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과 사별, 인생미션의 초입에서 - 공태인 감독의 <두 사람>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5-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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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살고 있는 엄마가 삼계탕을 먹으라고 자신의 딸 해은을 집으로 부른다. 해은은 보지도 않는 tv를 켜놓고, 밥상에서 이혼한 아빠를 언급하는 엄마와 한바탕 말싸움을 벌이고, 쓰레기를 버린다는 명목 하에 집을 나가버린다. 어둠이 드리운 밤, 해은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는 더 이상 집에 없다. 그녀는 넓은 거실에 쭈그려 앉아 홀로 Tv를 보다 새벽이 올 때까지 눈물을 흘린다.
표면적으로 모녀갈등을 담은 것처럼 보이는 공태인 감독의 단편영화 <두 사람>은 층위적으로 쌓아 올린 인간 내면의 복합성을 담고 있다. 영화에는 보이는 진실과 감추려는 진실들이 있다. 보이는 진실이 모녀갈등이었다면, 감추려는 진실은 그보다 깊숙한 곳에서 영화적 장치들에 의해 꽁꽁 숨겨져 있다.
<두 사람>에서 가장 어색하게 다가오는 것은 엄마의 존재이다. 영화의 초반부, 해은이 집에 들어올 때 영화는 텅 빈 거실과 고요한 햇살이 내려앉은 집안의 온기를 비추며 그곳이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 집인 양 묘사한다. 그러다 갑작스레 뒤바뀐 쇼트에서 희미한 TV소음이 영화 속으로 침투한다. 아무도 없던 집에 뜬금없이 TV가 켜진 것이다. 해은이 TV의 전원을 끄기 위해 서랍을 뒤지며 리모컨을 찾던 순간 엄마가 등장한다. 그녀는 집 내부에 있었던 것일까? 텅 비어있던 집에서 갑자기 등장한 존재. 관객은 엄마가 어디서 어떻게 나타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뜬금없이 그녀의 존재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처럼 엄마의 등장이 얼마나 어색한 것인지를 떠올려 본다면, 엄마라는 인물에 대한 의문들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간다.
한편 영화에서 눈에 띄는 또 다른 장면이 있다면, 그것은 옥상 창고의 고장난 문이다. 영화에는 제대로 닫히지 않아 삐그덕 거리는 옥상 다락방의 문이 여러 번 등장한다. 영화 속에서 문은 아무 서사적 영향력도 갖고 있지 않지만, 도저히 이어질 수 없는 영화의 쇼트와 쇼트를 이어주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가령 영화의 시간이 아침에서 밤으로 이동할 때, 그 개별적인 시간대를 포착한 두 쇼트 사이에 옥상 장면을 삽입해서 아침과 밤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해주고, 해은이 엄마와 언쟁을 벌이고 집을 나왔을 때, 집 내부에 있던 해은과 외부로 나온 해은을 사이를 연결해주는 식이다. 이 문은 집과 외부 사이, 또는 아침과 밤 사이라는 서로 다른 물질성을 지닌 (비)객체들 중간에서 공간성과 시간성, 그 어떤 것도 특기할 수 없는 모호성 속에 존재하고 있다.
영화 속 문의 존재가 처음 드러나는 것은 엄마의 말을 통해서다. 엄마는 해은에게 옥상 문이 고장 난 것 같으니 고쳐달라고 부탁하고, 옥상으로 올라간 해은은 자신이 문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열어둔 채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돌아온 해은은 엄마와 논쟁을 벌이게 된다.
밤이 오고, 해은은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집을 나왔을 때, 문득 열리 있는 옥상문을 보게 되고, 물통을 받침 삼아 문을 닫는다. 해은은 집으로 돌아오고, 우리는 또 다른 이상함을 깨닫는다. 엄마가 사라졌다. 영화는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가려버리고, 그저 혼자 남은 해은을 보여줄 뿐이다. 그녀는, 슬픈 눈으로 요란한 TV를 바라본다. 순간 그녀는 TV를 틀어놓던 엄마의 자리에 놓여지므로서 갑작스레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 이때 집과 밖, 아침과 밤이라는 양가적인 시공간을 연결시켜주고 있던 옥상문은 엄마가 집에 있을 때와 엄마가 집에 없을 때, 이 두 장면 사이에 놓여져 해은과 엄마의 관계 또한 연결시켜주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영화는 (엄마의 존재에 대한) 이상한 지점들을 두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너무 자연스럽게 지나가버린다. 도대체 무엇을 그렇게 숨기려고 하는 것일까? 아니, 질문을 바꿔서 영화는 왜 그런 이상한 지점들을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넘어가는 것일까?
