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틴10대 감성쟁이
명예의 전당
-
수필 여름 에어컨 아래서월장원 선정
따사로운 햇볕은 들어오시되, 후끈한 여름 공기는 환영하지 않아요. 창을 닫고 커튼을 엽니다. 선풍기로는 부족할 테니 간만에 에어컨을 틀어볼까요. 이제 산뜻하게 아침을 맞이할 수 있겠어요. 분명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온몸이 나른해져요. 주말이라서 그럴까요. 여름이라서 그렇다고요? 이유가 있기는 한 걸까요. 돌이켜보면 어느 계절이건 이불 속에 파묻히고 싶은 날들이 있어요. 오늘은 채광이 참 좋네요. 하늘이 맑아요. 이렇게 좋은 날, 언제나처럼 공원을 산책할 엄두는 나지 않습니다. 가을이었다면 나갔을 텐데. 어림도 없는 상황을 가정하며 의자에 앉아봅니다. 닫힌 창틈으로도 음악 소리가 새어 나와요. 항상 같은 노래, 보이지 않는 분수마저 그려집니다. 흩날리는 물방울을 맞는 사람들을 상상하며 사뭇 그들이 대단하다고 느껴요. 나라면 쉽게 나아가지 못할 자리에서 누군가는 미소를 띠네요. 여름이 선사하는 해방감. 그 웃음이 부러워요. 온도와 습도를 확인한 후에도 목적 없이 SNS에 접속해 봅니다. 새로운 이야기는 없습니다. 모두가 같은 나날이에요. 속으로 몇몇 친구의 안부를 물어보다가 무의미한 걱정인 걸 알고는 핸드폰을 덮습니다. 이토록 자연이 밝은 날, 반짝이는 화면은 어울리지 않아요. 자연스레 책장으로 향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만의 세계입니다. 대부분 소설이에요. 작은 책장 속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잠들어 있을까요. 그곳에 내가 있을까요. 무심코 책을 꺼내어 작가의 말을 읽습니다. 이야기는 허구여도 그들의 말에는 꾸밈이 없어요. 모두가 진심을 다하고 있어요. 가볍게 읽기 좋은 책 하나를 들춰봅니다. 작가의 말이 길어서 좋아요. 아껴두었다가 소설을 마치고 천천히 곱씹어야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재작년 겨울에 읽었던 책이에요. 소설의 배경은 봄입니다. 어째서 아무것도 들어맞지 않을까요. 상관하지 않습니다. 침대로 향해요. 베개를 둘 쌓아 올리고 살포시 이불을 덮습니다. 에어컨을 거쳐 간 이불이 맨살에 닿는 느낌이 좋아요.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촉입니다. 괜히 두 다리의 모양을 자꾸만 바꿔봅니다. 다리를 반쯤 접고 책장을 넘깁니다. 연두색 속지가 마음에 들어요. 마치 봄인 것만 같은 여름입니다. 짧은 소설은 금방 읽어요.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갑니다. 오후의 햇살이 조금은 약해집니다. 작가의 말이 쓰인 시점은 9월입니다. 아무것도 들어맞지 않지만, 모두가 제자리를 찾아간 듯합니다. 봄과 가을 사이에 잠든 여름을 깨워봅니다. 꿈만 같아요. P.S. 제가 좋아하는 여름날을 그려보았습니다. 반쯤 허구라는 소리에요. 2025. 05. 25
작성일 2025-07-01 작성자 아기호랑이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22상세보기 -
소설 부재와 잔재월장원 선정
* 그녀는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이들은 어린 시절 모르는 사람을 보면 울어버리고는 한다. 그 남자가 그녀의 아버지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녀는 오랜 시간 목 놓아 아빠를 불렀다. 그녀의 인생이 영화였다면 내가 너의 아빠라는 어떤 영화의 명대사가 그들에게는 일상일 것이다. 그녀가 조금 컸을 때 그녀의 엄마는 그녀를 병원에 데려갔다. 그녀는 엄마의 손을 더 강하게 잡았다. 두 손 사이에는 무엇도 흘러나갈 틈이 없었다. 그날 오전에는 비가 왔고 그녀는 빨간 장화를 신었다. * 나는 아직 그날을 기억한다. 모르는 남자가 왼쪽에 있는 방에서 나왔다. 그 남자는 아침밥을 먹을 때도 나의 왼쪽에 앉아서 내 숟가락에 반찬을 올려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흰밥 위에 스팸을 올려줬으니 나쁜 사람은 아니지 않을까, 그렇게 믿고 싶었다. 엄마는 방에서 나와 나를 보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신발장에서 빨간 장화를 꺼내주었다. 그동안에도 남자는 나의 왼쪽에 서 있었다. -엄마, 우리 어디가?-우리 딸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지 의사 선생님께 여쭤보러 갈 거야. 바람이 세게 불어서 엄마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렇게 믿었다.병원은 실내라서 그랬는지,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특별히 발견된 이상은 없고…. 한마디로 아이에게는 문제가 없습니다. 엄마가 울기 시작했다. -엄마, 나는 건강한데 왜 울어? 엄마의 손에는 보라색 편지지가 있었고, 점점 구겨지고 있었다. -엄마, 엄마, 엄마 나도 같이 울었다. 나는 아무것도 믿을 게 없어서 옆에 있는 남자를 보면서 울었다. -아저씨, 엄마가 왜 우는지 모르겠어요. 남자는 울지 않았고, -아저씨, 우리 엄마는 내가 건강한 게 싫은가 봐요. 