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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단상: 시대의 흐름 속에서 바라본 당사자성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5-09-11
  • 조회수 1,260

문학에서 (특히 소설의 경우) 저자가 3인칭 서술을 사용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다만 최근 한국문학에서 3인칭 서술 사용의 빈도가 가시적일 정도로 줄어들었다는 인상을 받고는 한다. 특히 그러한 양상은 미디어 매체에 전면적으로 영향을 받고, ‘SNS’와 ‘알고리즘’이라는 자기 폐쇄적인 공간을 시대에 의해 수용하게 된 2030 ‘젊은 세대’ 작가들에게서 크게 발견되고 있다. 

대표적인 이들만 간단히 호명해 보자면, ‘김병운’, ‘김멜라’, ‘김지연’, ‘이서수’, ‘서이제’, ‘손보미’ 등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작품(들)은 대게 소설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화자를 ‘나'라는 1인칭 단수로 설정함으로써 개인적인 이야기를 자기 폐쇄적인 공간에서 진솔하게 이끌어나간다. 그 과정에서 당사자성에 대한 조심스러운 고민의 흔적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젊은 작가들이 1인칭 묘사를 애용하는 이유를 살펴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휴대폰이 이제 막 세상에 등장했을 때, 그들은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었거나, 혹은 대학을 전전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한때 국내 문단을 주름잡았던 7080 세대들이 민주화 운동의 전선에서 사회를 마주하고 발화와 사유를 터득했던 것처럼, ‘2030’ 젊은 작가들은 휴대폰이란 자가폐쇄적/개인적 공간에서 세상을 마주했다. 그렇기에 ‘7080’ 세대 문인들이 운동권에서 세상을 배워나가며 ‘정치 문학’이라는 하나의 시대적 흐름을 만들어냈듯, 2030 세대 문인들은 (옳은 명칭은 아니겠지만) ‘개인 문학’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1인칭 묘사는 그러한 시대적 흐름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이 사례를 긍정적으로 (또는 무감각하게) 바라보는 것은 그다지 좋은 행동이 아닌 듯하다. 시대에 따라 뒤바뀐 양상을 검토 없이 수긍하는 것은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뿐더러, 체화되지 않은 것들을 내부로 끌어들일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묘사법처럼 독자와 작품을 매개 하는 중요한 형식은 더욱 세밀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런 1인칭 묘사/서술에 대해 조금 더 많은 논의를 거칠 필요성을 느꼈다. 


1인칭 묘사에 대해서는 풀리지 않는 논의가 하나 있다. 그것은 작품 속 ‘나’가 소설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구체화된 창조적 ‘인물'인지, 아니면 이면지 뒤에서 글을 쓰는 작가 ‘본인'인지에 대해서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지점에서 ‘당사자가 아닌 사람(작가)’이 화자가 되어 당사자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어쩌면 작품의 윤리를 결정적으로 판가름 지을 수도 있는 흐릿하고도 모호한 자가당착의 경계에 봉착한다. 작가가 입을 열지 않는 한 그 자가당착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근래 한국문학의 동시대적 담론이 과거에 비해 비교적 유보되어 있다는 인상이 적지 않게 드는 것 역시 당사지성에 대한 논의가 제한적인 자장 내에서 야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은 아닐까.


최근에는 유명 인플루언서나 연예인들의 일상을 담아낸 콘텐츠가 대중의 유흥거리로 소비되고 있다. 

연예인들은 자그마한 원탁에 모여 앉아 마이크를 찬 채 술(또는 안주거리)을 마시며 사담을 나누거나, 그 자리에서 자신의 진솔한 마음을 털어놓는다. 그곳에서 소비자는 평소 카메라 앞에서는 볼 수 없던 유명인의 ‘은밀한’ 모습을 원탁과 술이라는 ‘일상적 환경’을 통해 대면한다. 이곳에는 우리가 마치 타자(유명인)와 오래간 알고 지낸 관계처럼 만들어내는 외화면의 장력이 은연중 존재한다. 순간 우리는 일상적 환경에 의해 당사자성을 부여받는다. 다만 우리가 당사자성을 부여받는 가장 큰 까닭은, 타자가 운동하던 그 순간, 그 장소, 그 자리에 카메라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우리가 그 시공간에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스크린을 통해서 마주하는 타자와의 관계는, 표층기호들로 가로막힌 반작용적 관계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소비자는 스크린이라는 장벽 앞에서 타자와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없다. 이런 것을 두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소통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유형의 콘텐츠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댓글란)을 보면 마치 자신이 그 인물을 알 것 같다는 듯이 타자에 대한 가치 평가가 어렵지 않게 이루어진다. 이때 우리는 이들을 진정 ‘당사자’라고 불러야 할까?