<두 사람>은 영화적으로 완강한 태도를 고수하는 인상적인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단편영화의 특성상 어떠한 의문들은 영화 내부에서 풀어지지 않는다. 관객으로서 오직 추측으로만 영화를 상대하기에는 버거운 지점들 역시 있었다. 때때로 어떤 영화는 감독과 관객을 통해 성장한다. 또는 그 반대도 가능하다. 감독과 관객은 어떤 영화를 통해 성장하기도 한다. 여기서 히치콕과 트뤼포의 대담을 들이미는 것은 너무 진부한 일일까. 필자는 창작자의 입을 통해 확답을 듣는 것이 영화(와 우리)의 폭을 확장시켜 주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문득 공태인 감독을 만나고 싶어졌다. 서울에서 무작정 KTX표를 끊었다. 그리고 목포의 어느 예술 영화관, 독립 영화인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활달한 열정으로 내 고집스러운 질문들에 흔쾌히 답을 내어주었다. <두 사람>에 대한 논의는 이곳에서 시작됐다.
화자(이하 ‘화’) : (잠시 머뭇거리며)… 영화 속 어머니는 돌아가신 건가요?
공태인(이하 ‘공’) : 네. 맞습니다. (약간의 웃음)
화: 허. 영화를 두 번 보고서야 문득이 든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답은 그거밖에 없는 거 같더라구요. 너무 간접적이어서… 엄마가 돌아가신 게 아니고서야 영화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니깐.
공: 영화가 조금 불친절한 부분들이 있죠(웃음).
화: 아뇨, 오히려 엄마의 죽음에 대한 정보를 최소한 하고, 감추려는 게 더 좋았습니다. 아무래도 이 영화가 주인공 해은이 엄마를 이해해 나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듯이, 주인공이 엄마의 죽음에 대해서 부정하고, 그것에 대해 솔직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영화가 더 과감하게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는 진정성 있는 방식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공: 창작자 입장에서 그렇게 봐주시면 감사할 따름이죠.
화: 여튼, 좀 더 깊은 영화 이야기로 넘어가죠. 혹시 감독님께서는 <두 사람>을 만드시면서 특별히 참고했다거나,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는 영화들이 있습니까?
공: 영화를 만들 때, 처음부터 딱히 어떤 영화를 생각하고 만든 건 아니었어요. 제가 만들고 싶은 영화였으니깐요. 다만, 화자님이 그런 질문을 해주시니 오히려 화자님께서 제 영화를 통해 어떤 영화가 보였는지 궁금하네요.
화: 사실… 딱 이 영화와 같구나! 하고 생각난 것들은 없습니다만, 저로서는 최근에 본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더 원더스>가 떠오르더라구요. <더 원더스>의 구조적인 줄거리는, 자고 있던 집이 사냥꾼들의 소음에서 잠을 깨서 과거에 함께 살았던 아르투르인 가족들을 떠올리는 영화인데요, 그… 전체적인 부분에서… 기억을 더듬는다고 해야 하나? 과거의 인물(엄마)들을 불러내는 방식이 어느 정도 유사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두 사람>과 <더 원더스>가 여성 감독들의 첫 연출작이란 것도 어느 정도 공통된 지점들이 있고요.*(인터뷰 이 후 알게 된 사실로 <더 원더스>는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두번째 장편이라고 한다)
공: 아하. 아직 보지 못해서… 저도 꼭 한번 봐야겠네요.
화: 여기까지가 영화의 외부적인 이야기였다면, 이제는 완전히 <두 사람>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영화의 후반부, 해은은 열려있는 옥상문을 보고, 물통으로 다시 문을 닫습니다. 이때 영화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왜죠? 일종의 존중일까요? 죽은 사람과의 관계는 여기에서 고이 닫아두겠다는? 것도 아니면 추억을 다듬는 방식일까요?