나는 더 크게 울었다. 벌써 그 일도 10년 가까이 지났을 터이다. 내년이 지나면 10년인가, 오래된 기억은 꺼내볼수록 닳아서 나는 햇수를 세지 못했다. * 아주 오래전,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아직도 여름이 오면 그가 누워있는 곳을 찾아가 묻곤 한다. 우리가 약속한 영원은 언제 오느냐고. 세상의 종말이 오기 전에 당신이 먼저 오면 좋겠다고 말이다. 자주 꺼내보는 것은 닳는다. 그가 나에게 청혼할 때 주었던 보라색 편지도 닳았다. 학창 시절을 보내며 나는 그 흔한 연애 한 번 못 해봤다. 나에게는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너무 많았고, 사랑은 다 거짓말 같을 뿐이었다. 친구들을 보며 알았다. 웃고, 울고, 붙잡아도 그들의 손에 남는 것은 없었고, 다 사라졌다. 설렘도, 기쁨도, 슬픔도, 상처까지도. 그런 게 사랑이라면 너무 과대평가 받는 게 아닐지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신은 나에게 벌을 내리셨다. 그와 나는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우리는 매주 신비로운 현상들에 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터무니없는 가설을 세우고 터무니없는 실험을 했다. 대학생들이 하기에는 유치해 보였지만, 그중 진심으로 임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하루는 그가 죽은 자의 혼이 어디로 가게 되는지 열변을 토하며 그의 가설을
작성일 2025-06-09 작성자 하늘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17상세보기 -
감성&비평 『ASSEMBLE24』 감상평월장원 선정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고백하자면 나는 K-pop 음반에 대한 감상을 쓰기에는 그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특히 4세대나 5세대라고 불리는 아이돌들의 음악은 친구들이 알려주거나 SNS에서 마주하지 않는 이상 따로 찾아 듣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24인의 다인원으로 화제가 된 tripleS의 첫 완전체 정규 앨범, 「ASSEMBLE24」는 나에게도 소식이 닿을 정도로 흥행에 성공했고 내 취향에 맞았다. 나는 K-pop에 대한 지식이 모자라도 그들의 음악을 즐길 방법을 제안하며 이 앨범을 리뷰하려고 한다. 그 방법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트랙의 사운드와 앨범의 구성이다.[사운드]나는 음악 감상에서 세계관이나 내러티브를 덜 중요하게 여긴다. 특히 그들이 팀을 결성한 경위와 지금껏 겪은 역경 등에 대한 가사의 출처를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나에게 흥미롭지 않다. (이것은 앨범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는 구분된다) 대신 사운드의 디테일을 추구하는데, 이는 단순히 좋은 음색과 적절한 볼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리의 압축과 (스테레오 오디오에서) 악기의 배치, 공간감의 변주 등의 완성도를 기대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이는 음악의 장르와 뮤지션의 스타일에 따라 얼마든지 느슨해질 수 있지만, 요지는 그 타이트함과 루즈함을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러한 사운드의 관점에서 「ASSEMBLE24」를 바라보면 아쉬운 점이 눈에 띈다. 본 앨범의 7번 트랙 「24」를 예시로 들겠다. tripleS는 다인원 그룹이고, 데뷔 후 2년 만에 발매한 첫 완전체 앨범의 무드를 웅장하게 가져가고 싶었을 수 있다. 그런데 「24」는 웅장함을 목소리로 표현하는 데에 있어 다소 미숙했다. 「24」의 벌스에 사용된 드럼은 완전히 앞에 나와 있다. 벌스에서는 드럼과 베이스, 그리고 몇 가지의 효과음만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공간이 압축되고 집중되는 효과가 생긴다. 프리코러스에서는 킥을 빼고 스네어만 연주하고 있어 타격감이 줄어든 드럼이 코러스에 달해서는 아예 사라지는데, 이때 베이스는 저음역대를 부스트하고 박자를 쪼개서 드럼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와 동시에 공간감의 확장을 위해 신스와 브라스, 그리고 여러 플러그인이 도입되는데 이들이 음역대의 관점에서 보컬과 부딪힌다. 웅장함보다는 밀도만 높은 지저분한 음악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결국 보컬의 퍼포먼스다. 24인의 다인원 그룹의 멤버들이 (특히 앨범명 ‘assemble’의 의미를 고려하여) 단 한 명도 소외되지 않게 파트를 분배하려면 많은 더블링과 코러스, 애드리브가 필수적이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보컬의 볼륨이 작고 파워가 약하다. 이것은 공간감에 있어 뒤로 빠진 소리가 난다는 의미이고 여기서 몇 가지 문제점이 생긴다. 첫째로, 원하는 소리를 명료하게 구현할 수 없다. 보컬보다 뒤에 배치되어야 하는 악기들과 보컬이 충돌하며 소리가 정돈되지 않는다. 둘째로, 멜로디의 임팩트가 없다. 물론 풍성한 코러스는 음악의 높은 완성도에 기여하지만, 적어도 「24」에서 표현된 보컬은 멜로디를 코러스가 받쳐주
