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틴10대 감성쟁이
월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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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비평 여성에게 주어진 사랑, 그 이후의 삶 : 이디스 워튼의 [여름]을 읽고월장원 선정로맨스를 다룬 이디스 워튼의 소설, [여름]에 대한 가장 역사적(또한 현재까지 일반적)인 해석은 이렇다. 여자 주인공인 채리티가 자신의 성적 욕망과 사랑을 마주하고 점점 성숙해지는 “성장 소설”. 1917년 미국, 아직 여성 참정권도 허용되지 않던 시기. 여성의 성적 욕망과 사랑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이 소설은 파격적이었고, “인습과 전통에 맞서 자신의 욕망을 직면하는 여성을 묘사하며 미국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고 한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난 뒤 나는 미묘한 불쾌함을 느꼈다. 채리티는 자신의 욕망을 직면했으나, 그 끝을 보지 못했다. 현실의 벽에 욕망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채리티는 결국 로열(이하 **후견인)과의 결혼에 만족해야 했다. 100년도 전에 발간된 소설이니, 물론 지금의 생각만큼 파격적인 전개는 힘들었으리라. 하지만 현대에 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뒤표지는 이 결말을 “성장”이라고 소개한다. ‘채리티’는 기독교적 의미로 사랑을 상징한다. 이 소설을 읽은 뒤, 난 채리티가 그 이름에 걸맞은 사람이구나를 느낄 수 있었다. 주변 인물들과 상황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마음‘에 솔직하여 후견인의 사랑을 거절했으며, 하니와 함께 정열적인 ’사랑‘을 했다. 몸과 마음이 취약해져 후견인과의 반강제적인 결혼을 진행하기 전까지는, 채리티가 늘 ‘자신의 마음’과 ‘선택’을 계기로 하여 움직였으니, 남자들의 사랑에만 휘둘리던 당대의 수동적인 여성상을 탈피한 성격은 의미가 있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더 깊이 파고들면, [여름]은 결말에서 드러나는 구조적 한계가 분명한 소설이다. 채리티는 본인의 원래 꿈이었던 자립의 가능성이 모두 사라진 후에서야, 후견인과 결혼하게 된다. 혼약의 진행마저도, 신부에게 주어지는 강제성을 묵인하는 목사와, 당사자인 후견인/채리티 단 셋뿐인 공간에서, 절망적인 상황에 몸과 정신이 취약해진 채리티가 제대로 거부할 수 없는 상태일 때 해치우듯 벌어진다. 자신이 결혼했고, 이제 돌이킬 수 없음을 인정한 뒤에야 후견인에게 안정을 느낀 채 끝나는 결말을 우리가 “성장”한 것이라고 읽을 수 있을까? 난 아닌 것 같다. 혹자는 후견인의 외로움을 이해하고, 현실을 받아들인 채리티가 성숙해졌다고 하지만, 그것은 포기와 체념이었고, 그토록 갈망하던 자립이 사라진 최후의 선택지였으며, 남성의 보호 아래서만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가부장제 구조에 순응한 결말이다. 여성 참정권조차 없었을 당시에는, 단순히 여성의 성적 욕망과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당당히 드러냈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었겠지만, 이 소설을 현재의 관점에서 살펴보자면, 결국 가부장제 안에서 사랑과 성적 욕망을 절제 당하고, 바꿀 수 없는 현실에 순응한 여성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여성에게 “성장”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데에 있어 나는 잘못됨을 느꼈다. 만약
작성일 2026-02-28 작성자 방백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15상세보기 -
소설 황혼(퇴고)월장원 선정
사진을 찍는다는 건 단순히 어떤 순간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의 감정과 향기, 이를테면 푹푹 내리쬐는 햇빛의 쓰린 온기같이, 살면서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그 빛을 작은 프레임에 맞춰 조각하는 일이다. 우리는 인화된 사진을 바라보며 액자 속 세상을 때로는 연민하고 때로는 부러워하며 회상한다. 비록 다신 돌아갈 수 없을지라도. 그러니 사진을 찍는다는 건 일종의 세상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오로지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세상을. ―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흔적 ( 2014 - 2024 )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나는 전시장 앞에 세워진 팻말을 흘깃 보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평일 오전인 탓인지 그곳은 아직 사람 하나 없이 텅 비어있었다. 