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이체르 소나타와 상업 문학 Op.22
- 작성자 기능사
- 작성일 2025-05-07
- 좋아요 0
- 댓글수 1
- 조회수 895
‘우리가 섹스의 대상이기만 하면 좋겠지? 좋아. 대신 당신들을 노예로 만들겠어’
크로이체르 소나타 중
톨스토이. 많이 들어본 이름 아닌가? 작품은 몰라도 이름은 알 것이고 대체로 작품을 기억하는 것도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전쟁과 평화니 안나카레니나니 하는 것부터 단편선이나 이반일리치의 죽음, 바보 이반 같은 작품들도 꽤나 유명하다. 그러나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어떤가? 톨스토이의 연대기에 짧게 나와있는 것이 전부일뿐이다. 그나마 찾을 수 있는 설명들은 금욕주의니 섹스에 대한 혐오니 하는 단어들 때문에 언뜻 보면 톨스토이는 노망 난 반동적인 노인네처럼 보인다. 그러나 분명히 밝혀두건대, 비록 그가 반동이라 할지라도, 그는 완전히, 정열적으로 순수하게 무모순적인 인간 해방을 위해 노력했던 이상주의자였다. 나는 그를 반동이라 표현하느니 가장 급진적인 진보주의자라 부를 것 같다.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그래서 어떤 소설인가? 그것은 그 내용 그 자체(내용 그 자체는 조금의 가치도 없다)보다 그것의 사상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한 가지의 질문을 던지겠다. 사랑은 어떻게, 얼마나 인간을 구성하는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인간이 있는 반면에 그를 부정하는 이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수많은 사람들(역사에서나 지금이나)은 사랑으로부터 살아가야 할 이유와 젊음을 소모해야 할 당위를 얻는다는 것이다. 부수적으로 글 쓰는 많은 사람들에게 직업을 제공했다(로맨스 장르 하나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경쟁하는지 보라). 사랑은 꽤나 중요한 감정이다. 인간과 인간을 결합시키면서 동시에 감정적 만족을 주고 상당히 많은(대체로 우리가 역사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사람은 그런 영향에 거의 종속되다시피 했다) 제도적인 장치와 문화를 남겼다. 자유로운 개인 간의 연애가 확산된 지는 꽤나 오래됐다. 그러나 반동적인 구조가 남아있는 것은 현대의 우리나 톨스토이 시절의 러시아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헤테로섹슈얼에서 다루어볼 것은 3가지가 있다. 섹스, 로맨스, 그리고 관계와 결혼이다. 섹슈얼리티와 로맨스는 본질적으로 성질은 거의 완전히 같다. 모두 상대를 필요로 하며, 독립적인 욕구다. 섹슈얼리티는 선천적이지만 로맨스는 다소 그 구분이 모호한 것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것이 어떻든, 로맨스 또한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부분이 적지 않은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그 둘은 대체로 비슷한 성질을 띄며 서로 연관되어 나타나고 또한 수많은 매체에서 다양하게 표현되고 출판된다. 다만 섹슈얼리티는 어느 정도 접근에 제한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러나 로맨스는 맥락을 불문하고 섹슈얼리티보다 우월하며 도덕적으로 옳은 것처럼 취급된다. 대중에게 자주 노출되는 것도 있지만, 문학이 로맨스를 신성시하는 게 크다고 본다. 로맨스는 어째선지 다른 모든 감정과 욕구를 들을 초월하여 훌륭하고 권장할만한 것으로 포장되어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하면, 로맨스는 섹슈얼리티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사람이 평생 섹스만 하며 살 수 없듯이, 로맨스도 어느 순간에서는 섹슈얼리티처럼 완전히 사그라들어 알아차릴 수 없는 때가 온다. 그럴 때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다! 완전히 발가벗겨진 인간말이다! 성적으로도, 연인으로도 매력적이지 않은 완전히 평범해진 인간말이다! 연인은 사랑할 수 있고, 파트너는 사랑할 수 있지만, 그 ‘인간’은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묶여버린 관계는 지옥이 되는 것이다.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익히던지 아니면 어설프게 수평적이고 경직된 우리 시대의 연인이나 배우자의 관계는 꽤나 사랑의 달콤한 속삭임들만큼 오래가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일단, 사랑이란 또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우리의 연인들은 서로를 서로에게 묶어두고 종속시켜야 하는가?
