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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접지몽 세계: 텍스트와 이미지의 (불)가능성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5-10-02
  • 조회수 338

x=x 

칠판에 수식이 쓰여있다. 

이 기호식(혹은 방정식)을 마주하게 되면 이것이 품고 있는 부당성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특히 위 방정식에서 두 개의 기호 ‘x’를 매개하고 있는 등호(=)는 일종의 ‘같다(same as)’의 형용사처럼 사용되곤 하는데, 우선적으로 칠판에 쓰여진 ‘x’가 뒤 따라오는 x와 동일한 기호인지 의문이 든다. 물론 기호로서 ‘x’는 ‘x’ 일 것이다. 그러나 ‘칠판에 그려진 피상적인 기호’로서도 동일할까? 두 ‘x’는 비슷한 형태를 지니고 있지만, 칠판 위에서 세밀하게 살펴본다면 둘 중 다른 한쪽의 선이 더 길거나 짧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접근법에 따라 언제든 변환될 수 있는 기호의 ‘가변적 성질’을 감지하게 된다.


문학의 미술성

텍스트(기호)에 새롭게 접근하려는 시도는 오래전부터 논의되어 왔다. 특히 말라르메와 블랑쇼, 그리고 바르트의 작업들은 텍스트에 ‘정신성(mental)’이라는 유령을 덮어씌움으로써, 기호의 본질을 들여다보도록 만든 성공적인 사례를 보여주었다. 

반대로, 텍스트를 이미지로 받아들이려는 시도 역시 있었다. 편의를 위해 이 시도를 ‘텍스트-이미지’라 부르도록 하자. ‘텍스트-이미지’는 (내가 방정식을 부정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텍스트의 피성성을 중심으로 시도되어 왔다. 이 접근법으로 시도된 작품 중에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이상의 <오감도> 일 것이다.



이상 <오감도 제 4호 및 5호>


숫자와 기호들이 열을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을 처음 마주하게 되면 이상하게 텍스트 보다 ‘정사각형’이라는 이미지, 또는 측면에 위치한 화살표 그림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도대체 왜?


시간이 지나면 숫자와 기호들 역시 점차 시야에 들어온다. 하지만 숫자와 기호에 대한 그 어떤 서술도 부가적으로 쓰여 있지 않기 때문에, 위 작품만 보고서 텍스트가 지니고 있는 뜻을 발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곳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마주한다.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숫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숫자인가?”, “기호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기호가 맞을까?’ 이런 질문들을 거치게 되면 사실상 이 작품이 텍스트에 대한 기준을 자가의심을 통해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심지어는, 그림과 그림 사이에 놓인 한자마저 우리가 알고 있는 한자가 맞는지 의문에 들게 한다. 이곳에서 텍스트는 ‘기의’로서 공용성(共用性)을 상실한다. 


요컨대 로만 제이콥슨(Роман Якобсон)은 “공용성을 상실한 기호는 ‘기표’ (또는 이미지)가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기의(記意)가 ‘읽는 것’이라면, 기표(記標)는 ‘보는 것’이다. ‘보(이)는 것 (see)’과 ‘읽(히)는 것(read)’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보는 것이 인지(recognization)의 영역이라면, 읽는 것은 ‘이해(understand)’의 영역이다. 인지의 경우는 즉각적으로 감지되는 ‘감각’의 영역인 반면, 이해는 특정한 상황과 사건을 받아들이기 위해 시간과 논리를 함유한 ‘지성’을 필요로 한다. 특히 문학 - 처럼 텍스트가 보편적으로 기의로 받아들여지는 상황 - 의 경우는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논리적인 사고 체계를 요구하기도 한다. 반면 <오감도>처럼 기호가 의미를 상실하므로서 이미지가 부각되는 경우도 있다. <오감도>에서 ‘본다’는 행위가 ‘읽기’라는 행위보다 앞서 수행되고 있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미술인가? 문학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란 매우 난감한 일이다. 작가 스스로 이 작품을 ‘시’로 발표했다는 사실은 이 작품을 문학의 영역에 올려놓지만, 이 작품에서 기호가 문학에서 사용되어 왔던 텍스트의 보편성 - 텍스트는 기의라는 관념 - 을 철저히 파괴하므로서 문학과 거리를 두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오감도’의 실뜻이 ‘하늘에서 내려다본 그림’이라는 것과, 이 시가 절대적으로 ‘시각화’되어 있다는 두 가지 사실은 이 시를 미술의 영역에도 발을 걸치도록 만든다. 이곳에는 미술의 영역으로 침투하는 문학의 초월적 풍경이 도사리고 있다.


