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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단상: 시대의 흐름 속에서 바라본 당사자성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5-09-11
  • 조회수 862

문학에서 (특히 소설의 경우) 저자가 3인칭 서술을 사용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다만 최근 한국문학에서 3인칭 서술 사용의 빈도가 가시적일 정도로 줄어들었다는 인상을 받고는 한다. 특히 그러한 양상은 미디어 매체에 전면적으로 영향을 받고, ‘SNS’와 ‘알고리즘’이라는 자기 폐쇄적인 공간을 시대에 의해 수용하게 된 2030 ‘젊은 세대’ 작가들에게서 크게 발견되고 있다. 

대표적인 이들만 간단히 호명해 보자면, ‘김병운’, ‘김멜라’, ‘김지연’, ‘이서수’, ‘서이제’, ‘손보미’ 등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작품(들)은 대게 소설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화자를 ‘나'라는 1인칭 단수로 설정함으로써 개인적인 이야기를 자기 폐쇄적인 공간에서 진솔하게 이끌어나간다. 그 과정에서 당사자성에 대한 조심스러운 고민의 흔적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젊은 작가들이 1인칭 묘사를 애용하는 이유를 살펴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휴대폰이 이제 막 세상에 등장했을 때, 그들은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었거나, 혹은 대학을 전전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한때 국내 문단을 주름잡았던 7080 세대들이 민주화 운동의 전선에서 사회를 마주하고 발화와 사유를 터득했던 것처럼, ‘2030’ 젊은 작가들은 휴대폰이란 자가폐쇄적/개인적 공간에서 세상을 마주했다. 그렇기에 ‘7080’ 세대 문인들이 운동권에서 세상을 배워나가며 ‘정치 문학’이라는 하나의 시대적 흐름을 만들어냈듯, 2030 세대 문인들은 (옳은 명칭은 아니겠지만) ‘개인 문학’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1인칭 묘사는 그러한 시대적 흐름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이 사례를 긍정적으로 (또는 무감각하게) 바라보는 것은 그다지 좋은 행동이 아닌 듯하다. 시대에 따라 뒤바뀐 양상을 검토 없이 수긍하는 것은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뿐더러, 체화되지 않은 것들을 내부로 끌어들일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묘사법처럼 독자와 작품을 매개 하는 중요한 형식은 더욱 세밀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런 1인칭 묘사/서술에 대해 조금 더 많은 논의를 거칠 필요성을 느꼈다. 


1인칭 묘사에 대해서는 풀리지 않는 논의가 하나 있다. 그것은 작품 속 ‘나’가 소설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구체화된 창조적 ‘인물'인지, 아니면 이면지 뒤에서 글을 쓰는 작가 ‘본인'인지에 대해서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지점에서 ‘당사자가 아닌 사람(작가)’이 화자가 되어 당사자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어쩌면 작품의 윤리를 결정적으로 판가름 지을 수도 있는 흐릿하고도 모호한 자가당착의 경계에 봉착한다. 작가가 입을 열지 않는 한 그 자가당착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근래 한국문학의 동시대적 담론이 과거에 비해 비교적 유보되어 있다는 인상이 적지 않게 드는 것 역시 당사지성에 대한 논의가 제한적인 자장 내에서 야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은 아닐까.


최근에는 유명 인플루언서나 연예인들의 일상을 담아낸 콘텐츠가 대중의 유흥거리로 소비되고 있다. 

연예인들은 자그마한 원탁에 모여 앉아 마이크를 찬 채 술(또는 안주거리)을 마시며 사담을 나누거나, 그 자리에서 자신의 진솔한 마음을 털어놓는다. 그곳에서 소비자는 평소 카메라 앞에서는 볼 수 없던 유명인의 ‘은밀한’ 모습을 원탁과 술이라는 ‘일상적 환경’을 통해 대면한다. 이곳에는 우리가 마치 타자(유명인)와 오래간 알고 지낸 관계처럼 만들어내는 외화면의 장력이 은연중 존재한다. 순간 우리는 일상적 환경에 의해 당사자성을 부여받는다. 다만 우리가 당사자성을 부여받는 가장 큰 까닭은, 타자가 운동하던 그 순간, 그 장소, 그 자리에 카메라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우리가 그 시공간에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스크린을 통해서 마주하는 타자와의 관계는, 표층기호들로 가로막힌 반작용적 관계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소비자는 스크린이라는 장벽 앞에서 타자와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없다. 이런 것을 두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소통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유형의 콘텐츠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댓글란)을 보면 마치 자신이 그 인물을 알 것 같다는 듯이 타자에 대한 가치 평가가 어렵지 않게 이루어진다. 이때 우리는 이들을 진정 ‘당사자’라고 불러야 할까?