뉴욕에서 활동하던 작가의 사진전이라고 했다. 이름이 애쉬라고 했던가. 특이하게도 그는 본명이 아닌 가명을 쓰고 있었다. 때문에 처음부터 그를 인터뷰하려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대표작과 가명을 본 후에 생각이 바뀌었다. 무릇 어떠한 신념이란 아무리 숨기려 해도 티가 나기 마련이었다. 전시장에서는 뉴욕이라는 타이틀과 상반되는 잔잔한 클래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 넓은 공간은 아니었으나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소리가 울려댈 정도였다. 나는 작품을 감상하기 전 입구 쪽에 붙여진 포스터 앞에 멈춰 섰다. 젊음을 나타내는 수수한 미소를 띤, 그러나 얇은 테 안경 뒤에 숨겨진 가라앉은 눈빛으로써 그의 나이를 약간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아래에 적힌 그의 소개란은 미리 확인했듯 텅 비어있었다. 적혀있는 건 오로지 Ash라는 단어뿐.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의 과거라던가 본명은 알아낼 수가 없었다. 마치 이전의 자신을 철저히 떨어트려 놓고 싶다는 듯, 혹은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런 점이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첫 번째 작품의 배경은 도서관이었다. 사진 속 그곳은 소리하나 없이 침묵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초점이 잡히지 않아 명확히 알아볼 수가 없었다. 오직 비스듬히 스며든 햇빛만이 자신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는 채였다. 다음으로 본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전보다 두꺼운 프레임에 담겨있었는데, 플래시를 터트려 빛이 여러 갈래로 번진 사진이었다. 이렇듯 그의 작품은 주로 어딘가 엇나간 듯 흔들리고 비틀려 있었다. 산란된 형형색색의 빛과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사람들과 같이. 그러나 그것이 혼란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되려 가만히 멈춘 평범한 일상이 주를 이뤘고, 이따금 자유로운 뉴욕의 순간을 보여줄 때면 프레임 속 세상은 조금도 흔들려 있지 않았다. 천천히 감상했다고 생각했으나 어느새 전시의 막바지였다. 이 전시장은 특이하게도 감상을 하고 나면 반드시 뒤를 돌아 나와야 하는 구조였다. 때문에 마지막 작품은 가장 안쪽, 넓게 트인 창문 옆에 홀로 걸려있었다. 작품의 이름은 여명. 지금까지의 작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이었다. 그곳에는 막 떠오르는 햇빛을 등진 채 창문에 걸터앉아 있는 소년이 있었다
작성일 2026-02-11 작성자 서벽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78상세보기 -
시 노어를 배우는 기분월장원 선정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편지예요 덧발라진 유화 물감처럼 눈물 자국이 남은 편지지엔 수취인 불명 발행인 불명 단순히 내용만 적혀 있었죠 꼬부랑 글씨로 된 것은 의도한 걸까요? 노어 필기체는 러시아인들도 알아보기 힘들다던데 정갈한 필기체로 쓰인 문장 여러 송이 편지는 석양과도 같아서 저 너머로 보낼 때 가장 예쁜 법이라고들 하죠 한 자 한 자 꼭꼭 지르밟아 써낸 이 편지가 누구인지 모를 당신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 그렇게 감히 믿어 봐요 이 편지가 왜 저에게 온 걸까요? 노어를 배우지 못한 제게 언어라도 하나 배우라는 뜻 그런 뜻일까요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일 거야 그렇게 말한 것 같기도 하고요 사실 잘 모르겠어요 아직도 이 편지가 왜 제게 왔는지 Е는 에, Ж는 제. 키릴 문자 한 묶음이 정수리에 들어올 때마다 뇌를 턱 치는 새로운 기분이 들어요 즈드라스뜨부이쪠, 하라쇼. 기본 회화는 할 수 있어야겠죠? 언젠가 블라디보스토크에 갈 날이 온다면 이 편지에 직접 답을 적어 누군지 모를 당신의 손에 쥐여 드릴게요 노어를 배우는 기분은 이런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으면 좋을 텐데요
작성일 2026-02-11 작성자 앉은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24상세보기 -
수필 마음 뜨기월장원 선정