공: 이 이야기는 사실 저의 자전적 이야기로 만들어졌어요. 다만, 실화와 유일한 차이점이라 하면, 실제로는 저희 어머니가 살아계시다는 점이 유일하게 다른 점이네요. 그 외 모든 대사 및 상황설정은 실제 겪었던 일들, 서로에게 했었던 말들을 가져다 썼다고 볼 수 있어요. 따라서, 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영화를 만드는 내내, 저를 투영하는 주인공을 바라보고 연출하는 일들이 모두 쉽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아픈 이야기를 영화화 한다는 것도, 서로에게 모질었던 두 캐릭터를 화면 속에서 정면으로 마주하고 바라보는 일도, 모두 쉽지 않았답니다. 그러한 부분들을 반영해서 인물 없는 옥상이 탄생했어요. 정면으로 마주하기엔 다소 겁나는 일들이죠, 그래서 바라보는 것이 쉽지 않은 마음을 반영해서 저를 투영한다고 볼 수 있는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는, 빈 옥상 씬으로 한 번 연출해 봤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실제로도 많이 아프신데, 현실에서도 우리 두 사람이 정말로 이별을 마주하게 된다면, 어머니에게 못해준 것들만 생각나서 마음이 많이 아플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고치려 해도 끝내 고치지 못한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하는 문 장면에서 아예 인물을 지워버리고, 문이라는 것에 조금 더 초점을 두기로 했습니다. 아무리 좋게 지내려고 해도 결국에는 삐걱거리는 두 사람이니까요. 또 다른 한편으로는 두 사람이 마음과는 달리 서투른 표현, 즉 반대적 표현을 하는 캐릭터와도 샷구성이 닮아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발짝 떨어져 보면 분명 굽이굽이 서로에게 향한 마음을 알 수 있는데도, 영화 속 두 사람의 표현은 늘 서투르죠.
화: 문은 서로의 관계에 대한 은유겠군요.
공: 그런 셈이죠. 그래서 끝내 고 치치 못하고 덜컹거리는 문을 양동이를 가져다가 받쳐두는 장면을, 조금은 불친절하게 표현해 봤어요. 항상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니깐요. 마치 두 사람의 관계와도 같아요. 표면적으로 보여지기엔 항상 싸우기만 하고 마치 서로를 미워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지만, 굽이굽이 보면, 결국 서로를 향한 마음 때문에 싸우는 두 사람이니까요.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형태죠. 딸은 어머니가 자신을 보고 싶어서 불렀다는 것을 행동으로 느끼기보다는 가장 가시적인 수단, 즉 ‘말’이라는 것을 통해 꼭 듣고 싶어 한다는 점. 어머니 입장에서는 ‘내가 나가라 했다고 진짜 나가냐.. 아무리 내가 나가라 했어도 너만큼은 내 곁에 있었어야 했던 거 아니냐’ 하는 뭐 그런 애정갈구의 형태입니다) 어쨌든 서로 다른 반대의 표현을 하는 두 사람을, 여러 가지 면에서 인물을 비워진 빈 옥상으로 표현해 봤습니다. 다소 첫 연출이라 서투르긴 합니다만..;
화: 서투르다뇨. 오히려 좋았습니다. 그리고 또… 영화를 보는 내내 눈에 띄었던 지점들 중 하나가 인물들이 대화하는 것을 보여줄 때, 보편적인 역쇼트들이 으레 그렇듯 해은의 시점에서 엄마의 시점으로 (또는 그 반대로) 바로 화면전환되지 않고, 해은과 엄마가 마주하는 모습을 옆에서 바라본 후에 타자의 시점으로 이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 관계에 대해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고장 난 것을 고장 난 채로 닫아두면서 그것을 바라보고 서로를 존중하려고 하는 태도가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 같아요.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또 다른 질문. 엄마를 불러들이는 것은 다름 아닌 tv 사운드입니다. 굳이 tv여야만 했던 이유가 있을까요?
공: 실제로도 저 혼자 틀어져있는 TV를 보면 자꾸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나는데요, 그만큼 현재든 미래이든 어머니를 떠올리기에는 가장 강력한 소재중 하나라서 TV로 시제전환을 해봤습니다.