작성일 2025-05-21 작성자 joomen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56상세보기 -
수필 푸른에 대한 고찰월장원 선정
여러분은 푸른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그림이 있으십니까? 저는 푸른이라는 말을 들으면 푸른 들판, 푸른 하늘, 푸른 지구 등, 초록과 파란의 조화 一 생명력과 생동감이 한데 모여있는 一 자연과 맑음의 그림이 떠오릅니다. 이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우리 지구를 관용적으로 푸른 별이라고 칭하기도 하고요. 한문으로는 靑(푸를 청)과 綠(푸를 록), 蒼(푸를 창)이 조화되기도 하니, 세계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해도 초록과 파란에 그치지 않고 각종 의미를 함께 내포하는 어휘는 흔치 않은 것으로 압니다. 이 즈음 해서, 시선을 옮겨, 바깥을 바라봐 주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시선은, 푸른인가요? 언제부터인가 푸른은 우리 기억과 창작물 一 내지는 인위적으로 조성된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에서나 볼 수 있는 색채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강은 여전히 푸른색이고, 하늘은 여전히 푸른색이고, 가로수는 여전히 푸른색이고, 푸른 공원은 여전히 우리의 휴식처가 되어주고 있지만 一 그것은 진정한 푸른이 아닙니다. 물을 제 숙소 삼던 산천어를, 창공을 제 도로 삼던 기러기를, 나무를 제 창고 삼던 다람쥐를 보신 기억은 얼마나 오래되셨습니까? 공원을 마음껏 뛰어노는 온갖 동식물의 향연을 보신 기억은 어떻습니까? 푸른이라는 색채에는 색채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생명력과 생동감, 자연과 맑음의 의미가 그러합니다. 이러한 의미는 우리 인간이 인위적으로 따라 한다고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一 오히려 푸른과 그 푸른 속에서 살아오던 모든 생물에 대한 모욕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푸른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푸른은 아름다운 초록과 파란의 색채에 대한 단순한 표현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푸른을 지구로 기억해 보면 어떨까요. 초록과 파란의 一 생명력과 생동감이 모인 一 자연과 맑음의 별 一 푸른 별 지구를 진정한 푸른으로 기억해 보면 어떨까요. blue도, green도 아닌 earth color로 세계인이 모두 함께 푸른을 기억해 보면 어떨까요. 푸른의 다른 이명, 지구색으로 기억해 보면 어떨까요. 9월 7일은 푸른 하늘의 날이라고 합니다. 꾸준히 미세먼지로 인한 피해를 보고 있는 우리나라의 주도로 제안되어 채택된 UN(국제연합) 공식 기념일이죠. 푸른 一 우리의 진정한 푸른이 자그마한 회색 글자로 남아 잊히는 이름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작성일 2025-05-21 작성자 이해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65상세보기 -
감성&비평 고다르(론): 고다르와의 대화월장원 선정
고다르의 죽음 : 늦었지만, 이른 늦-초가을의 추도문그러니깐, 2022년 어느 늦여름이었다. 늦여름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도보에 떨어진 낙엽이 가끔씩 눈에 들고는 하는 가을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었으므로 나로서는 이 시기를 무어라 단정짓기 어려운 것이었다. 수요일이었고, 몸이 아파 학교를 조퇴한 상태에서 여느날과 다름없이 영화 한 편과(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 영화는 아마 테렌스 멜릭의 였을거다) 도서 한 권을 곁에 두고 하루를 여유롭게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당신의 부고소식을 들었다. “누벨바그의 거장, 조력자살로 생을 마감하다”기사가 떴다. 당신의 이름은 고다르. 어디선가 스쳐가듯 들어본 적 있었으나, 당신은 내게 어색한 사람이었고, 난 어정쩡 그날 오후를 보냈던 것 같다. 그로부터 조금의 시간이 지나, 2023년의 겨울 끝자락 무렵, 당신의 영화들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본 세 편의 영화. 와 , 그리고 . 당시에는 그냥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무슨 이런 영화가 다 있지, 싶은 정도. 