요즘 나는 오디오 북 듣기를 즐겨 하고 있다. 책은 직접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오랫동안 읽다 보니 눈이 아파서 잠깐 듣기 시작한 오디오 북은 어느새 한 달 째 내 방학 생활 전부를 차지하고 있다. 이 오디오 북은 생각보다 재미있었고, 일상 생활(특히 설거지나 빨래 개기 같은 한 자리에서 오랫동안 손을 움직여야 하는 일)을 하면서 지루함을 달래기에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틀어 놓고 귀로만 들어도 되니, 유튜브 영상이나 영화 보는 것처럼 다른 일을 할 때 중요한 장면을 놓칠 일도 없고,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해낸다는 효율성(즉 가성비)이 참 좋게 느껴지는 것이다. 오디오 북을 듣게 된 뒤로는 미루던 집안일도 흔쾌히 하게 되니 이거야말로 일석이조다. 다만 굳이 단점이라고 해야 할 점은 오디오 북‘만’ 듣고 있을 때 나타난다. 침대 헤드에 비스듬히 기대어 책 읽어주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청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들, 그리고 그 감각들로 할 수 있는 팔다리의 기능들이 ‘심심하고 시간 아깝다’며 아우성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날도 여느때와 같이 귀는 오디오 북에 기울인 채 흘러가는 이 시간을 어떻게 알차게 채울 수 있을까 고심하던 나는, 내 침대가에 있는 듯 없는 듯 방치되어 있던 뜨개질 바구니를 발견하게 된다. 어라?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눈으로 계속 봐야 하지만, 지루한 생각과 청각을 달래기엔 오디오 북이 적격인 것! 나는 뜨개질에 다시금 눈을 뜨게 되었다. (자, 어째서 '다시금'인지, 여기로 화제가 넘어가기 전에 한 가지를 강조하자면, 뜨개질과 오디오 북 듣기를 함께 하는 일은 정말 환상적인 콤비이자 효율적인 취미이다!) 초등학교 3학년즈음, 이제는 어떤 일인지 기억 안 나는 일로 잠시 큰고모집에서 동생과 내가 하루 놀게 된 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 큰고모는 참 다정하게도 재미있는 어린이용 떡 만들기 키트와, 뜨개실과, 동생과 내게 주실 선물까지 갖춰서 최고의 하루를 만들어주고자 준비 만반인 상태이셨다. 그날 나는 큰고모께 뜨개질 하는 법을 처음 배웠다. 세계(라고 해봤자 사실 서양으로 퉁쳐도 될 것 같은)문학전집을 오래 읽으며 자란 어린이에게, 뜨개질이란 무엇일까? 뜨개질이란... 오즈의 마법사와 하이디가 연상되고, 푸르른 들판(혹은 흐린 영국의 도시)에서 치맛자락을 당차게 쥐곤 힘있게 걸어가는 소녀들이 떠오르는 법이다! 그리고 추운 겨울날, 목재 흔들의자에 앉아 아주 긴 스웨터를 뜨시며 옛날 이야기를 들려 주시는 할머니 목소리. 그것을 따라 창문 바깥으로 신비로운 일들이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는... 그런 가슴 떨리는 순간들. 때문에 세계문학전집을 즐겨읽던 나는 뜨개질이 너무 좋았고, 뜨개질의 매력에 금새 빠져들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어린 나는 안타깝게도, 아주 기초적인 뜨개질 이후로는 마땅한 진도를 나갈 방법이 없었다. 사실 명절과 가족 모임에 뵙는 것 말고는 따로 혼자 찾아갈 방도가 없는 큰고모이기도 하셨고. 초등학생 시절, 핸드폰으로 뜨개질
작성일 2026-02-06 작성자 방백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02상세보기 -
시 착시월장원 선정
숲을 걷고 있으면 숲이 나를 가둔 것처럼 나무들이 나를 감싸고 들어오면 안 될 곳에 내가 들어온 듯 나무는 휘청인다 피아노 반주 소리가 들려온다 말라가는 나뭇잎을 밟고 있으면 아작, 무너져 내리는 소리 숲이 서서히 내려간다 스크린에 비쳤던 수많은 나무 스크린 주변을 걷는 관람객 숲을 흉내 내는 기계가 기계를 흉내 내는 숲으로 보일 때 단 한 명처럼 보이는 피아니스트들이 온몸으로 음악을 만들고 우린 만들어진 숲에서 항상 헤맸다 비상구가 어디 있는지 알아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비상구를 찾아 어둠을 더듬으며 걷는데 피아노 건반 여러 겹이 동시에 울린다 화음 스크린에 나타난 여러 명의 이름 숲을 탈출할 수 있었던, 숲을 너무 사랑해 묻어질 수밖에 없던 이름들 빈 영화관에서 홀로 상영된다 의자를 모두 바라본다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전등이 하나씩 켜진다 상영관은 비어 있고 우리의 껍질도 비어 있는 거 같은데 기계는 숲을 보여주는 척 나무의 밑동도 없었다 매 몰려고 하는 몸과 매 몰리고 싶어 하는 몸이 잔잔했던 반주와 함께 휘청인다 많은 이름이 빠르게 무뎌질 수 있도록
작성일 2026-02-02 작성자 송희찬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403상세보기 -
감상&비평 현대적이지 않은 현대극 -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비판론월장원 선정