그 로맨스를 위해 이루어지는 희생들을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에서 멋있다거나 값을 올려 부르곤 한다. 그러나 진정한 희생이란 뭔가? 자아라는 개념의 포기 없이는 희생은 생각될 수도 없고 실천될 수도 없다. 비단 목숨의 포기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떤 목적에 대한 의지로 스스로 생각하는 기계로 돌아가겠다는 자기 인식의 전환 말이다. 그 결과로 로맨스와 섹슈얼리티와 연인으로서의 종속을 비롯하여 상대에게 가지는 모든 요구와 욕구들의 포기로 까지 돌아가야 한다. 그런 욕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어떤 목적, 사랑이라는 목적 아래에, 그것을 요구할 권리마저도 포기해야한다. 사랑은 그런 것이고 그래야만 하는데, 로맨스는 책장 그런 자기희생은 책장 뒤로 던져버리고 신비감과 만족감을 보여주며 마치 자기희생따위는 조금 뒤에 생각해도 되는 문제처럼 말한다.
혹자는 자기희생의 필요성에 부동의 할지도 모른다. 그럼 되묻겠다. 그대가 생각하고 있는 그 사랑은 계약과는 어떻게 다른가? 자기자신을 남겨 두고 요구 받는 것을 떼어주고 요구하는 것을 가져오는 것이 계약과는 어떻게 다를 수 있는가? 역설적으로, 인간 존재간의 평등한 사랑은 존재의 포기이외에서는 불가능하다.
톨스토이가 원래 하고자 하던 말은 로맨스나 섹슈얼리티나 아가페에 대한 방해만 될 뿐 그 자체로는 모순 덩어리인데다 안정적이지도 않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유에 대한 사랑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한 사람을 사랑하는게 모든 것의 목표인 사람도 있을 것 아닌가?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나 이런 글을 읽을 것 아닌가?) 톨스토이적인 짧은 성찰을 해보았다.
추천 콘텐츠
Ⅰ. 서론 – 뮤지컬에서 넘버는 왜 서사의 언어가 되는가 연극에서 인물은 대사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낸다. 그러나 뮤지컬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말만으로 더 이상 감정을 담아낼 수 없는 순간 이야기를 노래로 넘긴다. 이때 뮤지컬의 넘버(Number)가 맡는 역할은 극의 분위기를 환기하거나 음악적 즐거움을 더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넘버는 인물의 내면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또 하나의 대사이자 서사를 움직이는 핵심 장치다. 뮤지컬을 감상하다 보면 유독 오래 기억에 남는 노래들이 있다. 흔히 ‘대표 넘버’라 불리는 이 곡들이 기억되는 이유는 멜로디의 아름다움이나 대중적 인지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대표 넘버는 인물이 삶의 전환점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거나, 더는 외면할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 그 순간 음악은 이야기의 흐름을 멈추기는커녕 이야기가 나아갈 방향 자체를 결정한다. 뮤지컬에서 음악은 감정을 설명하는 대신 경험하게 만든다. 배우의 호흡은 점차 거칠어지고 선율은 인물의 심리 변화를 따라 오르내리며 리듬은 흔들리는 마음을 그대로 담아낸다. 여기에 가사와 오케스트레이션, 연기와 무대 연출이 더해지는 순간 하나의 넘버는 독립된 음악을 넘어 한 장면, 한 서사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비평은 ‘뮤지컬 넘버는 어떻게 인물의 서사를 음악으로 완성하는가’ 라는 질문에서 출발하였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사랑과 성장이라는 전혀 다른 서사를 다루는 두 작품이자, 필자가 가장 인상 깊게 봤던 뮤지컬인 『베르테르』와 『킹키부츠』를 선정하였다. 장르와 시대, 음악적 색채는 다르지만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이 삶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마다 넘버를 통해 내면을 드러낸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본 비평에서는 『베르테르』의 넘버 「어쩌나 이 마음」과 「발길을 뗄 수 없으면」, 『킹키부츠』의 넘버 「Step One」과 「Soul of a Man」을 중심으로 가사, 선율, 리듬과 템포, 배우의 음악적 표현, 장면 연출이 인물의 감정선과 서사에 미치는 영향을 비교·분석할 것 이다. 