미술의 문학성

미술과 문학에 대한 분류학적 고민은 문학계 뿐 아니라 미술계에서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특히 카와라 온(河原温)과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 같은 작가들의 작업방식 - 캔버스에 텍스트를 삽입하고, 그 텍스트가 ‘읽히게 됨’으로서 작품이 힘을 얻게 되는 ‘문학적 형식’- 은, 문학에서 시도되었던 ‘텍스트-이미지’ 운동이 ‘이미지-텍스트’ 운동으로 역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기도 한다. 

‘문학’과 ‘미술’의 정의를 ‘텍스트’와 ‘이미지’의 관계가 아니라 ‘이해와 인지’의 영역으로 확장시켜 본다면, 이러한 논의는 더욱 활발해진다. 


특히 오늘날 미술제도에 적지 않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개념미술’이 ‘이해’와 ‘지성’을 필연적으로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요컨대 마르셀 뒤샹부터 시작되어 온 개념미술의 보편성 - 우리의 근저를 둘러싼 환경적 요소에 침투하고, 그것을 이해하도록 만드는 성질– 은 ‘보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촉발시킴으로써 단순 감각의 영역에 놓여져 있던 미술사조(추상화 및 회화)의 패러다임을 한순간 바꿔 놓았다. 이것은 미술을 감각의 영역에서 더욱 나아가, ‘사유(인지-생각)하는 것’으로 강화시켰으므로, 미술이 지성의 영역에서 독해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행위 과정을 짐짓 문학의 과정이라고 말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글을 읽기 위해 필수적으로 수행되는 과정 - 논리적인 사고 체계를 거쳐 작품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방식 - 이 오늘날 개념미술에서도 동일하게 수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살펴본다면 미술의 문학성은 작품에만 안주하지 않는다. 특수한 경우는 작가 스스로의 해설을 통해 독자에게 다가가기도 한다. 개념미술의 시초가 되었던 뒤샹의 <샘>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뒤샹의 <샘>이 화단의 주목을 받게 된 결정적 계기가 ‘비평문’ 덕분이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은 텍스트(비평)가 미술을 담아내는 ‘이미지-텍스트’ 시도를 보여준다. 만일 뒤샹의 비평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샘>이 오늘날처럼 타당한 미술사적 위치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현대미술의 본질은 작품 자체가 아니라, 작품을 서술하는 텍스트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빼어난 수사학으로 꾸며진 작품들을 마주하면 종종 ‘미술적’이라기보단 ‘문학적’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남는다. 또한 작품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해서 외주화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오늘날 미술비평의 기이한 풍경 역시 이미지를 텍스트로 전이하기 위한 또 다른 ‘이미지-텍스트적’ 운동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작품과 비평을 포함한 오늘날 미술제도에는 문학적 접근이 만연되어 있다. 이곳에는 미술로 자연스럽게 침투한 문학의 또 다른 초월적 풍경이 도사리고 있다.


가능성과 종말

작금 미술계에서 보여지는 문학성을 차치하더라도 우리는 이미 ‘텍스트-이미지’(또는 이미지-텍스트) 개념에 적지 않게 노출되어 있다. 유튜브와 SNS를 통해 텍스트와 이미지가 뒤섞여있는 짧은 영상들 - 유튜브 쇼츠나 인스타 릴스 같은 - 을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현실을 감각케 한다. 이 영상물들은 만 레이와 마르셀 뒤샹이 <현기증 시네마(Anemic Cinema)>에서 시도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텍스트와 이미지를 한 곳에 모아두므로서 ‘텍스트-이미지’ 혹은 ‘이미지-텍스트’에 대한 동시대적 논의를 유지시킨다.


