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접지몽 세계: 텍스트와 이미지의 (불)가능성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5-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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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
칠판에 수식이 쓰여있다.
이 기호식(혹은 방정식)을 마주하게 되면 이것이 품고 있는 부당성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특히 위 방정식에서 두 개의 기호 ‘x’를 매개하고 있는 등호(=)는 일종의 ‘같다(same as)’의 형용사처럼 사용되곤 하는데, 우선적으로 칠판에 쓰여진 ‘x’가 뒤 따라오는 x와 동일한 기호인지 의문이 든다. 물론 기호로서 ‘x’는 ‘x’ 일 것이다. 그러나 ‘칠판에 그려진 피상적인 기호’로서도 동일할까? 두 ‘x’는 비슷한 형태를 지니고 있지만, 칠판 위에서 세밀하게 살펴본다면 둘 중 다른 한쪽의 선이 더 길거나 짧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접근법에 따라 언제든 변환될 수 있는 기호의 ‘가변적 성질’을 감지하게 된다.
문학의 미술성
텍스트(기호)에 새롭게 접근하려는 시도는 오래전부터 논의되어 왔다. 특히 말라르메와 블랑쇼, 그리고 바르트의 작업들은 텍스트에 ‘정신성(mental)’이라는 유령을 덮어씌움으로써, 기호의 본질을 들여다보도록 만든 성공적인 사례를 보여주었다.
반대로, 텍스트를 이미지로 받아들이려는 시도 역시 있었다. 편의를 위해 이 시도를 ‘텍스트-이미지’라 부르도록 하자. ‘텍스트-이미지’는 (내가 방정식을 부정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텍스트의 피성성을 중심으로 시도되어 왔다. 이 접근법으로 시도된 작품 중에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이상의 <오감도> 일 것이다.
이상 <오감도 제 4호 및 5호>
숫자와 기호들이 열을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을 처음 마주하게 되면 이상하게 텍스트 보다 ‘정사각형’이라는 이미지, 또는 측면에 위치한 화살표 그림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도대체 왜?
시간이 지나면 숫자와 기호들 역시 점차 시야에 들어온다. 하지만 숫자와 기호에 대한 그 어떤 서술도 부가적으로 쓰여 있지 않기 때문에, 위 작품만 보고서 텍스트가 지니고 있는 뜻을 발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곳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마주한다.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숫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숫자인가?”, “기호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기호가 맞을까?’ 이런 질문들을 거치게 되면 사실상 이 작품이 텍스트에 대한 기준을 자가의심을 통해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심지어는, 그림과 그림 사이에 놓인 한자마저 우리가 알고 있는 한자가 맞는지 의문에 들게 한다. 이곳에서 텍스트는 ‘기의’로서 공용성(共用性)을 상실한다.
요컨대 로만 제이콥슨(Роман Якобсон)은 “공용성을 상실한 기호는 ‘기표’ (또는 이미지)가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기의(記意)가 ‘읽는 것’이라면, 기표(記標)는 ‘보는 것’이다. ‘보(이)는 것 (see)’과 ‘읽(히)는 것(read)’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보는 것이 인지(recognization)의 영역이라면, 읽는 것은 ‘이해(understand)’의 영역이다. 인지의 경우는 즉각적으로 감지되는 ‘감각’의 영역인 반면, 이해는 특정한 상황과 사건을 받아들이기 위해 시간과 논리를 함유한 ‘지성’을 필요로 한다. 특히 문학 - 처럼 텍스트가 보편적으로 기의로 받아들여지는 상황 - 의 경우는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논리적인 사고 체계를 요구하기도 한다. 반면 <오감도>처럼 기호가 의미를 상실하므로서 이미지가 부각되는 경우도 있다. <오감도>에서 ‘본다’는 행위가 ‘읽기’라는 행위보다 앞서 수행되고 있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미술인가? 문학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란 매우 난감한 일이다. 작가 스스로 이 작품을 ‘시’로 발표했다는 사실은 이 작품을 문학의 영역에 올려놓지만, 이 작품에서 기호가 문학에서 사용되어 왔던 텍스트의 보편성 - 텍스트는 기의라는 관념 - 을 철저히 파괴하므로서 문학과 거리를 두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오감도’의 실뜻이 ‘하늘에서 내려다본 그림’이라는 것과, 이 시가 절대적으로 ‘시각화’되어 있다는 두 가지 사실은 이 시를 미술의 영역에도 발을 걸치도록 만든다. 이곳에는 미술의 영역으로 침투하는 문학의 초월적 풍경이 도사리고 있다.
미술의 문학성
미술과 문학에 대한 분류학적 고민은 문학계 뿐 아니라 미술계에서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특히 카와라 온(河原温)과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 같은 작가들의 작업방식 - 캔버스에 텍스트를 삽입하고, 그 텍스트가 ‘읽히게 됨’으로서 작품이 힘을 얻게 되는 ‘문학적 형식’- 은, 문학에서 시도되었던 ‘텍스트-이미지’ 운동이 ‘이미지-텍스트’ 운동으로 역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기도 한다.
‘문학’과 ‘미술’의 정의를 ‘텍스트’와 ‘이미지’의 관계가 아니라 ‘이해와 인지’의 영역으로 확장시켜 본다면, 이러한 논의는 더욱 활발해진다.