그랬던 나는, 어느새 장 피에르 멜빌을 존경하던 당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새뮤얼 퓰러와 프리츠 랑을 사랑하던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 당신이 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풀어놓기에는 너무 늦은걸까. 당신은 이 세상에 없다. 이 글이 쓰여지기 불과 얼마 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당신의 압도적인 지력으로 세계 영화사와 시네마의 의미를 탐구하는 걸작 과 를 다시 보았다. 영화를 보면 볼수록 당신에 대한 나의 마음은 싹 트는데, 내가 보지 못한 당신의 영화는 이제 과 단 두 편 뿐이다. 이제 그 마음마저 끝에 다다르고 있는 것일까. 끝내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나는 그 두 편 보기를 계속 미루고, 당신의 작품들을 여러번 돌려보고 있다.그러던 중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당신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두 편의 영화를 상영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목은 . 가 극장에서 상영되는 건 이번이 두번째인 것으로 알고 있다. 첫번 째는 칸 영화제였다. 그곳에서 를 상영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프랑스에 가려고 애썼다. 물론 가지는 못했다. 그렇게 상영일이 지났을 때, 나는 좌절했다. 미치도록 보고 싶은 영화가 바로 당신의 것이었다. 이건 내가 시네필로서 당신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다. 그리고 반 년의 시간이 흘러 그 영화가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이번이 아니면 당신의 영화를 볼 기회는 정말 없을지도 모른다. 방학시기와 여행시기가 맞물려 운좋게도 토론토국제영화제에 갈 수 있었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건, 당신의 유작이 상영되었던 상영일이 당신의 기일이었다는 것이다. 선선한 저녁이었고, 내가 당신의 부고를 들었던 날이기도 했다. 지금이 2024년이라는 것만 의식하지 않게 되어버린다면, 나는 마치 당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경계에 우두커니 서있게 되었다. 알 수 없는 감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당신은 이 세상에 없지만, 그 누구보다 이 세상에서 강
작성일 2025-05-21 작성자 화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33상세보기 -
수필 자화상: 풍화가 당신을 떠난 세계의 하루월장원 선정
"내가 너를 버렸다고 기억할 때, 그것은 사실이다. 내가 너를 버렸던 것 조차 아니라고 네가 슬프게 말할 때,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으로부터 버림 받은 것이라고 네가 생각할 때, 도대체 누가 지금 네 곁에 남아있는가?" - 『기다림 망각』 (모리스 블랑쇼, 1962)여름의 더위가 아물지 않은 작년 초가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베르나르 뷔페 회고전을 다녀왔다. 한때는 미술학도였으나 이제는 붓을 꺾고 꽤 긴 시간 영화와 일탈을 벌여온 사람으로서,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항상 싱숭생숭한 마음이 들고는 하는데, 특히 그것이 학교에서 얼핏 들어본 이름이라거나, 관념적인 이론 내부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 중에서도 베르나르 뷔페는, 근현대 국외작가를 향한 화단의 협소한 연구와 담론으로 인해, 국내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그에 대한 논의가 중단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던 작가였다. 뷔페에 대한 대부분의 글들이 이번 전시회 시기를 내외로 갑작스레 여러 지면에 발표되었다는 것과, 같은 시기 열린 뭉크 전시회의 방문객에 비해 뷔페 전시회의 객들이 눈에 띄게 적었다는 사실이 그 반증일 것이다. 더군다나 베르나르 뷔페 회고전 현판에는 대놓고 ‘피카소가 질투한’ 화가라거나 현대미술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작가라는 둥, 다소 보편적이고 신화적인 문구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나로서는 쉽사리 수긍하기 어려운 수식어들이었다. 그 수식들의 부당성을 설명하기 위해선 뷔페의 작품들이 어떤 의미를 지닌 채, 어느 위치에 놓여있는지 말해보아야 할 것이다. 뷔페의 풍화요컨대 뷔페의 그림을 본다는 것은 작가의 심상을 가장 직관적으로 바라보는 것과 같다. 때로는 날카롭고, 어쩔때는 정갈하며, 움푹 파여있는 감각적인 선들은 캔버스에 선을 긋고 있던 뷔페의 심상을 가늠케한다. 보다 명료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그의 작품들을 시기별로 나열해서 비교해보는 편이 더욱 효과적일 듯 하다.