우리는 어떻게 현대를 감지하는가? 무엇을 보고 ‘현대(적)’이라고 느끼는가? 요컨대 영화에서 현대가 드러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 오늘날 끊임없이 속기되고 있는 사회적 논의들이 될 수도 있고(퀴어 영화, 정치 영화의 경우), 우리의 오늘날 그 자체가 될 수도 있다(21세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 영화가 ‘현대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오늘날 우리와 맞닿아 있다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의 생활양식에서 결코 배제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스마트폰의 존재일 것이다. 문득 21세기 영화의 책무는 스마트폰을 어색하지 않게 사용하는 것이라는 유운성 평론가의 진단(「터칭 스페이스: 스마트휴먼의 몸짓과 장소」)이 떠오른다. 집과 직장, 학교 같은 일상적 공간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은 더 이상 이상할 일이 아니다. 스마트폰을 통해 소통과 표현(전화 및 SNS 기능)을 간단히 대체할 수 있는 오늘날, 현대는 스마트폰을 통해 형체를 드러낸다. 현대극을 차용한 영화들 ― 그렇기에 현대를 보여줘야만 하는 영화들 ― 은 감독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스마트폰을 드러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 앤더슨이 휴대폰을 드러내는 방식 폴 토마스 앤더슨의 는 이후 무려 23년 만에 현대를 배경으로 한 그의 신작이라는 점에서 주목해 볼 만하다. 한 때 현대극을 찍지 않는 이유에 대해 “스마트폰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다”고 답한 앤더슨의 대답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는 폴 토마스 앤더슨이 스마트폰을 담는 방식을 23년간의 연구 끝에 깨닫고 만든 진정 ‘현대적인 영화’인 것일까? 영화에는 스마트폰에 대한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윌라가 경찰의 추적을 피해 수녀원으로 이동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윌라가 소지하고 있던 휴대폰으로 인해 위치가 추적당하자, 한 아나키스트 단원이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휴대폰을 던진다. 카메라는 고속도로 밖에서 외부로 떨어져 나가는 휴대폰을 포착한다. 앤더슨은 이 장면을 굳이 자동차(내부)와 고속도로(외부)라는 개별적 공간으로 분활하므로서, 마지막 쇼트에서 외부로 떨어진 스마트폰에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영화 내부(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자동차)에서 영화와 전혀 관련 없는 외부로 버려져 산산조각 난 휴대폰의 풍경이다. 이 파괴된 휴대폰, 다시 말해 파괴된 현대성이야말로 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는 계속해서 스마트폰을 영화 외부로 밀어내려는 시도들이 보인다. 툭하면 휴대폰에 부착된 위치추적 기능을 사용, 또는 회피하기 위해 휴대폰이 있냐 없냐 묻는 등장인물들의 질문은 영화가 휴대폰의 진위여부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특히 위치추적을 빌미로 휴대폰을 치우기 위해 애쓰고 있는 영화를 보게 되면, 앤더슨이 휴대폰을 거슬리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된다. 폴 토마스 앤더슨이 스마트폰을 변방으로 치워버리기 위해 애쓰는 까닭을 고민해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앤더슨이 고전영
작성일 2026-01-29 작성자 화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23상세보기 -
수필 7인의 아버지월장원 선정
“이 전쟁에서 이긴 것은 사무라이가 아니고 농민들이지 우리들은 졌어.”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에서 사무라이 7명은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 이들은 어떠한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삼시세끼 끼니만 마을 사람들이 챙겨 줄 뿐이다. 사무라이는 산적의 칩입을 막아내는데 성공하지만, 7명중 4명이 죽는 비극을 겪는다. 농민들은 산적이 모두 죽자, 농사일에만 전념하며, 사무라이들은 다시 떠돌이 신세가 된다. 여기서 나는 의문이 한 가지 들었다. 사무라이들은 무엇을 위해서 저 농민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일까? 돈도, 명예도 없는 일에 왜 모든 것을 건 것일까? 나에겐 7인의 아버지가 있다. 7인의 아버지는 모두 다르면서도,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다. 일단 공통점은 택배 기사이다. 