특히 오늘날 미술제도에 적지 않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개념미술’이 ‘이해’와 ‘지성’을 필연적으로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요컨대 마르셀 뒤샹부터 시작되어 온 개념미술의 보편성 - 우리의 근저를 둘러싼 환경적 요소에 침투하고, 그것을 이해하도록 만드는 성질– 은 ‘보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촉발시킴으로써 단순 감각의 영역에 놓여져 있던 미술사조(추상화 및 회화)의 패러다임을 한순간 바꿔 놓았다. 이것은 미술을 감각의 영역에서 더욱 나아가, ‘사유(인지-생각)하는 것’으로 강화시켰으므로, 미술이 지성의 영역에서 독해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행위 과정을 짐짓 문학의 과정이라고 말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글을 읽기 위해 필수적으로 수행되는 과정 - 논리적인 사고 체계를 거쳐 작품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방식 - 이 오늘날 개념미술에서도 동일하게 수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살펴본다면 미술의 문학성은 작품에만 안주하지 않는다. 특수한 경우는 작가 스스로의 해설을 통해 독자에게 다가가기도 한다. 개념미술의 시초가 되었던 뒤샹의 <샘>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뒤샹의 <샘>이 화단의 주목을 받게 된 결정적 계기가 ‘비평문’ 덕분이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은 텍스트(비평)가 미술을 담아내는 ‘이미지-텍스트’ 시도를 보여준다. 만일 뒤샹의 비평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샘>이 오늘날처럼 타당한 미술사적 위치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현대미술의 본질은 작품 자체가 아니라, 작품을 서술하는 텍스트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빼어난 수사학으로 꾸며진 작품들을 마주하면 종종 ‘미술적’이라기보단 ‘문학적’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남는다. 또한 작품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해서 외주화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오늘날 미술비평의 기이한 풍경 역시 이미지를 텍스트로 전이하기 위한 또 다른 ‘이미지-텍스트적’ 운동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작품과 비평을 포함한 오늘날 미술제도에는 문학적 접근이 만연되어 있다. 이곳에는 미술로 자연스럽게 침투한 문학의 또 다른 초월적 풍경이 도사리고 있다.
가능성과 종말
작금 미술계에서 보여지는 문학성을 차치하더라도 우리는 이미 ‘텍스트-이미지’(또는 이미지-텍스트) 개념에 적지 않게 노출되어 있다. 유튜브와 SNS를 통해 텍스트와 이미지가 뒤섞여있는 짧은 영상들 - 유튜브 쇼츠나 인스타 릴스 같은 - 을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현실을 감각케 한다. 이 영상물들은 만 레이와 마르셀 뒤샹이 <현기증 시네마(Anemic Cinema)>에서 시도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텍스트와 이미지를 한 곳에 모아두므로서 ‘텍스트-이미지’ 혹은 ‘이미지-텍스트’에 대한 동시대적 논의를 유지시킨다.
오늘날 미디어 형식 – 이미지와 텍스트가 뒤섞인 형태 – 을 접해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텍스트가 자막처럼 소비되는 경향을 지니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다만 이곳에서 텍스트는 영상의 상단이나 하단이 아닌 정중앙에 배치되어 이미지를 가려버리는 성질을 띄고 있는데, 자막이 이미지를 설명하는 도구라는 것을 떠올려 본다면, 이런 자막(텍스트)의 활용은 매우 이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영상물들은 종종 텍스트로 이미지를 가리므로서 사용자(청자)로 하여금 텍스트에 집중할 것을 요구하며, 동시에 텍스트 뒤에 이미지를 삽입하므로서 텍스트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식으로 우리의 시선을 분산시킨다. 우리는 이런 분산의 과정을 통해 읽고 본다는 행위를 동시다발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이곳에는 이미지와 텍스트를 구분 짓던 기의와 기표적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텍스트는 보는 것이자 읽히는 것이 되고, 이미지 역시 서술되고 있는 텍스트를 통해 보이는 것이자 읽히는 것이 된다. 텍스트와 이미지 둘 중 그 어느 것도 일관적으로 본질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카오스적인 공간에 놓여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문득 장자의 <제물론> 속 어느 문구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된 것인가? "
이 고절한 문구에는 “나비”와 “장자”라는 두 주어 중 무엇이 실질적으로 기능 – 하며 주체적으로 현전 – 하는 존재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혼돈이 도사리고 있다.
텍스트와 이미지가 혼제된 영상물이 우리를 둘러싼 오늘날, 우리는 이 문구를 다음과 같이 바꿔 적어야 한다.
이미지가 텍스트가 된 것인가, 텍스트가 이미지가 된 것인가?
긴 분량의 영상보다 월등히 많은 조회수와 반응을 얻음으로써 미디어 매체를 장악한 짧은 영상물들은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들어야 하는지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이런 영상물에 노출될수록 우리는 점점 흐릿하고 모호한 경계 속에서 세계를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곳에는 틀림없이 구분 가능한 것들이 한데 뒤엉켜 구분 불가능한 것으로 변환된다. 이런 세계에선 <오감도>처럼 텍스트를 향한 기표적 접근이나 <샘>처럼 이미지를 향한 기의적 접근은 더 이상 신선하지도, 유효하지 않다. 어쩌면 이미지와 텍스트의 구분이 무용해지는 시대가 우리 앞에 있지는 않을까? 이것이 점진적으로 발전할 미디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예언일지, 미술과 문학의 어떤 가능성에 대한 종언일지는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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