(1) 청년기 1948년 (당시 뷔페 나이 20세) (왼쪽부터) , , (2) 중년기 1970년대 (당시 뷔페 나이 40세 중반) (왼쪽부터) , , (1)은 청소년 시절에서 청년 시절까지 그린 그림들이고, (2)의 경우는 그의 작품이 평단의 주목을 받으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 중장년기의 작품들이다. 그의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여의고 뷔페 혼자 살아가야 했던 불행했던 유년시절 그린 그림들, 가령 (1) 의 작품들은 난잡한 선들이 캔버스를 뒤덮고 있고, 무미건조한 색감과 왜곡된 정물들이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 이곳에 그어진 거친 선들은 마치 당시 고독과 연민에 빠져있던 뷔페의 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반면 그가 사회적으로 유명 화가로 떠올랐을 시기의 작품들 (2)은 대부분 초기에 비해 비교적 단조롭게 정리된 선들과 정물화같은 일반적인 색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작품들에 그어진 선들은 부동할 것처럼 단단하고 두꺼워서 보는 이로 하여금 안정감을 느끼도록 한다. 그것은 초기에 비해 외려 산뜻하고 정갈한 감각을 불러일으켜서 이 시
작성일 2025-05-21 작성자 화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28상세보기 -
소설 봄, 계절성 우울월장원 선정
누군가의 말에 따르면, 갑작스러운 일조량 변화로 인해 봄에 계절성 우울증을 겪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우울이란 단어는 제법 멋진데 뒤에 증이 붙어서 우울증이 되면 좀 뭐랄까, 그 어둡고 암담한 분위기를 잃는 듯했다. 그래서 서진은 우울은 좋아도 우울증은 별로 안 좋아했다. 그게 실제로 존재하는 병이고 얼마나 아픈지 알아도, 우울증은 가짜 같기만 했다. 우울한 병, 단순히 많이 우울한 병...병 같지 않다. 질병이라기보단 그냥 기분 상태 같았다. 서진은 텅 빈 골대를 향해 공을 찼다. 공은 매섭게 날아가서 그대로 골대에 들어갔다. 실린 힘에 비해 맥없는 골이었다. 골키퍼가 없으니 당연하다 해도 할 말은 없었지만, 서진은 조금 짜증이 났다. 경기를 뛸 땐 열심히 차도 잘 안 들어가더니, 경기가 아니면 대충 차도 다 들어간다. 답지 않은 생각이지만 삶 같다. 노력하면 남들보다 훨씬 잘하지만 같은 일을 하는 누군가가 나타나면 금방 밀려나게 된다. 노력이나 절박함의 차이라면 아쉽지라도 않지, 단순 재능 차이면 화가 난다. 서진은 승승장구라는 단어를 싫어했다. 봄이 시작했을 무렵 자라나기 시작한 우울은 슬슬 절정을 찍고 있었고, 그와 같이 봄도 끝나가고 있었다. 서진은 어떤 식으로든 곧 결말이 올 거라 생각했다. 시간은 늦었고 골키퍼 없는 골대처럼 운동장도 비었다. 학교에 남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 운동장에는 서진 한 명뿐이었다. 그는 흙바닥을 몇 번 차다가 교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나가고 싶은데 또 움직이고 싶지는 않다. 공이라도 찰까 싶었지만 또 골대는 너무 멀었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평소랑은 조금 다르다. 몸은 힘들지 않았지만 그냥 움직이기가 싫었다. 그래서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사실은 일부러 힘을 빼서 앉았다. 하지만 눕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까맣기만 한 하늘이 꼴 보기 싫어서였다. 별이라도 있었다면 하늘을 열심히 보았겠지만 서울의 하늘은 너무 삭막했다. 사람들은 밤하늘을 바다에 비유하곤 했지만 서진의 생각에 밤하늘은 사막에 더 가까웠다. 시커먼 모래가 묻어나는 죽음의 땅 같은 것.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사막의 진주, 오아시스는 마시면 안 된다. 박테리아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 서진은 한참 있다가 바람에 등 떠밀려 집으로 향했다. 긍정이 꼭 좋은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긍정만 남은 해맑음은 공허한 것이다. 다만 그건 보기에는 좋을 수 있었다. 알기 싫은 걸 무시하고 사는 삶은 즐거운 법이었다. 서진은 공부를 했다. 책을 펴고 글자를 외우고 문제를 풀었다. 정신적 감성이 거세된 공부는 그처럼 단순해져 있다-단순하지 않은 것은 그 현학적인 내용뿐이다. "으." 습관적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시간은 가질 않는다. 반복작업을 점심시간 절반 동안 했다. 나름대로 노력해서 하는 공부였다. 짜증이 다시 밀려올 무렵 예정된 상담이 떠올랐다. 주기적으로 있는 담임과의 상담이었다. 서진은 조금 일찍 가기로 하고 책을 덮었다. 담임이 있는 교무실은 멀지 않았다. 문을 통해 나가서 다른 문으로 또 들어갔
작성일 2025-05-12 작성자 김희수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455상세보기 -
소설 내 딸의 유서월장원 선정
