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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르(론): 고다르와의 대화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5-03-26
  • 조회수 1,123

고다르의 죽음 :  늦었지만,  이른 늦-초가을의 추도문

그러니깐, 2022년 어느 늦여름이었다. 늦여름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도보에 떨어진 낙엽이 가끔씩 눈에 들고는 하는 가을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었으므로 나로서는 이 시기를 무어라 단정짓기 어려운 것이었다. 수요일이었고, 몸이 아파 학교를 조퇴한 상태에서 여느날과 다름없이 영화 한 편과(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 영화는 아마 테렌스 멜릭의 <트리 오브 라이프>였을거다) 도서 한 권을 곁에 두고 하루를 여유롭게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당신의 부고소식을 들었다. 

“누벨바그의 거장, 조력자살로 생을 마감하다”

기사가 떴다. 당신의 이름은 고다르. 어디선가 스쳐가듯 들어본 적 있었으나, 당신은 내게 어색한 사람이었고, 난 어정쩡 그날 오후를 보냈던 것 같다. 

그로부터 조금의 시간이 지나, 2023년의 겨울 끝자락 무렵, 당신의 영화들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본 세 편의 영화. <네 멋대로 해라>와 <미치광이 피에로>, 그리고 <욕망>. 당시에는 그냥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무슨 이런 영화가 다 있지, 싶은 정도. 그랬던 나는, 어느새 장 피에르 멜빌을 존경하던 당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새뮤얼 퓰러와 프리츠 랑을 사랑하던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 당신이 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풀어놓기에는 너무 늦은걸까. 당신은 이 세상에 없다. 


이 글이 쓰여지기 불과 얼마 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당신의 압도적인 지력으로 세계 영화사와 시네마의 의미를 탐구하는 걸작 <영화사(들)>과 <포에버 모차르트>를 다시 보았다. 영화를 보면 볼수록 당신에 대한 나의 마음은 싹 트는데, 내가 보지 못한 당신의 영화는 이제 <이탈리아에서의 투쟁>과 <넘버 투> 단 두 편 뿐이다. 이제 그 마음마저 끝에 다다르고 있는 것일까. 끝내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나는 그 두 편 보기를 계속 미루고,  당신의 작품들을 여러번 돌려보고 있다.

그러던 중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당신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두 편의 영화를 상영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목은 <시나리오>. <시나리오>가 극장에서 상영되는 건 이번이 두번째인 것으로 알고 있다. 첫번 째는 칸 영화제였다. 그곳에서 <시나리오>를 상영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프랑스에 가려고 애썼다. 물론 가지는 못했다. 그렇게 <시나리오> 상영일이 지났을 때, 나는 좌절했다. 미치도록 보고 싶은 영화가 바로 당신의 것이었다. 이건 내가 시네필로서 당신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다. 

그리고 반 년의 시간이 흘러 그 영화가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이번이 아니면 당신의 영화를 볼 기회는 정말 없을지도 모른다. 방학시기와 여행시기가 맞물려 운좋게도 토론토국제영화제에 갈 수 있었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건, 당신의 유작이 상영되었던 상영일이 당신의 기일이었다는 것이다. 선선한 저녁이었고, 내가 당신의 부고를 들었던 날이기도 했다. 지금이 2024년이라는 것만 의식하지 않게 되어버린다면, 나는 마치 당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경계에 우두커니 서있게 되었다. 알 수 없는 감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당신은 이 세상에 없지만, 그 누구보다 이 세상에서 강렬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세상을 떠난지 어엇  2년의 시간이 더 흐른 가을의 중심에서야 당신에 대해 말해보려한다. 이번이 아니면 당신에 대해 말할 기회는 없을지도 모른다. 정말 마지막이 될 것만 같아서, 모든 것을 토해내는 심정으로 당신에 대해서 말하고 말겠다. 그것도 매우 기쁜 마음으로. 

당신의 인생은 끝났지만, 당신의 영화는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여전히 나의 머릿 속에서 영사되고 있다. 

어쩌면 이 추도문은 너무 늦게 도착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당신의 유작이 대중들에게 공개되지 않은 지금, 이 추도문은 인류에게 너무 이르게 도착한 것일 수도 있다.  


 고다르의 삶

1.고다르에게는 두 편의 유작이 있다. 그 중 <결코 존재하지 않는 영화의 예고편>(이하 ‘결코…>)은, 고다르의 첫번째 유작에 해당한다. <결코 존재 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이 세상에 처음으로 공개된건 2023년 여름, 칸 영화제로, 고다르 사후 처음으로 공개된 그의 유작이었다. 

이와 같은 고다르의 후기 '홈 무비' 형식의 영화론에는 많은 부정적인 시선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시로, 페드루 코스타는 고다르의 만년 양식이 ‘영화 전체보다는 쇼트의 아름다움에 치중되었다'라고 단평한 적있는데, 이미지들의 콜라주로 이루어져있던 고다르의 영화 속 그 이미지들은 ‘이미지의 연쇄로 이루어진 영화’ 형식 속에서 쇼트로 치환될 운명을 지녔기 때문에 그의 영화가 쇼트에 치중되었다는 코스타의 지적은 어느정도 합당하다. 그러나 이러한 지점이 고다르의 영화를 부정적으로 만드는 요인이라고 단정짓는 것에는 어느정도 무리가 있다. 그건 고다르가 생각하는 쇼트에 대한 사유가 중요한데, 쇼트와 고다르의 관계를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그의 영화인생에 대해 조금 더 세밀히 살펴보아야한다. 우리는 우선적으로 이 거장이 남긴 두 편의 유작에 대해 이야기 하기 앞서, 그가 80년이란 영화인생 동안 쌓아올린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과 영화론을 이해해볼 필요가 있다. 


고다르 - 쇼트와 인생

  • 2.흔히 알려졌다시피, 고다르는 자신의 첫 장편영화 <네 멋대로 해라>를 통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 전, 프랑스의 영화 전문 예술지 ‘카예 뒤 시네마' 소속의 비평가로 활동한 적이 있다. 그 시기 고다르가 기고한 비평글들은, 그의 비평 선집 <고다르 온 고다르>를 두고 조너선 로젠붐이 말던 것처럼 때로는 비평의 예의를 저버리거나 익명의 필자가 되어 작품을 마구 비난하는 글들로, 영화 감독 시절 붙여졌던 ‘이단아’라는 호칭이 널리 퍼지기 이전부터 비평에서 이단적임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비평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몇몇 글들은 대상 작품의 시퀀스를 쇼트하나하나를로 전부 해체하고 설명하는, 쇼트에 대한 변태적인 집착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특기할만한 건, 고다르가 1948년 카예 뒤 시네마에 기고한 <고전 형식의 설명과 옹호Defence and Illustration of Classical Construction>라는 글이다.

고다르는 글의 일부 전문에서 쇼트와 그것을 이루는 몽타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있다.


A. (영화의 예술성은) 매 순간 사물을 무척 새롭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너무 새롭게 바라보는 바람에 그 시선은 그 사물에게 간청하기보다 그것을 꿰뚫어 보고, 추상이 잠복하면서 기다리는 무언가를 그 시선 안에 포착한다[그 사물이 추상화될 수 있는 잠재성을 시선으로 파악하여 그것을 추상화한다].

B. <게임의 규칙>의 감독에게서 예시 하나를 빌려서 인용하고자 한다. 르누아르는 인상파 거장들보다 앙리 다비드와 푸생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러한 그의 미장센은 맥락에서 분리되는 일 없이도 세부 요소를 드러내는, 다비드와 푸생의 것과 똑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다. 만약 르누아르가 <마담 보바리>에서 딥포커스 스타일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자연이 그 효과들 사이의 관계를 은폐하는 미묘한 방식을 모방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사건을 준비한다면, 그것은 사건들을 더 잘 연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감정이 만들어내는 전염보다 감정의 영향에 더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C. 이것(몽타주)이 영화 변증법의 본질이다. 사람은 그저 생명을 지속하기보다 삶을 살아야 한다. 더 오래 살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죽이는 것은 무의미하다.