오늘날 미디어 형식 – 이미지와 텍스트가 뒤섞인 형태 – 을 접해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텍스트가 자막처럼 소비되는 경향을 지니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다만 이곳에서 텍스트는 영상의 상단이나 하단이 아닌 정중앙에 배치되어 이미지를 가려버리는 성질을 띄고 있는데, 자막이 이미지를 설명하는 도구라는 것을 떠올려 본다면, 이런 자막(텍스트)의 활용은 매우 이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영상물들은 종종 텍스트로 이미지를 가리므로서 사용자(청자)로 하여금 텍스트에 집중할 것을 요구하며, 동시에 텍스트 뒤에 이미지를 삽입하므로서 텍스트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식으로 우리의 시선을 분산시킨다. 우리는 이런 분산의 과정을 통해 읽고 본다는 행위를 동시다발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이곳에는 이미지와 텍스트를 구분 짓던 기의와 기표적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텍스트는 보는 것이자 읽히는 것이 되고, 이미지 역시 서술되고 있는 텍스트를 통해 보이는 것이자 읽히는 것이 된다. 텍스트와 이미지 둘 중 그 어느 것도 일관적으로 본질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카오스적인 공간에 놓여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문득 장자의 <제물론> 속 어느 문구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된 것인가? " 

이 고절한 문구에는 “나비”와 “장자”라는 두 주어 중 무엇이 실질적으로 기능 – 하며 주체적으로 현전 – 하는 존재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혼돈이 도사리고 있다. 

텍스트와 이미지가 혼제된 영상물이 우리를 둘러싼 오늘날, 우리는 이 문구를 다음과 같이 바꿔 적어야 한다. 

이미지가 텍스트가 된 것인가, 텍스트가 이미지가 된 것인가? 


긴 분량의 영상보다 월등히 많은 조회수와 반응을 얻음으로써 미디어 매체를 장악한 짧은 영상물들은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들어야 하는지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이런 영상물에 노출될수록 우리는 점점 흐릿하고 모호한 경계 속에서 세계를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곳에는 틀림없이 구분 가능한 것들이 한데 뒤엉켜 구분 불가능한 것으로 변환된다. 이런 세계에선 <오감도>처럼 텍스트를 향한 기표적 접근이나 <샘>처럼 이미지를 향한 기의적 접근은 더 이상 신선하지도, 유효하지 않다. 어쩌면 이미지와 텍스트의 구분이 무용해지는 시대가 우리 앞에 있지는 않을까? 이것이 점진적으로 발전할 미디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예언일지, 미술과 문학의 어떤 가능성에 대한 종언일지는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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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단상: 시대의 흐름 속에서 바라본 당사자성

문학에서 (특히 소설의 경우) 저자가 3인칭 서술을 사용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다만 최근 한국문학에서 3인칭 서술 사용의 빈도가 가시적일 정도로 줄어들었다는 인상을 받고는 한다. 특히 그러한 양상은 미디어 매체에 전면적으로 영향을 받고, &lsquo;SNS&rsquo;와 &lsquo;알고리즘&rsquo;이라는 자기 폐쇄적인 공간을 시대에 의해 수용하게 된 2030 &lsquo;젊은 세대&rsquo; 작가들에게서 크게 발견되고 있다. 대표적인 이들만 간단히 호명해 보자면, &lsquo;김병운&rsquo;, &lsquo;김멜라&rsquo;, &lsquo;김지연&rsquo;, &lsquo;이서수&rsquo;, &lsquo;서이제&rsquo;, &lsquo;손보미&rsquo; 등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작품(들)은 대게 소설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화자를 &lsquo;나'라는 1인칭 단수로 설정함으로써 개인적인 이야기를 자기 폐쇄적인 공간에서 진솔하게 이끌어나간다. 그 과정에서 당사자성에 대한 조심스러운 고민의 흔적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젊은 작가들이 1인칭 묘사를 애용하는 이유를 살펴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휴대폰이 이제 막 세상에 등장했을 때, 그들은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었거나, 혹은 대학을 전전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한때 국내 문단을 주름잡았던 7080 세대들이 민주화 운동의 전선에서 사회를 마주하고 발화와 사유를 터득했던 것처럼, &lsquo;2030&rsquo; 젊은 작가들은 휴대폰이란 자가폐쇄적/개인적 공간에서 세상을 마주했다. 그렇기에 &lsquo;7080&rsquo; 세대 문인들이 운동권에서 세상을 배워나가며 &lsquo;정치 문학&rsquo;이라는 하나의 시대적 흐름을 만들어냈듯, 2030 세대 문인들은 (옳은 명칭은 아니겠지만) &lsquo;개인 문학&rsquo;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1인칭 묘사는 그러한 시대적 흐름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이 사례를 긍정적으로 (또는 무감각하게) 바라보는 것은 그다지 좋은 행동이 아닌 듯하다. 시대에 따라 뒤바뀐 양상을 검토 없이 수긍하는 것은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뿐더러, 체화되지 않은 것들을 내부로 끌어들일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묘사법처럼 독자와 작품을 매개 하는 중요한 형식은 더욱 세밀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런 1인칭 묘사/서술에 대해 조금 더 많은 논의를 거칠 필요성을 느꼈다. 1인칭 묘사에 대해서는 풀리지 않는 논의가 하나 있다. 그것은 작품 속 &lsquo;나&rsquo;가 소설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구체화된 창조적 &lsquo;인물'인지, 아니면 이면지 뒤에서 글을 쓰는 작가 &lsquo;본인'인지에 대해서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지점에서 &lsquo;당사자가 아닌 사람(작가)&rsquo;이 화자가 되어 당사자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어쩌면 작품의 윤리를 결정적으로 판가름 지을 수도 있는 흐릿하고도 모호한 자가당착의 경계에 봉착한다. 작