... 어머니께서 이것을 보고 계시다는 것은 제가 거기에 없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단순한 방 청소로는 발견할 수 없을 만한 위치에 숨겨 두었으니 아마 저를 앞에 두고 읽으실 일은 없을 거라 믿습니다. 어머니께서 글을 읽고 계시는 현재, 저는 사진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게지요. 혹자는 저더러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을지도 모릅니다. 산 사람의 물음이 지금의 저에게까지 닿지 않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그러나 누군가 그렇게 물을 것을 알기에, 저는 미리 대답하겠습니다. 저는 한 치의 후회도 없습니다. 단언합니다. 나는 내가 후회하지 않았음과, 내가 후회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또 혹자는 내게 물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그런 선택을 하였니, 하고 말입니다. 거기에 또 내가 낱낱이 답한다면 나는 싸구려 기계처럼 변하고 말 테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평생을 기계가 되는 법을 배우며 살았는데 이제 와서 사람 행세를 하기도 귀찮고 하여, 나는 또 대답을 하고 맙니다. 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아니, 사람보다 하등한 존재.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어린아이. 비둘기, 새싹, 길가에 지나다니는 개미. 보통의 자들보다 열등한 나는 내가 무엇을 닮았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이리하여 나는 죽고 맙니다. 내가 살아가기에 세상은 지나치게 크고 넓습니다.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숨을 쉬는 법을 배우지 못하였으니 그만 폐가 굳어버립니다. 나는 과히 아름답고 정교한 방을 배정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왜 그러한 방에 소속되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압니다. 왜 스스로 그곳에 있는지, 나를 제외한 전부가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경탄할 만한 자들입니다. 나는 내가 왜 나와 다른 방을 쓰는 자들과 다투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채로 학교로 갑니다. 학교에 가면 나는 나와 다른 방을 쓰는 자들, 이를테면 성적이 낮거나 떠들기를 좋아하는 자들을 무시해야 합니다. 이유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들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깔보고 화내고 하면서, 나에게도 권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마치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도 그들을 따라 버립니다. 학교에서 나오면 나는 또 거리를 걷습니다. 거리를 걷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곤 합니다. 그들은 또 누구랄 것 없이 서로를 헐뜯고 싸우고 손가락질합니다. 다들 그러하니 나도 그렇게 해야 하는 줄은 압니다만, 어리석은 나로서는 조금 더 본질적인 이유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다들 똑똑한 자들입니다.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모든 것을 이해하니까요. 거리를 걷다 보면 집에 도착합니다. 나에게는 집이 가장 어려운 곳입니다. 세상은 그렇게나 시끄러운 곳임에도, 집은 사랑으로 넘칩니다. 하지만 어머니를 비롯한 다른 가족들이 진정 사랑하는 것이 나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머니께서 사랑하시는 것이 남들처럼 똑똑한 척 연기하는 나인지 아니면 그저 어리석은 나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어머니께서 어리석은 나
작성일 2025-04-16 작성자 신현 좋아요 5 댓글수 0 조회수 507상세보기 -
시 복숭아 아이스크림에는 껍질이 들어가지 않는다월장원 선정
이따금 겉이 푸석해진 과일을바닥에 굴리며 말했다비가 오지 않는 동네에 사는 네 모습을 상상한 적이 있다고나츠, 하고 부르면 젖어드는 양말 끝자락과배차 간격이 긴 버스 노선도쏟아버린 슈크림 라떼나건조가 다 된 빨래, 꺼내는 걸 까먹었어!그런 얘기를 할 때면 네가 작게 웃곤 했는데사실 이런 모습을 좋아했을지도 모르겠어채도 높은 인디 음악을 들을 때처럼마음 한 켠이 간질거렸다, 왜 산성비 알러지는 없는 걸까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걷고 싶었던 날들이분명히 있었다 하늘색 분홍색 어떤 색이어도 좋아푸석푸석한 과일도 한 군데 갈아 넣으면 꼭 같은 맛이 났다그게 우리만 알고 있던 사실이 맞지? 다시금 물으면튜브 대신 하드형 아이스크림을 물고 있던 나츠네가 말 대신 다 먹은 나무 막대 끝을 보여준다잘 닦고 잘 말려서 밀봉해갈 것때로는 하나 더, 라는 문구보다 한 입 베어 물은 표면이모든 걸 먼저 말해줄 때가 있다
