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와 역사의 비탈에서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5-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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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근대를 살아간다는 일은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세계에 발맞춰 유동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과 같다.
당장만 보아도 불과 2년 전(2023년) 출시되어 큰 반항을 일으켰던 인공지능 서비스 Chat GPT가 어느새 우리의 일상 - 업무, 학업, 유흥 등 - 에 천착해있다는 사실은 시대적 감각을 가늠케 한다. 뿐만 아니라 정식적으로 보급된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은 스마트폰 역시 우리가 일상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의식주, 의사소통, 유흥욕구 등)을 편리적으로 소비/사용 하도록 돕고, 보다 나아가 개인정보를 통해 그 사람의 실존적인 문제를 증명하며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필수품처럼 보편화되어 세계적인 문화가 되었다는 사실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급진적으로 기술과 문화 발전의 변화를 포용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상은 급변하고, 사람들은 정신없이 세계를 쫓는다. 발 빠르게 기술과 문화를 수용하는 이 시대의 유동성만큼, 내외부에서 끊임없이 사고하고 운동하는 인간의 유동성은 그 시대의 변화들을 가능케 했다.
그렇기에 (칼 마르크스의 말을 빌려보자면), 이 시대에 변화하지 않는 것, 급변하는 근대에서 운동하지 않는 상태로 존재하는 “모든 고체는 대기 중으로 사라진다”. 그곳에는 어느날 섬광처럼 번쩍 등장해서 사라지는 일시적이고 유한한 유행과 기술들만이 존재할 뿐이고, 모든 부동한 고체들은 유동적인 세계의 산성에 의해 융해된다.
망각과 부활 - 경복궁 월대와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이탈리아 여행>을 중심으로
이런 세상에서 과거와 역사를 되살펴보는 일은 더욱 중요하고 조심스러운 일이 되고 말았는데, 그것은 곧 유동적인 세계에서 자신만의 역사를 지닌 채 특정 장소에서 미동 없이 머물고 있는 부동(不動)의 고체(또는 정물)들을 살펴보는 것에 다름 아니게 되었다. 그렇기에 오늘날 유동하는 세계 속에서 특정 장소에 고정되어 있는 ‘고체’들은 단지 과거의 잔재가 아니라, 잊고 있던 진실을 환기시키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근래에 재건된 경복궁의 월대는 그러한 사례의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일 것이다.
월대는 예로부터 왕이 걷는 도보라는 의미로 여겨져 왔다. 그것은 단지 오랜 기간을 버텨온 역사적 건축물 - 경복궁 월대가 처음으로 논의된 것은 14세기의 일이고, 조성된건 18세기 후반의 일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4세기를 거쳐서 완성되었다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 일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왕이 행차해왔던 길이라는 점에서 조선왕조의 상징과도 같은 건축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일제가 ‘철도'를 건설하겠다는 이유로 1924년 경복궁 월대를 파괴했을 때, 그곳에는 ‘전철’이라는 조선의 근대화의 상징이 떠오름과 동시에, 조선의 역사/권위적 상징과도 같은 왕의 길을 부숴버리므로서 조선의 역사를 부정하고 민족의식을 뿌리 뽑으려던 악의적인 의도가 암암리에 공존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국가의 지도자의 실권상실(순종의 죽음, 1926년)과, 민족문화역사의 폄훼와 왜곡(문화통치 1920년)으로 직결되어 조선의 국성을 뒤흔드는데 선험적으로 일조했다. 그러므로 일제 식민지배 치하에 파괴되어 버린 경복궁의 월대가 지니는 의의는 결코 적지 않다.
그렇기에 어엇 한세기가 지난 지금, 경복궁 월대가 복원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해 볼 만하다. ‘월대라는 고체(또는 정물)’의 부활은 우리로 하여금 여전히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일제의 잔재라는 유령을 소환하고, 일본의 만행을 수면 위로 공론화시켜서 우리가 망각하고 있던 역사적 진실(또는 역사적 의식)을 날카롭게 고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원하든 원치않든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내부에 잔존하는) 민족/역사성을 복원시키며, 한국인으로서의 자의식을 강화시키고, 종국에 일제의 문화양식을 얼마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했던 과거의 망령을 소멸시킨다.