물론 두 종류가 있다. 어떤 아버지는 낮에 택배를 하시고, 어떤 아버지는 새벽에 택배를 하신다. 이외에도 아버지의 성격 자체는 거의 유사하다. 화를 거의 내지 않다가, 갑자기 주전자에 물이 끓어 넘치듯 화를 내거나, 맨날 정치 유튜브를 크게 틀어놓고, 본인은 잠을 잔다던가 등 이런 점들은 비슷하다. 하지만 각자가 모두 다른 세계에서 다르게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는 한 명인데, 왜 7명이라 부르냐면, 그것은 내가 쓴 7개의 단편에 모두 아버지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길래, 소설에 항상 아버지가 나오냐고. 그것도 주연급으로 말이다. 사실 이것은 나의 소재력이 부족한 탓이다. 우리 집에서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아버지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건 내 생각이다. 일단 아버지는 원래부터 택배 기사를 한 사람도 아니고, 원래 그렇게 몸 쓰는 일을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평범한 직장을 다니던 사람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만 해도 여름엔 차가운 에어컨 아래에서, 겨울에는 거센 폭설이 내려와도, 따뜻한 히터에서 나오는 바람과 함께 업무를 보셨다. 아버지는 대학원까지 졸업한 사람이었고, 계속해서 이런 삶이 지속될 줄 알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셨다. 우리는 갑작스럽게 이사를 가야만 했고, 아버지는 급하게 일을 찾다가 택배 기사를 시작하셨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스토리는 나의 소설에 단골 소재가 되었다. 아버지가 매일 겪는 부조리의 연속은 소설에 담아내고도 남을 정도로 정말 어처구니 없는 소재부터 재밌는 소재까지 다양했다. 택배를 하다보면, 참 여러 일이 발생한다. 분명 101호에 놓고 갔는데, 누군가가 그 택배를 훔쳐 가거나(코로나 시기에 이런 일이 실제로 많았다), 물건이 파손이 되었다고 연락이 오거나, 아파트에서 택배 트럭 출입을 금지해서 다툼이 벌어지는 등 파란만장한 일이 매일 벌어진다. 그래서 아버지는 천화벨 소리에 예민하다. 아버지가 전화가 울리면 무조건 받아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 받지 않으면, 물건 값을 물어주거나, 불이익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화벨 소리를 크게 해놓는다. 그러나 정작 전화벨이 울리면
작성일 2026-01-29 작성자 노스텔지아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83상세보기 -
소설 같은 속도로 독자와 동행월장원 선정
* 걸어온 이야기는 하고 싶은데, 발에 관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저에게 발이란 무턱대고 걸어서, 땅과 마주하는 일이 더 이상 아프지 않아요. 이걸 굳은살이라고 해야 할까요? 오랫동안 천천히 무감각해지는 발의 이야기는 굳은살투성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괜찮지만, 당신들은 괜찮겠어요? 제 발이 지나온 이야기가 약간 아플 수도 있을 거예요. 이렇게까지 이야기했는데, 궁금하다면 보여드리겠습니다. 다만 눈은 조금 아플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나는 분명, 경고했다. ** 그러나 사람들은 각자의 굳은살 이야기가 뭐 그렇게 듣고 싶은지, 아니면 공감받고 싶은지 눈을 크게 뜨고 눈과 눈을 마주치며 스쳐 지난다. 사실 관심이 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 걷고 있는 길에 바람이 꽤 차갑다. 강원도 산간의 겨울은 역시 눈도 많이 내리고 나무와 나무 사이의 골바람이 도시의 골바람과 다른 매서움을 가지고 있다. 작년에, 삼촌 내외와 가까운 강원도 산간으로 이사를 왔다. 다른 이유는 아니고, 현실에서 일종의 도피를 경험하고 싶었기에. 도시에서 살며, 들이마셨던 공기와 먼지를 이삿짐과 함께 털털 털어내고 시작한 산골 생활이라 우리 가족은 이사 가기 전까지 즐거운 것들을 상상했다. 엄마와 나의 건강 회복과 농촌에 들어가면 받을 수 있는 여러 혜택. 하지만, 시골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텃세가 심하다던데. 그래도 의지할 수 있는 한 식구가 주변에 사니까, 기댈 수 있는 식구가 없었던, 도시보다는 괜찮을 것 같다는 믿음과 희망이 가득했다. <리틀 포레스트>와 같은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엄마와 나는 손을 잡고 소리쳤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짐들은 언제 다 풀고 정리할까. 우린 서로 웃다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버릴 건 버리고, 나눌 건 나누고, 가져갈 건 가져가기 위해 손을 움직이고 발을 움직였다. 