작성일 2025-04-16 작성자 눈금실린더 좋아요 2 댓글수 0 조회수 787상세보기 -
소설 UB월장원 선정
그는 빠르게 지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쉽게 잠에 드는 사람도 아니었다. 체질이라는 선천적인 비극이 그의 한평생을 덮치고 있었기 때문에, 밤중의 열차 안에서도 그는 피로의 고통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구매한 표는 지나치게 저렴했고, 악바리 운행의 진수를 교시하는 열차는 지나치게 낡아 있었다. 직물 시트는 먼지가 잔뜩 묵은 데다 고릿한 얼룩이 선객을 자처하고 있었다. 좌석의 불결한 관리 수준은 몸을 눕히고픈 충동으로부터 실행력을 앗아갔다. 애초에 그가 택한 일반 객실은 누울 만큼의 공간을 확보하기도 마땅치 않은 크기였다. 오늘 종일 치러야 했던 곤욕을 회상하노라면 그는 이가 갈렸다. 경찰에 연행되는 바람에 타려던 특급 급행열차는 결제까지 마치고도 떠나보내야 했다. 우매한 공권력은 해가 저물도록 그를 잡아 둔 끝에야 멋대로 씌운 혐의를 벗겨 내고 응당한 자유를 되돌려 주었다. 그를 풀어주던 경찰은 그저 한마디를 웅얼거렸다. ‘오해였습니다.’ 그건 분명 사과가 아니었다. 망할 작자는 오히려 아깝다는 기색이었다. 어떻게 되먹은 일처리 정신인지. 그래, 위로금을 지급한다든가 하는 일말의 성의도 당연하다는 양 생략됐다. 온갖 절차를 늘어뜨리고 진행됐던 굼뜬 취조와는 참으로 대비되는 신속한 종결이었다. 한적해진 역에서 그는 부랴부랴 새 열차 편을 알아보아야 했고, 황혼녘의 철도역은 구시대적 승차감을 자랑하는 퇴물 단 하나의 선택지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는 후회 또는 분노하기는커녕 앞서 벌어진 일을 되감을 기력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뻣뻣이 절전된 그는 좌석 등받이에 얌전히 상체를 기대어 뿌연 창문 너머의 역동적인 어둠을 멍하니 주목할 뿐이었다. 얼마 전까지 황폐한 농원을 가로지르던 열차는 언제부터인가 아무런 형체도 분간할 수 없는 풍경을 선사하고 있었다. 경유하는 고장의 영화관에 걸린 개봉작을 확인한다거나 벌판에 듬성듬성 등장하는 나무를 셈하는 유희도 막혀 버렸다. 아쉽게 된 대로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렇게 단조로운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비교적 낮은 온도의 공기가 그의 적막에 유입되었다. 경미한 변화를 감지한 그는 기민하게 시야를 재확보했다. 문이 스륵 열렸고, 누군가 문틈으로 구두코를 디밀었다. 웬 여자가 객실에 성큼 들어와 곧장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갑작스레 출현한 목전의 여자를 찬찬히 훑었다. 생기가 부족한 인상임에도 뚜렷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검은 모발은 부드럽게 굽은 직모였고, 윤기와 탄력을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었다. 흐뭇하게 뻗은 눈매에 담긴 검푸른 눈동자는 짙은 그림자가 진 바다를 연상케 했다. 흰 피부는 비록 심히 창백한 감이 있었으나 장인의 수제 사탕처럼 매끈한 동시에 신선한 윤기가 흘렀다. 야릇한 기품을 갖춘 기묘한 여자였다. 물론 상대를 단숨에 홀리는 매력을 풍긴다 해도 구태여 비좁은 객실에 합석하려는 만행은 참작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긴 흑발의 미녀이기 전에 고상한 태도의 불청객이었다. 게다가 꺼림칙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여자의 명품 코르사주 같은 외관에서 휘몰아치는 독한 소용돌이가 적
작성일 2025-04-01 작성자 지존 좋아요 3 댓글수 0 조회수 497상세보기 -
소설 K월장원 선정
우리가 ‘작업’을 할 때. 피부는 투명하게 마르고 있었고 심장에 귀를 가져다 대면 찌릿거리며 정전기가 옮을 것 같았다. K는 인어. 상체는 로봇이고 하체는 진짜 물고기 꼬리였다. K는 반투명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우리집은 K에게 불법적으로 수조를 제공했으며 필요할 때 배터리를 갈아끼워주웠다. 대신에 때마다 K의 살점을 조금씩 떼어내서 횟감에 섞어 팔았다. 그것을 우리 가족은 ‘작업’이라 불렀다. 비린내. K 앞에선 어떤 비린내도 나지 않았다. 투명해서 기분 나쁜 수산시장 소독약 물 냄새만 주위를 둥둥 떠다녔다. 어떻게 K같은 존재가 우리집에 있는지, 애초에 K같은 존재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게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K를 아는 사람들 중, 그러니까 엄마나 아빠, 이모나 이모의 외동아들 중...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알고 있어도 자신이 알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 비밀을 알고 싶지 않았다. K는 감정이 없는 눈동자로 이층 창문 바깥을 바라보았다. K의 그런 취미 때문은 아니지만 창문에는 썬텐지가 짙게 발려 있었다. 