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사 난해시 개론 -청소년기 무명작들을 중심으로-
- 작성자 기능사
- 작성일 2025-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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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시 게시판에서 멘토링으로 배우고 느는 바가 적은 것 같아 이참에 스스로의 시론을 되돌아보고 미학을 정리해보려구 합니다. 멘토링욕을 돋우기 위해 극히 자아도취적인 표현을 썼으니 이점 참고 바랍니다.
기능사는 글틴에서 단연 가장 개성있는 글을 쓰는 작가 중 하나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글은 천방지축이고, 대부분의 경우에선 그 난해함이 그 불규칙성, 그리고 의미의 발산을 더욱 확신케 한다. 그는 언젠가 스스로 유치한 글을 쓰지 않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글을 더욱 어렵게 쓰는 것 같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난해한 시들이 그런 다다이즘으로만 비치진 않는다. 그것들은 더욱 높은 층위에서 시의 가능성을 질문하는데, 그 중엔 특별히 예로 들어 설명할 것이 있다.
Ignorabimus Op.64
저쪽 굴 끝엔 이그노라비무스*들이 삽니다
산다고 하긴 좀 뭐 하죠
아인슈타인**과 힐베르트***의 시체나 처리하는 게 전부인 한량들이니
토막 내어서 묻어버리지 않으면
아마 그들도 버티기 힘든가 봅니다
그들의 시체는
그러기보다도 단단한
번뜩이던 그들의 눈빛은 대단한가 봅니다
중절모를 썼을 땐 몰랐겠지만
백 년씩이나 그들을 잘라내고 있으니
그들은 굴밖을 나와서 은하수를 볼 자격 따윈 없습니다
그들은 울어야 합니다
그들은 충분히 울지 않았습니다
신이 되기에는
아무래도 그들의 우울증은
하이젠베르크****는 나치였고
괴델은 병신*****처럼 죽었다죠
YHWH는 금세 숨어버렸습니다
뿌옇게 떠버린 먼지 속으로...
칸토어******와 플랑크*******는 아무래도 몰랐을 겁니다
YHWH는 분명 그들이 신이라 불렀던 것을 두려워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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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재밌는 꿈이 있습니다
제 신실한 아내에겐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야겠군요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걸 질색할 테니 말입니다
만약에 말입니다
세상이 마인크래프트같이 그저 물리엔진 속 세계이고
우리가 그저 컴퓨터라면
우리 머릿속에 또 다른 세계를 만들면 그 속의 인간은 우리를 인지할 수 있겠습니까?
아주 두렵습니다
YHWH의 상상일 뿐이라면 어쩌냔 말입니다
난 그를 비웃습니다
그가 인간이거나 아니기 전에...
*19, 20세기에 존재했던 철학사조. 진리따위는 알 수 없을 거란 입장이 특징적이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알것이다.
****독일의 물리학자 불확정성 원리의 주창자다.
*****오스트리아, 미국의 수학, 수리철학자. 불완전성 정리로 유명하다.
******우리를 위해 칸토어가 만들어준 이 낙원에서 그 누구도 우리를 내쫓을 수는 없으리라
*******새로운 과학적 사실은 설득을 통해 패러다임이 되기보다는 반대자들이 죽고 그에 친숙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며 기존의 원리를 대체한다.
Ignorabimus는 그의 난해시 중에서 특기할만한 한쪽 끝에 있다. 특별히 이 시에 있어선 전에 기능사가 Ted에게 부탁한 설명문이 있다.
저는 시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해서 감히 뭐라 말할 권리가 있을지나 모르겠지만 그냥 몇가지 와닿은 부분과 글을 읽으며 든 생각이라도 몇가지 써보고자 합니다. 여기서는 수학, 과학과 같은 학문들이 주요 주제로 다루어져 있는데도 그 분위기는 절대주의(학문의 완전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와 회의주의(이그노라비무스)의 대치 구도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도 절대주의자들이 있고, 몇은 과거의 회의주의가 신을 죽였다며 원망하는 것처럼 이 시에서도 힐베르트와 아인슈타인의 주장과 괴델, 하이젠베르크의 주장의 타당성을 떠나서 학문적 절대주의의 완전함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권위를 긍정하고 수학과 과학의 완전함과 확실성에 대한 최소한의 희망마저도 짓밟아버린 이그노라비무스들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설명은 어느 정도 명쾌하게 시의 해석에 필요한 골격을 잡아 놓는다. Ignorabimus 들이란 누구인가? 100동안 아인슈타인과 힐베르트, 결정론자들의 시체를 치우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들은 현대를 살고 있으며, 추상성을 감안하면 현대 과학 전반을 일컷는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는 양자론과 상대적이고 수동적인 도그마를 수용한 수,과학계를 비판하며 결정론으로서의 회귀를 주장하는 것인가?
