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론 Op.36
- 작성자 기능사
- 작성일 202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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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한해에 중국인 이 3만 4천명이 순유입됐다. 십삼만명이 들어오고, 십만명이 나갔다. 단지 그뿐만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중국은 꽤나 큰 위협으로 인식되는 것은 분명하다. 당장에 정치권에서는 외교적인 결례는 차치하고 친중 여부를 가리는 것을 너머, 심지어 어느 인물이 화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말이 오가고 있다. 당연히 머릿수로만 영향력에 대해서 따질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눈여겨볼만한 자료임은 분명하다. 논리적 미흡함에도 불구하고 영향력을 머릿수로 치환하여 본다면, 사람들의 중국인과 중국에 대한 주의는 분명 대단하다. 3만 3천의 순유입을 감안하면 말이다. 그러나 그의 10배 가까이 되는 인구를 우리는 매년 맞아들이고 있다. 중국인들과는 다르게 우리는 그들을 기꺼이 보호하며, 각종 의무로부터 면제시키고, 또 억압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스스로를 정의할 의지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어느 누구도 그들을 정의내릴 최소한의 지식에조차 무관심하다.
그들은 청소년이다.
청소년에 대해서 말하고자하는 것은 무수히 많지만, 그러기 전에 청소년이라는 인식자체의 몇가지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청소년은 당연히 생물학적으로 필연적이며 인류사의 모든 부분에 대해서 상존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대체로 청소년들은 ‘아녀자’로, 역사학자들에게는 소유물이자 대상으로 서술되었다. 그렇다고 자주 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운 좋게 나라가 망하거나 하면서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로 적혀있는 게 전부다. 청소년은 오랜 시간동안 소어른으로 인식되어왔다. 애초에 시민권이 확립되기 전이므로 권리를 동등하게 누린다기 보단 그저 발달과정에 대한 무지라 하는게 옳을 것이다. 그러나 차차 여러 동정적인 인권주의자들과 휴머니스트, 그리고 교육철학자들을 통해 청소년들은 ‘발견’’되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차 정부는 청소년들을 그들의 존재에 대한 좋은 명분이자 훌륭한 수단으로 보았다. 정부는 자기 조직과 권력을 재생산하고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공교육을 만들어내어 복종적인 군인과 노동자들을 만들어 내고자 했고, 또 많은 경우에서 그렇게 되었다. 그러고 정부는 자기가 하고 있는 훌륭한 역할에 대해 역설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것이 절대로 대체되어선 안되는 것 마냥 말이다. 여성또한 비슷하게 정부에게 이용당했다. 그러나 여성에게 노동시장을 허용한것은 점차 가부장적 질서의 해체로 이어져 여성은 여러 권리를 요구하고, 또한 쟁취하게 되었다. 세계 대전 들을 생각해보자. 남성의 노동력이 부족해지지 않았다면 여성들이 부엌을 떠날 수가 있었을까?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일이 청소년에게 벌어지지는 않았다. 청소년은 희한하게도, 부조리에 대하여 저항할 의지와 능력을 갖출 때쯤이면 이미 비청소년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세상에 스스로를 청소년으로 정체화 한 세력은 단 하나도 없다.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고, 앞으로 생기기도 요원해보인다.
청소년은 여러가지 특징점을 지닌다. 첫째, 정의상 국민으로 등록된 사람은 청소년일지라도 국민으로 여겨지나, 희한한 이유로 여러가지 권리들은 제한되며 또 여러가지 의무로부터 자유롭다. 우선 당연하게도, 청소년에겐 병역의 의무가 없다. 유엔 아동 인권 협약의 서명국으로서 사실 당연한 것이다. 또한 세금에서와, 사회복지적 부분에 대해서 특혜를 받는다. 그리고 청소년은 그 보호자에게 사회적, 법적, 금전적으로 종속적이다. 보호자는 청소년을 훈계하고 선도할 의무가 있으며 의무교육을 이수하게 하여야만 한다. 또한 노동법 상 청소년의 노동은 크게 제약이 되어있고, 사회적으로도 청소년의 노동 종사는 제약이 크므로, 청소년의 소득은 없다고 봄이 합당할 것이다.