한동안은 이 질문이 가장 큰 고민거리로 맴돌았다. 어떤 방식으로든 타자에게 공감하고 연대하며 개인적으로 소통하는 듯한 감흥을 받은 소비자는 당사자일까? 아니, 애초에 상호작용하지 못한 관계를 두고 ‘우리’라는 ‘공동체’로 구분 짓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우리’라는 공동체를 이루는 관계는, 타자와 나라는 서로 다른 두 객체가 상호작용할 때 더욱 돈독해지는 것처럼, 서로가 얼마나 소통하느냐, 혹은 참여하느냐에 따라서 관계의 당사자가 될 자격을 얻는다. 그렇기에 당사자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타자를 이해하고 어떠한 것에 대해 책임져야 할 의무를 진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당사자가 될 자격만큼은 쉽게 주어져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일상적인 V-log 형식의 콘텐츠가 인기를 끌고 있다는 생각해 볼 때, 이 시대는 너무도 쉽게 제공될 여지가 있는 ‘당사자성’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요즘 청중을 필요로 하는 예술 매체, 문학 뿐 아니라 영화, 미술 등 여러 분야들이 시대적 흐름을 뒤따르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당사자성’을 어떤 방식으로든 끌어안으며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는 한다. 그것은 때때로 독자에게 작품과 거리를 둘 것을 요구하거나, 혹은 작품에 다가오기를 요구한다. 이런 사례가 만연되어 가끔씩 독자를 억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문학에서 사용되는 1인칭 묘사도 그와 다르지 않다. 


독자는 왜 당사자가 되어야 하는가? 또는 왜 당사자가 될 수 없는가?


오늘날 예술계(미술, 문학, 영화, 공연)는 어떠한 작품을 마주할 때 매 번(또는 자주) 이런 고민으로 작품을 바라봐야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우리의 비평은 이 과제를 풀어나가야만 한다. 


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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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넘버는 어떻게 인물의 서사를 음악으로 완성하는가 — 뮤지컬『베르테르』와『킹키부츠』를 중심으로

Ⅰ. 서론 – 뮤지컬에서 넘버는 왜 서사의 언어가 되는가 연극에서 인물은 대사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낸다. 그러나 뮤지컬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말만으로 더 이상 감정을 담아낼 수 없는 순간 이야기를 노래로 넘긴다. 이때 뮤지컬의 넘버(Number)가 맡는 역할은 극의 분위기를 환기하거나 음악적 즐거움을 더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넘버는 인물의 내면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또 하나의 대사이자 서사를 움직이는 핵심 장치다. 뮤지컬을 감상하다 보면 유독 오래 기억에 남는 노래들이 있다. 흔히 ‘대표 넘버’라 불리는 이 곡들이 기억되는 이유는 멜로디의 아름다움이나 대중적 인지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대표 넘버는 인물이 삶의 전환점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거나, 더는 외면할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 그 순간 음악은 이야기의 흐름을 멈추기는커녕 이야기가 나아갈 방향 자체를 결정한다. 뮤지컬에서 음악은 감정을 설명하는 대신 경험하게 만든다. 배우의 호흡은 점차 거칠어지고 선율은 인물의 심리 변화를 따라 오르내리며 리듬은 흔들리는 마음을 그대로 담아낸다. 여기에 가사와 오케스트레이션, 연기와 무대 연출이 더해지는 순간 하나의 넘버는 독립된 음악을 넘어 한 장면, 한 서사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비평은 ‘뮤지컬 넘버는 어떻게 인물의 서사를 음악으로 완성하는가’ 라는 질문에서 출발하였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사랑과 성장이라는 전혀 다른 서사를 다루는 두 작품이자, 필자가 가장 인상 깊게 봤던 뮤지컬인 『베르테르』와 『킹키부츠』를 선정하였다. 장르와 시대, 음악적 색채는 다르지만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이 삶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마다 넘버를 통해 내면을 드러낸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본 비평에서는 『베르테르』의 넘버 「어쩌나 이 마음」과 「발길을 뗄 수 없으면」, 『킹키부츠』의 넘버 「Step One」과 「Soul of a Man」을 중심으로 가사, 선율, 리듬과 템포, 배우의 음악적 표현, 장면 연출이 인물의 감정선과 서사에 미치는 영향을 비교·분석할 것 이다. 네 곡 모두 주인공이 직접 부르는 대표 넘버이자 서사가 가장 크게 전환되는 순간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했으며 각 넘버가 왜 하필 그 장면에서 울려야 했는지 그 노래가 없었다면 인물의 서사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를 살펴봄으로써 넘버가 음악을 넘어 인물의 삶을 완성하는 언어임을 고찰하고자 한다.Ⅱ. 『베르테르』 뮤지컬 『베르테르』는 주인공 베르테르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다루지만 그 사랑은 화려하거나 극적인 사건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작품은 한 사람이 감정을 자각하고, 그것을 억누르려 애쓰다가, 끝내 그 감정에 잠식되어 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따라갈 뿐이다. 이러한 서정적인 심리의 결은 대사만으로는 다 담아내기에는 관객에게 충분히 전달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그 순간마다 넘버가 등장한다. 베르테르의 넘버는 이미 정리된 감정을 노래로 옮기는 도구가 아니다. 그는 노래를 부르는 과정 자체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스스로도