위 글을 문단별로 과도하리만치 맥락화 시켜보자면, 쇼트야말로 창작가의 윤리적인 시선을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결정체이고, 그 시선들을 조합하는 것(몽타주)이 영화의 변증법이라는 것이다. 고다르는 이 시선을 설명하는 지점에서 매우 인상적인 말을 한다.

‘사람은 그저 생명을 지속하기보다 삶을 살아야 한다. 더 오래 살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죽이는 것은 무의미하다.’

여기에서 지속되는 생명이란, 시선(쇼트)을 지속시켰던 롱 테이크일 것이고,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은, 시선(쇼트)을 나누고 배합하는 몽타주로서의 행위를 뜻한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 롱테이크가 아닌 몽타주를 영화의 미덕으로 생각하는 고다르의 영화 태도(또는 철학)를 확인해볼 수 있다. 


3. 한편 조너선 로젠붐은 <고전…>을 두고 ‘안드레 바쟁의 반몽타주 이론에 대한 훌륭한 반박'이라고 말한 적 있는데, 그것은 고다르와 바쟁의 차이점을 대조시킬 여지를 마련한다. 요컨데 바쟁은 고다르와는 정반대로 '지속되는 생명(롱테이크)'에 매혹당했다. 비토리오 데 시카의 영화 <움베르토 D>에 대한 바쟁의 글은 롱테이크가 지니고 있는 영화의 미학에 매혹되었던 바쟁의 태도를 보여준다.


이 영화(<움베르토D>)에는 젊은 하녀가 아침에 일어나는, 매우 위대한 시퀀스가 있다. 거기서 카메라는 아직 졸린 눈을 비비면서 부엌안을 서성거리면서 개수통 에 들어가 있는 개미를 빠져 죽게 하고 커피를 끓이고 하는 것과 같은 세세한 아침 일을 하고 있는 그녀를 오로지 물끄러미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다.

주석* (흔히 대표적인 시네마의 데드타임 중 하나로 불리기도 하는 <움베르토 D>의 이 장면은, 영화의 전개상 불필요한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동작과 시간의 흐름을 필름 위에 지속시켜내므로서, 현실을 담아낸 ‘진실’로서의 영화를 만들어냈다고 평가받는다.)


바쟁은 이 시퀀스를 두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네오 리얼리즘”이라고 상찬했다. 바쟁이 후기에 만들어낸 반몽타주 이론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데드 타임의 지속성과 다름아니었다. 쇼트와 쇼트의 연쇄로 이루어져서 현실을 왜곡하는 몽타주 기법을 부정하고, 필름이 돌아가는 그 순간부터 필름이 끝나는 때 까지를 조작없이 세밀하게 기록한 롱 테이크로서의 영화를 바쟁은 진실이라고 믿었다. 그런 의미에서 반몽타주 이론이란 여지껏 텍스트의 조합, 계이름의 조합 등으로 기호화된 채 목숨을 연명해오던 문학, 음악과 같은 예술형식과 차별점을 두고,  영화를 탈텍스트화(또는 탈기호화) 시키려했던 영화의 신화화 운동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반면 쇼트가 많으면 많을수록 영화는 (윤리적으로) 더욱 복잡해지고, 그로 인해 수많은 시선과 독자적인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기술한 고다르의 “고전 형식의 설명과 옹호”는, 쇼트를 부정하고 영화가 지속될 때 그것이 비로소 진실이 된다는 바쟁에게 ‘사람은 그저 생명을 지속하기보다 삶을 살아야 한다.’라고 말하며, 바쟁이 시도하려했던 영화의 신화화와 정면적으로 충돌하고 있다. 고다르는 반몽타주 이론과는 정반대의 경로에서 영화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글이 ‘바쟁의 반몽타주 이론에 대한 완벽한 반론’이라는 로젠붐의 평은 매우 적합해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고다르가 이 비평을 발표한 지면이 다름아닌 ‘카예 뒤 시네마’라는 것이다. ‘카예 뒤 시네마’의 창간자가 바쟁이라는 것과, 당시 프랑스 평단의 대부분(특히 카예 뒤 시네마의 필진들)이 스스로를 바지니스트라고 칭할 정도로 바쟁을 열렬히 추종하고 있었다는 것을 상기해볼 때, 고다르의 이러한 비평글은 평단 전부를 등지는, 매우 ‘이단적’인 것이 아닐 수가 없었다. 바쟁이 창간한 문예지에서 바쟁을 부정하는, 일종의 패륜적인 행위를 했고, 고다르의 영화철학은 주류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이 후로 고다르는 (하스미 시게히코의 말에 따르면) 바쟁이 논의를 중단한 존 포드의 위대함을 깨닫고 ‘카예 뒤 시네마 1961년 베스트 영화 목록 리스트에 존 포드의 영화 <투 로드 투게더>를 집어넣는 등, 바쟁의 자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쓰기도 했다. 고다르를 지칭하는 수식어들이 ‘영화 혁명가’, '실험영화의 대가’, '누벨 바그의 거장’ 등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영화감독 고다르의 이러한 실험적인 사고와 시도들은 비평에서부터 일찍이 두각을 보여왔다고 볼 수 있다.


4. 쇼트에 대한 영화철학과 이단적인 반골 기질은 고다르가 영화감독이 된 이후에도 계속되어 그의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에서 점프컷이라는 혁명적인 기법을 창조하기에 이른다. 이 점프컷은 바지니스트들에게 은어로는 '게임의 규칙(또는 절대적인 관념)'이라고까지 불렸던 영화의 흐름(지속적인 삶 - 롱 테이크/역쇼트)을 인조적으로 파괴하고 봉합하는 기이한 현상을 보여주었고, 영화는 기존 형식을 파괴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기적으로서의 영화가 되었다. 

고다르는 이 후에도 꾸준히 자신의 영화들에서 여러 실험적인 시도를 하므로서 새로움을 추구했고, 쇼트에 대한 영화철학 역시 변형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쇼트라는 언어를 가지고, 그것을 연쇄시키며 변증법적인 영화로 자신의 담론을 말해나갔다. 이 시기 고다르는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칭하며 사회주의적인 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미치광이 피에로>와 <아메리카의 퇴조>, 그리고 그 이후 제작된 거의 대부분의 고다르 영화들이다. 이 당시(60~80년대) 그는 대략 1년에 두-세편 정도되는 다작을 하며 사회와 정치, 예술로서의 시네마에 대해 말하기 위해 애썼다. 고다르에게 영화란 삶(재미와 기쁨)이였고, 그는 그 삶(영화 라는 쇼트의 연쇄)을 통해 살았다. 영화에 대한 고다르의 열정은 고도조에 이르렀고, 그는 실험적인 시도들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프랑스 영화계는 고다르(와 그 이외 여러 동시대 영화감독들)가 열어젖힌 기적을 통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고, 그것은 스트로브, 위예, 바르다, 알랭 레네 등으로 대변되는 ‘누벨바그'를 일구어내게 된다.


누벨바그, 잊혀져버린 역사 - <영화사(들)>, <누벨 바그>를 중심으로

5. 그러나 어째서인지, 시간이 흐를수록 고다르는 말(쇼트)을 잃었다. 그 결과 중기 고다르(90년대)는 2년에 한 편의 영화를 찍을 정도로 활동을 줄이기 시작했다.

그 누구보다 찬란한 (영화로서의) 생을 살아가던 고다르를 멈춰세운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영화에 대한 메타적인 지점들을 담고있는 고다르의 중기 걸작 세 편(<영화사(들)>, <누벨 바그>, <아워 뮤직>) 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영화사(들)>에는 여러 크고 작은 예시들이 영화의 운명에 대한 담론으로 존재하는데, 그건 영화 속 재현의 윤리를 다룬 쇼아-고다르는 쇼아가 윤리의 문제를 재현하지 못하므로, 홀로코스트 앞에서 영화는 죽는다고 생각했다 - 대한 장문(장시간)의 에피소드와 도서관들을 헤집고다니는 고다르의 모습-어떻게 해서든 영화를 살리기 위해 애쓰는 형상-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 중에서도 유운성 평론가가 매우 깊은 통찰력과 개인적인 소고를 가지고 <영화사(들)> 속 한 장면에 대해 쓴 인상적인 글이 있기도 하고, 필자의 의견과 어느정도 일맥상통하는 의견을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으므로 그 글의 일부 전문을 옮겨본다. 


