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은별의 <시한부>를 읽고 Op.33
- 작성자 기능사
- 작성일 2025-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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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시한부>를 읽고 감상을 적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청소년 작가를 꿈꾸던 시절(다만 나의 작품들은 섹슈얼리티를 숨김없이 다루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내가 청소년 작가로 다루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베스트셀러였기에 추천을 받아 사서 쟁여 놓았을 뿐이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이 책을 읽으며 현대 문학, 아니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정정하자면, 현대 문학의 어느 정의하기 어려운 일부에 대해서 내가 단순히 그것들을 읽는 것 자체에 대하여 역겹다고 느낀다는 확신이 생겼다. 또한 그와 비슷하게 내가 작가로서 벌어먹고 사는게 불가능하겠구나하는 생각을 실제로 하였다. <시한부>가 나의 안티테제라 할 정도로 내가 그를 적대시 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시한부>는 나에게 굉장한 영향을 주었다. 순전히 이 책의 영향을 받아 나는 장편을 기획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글틴에 올리진 못할 것 같으나 언젠가는 볼 수 있길 바란다.
<시한부>는 굉장히 감동적인 스토리와 심리전개로 고평가를 받았고,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베스트셀러로서 유명하며 대만등 해외로 번역까지(아시아인이 사는게 다 거기서 거기다) 되었다. 리얼리스트로서도 (뒤에서 다시 이야기할 테지만) 굉장한 실력을 갖추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구구하게 스토리를 다 설명할 만큼 작품을 존중해줄 생각은 조금도 없다. 요약하자면 친구가 죽고 슬퍼서 자살하려다 결국 안 한다는 얘기다.
필자는 어느정도 만드는 캐릭터와 스스로를 분리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아마 독자들도 그게 무슨 소리인지는 다들 알 것이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작가가 캐릭터에게 자신을 너무 녹여냈을 때 생기는 부작용이 크다는 것도 이해하기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가끔씩 작가들은 자기연민에 빠지기도 하니까. 자기연민에 빠진 글은 에둘러 설명할 필요없이 작가가 글을 컨트롤 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또 작가가 미성숙하단 뜻이다. 자기연민에 잔뜩 빠진 글은 간혹 굉장히 서정적으로 문장을 쓸 때가 있는데, 다른 독자는 몰라도 필자는 그 부분에서 독서를 포기한다. 작법서에도 어설프게 미문을 쓰려하지 말라고 되어있다. 너무 자주 등장하는 시적인 문장들은 임팩트도 없을 뿐더러 감정의 과잉, 곧 작가가 글에 감정적으로 매몰되었다는 것의 증거가 된다. 우리가 자주 감명을 받는 미문들은 딱 그부분만 떼어내어 보여주는 경우가 잦기 때문에 아주 조금, 중요한 곳에서만 사용하며, 아예 읽어내려가다 지친 독자에게 잠시 메세지를 건내거나, 그냥 속독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도록 해야한다. 자기연민을 조절하기를 포기한 글은 그냥 토사물같은 글이다. 실험적이라고 한다면 물론 실험적이기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고평가되질 않아 잘 보이지 않을 뿐이지 세상에 널려있어서 정말 잘 쓰지 않는 이상 발전시킬 부분이 아니라 극복해야할 부분이라 할 것이다.
<시한부>를 읽으면서 글틴에서 자주 봤던 글들이 생각났다. 정말이지, 거칠게 말하면 문체가 똑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냥 백은별 작가가 글을 구조화하고 길게 쓸 의지가 있었을 뿐이지 필자로서는 그 이외의 차이가 아예없다고 느꼈다. 심지어 자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비슷하다.
<시한부>에 대해 쓰긴 썼으나, 들을 이는 들으리라 믿는다. 필자가 무슨 권리로 누구를 비판하니 마니 하냐마는, 모든 것을 비판하는 것이 필자의 사상이라고 짧게만 말하고 지나가겠다. 이에 대해서도 후에 글이 있을 것이다. 이미 기성 작가인 사람에게 아무것도 아닌 필자가 어찌 검증되지도 않은 보잘것 없는 문학론을 들이대는지에 대해서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독자들의 검증을 받은 베스트셀러의 작가에 비해 역시 필자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모자란 사람이다. 그러나 문학은 무엇인가? 문학에서 한 인간의 권리는 어떻게 정의된다는 것인가?
