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와 꿈의 기로에서 -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_우스운 전쟁들>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5-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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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뤽 고다르의 유작 2편 중 처음으로 공개되었던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_우스운 전쟁들>은 다소 급진적이고 정치적이었던 고다르의 ‘영화 행위(Filming)’를 종결짓는 마지막 보루다. 무엇보다, 감동적이다.
고다르는 <이미지 북>을 만들고 나서 또 하나의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다. 제목은 미정의 장편이었지만 프랑스의 소설가 플리스니에의 소설 <위조여권>에 수록된 단편 “샤를로테”를 각색한 영화였다. 그러나 고다르는 늙었고, 내용은 다소 어려웠으며, 아무도 영화를 위해 투자하지 않았다. 영화는 여러번 제작이 무산되었다. 마지막까지 고다르의 곁을 지켰던 그의 조수 파브리스 아가리노에 의하면, 그즈음 고다르는 자신 스스로 더 이상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고다르는 영화 제작하기를 관뒀다. 대신 그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모아둔 여러 이미지와 텍스트 자료들을 조합해두었던 자료집을 재구성해서 전자문서로 변환했고, 이 후 그 곳에 나레이션을 입히고 간단한 편집작업을 거쳤다. 그러자 그 자료들은 고다르가 원하던 영화의 형태로 얼추 뼈대를 맞추게 되었던 것이다. 그게 바로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이다.
이건 고다르가 원했던 완전한 형태의 영화가 아니라, 그 영화를 만들기 위한 일종의 자료 콜라주를 영화화시킨 것이므로 피상적인 ‘예고편’ 정도에 불과했다. 제목이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인 까닭은 그래서이다. 이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고다르는 존재하지 않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애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자신의 초상을 그리듯, 영화의 도입부에서 “어두운 방에서 검은 고양이를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특히 그것이 없더라면 더욱이 어렵다.(It’s hard to find a black cat in a dark room, especially if it’s not there.)” 라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며 고다르는 본작의 핵심을 알려주며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이 후 다음과 같은 텍스트와 이미지가 등장한다.
(영화 이미지)
A. ‘우리들의 전쟁은 멀리서 다가오는 하나의 이미지와 같다. 그곳에는 두개의 이미지가 나란히 놓여있다. 그녀와 나. 그녀 다음에 내가 있지만, 난 그녀를 만난 적 없다. 그저 인지할 뿐이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Our war, It's like...an image that comes from far away. There are two of them, side by side. next to her is me. I’ve never seen her before.)’
고다르는 위 문장을 통해 이미지들에게 ‘그녀와 나’라는 육체를 부여한다. 이미지들은 비로소 탈-이미지화되어서, 더 이상 이미지가 아니게되고, 그 자체로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된다. 고다르는 이미지에 대한 사유를 시작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나간다.
그다음 영화는 여러 이미지(영혼)들의 배열과 조합을 보여주고, 나레이션으로 전쟁에 대한 참상을 묘사한다. 쇼스타코비치의 현악 4중주 8번의 음악이 등장하고,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와 샹탈 아커만의 사진이 보인다. 고다르가 2004년에 연출한 <아워 뮤직>의 장면들이 지나간다. 고다르는 나레이션으로 이 영화가 트로츠키주의를 다룬 플레스니어의 소설 <위조 여권>의 영화화라고 고백하고, 영화는 한나 아렌트에 대한 이야기로 끝난다. 약 15분 동안 이런식으로 이미지와 나레이션이 우발적이고 연쇄적으로 스크린에 영사된다.
고다르의 여느 영화가 그렇듯 <결코 존재 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 역시 난해한 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쇼트를 중시하던 고다르의 눈으로 영화를 보게 되면 어느 정도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이 영화는 쇼트(들)와 나레이션으로 이루어져있지만, 쇼트와 나레이션을 조합하는 과정에서 다소 실험적인 시도들을 행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고다르가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해 서술하는 장면일 것이다. 그는 나레이션으로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해 ‘그들은 텍스트가 아닌 초상화를 그릴 줄 안다’라고 말하지만, 영화는 그들과 전혀 관련없는 사진들과 세잔의 <붉은 조끼를 입은 소년>을 보여주는 둥, 여러번 언행(사운드)과 언동(스크린)이 불일치하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고다르는 영화 전반에 걸쳐서 나레이션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묘사하거나 정치적인 사상(트로츠키주의와 사회주의, 한나 아렌트)을 설명하지만, 정작 영화가 보여주는 이미지들은 그런 정치적인 것들과는 무관한 자료들만을 현시한다. 그 자료들은 대게 <붉은 조끼를 입은 소년>과같은 회화이거나, <아워 뮤직>같은 영화 클립, 또는 샹탈 아커만과 파졸리니의 얼굴사진들이다. 고다르의 나레이션이 ‘정치'을 들려준다면, 이미지는 ‘예술'을 보여준다.