어느 정도 정리가 다 됐다. 이제, 이사 가기 전, 감사했던 사람들을 찾아가는 일만 남았다. 학교 다녔을 때 쉼터가 되어준 친구. 내 휴대폰에는 그들의 이름을 이름으로 저장해 두지 않았다. 성과 이름을 같이 붙여 놓으면, 차가운 느낌이 들어서. 그들을 각각 ‘아침의 햇살’과 ‘늦 밤의 달빛’으로. 저장해 뒀다. 그들이 언제 시간이 될지 모르지만, 이사 가기 전에는 연락이 왔으면 좋을 것 텐데. 나는 확신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어떤 것이든 ‘할 텐데’라고 말끝을 흐리기에. 모든 일이 ‘텐데’로 끝났다. 이번에도 그렇고, 저번에도, 그 이전에도 그렇고. 확신이 없었기에, 그들에게 만나자고 했던 카톡 메시지는 다른 광고성 문자들로 인해 내려갈 공간까지 내려갔다. 그런, 나랑 반대로 엄마는 최근까지도 동생네 어린이집 학부모 모임에도 빠짐없이 잘 나갔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사람을 만나는데 거리감이 적었다. 다만, 그만큼 한 공간에 뭉쳐 있지 않으면 그들과의 관계가 금방 흐지부지하게 끝난다는 것. 엄마는 조동모임에는 가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이유겠지. 조동 친구들은 산후조리원에서 나온 뒤, 아이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유지되는 관계
작성일 2026-01-25 작성자 송희찬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849상세보기 -
시 산행월장원 선정
산행 흙바닥에 맨발로 닿았다 떼었다 했다. 돌조각이 땀에 엉겨 붙어 박히기도 하고, 물기를 머금고 흙이 저 스스로 찾아오기도 했지. 그러다 숨은 가빠오고, 어느덧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고 있는다. 나무도 있고 새도 있고 바람도 있지만 이래서야 언제 정상에 오를까 싶지. 잠깐 벤치에 앉아 쉬다가 옆에 놓인 큰 바위. 그걸 막 장난으로 밀쳐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신을 해칠 의도는 없었어요. 바람이 불어오면 꽃가루가 날아오면 코가 간질거리지, 마음도 근질거리면 기침이 난다. 그걸 손으로라도 막아야 하나, 팔로 막아야 하나, 막지 말아야 하나. 돌바닥에 맨발이 닿았다 떼였다 하지. 이런 데서 넘어지면 크게 다치니까, 중심을 잡으려면 팔도 허우적대고, 밧줄도 잡고, 그래야 된다. 그럴 때 구름은 만만히 떠내려 가고 있었네, 눈이 번쩍번쩍 부셨다 안 부셨다. 안 뜨였다 뜨였다. 당신은 어느새 저 위에서 손짓하고 있었어요, 나는 약골이라고 놀림도 받았어요. 살짝 얼굴에 주름이 졌지. 그때 얼굴에서 흘러내리던 땀 몇 방울. 하나는 입이 먹고, 하나는 발이 먹고, 하나는 풀이 먹고. 짰다. 여기가 꼭대기인 줄은 모르겠고, 봉우리인 건 알겠고, 우리는 펼쳐진 풍경을 보며 저기가 네 집이 맞니 아니니, 말다툼도 했다. 그래서 마음도 상할 뻔 했는데 이제 돌아갈 거야. 돌아가는 길은 내리막이라서 빠르다. 바람도 선선하고. 가는 길에는 익숙한 나무 기둥에 손도 올려 보았다. 아까 그 바위에 기대 보기도 했고, 나를 해치려는 건 아니었지만. 조금 뒤에는 올라오는 사람들이 길을 묻기에 얼마 안 남았다고도 말해주었어. 어디 식당에서 뭘 먹어야 너도 맛있고 나도 좋고 소문도 돌고 그럴까? 우리는 머리칼에 봄가루가 엉겨 붙는 것도. 땀이 식으며 떡지는 것도. 모르고 제비처럼 걸었다. 발바닥은 언제 베였는지 몰라, 따끔거렸고. 입구에서 발을 씻다가 장난도 쳤다. 옷을 온통 다 적셔버렸지.
작성일 2026-01-24 작성자 사인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332상세보기 -
소설 한여름을 베어물며월장원 선정
가습기와 에어컨을 모두 끈 채로, 맞이하는 여름은 생각보다 더 덥고, 꿉꿉하다. 습기가 가득 찬 여름의 공기, 나무와 바람이 만약 신이라면, 지금, 이 날씨를 견디는 우리를 보며 신이 날 것 같다. 축축한 벽지와 눅눅한 얼굴과 몸, 그들이 원하는 게 인간의 벌이라면, 인간은 살아가면서 그 벌을 모두 맞이하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 사후 그들을 만난데도 나는 떳떳하다. 이번 여름은 작년 여름보다 더 한 것들을 안고 살아야 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세대에서, 사람 한 명 한 명 더 깊은 곳으로 추락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방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생각보다 차갑다. 여름인데, 이런 바람은 여름과 어울리지 않지만, 바람은 바람이다. 내가 공부를 싫어하는 것도,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알지만 수능 대비 대신, 글만 쓰는 것도 결국 나지만, 책임은 언제나 두렵다. 그러니까, 노트북을 들고 재빨리 거실로 나가자.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 손은 휴대폰을 넘기고 있다. 이 쇼츠 하나만 더 보고 공부하는 거다. 그래, 딱 하나만 더 보고. 