TV는 혼자 사는 어머니의 불안감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데요. 보통은 집에 도둑이 잘 들지 않죠? 그러나 극 중 어머니는 집에 도둑이 들까 무서워 늘 불안에 떨면서, 사람이 없는 때에도 TV를 틀어두며 지내는데, 그 모습을 보고 해은은 유난 떤다는 정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해은의 클로즈업에 나왔듯이, 다른 한편으로는 그 불안감을 순식간에 이해하기도 해요. 저는 아직도 엄마가 유난 떤다고는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안타까운 부분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아무튼, 유난 떠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는 딸의 모습이 아니라, 그런 불안감을 가진, 마음까지 병든 어머니를 딸인 제가 조금만 더 너그럽게 이해하고 감싸줬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 어린 생각들.. 을 먼 미래의 제가 하고 있을 거 같고, 지금도 하고 있기 때문에.. tv라는 소재를 통해 한번 표현해 봤습니다. 과거에 쉽게 이해하지 못했던 마음을 뒤늦게 다시 한번 돌이켜보는 마음이랄까…
화: TV는 뿐만 아니라 타자와 나의 관계를 연결해 주는 매게로 기능하기도 하죠. 그런 의미에서 엄마와 나의 관계를 TV로 연결지은 점들이 무척 인상적이었다고 생각했는데, 감독님의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들으니 더 감회가 남다른 것 같습니다. 그리고…TV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영화 속 가장 이상한 점. 영화의 후반부, 해은은 거실에 쪼그려 앉아 (사실상 멍 때리고 있는 상태로) 의미 없이 tv를 봅니다. 이때 해은은 tv를 틀어놓던 엄마를 이해한 것처럼 보입니다. 또는, 그런 의미에서 엄마를 그리워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바로 전 장면에서 문은 여전히 고장 난 상태입니다. 문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해은은 그 문을 고장 난 상태로 닫아버렸습니다. 관계가 완전히 회복된 것인가요?
공: 멍 때린다기보다는 사실상 복잡 미묘한 감정으로, 많은 생각에 잠긴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구요. 그리고, 어머니를 과거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 와서 이해하게 된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어머니의 불안감을 알고 있었고, 지금도 알고 있지만, 그 마음을 품어주고 감싸주기에는 부족한 딸이었던 거죠.
그래서 이름 모를 죄책감도 스며들 것이고, 엄마의 외로움을 달래준 친구가 되어주었던 TV를 보며 많은 생각에 잠긴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말씀하신 것 중, 관계의 경우, ‘집이라는 경계선’ 밖으로 밀려난 해은이가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서야 그나마 경계선 안으로 다시 들어오게 되면서, 살아서는 온전한 화해를 하지 못한 두 사람이지만, 뒤늦게나마 일정 부분 화해했다고도 볼 수는 있는데요.
그렇다고 해서 막, 온전하게 그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어머니가 안 계시기도 하고, 살아계신다고 해서 과연 두 사람이 화해하고 잘 지낼까? 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죠. 화자 씨 말처럼, 굳이 앞 씬의 고장 난 문과 연결 지어 이야기해 보자면, 온전히 고친 것도 아니지만 어설프게 원복 해둔 문처럼, 온전한 화해라기보다는 집이라는 경계선 안으로 들어오면서 약간의 완화 정도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함께하기 어려운 두 사람이지만, 언제나 마음만큼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반영해 이 <두 사람>을 만들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화: 그렇군요... 그렇다면 또 다른 질문. 후반부 해은은 카메라를 등진 상태로 tv를 보고 있습니다. 이때 바닥에 놓여진 카메라의 시점숏은 마치 엄마의 눈 같습니다. 영화 속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 중 하나가 시점이 애매모호하다는 것이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서술한 장면 역시 엄마의 시점이라고 단정 짓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 영화가 가능한 많은 집의 사물들을 응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떠한 애정들이 묻어나 보였는데요, 감독님으로부터 영화 속 집에 대한 이야기와 시점숏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공: 네, 아무래도 엄마의 시점이라고 보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고요, 시점샷에 관한 부분은, 이 영화가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하다 보니.. 