그러나 위의 모든 문제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청소년을 위한 대의민주적 시스템이 전무하다는게 그것이다. 청소년의 선거권을 근본적으로 제한하는 이유는 청소년이 성숙하지 않았다는 것과, 이런 이유로 의사결정에 있어 스스로의 의견을 책임있게 가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라면 충분히 다른 요소들로도 일부 성인의 투표권을 제한하는 것 또한 합당할 텐데, 당연하게도 그런 일은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았고 일어날 수도 없다. 민주주의는 그런 논리에 대한 반항으로 일어난 움직임이다. 딱 떠오르는 예를 들어보자면, 브렉시트에 투표한 영국국민은 비성숙하고 책임있는 자기결정을 하기 부족한 유권자들이므로 통일주체국민회의로 돌아가야하는가? 필연적으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정견에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하고, 또한 때때로 틀린 선택을 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그러나, 적어도 민주공화국에서는 대의민주주의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권리가 그랬듯, 권리는 쟁취되고 고착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87년 헌법이후 선거연령하향이 한번 이루어지고, 학생인권조례가 일부 시도에서 제정되는 것 이외에 학생 인권 운동은 조금의 진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학생 인권 조례라는 건, 아직도 교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라며 반대하는 세력이 있지만, 그와는 무관하게 공교육 내에서의 학생 인권을 보장하는 데, 아니 보장하여 노력하는데 그칠 뿐이며, 여러 근로조건 감독의 문제와 같이 사립이나 학원 같은 곳에서의 인권은 여전히 열악한 것이 사실이다. 잠시 양해 구해 이에 대해 조금만 더 써보자면, 혹자는 학부모들이 교사를 고소하거나 법적으로 대응하는 일로 교권이 침해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법적으로 충분히 보완 가능한 문제임은 차치하고서라도 평균적인 학생과 평균적인 교사를 고려하여보았을 때 어떤 형태이든 학생이 교사보다 훨씬 더 폭력에 취약하다. 자의건 타의건 학부모의 힘을 빌려 교사에게 위해나 협박을 하는 경우에 (물론 이 경우에 필자는 부모가 미쳐있는 거라고 확신한다. 이에 대한 보편론은 아무래도 후에 글로 적는 것이 나을 듯 싶다) 학생이 받는 피해는 상상 이상이다. 당장에 교사 단체는 그 성향과 무관하게 비합리적인 교사에 대한 제재를 규탄하며 그 학생이 그러한 불명예를 어떤 형태로든 피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대체로 이런 일은 초등학교에서 집중되어 벌어지는데, 초등학교에서의 일은 후에 진학에 미치는 영향이 상대적으로 적어, 거의 무시할만 하기 때문이다. 중학교 이후로 올라가면 부모는 고소를 할 돈으로 차라리 학원을 더 보내는 선택을 한다. 또한 중학교 이후에는 교사가 가지는 절대적인 권력때문에 정말로 돈이 넘쳐나거나 자퇴에 준하는 각오가 있지 않는 이상에야 학생이나 학부모나 별것 아닌 일로 교사를 괴롭힌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학생 인권과 교권의 관계야 어찌됐든, 권리라 쓰고 의무라 읽는 의무교육의 명령하에 학교를 다니는 청소년들은 비청소년들의 탁상공론에 따라 이것저것 의무만 잔뜩 짊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교사 집단은 수많은 대의민주주의 조직에다, 수십명의 선출직 공무원을 배출하는데 반해, 현재 청소년들이 뽑을 수 있는 거라곤 고작 몇몇 엘리트 학생들 생기부에 학생회장이니 학생부회장이니 몇자 적어주는 것이 고작이며, 심지어 그것조차도 오로지 학교를 다니는 청소년을 위한 것 뿐만아니라, 실권은 전혀 없으며, 전국적인 조직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가 없다. 기껏 있는 아수나로같은 조직들은 각 시도 지부 회원 스무명 정도가 다고, 그마저도 대의민주주의는 커녕 퀴어축제나 가서 성소수자를 지지하거나 이마트에서 콘돔을 청소년들에게 안 판다 하면 가서 규탄서나 낭독하는게 고작이다.