더 더워지기 전에 공부를 해야지 하면서도, 공부를 끝없이 밀어냈다. 손에 땀이 고이고, 아이들의 목소리가 앞 골목에서 집 쪽으로 내려오기 전까지. 현재 시각 14시다. 동생 희열의 하교 시간이 점차 다가온다. 그때부터 기침이 나도 모르게 갈비뼈를 짓누르고 목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거부 반응. 오늘도 하루의 대다수를 휴대폰에 다 썼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은 언제나 빨리 학교를 나간다. 그러면서도 매일 학교를 빠지고 싶다고 희열이는 이야기한다. 물론, 내가 학교를 쉬기에 그 아이 입장에서는 내가 그렇게 보이겠지. 그러나 그에게도 지금 상황이 나쁘지마는 아닐 거다. 엄마, 아빠 출근해도 집에서 항상 반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로. 그래도, 내가 미워 보일 수도 있을까. 아직 어리니까, 그런 상황은 일단 내버려두고 옷이나 껴 입자. 언제부터 녹아갔는지 모르는 벽지 위에 걸린 옷을 꺼내 입으며, 인간이면서 인간 다워 보이려고 했다. 그게 방과 후가 끝난 희열과 본인의 자식들을 데리러 오는 부모들에 대한 일종의 예의이자 안심이기에. 기침과 함께 튀어나오는 아쉬움을 감추기 위해, 홀스를 입에 물고 흰색 마스크를 입가에 걸쳤다. 이제, 날 그저 학부모 같은 청소년으로 봐 줄 수 있겠지. 오늘도, 작년 여름처럼 습기가 창문을 적셨고, 도로에는 물웅덩이가 깊게 파여 있다. 인공적으로 다시 타임 루프 한 것도 아니면서. 감기기가 아닌 기침이 작년 초 학교를 다닐 때와 비슷했다. 그러나, 딱 하나 다른 점이 있다. 나를 잡을 수 있는 타인은 없지만, 유일한 내가 나를 잡을 수 있는 것. 최대한 배에 힘을 주고, 원조 고등학교에서 열공을 하고 있을 나를 지지한 친구들과 나를 고교에서 내 쫓은 친구와 선생님의 얼굴에 대하여 올해는 어떻게 지낼지 생각한다. 그들이 결코 행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 자체가 나도 모르게 마음으로 죄를 짓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들을 미화하거나, 좋은 추억을 꺼내 되새김질
작성일 2025-12-23 작성자 송희찬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412상세보기 -
감상&비평 문학과 영화가 나아가야 할 곳(포크너, 이창동, 하루키의 작품 중심으로)월장원 선정
1) 이번 글의 동기 및 목적 1958년 미국의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는 [Barn Burning](헛간, 불태우다)이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을 발표한다. 그리고 1983년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納屋を焼く](헛간을 태우다)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한다. 마지막으로 2018년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이 개봉했다. 이 세 개의 작품은 같은 주제를 공유하면서도 문화적으로, 형식적으로, 서사적으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첫 작품인 포크너가 담고 있는 주제, 무라카미 하루키가 담고 있는 주제, 이창동이 담고 있는 주제가 모두 다르며, 이 소설의 공통점인 ‘불태우는 행위’라는 것도 모두 다른 것에서 파생되고 있다. 이 세 가지 작품은 로컬라이제이션, 트랜스 미디어 등으로 그 효과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처음 ‘헛간을 태우다’라는 하나의 행위가 버닝이라는 거대한 서사까지 어떻게 이어질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이어짐의 효과를 탐구해 보고자 했다. [버닝]은 트랜스 미디어의 최종적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 관객은 단 52만명이 그쳤다. 실제로 작품성을 크게 인정받았음에도 말이다. 2018년 칸 영화제에서 [버닝]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현지 분위기는 열광적이었다. 는 역대 최고 평점(3.8)을 주었고, 다른 매체들도 폭발적인 리뷰를 쏟아내며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대중의 벽은 여전히 높다. 대중들은 여전히 오락적인 영화, 재미를 추구하는 영화를 찾고 있다. 그것은 대중의 문제가 아니다. 이전에도 그래왔고, 현재도 그런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애당초 독립, 예술 영화는 특정한 매니아들이 주로 관람했다. 그러나 이젠 그 매니아들도 이젠 사라지고 있다. 작품성의 이유도 있겠지만, 극장이 적자로 인해서 독립, 예술 영화를 상영하지 않는다. 대중들은 독립, 예술 영화 전용관이 줄어들수록 영화를 볼 기회를 잃고 있다. 