이처럼 역사적 건축물(또는 역사성을 지닌 정물들)은 항상 우리가 망각하고 있던 과거와 진실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특정한 장소에서 부활한 고체(경복궁 월대)는 급변하는 세상을 따라 운동하는 변속적 물체(사람)의 특정한 무의식/의식적 기억을 건들고, 그 변속적 물체의 운동을 정지시키므로서 진실을 망각하고 있던 그것에게 존재하지 않던 과거를 부여하며 물성을 뒤바꿔놓기도 한다. 특히 현재를 선험하며 역사를 지닌 채 살아가는 생명체로서 존재하는 사람과, 역사를 환기시키는 물질의 상호작용은 인간을 변화시킨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영화 <이탈리아 여행>의 한 장면은 그러한 역사와 물질, 그리고 사람이 갖는 신유물론적 관계를 전면적으로 대두시킨다.
<이탈리아 여행>의 후반부, 이혼을 결심한 알렉스 부부는 폼페이 유적지에서 서로를 껴안은 채 석고가 되어버린 어느 부부의 유적을 보게 되고, 얼마안가 서로가 했던 말에 대해 사과하며 화해한다. 그곳에는 죽을 때까지 서로 떨어지지 않았던 ‘부부의 유적(고체)’이 지닌 ‘역사’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알렉스와 캐서린 부부(변속적인 물체)가 망각하고 있던 자신들의 또 다른 과거(석고가 되어버린 부부)의 다짐을 일깨움으로써, 이혼하기로 결정한 물체의 현재적 물성을 뒤집고, 그들이 과거를 경유하며 서로의 잘못을 뉘우치도록 만든다. 여기서 등장하는 ‘부부 유적'은 단지 ‘과거의 망령(서로 험한 말을 하며 싸웠던 알랙스와 캐서린 부부)’을 소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과거의 망령을 통해 자신들을 살펴보며 지금을 다시 살도록 만든다. 이처럼 역사성을 지닌 정물은, 자신이 지닌 역사성을 통해 사람을 변화기키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모든 고체가 <이탈리아 여행>이나 경복궁 월대 마냥 우리가 망각했던 무의식을 건드리는 식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건 아니다. 도시 재개발을 다룬 주호민의 만화 <신과 함께: 이승편>에는 부활하지 않는 역사적 건축물과 망각되는 역사, 고체가 되어버린 변속적 물체들이 등장한다.
근대가 파괴하는 것들 - <신과 함께: 이승편>을 중심으로
<신과 함께: 이승편>은, 폐지를 주우며 살고 있는 동현이와 할아버지의 집이 재계발 구역으로 확정되어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집을 지키는 가택신들(성주신, 측신, 조왕신)이 그들을 그 위기로부터 지키기 위해 애쓰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가택신들은 문화, 전통, 역사를 간직한 존재들이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고체-성주신이 머물고 있는 대들보, 조왕신이 있는 부뚜막, 측신이 머무는 측간-는 우리의 조상이 살아왔던 시간과 지혜, 그리고 일상 양식과 직접적으로 감응시켜주는 장소로서 우리의 역사를 의식시키는 역사적 건축물들이다.
역사를 품고 있는 것은 재계발로 인해 철거 위기에 놓인 집 역시 마찬가지다. 그 집은 6.25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상경한 할아버지가 직접 만든 건축물이자, 단 한 번도 이사하지 않고 살았던, 할아버지의 역사와 인생이 깃든 장소다. 하지만 종국에 이르러서 이 역사적 장소들은 모두 근대에 의해 파괴된다.