고다르가 자신의 책꽂이에서 꺼내든 한 권의 책이 내 시선을 끈다. 그는 꺼내든 책을 살며시 잡고, 나직한 목소리로 그 제목을 읽고, 다시 원래의 자리에 꽂는다. 영과 무한(Le zero et l'infini). 이것은 헝가리 태생의 작가 아서 쾨슬러의 대표작 『한낮의 어둠』(1940)의 프랑스어판 제목이다.

(중략)

(한낮의 어둠의 주인공 루바쇼프는 자신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쓴다. “나는 역사가 내게 대출해 준 신용을 모두 탕진해 버렸다. 내가 옳았다면 후회할 것이 없고, 틀렸다면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역사는 어떤 역사인가? 역사의 판단은 언제 도래하는가? 그것은 언제나 늦게, 그것도 가장 늦게 도래하는 것이다. “역사는 하소연하는 이들의 턱뼈가 먼지가 될 즈음에야 판결을 내렸다.” 루바쇼프와 고다르는 자신들이 역사에 전적으로 새로운 국면(공산주의의 실현, 영화의 누벨바그)이 도래하게끔 했다고 믿었지만 실은 역사에 도래했던 마지막 국면 - 더 이상 그 이후의 국면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앞선 것들의 쇠락만을 지켜보게 만드는 저주받은 유토피아 - 의 조종(弔鐘)을 울리기 위해 호출된 자들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세대에 속한다. 그들의 뒤를 잇는 세대에 대한 (고다르도 동의할 법한) 쾨슬러의 묘사는 서늘하면서도 냉철하다. “그들은 어떤 과거도 안 가졌기 때문에 과거를 부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탯줄도 없이, 경쾌함도 없이, 우울도 없이 태어났다.”


유운성 평론가는 <영화사(들)> 속 고다르를 통해 그가 영화에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낸 동시에, 마지막 혁명가로서 영화의 몰락을 지켜보는 자라고 설명한다. 고다르를 중심으로 일종의 영화혁명이라고 불렸던 누벨바그가 일어난 이후, 영화를 항한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혁명 운동과 새로운 시도들은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아시아 영화와 대만 뉴웨이브, 그리고 슬로우 시네마라는 사조들이 종종 우리 곁에 찾아왔지만, 그것들을 두고 누벨바그와 같이 기적을 불러일으킨 영화운동이라고 하기에는 어느 정도 무리가 있다. 


흔히 에드워드 양과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들 <비정성시>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으로 대변되는 대만 뉴웨이브는 누벨바그처럼 일종의 섬광처럼 번쩍 생겨났다기 보단 <무방비도시>나 <쇼아>를 통해 이미 시도되었던 정치 시네마와 네오 리얼리즘의 사이에서 파생된 아류라고 할 수 있고, 슬로우 시네마의 경우 데드타임으로 이루어진 <움베르토 D>와 드레이어 영화의 몇몇 시퀀스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영화들이기 때문에 누벨바그가 영화 사조를 "창조" 했던 것과는 다르게, 고전을 계승한 사조라고 하는 것이 더욱 알맞을 듯 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현세대 영화들은 그 어떤 영화혁명 없이 고전에 대한 변주와 다름없는 것만 같다. 시네필리아들은 히치콕과 존 포드, 하워드 혹스와 수많은 무성영화들을 자신의 영화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오마쥬 하지만, 누벨바그 세대를 오마쥬하는 영화는 드물다. 다시 말해, 아무도 고다르의 계보에는 속하려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고다르의 계보에 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지점에서 필자는 “영화는 영화다”라던 고다르의 말을 빌려 “고다르는 고다르다”라고 말해보고 싶다. 그것은 고다르가 히치콕과 채플린, 또는 여러 무성영화의 대가들에게 의지하거나, 그들을 오마쥬하지 않고, 영화의 문법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오직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점은 고다르가 자신의 영화에 직접적으로 등장시켰던 영화감독들, 자신이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던 이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더욱 기시적으로 드러난다. 


요컨대 고다르의 영화에는 무수히 많은 영화감독들이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영화에 멜빌(<네 멋대로 해라>)과 프리츠 랑(<경멸>), 새뮤엘 퓰러(<네 멋대로 해라>)를 출연시킨 적 있고, 그의 말기 걸작 <영화사(들)>에는 수많은 감독들의 사진이 콜라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두고 고다르가 그들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는데, 그것은 자신의 영화 속 여러 영화감독들을 출연시켰던 고다르가 영화를 통해 취하던 태도를 통해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



  

장 피에르 멜빌의 첫 등장씬 - <네 멋대로 해라(1960)>


 

프리츠 랑의 첫 등장씬 <경멸(1963)>


 

새뮤얼 퓰러의 첫 등장씬 <미치광이 피에로(1965)>


위의 세 장면은 고다르의 영화에 출연한 감독들의 첫 등장씬으로, 고다르는 그들을 모두 공통된 수평쇼트를 사용하여 찍었다. 만일 고다르가 진정으로 그들의 영향을 받은 문하생-또는 제자-의 관계에 있었다면, 대상을 바라보며 경외감을 느끼도록 하는 로우앵글에서 찍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평쇼트를 사용하며 오히려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그러므로 이건 제자의 관계보단 관찰자-또는 비평가와 같은 - 관계라고 하는 편이 더욱 적합할 듯하다. 우리는 이를 통해 고다르는 자신 스스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감독들을 자신의 영화에 끌어들여와 그들을 오마쥬(신화화)했다기보단,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고다르는 영화사에 일종의 돌연변이이자 이단이었으며, 새로운 객체로서 존재했다. 그는 영화사의 족보를 벗어나,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형식을 만들어내므로서 창조라는 기적을 해냈다. 그러므로 누벨바그, 혹은 고다르의 영화를 계승한다는 것의 요점은 고다르를 오마쥬하는 것이 아니라, 고다르가 했던 것처럼 이전 세대의 영화가 보이지 못한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에 놓여져있다.

그렇다면 과연 현세대에 고다르의 계보에 존재하는 이들은 누가 있는가? 다시 말해 현세대 사유의 양식으로 새로운 계보를 일구어내는 영화가 있는가?

다소 성급한 판단일지 모르겠으나, 현세대에 - 자신만의 영화를 지닌 이들은 많지만 - 무언가를 창조하는 아들은 없다. (혹은 내가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작금의 감독들은 영화적인 혁명을 시도하기보단 고전을 향한 존경만을 바탕으로 오마쥬하며, 누벨바그가 만들어낸 창조로서의 영화는 시도하지 않고 있지는 않은가?

이러한 배경의 가장 큰 병폐는 단연 누벨바그의 영화적 혁명 이 후 새롭게 주어진 영화의 운명을 향한 금 세대 기성 영화인들의 안일한 게으름으로, 그들은 누벨바그가 제기한 영화의 가능성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힐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급진적으로 다가온 새로움에 적응하지 못해 누벨바그 이전 과거의 영광(존 포드, 하워드 혹스, 드레이어, 그리고 그 이외 무성영화들)으로 돌아가 그것을 복제/응용하며 누벨바그를 의도적으로 외면, 또는 부정했다. 그 결과, 기성세대의 안배를 계승한 현세대 영화인들에게 누벨바그는 과거 영화사의 영광적인 산물이라는 ‘시도 불가능한 금자탑’으로 위시, 또는 신화화되며 현세대 영화와 단절되고 말았다.

누벨바그는 창조로서의 영화를 이룩했으나, 그 영광을 지속시키기 위한 계보는 기성세대에 의해 소실되었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누벨바그가 이룩한 성취를 부정하거나, 마치 그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그 흔적을 영화에서 소거시키는  방식으로 지워 나갔다. (만일 영화계가 이런 식으로 우리의 과거(누벨바그)가 이룩한 성취를 의도적으로 배척하거나 외면해나간다면, 미래의 그 어떤 영화도 창조를 일구어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사고 속에서 ‘그들은 어떤 과거도 안 가졌기 때문에 과거를 부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탯줄도 없이, 경쾌함도 없이, 우울도 없이 태어났다.”라는 유운성 평론가의 말은 일종의 저주처럼 섬뜩하게 다가온다.)

