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진의 <동경>을 읽고
- 작성자 담
- 작성일 2026-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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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앉아 동경의 마음에 대해 한참을 생각한다. 숭고하고 부드럽게 느껴지는 단어. 완전한 흰빛처럼, 숱한 사랑의 원형 같은 단어. 하지만 이내 내가 품은 동경의 마음들을 짚어내고는 생각을 바꾼다. 깨끗한 동경이라는 것은 실재하기 힘들다는 사실. 사랑에는 언제나 미움이 있고 성취에는 언제나 간과가 있으며, 증오에는 언제나 미약한 슬픔이 있다. 하나의 마음이 단일한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에 가까운지 나는 문득 깨닫는다.
이 소설 속 인물들 역시 깨끗하고 순수한 동경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그렇게 단순한 이름으로 묶인 우정이 아니다. 이들은 얽히고 갈라진다. 우리가 소중한 사람을 대할 때 자주 느끼는 마음처럼, 가까워지면 무심해지고 멀어지면 애틋해진다. 그럼에도 아름과 민아, 해든이 얇지만 질긴 실로 안온한 삼각형을 만드는 것은 때때로 찾아오는 무심함을 자꾸 되돌아보려는 태도에 있다. 아름은 천성으로, 민아와 해든은 사랑으로 그렇게 한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어른의 우정에 대해 상상했다. 의무적인 공간에서 의무적으로 붙어지내는 이들과 당연히 친구가 되는 삶. 하는 수없이 어설픈 관계가 친구라는 단어에 묶여 특별한 것처럼 포장되기도 하고, 그보다 훨씬 깊은 정도로 아끼고야 말게 되는 이들이 동일한 층위에 놓여 평범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른의 우정은.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진 사람, 비슷한 것을 더 넓게 바라보는 사람, 유사한 상흔을 애써 덮고 있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알아봄에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의 반짝임, 시야의 사려깊음, 괴로움을 견디는 일의 인내에 대한 동경이 있다.
나 역시도 친구가 되지 못했지만 질투하고 동경하는 사람이 있다. 혹은 멀고도 가까운 친구이기에 자조하고 동경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이 소설의 세 인물이 가진 삶의 일부와 태도의 일부를 조금씩 다 닮은 사람. 나는 아름이기도 민아이기도 해든이기도 하다.
<아름의 이야기>
동경의 마음은 복합적이라는 점에서 사람을 향한 것과 꿈을 향한 것이 닮았다. 동경은 때떄로 없던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나를 독려하기도, 있던 용기도 사라지도록 나를 주눅들게 하기도 한다. 아름은 후자를 거쳐 전자에 도달한다.
아름이 민아와 해든을 동경한 방식은, 리페인팅과 사진이다. 자꾸 그쪽으로 발을 내딛고 싶어지는 일을 진심과 능숙함으로 해내는 민아와 해든을 나름의 방식으로 동경한다. 아름은 싫은 말을 쉽게 하지 못하는 사람, 무심코 들은 한 마디에 마음을 다 해 괴로워하고 매번 다시 태어나는 사람이다. 이런 아름에게 민아와 해든은 소중한 친구인 동시에 인정 받아야 하는, 인정 받고 싶은 동료이기도 하다. 꿈을 향한 열망과 그 둘을 향한 사랑이 우둘투둘하게 결합되어 있는 형태인 것이다.
아나는 아름이 그 굴곡 위를 건너며 균형을 잡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미아에 대한 신의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고 사진을 하러 가는 선택을 하기 어려웠던 아름이 결정을 내린 후, 한강공원에서 먼 앵글로 민아를 찍어주는 장면에서 특히 확실한 감동을 느꼈다. 민아의 몸선을 따라 어렴풋하게 오후의 햇빛이 테두리를 만든다. 아름의 선택과 민아가 그 자체로 하나가 되는 것만 같던 순간. 그 때 나는 서로는 서로에게 때때로 서운할 것이고, 몰이해에 갇혀 힘들기도 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이기 때문에 영영 친구일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후 아름이 개인전을 하기로 하고 해든과 함께 자신의 지난 사진을 하나하나 보던 날 밤, 해든이 민아의 사진을 보고 멈추는 것은 이 장면과 이어진다. 셋이라는 불완전해보이는 숫자가 실은 가장 안전하고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름과 민아가 공유한 오후의 햇볕을 아름의 사진을 통해 해든이 함께 느끼며, 그들 사이의 균형이 조금씩 평형을 이루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계절을 건너 다시 봄이 찾아오고 아름은 자신의 자리가 민아와 해든 사이의 그 여백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깨닫는다. 그렇게 봄이 오기까지 민아는 아팠고, 해든은 사진집을 냈고, 아름은 사진을 시작했다. 셋의 개별적인 삶이 어떤 방식으로 진동하든 그들은 각자의 꼭짓점을 지키며 함께할 것. 나는 아름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읽으며 동경의 마음을 여러번 다시 정의했다. 개끗한 존경, 인정 받고 싶은 욕구, 불순물 섞인 서운함 같은 것. 그리고 마침내 꿈이다. 두 사람과 함께 아름은 점점 더 자신이 되었다. 아름의 이야기를 통해서는 동경과 우정의 아름다운 점은 꿈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꿈을 선택하도록 하는 넓은 품이라는 것을 알았다.