  • 시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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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캔디
  • 2026-07-08
대중 앞에 놓인 카타르시스성 폭력-드라마 '참교육'을 중심으로

대부분의 한국 고전 산문들은 인과응보와 권선징악을 띄고 있다. 당장 ‘홍길동전’과 ‘장화홍련전’의 결말을 두고 비교해봐도 그렇다. 두 작품 모두 악인은 벌을 받고 선인은 복을 받는 결말이다. 이러한 구성 방식과 결말은 한국 근대 이전의 소설들 속에서 주를 이뤘다. 그러나 권선징악과 인과응보는 한국 고전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도 상업 소설인 웹소설, 상업 드라마, 상업 영화 등 대중적인 이야기 플롯에서 자주 등장한다. 이는 일종의 모티프다. 이런 모티프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유지되기도 한다. 그중 인과응보, 권선징악이라는 모티프는 전 세대에 걸쳐 과거에서 현재까지 매체와 서술 방식을 변주하며 계속 나타난다. 특히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상업 드라마라는 이름으로 권선징악과 관련된 모티프가 자주 나타난다. 상업 드라마에서 권선징악, 인과응보를 보여주는 드라마 중 일부는 복수라는 장르를 내세우기도 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김순옥의 ‘아내의 유혹’, ‘펜트하우스’, sbs 시리즈 드라마 ‘모범택시’, ‘열혈사제’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복수극도 개인에 이야기만을 하는 드라마와 개인을 넘어 사회까지 유효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드라마로 나눌 수 있다. 이로 볼 때 김순옥의 ‘아내의 유혹’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복수로 그려진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모범택시’ 시리즈, ‘열혈사제’ 시리즈는 개인과 개인을 넘어 현실 사회 문제도 건드리는 복수극이다. 따라서 ‘열혈사제’와 ‘모범택시’ 시리즈는 각종 사회 문제를 시리즈별로 이야기하여 그려낸다. 반면, ‘아내의 유혹’은 구은재와 신애리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복수를 그려내고 있다. 이런 차이점은 각각 드라마의 결말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김순옥의 ‘아내의 유혹’은 악역인 신애리와 정교빈이 죽음으로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며 극이 마무리된다. 그러나 주인공인 구은재는 그들이 받은 벌을 보고도 행복해하지는 않는다. 구은재는 신애리에게 피해를 받은 피해자기도 하지만, 그녀에게 신애리는 친구이자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복수의 성공이 결코 행복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역으로 한때 악역이었던 애리를 용서하는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결말을 맺는다. 반면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 실현으로 복수를 진행하는 ‘모범택시’ 시리즈와 같은 드라마는 무지개 운수라는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집단이 사회 문제를 대표하는 사건을 해결하는 식으로 에피소드별 결말을 맺는다. 그 과정은 복수극과 복수 대행 서비스 안에 맞춰서 폭력적이고, 역지사지의 방식으로 진행되고 해결된다. 그 과정에서 시청자는 악인을 폭력으로 제압하고 벌하는 모습을 보며 고양된 감정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런 카타르시스 안에는 사회정의라는 이름에 감춰진 폭력이 존재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단어가 바로 ‘참교육’이다. 참교육은 본래, 참된 교육이라는 뜻으로 선생이나 어른이 진정으로 학생들을 위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가르치고 지도하는 일을 뜻한다. 현재까지도 교육 현장에서 교사들이 지향해야 하는 교육이 바로

  • 송희찬
  • 2026-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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