에 들렀던 토요일 밤이었지. 처음부터 그걸 보려 한 적은 없었단 걸 우선 말하는 게 좋겠군. 맹세코, 정말이지 말이야. 그렇지만 뮐러, 과학자의 호기심은 넘쳐난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라. 그 명단을 본 순간부터 나는 수백 가지의 경우를 상상했다네. 그곳에 우리 이름 따위가 없다는 건 그리 와닿지 않았어. 애초부터 영생을 바란 적 없으니 말이지. 이 정도면 오래 살았다고 생각했지. 그렇지만 그 명단에 속하지 못한 인류는? 나머지 99억이 넘어가는 인류는 무슨 죄가 있겠어? 그들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했어. 차라리 스스로의 구원을 믿던 헬레니즘 시대가 그리워질 지경이지. 나라고 수만 명의 생명을 손에 쥐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네. 그렇지만 내가 자네와 함께 영생을 만들어 낸 순간 떠올린 말이 무엇인지 아나? 드디어였다네. 드디어. 내가 무언가를 증명해 내고야 말았다고 생각했지. 인류의 진화 한모퉁이에 내 이름이 새겨질 미래를 생각하고, 오직 과학만이 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였다고, 그런 경탄으로 가득한 생각이었지. 그렇지만 뮐러, 이제서야 고백하지. 내가 틀렸어. 과학만으론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어. 단지 새로운 시대를 열 뿐이지. 선도 악도 존재한 적이 없는….

디트리히와 발터에게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네.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난 숨겨내는 데에 재능이 턱도 없으니까. 처음부터 숨길 생각이 없었냐고 묻는다면 부정은 못 하겠군. 애초부터 나는 그들이 방주를 잃어버리는 쪽을 택할 것이라는 걸 예감하고 있었으니까.

뮐러, 그대라면 아마 이렇게 생각하겠지. 적어도 선택받은 이들만이라도, 비록 그들이 인류를 저버렸더라도 멸망에서 벗어나도록 해야만 한다고. 우리가 죽음에서 벗어나려 했듯이 말이야. 그렇지만 뮐러, 역시나 희망이 무엇이지? 누군가의 손에서 골라지는 것을 희망이라고 볼 수 있나? 하물며 구원이라도? 난 그건 희망이 아니라 지옥이라고 생각한다네. 그것도 인류가 만들어 낸 아주 잔인한 지옥일 거야. 이 선택이 어떤 파멸을 불러올지는 누구도 알지 못해. 그렇지만 난 언제나 시도하는 것이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 옳다고 여긴다네. 그 신념이 이 100억 명의 인류를 망가트린다면…. 우리가 이 세상의 구원자라고 칭송하던 이들을 기억하네. 그들은 곧 나를 배신자라고 여기게 될까? 그것 또한 나의 운명이겠지. 받아들여야만 하는….

그러니 마지막으로 네게 맹세하지. 존 뮐러, 희망은 선택되어서는 안 돼. 인류는 그저 맞이해야만 할 뿐이지. 멸망하는 세상을, 그리고 새로운 시대가 태어나도록. 부디 그대가 그 모습을 바라볼 수 있기를.

P.S. 아! 정말이지 무력한 일이야. 이 모든 일을 그대와 논하지 못한다니. 그것보다 더 아쉬운 것은 없을 테야. 진심으로.

 

뮐러는 우주를 표류하고 있을 그를 떠올렸다. 궤도 밖으로 사라진 탐사선에서, 죽음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인류를 바라보고 있을 그를. 그는 지금 쯤 이 선택을 후회하고 있을까. 알 수 없었다. 그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다만 속죄할 뿐이었다.

 

그러니, 요제프. 죽음으로 속죄하고 싶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자백

요제프의 편지를 받고도 시간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뮐러는 근래 속죄라는 이름으로 술에 취해 살고 있었는데, 또한 환상통일 것이 분명한 두통이 자꾸만 머리를 뒤흔들어 댔기 때문이었다. 그는 밤이 깊어진 거리 위를 목적지 하나 없이 걷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 들린 빈 맥주병이 이따금 달그락거렸다. 텅 빈 눈빛을 하던 그는 어느새 중앙광장에 도래해 있었다. 어스름한 입구를 지나는 뮐러의 시선이 광장 한구석에 앉아있는 한 남자에게로 향했다.