네 곡 모두 주인공이 직접 부르는 대표 넘버이자 서사가 가장 크게 전환되는 순간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했으며 각 넘버가 왜 하필 그 장면에서 울려야 했는지 그 노래가 없었다면 인물의 서사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를 살펴봄으로써 넘버가 음악을 넘어 인물의 삶을 완성하는 언어임을 고찰하고자 한다.Ⅱ. 『베르테르』 뮤지컬 『베르테르』는 주인공 베르테르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다루지만 그 사랑은 화려하거나 극적인 사건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작품은 한 사람이 감정을 자각하고, 그것을 억누르려 애쓰다가, 끝내 그 감정에 잠식되어 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따라갈 뿐이다. 이러한 서정적인 심리의 결은 대사만으로는 다 담아내기에는 관객에게 충분히 전달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그 순간마다 넘버가 등장한다. 베르테르의 넘버는 이미 정리된 감정을 노래로 옮기는 도구가 아니다. 그는 노래를 부르는 과정 자체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스스로도
- 시유레
- 2026-07-10
나는 이 영화를 처음 본 그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그 기억을 살려 다시 한번 충격에 빠져보고자 이 글을 쓴다.첫 장면은 드럼 소리로 시작한다. 처음부터 긴장감이 흘렀다. 어두운 화면에서 일정한 간격의 드럼 소리가 흘러나오다가 드럼과 함께 이 영화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앤드류가 나온다. 앤드류는 또 다른 주인공인 플래처 교수의 강의실을 바라보기만 하며 선뜻 다가가지는 못한다. 앤드류 역시 플래처의 제자가 되기를 바랐지만 말하지 못하는 앤드류가 그때는 참 소심해보였다. 결국 플래처가 앤드류의 연주를 보게 되지만 문을 닫고 나가버린다. 하지만 곧 앤드류를 자신의 수업에 불러들인다. 이때까지는 희망적이었다.그러나 이는 곧 절망으로 돌아선다. 플래처 교수는 지속적으로 앤드류를 괴롭혔다. 여기까지는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관점에서 글을 써보고자 한다. 왜 앤드류는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도 플래처의 곁을 떠나지 못한 걸까? 이 영화를 보면 가족과의 식사 장면에서 다른 가족들은 모두 자랑을 늘어놓으며 앤드류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가족조차도 무시했던 앤드류를 인정해주고 받아준 사람은 플래처 교수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플래처를 영화의 제목에서처럼 위플래쉬(채찍)만을 휘둘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플래처는 앤드류에게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주었다. 강압적으로 몰아붙였지만 앤드류한테 잘할 수 있다고 말해준 것 또한 플래처 교수였다. 앤드류에게 메인 드러머를 맡긴 것도 플래처였다. 즉 그런 식으로 앤드류가 떠나지 못하도록 정서적 감옥에 가둔 채 꼭두각시 인형처럼 갖고 놀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강압적이라고만 생각했으나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플래처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앤드류에게 기회를 주고 다시금 희망을 빼앗으며 앤드류를 지배하고 있다는 감정 자체를 즐기고 있었던 것 같다.앤드류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 앞서 말했듯 앤드류는 소심한 아이였다. 플래처의 행동에 눈물을 보이던 여린 아이였는데 본인이 쟁취한 메인 드러머 자리가 다른 드러머로 대체되려 할 때 플래처에게 크게 화를 내며 둘은 싸움이 일어났다. 가장 놀랐던 부분은 대체 드러머가 상황을 말리려 할 때 그에게 소리치며 인신공격을 포함한 욕설을 했다는 사실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모습에 앤드류의 간절함과 함께 그가 점점 플래처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음을 느끼며 안타깝고 두려웠다. 메인 드러머 자리를 차지하려는 과정에서 스틱을 가져오는 길에 크게 교통사고가 난다. 온몸에 피를 흘리며 피가 잔뜩 묻은 손으로 스틱을 잡은 채 모두의 만류에도, 플래처의 호통에도 공연을 강행하였다. 하지만 뜻대로 손이 움직여주지 않았고 스틱을 놓치는 등 공연을 망쳐버렸다. 플래처의 공감 능력의 결여를 느낄 수 있었던 부분은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픈 앤드류를 달래기는커녕 그 자리에서 앤드류에게 '넌 이제 끝이다.'라는 말을 내뱉고는 돌아선 것이다. 이에 화가 난 앤드류는 플래처와 몸싸움