이쯤 되어서 필자는 굉장히 궁금하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이 진보하는 걸 막는단 말인가? 이 청소년들이 교회에 안나오면 화형을 당하는 시대에 살았나, 식민지인을 교화하는게 사명이라 선전하던 시대에 살았나? 당장 TV를 틀면 민주적으로 뽑혀서 일을 하는 정치인들을 볼 수 있고, 역사책이나 윤사 책이나 어느 책이든 펼쳐서 보면 자기결정권이 무엇인지는 별 어려울 것 없이 곧바로 알 수 있다. 대의민주주의는 어느 다른 별에서 온 뚱딴지 같은 소리가 아니다! 자기결정권 또한 악마나 말할법한 이단적인 개념이 아니다! 도대체 이 나라의 청소년들은 어디가 잘못되어서 자기가 한명의 시민으로서 기능할 수 있게 준비할테니 권리를 달라고 말하는 것을 못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필자는 꽤나 오랜 세월동안 대답하려 애써봤다. 그러나 어떤 선택지든 간에 필자는 엘리트주의로 귀결될 수밖에는 없었다.
필자의 대답은 그렇다. 청소년 운동은 본질적으로 엘리트주의다. 사실 모든 사상이 그랬듯이 말이다. 모든 군대가 결국 전쟁을 위한것이고 모든 총이 결국 사람을 겨누기 위해서이듯이 청소년을 아무리 연구하고 분석한다 하여도 개선에 대한 자주적 의지가 없는 이상 의미가 있다하기 어렵다. 연구 자체 마저도 청소년학에 대한 변변한 이름조차 없다는 현실은 차치하고서 말이다.
필자는 이 글이 크게 와닿기 보다는 독자들이 한번씩 청소년과 그 권리에 대해서 한번 쯤 돌이켜 보는 계기이자, 궁극적으로는 지금 생각하고 있는 무언가의 트리거가 되었길 바란다.
긴 글 읽어주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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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긴 글을 적어보려고 한다. 내가 그간 혹자, 혹은 독자라 부르던 사람들에 대한 나의 애정과 존중은 너무 깊이 파묻은 탓인지 잠시 옆에 치워두고 싶다. 한국어에 대한 오랜 고민이 있었다. 내가 읽어온 한국어는, 특히나 문학에 있어서 의지의 표출이었다. 그것은 그것 자체로 본질이라기 보다도, 더 큰 맥락을 대표하기 위해 존재했다. 상록수와 수난이대를 읽던 내게 아몬드나 그 엇비슷한 표지들의 요즘 책들, 그러니까 말 그대로의 픽션들은 내게는 너무도 난해한 것들이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외계의 스토리들, 그리고 낯선, 그러니까 엉뚱하리만치 이상한 단어들을 가져와다 쓰는 서평들을 읽다보면 그 소설들은, 또 문학은 현실의 프라모델이라기보단 또봇이라거나 카봇이라거나 하는 대중적인 메카물의 피규어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즐기거나 즐기지 않건간에, 사유라거나 깊이라거나 하는 단어들, 그러니까 해설하자면 적어도 500쪽은 되는 책들에서나 기대하고 찾던 작가들 본연의 누적된 생각들은 뜨고 지는 사조들의 저편으로 이미 사라졌다고밖에는 내게 남아있는 결론이 없다. 예수가 말했듯 비판받기 싫다면 비판하지 말아야하므로 나는 나의 주장을 만듦에 있어 어느정도는 책임감을 느낀다. 한국어는 단지 문학의 필요가 전혀 없는 맥락이다. 한국 문학의 세련된 학풍, 그리고 여러 비평, 발문, 서평등으로 지껄여지는 공명은 한국어와는 완전히 무관하게, 또 괴이하게 스스로 발전하며 작동한다. 한국 문학의 고요하고 정제된, 말하자면 연구된 문장으로서의 문학은 어쩌면 고도의 완곡한 풍자극이 아닐까도 생각한다. 한국어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텍스트는 작가들의 불평불만은 고결하게 풀어낸 보여주기식의 자기고백이나 오덕들의 엔터테인먼트라고밖에 할 수 없는 픽션들이 아니라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다. 우리 백치들은 우리가 마치 이전 사조들보다 위대한 걸 건축해 낸 것 마냥 떠든다. 무슨 소설집이 넷플릭스보다 재밌다느니 토마토가 심장보다 단단하다느니 하는 모든 것, 또, 굳이 꺼낼 필요는 없겠으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싶다는 등의 모든 너무 자기의식적인 나머지 병신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비아냥으로까지 들리는 개소리들말이다. 