“선생.”

담요를 뒤집어쓴 그는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낮고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뮐러는 초점 없이 걷던 걸음을 멈춰 세웠다. 담요 아래로 남자의 낡은 외투가 바람에 펄럭거렸다.
“술 좀 주시게.”

뮐러는 입을 열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남자를 응시했다. 지저분하게 자라난 수염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주름으로 가득했다. 생기 하나 없는 얼굴이었다. 오래 거리에서 지낸 사람 특유의 희미한 냄새가 풍겨왔다.

“없습니다.”
남자는 뮐러의 말에 실망한 모습 하나 없이 다시금 몸을 웅크렸다. 뮐러는 그 초라한 모습을 바라보다가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당신은 여기서 뭘 하고 있습니까?”

“기다리고 있소.”

“누구를 말입니까?”

그는 입을 열지 않고는 잠시 광장 너머를 바라보았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이 오직 눈발만이 빗발쳐 대는 허공을. 남자는 담요를 끌어 올리고는 답했다.

“죽음을.”
“그건 기다린다고 오는 게 아닙니다.”

뮐러는 차마 비웃음을 참지 못하고는 터트렸다. 새어 나온 웃음이 차가운 공기 사이로 흩어져 내렸다.
“그러니까 기다리는 거지 않소.”

태연한 목소리로 답한 그는 이윽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뮐러는 그의 눈빛이 흐리멍덩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마주한 눈동자는 도무지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되려 한없이 초라해진 그의 모습만이 남자의 눈동자에 박혀 일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선생은 무얼 하고 있지?”

그 말에 뮐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다만 그것은 어딘가 잊어버렸던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듯한 목소리였다. 죽음을 잃어버리고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그런 이야기에 대해. 남자는 그가 대답하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담요를 머리까지 덮어 올렸다. 집으로 돌아온 뮐러는 편지가 놓인 테이블에 앉아 질문에 대한 멈출 수 없는 변론을 거듭했다. 뇌를 찔러대는 두통 속에서도 그는 수없이 많은 답변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는 이윽고, 이제 그 모든 것들은 그저 변명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덧 자신이 기다리던 순간이 찾아오고야 말았다는 것도. 기나긴 밤이 지나고 창밖으로 여명이 떠올랐다. 메마른 햇빛이 테이블 위를 적셔왔다. 뮐러는 그 빛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 빛에는 마치 100년의 세월에도 사라지지 않은 어떠한 결심이 새겨져 있는 듯했다. 아주 오랫동안 케케묵어, 더는 되돌릴 수 없을 듯했던 선택이. 뮐러는 이번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이윽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서랍 가장 아래 칸을 열어 헤진 서류 하나를 꺼내 들었다. 뮐러는 더 이상 무언가를 기다릴 수 없었다.

 

요제프. 나는 자백을 하고야 말 것이다. 이 멸망이 절정에 치닫기 전에, 인류가 끝없는 전락에 취해버리기 전에, 머지않아, 어쩌면 곧.

 

뮐러는 그날 오후 쾰른의 한 신문사를 찾아갔다. 그 건물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듯 입구에 붙은 신문사의 이름은 희미하게 바래있었다. 반쯤 열린 나무 문 사이로 종이와 잉크가 뒤섞인 냄새가 새어 나왔다. 그는 잠시 문 앞에 서서는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는 걸음을 내디뎠다. 한때는 수십 명의 기자들이 드나들었을 건물 안은 이제 몇 남지 않은 사람들의 발소리만이 간간이 울려대고 있었다. 로비의 한쪽 벽에는 신문들이 액자로 걸려있었는데 뮐러는 그중 한 액자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호라이즌 프로젝트, 인류의 새로운 시대를 열다]

한 세기 이전의 신문은 인류의 멸망 따위는 없다는 듯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평선을 여는 여정. 그러나 이제는 노아의 방주를 타고 떠나버릴 이들을 위한 프로젝트로 기억될 것이었다.