한동안은 이 질문이 가장 큰 고민거리로 맴돌았다. 어떤 방식으로든 타자에게 공감하고 연대하며 개인적으로 소통하는 듯한 감흥을 받은 소비자는 당사자일까? 아니, 애초에 상호작용하지 못한 관계를 두고 ‘우리’라는 ‘공동체’로 구분 짓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우리’라는 공동체를 이루는 관계는, 타자와 나라는 서로 다른 두 객체가 상호작용할 때 더욱 돈독해지는 것처럼, 서로가 얼마나 소통하느냐, 혹은 참여하느냐에 따라서 관계의 당사자가 될 자격을 얻는다. 그렇기에 당사자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타자를 이해하고 어떠한 것에 대해 책임져야 할 의무를 진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당사자가 될 자격만큼은 쉽게 주어져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일상적인 V-log 형식의 콘텐츠가 인기를 끌고 있다는 생각해 볼 때, 이 시대는 너무도 쉽게 제공될 여지가 있는 ‘당사자성’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요즘 청중을 필요로 하는 예술 매체, 문학 뿐 아니라 영화, 미술 등 여러 분야들이 시대적 흐름을 뒤따르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당사자성’을 어떤 방식으로든 끌어안으며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는 한다. 그것은 때때로 독자에게 작품과 거리를 둘 것을 요구하거나, 혹은 작품에 다가오기를 요구한다. 이런 사례가 만연되어 가끔씩 독자를 억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문학에서 사용되는 1인칭 묘사도 그와 다르지 않다. 


독자는 왜 당사자가 되어야 하는가? 또는 왜 당사자가 될 수 없는가?


오늘날 예술계(미술, 문학, 영화, 공연)는 어떠한 작품을 마주할 때 매 번(또는 자주) 이런 고민으로 작품을 바라봐야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우리의 비평은 이 과제를 풀어나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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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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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자
  • 2025-07-14
실체 없는 당신 얼굴 앞에서 - 알랭 기로디의 <미세리코르디아>

알랭 기로디의 2024년 영화 는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보다 정확히는 자동차의 운전자)의 시점으로 시작한다. 카메라는 꽤 오래간 우측에서 직행하는 자동차의 시점에 놓여있다가 돌연 좌측에서 직행하는 자동차의 시점으로 옮겨가는데, 이 장면을 보면서 일차적으로 찾아오는 것은 다름 아닌 당혹감이다. 오른쪽에서 직행하던 카메라가 왼쪽에서 직행할 때, 180도 상상선이 파괴되고 영화의 규칙은 무너지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당혹감에 사로잡혀 영화를 더듬거리고 있을 때 즈음, 도로를 질주하던 자동차는 산골 마을의 작은 제빵소 앞에서 멈춰 선다. 이야기는 그 제빵소에서 시작된다. 조금 다르게 말해보자면, 영화는 규칙이 무너진 바로 그 상태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그렇기에 의 첫 장면은 꽤나 도발적으로 다가온다. 사실 영화의 오프닝 씬에서 사용된 몽타주 -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카메라가 옮겨갈 때 - 는, 여느 영화에서 인물과 인물이 서로를 마주 보고 대화할 때마다 소비되어 왔던 보편적인 역쇼트처럼 기능한다. 다만 이 영화 속 시퀀스를 두고 ‘보편적’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분명 석연찮은 지점들이 있는데, 무수히 많은 영화 속에서 사용된 역쇼트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마주하는 ‘대응의 풍경’을 담아내는 반면, 이 영화의 역쇼트 시퀀스에는 서로를 마주보는 인물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속 자동차가 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 그곳에 놓여있는 건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쉼 없이 흘러가는 자연의 풍경이다. 그렇기에 고속도로 위에서 벌어지는 이 역쇼트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물질적인 존재(들), ‘얼굴과 얼굴의 대면’이 아니라, 도로 위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비물질적인 세계의 만남이자 대면’이다.그런 의미에서 는 실체없이 서로를 마주보는 것들에 대한 탐구라고 볼 수 있다. 영화는 동성애자 제레미가 고향마을에서 친구 빈센트를 우발적으로 살해, 유기하고 자신의 범행을 은폐시키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과정에서 빈센트의 어머니는 제레미가 자신의 아들을 죽였다고 의심하며, 늦은 새벽 경찰에게 제레미가 머물고 있는 2층 방문을 열쇠를 쥐어주고, 그의 방을 수색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뿐 아니라 제레미가 자고 있을 때면 예고 없이 그의 곁으로 다가가 “네가 빈센트를 죽였니?”라고 속삭이듯 물어보기까지 한다. 그러다가 제레미가 잠에서 깨어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듯 태연하게 고개를 돌리고, 제레미가 경찰이 새벽에 자신의 방을 뒤졌다고 호소할 때는, "악몽을 꾸었구나"라고 맞받아 친다. 그녀는 자신이 제레미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애쓴다.여기서 희한한 것은 제레미 역시 그녀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빈센트의 어머니는 제레미가 자신의 아들을 죽였다고 의심하고 있고, 제레미 역시 빈센트의 어머니를 의심하고 있다. 이 이중의심의 결속은 두 사람을 더욱 먼 곳으로 떨어트려 놓는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제레미는 막막한 어둠으로 뒤덮인 밤거리를 혼자 배회하고, 빈센트의 엄마는 영화에서 자취를 감춘다. 서로를 마주하게

  • 화자
  • 2025-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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