여튼, 그러한 의미에서 고다르의 계보는 여전히 공석이며, 누벨바그는 20세기의 산물로 잊혀저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두고 고다르를 ‘역사에 전적으로 새로운 국면(공산주의의 실현, 영화의 누벨바그)이 도래하게끔 했다고 믿었지만 실은 역사에 도래했던 마지막 국면 - 더 이상 그 이후의 국면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앞선 것들의 쇠락만을 지켜보게 만드는 저주받은 유토피아 - 의 조종(弔鐘)을 울리기 위해 호출된 자’ 라고 서술한 유운성 평론가의 말은 더없이 적합해 보인다.

(여기에 굳이 한가지 더 얻어보자면, 고다르는 그 책을 훑어보고는 도로 책꽂이에 꽂아넣었다는 것이다. 자신과 영화의 미래에 대해 말하는 책을 읽지 않고 다시 집어넣는 행위에는 도대체 무엇이 담겨있을까.)


위와 같은 누벨바그와 현세대의 단절에 대한 상항을 염두해 둘 때, 고다르는 조종을 울리기 위해 호출된 자로서 영화의 죽음을 어느 정도 예견한 것만 같다. 그의 작품 발표 시기가 늦어지며 점차 말을 하고자 하는 욕망을 잃어갔던 것과, <한낮의 어둠>을 굳이 <영화사(들)>에서 언급한 것 역시 그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고다르가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 영화를 만들어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말년에 이를 수록 작품 발표가 뜸해지기는 했지만, <필름 소셜리즘>과 <언어와의 작별>, <이미지 북> 같은 영화들을 끊임없이 내놓으므로서 정치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콜라주 같은 이미지들을 병렬시켜 놓고 해설을 붙이는 식으로, 관객이 마치 학생이 되고 고다르는 선생님이 되어 거대한 스크린에서 가르침을 준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칠판 영화를 보여주었다. 


고다르의 칠판영화는 어디까지나 가르침의 영역으로서 일종의 변증법적인 형식으로 관객을 설득하려고 시도했는데, 그 결과 고다르는 자신이 영화의 변증법이라고 믿어왔던 ‘쇼트(와 그것의 연쇄)'에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고다르의 이러한 방법론이 대중과 일부 평단에게 난해하게 다가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이유로 코스타처럼 고다르의 칠판(변증법적) 영화론이 잘못되었다고 단정 짓는 것은 너무 섣부른 일처럼 느껴진다. 


사실 고다르의 영화문법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혹은 고다르의 영화들을 대부분을 보았던 이들)에게 그의 후기작품은 그다지 낯서거나 난해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다르는 자신의 영화에서 항상 “쇼트”를 중심으로 말하고자 하는 일관된 입장만을 고수해왔기 때문에, 고다르의 작품들을 보게 된다면 ‘쇼트의 혁명적인 사용’이라는 점에서 초기와 후기 작품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를 조금 더 명확히 이해해보는 방법은 지금 당장 <네 멋대로 해라>와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고다르의 후기작 <필름 소셜리즘>을 대조해 보는 것이다.

요컨대 이야기적인 측면에서 <네 멋대로 해라>를 해체하게 된다면 우리는 허술한 구멍들을 마주 할 수밖에 없다. 형사와 범죄자가 서로를 쫒고 쫒는 범죄물이기도 하지만, 파트리샤와 미셸이 서로 사랑을 나누는 로맨스라는 점에서 <네 멋대로 해라>는 무척 이상한 영화가 아닐 수 없는데, 특히 미셸이 경찰들의 총을 맞고 갑작스레 "역겨워"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어버리는 결말은 도무지 상식선에서 수긍 가능한 결말이 아니다. 패트리샤 역시 "역겨워"라고 말한 미셸의 저의를 알지 못해서 계속해서 되묻는다. 이 같은 소통불가능한 장면은 <필름 소셜리즘>에서 더욱 확대되어서, 고다르는 관객들이 영화가 무슨 이야기인지 가늠하지 못하도록 쇼트와 쇼트를 마구 엮어버리고 그 위로 인물들의 대사를 덧씌웠다. 그리고 <필름 소셜리즘>을 보는 관객은 고다르에 의해 <네 멋대로 해라> 속 "파트리샤"의 자리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영화들은 “쇼트란 삶이고 기쁨이다”라고 말하던 그의 말과 단한치의 모순 없이, 계속하여 영화가 다루고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영화를 이루고 있는 "형식(카메라)"에 주목하며 쇼트 중심으로 만들어졌으며, 고다르는 단지 하고 싶은 말만 바꾸어가며 같은 형식을 진화시켜 나갔다. 고다르는 결코 바뀐 적이 없으며, 계속해서 자신의 영화론을 정립했다. 그렇기에 고다르의 영화를 익히 알아온 이라면, 그의 후기 영화와 초기 영화가 큰 차이점을 두고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다만, 고다르의 작품들을 (고다르 자신의 것이 아닌) 현세대의 그 어느 영화와 비교해 본다면, 그것은 어느 방향으로든 서로 완전히 다른 매체의 것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다르다. 그것은 현세대의 영화들로부터 은폐되어 버린 누벨바그(고다르)의 결과로 볼 수 있다.


6. 현세대와 누벨바그에 대한 고다르의 태도는 그의 또 다른 후기 걸작 <누벨 바그> 속 들리는 나레이션을 통해 더욱 명확히 확인해 볼 수 있다. 


“뭘 할지 염두에 두지 않고, 지금 현재 행동이 이뤄지는 곳에서 과거처럼 행동했다. 과거와 현재의 같은 바다, 똑같은 파도 위에서 미동 없이 우쭐했다. 곧 어떤 사회적 관습, 법칙이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형존하지 않는 세대를 아는 것처럼 여긴다. 미래 세대는 그걸 다만 역사의 매혹적인 순간으로 기억하고 이야기할 것이다.” 

영화의 제목이 <누벨 바그>라는 것을 상기해 본다면, 여기서 고다르의 나레이션은 마치 자신이 거룩한 누벨바그의 영화사적 몰락에 대한 일종의 씁쓸한 회고록처럼 들린다. 

영화 <누벨 바그>는 부르주아가 바다에서 익사한 자신의 애인의 죽음을 은폐하기 위해 애쓴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서 부르주아란 누구인가. 그것은 풍족하고 부유하던 -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그것을 자신의 영화에 끌어들일 수 있었던 - 고전영화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부르주아(고전영화)들에 의해 죽음을 은폐당한 애인은 다름 아닌 누벨 바그일 것이다. 누벨바그 기수들이야말로 그 누구보다 고전영화를 사랑했으며, 동시에 그들에 의해 묻혔기 때문이다.


다만 영화에서 매우 이상한 장면은, 누벨바그의 헌신이라고도 볼 수 있는 부르주아의 애인이,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이내 마치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 듯, 손을 뻗고 물속으로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고다르가 살기 위해 부르주아(고전영화)에게 손을 뻗기보단 자신의 방식을 끝까지 고수하며 끝까지 “과거와 현재의 같은 바다, 똑같은 파도 위에서 미동 없이 우쭐"했기 때문이며, “미래 세대는 그걸 다만 역사의 매혹적인 순간으로 기억하고 이야기"했을 뿐이다. 이곳에는 단지 작금 영화에 대한 안일함 뿐 아니라, 스스로의 잘못을 고해하는 속죄가 담겨있다. 그렇기에 고다르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누구보다 누벨바그적으로 영화를 만들었지만, 현세대의 그 누구도 누벨바그를 계승하지 못했고, 자신 스스로도 현세대와 소통하지 않으려 했으므로 그의 영화는 주류영화 속에서 그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었고, 그것은 현대주류영화에 인주하고 있는 대중과 소통 불능 상태로 그를 몰아갔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개척자가 되었지만, 자신의 뒤를 이어 그 영역을 넓혀나갈 계승자가 없었고, 그렇기에 이방인이 되어 어두운 땅을 홀로 걸어 나가고 있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고다르의 과오는 세계가 자신을 뒤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비약했다는 것에 있고, 우리 시대의 과오는 그 비약을 부정해 버렸다는 것에 있다.