다행히 기능사는 여전히 열정적이며 도전적인 비평가다.
읽어주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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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긴 글을 적어보려고 한다. 내가 그간 혹자, 혹은 독자라 부르던 사람들에 대한 나의 애정과 존중은 너무 깊이 파묻은 탓인지 잠시 옆에 치워두고 싶다. 한국어에 대한 오랜 고민이 있었다. 내가 읽어온 한국어는, 특히나 문학에 있어서 의지의 표출이었다. 그것은 그것 자체로 본질이라기 보다도, 더 큰 맥락을 대표하기 위해 존재했다. 상록수와 수난이대를 읽던 내게 아몬드나 그 엇비슷한 표지들의 요즘 책들, 그러니까 말 그대로의 픽션들은 내게는 너무도 난해한 것들이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외계의 스토리들, 그리고 낯선, 그러니까 엉뚱하리만치 이상한 단어들을 가져와다 쓰는 서평들을 읽다보면 그 소설들은, 또 문학은 현실의 프라모델이라기보단 또봇이라거나 카봇이라거나 하는 대중적인 메카물의 피규어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즐기거나 즐기지 않건간에, 사유라거나 깊이라거나 하는 단어들, 그러니까 해설하자면 적어도 500쪽은 되는 책들에서나 기대하고 찾던 작가들 본연의 누적된 생각들은 뜨고 지는 사조들의 저편으로 이미 사라졌다고밖에는 내게 남아있는 결론이 없다. 예수가 말했듯 비판받기 싫다면 비판하지 말아야하므로 나는 나의 주장을 만듦에 있어 어느정도는 책임감을 느낀다. 한국어는 단지 문학의 필요가 전혀 없는 맥락이다. 한국 문학의 세련된 학풍, 그리고 여러 비평, 발문, 서평등으로 지껄여지는 공명은 한국어와는 완전히 무관하게, 또 괴이하게 스스로 발전하며 작동한다. 한국 문학의 고요하고 정제된, 말하자면 연구된 문장으로서의 문학은 어쩌면 고도의 완곡한 풍자극이 아닐까도 생각한다. 한국어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텍스트는 작가들의 불평불만은 고결하게 풀어낸 보여주기식의 자기고백이나 오덕들의 엔터테인먼트라고밖에 할 수 없는 픽션들이 아니라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다. 우리 백치들은 우리가 마치 이전 사조들보다 위대한 걸 건축해 낸 것 마냥 떠든다. 무슨 소설집이 넷플릭스보다 재밌다느니 토마토가 심장보다 단단하다느니 하는 모든 것, 또, 굳이 꺼낼 필요는 없겠으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싶다는 등의 모든 너무 자기의식적인 나머지 병신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비아냥으로까지 들리는 개소리들말이다. 말해왔던 바지만, 엔터테이너로서의 길을 갈 사람들을 응원한다. 열심히 해라. 사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선 차라리 작가 기획사를 차려서 사업을 하는게 훨씬 낫지 않을까도 싶지만 우리 백치들은 그럴 염치는 없는 것 같다. 물론 사업성이 떨어지는 것도 있고 말이다. 나는 문학의 구성요소로서의 메세지라는 개념을 싫어한다. 직접적으로 제시되는 것은 없지만서도, 은연중에 문학은 근본적으로 엔터테인먼트지만 중심적이며 추상적인 메세지가 있어야 여운이 남는다거나 더 완결적인 작품이 된다거나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쓴다면 쓰는 거다. 쓰는 것에 대해 연역적으로 선행하는 목적같은 건 있을 수 없으며 쓰는 것은, 그리하여 적히는 것 그 자체로 온전한 목적이며 메세지다. 기껏해봐야 로맨스물, 단순성장물 쓸거면서 페미니즘, 기후변화같은 것들을 찍먹하는 걸 나는 순수히
- 기능사
- 2025-11-20