정리해보자면, 타인과의 관계를 전쟁을 통해 묘사하는 방식은 사운드를 통해 이루어지고, 예술은 이미지를 통해 보여지고 있다. 즉 사운드와 이미지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다르에게 육체를 부여받은 이미지들은 불완전하고, 사운드 역시 어긋나있다. 이미지와 사운드의 부조리. 이 지점에서 영화 속 인상적인 대사를 다시 한번 끌어와보자.
“우리들의 전쟁은 멀리서 다가오는 하나의 이미지와 같다. 그곳에는 두개의 이미지가 나란히 놓여있다. 그녀와 나. 그녀 옆에는 내가 있지만, 난 그녀를 만난 적 없다. 그저 인지할 뿐이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여기에서 전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녀(이미지)와 나(사운드)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가 서로 치열하게 맞붙는 행위로서의 전쟁인 동시에, 예술(이미지)과 사회성(사운드)의 전쟁이기도 하다.
이미지와 사운드는 불일치하지만, 영화는 이미지와 사운드를 결합시켜 놓은 채로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서로 다른 세계이지만, 동시에 서로의 육체를 제공하는, 공존하고있는 세계이기도 하다.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은 그 두 물질들(사운드와 이미지)의 전쟁 사이에서 일어난 참상이 일구어낸 ‘영화(하나의 이미지)'라는 하나의 통일된 세계이다. 사운드와 이미지로 이루어져있는 영화는 그 전쟁과 분단이 화합을 이루는 공간이다. 이 영화가 고다르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상기해본다면, 고다르는 화합이라는 영화의 본질 속에서, 알제리 전쟁부터(<기관총 부대>, <작은 병정>)부터 베트남 전쟁(<미치광이 피에로>, <주말>)까지 다루던 자신의 정치-시네마에 방점을 찍음과 동시에, 더 나아가 예술을 통해 평화를 말하고자 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나면 막상 그 평화의 방식을 긍정할 수만은 없다. 이것은 고다르가 진정으로 만들고자 했던 영화의 형식이 아니라, 그저 만들고자 했던 영화의 예고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평화는 아직 완벽하게 완성되지 않았다. 고다르가 죽은 이상 아마 결코 완벽하게 완성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이 고다르를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토록 감동스럽게 다가오는 건, 고다르가 우리 곁을 떠났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까지 그 스스로로 영화를 만드려고 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 영화가 제작단계에서 여러번 무산되고, 결국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채로 그의 죽음 이 후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그곳에는 자신이 영화를 만들지 못할지라도, 어떻게 해서든 만드려고 했던 어느 노장의 패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여기에는 어떤 슬픔이나 비애감보다도, 아주 희미한, 그러나 강경하고 희망적인 의지가 머물고 있다. 그 의지는 끝나지 않았다. 이 영화를 기억하는 누군가는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 것 이다. 적어도 이 영화를 우리가 기억하는 한,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무엇보다 단단한 연대를 이루고, 화합하도록 하는 새로운 장을 마련해주고야 말 것이다. 그 새로운 화합의 장소에서, 존재하지 않던 고양이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탄생하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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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근대를 살아간다는 일은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세계에 발맞춰 유동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과 같다. 당장만 보아도 불과 2년 전(2023년) 출시되어 큰 반항을 일으켰던 인공지능 서비스 Chat GPT가 어느새 우리의 일상 - 업무, 학업, 유흥 등 - 에 천착해있다는 사실은 시대적 감각을 가늠케 한다. 뿐만 아니라 정식적으로 보급된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은 스마트폰 역시 우리가 일상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의식주, 의사소통, 유흥욕구 등)을 편리적으로 소비/사용 하도록 돕고, 보다 나아가 개인정보를 통해 그 사람의 실존적인 문제를 증명하며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필수품처럼 보편화되어 세계적인 문화가 되었다는 사실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급진적으로 기술과 문화 발전의 변화를 포용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상은 급변하고, 사람들은 정신없이 세계를 쫓는다. 발 빠르게 기술과 문화를 수용하는 이 시대의 유동성만큼, 내외부에서 끊임없이 사고하고 운동하는 인간의 유동성은 그 시대의 변화들을 가능케 했다. 