7.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다르는 고집스럽게 소통 불가능한 형식으로 계속 영화를 만들었다. 그 행위에는 은폐되어버린 누밸바그를 어떻게 해서든 유지시키려는 어느 예술가의 몸부림이 담겨있다. 죽을 때까지 누벨바그를 누군가에게 계승시키려는 의지. 그는 자신의 후계자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더욱 쉽게 걸을 수 있도록, 언젠가는 소통이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소통불가능의 상태에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갔다. 마치 영화사들에서 너의 뒤에 후계자는 없고, 너는 쇠락을 지켜보기 전, 조종을 울리기 위해 호출된 자라고 말하는 낮과 밤을 책꽂이에 도로 꽂아넣는 것 처럼. 그는 영화에 대한 무한한 믿음으로 자신을 계시자이자 종말자라고 말하는 세계를 그저 조용히 책꽂이에 도로 꽂아넣을 뿐이다. 여기에는 자신의 계보가 언젠간 계속될 것이라는 강력(하지만 실상은 막연)한 믿음이 도사리고 있다. 설령 그것이 매우 독자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므로 고다르는 영화의 가능성을 만들어낸 ‘영화 혁명가’이자, 어떻게 해서든 그 가능성을 계승시키기위해 애썻던 ‘영화 파수이었다. 고다르의 후기 작품에 담겨있는건, 이방인으로서 남겨지게된 자신을 부정하며 세계의 몰락을 일으켜 세우려는 굳센 의지를 지닌 한 혁명가의 필사와, 죽어가는 삶을 지속하기위해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더욱 세밀하게 세공된 쇼트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애썼던 필멸자로서의 발악이었다. 


8. 그러므로 ‘요즘 고다르의 영화는 쇼트에 더욱 치중되어있다’는 페드루 코스타의 부정적인 단평은, 어쩌면 자신의 영화론을 끝까지 유지해나간 고다르의 작가주의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고, 힘을 과시하는 것 같다는 말은, 누벨바그의 계보를 유지하기위한 몸부림을 이해하는 자가 없다는, 슬픔의 발언으로 읽혀야한다. 

(페드루 코스타에 대해 집고 넘어갈 것이 하나 있다면, 그의 영화는 고다르의 영화철학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코스타의 것은 오히려 바쟁의 것에 더욱 가깝다. <행진하는 청춘>과 <반다의 방>, 그리고 그의 가장 최근작이자 압도적인 감성으로 영성의 시간을 탐구하는 걸작 <비탈리나 바렐라나>까지, 코스타의 영화들은 쇼트 속에서 지속되는 삶(데드타임)과 흐름을 보여주어왔다. 고다르의 영화들과 영화철학이 그 시간성의 흐름을 철저하게 부숴버리는 방식(몽타주)으로 이루어져왔음을 생각해본다면, 코스타가 고다르를 부정하는 것은 단지 비평적인 업무 때문 아니라, 코스타 스스로 자신의 영화와 예술관을 지키기 위한 필연적인 행위로 보인다. 그렇기에 고다르에 대한 코스타의 발언은 다시 한번 논의되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글은 페드루 코스타에 대한 글이 아니기 때문에, 지면의 부족함으로 일차적인 선에서만 집고 넘어간다.)


이러한 배경을 전제로 할 때, 고다르가 마지막으로 남긴 두 편의 유작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과 <시나리오>는 우리 앞에 더욱 명확하게 다가온다. 

***

영화의 죽음 -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_우스운 전쟁들>

9.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_우스운 전쟁들>은 다소 급진적이고 정치적이었던 고다르의 ‘영화 행위(Filming)’를 종결짓는 마지막 보루다. 무엇보다, 감동적이다.


고다르는 <이미지 북>을 만들고 나서 또 하나의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다. 제목은 미정의 장편이었지만 프랑스의 소설가 플리스니에의 소설 <위조여권>에 수록된 단편 “샤를로테”를 각색한 영화였다. 그러나 고다르는 늙었고, 내용은 다소 어려웠으며, 아무도 영화를 위해 투자하지 않았다. 영화는 여러번 제작이 무산되었다. 마지막까지 고다르의 곁을 지켰던 그의 조수 파브리스 아가리노에 의하면, 그즈음 고다르는 자신 스스로 더 이상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고다르는 영화 제작하기를 관뒀다. 대신 그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모아둔 여러 이미지와 텍스트 자료들을 조합해두었던 자료집을 재구성해서 전자문서로 변환했고, 이 후 그 곳에 나레이션을 입히고 간단한 편집작업을 거쳤다. 그러자 그 자료들은 고다르가 원하던 영화의 형태로 얼추 뼈대를 맞추게 되었던 것이다. 그게 바로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이다. 

이건 고다르가 원했던 완전한 형태의 영화가 아니라, 그 영화를 만들기 위한 일종의 자료 콜라주를 영화화시킨 것이므로 피상적인 ‘예고편’ 정도에 불과했다. 제목이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인 까닭은 그래서이다. 이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고다르는 존재하지 않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애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자신의 초상을 그리듯, 영화의 도입부에서 “어두운 방에서 검은 고양이를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특히 그것이 없더라면 더욱이 어렵다.(It’s hard to find a black cat in a dark room, especially if it’s not there.)” 라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며 고다르는 본작의 핵심을 알려주며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이 후 다음과 같은 텍스트가 등장한다.


A. ‘우리들의 전쟁은 멀리서 다가오는 하나의 이미지와 같다. 그곳에는 두개의 이미지가 나란히 놓여있다. 그녀와 나. 그녀 다음에 내가 있지만, 난 그녀를 만난 적 없다. 그저 인지할 뿐이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Our war, It's like...an image that comes from far away. There are two of them, side by side. next to her is me. I’ve never seen her before.)’

고다르는 위 문장을 통해 이미지들에게 ‘그녀와 나’라는 육체를 부여한다. 이미지들은 비로소 탈-이미지화되어서, 더 이상 이미지가 아니게되고, 그 자체로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된다. 고다르는 이미지에 대한 사유를 시작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나간다.

그 다음 영화는 여러 이미지(영혼)들의 배열과 조합을 보여주고, 나레이션으로 전쟁에 대한 참상을 묘사한다. 쇼스타코비치의 현악 4중주 8번의 음악이 등장하고,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와 샹탈 아커만의 사진이 보인다. 고다르가 2004년에 연출한 <아워 뮤직>의 장면들이 지나간다. 고다르는 나레이션으로 이 영화가 트로츠키주의를 다룬 플레스니어의 소설 <위조 여권>의 영화화라고 고백하고, 영화는 한나 아렌트에 대한 이야기로 끝난다. 약 15분 동안 이런식으로 이미지와 나레이션이 우발적이고 연쇄적으로 스크린에 영사된다.

 

고다르의 여느 영화가 그렇듯 <결코 존재 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 역시 난해한 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쇼트를 중시하던 고다르의 눈으로 영화를 보게 되면 어느 정도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이 영화는 쇼트(들)와 나레이션으로 이루어져있지만, 쇼트와 나레이션을 조합하는 과정에서 다소 실험적인 시도들을 행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고다르가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해 서술하는 장면일 것이다. 그는 나레이션으로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해 ‘그들은 텍스트가 아닌 초상화를 그릴 줄 안다’라고 말하지만, 영화는 그들과 전혀 관련없는 사진들과 세잔의 <붉은 조끼를 입은 소년>을 보여주는 둥, 여러번 언행(사운드)과 언동(스크린)이 불일치하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고다르는 영화 전반에 걸쳐서 나레이션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묘사하거나 정치적인 사상(트로츠키주의와 사회주의, 한나 아렌트)을 설명하지만, 정작 영화가 보여주는 이미지들은 그런 정치적인 것들과는 무관한 자료들만을 현시한다. 그 자료들은 대게 <붉은 조끼를 입은 소년>과같은 회화이거나, <아워 뮤직>같은 영화 클립, 또는 샹탈 아커만과 파졸리니의 얼굴사진들이다. 고다르의 나레이션이 ‘정치'을 들려준다면, 이미지는 ‘예술'을 보여준다.