누군가 한 사람의 시점을 다루기에는 영화가 편파적으로 진행될 우려가 있다는 생각에 나름 객관적 시점으로 다뤘어요. 두 사람은 자신의 생각에만 빠져 상대의 마음을 제대로 보지는 못하니까요. 아무래도 인서트샷 등에서 애정이 묻어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람이 일정 기간 살지 않았다는 빈 집의 느낌과 공간의 허전함 등도 일부 담으려 했고요. 그리고, 이 작품 로케이션이 저희 pd님 외할아버님 댁인데요. 실제로 장소를 빌릴 당시, 외할아버님께서 병원에 입원 중이셔서 집이 비어있었기 때문에 대여 허락을 받은 것이었는데, 제작 준비 기간 때 갑자기 외할아버님께서 작고하셨어요. 그래서 집을 못 빌려주겠다고 번복하신다 해도 내심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pd님 어머님께서 빌려주시겠다고 다시 한번 허락해 주셨습니다. 어머님께서 제게, 이 영화를 만난 건 마치 운명과 같다고 하시면서, 집은 촬영 끝나는 대로 곧 처분할 예정이니, 그전에 마지막으로 이 집을 영화 속에 기록으로 꼭 잘 남겨달라는 말씀을 하시며 빌려주셨어요.. 너무 감사하고 울컥했죠.. 그래서 저도 이 집을 소중히 잘 다루고 또 잘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또한, 해은은 엄마의 집에 늘상 살고 싶었지만, 쫓겨났다는 점.. ‘집’이라는 것은 한 가정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해체된 가정의 이야기다 보니, 해은은 화목한 가정을 가장 원했을 겁니다. 그만큼 엄마의 집, 그러나 훨씬 더 앞 전에는 ‘우리 가족의 집’이었을 텐데, 그만큼 화목한 가정, 화목한 공간, 화목한 집을 항상 바래왔을 거고, 그러한 애정 가지고 있다 보니… 애써 찍은 인서트샷들을 버리기가 좀 어려웠고 최대한 잘 간직한 채 가져가고 싶었어요. 물론 몇 개는 편집되었지만...(약간의 웃음).
화: 영화를 보다 보면 해은을 집으로 부른 것은 엄마인 것 같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삼계탕을 해주겠다고 부른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단지 표면적인 이유일 뿐입니다. 진실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드는 질문은, 죽은 엄마를 현실로 불러내는 것은 그녀를 그리워(?)하는 해은이라는 점입니다. 즉, 어떻게 보면 혜은과 엄마 서로가 서로를 불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가 시작된 지점들이 매우 궁금합니다. 엄마를 깨운 것은 해은의 그리움과 tv소리입니다. 반대로, 혜은이 엄마의 집으로 가도록 그녀를 깨운 것은 무엇일까요?
공: 시작하게 된 지점은.. 엄마와 딸의 갈등을 그린 장편 시나리오가 저의 첫 번째 시나리오인데, 장편을 바로 제작하게 되는 감독은 드물기에, 단편작품부터 시작하게 됐어요. 어떤 이야기를 쓰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가장 나 다운 작품은 뭘까?’라는 고민 끝에, 장편 시나리오의 샘플 같은 버전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예전에 엄마가 백숙을 해준다 해놓고 약속을 여러 번 어겨서 두고두고 서러웠던 게 생각나기도 했구요. 그렇지만... 단순히 먹고 싶은 음식을 못 먹어서라기보다는, 우리가 진정한 이별을 맞이하면, 엄마의 모든 흔적조차 사라지는 느낌이라 어머니 살아계실 때 레시피를 배워둬야겠다는 생각도 했었거든요. 그리고 실제로 백숙(실제로는 옻닭)을 잘하시기도 하고요. 해은이 집으로 가도록 깨운 것은 ‘가족(화목한 가정)’이란 단어에 대한 바람 때문이라 생각해요. 경계선 밖에 밀려난 해은은 항상 ‘가정’이라는 따듯한 울타리 안으로 늘 들어오고 싶었을 겁니다. 싸우는 가정이 아닌 정말 따듯하고 화목한 가정이요. 비록 어머님 살아계실 때는 매번 화목하지 못한 가정으로 가게 되지만, 싸우던 기억조차 이제 그녀에겐 아픈 향수가 되었을 테니까요. 또한 어머니가 집을 물려주지 않을 수도 있는데, 영화 속 엔딩에서는 결국 집을 물려주게 되는 설정입니다. 실제로 어머니가 집을 물려주실지는 모르겠지만, 돈의 가치를 떠나 그 집에 다시 들어가서 살고 싶은 저의 바람이 이 영화의 전개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면 될 거 같습니다.
화: 영화의 초반부, 엄마는 도둑이 들까 봐 tv를 틀어놓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엄마의 등장 역시 tv와 함께 시작되죠.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엄마가 리모컨을 찾기 위해 서랍을 뒤지던 해은에게 한 첫 대사는 의미심장합니다. "남의 집에서 뭐 하니. 도둑고양이처럼". 이 영화를 엄마의 시각으로 볼 때, 해은은 엄마의 집을 뒤지는 도둑입니다. 동시에 손님이기도 하죠. 영화의 마지막 장면. 엄마는 사라지고 해은 혼자 남을 때 우리는 도둑이 자신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tv를 보며 씁쓸해하는 광경을 목도하게 됩니다. 이 관계를 도둑과 주인으로 묶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지만, 영화 내에서의 설명으로 그 관계를 부정하기에는 약간의 어려움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혜은이 tv에서 서랍을 뒤적거리고 있을 때, 그것은 무얼 위한 뒤적거림이었을까요?