“존 뮐러씨?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입구로 들어서던 한 남자가 뮐러를 알아본 듯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뮐러는 품에서 낡은 서류철을 꺼내 들었다.

“호라이즌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를 하러 왔습니다.”

“어떤 내용입니까?”
“호라이즌 프로젝트는….”

수십 년 동안 지워져 있던 이름을 꺼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과 요제프의 이름, 그리고 그날 기록 보관실에서 보았던 수많은 이름들까지. 꺼내어 놓는 순간 빛이 바랜 줄 알았던 활자들이 그의 입에서 살아나 팔딱거렸다. 그는 저와 마찬가지로 늙지 않는 청년의 눈빛을, 죽음을 잃어버린 그 곧은 눈빛을 바라보았다. 오늘이 지나면 새로운 시대가 태어날 것이다. 뮐러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자백을 한다는 것은 결국 그런 것이었다.

뮐러의 얼굴이 실린 신문이 인쇄되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고 난 후였다. 그는 아주 오래간만에 느린 낮잠을 잤다. 잠에서 깨어나자 꿈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으나 그는 그마저도 괜찮았다. 집 밖을 나선 뮐러는 거리를 울려대는 침묵의 술렁거림을 느꼈다. 그는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는 신문을 뒤로한 채 기차역을 향했다. 코트 안 주머니에는 오직 한 장만이 남은 노트가 담겨있었다. 객차 안의 이들은 하나같이 신문을 쥐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거센 추위에 입김을 내뱉는 것마저도 잊어버린 채였다. 뮐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드러나지 않을 웃음을 지었다. 더이상 두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뮐러는 괴팅겐의 한 마을 구석에 버려진 집 문 앞에 다다랐다. 이제는 폐허가 되어버린 요제프의 집이었다. 지평선이 넓게 보이는 녹슨 대문을 열자 수풀이 무성하게 자라난 마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뮐러는 여전히 익숙한 발걸음으로 마당의 왼편에 놓인 샛노란 자동차 문을 열었다. 아무렇게나 놓인 글로브박스 안에서 열쇠를 집어 들어 꽂자, 이내 비틀거리는 듯하던 자동차에 시동이 걸렸다. 딸깍. 뮐러는 CD 플레이어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이내 썩어버린 자동차 안에서는 멸망 이전의 노래가 새어 나왔다. 머지않아 도래할 종말을 재촉하기라도 하듯이. 그는 화약 냄새로 가득한 운전석에 기대어 고개를 까닥거렸다.

*Reisen, Zeit, Medizin, Unterhaltung

Computerwelt

Denn Zeit ist Geld...

이내 흥얼거림은 잦아들고 오직 태동하는 세상만이 남아 그를 에워쌌다. 길바닥에 흩뿌려진 신문지와 탄약. 그는 손안에 쥐고 있던 편지를 창밖으로 내던졌다. 종말의 냄새로 가득한 세상을 향해. 마지막 인사를 고하면서.

 

요제프, 친애하는 프란츠 요제프. 새로운 시대가 태어나고 있어. 더는 멈출 수 없어.

 




 

 

*Kraftwerk-Computerwelt(1981): 거래, 통신 등 당대 새로운 시대를 연 컴퓨터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정확하게 예견한 노래로 유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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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는 앉고야 말겠지

부서진 망치를 쥔 목수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야 슬픈 일이니까 글루건이 잔뜩 붙어버려서 떼지 못하는 인생 같은 건 사실 그렇게 아프지는 않을지도 모르지 아우성을 내지른다고 해서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 아무렴 숨을 쉬기만 하면 된다고 누가 그렇게 말했던 것도 같은데 식탁을 만들어내는 일은 꽤나 어려운 일이겠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하면 인정하게 되는 거 아닐까 사포가 갈리는 소리 웅웅대는 그라인더와 함께 지워낼 수 있다고 여기는 거겠지 부서져도 남아있는 게 있다고 믿으면서 얼기설키 뭉친 톱밥 그러모으면 새로운 의자가 만들어졌으면 좋겠어 슬픔 없이도 말이야 조각내야만 하겠지만 그런데 목수는 사랑했을까 그의 작품을? 아니 연대기를? 그게 뭐든 이미 잃어버린 것들을 손에 쥔 것들을 그게 무슨 소용이야 손바닥을 보이지도 못하는데 그러나 여전히 북적이는 공방 설계도 하나 없이 만드는 커다란 식탁과 단 한 개의 의자 목수는 앉고야 말겠지 왼팔과 오른팔을 헤집으면서도 새하얀 망치가 부서지고도 내려앉지 않고서