- 캔디
- 2026-07-08
대부분의 한국 고전 산문들은 인과응보와 권선징악을 띄고 있다. 당장 ‘홍길동전’과 ‘장화홍련전’의 결말을 두고 비교해봐도 그렇다. 두 작품 모두 악인은 벌을 받고 선인은 복을 받는 결말이다. 이러한 구성 방식과 결말은 한국 근대 이전의 소설들 속에서 주를 이뤘다. 그러나 권선징악과 인과응보는 한국 고전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도 상업 소설인 웹소설, 상업 드라마, 상업 영화 등 대중적인 이야기 플롯에서 자주 등장한다. 이는 일종의 모티프다. 이런 모티프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유지되기도 한다. 그중 인과응보, 권선징악이라는 모티프는 전 세대에 걸쳐 과거에서 현재까지 매체와 서술 방식을 변주하며 계속 나타난다. 특히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상업 드라마라는 이름으로 권선징악과 관련된 모티프가 자주 나타난다. 상업 드라마에서 권선징악, 인과응보를 보여주는 드라마 중 일부는 복수라는 장르를 내세우기도 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김순옥의 ‘아내의 유혹’, ‘펜트하우스’, sbs 시리즈 드라마 ‘모범택시’, ‘열혈사제’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복수극도 개인에 이야기만을 하는 드라마와 개인을 넘어 사회까지 유효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드라마로 나눌 수 있다. 이로 볼 때 김순옥의 ‘아내의 유혹’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복수로 그려진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모범택시’ 시리즈, ‘열혈사제’ 시리즈는 개인과 개인을 넘어 현실 사회 문제도 건드리는 복수극이다. 따라서 ‘열혈사제’와 ‘모범택시’ 시리즈는 각종 사회 문제를 시리즈별로 이야기하여 그려낸다. 반면, ‘아내의 유혹’은 구은재와 신애리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복수를 그려내고 있다. 이런 차이점은 각각 드라마의 결말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김순옥의 ‘아내의 유혹’은 악역인 신애리와 정교빈이 죽음으로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며 극이 마무리된다. 그러나 주인공인 구은재는 그들이 받은 벌을 보고도 행복해하지는 않는다. 구은재는 신애리에게 피해를 받은 피해자기도 하지만, 그녀에게 신애리는 친구이자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복수의 성공이 결코 행복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역으로 한때 악역이었던 애리를 용서하는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결말을 맺는다. 반면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 실현으로 복수를 진행하는 ‘모범택시’ 시리즈와 같은 드라마는 무지개 운수라는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집단이 사회 문제를 대표하는 사건을 해결하는 식으로 에피소드별 결말을 맺는다. 그 과정은 복수극과 복수 대행 서비스 안에 맞춰서 폭력적이고, 역지사지의 방식으로 진행되고 해결된다. 그 과정에서 시청자는 악인을 폭력으로 제압하고 벌하는 모습을 보며 고양된 감정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런 카타르시스 안에는 사회정의라는 이름에 감춰진 폭력이 존재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단어가 바로 ‘참교육’이다. 참교육은 본래, 참된 교육이라는 뜻으로 선생이나 어른이 진정으로 학생들을 위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가르치고 지도하는 일을 뜻한다. 현재까지도 교육 현장에서 교사들이 지향해야 하는 교육이 바로
- 송희찬
- 2026-06-29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