걸어다니고 싶은 건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K가 물 위로 둥둥 떠올랐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며 아빠를 불렀다. 아빠는 횟감을 뜨는 것처럼 K를 물에서 건져내 수건을 깐 바닥에 눕혔다. 엄마가 공구 상자를 가져왔고 녹이 슨 곳을 대충 살펴본 뒤 인공 피부를 가르고 철로 된 흉곽을 열었다. 아빠의 손놀림은 빠르고 효율적이었다. 물기를 닦아냈고, 구석구석 방수 스프레이를 뿌렸다. 우리 가게는 호황이었다. 각종 인터넷 매체도 여러번 타 돈을 많이 벌었다. 나는 K의 꼬리지느러미에 여태껏 발견되지 않았던 종류의 마약 성분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빠가 일련의 행위를 거의 마무리하는 동안 나는 관심 없는 척 철과 살이 맞닿아 있는 이음새를 여러 번 살펴보았다. 심장에서 피가 흐르지 않는데 어떻게 꼬리가 살아있을 수 있는지, 도대체 어떤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있지 너무나도 궁금해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때 허공을 바라보던 K와 눈이 마주쳤다. K가 입을 뻐끔거렸다. 그것은 분명히 말을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뻗뻗하게 굳어버렸다. K의 지능은 당연히 평균적인 로봇의 학습 프로그레밍과 비슷할 것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너무 구형이라 요즘 시장에 나오는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인간형 로봇의 지능은 원래 수준이 높았다. 기업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굳이 돈을 들여 인간 형태를 만들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지능이 높은 로봇은 좋다. 지능이 낮은 로봇도 그 형태에 따라 쓸모가 있다. 하지만 지능이 낮은 인간형 로봇을 누가 원하겠는가. 아니, 그런데 기업에서 양산형으로 만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나? 아무튼 중요한 건 K가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말 말이었다. K가 또다시 눈동자를 굴렸다. 내가 움직이려고 움찔거리는 입으로 시선을 집중할 때 풍덩 소리와 함께 K가 수조로 던져졌다.ㅡ가족 외의 누군가 K를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든 건 지난 여름이었다. 폭염주의보로 인해 아무도 거리로 나
작성일 2025-04-01 작성자 방백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814상세보기 -
시 일방통행월장원 선정
산 골목에서 물을 따라가는 물고기는 만났지만산 골목에서 몸을 따라가는 물고기는 보지 못했다산 아래 산을 먹은 학교에 다니는 너도산 아래 산을 먹은 학교를 뱉은 나도산 골목을 몸이 걸어 다니지 못했다학교 주변 건물은 시속이 낮다어린이 보호 구역 어린이 틈에서 몸이 자란 나는어린이라 불릴 수 없지만 몸이 산에 눌어붙어서물고기의 흐름으로속도 낮은 골목을 걸어야 했다골목에 있는 물고기뻗어나가는 나무학교 주변 낮은 어린이들작은 속도를 가진 건물 사이나도 그렇게 작은 얼굴을뻗어가며 학교 품에 들어갔었지산을 먹은 학교에는 물고기 그림이 많았다나도 흘러가는 물고기 중 졸업사진에 그림이 걸린 그런 사람이고뻗어나가는 나무 주변에서 깊어지는 몸 낮은 건물 중 하나고나는 어린이 안에서 자라고 작아졌다학교에는 자리가 있었고몸은 그 자리에 앉았다내 옆 짝꿍인 너도 산에서 내려와서몸을 낮게 하는 연습하고 있다지낮은 건물이 많은 골목에서몸이 흐릿하고 페인트가 좁아지는 너와 나는옆에서 똑같이 흘러가어린이를 보호하자는 학교 주변 골목을산속에 묻어 놓았다뻗어나가는 골목의 나무는 산속에서 왔고우리가 다니고 다녔던 학교는 산을 먹었고학교 운동장에서 물고기의 작은 물방울을 들으며학교 속 그림들과 골목을 묻는 방법을 이야기했었다낡은 물방울작은 눈방울작년 웃음운동장 모래에 떨어졌다선생님은 그림과 떠드는 나와 너를몸을 자라게 뻗게 했다자라는 것은 몸이 커지는 일인가?너는 뻗은 나무에 걸린 많은 물고기 그림을 보고나는 굳은 나무에 열린 낮은 건물 속 물방울을 보고졸업사진 속 물고기들은 물방울만 남았다몸을 잃은 물 속을 걸어다니는 물만 남았다짝이었던 나와 너는 돌아가는 것을 팠고골목을 묻는 법을 낮은 속도로 머리에 놓았다학교 종이 울린다어린이들이 골목에서 과속하며 뛰어나온다물고기의 거품이 하나씩 터져갔고작은 건물에는 물고기 웃음이 낡아거리에 그림은 뻗은 가지치기가 됬다나는 거리를 돌아서 가지가 빠진 나무를 봤고운동장의 모래를 모래 속 흙에 찼다너는 물고기의 몸을 버렸다나는 산으로 돌아갔고페인트가 빠지며 오염되었다건물에서 흘러가는 나에게 딱지가 날라왔다돌아가는 것도 흘러가는 것도
작성일 2025-03-31 작성자 송희찬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664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