우리 문학이 점점 짧아진다. 오랫동안의 사견이었으나, 단지 사견으로 끝날 주장이 아니다. 실제로도 그렇다. 당장 어느 서점에 가더라도, 대하소설은커녕 엄지손가락보다 두꺼운 소설들도 곧장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하소설은 대가 끊겼다. 2000년대 초에 나온 것 역작들만 옛 독자들이 알아볼 뿐이고, 등단 수십 년을 바라보는 옛 작가들의 추억 이야기가 이제는 정말로 대하소설의 일몰이라고 밖엔 볼 수 없다. 실제로 교보문고에서도 그러한 장편 중에선 (당연히 경장편들은 제하고) 조정래와 김진명, 무라카미 하루키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전부다하는 말도 나온다. 그러나 현대의 트렌드는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라거나 대중의 테이스트가 너무 스낵컬처에만 맞게 퇴화했다거나 하는 분석은 차치하고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대하소설, 더 나아가, (대하소설은 그 자체로는 그냥 플롯 구조가 완만한 거대한 소설이라는 뜻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총체 소설의 필요성을 알아야만 한다. 총체 소설은 사학이다. 역사를 재구함에 있어 기타 사료와 수량화된 자료들만큼이나 그 맥락을 증언하는 것은 문학의 존재다. 토지가 그러했고, 한강의 여러 작품이 그러했으며, 한국 문학의 원초를 거슬러가 본다면 역시나 같은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소설이므로 그것이 실체적인 진실이라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실체적인 진실은 사실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그 때문에 작가는 집필의 의지와 과거의 불확실성 사이에서 사투하고 공부하고 또 갈등해 나가야 한다. 또 그렇게 작품이 발표된다면 그것은 다시 공격받고 다른 매체, 어쩌면 다른 소설로서 반박될 것이다. 그러한 과정이야말로 역사에 기여하는 올바른 방법이다.총체 소설은 그러한 이유로 맥락을 충분히, 그리고 최대한 완전히 전달하기 위해 필요하다. 혹은 필요했다. 그러나 요즘의 사조는 그러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굳이 역사 소설이라 표현할 필요는 없을 듯싶다. 굳이 과거사만을 위한 총체소설일 필요는 없으므로) 소설의 필요성은 다양한 의미에서 무시된다. 짧은 가방끈으로 뭐라 할 말이 있겠냐마는 현대의 도그마는 역시나 개인이다. 더 나아가 사회의 대비로서의 개인이다. 집단의 안티로서의 개인, 수량화된 전체 속에서 억눌리어 살아가는 개인, 무채색의 수많은 ‘개체’들 간에서 억눌리어 살아가는 개인이다. 비단 캐릭터가 여러 명 등장하는 소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이야기는 오로지 개체에서 개인으로 정체화되어야만이 성립한다. 그런 과정에서 개인이 얕아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클리셰를 그대로 쓰는 작가가 어딨겠냐마는 독자들이 원하는 건 이해 가능한, 또 그렇기에 정상적인 형태로 감정적인 주인공이지 까발려진 타자가 아니다. 그러나 사학이기보다 엔터테인먼트로서의 길을 문학이 택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으로 남을 것이냐하는 걸 생각해야 한다. 우리 인간군(군체로서의 개체들, 나는 사회라는 개념을 싫어한다)이 고민해야 할 것을 고민하지 않은 세대로 남아도 되느냐고, 정말 그래도 되느냐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혹자는 사회가 정말 필요한 것
- 기능사
- 2025-11-10
요즘 시 게시판에서 멘토링으로 배우고 느는 바가 적은 것 같아 이참에 스스로의 시론을 되돌아보고 미학을 정리해보려구 합니다. 멘토링욕을 돋우기 위해 극히 자아도취적인 표현을 썼으니 이점 참고 바랍니다. 기능사는 글틴에서 단연 가장 개성있는 글을 쓰는 작가 중 하나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글은 천방지축이고, 대부분의 경우에선 그 난해함이 그 불규칙성, 그리고 의미의 발산을 더욱 확신케 한다. 그는 언젠가 스스로 유치한 글을 쓰지 않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글을 더욱 어렵게 쓰는 것 같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난해한 시들이 그런 다다이즘으로만 비치진 않는다. 