  • 화자
  • 2025-09-11
과거의 망령과 죽음의 골짜기에서 - <고요한 인생의 흐름에서>와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를 중심으로

속 유령을 찾아서 조명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세면대. 세수를 하기 위해 고개를 숙인 중기에게 오래전 망각하고 있던 기억이 떠오른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어떤 남자가 강압적으로 묻는다. &ldquo;○○○ 어딨어?!&rdquo; 중기는 떨리는 손을 허공에 뻗은 채 세면대를 벗어나 빛이 새어오는 문 틈으로 다가간다. 귓가에 울리던 폭력적인 소리는 더욱 크게 증폭된다. 과거의 소음이 현재를 장악해버린다. 김응수 감독의 1998년 영화 의 한 장면이다. 영화는 불혹에 접어든 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이 오래간만에 만나 시간을 보내는 내용을 담고있다. 언뜻보기에 애틋하고 향수어린 감각이 묻어있을 것 같은 줄거리이지만, 영화를 보게되면 정작 그런 것들과는 다소 거리가 먼 영화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오히려 위에서 서술한 세면대 장면을 보면 몸서리 처질 정도로 오싹하기까지 하다. 도대체 아름다워야할 이 장면이 이토록 소름돋게 다가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를 살펴 보기 위해 우선 세면대 장면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아야할 듯 싶다. 영화는 80년대 운동권에서 활동했던 학생들의 현재(90년 대)를 다루고 있다. 그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한국을 떠나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데, 중기라는 인물은 군사독재시절 운동권으로서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동료에 대해 자백해버려 그의 죽음에 선험적으로 일조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세면대 장면에서 모습을 드리우는 과거의 소음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잊혀지지 않는 그 죄책감(혹은 시대가 남긴 트라우마)이라는 유령적 존재가 우리의 일상에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대 운동권들이 겪어야했던 &lsquo;물고문'이라는 시대적 폭력의 상흔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장면이 이토록 섬짓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망각하고 있던 과거(를 재현시키는 소음)가 세수를 하려는 일상적인 순간에 불쑥 찾아와 현재를 장악해버렸다는 것에 있다. 요컨데 오랜 시간이 흘러버린 과거는 - 우리의 기억을 통해 왜곡된 생태로 현실에 개입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 그 자체로는 더 이상 현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기에, &lsquo;유령적인 존재&rsquo;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발생한 영화 속 사건(중기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자백하는 사건)이 특정 쇼트를 통해 물리적인 이미지로 보여지지 않고, 오직 인물들의 언급, 또는 비명, 목소리 같은 청각(사운드)에 의해 전개되는 것 역시 그 때문이다. 이 유령적인 존재는 우리에게 물질적인 방식을 통해 직접적으로 다가 올 수 없다. 반면 그것이 간접적으로 우리 현실에 침투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과거가 무의식 중에 우리에게 찾아온다면? 마치 유령처럼 어느 순간 비물질적으로 우리의 현실에 다가온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적어도 에서 만큼은) 과거가 현재에 소환되면, 현재의 지반을 이루고 있는 무수히 많은 과거의 층위 중 하나가 현재의 표부와 뒤섞이며 현재(의 상태)는 위태롭게 변질되어 버린다. 일상적이었던 것은