이 글에서는 트랜스 미디어를 통한 분석, 더 나아가 영화계, 문학계의 수요가 하락하고 있는 2025년, 어떤 방식으로 대중에게 다시 예술을 선보일 수 있는지 탐구할 것이다. 2) 소설 줄거리 및 정보 2)-1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헛간, 불태우다] 윌리엄 포크너는 [Barn Burning]이라는 제목으로 1958년 단편작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미국 남부에 만연하던 대지주와 소작농의 계급 갈등을 다룬다. 주인공 사티의 아버지 애브너는 소작농인데, 늘 욱하는 성미를 참지 못하여 지주와 다투거나 송사에 휘말린다. 일말의 분노가 차오를 때마다 지주의 헛간(대규모 농장의 헛간은 저택만큼 크고, 값비싼 농기구와 수확물, 가축 등을 보관한다.)에 불을 지르는 애브너는 좀처럼 정착하지 못하고, 가부장에 짓눌린 가족들 역시 떠돌이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이렇듯 매사 무모하고 무자비하고 무법적으로 생활하는 아버지를 보며 아들 사티는 혼란(두려움과 수치심, 존경과 죄의식)에 사로잡히고, 마침내 결단을 내리게 된다. 아들 사티가 지주에게 아버지의 범죄를 예고해 주고, 도
작성일 2025-12-20 작성자 노스텔지아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08상세보기 -
수필 안녕, 어른이월장원 선정*주의: 본문에는 이물 표현이 있습니다. 식사하시면서 보지 않는 것을 추천합니다. 며칠 전, 고등학생 시절 친구를 만났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게 6개월 전이었지. 못 본 지 반년 동안 그와 나는 많은 것을 이루어냈다. 그는 2학년 1.2학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모두 마쳐 고3을 마주해 있고, 나는 검정고시와 수시 합격 그리고 수능을 치르는 등의 경험과 성취를 이루어 냈다. 그래, 우리 모두 올 한 해 수고했지. 또한 내년에도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온 힘을 다해 뒤척이겠지. 그런 뒤척임이 한 해 한 해 쌓이며, 우린 나이를 먹어갔다. 그러다 보니, 금세 열아홉을 바라보게 되었으며, 청소년이 유효한 시간이 1년밖에 남지 않게 됐다. 일 년, 일 년 지날 때마다 몸은 매해 바뀌었다. 키와 몸무게가 늘기도 하지만, 어릴 때 좋아했던, 매운 음식을 먹으면 속이 더부룩해지는 등 체질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특히 작년에는 그 변화가 빠르게 진행됐다. 평소에 즐겨 먹던 얼큰한 찌개와 매콤한 닭발을 몇 입 먹지 않았는데, 먹은 뒤에 속이 끓거나, 변을 자주 보는 등의 행위가 심해졌고, 매운 음식을 거부하게 됐다. 그렇기에 옛날에 바라보지도 않았던, 사리곰탕과 튀김우동이 제일 좋아하는 라면으로 변했다. 계속 이러다가, 이들조차 맵다고 느끼면 어떻게 해야 할지, 함께 매운 것도 못 먹는 맵질이 어른이 되는지 해가 거듭될수록 음식에 대한 걱정이 커진다. 하지만, 매운 음식과 반대로 어릴 적 못 먹었던 비빔밥은 한 해가 지날수록 고추장, 다시 먹을 수 있게 됐다. 내가 지금 껏 비빔밥을 먹지 못한 이유는 네 글자로 요약할 수 있다. 트라우마. 평범했던 초등학교 1학년 1학기 급식으로 비빔밥을 먹었던 그날 급식이 속에서 얹혀 기절했다. 나는 태권도에 들어가자마자 출입문에서 토를 내뱉고, 나도 모르게 쓰러져 버렸다. 일종의 침묵, 어쩌면 소란스러운 환경에서의 고요만이 내 몸을 짓눌렀다. 그런 짓누름에 눈은 점점 감겼다. 어둠이다. 어렸을 때 나는 어둠을 참 무서워했는데, 그 당시에는 어둠이 무섭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편안한 휴식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얼마나 어둠 속에서 쉬었을까?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구급 대원들이 있었고, 태권도 학원 원장이었던, 위층의 미술 선생님과 태권도 사범님 등 학원 관계자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게 여러 질문을 했다. 그중 가장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미술 선생님의 질문. "희찬아, 100까지 세어볼까?" 그녀의 질문에 몇 까지 세었을까? 한 사십까지는 말했던 것 같지만, 결국 100까지 세지 못했다. "그다음에는 모르겠어요." 사실, 내가 숫자 100까지 셀 수 있는지 궁금해한 것이 아니다. 아마도, 내가 다시 정신을 잃지 못하게 집중할 수 있는 것을 찾은 거겠지. 이후 몇 가지 질문을 받은 뒤, 나는 앰뷸런스를 타고 태권도 사범님과 병원으로 이송됐다. 그것이 그날의 마지막 기억이다. 그러나, 이는 그 상황의 마지막은 아니었다. 이후, 각종 검사를 받았다. 뇌파와 CT 등 뇌에 문
작성일 2025-12-19 작성자 송희찬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599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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