정리해보자면, 타인과의 관계를 전쟁을 통해 묘사하는 방식은 사운드를 통해 이루어지고, 예술은 이미지를 통해 보여지고 있다. 즉 사운드와 이미지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다르에게 육체를 부여받은 이미지들은 불완전하고, 사운드 역시 어긋나있다. 이미지와 사운드의 부조리. 이 지점에서 영화 속 인상적인 대사를 다시 한번 끌어와보자.

“우리들의 전쟁은 멀리서 다가오는 하나의 이미지와 같다. 그곳에는 두개의 이미지가 나란히 놓여있다. 그녀와 나. 그녀 옆에는 내가 있지만, 난 그녀를 만난 적 없다. 그저 인지할 뿐이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여기에서 전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녀(이미지)와 나(사운드)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가 서로 치열하게 맞붙는 행위로서의 전쟁인 동시에, 예술(이미지)과 사회성(사운드)의 전쟁이기도 하다.

이미지와 사운드는 불일치하지만, 영화는 이미지와 사운드를 결합시켜 놓은 채로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서로 다른 세계이지만, 동시에 서로의 육체를 제공하는, 공존하고있는 세계이기도 하다.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은 그 두 물질들(사운드와 이미지)의 전쟁 사이에서 일어난 참상이 일구어낸 ‘영화(하나의 이미지)'라는 하나의 통일된 세계이다. 사운드와 이미지로 이루어져있는 영화는 그 전쟁과 분단이 화합을 이루는 공간이다. 이 영화가 고다르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상기해본다면, 고다르는 화합이라는 영화의 본질 속에서, 알제리 전쟁부터(<기관총 부대>, <작은 병정>)부터 베트남 전쟁(<미치광이 피에로>, <주말>)까지 다루던 자신의 정치-시네마에 방점을 찍음과 동시에, 더 나아가 예술을 통해 평화를 말하고자 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나면 막상 그 평화의 방식을 긍정할 수만은 없다. 이것은 고다르가 진정으로 만들고자 했던 영화의 형식이 아니라, 그저 만들고자 했던 영화의 예고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평화는 아직 완벽하게 완성되지 않았다. 고다르가 죽은 이상 아마 결코 완벽하게 완성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이 고다르를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토록 감동스럽게 다가오는 건, 고다르가 우리 곁을 떠났기 때문이 아니라, 노년 때 까지 계속해서 그 스스로 영화를 만드려고 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는 계속해서 영화를 통한 가능성을 시도했다. 

이 영화가 제작단계에서 여러번 무산되고, 결국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채로 그의 죽음 이 후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그곳에는 어떠한 슬픔이나 비애감보단, 자신이 영화를 만들지 못할지라도, 어떻게 해서든 만드려고 했던 어느 노장의 패기가 도사리고 있다. 그건 어떤 의미에서든 우리로 하여금 영화에 대한 끊임없는 꿈들을 만들어내고 본받을 수 있도록 한다.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예고편>에 담겨있는 것은 마지막까지 누벨바그, 혹은 영화를 유지시키고 만드려했던 영화 파수꾼으로서의 고다르이다. 


<시나리오> 가 만들어지기까지

10.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예고편>이 무산되었다는 소식들이 간간히 영화제에서 들려왔던 것을 제외한다면 한동안 고다르의 말년은 조용했다. 디지털 영화 이전까지만 해도 TV와 지면 같은 매체를 막론하고 활동하던 그는 자신의 오랜 친구 아녜스 바르다가 늙은 몸을 이끌고 프랑스에서 스위스까지 날아와 자신의 집 문을 두드렸을 때에도 결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고다르는 스위스에 정착 해서 문을 걸어잠궜다. 그동안 알랭 레네가 세상을 떠났고, 다니엘 위예와 바르다 역시 세상을 떠났다. 그들이 세상을 떠나버렸을 때, 고다르는 장 마리 스트로브와 함께 세상에 남아있던 마지막 누벨바그가 되었다. 다르게 말해보자면, 그가 한평생 유지하고 계승시키려고 애써온 누벨바그의 계보와 안배는 이제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갑작스레 찾아온 고다르의 죽음은 그다지 특별한 것은 아닌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이 지니고 있던 약간의 차별점은, 그가 조력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그는 왜 자연사가 아니라 조력자살로 생을 마감해야만 했나? 고다르의 말년을 곁에서 함께했던 그의 조수 파브리스 아라가노에 의하면, 고다르가 조력자살을 택한 까닭은, "그가 너무 지쳤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고다르를 지치도록 했던건 나이가 들어 망가진 그의 육체 뿐 아니라, 그가 모든 영화 인생을 쏟아부어 되살리려 했던 누벨바그 사조가 저물고 있다는 사실 때문 아니었을까? 아무래도 고다르는 그것을 계승시키기엔 이제 늦어버렸고,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만 같다. 고다르의 죽음 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해에 스트로브 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누벨바그는 막을 내렸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의 영화는 새롭게 나올 수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과 <시나리오>가 고다르의 죽음 이 후 1년 주기로 순차적 공개되었을 때, 그것은 누벨바그(고다르) 사조를 조금이라도 더 연장시키려 했던 그의 사념은 아니었을까? <시나리오>를 만들던 고다르의 모습이 담겨있는 영화 <시나리오 발표>는, 영화를 위해선 뭐든 할 수 있다는 듯이 지친 몸과 떨리는 목소리를 가지고 정신없이 영화를 만들고 있던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곳에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죽음이 드리운 순간까지 끊임없이 애썼던 이가 남아있었다. 이 영화에 대한 고다르의 사랑은, 그의 유작 <시나리오>까지 이어졌고, <시나리오>는 영화를 사랑하는 시네필들에게 고다르가 보내는 은밀한 편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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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시나리오>, 삶으로서의 영화, 죽음으로서의 영화

세상에 단 한번도 존재한 적 없던, 유일무이한 예술. 고다르의 <시나리오>는, 인류가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깊이에 도달해 있다. 

고다르에게는 두 개의 유작이 있다.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과, <시나리오>. 둘의 차이점이라면, 고다르는 <시나리오>를 완성한 바로 다음날 조력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시나리오>야말로 고다르의 진정한 유언처럼 읽힌다. 다만 영화의 형식은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과 같다.

백지 위에서 중첩된 이미지들이 보이고, 사운드가 흘러나온다. <미치광이 피에로>, <국외자들>, <알파빌>같은 고다르의 영화 클립들이 지나가고, (이름 모를) 존 카사베츠의 영화들이 나온다. 엄마를 잃고 우는 로셀리니의 <무방비도시> 속 어린 아이의 모습. 클래식 노래와 풀밭 위를 걷는 노인이 보인다. 영화의 끝에 이르러서는, 뚱뚱하고 축 쳐진 몸을 드러낸 고다르가 침대에 걸터앉아 백마비마 논쟁에 대한 사르트르의 말을 사용한다.

‘말이 말이 아님을 설명하기 위해 말을 사용하는 건 말이 말이 아님을 설명하기 위해 말이 아닌 것을 사용하는 것보다 덜 효율적이다.'

도대체 뭔 소린가 싶다. <시나리오>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과 마찬가지로, ‘고다르의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다만 그의 첫번째 유작처럼 엄청난 교양과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영화 속 이미지들에는 육체가(있지만 중요치 않다) 없다. 다만, 그렇다고 당신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그의 유언을 들을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고다르의 이야기’다. 만일 당신이 <국외자들>과 <알파빌>, <미치광이 피에로>와 같은 고다르의 영화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면, 이 영화를 보고서도 이해할 수 없다. 당신이 존 카사베츠와 로셀리니를 모른다면 이 영화를 볼 수 없다. 이것은 결코 다음 세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평화를 이야기하는 사회참여적인 영화(<결코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가 아니다. 그렇기에 한나 아렌트나 쇼스타코비치 같은 건 아무 필요없다. 그저 영화만을 필요로 할 뿐이다. <시나리오>는 영화를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 이건, 고다르가 시네필들에게 보내는 편지다. 또는, 시네마로 자신을 정리하는 유언장이다.