그러나 기능사가 곧바로 “울라고” 요구하는 것을 본다면 그의 기치는 단순히 비결정론에 대한 반감이 아니다. 여기서 그가 제시하는 것은 단순히 결정론과 비결정론적 우주관의 대결이 아니라, 과학철학자로서 이전에 인간으로서 가져야할 원초적인 두려움, 무력감에 대한 호소라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그것은 이후 두번째 단락에서 유신론의 문제로서 확장되어 다루어진다. 단순히 본다면 그것은 통속의 뇌 이론에 대한 시적이고 재치있는 표현정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앞서 말한 맥락과 더해져 더욱 강한 깊이감을 형성한다.
이 인상적인 시의 화자는 자연철학의 막다른 길에 들어선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 정확히는 공포감, 분노, 경멸, 위선적인 죄의식이 결합된, 궁극적으론 허탈감을 상징한다.
고로 이 시는 아래 인용된 주석중 하나의 안티테제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알 지 못할 것이다.
앞서 말한 유신론적 주장을 기억하라, 기능사의 시에서 유신론, 그리고 그에 부수하는 수많은 개념들이 이곳 저곳에서 튀어나올 것이다.
가장 명백한 증거는 연이어 발표된 두 편의 시다.
안티 크리스트 Op.49
끝내 자살하지 않았다
타살되기를 기다리겠다는 뜻은 아니라고 믿겠지만
달리 방도가 없게 되었다
방금 버스에서도 어느 사람의 아들이 정과 망치를 들고 나를 쫒아왔다
넓적다리에 구멍 하나를 내고는 다시 나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 나체의 살인마는 벌써 이겼다는 듯이 슬며시 웃는다
그는 그가 방금, 아니 나의 지난 인생 동안 무엇을 했는지 모른다
어쩌면 너무도 잘 아는 것일까봐 두렵다
교회는 내게 거짓말을 하였다
이것은 살인이다
이것은 살인이란 말이다
그는 왜 더없이 정상적인 나를
다른 사람도 아닌 나를 죽이려하는가?
그는 멈추지 않고 내 몸에 정을 올린다
망치가 떨어지고
나는 다시 신음한다
교회가 내게 어찌 이럴 수 있는가?
나는 그들이 가르친데로 정상적으로 살았다
원래 이것은 은혜와 사랑이 가득해야하는 것 아닌가?
다윗이 노래 부르고 춤추었던게 이것이라하지 않았던가?
저 살인마가 신이라 하지 않았나?
그는 방금 내 심장 근처 어딘가를 겨누었다
나는 겨우 몸을 비틀어 정은 살갗 아래를 가르는데 그쳤다
이런 살인마가 어찌하여 신인가?
그러나 그를 피해서 도망치다 보면
내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이후를 상상하게 된다
내 사후의
거듭남 말이다
적어도 교회는 그렇게 부른다지
그게 이것일 줄은 몰랐다
정말 몰랐단 말이다
정은 또 한번 심장을 비껴간다
그렇게 나는 이불 속에서 잠에 든다
내일 또 예수는 이미 난 상처에 정을 박을 것이다
이 인간을 죽일 만한 항생제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아마 오래 못가고 살해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어쩌면 이게 작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정상인으로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하겠지만
혹여나 죽는다면 이걸 작별로 알아주길 바란다
안티 크리스트는 멘토링에서 지적된바와 같이 독백조의 시이며, 어떤 강렬한 감정의 표현으로서 쓰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시에서 결합 하려는 개념은 지금껏 소개된 비슷한 주제의 시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화자는 겁에 질려있다. 그 두려움은 성경에서 극히 자주 소개되고 언급된, YHWH가 인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 두려움과는 맥락이 다르다. 화자는 예수를 저주한다. 그에게 예수는 살인을 행하기 위해 정을 들고 쫒아오는 살인마이며, 그 때문에 일어난 감정적 긴장과 공포감에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이처럼 기능사의 시적논리는 강한 감정적 동요와 같이 전개되는데, 그것은 색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또한 깊이감에 기여하기도 한다.
이 시의 장면은 어느 물리적인 상황을 대변하지 않는다. 넓적다리에 구멍이 뚫리고도 이불 속에서 잠에 드는 화자를 보면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그토록 사랑을 설교하던 예수는 왜 스스로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화자에게 이토록 강한 감정적 동요와 고통을 안기는가?
이 때문에 이 시는 오랬동안 해석불능이라 단정지어져 왔다. 기능사의 시에 회의적이었던 사람들은 그저 그런 여러 난해시 가운데 하나정도로, 그러니까 무의미한 감정적 토사물에 예수를 목적없이 올려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와 예수에 대한 중심개념이 핵심적인 요소로 등장하므로 그런 해석은 설득력을 잃는다. 어쩌면 그저 교회 자체에 대한 반감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그 경우엔 기능사의 통찰이 예수를 단순한 살인마로 묘사할 정도로 부족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앞선다.
