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의 시작점을 어디로 잡아야 하는가?' 주장문
- 작성자 Ted
- 작성일 2025-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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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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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 세계의 시작점을 어디로 잡아야 하는가?'를 주제로 철학적 입장에서 쓴 발표문입니다.
세계라 함은 물질 세계, 가능 세계, 수학적 세계 등등 수많은 세계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세계란 무엇일까요? 세계의 정의는 앞서 제시한 세계들의 공통점에 있는데 그것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집합’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각자 존재를 정의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들의 집합이 각각의 세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물질 세계는 물질적인 존재들의 집합이고 가능 세계에서는 가능태로서 존재하는 것들의 집합, 수학적 세계에서는 수학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의 집합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계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완전한 세계처럼 보이기에 우리는 논제에서 말하는 세계가 도대체 어떤 세계를 말하는지를 헷갈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번 시간에 이런 헷갈리는 세계들을 종합적으로 바라보고, 하나의 공통된 세계를 제시하여 그 시작점을 탐구할 생각입니다.
여러가지 세계 중에서 가장 일상적이고 다루기 쉬운 세계를 꼽으라 하면 우리는 가장 먼저 물질 세계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물질 세계는 겉보기에 완전해 보이는 것과는 달리 실은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한 다는 것은 쉽게 입증될 수 있는데 가령 우리는 이런 경우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어디선가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이 튀어나와서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그대가 말하는 물질 세계는 어째서 믿을만한 것이 되는가?” 그럼 우리는 물질 세계는 우리의 감각 기관에 의해 너무나 쉽고 실감나게 체험되기에 믿을 수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상한 사람은 또다시 묻는 것입니다. “그대의 감관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그럼 우린 아마 그것이 과학적으로 검증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럼 그가 과학적이라는 용어를 이렇게 재정의하는 것입니다. “과학적이라는 것은 감관에 의해서 체험된 사실을 말하는가?” 그럼 우린 이때 무언가 논리가 잘못됨을 느끼면서도 그의 물음에 긍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 그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은 이렇게 우리의 대화를 요약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네의 주장을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이런 거라네. ‘물질세계는 믿을만하다. 왜냐하면 감관에 의해 체험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관이 믿을만한 이유는 감관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이 경우 만약 감관이 믿을만 하다면 물질 세계를 우리가 믿을 수도 있겠지만 또한 같은 이유로 감관이 믿을만 하지 않다면 물질 세계 또한 믿을만 하지 않음을 찾을 수 있지만 감관이 믿을만한 이유가 없기에 물질세계는 ‘꼭 그래야 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유로 다른 대부분의 세계는 가장 근본적인 부분에서 합당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단지 순환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령 수학의 경우에도 공리를 믿음으로서 시작하므로 필연적일 이유가 없고, 또 가장 쉬운 사례로 종교의 경우에도 신에 대한 믿음 위에서 세워진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생각보다 복잡하지도 않은 회의를 통해 우리가 확실하다고 단언한 것들이 단지 종교와 같은 믿음에 지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다 할 결론도 없이 이런 회의 속에서 글을 마친다면 이 글은 단지 허무주의적 입장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한번 본론으로 