그렇기에 (칼 마르크스의 말을 빌려보자면), 이 시대에 변화하지 않는 것, 급변하는 근대에서 운동하지 않는 상태로 존재하는 “모든 고체는 대기 중으로 사라진다”. 그곳에는 어느날 섬광처럼 번쩍 등장해서 사라지는 일시적이고 유한한 유행과 기술들만이 존재할 뿐이고, 모든 부동한 고체들은 유동적인 세계의 산성에 의해 융해된다.망각과 부활 - 경복궁 월대와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을 중심으로이런 세상에서 과거와 역사를 되살펴보는 일은 더욱 중요하고 조심스러운 일이 되고 말았는데, 그것은 곧 유동적인 세계에서 자신만의 역사를 지닌 채 특정 장소에서 미동 없이 머물고 있는 부동(不動)의 고체(또는 정물)들을 살펴보는 것에 다름 아니게 되었다. 그렇기에 오늘날 유동하는 세계 속에서 특정 장소에 고정되어 있는 ‘고체’들은 단지 과거의 잔재가 아니라, 잊고 있던 진실을 환기시키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근래에 재건된 경복궁의 월대는 그러한 사례의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일 것이다. 월대는 예로부터 왕이 걷는 도보라는 의미로 여겨져 왔다. 그것은 단지 오랜 기간을 버텨온 역사적 건축물 - 경복궁 월대가 처음으로 논의된 것은 14세기의 일이고, 조성된건 18세기 후반의 일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4세기를 거쳐서 완성되었다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 일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왕이 행차해왔던 길이라는 점에서 조선왕조의 상징과도 같은 건축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일제가 ‘철도'를 건설하겠다는 이유로 1924년 경복궁 월대를 파괴했을 때, 그곳에는 ‘전철’이라는 조선의 근대화의 상징이 떠오름과 동시에, 조선의 역사/권위적 상징과도 같은 왕의 길을 부숴버리므로서 조선의 역사를 부정하고 민족의식을 뿌리 뽑으려던 악의적인 의도가 암암리에 공존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국가의 지도자의 실권상실(순종의 죽음, 1926년)과, 민족문화역사의 폄훼와 왜곡(문화통치 1920년)으로 직결되어 조선의 국성을 뒤흔드는데 선험적으로 일조했다. 그러므로 일제 식민지배 치하에 파괴되어 버린 경복궁의
- 화자
- 2025-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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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9
고다르의 죽음 : 늦었지만, 이른 늦-초가을의 추도문그러니깐, 2022년 어느 늦여름이었다. 늦여름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도보에 떨어진 낙엽이 가끔씩 눈에 들고는 하는 가을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었으므로 나로서는 이 시기를 무어라 단정짓기 어려운 것이었다. 수요일이었고, 몸이 아파 학교를 조퇴한 상태에서 여느날과 다름없이 영화 한 편과(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 영화는 아마 테렌스 멜릭의 였을거다) 도서 한 권을 곁에 두고 하루를 여유롭게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당신의 부고소식을 들었다. “누벨바그의 거장, 조력자살로 생을 마감하다”기사가 떴다. 당신의 이름은 고다르. 어디선가 스쳐가듯 들어본 적 있었으나, 당신은 내게 어색한 사람이었고, 난 어정쩡 그날 오후를 보냈던 것 같다. 그로부터 조금의 시간이 지나, 2023년의 겨울 끝자락 무렵, 당신의 영화들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본 세 편의 영화. 와 , 그리고 . 당시에는 그냥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무슨 이런 영화가 다 있지, 싶은 정도. 그랬던 나는, 어느새 장 피에르 멜빌을 존경하던 당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새뮤얼 퓰러와 프리츠 랑을 사랑하던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 당신이 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풀어놓기에는 너무 늦은걸까. 당신은 이 세상에 없다. 이 글이 쓰여지기 불과 얼마 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당신의 압도적인 지력으로 세계 영화사와 시네마의 의미를 탐구하는 걸작 과 를 다시 보았다. 영화를 보면 볼수록 당신에 대한 나의 마음은 싹 트는데, 내가 보지 못한 당신의 영화는 이제 과 단 두 편 뿐이다. 이제 그 마음마저 끝에 다다르고 있는 것일까. 끝내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나는 그 두 편 보기를 계속 미루고, 당신의 작품들을 여러번 돌려보고 있다.그러던 중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당신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두 편의 영화를 상영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목은 . 가 극장에서 상영되는 건 이번이 두번째인 것으로 알고 있다. 첫번 째는 칸 영화제였다. 그곳에서 를 상영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프랑스에 가려고 애썼다. 물론 가지는 못했다. 그렇게 상영일이 지났을 때, 나는 좌절했다. 