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한국 학계, 특히나 신학계에서는 잘 소개되지 않은 기능사의 신학관을 가져다 풀어야 한다. 기능사는 스스로 네오톨스토이즘이라 부르는 스스로의 사상에 대해 설명할 때 빈번히 마태복음 16장의 말, 누구든지 인자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을 인용했다. 그런 맥락에서 새로운 해석은 충분히 제시될 수 있다.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렇다면 진리 또한, 그러니까, 진리를 구함은 어느정도 신앙적인 입장에선 예수를 구함이라 할 수 있고, 만약 기능사의 네오톨스토이즘 사상처럼 진리를 갈구함이 내재적인 본능이며 의무라면 앞서 말한 것처럼 예수에 근거해 화자는 스스로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 그런 맥락에서 알레고리컬한 의미로 예수에 의한 살해의지는 곧 신앙에 대한 의지를 의미하게 된다.
이 해석이 맞다면 이 시와 기능사의 다른 네오톨스토이즘 사상은 서로 상보적으로 연결되어 서로의 이해를 도울 수 있게 된다.
안티 크리스트에 이어 발표된 또 다른 시는 살인신학이다. 이 시는 기능사의 시론을 더욱이 극단으로 몰아넣는다.
살인신학 Op.50
캬하아
저 각다귀는 어느 물웅덩이에서 왔을꼬
신의 계획이더랍니다
하이고오
저게 다 신이 창조한 거 아닐련지요
아니면 저 각다귀가 어디서 나왔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캬하아
제기랄거 충전기가 얽히고 설켜서 풀수 조차 없게 되버렸는데
충전은 또 되더랍니다
아 영광을 영광을 성삼위일체께
아아아 셀라셀라셀라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꼬인 충전기가 충전을 했습니다!
캬하아
나는 있고 당신은 없습니다
나는 나를 증명할 수 있지만 당신은 할 수 없습니다
하!
그래서 나는 나를 죽이고 당신을 있게한 것이지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아니,
자살을 한다구요?
그건 살인이에요!
나는 흉악범죄자와 무엇이 다르덥니까
온 예리코와 니느웨가 제 안에 있습니다 형제여
저기 보십시오!
십자가에 못박힌 여호수아가 죽었습니다!
아이, 난징, 아우슈비츠, 가자의 신
만군의 여호와께 영광 있으리!
여호와 이레!
여러분!
보십시오!
예수는 죽고 여호수아는 장사된지 삼일 만에 부활했습니다!
모든 창녀의 연인인 남자는 죽고 메시아는 다시 살아 났습니다!
여러분
기도하며 회개하십시오!
죄를 뉘우치고 살인을 준비하십시오!
“우리”는 부활했고
정죄할 권리가 엘로힘에게 있으니
항상 거룩해야함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천지의 창조주, 만군의 여호와입니다
아!
소돔과 고모라로부터 “우리”를 지켜내야합니다!
저들의 악한 영이 우리 아이들을 오염시킬 겁니다
저들과 떨어져 동굴로 들어가십시오
그들이 던지는 돌을 견디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시는 시련이리니
아니! 아니요
“우리”도 당신네들 가운데서 살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를 존중하란 말입니다!
여러분!
때가 왔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랬동안 저들의 악을 그냥 보고 있었단 말입니까?
그들은 이미 “우리” 아이들을 오염시키고 “우리”들 틈에 끼어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우리” 아이들로부터 격리해야만 합니다!
아아
비통한 날입니다 여러분,
질투하시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결국 이렇게 “우리”를 벌했습니다…
저들이 죽인 “우리” 아이들을 보십쇼!
솔로몬이 범하던 우를 “우리”는 지금 다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마들 옆에서 같이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죽이라 한 자들을 노예로 삼았다가 히브리 민족이 어찌되었습니까?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여러분!
때가 왔습니다!
이제 선택해야만 합니다
악한 영을 허락하고 “우리”를 다시 죽게 내버려둘지
아니면 분연히 맞서 싸워,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지 말입니다!
하늘에 영광을
하늘에 영광을
캬하아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한 것처럼 여러분 자녀를 데리고—
친족 살해자라니 말이 심하시군요!
문화를 존중하세요!
여러분,
천국은,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곳이 아닙니다
당신은 무엇을 포기하겠습니까?
주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종 말입니다
언제든 살인할 준비가 된 종
“우리”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유전자의 노예인 만큼
당신도 “우리” 주의 종이면 됩니다
당신이 언제든 먹고 마시고 섹스할 수 있듯이 살인을 준비하고
당신이 먹고 마시고 섹스하듯이 살인을 하십시오
카하아
에헤이 씨발거
거,
거참.