  • 화자
  • 2025-07-14
실체 없는 당신 얼굴 앞에서 - 알랭 기로디의 <미세리코르디아>

알랭 기로디의 2024년 영화 는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보다 정확히는 자동차의 운전자)의 시점으로 시작한다. 카메라는 꽤 오래간 우측에서 직행하는 자동차의 시점에 놓여있다가 돌연 좌측에서 직행하는 자동차의 시점으로 옮겨가는데, 이 장면을 보면서 일차적으로 찾아오는 것은 다름 아닌 당혹감이다. 오른쪽에서 직행하던 카메라가 왼쪽에서 직행할 때, 180도 상상선이 파괴되고 영화의 규칙은 무너지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당혹감에 사로잡혀 영화를 더듬거리고 있을 때 즈음, 도로를 질주하던 자동차는 산골 마을의 작은 제빵소 앞에서 멈춰 선다. 이야기는 그 제빵소에서 시작된다. 조금 다르게 말해보자면, 영화는 규칙이 무너진 바로 그 상태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그렇기에 의 첫 장면은 꽤나 도발적으로 다가온다. 사실 영화의 오프닝 씬에서 사용된 몽타주 -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카메라가 옮겨갈 때 - 는, 여느 영화에서 인물과 인물이 서로를 마주 보고 대화할 때마다 소비되어 왔던 보편적인 역쇼트처럼 기능한다. 다만 이 영화 속 시퀀스를 두고 ‘보편적’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분명 석연찮은 지점들이 있는데, 무수히 많은 영화 속에서 사용된 역쇼트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마주하는 ‘대응의 풍경’을 담아내는 반면, 이 영화의 역쇼트 시퀀스에는 서로를 마주보는 인물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속 자동차가 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 그곳에 놓여있는 건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쉼 없이 흘러가는 자연의 풍경이다. 그렇기에 고속도로 위에서 벌어지는 이 역쇼트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물질적인 존재(들), ‘얼굴과 얼굴의 대면’이 아니라, 도로 위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비물질적인 세계의 만남이자 대면’이다.그런 의미에서 는 실체없이 서로를 마주보는 것들에 대한 탐구라고 볼 수 있다. 영화는 동성애자 제레미가 고향마을에서 친구 빈센트를 우발적으로 살해, 유기하고 자신의 범행을 은폐시키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과정에서 빈센트의 어머니는 제레미가 자신의 아들을 죽였다고 의심하며, 늦은 새벽 경찰에게 제레미가 머물고 있는 2층 방문을 열쇠를 쥐어주고, 그의 방을 수색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뿐 아니라 제레미가 자고 있을 때면 예고 없이 그의 곁으로 다가가 “네가 빈센트를 죽였니?”라고 속삭이듯 물어보기까지 한다. 그러다가 제레미가 잠에서 깨어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듯 태연하게 고개를 돌리고, 제레미가 경찰이 새벽에 자신의 방을 뒤졌다고 호소할 때는, "악몽을 꾸었구나"라고 맞받아 친다. 그녀는 자신이 제레미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애쓴다.여기서 희한한 것은 제레미 역시 그녀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빈센트의 어머니는 제레미가 자신의 아들을 죽였다고 의심하고 있고, 제레미 역시 빈센트의 어머니를 의심하고 있다. 이 이중의심의 결속은 두 사람을 더욱 먼 곳으로 떨어트려 놓는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제레미는 막막한 어둠으로 뒤덮인 밤거리를 혼자 배회하고, 빈센트의 엄마는 영화에서 자취를 감춘다. 서로를 마주하게

  • 화자
  • 2025-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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