미치도록 보고 싶은 영화가 바로 당신의 것이었다. 이건 내가 시네필로서 당신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다. 그리고 반 년의 시간이 흘러 그 영화가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이번이 아니면 당신의 영화를 볼 기회는 정말 없을지도 모른다. 방학시기와 여행시기가 맞물려 운좋게도 토론토국제영화제에 갈 수 있었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건, 당신의 유작이 상영되었던 상영일이 당신의 기일이었다는 것이다. 선선한 저녁이었고, 내가 당신의 부고를 들었던 날이기도 했다. 지금이 2024년이라는 것만 의식하지 않게 되어버린다면, 나는 마치 당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경계에 우두커니 서있게 되었다. 알 수 없는 감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당신은 이 세상에 없지만, 그 누구보다 이 세상에서 강
- 화자
- 2025-03-26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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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화자님 안녕하세요. 장 뤽 고다르의 영화에 대한 글 잘 보았습니다. 이 글이 수정되기 전에는 다른 영화에 대한 글을 작성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 글도 언젠가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글을 읽다보니 불현듯 2006년 가을 어느 날엔가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아워 뮤직>이라는 이름으로 개봉한 고다르의 영화를 본 기억이 나네요. 고다르의 영화를 극장에서, 그것도 개봉시기에 맞춰서 본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이미지들과 몽타주를 통해 전쟁과 우리 세계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전하는 영화로 기억하는데, 사실 자세한 이야기는 거의 떠오르지 않습니다. 사색을 불러일으킬만한 대화들이 이어지고 장면들이 어지럽게 움직인 것들에 대한 경험만 남아있어요. 이렇게 회상을 하다보니 내러티브보다도 이러한 운동성 자체가 어쩌면 고다르가 의도한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 역시도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아워 뮤직>과 닿아 있는 지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콜라주와 몽타주 역시 그 운동성과 이미지의 표현에서 많은 점이 닮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 의미에서 자료를 모으고 배열하는 과정 역시 고다르에게는 화자님의 글처럼 영화를 만드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차이점이라면 하나는 시간과 운동의 이미지가 펼쳐지지만, 다른 하나는 (일단은) 정지해 있는 이미지의 모음이라는 점이겠죠. 물론 ‘정지해 있는’이라 하였지만, 가령 그림이나 사진과 같은 스틸 이미지를 반드시 정지한 것으로 볼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시간이란 완전히 정지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사진으로 촬영된 것 역시 일정한 시간의 흐름이 겹쳐 있는 상태로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림도 마찬가지고요. 때문에 인상주의와 같은 기법들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겠죠. 그런 점에서 이미지를 선별하고 배열하는 일이 어떻게 다시 우리에게 특정한 운동성으로 펼쳐지고 의미를 만들어가게 되는지에 대한 탐색을 이어가다보면 예술과 삶이 겹치는 독특한 영역에 이르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흐름에서 질문이 있어요. 화자님은 이 글에서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이 감동스럽게 다가오는 까닭으로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까지 그 스스로로 영화를 만들려고 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하고 물었는데요. 그러한 물음을 던지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한편, ‘결코 존재하지 않을’이라는 표현에 담긴 의미들을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존재하지 않을’이라는 말은 미래를 가정하는 말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다가오는 것으로 있는 그 무엇을 가리키는 말처럼도 들리죠. 이미 완성된 것은 그 순간 과거의 것이 되어버리지만, 미완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다가올 것으로 머무른다는 점에서 어떤 약속처럼 다가오기도 하죠. 벤야민이 ‘메시아’라는 것을 논하면서 이야기했던 그러한 시간성도 떠오르게 하고요. 항상 건강한 글쓰기 생활 이어가기를 바랍니다.
'황홀경의 데스나'라는 이름으로는 어떠한 영화인지 찾을 수 없네요. 혹시 1964년에 나온 영어제목이 "The Enchanted Desna"인 영화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