말해왔던 바지만, 엔터테이너로서의 길을 갈 사람들을 응원한다. 열심히 해라. 사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선 차라리 작가 기획사를 차려서 사업을 하는게 훨씬 낫지 않을까도 싶지만 우리 백치들은 그럴 염치는 없는 것 같다. 물론 사업성이 떨어지는 것도 있고 말이다. 나는 문학의 구성요소로서의 메세지라는 개념을 싫어한다. 직접적으로 제시되는 것은 없지만서도, 은연중에 문학은 근본적으로 엔터테인먼트지만 중심적이며 추상적인 메세지가 있어야 여운이 남는다거나 더 완결적인 작품이 된다거나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쓴다면 쓰는 거다. 쓰는 것에 대해 연역적으로 선행하는 목적같은 건 있을 수 없으며 쓰는 것은, 그리하여 적히는 것 그 자체로 온전한 목적이며 메세지다. 기껏해봐야 로맨스물, 단순성장물 쓸거면서 페미니즘, 기후변화같은 것들을 찍먹하는 걸 나는 순수히
- 기능사
- 2025-11-20
우리 문학이 점점 짧아진다. 오랫동안의 사견이었으나, 단지 사견으로 끝날 주장이 아니다. 실제로도 그렇다. 당장 어느 서점에 가더라도, 대하소설은커녕 엄지손가락보다 두꺼운 소설들도 곧장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하소설은 대가 끊겼다. 2000년대 초에 나온 것 역작들만 옛 독자들이 알아볼 뿐이고, 등단 수십 년을 바라보는 옛 작가들의 추억 이야기가 이제는 정말로 대하소설의 일몰이라고 밖엔 볼 수 없다. 실제로 교보문고에서도 그러한 장편 중에선 (당연히 경장편들은 제하고) 조정래와 김진명, 무라카미 하루키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전부다하는 말도 나온다. 그러나 현대의 트렌드는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라거나 대중의 테이스트가 너무 스낵컬처에만 맞게 퇴화했다거나 하는 분석은 차치하고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대하소설, 더 나아가, (대하소설은 그 자체로는 그냥 플롯 구조가 완만한 거대한 소설이라는 뜻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총체 소설의 필요성을 알아야만 한다. 총체 소설은 사학이다. 역사를 재구함에 있어 기타 사료와 수량화된 자료들만큼이나 그 맥락을 증언하는 것은 문학의 존재다. 토지가 그러했고, 한강의 여러 작품이 그러했으며, 한국 문학의 원초를 거슬러가 본다면 역시나 같은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소설이므로 그것이 실체적인 진실이라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실체적인 진실은 사실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그 때문에 작가는 집필의 의지와 과거의 불확실성 사이에서 사투하고 공부하고 또 갈등해 나가야 한다. 또 그렇게 작품이 발표된다면 그것은 다시 공격받고 다른 매체, 어쩌면 다른 소설로서 반박될 것이다. 그러한 과정이야말로 역사에 기여하는 올바른 방법이다.총체 소설은 그러한 이유로 맥락을 충분히, 그리고 최대한 완전히 전달하기 위해 필요하다. 혹은 필요했다. 그러나 요즘의 사조는 그러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굳이 역사 소설이라 표현할 필요는 없을 듯싶다. 굳이 과거사만을 위한 총체소설일 필요는 없으므로) 소설의 필요성은 다양한 의미에서 무시된다. 짧은 가방끈으로 뭐라 할 말이 있겠냐마는 현대의 도그마는 역시나 개인이다. 더 나아가 사회의 대비로서의 개인이다. 집단의 안티로서의 개인, 수량화된 전체 속에서 억눌리어 살아가는 개인, 무채색의 수많은 ‘개체’들 간에서 억눌리어 살아가는 개인이다. 비단 캐릭터가 여러 명 등장하는 소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이야기는 오로지 개체에서 개인으로 정체화되어야만이 성립한다. 그런 과정에서 개인이 얕아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클리셰를 그대로 쓰는 작가가 어딨겠냐마는 독자들이 원하는 건 이해 가능한, 또 그렇기에 정상적인 형태로 감정적인 주인공이지 까발려진 타자가 아니다. 그러나 사학이기보다 엔터테인먼트로서의 길을 문학이 택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으로 남을 것이냐하는 걸 생각해야 한다. 우리 인간군(군체로서의 개체들, 나는 사회라는 개념을 싫어한다)이 고민해야 할 것을 고민하지 않은 세대로 남아도 되느냐고, 정말 그래도 되느냐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혹자는 사회가 정말 필요한 것