공: 해은이 뒤적거린 건 TV를 끄기 위해 리모컨을 찾는 것을 어머니가 마치 훔쳐가는 도둑으로 오인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평소에도 그런 오해어린 취급을 많이 받아왔음을 알 수 있기도 하구요.
그리고 또, 도둑이라는 대사는 혼자 사는 엄마의 불안감을 의미하는 것인데, 추후 도둑이란 대사에 기분 나빠진 해은이 엄마의 불안감을 상징하는 단어인 ‘도둑’으로 맞받아 칩니다. ("왜 그 사람도 도둑놈 같아?") 서로의 상처를 건드는 느낌이랄까요.
화: 불안과 경계 속에 담겨진 인물들을 표현하시려고 하신 거군요.
공: 네.
화: 그렇다면 가장 궁금한 한 개의 질문. 영화 속 가장 궁금한 것은 아버지의 자리입니다. 영화에서 아버지는 그저 엄마의 '너네 아빠는 잘 지낸다니?' 하는 질문으로 언급될 뿐입니다. 그 마저도 딸이 질문을 얼버무리는 식으로 진행되죠. 이때 영화는 엄마와 딸을 전부 프레임에 잡습니다. 딸과 엄마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은 아버지 같습니다. 그러나 영화에 아버지에 대한 애정은 없습니다. 그 이 후로도 영화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희미하고요. 감독님에게 <두 사람> 속 아버지의 자리란 무엇입니까?
공: 아버지는 딸 해은이 지켜야 할 대상입니다. 해은과 아버지가 같이 쫓겨났죠? 그래서 해은은 엄마를 향한 원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도, 자신도 쫓아냈기 때문에. 영화 속에선 그 정도의 정보마저도 알기 어렵죠. 개인적으로는 퍼즐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는데… 기회가 온다면 그때 아버지의 자리에 대해 조금 더 담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화: 어느덧 시간도 많이 지났고… 형식적인 질문 몇 개를 드리며 인터뷰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감독님의 첫 연출작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 영화를 만들기에 앞서 들었던 생각들과 첫 만들고 난 이후의 소감이 궁금합니다.
공: 만들기 전에는 '마음 아프다' 정도였던 것 같고, 만들고 난 소감은…(머뭇 거리다) 만들 당시에는 그렇게 괴롭고 힘들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나에게 웃는 일도 가져다주는 걸 보니 아픈 시간을 잘 견뎌냈기에 주는 상처럼 느껴져서 많은 감정이 드는 것 같습니다. (주석- 공태인 감독의 두 사람은 목포국도1호선독립영화제에서 본상을 수상했다)
화: 이제는 우리가 마지막 질문을 해야 할 시간. 감독님에게 묻겠습니다. 첫 연출작 <두 사람>을 만든 지금, 감독님에게 있어서 ‘영화’란 무엇입니까?