돌아와 세계가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앞서 얘기했듯 세계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집합’ 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에는 크게 2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앞선 정의에서 ‘집합’이라는 단어에 방점을 찍고 집합을 정의함으로서 존재를 정의하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말한 지금껏 다양한 세계들이 알게 모르게 선택했던 방식으로 일단 먼저 세계를 정의해 놓고, 그 정의에 속한 ‘존재하는 것’이면 ‘진정한 의미의 존재’라 부르고 그 정의에 속하지 않으면 ‘허상’ 혹은 ‘발명된 것’으로 그 의미를 축소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첫번째 경우가 우리가 충분히 만족할 만한 답을 쥐여주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겐 두번째 방식이 있는데 바로 앞선 정의, 즉 ‘존재하는 것들의 집합’에서 존재에 집중해 보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존재를 분석해 봅시다. 존재란 무엇일까요? 일반적인 경우, 즉 세계에 대한 정의를 앞세우는 자의 존재에 대한 정의는 아마 이런 것일 것입니다. ‘100원짜리 동전이 내 주머니에 실제로 있는 것과 실제로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 다른 것과 같이 절대적이고 (나의 관념이나 정의된 세계가 취급하지 않는 것들과는)아무래도 상관없는 그 신비성’ 그러니까 어떤 허무주의적 우주론자가 “내가 갑자기 어떤 이유도 없이, 그러니까 마치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햇빛에 눈이 부셔서 이 사람을 죽이든, 당장의 저 창문으로 뛰어내리든, 지극히 히스테릭적인 정열에 젖어서 신을 믿게 되든, 혹은 설령 내 주장이 틀렸음을 스스로 시인하든 어쨌거나 우주는 그냥 그렇게 존재하고, 우주적 관점에서 아무래도 상관 없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그 압도적인 존재(자체)의 신비를 아마 그들은 말할 것입니다. 물론 그 압도적인 신비는 우리가 종교를, 과학을, 수학을 믿게 했지만 지금은 한발짝 물러나서 생각해봅시다. 도대체 우리에게 주어진게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이 막연한 세계를 생각하기 앞서 지금 우리 손에 도대체 뭐가 들려 있기에 우리 손에 있는게 실은 그 압도적이고 거대한 것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어디선가 나무에 매달린 사과를 보고 그것을 거대하고 압도적인 신의 일부라 가정하고 토테미즘적 신앙에 빠진 어느 구석기인과 같은 사과를 보고 거대하고 압도적인 우주를 생각한 경험주의자와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아, 물론 어떤 경험주의자는 이렇게 반론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겐 더 많은 사과가 있고 그 사과들은 하나의 압도적인 우주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사과들을 보면서 이건 분명 우주의 일부일거야 라고 생각하는 과학적 인간이나 이건 분명 엄청나게 커다란 사과에 하나일거야 라고 말하는 어떤 범신론적 토테미즘의 숭배자나 혹은 이 모든 사과들은 하나의 사과 신께서 창조하신 거라고 말하는 인격신적 토테미즘 신자나 다를게 무엇입니까? 이 토테미즘 신앙의 구석인들도 분명 자신들에겐 수도 없이 많은 사과가 있지만 이것들 모두가 다 토테미즘적 신앙으로 설명된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다시 이들이 말하는 그 ‘존재’가 단지 그들이 규정하는 발견된 것, 즉 그들의 집합에 대한 정의에 적합한 일부와 그 일부로부터 예측 될 수 있는 무한한 전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인식된 일부의 신비스러운 존재라는 지위는 압도적인 전체로부터 나오며 이 전체는 실은 일부로부터 예측된 하나의 세계, 그마저도 예측될 수 있는 유일한 세계도 아니고 단지 그렇게 믿어지는 세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여기서 비로소 존재에 방점을 찍을 수 있습니다. 존재란 일체의 가정이 가미되지 않은 인식된 일부 그 자체라는 새로운 정의를 존재를 강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일부를 그 자체로, 아니 애당초 일부도 아니었고 그저 존재하는 것들을 그 자체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계에 존재를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들에 맞춰서 세계를 (단지 존재들의 관계를 명확히 알기 위해서) 만드는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이죠. 그리고 이 새로 만들어진 세계에서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인식된 것들 자체가 모두 존재하는 것들이 되며 단지 그것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여기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인식된 것’은 물질적 세계에 대한 인식, 수학 세계에 대한 인식, 종교적 체험, 논리적 인식 그 자체와 인식된 것들이 어떤 관계 내에서 만들어낸 것들, 가령 가정된 세계 등지의 것들도 논리적 인식의 방식에 포함되므로 ‘존재하는 것’에 포함된다. 