  • 서벽
  • 2026-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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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벽
  • 2026-08-21
지상에서 맞는 환상적인 삶

은유게임이란, 아무 단어를 제시어로 던졌을 때 그 단어의 본질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유의어와 반의어를 말하는 것으로 최근 친구들과 하기 시작한 게임이다. 얼마 전, 혼자 은유게임을 하다가 ‘상실’을 제시어로 던졌다. 곰곰히 생각하다보니 삶이라는 단어가 툭 튀어나왔다. 이 단어는 분명 게임의 답이 맞는데, 유의어와 반의어 중 어느 쪽에 두어야 할지 한참이나 고민했다. 그러던 중 문득, 좋은 은유는 어느 쪽의 말이라도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지점이 찾아왔다. 삶은 상실과 유사한 말이 될 수도 있고, 상실과 반대인 말이 될 수도 있다. 그 이유는 바로 ‘같은 성질’과, ‘다른 성질’을 넘어선 본질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상실과 삶은 본질적인 ‘성질’을 공유하고 있다. 만질 수 없지만 존재하고, 보지 못하지만 느낄 수 있는 것. 잃음과 얻음이 한 판의 유리장처럼 서로 붙어 있어 떨어트릴 수 없는 것. 한 쪽을 바라볼 때 다른 쪽이 투명하게 비쳐 보이는 것. 그것이 바로 삶과 상실의 동일한 면이었다. 그렇기에 삶은 즉, 상실이 될 수 있다. 삶은 상실이라는 과정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 상실을 통해서 우리는 무언가를 또 얻어간다. 임선우 작가의 소설집, 을 읽고 나면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상실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햇빛에 비춰 보는 다각면의 보석처럼 여러 인물들과 상황 속에서, 환상적인 장치 속에서 세심하게 어루만지고 있는 것일까? 소설은, ‘상실’이라는 게 무엇인지, 명확히 정의내리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궁금증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비평을 쓰고자 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상실이 삶이고, 삶이 상실이라면, 결국 그게 무엇인지 정의내리는 건 큰 의미가 없지 않을까? 우리가 카페에 앉아 유리창의 얼룩을 바라보고 있더라도, 멀리 있는 사람에게 그것은 결국 반대편의 거리를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타인의 시선에서, 생의 목표하는 지점들은, 징검다리처럼 띄엄띄엄한 것이 아니라 사실 긴 터널과 같이 이어져 있다. 소설집에서 사용되는 환상적인 장치들은, 독자가 익숙하다고 여겼던 세상과 몰입하는 것을 계속해서 깨트리며, 독자로 하여금 소설 속 인물들과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독자를 타자화시키면서, 독자는 인물들이 목표하는 띄엄띄엄한 지점들이, 멀리서 보았을 때 전부 이어져 있다고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촉수에 닿으면 인간이고 동물이고 전부 해파리로 변”하는 “변종 해파리”의 출현은, 인물의 상황이 실화가 아닌, ‘지어낸 이야기’임을 끊임없이 자각하도록 만든다. 그 ‘지어낸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 ‘수’가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해 히키코모리가 된 사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도둑질을 하다가 해파리 변신 대행업체를 찾아간 사건은, 삶의 의미를 다시 깨닫는 소설의 마지막 결론을 위한 하나의 수순처럼 느껴진다. 즉, 이 소설집에서 나타나는 ‘상실’은 ‘환상’과 결합하는 순간 ‘잃었다’는 의미보다 ‘생겨남’의 의미로 연결되게 된다. “변종 해파리”의 출현 전까지, ‘수’의 ‘현실적인’ 상황들(히키코모리, 아버지의 돌아가심,

  • 방백
  • 202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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