공: 어려운 질문이네요…(잠시 고민) … 저에게 영화란 인생미션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너무 좋아하니깐. 아무리 힘들어도 저에게 주어진 의무라고 할까요. 적어도 제게 영화는 그래요.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할 수 없는 인생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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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근대를 살아간다는 일은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세계에 발맞춰 유동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과 같다. 당장만 보아도 불과 2년 전(2023년) 출시되어 큰 반항을 일으켰던 인공지능 서비스 Chat GPT가 어느새 우리의 일상 - 업무, 학업, 유흥 등 - 에 천착해있다는 사실은 시대적 감각을 가늠케 한다. 뿐만 아니라 정식적으로 보급된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은 스마트폰 역시 우리가 일상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의식주, 의사소통, 유흥욕구 등)을 편리적으로 소비/사용 하도록 돕고, 보다 나아가 개인정보를 통해 그 사람의 실존적인 문제를 증명하며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필수품처럼 보편화되어 세계적인 문화가 되었다는 사실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급진적으로 기술과 문화 발전의 변화를 포용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상은 급변하고, 사람들은 정신없이 세계를 쫓는다. 발 빠르게 기술과 문화를 수용하는 이 시대의 유동성만큼, 내외부에서 끊임없이 사고하고 운동하는 인간의 유동성은 그 시대의 변화들을 가능케 했다. 그렇기에 (칼 마르크스의 말을 빌려보자면), 이 시대에 변화하지 않는 것, 급변하는 근대에서 운동하지 않는 상태로 존재하는 “모든 고체는 대기 중으로 사라진다”. 그곳에는 어느날 섬광처럼 번쩍 등장해서 사라지는 일시적이고 유한한 유행과 기술들만이 존재할 뿐이고, 모든 부동한 고체들은 유동적인 세계의 산성에 의해 융해된다.망각과 부활 - 경복궁 월대와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을 중심으로이런 세상에서 과거와 역사를 되살펴보는 일은 더욱 중요하고 조심스러운 일이 되고 말았는데, 그것은 곧 유동적인 세계에서 자신만의 역사를 지닌 채 특정 장소에서 미동 없이 머물고 있는 부동(不動)의 고체(또는 정물)들을 살펴보는 것에 다름 아니게 되었다. 그렇기에 오늘날 유동하는 세계 속에서 특정 장소에 고정되어 있는 ‘고체’들은 단지 과거의 잔재가 아니라, 잊고 있던 진실을 환기시키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근래에 재건된 경복궁의 월대는 그러한 사례의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일 것이다. 월대는 예로부터 왕이 걷는 도보라는 의미로 여겨져 왔다. 그것은 단지 오랜 기간을 버텨온 역사적 건축물 - 경복궁 월대가 처음으로 논의된 것은 14세기의 일이고, 조성된건 18세기 후반의 일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4세기를 거쳐서 완성되었다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 일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왕이 행차해왔던 길이라는 점에서 조선왕조의 상징과도 같은 건축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일제가 ‘철도'를 건설하겠다는 이유로 1924년 경복궁 월대를 파괴했을 때, 그곳에는 ‘전철’이라는 조선의 근대화의 상징이 떠오름과 동시에, 조선의 역사/권위적 상징과도 같은 왕의 길을 부숴버리므로서 조선의 역사를 부정하고 민족의식을 뿌리 뽑으려던 악의적인 의도가 암암리에 공존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국가의 지도자의 실권상실(순종의 죽음, 1926년)과, 민족문화역사의 폄훼와 왜곡(문화통치 1920년)으로 직결되어 조선의 국성을 뒤흔드는데 선험적으로 일조했다. 그러므로 일제 식민지배 치하에 파괴되어 버린 경복궁의
- 화자
- 2025-05-07
고다르의 죽음 : 늦었지만, 이른 늦-초가을의 추도문그러니깐, 2022년 어느 늦여름이었다. 늦여름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도보에 떨어진 낙엽이 가끔씩 눈에 들고는 하는 가을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었으므로 나로서는 이 시기를 무어라 단정짓기 어려운 것이었다. 수요일이었고, 몸이 아파 학교를 조퇴한 상태에서 여느날과 다름없이 영화 한 편과(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 영화는 아마 테렌스 멜릭의 였을거다) 도서 한 권을 곁에 두고 하루를 여유롭게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당신의 부고소식을 들었다. “누벨바그의 거장, 조력자살로 생을 마감하다”기사가 떴다. 당신의 이름은 고다르. 어디선가 스쳐가듯 들어본 적 있었으나, 당신은 내게 어색한 사람이었고, 난 어정쩡 그날 오후를 보냈던 것 같다. 그로부터 조금의 시간이 지나, 2023년의 겨울 끝자락 무렵, 당신의 영화들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본 세 편의 영화. 와 , 그리고 . 당시에는 그냥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무슨 이런 영화가 다 있지, 싶은 정도. 그랬던 나는, 어느새 장 피에르 멜빌을 존경하던 당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새뮤얼 퓰러와 프리츠 랑을 사랑하던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 당신이 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풀어놓기에는 너무 늦은걸까. 