다만 존재하는 것들 사이에는 명확한 관계가 없다. 명확한 관계가 있다면 다시 하나의 가정된 세계가 가능해지기에)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렇게 새로 창조된 세계, 그러니까 오직 인식된 것, 즉 존재하는 것을 위하여서 발명된 세계의 시작점은 어디입니까? 이 경우 존재하는 것들 사이에 어떤 시간적 관계는 있을 수 없으므로 시작점이란 시간에서의 처음이라기 보다는 가장 본질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들은 인식된 것들이며 인식된 것의 본질은 인식이라는 행위에 있고, 그 인식이라는 행위는 주체 ‘인식하는 주어 나’를 내포하므로 이 세계의 본질이자 시작점은 ‘인식하는 행위와 그 주체 나’(물론 ‘인식하는 행위’라 말하든 ‘인식하는 주어 나’라고 말하든 같은 의미이지만 지금은 풀어썼다)라고 생각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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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 뮤지컬에서 넘버는 왜 서사의 언어가 되는가 연극에서 인물은 대사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낸다. 그러나 뮤지컬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말만으로 더 이상 감정을 담아낼 수 없는 순간 이야기를 노래로 넘긴다. 이때 뮤지컬의 넘버(Number)가 맡는 역할은 극의 분위기를 환기하거나 음악적 즐거움을 더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넘버는 인물의 내면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또 하나의 대사이자 서사를 움직이는 핵심 장치다. 뮤지컬을 감상하다 보면 유독 오래 기억에 남는 노래들이 있다. 흔히 ‘대표 넘버’라 불리는 이 곡들이 기억되는 이유는 멜로디의 아름다움이나 대중적 인지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대표 넘버는 인물이 삶의 전환점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거나, 더는 외면할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 그 순간 음악은 이야기의 흐름을 멈추기는커녕 이야기가 나아갈 방향 자체를 결정한다. 뮤지컬에서 음악은 감정을 설명하는 대신 경험하게 만든다. 배우의 호흡은 점차 거칠어지고 선율은 인물의 심리 변화를 따라 오르내리며 리듬은 흔들리는 마음을 그대로 담아낸다. 여기에 가사와 오케스트레이션, 연기와 무대 연출이 더해지는 순간 하나의 넘버는 독립된 음악을 넘어 한 장면, 한 서사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비평은 ‘뮤지컬 넘버는 어떻게 인물의 서사를 음악으로 완성하는가’ 라는 질문에서 출발하였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사랑과 성장이라는 전혀 다른 서사를 다루는 두 작품이자, 필자가 가장 인상 깊게 봤던 뮤지컬인 『베르테르』와 『킹키부츠』를 선정하였다. 장르와 시대, 음악적 색채는 다르지만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이 삶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마다 넘버를 통해 내면을 드러낸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본 비평에서는 『베르테르』의 넘버 「어쩌나 이 마음」과 「발길을 뗄 수 없으면」, 『킹키부츠』의 넘버 「Step One」과 「Soul of a Man」을 중심으로 가사, 선율, 리듬과 템포, 배우의 음악적 표현, 장면 연출이 인물의 감정선과 서사에 미치는 영향을 비교·분석할 것 이다. 네 곡 모두 주인공이 직접 부르는 대표 넘버이자 서사가 가장 크게 전환되는 순간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했으며 각 넘버가 왜 하필 그 장면에서 울려야 했는지 그 노래가 없었다면 인물의 서사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를 살펴봄으로써 넘버가 음악을 넘어 인물의 삶을 완성하는 언어임을 고찰하고자 한다.Ⅱ. 『베르테르』 뮤지컬 『베르테르』는 주인공 베르테르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다루지만 그 사랑은 화려하거나 극적인 사건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작품은 한 사람이 감정을 자각하고, 그것을 억누르려 애쓰다가, 끝내 그 감정에 잠식되어 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따라갈 뿐이다. 이러한 서정적인 심리의 결은 대사만으로는 다 담아내기에는 관객에게 충분히 전달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그 순간마다 넘버가 등장한다. 베르테르의 넘버는 이미 정리된 감정을 노래로 옮기는 도구가 아니다. 그는 노래를 부르는 과정 자체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스스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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