그것들은 더욱 높은 층위에서 시의 가능성을 질문하는데, 그 중엔 특별히 예로 들어 설명할 것이 있다. Ignorabimus Op.64저쪽 굴 끝엔 이그노라비무스*들이 삽니다 산다고 하긴 좀 뭐 하죠 아인슈타인**과 힐베르트***의 시체나 처리하는 게 전부인 한량들이니 토막 내어서 묻어버리지 않으면 아마 그들도 버티기 힘든가 봅니다 그들의 시체는 그러기보다도 단단한 번뜩이던 그들의 눈빛은 대단한가 봅니다 중절모를 썼을 땐 몰랐겠지만 백 년씩이나 그들을 잘라내고 있으니 그들은 굴밖을 나와서 은하수를 볼 자격 따윈 없습니다 그들은 울어야 합니다 그들은 충분히 울지 않았습니다 신이 되기에는 아무래도 그들의 우울증은 하이젠베르크****는 나치였고 괴델은 병신*****처럼 죽었다죠 YHWH는 금세 숨어버렸습니다 뿌옇게 떠버린 먼지 속으로... 칸토어******와 플랑크*******는 아무래도 몰랐을 겁니다 YHWH는 분명 그들이 신이라 불렀던 것을 두려워했겠죠 --- 아주 재밌는 꿈이 있습니다 제 신실한 아내에겐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야겠군요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걸 질색할 테니 말입니다 만약에 말입니다 세상이 마인크래프트같이 그저 물리엔진 속 세계이고 우리가 그저 컴퓨터라면 우리 머릿속에 또 다른 세계를 만들면 그 속의 인간은 우리를 인지할 수 있겠습니까? 아주 두렵습니다 YHWH의 상상일 뿐이라면 어쩌냔 말입니다 난 그를 비웃습니다 그가 인간이거나 아니기 전에...*19, 20세기에 존재했던 철학사조. 진리따위는 알 수 없을 거란 입장이 특징적이다.**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알것이다.****독일의 물리학자 불확정성 원리의 주창자다.*****오스트리아, 미국의 수학, 수리철학자. 불완전성 정리로 유명하다.******우리를 위해 칸토어가 만들어준 이 낙원에서 그 누구도 우리를 내쫓을 수는 없으리라*******새로운 과학적 사실은 설득을 통해 패러다임이 되기보다는 반대자들이 죽고 그에 친숙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며 기존의 원리를 대체한다.Ignorabimus는 그의 난해시 중에서 특기할만한 한쪽 끝에 있다. 특별히 이 시에 있어선 전에 기능사가 Ted에게 부탁한 설명문이 있다. 저는 시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해서 감히 뭐라 말할 권리가 있을지나 모르겠지만 그냥 몇가지 와닿은 부분과 글을 읽으며 든 생각이라도 몇가지 써보고자 합니다. 여기서는 수학
- 기능사
- 2025-11-03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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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글에서 배움을 얻어갑니다, 감사합니다
@구포대교 쩝 엄청 대충 썻는뎅...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도 시한부를 읽은 적 있는데, 문체가 특출나진 않아도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기본은 되어있고 작가 자신의 힘으로 긴 서사를 완결시킨 부분은 고평가 받을만 하다고 봅니다. 제가 글 쓰는 취미가 있기 전에 음악을 했었는데 저보다 기타를 못치는 친구는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홍대에 가서 지금도 버스킹과 밴드를 병행하며 음악으로 돈을 벌고 있습니다. 음악 업계에서 프로의 기준은 소위 말하는 실력같은 것이 아니라 순전히 음악으로 돈을 버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 둘로 나뉘는데요,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혼자 글을 끄적이고 발표하지 않으면 작품이 될 수 없고, 결국 아무리 음악성이 뛰어난 노래를 만들어도 최소한의 대중성은 갖추어야 들어주는 사람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백은별 작가는 자신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서사를 완결시켜 출판사에 제출해 돈을 벌었다. 이거 하나로 이미 프로의 세계에 속해있다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밎장굴친 바람에 그게 좀 애매한것이, 문학이 돈만지려고 하는게 아니여서 말이죠. 문학에서의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해서은 후에 다룰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