“요즘에는 측간을 사용하지도, 부뚜막을 사용하지도, 대들보를 사용하지도 않는다”는 만화 속 탄석차사와 단물차사의 대화를 예시로 들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작금의 우리에게는 레버 하나만 돌리면 간단히 용변을 볼 수 있는 변기통이 있고, 간편하게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주방이 거실 옆에 딸려있으며, 집을 지탱하는 대들보 보다 더욱 효율적인 철근과 콘크리트가 있다. 가택신들이 머물고 있는 건축물은 이 시대에 무척 남루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변기, 주방, 콘크리트 같은 근대의 산물들은 우리 삶을 더욱 효율적으로 만듦과 동시에, 미래에 도움 되지 않는 모든 전통과 역사(가택신)를 멸종시켰다.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가 " 6.25 때 상경해서 자신의 손으로" 지었다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집 역시 “재계발”이라는 근대적 산업에 의해 퇴후 된 장소로 간주되고, 포크레인이라는 근대적 발명품에 의해 부숴졌다. 이 근대적인 것들은 성주신이 깃들어있는 성주단지 마저 부숴버리고, 전통과 역사를 간직하던 집을 지탱하고 있던 성주신은 소멸한다. 근대는 역사와 시간을 품은 모든 유물을 일말의 고민 없이 파괴하고, 역사와 전통을 망각한다. 그것은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변화와 번영을 추구하며 계속 운동할 뿐, 운동을 멈춰 세우고 사색적 고찰을 요구로 하는 역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보다 쉬운 이해를 위해 빠르게 회전하는 구체를 떠올려보자. 그 구체 안에는, 특정 장소에 놓인 부동의 물체(역사)와, 구체의 회전력을 따라 운동하는 유동적인 물체(현재)가 함께 있다. 그 상태에서 구체가 회전하면, 유동적인 물체는 회전계의 구심력에 의해 중심부로 천착하고, 운동하지 않는 부동의 물체는 원심력에 의해 구의 외부로 떨어져 나간다.
우리의 시간은 지구가 태양계를 회전하며 발생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을 때, 이 빠르게 운동(회전-변화)하는 우리 세계 자체가 회전계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기에 특정 (시)공간, 또는 장소에 머물고 있는 역사들(가택신, 낡은 집)이 관성에 의해 외부로 밀려난다.
운동하지 않는 물체(또는 특정한 장소에서 미동 없이 멈춰있는 역사)를 배태하는 근대의 관성을 현시하듯, 만화에서 조왕신과 측신은 성주신의 부활을 염원하며 깨져버린 성주단지를 복원하지만, 성주신은 결코 부활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근대가 꼭 부동한 역사적 물체만을 도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과 함께: 이승편>은, 재계발 사업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진압대와 충돌하며 여러 사망자가 발생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때 “재계발”이라는 근대적 산물은, ‘유동적인 세계에서 열렬히 참여하고 운동하고 있던 생명체(사람)’ 마저 미동도 없이 ‘역사만을 간직한 고체(시체)’로 만들고 있지는 않는가? 그것은 이따금 유동적인 것마저도 파괴시켜 버린다.
특히 2011년에 공개된 <신과 함께: 이승편>을 보고나서, 불현듯 동시대 발생했던 용산철거현장 화재 사건이라는 유령이 우리 곁에 맴돌 때, 우리의 현실은 비로소 근대의 민낯과 직접적으로 마주한다.
일제 근대화라는 이름 뒤에 조선의 민족성을 뿌리 뽑으려던 악의성이 머물고 있듯, ‘근대(재계발)’에는 ‘운동의 정지’라는 은폐된 비극과 참사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오늘날 근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Chat GPT를 포함한 AI산업은 나날히 우리의 일상을 잠식해가고 있다. 우리는 AI를 사용할 때 몸을 크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의자에 앉아 타자기와 마우스를 몇 번 까딱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다시 말해, AI는 운동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스크린과 전자 프로그램이라는 메타적인 공간에 존재하기 때문에,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잠정적으로 우리의 눈을 물리적이기 때문에 역사성을 간직할 수 있는 현실 세계로부터 떨쳐내 버리도록 하는 관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 까닭에 인류는 AI와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물리적인 세계의 역사들을 수없이 스쳐지나 방관하다가, 종국에는 망각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역사를 파괴했던 <신과 함께> 속 근대는 오늘날에 와서 또 다른 방식으로 재현되어 인류가 역사를 망각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 시대에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AI”라는 매체가 아니라, 역사를 기만하는 인류의 태도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어떤 것이 위협이 되는지가 아니라, 어떤 것을 놓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하는 세기를 살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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