12. 영화는 줄곧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여러발의 총탄을 맞고 죽음을 고지에 앞둔 남자가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비브르사비>의 한 장면과, 생명을 품은 나무를 심기위해 걷는 <희생> 속 노인의 이미지가 오버랩되며, 영화는 죽음과 생을 한곳에 결합시킨다. 그리고 재혼을 앞둔 과부가 나치군들에게 끌려가는 남편을 붙잡으려다 총에 맞아 사망하고,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린 그녀의 육체만이 길가에서 쓰러져있자 과부의 어린 아들이 달려와 엄마를 붙잡고 우는 그 유명한 <무방비도시> 속 한 장면을 통해 ‘삶의 근저에는 언제나 죽음이 도사리고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카메라를 든 남자의 이미지가 스크린을 채울 때, 관객은 마치 영화 안으로 빠져든다. 고다르는 이 곳에서 ‘우리의 인생은 영화였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죽었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죠?’ 라고 반문하듯, 물에 빠진 군인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시네마의 죽음. 고다르에게 남은 것은 지독한 염세주의와 프로파간다적인 정치성이었다. 적어도 <시나리오> 마지막 장면 전까지 고다르에게 시네마란 그랬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렇지 않다. 영화의 마지막, 축 늘어진 맨 몸으로 침대에 걸터 앉은 고다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말이 말이 아님을 설명하기 위해 말을 사용하는 것은 말이 말이 아님을 설명하기 위해 말이 아닌 것을 사용하는 것보다 덜 효율적이다.’

대사가 끝나고 무언가 번뜩인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카메라를 응시하는 고다르는, 최후이자, 최초,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한다. 

“이제 알았다(Okay)”. 

이 후 영화는 끝난다. 이 때 고다르가 알게 된 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나는 알 수 없다. 영화 역시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다르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리고 이 영화가 완성된 다음날 바로 세상을 떠났다. 마치 죽음 너머에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을거라는 확신. 고다르의 죽음은 그 확신을 영화 내부로 끌어들였다. 고다르의 죽음은 영화 속에 갇혀있고, 이 영화는 고다르의 죽음을 통해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해낸다. 이 영화는 결국, 죽음에 대한 일말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육신은 재가 되어 사라져버렸지만 죽기 직전 그가 남겼던 자신의 목소리와 얼굴, 그리고 눈빛은 영화에 남아 있다. 영화가 상영되는 그 순간만큼앤 고다르는 그러나 저 스크린 너머에, 우리와 같은 공간에 함께 있다.그 곳에서 고다르는 영화로서 삶을 살기 시작한다. 동시에 그의 죽음 역시 영화에 각인되었다.

죽음이 삶을 이끌어내는 것. 또는 죽음이 삶을 만들어내는 것. 영화관에서 그 모든 것은 모호한 경계 속에서 흐릿해지고, 우리는 아무도 모를 새로운 감각적 공간에 놓이게 된다. 그야말로 ‘유일무이’의 기적. 이건 기적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다. <시나리오>는, 여지껏 세상에 존재한 적 없던 죽음 너머의 무한함에 대하여 확신하는 ‘기적’으로서의 영화이자,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낸 ‘창조’의 시작이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다시 말해 우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한 노인이 저 검은 스크린 속으로 아스라히 사라져버리고 나서, 그곳에 놓인 것은 암담한 허무, 그러나 영화를 통해 새로운 기적의 공간을 경험한 우리들이 놓여있었다. 이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이 기적적인 경험이 이 순간에 끝나지 않도록 두는 것이리라. <시나리오>가 만들어낸 이 기적적이고 창조적인 감각을 느끼고 있는 이상, 영화를 본 우리들은 고다르가 누벨바그를 지키기 위해 애썼던 것처럼, 영화를 지키기 위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비평을 쓰고, 누군가는 영화를 만들어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저마다의 ‘영화 파수꾼’이 되었고, 그 파수꾼들이 뿌린 씨앗을 통해, 먼 옛날 고다르가 그랬듯, 언젠가는 탄생할 ‘존재하지 않던 영화’, 그 어떤 계보도 계승하지 않은 영화의 탄생을 향한 조그마한 희망을 품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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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와 역사의 비탈에서

요컨대 근대를 살아간다는 일은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세계에 발맞춰 유동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과 같다. 당장만 보아도 불과 2년 전(2023년) 출시되어 큰 반항을 일으켰던 인공지능 서비스 Chat GPT가 어느새 우리의 일상 - 업무, 학업, 유흥 등 - 에 천착해있다는 사실은 시대적 감각을 가늠케 한다. 뿐만 아니라 정식적으로 보급된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은 스마트폰 역시 우리가 일상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의식주, 의사소통, 유흥욕구 등)을 편리적으로 소비/사용 하도록 돕고, 보다 나아가 개인정보를 통해 그 사람의 실존적인 문제를 증명하며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필수품처럼 보편화되어 세계적인 문화가 되었다는 사실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급진적으로 기술과 문화 발전의 변화를 포용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상은 급변하고, 사람들은 정신없이 세계를 쫓는다. 발 빠르게 기술과 문화를 수용하는 이 시대의 유동성만큼, 내외부에서 끊임없이 사고하고 운동하는 인간의 유동성은 그 시대의 변화들을 가능케 했다. 그렇기에 (칼 마르크스의 말을 빌려보자면), 이 시대에 변화하지 않는 것, 급변하는 근대에서 운동하지 않는 상태로 존재하는 “모든 고체는 대기 중으로 사라진다”. 그곳에는 어느날 섬광처럼 번쩍 등장해서 사라지는 일시적이고 유한한 유행과 기술들만이 존재할 뿐이고, 모든 부동한 고체들은 유동적인 세계의 산성에 의해 융해된다.망각과 부활 - 경복궁 월대와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을 중심으로이런 세상에서 과거와 역사를 되살펴보는 일은 더욱 중요하고 조심스러운 일이 되고 말았는데, 그것은 곧 유동적인 세계에서 자신만의 역사를 지닌 채 특정 장소에서 미동 없이 머물고 있는 부동(不動)의 고체(또는 정물)들을 살펴보는 것에 다름 아니게 되었다. 그렇기에 오늘날 유동하는 세계 속에서 특정 장소에 고정되어 있는 ‘고체’들은 단지 과거의 잔재가 아니라, 잊고 있던 진실을 환기시키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근래에 재건된 경복궁의 월대는 그러한 사례의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일 것이다. 월대는 예로부터 왕이 걷는 도보라는 의미로 여겨져 왔다. 그것은 단지 오랜 기간을 버텨온 역사적 건축물 - 경복궁 월대가 처음으로 논의된 것은 14세기의 일이고, 조성된건 18세기 후반의 일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4세기를 거쳐서 완성되었다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 일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왕이 행차해왔던 길이라는 점에서 조선왕조의 상징과도 같은 건축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일제가 ‘철도'를 건설하겠다는 이유로 1924년 경복궁 월대를 파괴했을 때, 그곳에는 ‘전철’이라는 조선의 근대화의 상징이 떠오름과 동시에, 조선의 역사/권위적 상징과도 같은 왕의 길을 부숴버리므로서 조선의 역사를 부정하고 민족의식을 뿌리 뽑으려던 악의적인 의도가 암암리에 공존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국가의 지도자의 실권상실(순종의 죽음, 1926년)과, 민족문화역사의 폄훼와 왜곡(문화통치 1920년)으로 직결되어 조선의 국성을 뒤흔드는데 선험적으로 일조했다. 그러므로 일제 식민지배 치하에 파괴되어 버린 경복궁의