- 기능사
- 2025-11-10
요즘 시 게시판에서 멘토링으로 배우고 느는 바가 적은 것 같아 이참에 스스로의 시론을 되돌아보고 미학을 정리해보려구 합니다. 멘토링욕을 돋우기 위해 극히 자아도취적인 표현을 썼으니 이점 참고 바랍니다. 기능사는 글틴에서 단연 가장 개성있는 글을 쓰는 작가 중 하나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글은 천방지축이고, 대부분의 경우에선 그 난해함이 그 불규칙성, 그리고 의미의 발산을 더욱 확신케 한다. 그는 언젠가 스스로 유치한 글을 쓰지 않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글을 더욱 어렵게 쓰는 것 같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난해한 시들이 그런 다다이즘으로만 비치진 않는다. 그것들은 더욱 높은 층위에서 시의 가능성을 질문하는데, 그 중엔 특별히 예로 들어 설명할 것이 있다. Ignorabimus Op.64저쪽 굴 끝엔 이그노라비무스*들이 삽니다 산다고 하긴 좀 뭐 하죠 아인슈타인**과 힐베르트***의 시체나 처리하는 게 전부인 한량들이니 토막 내어서 묻어버리지 않으면 아마 그들도 버티기 힘든가 봅니다 그들의 시체는 그러기보다도 단단한 번뜩이던 그들의 눈빛은 대단한가 봅니다 중절모를 썼을 땐 몰랐겠지만 백 년씩이나 그들을 잘라내고 있으니 그들은 굴밖을 나와서 은하수를 볼 자격 따윈 없습니다 그들은 울어야 합니다 그들은 충분히 울지 않았습니다 신이 되기에는 아무래도 그들의 우울증은 하이젠베르크****는 나치였고 괴델은 병신*****처럼 죽었다죠 YHWH는 금세 숨어버렸습니다 뿌옇게 떠버린 먼지 속으로... 칸토어******와 플랑크*******는 아무래도 몰랐을 겁니다 YHWH는 분명 그들이 신이라 불렀던 것을 두려워했겠죠 --- 아주 재밌는 꿈이 있습니다 제 신실한 아내에겐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야겠군요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걸 질색할 테니 말입니다 만약에 말입니다 세상이 마인크래프트같이 그저 물리엔진 속 세계이고 우리가 그저 컴퓨터라면 우리 머릿속에 또 다른 세계를 만들면 그 속의 인간은 우리를 인지할 수 있겠습니까? 아주 두렵습니다 YHWH의 상상일 뿐이라면 어쩌냔 말입니다 난 그를 비웃습니다 그가 인간이거나 아니기 전에...*19, 20세기에 존재했던 철학사조. 진리따위는 알 수 없을 거란 입장이 특징적이다.**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알것이다.****독일의 물리학자 불확정성 원리의 주창자다.*****오스트리아, 미국의 수학, 수리철학자. 불완전성 정리로 유명하다.******우리를 위해 칸토어가 만들어준 이 낙원에서 그 누구도 우리를 내쫓을 수는 없으리라*******새로운 과학적 사실은 설득을 통해 패러다임이 되기보다는 반대자들이 죽고 그에 친숙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며 기존의 원리를 대체한다.Ignorabimus는 그의 난해시 중에서 특기할만한 한쪽 끝에 있다. 특별히 이 시에 있어선 전에 기능사가 Ted에게 부탁한 설명문이 있다. 저는 시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해서 감히 뭐라 말할 권리가 있을지나 모르겠지만 그냥 몇가지 와닿은 부분과 글을 읽으며 든 생각이라도 몇가지 써보고자 합니다. 여기서는 수학
- 기능사
- 2025-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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