당신은 이 세상에 없다. 이 글이 쓰여지기 불과 얼마 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당신의 압도적인 지력으로 세계 영화사와 시네마의 의미를 탐구하는 걸작 과 를 다시 보았다. 영화를 보면 볼수록 당신에 대한 나의 마음은 싹 트는데, 내가 보지 못한 당신의 영화는 이제 과 단 두 편 뿐이다. 이제 그 마음마저 끝에 다다르고 있는 것일까. 끝내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나는 그 두 편 보기를 계속 미루고, 당신의 작품들을 여러번 돌려보고 있다.그러던 중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당신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두 편의 영화를 상영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목은 . 가 극장에서 상영되는 건 이번이 두번째인 것으로 알고 있다. 첫번 째는 칸 영화제였다. 그곳에서 를 상영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프랑스에 가려고 애썼다. 물론 가지는 못했다. 그렇게 상영일이 지났을 때, 나는 좌절했다. 미치도록 보고 싶은 영화가 바로 당신의 것이었다. 이건 내가 시네필로서 당신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다. 그리고 반 년의 시간이 흘러 그 영화가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이번이 아니면 당신의 영화를 볼 기회는 정말 없을지도 모른다. 방학시기와 여행시기가 맞물려 운좋게도 토론토국제영화제에 갈 수 있었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건, 당신의 유작이 상영되었던 상영일이 당신의 기일이었다는 것이다. 선선한 저녁이었고, 내가 당신의 부고를 들었던 날이기도 했다. 지금이 2024년이라는 것만 의식하지 않게 되어버린다면, 나는 마치 당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경계에 우두커니 서있게 되었다. 알 수 없는 감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당신은 이 세상에 없지만, 그 누구보다 이 세상에서 강
- 화자
- 2025-03-26
장 뤽 고다르의 유작 2편 중 처음으로 공개되었던 은 다소 급진적이고 정치적이었던 고다르의 ‘영화 행위(Filming)’를 종결짓는 마지막 보루다. 무엇보다, 감동적이다.고다르는 을 만들고 나서 또 하나의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다. 제목은 미정의 장편이었지만 프랑스의 소설가 플리스니에의 소설 에 수록된 단편 “샤를로테”를 각색한 영화였다. 그러나 고다르는 늙었고, 내용은 다소 어려웠으며, 아무도 영화를 위해 투자하지 않았다. 영화는 여러번 제작이 무산되었다. 마지막까지 고다르의 곁을 지켰던 그의 조수 파브리스 아가리노에 의하면, 그즈음 고다르는 자신 스스로 더 이상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고다르는 영화 제작하기를 관뒀다. 대신 그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모아둔 여러 이미지와 텍스트 자료들을 조합해두었던 자료집을 재구성해서 전자문서로 변환했고, 이 후 그 곳에 나레이션을 입히고 간단한 편집작업을 거쳤다. 그러자 그 자료들은 고다르가 원하던 영화의 형태로 얼추 뼈대를 맞추게 되었던 것이다. 그게 바로 이다. 이건 고다르가 원했던 완전한 형태의 영화가 아니라, 그 영화를 만들기 위한 일종의 자료 콜라주를 영화화시킨 것이므로 피상적인 ‘예고편’ 정도에 불과했다. 제목이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인 까닭은 그래서이다. 이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고다르는 존재하지 않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애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자신의 초상을 그리듯, 영화의 도입부에서 “어두운 방에서 검은 고양이를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특히 그것이 없더라면 더욱이 어렵다.(It’s hard to find a black cat in a dark room, especially if it’s not there.)” 라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며 고다르는 본작의 핵심을 알려주며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이 후 다음과 같은 텍스트와 이미지가 등장한다. (영화 이미지)A. ‘우리들의 전쟁은 멀리서 다가오는 하나의 이미지와 같다. 그곳에는 두개의 이미지가 나란히 놓여있다. 그녀와 나. 그녀 다음에 내가 있지만, 난 그녀를 만난 적 없다. 그저 인지할 뿐이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Our war, It's like...an image that comes from far away. There are two of them, side by side. next to her is me. I’ve never seen her before.)’고다르는 위 문장을 통해 이미지들에게 ‘그녀와 나’라는 육체를 부여한다. 이미지들은 비로소 탈-이미지화되어서, 더 이상 이미지가 아니게되고, 그 자체로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된다. 고다르는 이미지에 대한 사유를 시작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나간다.그다음 영화는 여러 이미지(영혼)들의 배열과 조합을 보여주고, 나레이션으로 전쟁에 대한 참상을 묘사한다. 쇼스타코비치의 현악 4중주 8번의 음악이 등장하고,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와 샹탈 아커만의 사진이 보인다. 고다
- 화자
- 2025-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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