  • 화자
  • 2025-05-07
이별과 사별, 인생미션의 초입에서 - 공태인 감독의 <두 사람>

혼자 살고 있는 엄마가 삼계탕을 먹으라고 자신의 딸 해은을 집으로 부른다. 해은은 보지도 않는 tv를 켜놓고, 밥상에서 이혼한 아빠를 언급하는 엄마와 한바탕 말싸움을 벌이고, 쓰레기를 버린다는 명목 하에 집을 나가버린다. 어둠이 드리운 밤, 해은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는 더 이상 집에 없다. 그녀는 넓은 거실에 쭈그려 앉아 홀로 Tv를 보다 새벽이 올 때까지 눈물을 흘린다. 표면적으로 모녀갈등을 담은 것처럼 보이는 공태인 감독의 단편영화 은 층위적으로 쌓아 올린 인간 내면의 복합성을 담고 있다. 영화에는 보이는 진실과 감추려는 진실들이 있다. 보이는 진실이 모녀갈등이었다면, 감추려는 진실은 그보다 깊숙한 곳에서 영화적 장치들에 의해 꽁꽁 숨겨져 있다. 에서 가장 어색하게 다가오는 것은 엄마의 존재이다. 영화의 초반부, 해은이 집에 들어올 때 영화는 텅 빈 거실과 고요한 햇살이 내려앉은 집안의 온기를 비추며 그곳이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 집인 양 묘사한다. 그러다 갑작스레 뒤바뀐 쇼트에서 희미한 TV소음이 영화 속으로 침투한다. 아무도 없던 집에 뜬금없이 TV가 켜진 것이다. 해은이 TV의 전원을 끄기 위해 서랍을 뒤지며 리모컨을 찾던 순간 엄마가 등장한다. 그녀는 집 내부에 있었던 것일까? 텅 비어있던 집에서 갑자기 등장한 존재. 관객은 엄마가 어디서 어떻게 나타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뜬금없이 그녀의 존재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처럼 엄마의 등장이 얼마나 어색한 것인지를 떠올려 본다면, 엄마라는 인물에 대한 의문들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간다.한편 영화에서 눈에 띄는 또 다른 장면이 있다면, 그것은 옥상 창고의 고장난 문이다. 영화에는 제대로 닫히지 않아 삐그덕 거리는 옥상 다락방의 문이 여러 번 등장한다. 영화 속에서 문은 아무 서사적 영향력도 갖고 있지 않지만, 도저히 이어질 수 없는 영화의 쇼트와 쇼트를 이어주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가령 영화의 시간이 아침에서 밤으로 이동할 때, 그 개별적인 시간대를 포착한 두 쇼트 사이에 옥상 장면을 삽입해서 아침과 밤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해주고, 해은이 엄마와 언쟁을 벌이고 집을 나왔을 때, 집 내부에 있던 해은과 외부로 나온 해은을 사이를 연결해주는 식이다. 이 문은 집과 외부 사이, 또는 아침과 밤 사이라는 서로 다른 물질성을 지닌 (비)객체들 중간에서 공간성과 시간성, 그 어떤 것도 특기할 수 없는 모호성 속에 존재하고 있다. 영화 속 문의 존재가 처음 드러나는 것은 엄마의 말을 통해서다. 엄마는 해은에게 옥상 문이 고장 난 것 같으니 고쳐달라고 부탁하고, 옥상으로 올라간 해은은 자신이 문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열어둔 채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돌아온 해은은 엄마와 논쟁을 벌이게 된다. 밤이 오고, 해은은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집을 나왔을 때, 문득 열리 있는 옥상문을 보게 되고, 물통을 받침 삼아 문을 닫는다. 해은은 집으로 돌아오고, 우리는 또 다른 이상함을 깨닫는다. 엄마가 사라졌다. 영화는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가려버리고,

  • 화자
  • 2025-04-29
연대와 꿈의 기로에서 -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_우스운 전쟁들>

장 뤽 고다르의 유작 2편 중 처음으로 공개되었던 은 다소 급진적이고 정치적이었던 고다르의 ‘영화 행위(Filming)’를 종결짓는 마지막 보루다. 무엇보다, 감동적이다.고다르는 을 만들고 나서 또 하나의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다. 제목은 미정의 장편이었지만 프랑스의 소설가 플리스니에의 소설 에 수록된 단편 “샤를로테”를 각색한 영화였다. 그러나 고다르는 늙었고, 내용은 다소 어려웠으며, 아무도 영화를 위해 투자하지 않았다. 영화는 여러번 제작이 무산되었다. 마지막까지 고다르의 곁을 지켰던 그의 조수 파브리스 아가리노에 의하면, 그즈음 고다르는 자신 스스로 더 이상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고다르는 영화 제작하기를 관뒀다. 대신 그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모아둔 여러 이미지와 텍스트 자료들을 조합해두었던 자료집을 재구성해서 전자문서로 변환했고, 이 후 그 곳에 나레이션을 입히고 간단한 편집작업을 거쳤다. 그러자 그 자료들은 고다르가 원하던 영화의 형태로 얼추 뼈대를 맞추게 되었던 것이다. 그게 바로 이다. 이건 고다르가 원했던 완전한 형태의 영화가 아니라, 그 영화를 만들기 위한 일종의 자료 콜라주를 영화화시킨 것이므로 피상적인 ‘예고편’ 정도에 불과했다. 제목이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인 까닭은 그래서이다. 이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고다르는 존재하지 않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애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자신의 초상을 그리듯, 영화의 도입부에서 “어두운 방에서 검은 고양이를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특히 그것이 없더라면 더욱이 어렵다.(It’s hard to find a black cat in a dark room, especially if it’s not there.)” 라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며 고다르는 본작의 핵심을 알려주며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이 후 다음과 같은 텍스트와 이미지가 등장한다. (영화 이미지)A. ‘우리들의 전쟁은 멀리서 다가오는 하나의 이미지와 같다. 그곳에는 두개의 이미지가 나란히 놓여있다. 그녀와 나. 그녀 다음에 내가 있지만, 난 그녀를 만난 적 없다. 그저 인지할 뿐이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Our war, It's like...an image that comes from far away. There are two of them, side by side. next to her is me. I’ve never seen her before.)’고다르는 위 문장을 통해 이미지들에게 ‘그녀와 나’라는 육체를 부여한다. 이미지들은 비로소 탈-이미지화되어서, 더 이상 이미지가 아니게되고, 그 자체로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된다. 고다르는 이미지에 대한 사유를 시작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나간다.그다음 영화는 여러 이미지(영혼)들의 배열과 조합을 보여주고, 나레이션으로 전쟁에 대한 참상을 묘사한다. 쇼스타코비치의 현악 4중주 8번의 음악이 등장하고,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와 샹탈 아커만의 사진이 보인다. 고다

  • 화자
  • 2025-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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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님

    저도 얼마 전에 <미치광이 피에로>를 본 후로 고다르의 영화에 관심이 생겨서 글을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어요.자신이 좋아하는 주제에 대해 이렇게 긴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정말 멋지고 대단한 것 같아요...!!

    • 2025-06-14 05:07:39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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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히치콕
    최고에요

    고다르는 정말 혁명가라는 말에 어울리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 2025-05-01 20:58:31
    히치콕 최고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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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자

    안녕하세요, 화자입니다. 여기까지 오셨다면 다소 난잡하고 긴 글을 전부 읽으셨다는 뜻이겠지요. 이 글을 쓰기까지 무려 7개월이 걸렸네요. 원래는 2개월을 야금야금 쓰다 4개월 정도를 방치하고, 다시 한달을 이 글을 쓰는 것에 쏟아 부었습니다. 작가론을 쓴다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네요. 다가오는 만춘,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시나리오>가 공개된다고 합니다. 지저분한 글이라 그저 방치하려고 하였던 것인데, 이 글이 <시나리오>를 보실 분들께 약간의 참고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짧게 수정하여 급히 올리게 되었네요. 오래간 땀과 오기로 써내려온 글이라 이런 식으로 더욱 말하고 싶다는 미련이 남는가봅니다. 모쪼록 좋은 봄 보내시고 시간이 나신다면 전주영화제도 가보시기를 조심스레 제안드려봅니다.

    • 2025-03-27 12:21:00
    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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