<민아와 해든의 이야기>
둘에게는 닮은 점이 있다. 아름이 종종 느낀 것처럼, 아름과는 하지 않는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함게 외곽으로 전시를 보러 가기도 했다는 것. 그러니까 이 둘의 마음에는 엄마와 아빠를 향한 부채감과 상처, 그리고 사랑이 있다. 아주 크게, 삶의 전반에 걸쳐서.
이들은 각자의 모부에게 밀착적인 사랑과 증오를 동시에 느낀다. 이 소설이 더 나의 이야기처럼 다가왔던 것은 이런 솔직함 때문이다. 내가 죽을까봐 두려워하느라 나를 자꾸 붙잡아두는 엄마, 나의 소망에 불을 붙여놓고 그 점화의 순간을 부정하는 아빠가 민아와 해든에게는 있다. 하지만 민아는 자신보다 엄마를 더 걱정하는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고 해든은 어린시절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는 얼굴로 쳐다보던 아빠를 회상하는 마음으로 여전히 애증한다.
이것은 동경과 닮은 구석이 있다. 물론 더 지난하고 더 진득한 마음이다. 산뜻함이라고는 없는 이들의 마음에 눌러붙은 미안함과 사랑이 있다. 위하고 싶지 않아서 긁어내보아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 까맣게 되어버린 놀이터 바닥의 껌처럼.
나에게도 이런 마음이 있다. 자신의 삶보다 나의 삶을 더 기대하는 엄마를 향한 한심함이, 꿈을 말할 때 얼굴이 어두워지는 아빠에 대한 실망이 언제나 있다. 나는 집착적으로 모부와 싸우는 중학교 시절을 보냈다.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큰 상처를 주고 받았고, 동시에 너무 깊게 사랑했다. 상처가 나서 살이 벌어진 그만큼 미움과 사랑이 공통으로 차올랐다. 그런 나는 민아와 해든의 이야기를 읽으며 스스로를 위무하는 과정을 보냈다. 성기게 짜여진 삶의 형태가 민아와 해든을 말하는 문장으로 단단한 매듭이 되는 기분. 나는 내가 알지 못하고 말하지 못했던 마음을 문장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수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이 동경은 스스로의 지난 날에게 건네는 매끈한 울음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차치해두고, 이 책에 관해 단지 느끼고 싶었다. 우정과 사랑, 꿈과 열망. 낙담과 좌절. 그러면서도 최선을 다해 담대해지는 아름, 민아, 해든. 이들의 삶을 오래오래 음 미해본다. 봄이면 먹게 된다는 신 사탕의 맛, 한겨울 삿포로의 파르페, 여름의 천변과 가을의 바람이 천천히 내 안에 쌓인다. 그리고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먼 존재들을 떠올린다. 나에게 없는 것이 그들에게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어서 자꾸만 내 마음이 기우는 사람들. 괜히 친근하게 부르게 되는 배우들과 작가들.
나는 책을 덮고 속엣말로 그 이름들을 가만히 여러번 되뇌인다. 아름처럼, 내가 하고 싶어서 자꾸 힘들어지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떠올리기만 해도 생동하는 몸짓이 어른거린다. 이름을 되뇌이니 어쩐지 내가 곧 그들과 어깨를 맞댈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그런 용기를 얻었다. 이 책은 사랑과 용기를 담아 건네는 한 편의 긴 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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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백
- 2026-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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