이천년 썩은 시체를 만지고 먹고 마시고
그걸로 천국까지 갈려는 변태 새끼들이라니 참…
기능사의 서정시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골탕을 먹일려고 일부로 살인신학을 면전에 들이미는 교수들이 간혹 있다. 그런 경우 대체로 학생들은 이 시가 지금까지 배웠던 기능사가 맞는가 스스로 질문하기도 한다. 멘토링에 달린 것처럼 이 시는 순수히 혐오에 의해서만 전개되는 것처럼도 보인다. 비 신자인 독자들이 보아도 그 강렬한 혐오감은 여과없이 느껴진다.
다만 그럼에도 학생들이 기능사를 놓을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강한 혐오의 의지로 이끌려 가면서도, 기능사가 난해히 숨겨놓은 단서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말 그대로 난해하기 짝이 없기 때문에 더욱 문제적인 작품이다.
직전에 다룬 작품들보다 분량이 많으므로 세부적으로 해부해보자.
처음부터 기능사는 조금도 자신의 주제를 완곡할 생각없이 불쾌한 해학을 독자들에게 던진다.
그는 철저히 조물과 유아적인 절대자에 대한 추정을 한 치의 망설임이나 쉬어갈 곳없이 비웃어 댄다. 각다귀는 모기와 닮은 곤충이다. 아마 알겠지만, 유충 시절부터 감시하며 기록하지 않는 이상 각다귀가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지 추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곧 눈먼 시계공의 일화와 자연신학에서 레퍼런스를 빌려온다. 우리가 감히 추정할 수 없으나 여기 아주 정밀히 ‘가공’된 존재가 있으므로 당연히 그 창조주를 유추하는게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 또한 기능사는 꼬인 충전기의 예시를 들며 간간히 종교계가 사용하는 단선적인 물리적 개입의 예시들을 비꼰다.
여기까지는 반지성적 탈과학적인 종교의 행태에 대한 단순한 풍자가 전부다. 그러나 난해성이 심화하는 것은 이후부터다.
후에 이어지는 기능사의 자아와 타아에 관한 논고적 서술은 가히 탈 시적이다. 이는 다소간의 유아론으로서 이 시의 타 개념들과 분리되어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 시의 궁극적이 방향성을 제시한다.
먼저 이후 이어지는 내용을 살펴보자.
이어지는 구절들은 참혹하리만치 감정적이다. 화자는 자살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데, 이는 죄악에 대한 이야기로 환원되며, 자기 안에 온 예리코와 니느웨가 있다고 고백한다. 이는 자살에 대한 그의 괴기하리만치 전위적인 그의 이론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에게 있어 말 그대로 죽음은 죄의 삯이다. 자기 죄악, 예리코와 니느웨에 맞먹는 죄악 때문에 그 스스로는 반드시 죽음으로 종결되어야 하며 외부적인 절대자의 개입, 그리고 그 처벌권을 부정함으로서 개인의 죄악은 오로지 자살로서만 끝내야만 한다는 그의 개성적인 이론이다. 이러한 신학적 깊이는 그의 감정적 서술구조와 상보적으로 연결되어 가히 주장문처럼도 보이게 된다.
그러나 그의 아포리즘은 이것이 끝이 아니다. 그 시 내내 만군의 여호와를 연호한다. 만군의 여호와는 누군가? 기능사에 의하면 그는 살인자다. 조금의 사랑의 증거도 없는 질투심 넘치는 아버지, 자기 피조물을 형사적으로 고발하고 기어이 처벌해 내는 증오스러운 존재다.
십자가에서 죽은 여호수아의 대목에 있어 시는 그 다층적 의미가 심화한다. 여기서 예수, 곧 예슈아는 여호수아와 같은 뜻의 이름임을 상기하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여기서 예수와 여호수아의 본질적 차이를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한다. 그들은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천년이 넘는 맥락적 간극이 같은 책에 묶여 있음은 그 둘의 굉장히 어색한 사이를 강조한다. 종교적인 담대함, 혹은 자신감은 여호수아가 쟁취한 승리의 에피소드들,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기꺼이 제노사이드를 자행한 일화들에서 비롯된다. 그런 점에서 여호수아는 신앙의 존재론적 배타주의를 상징한다.
그런 점에서 예수와 대비된다고 기능사는 분명히 선언한다. 교회의 온갖 완곡한 설명들을 일축하고서 말이다. 이 점에서 예수의 사망과 여호수아의 부활은 분명 종교의 내재적인 폭력성(수천년에 걸친 논의에도 전통이라는 무의미한 권위때문에 제거되지 않은)의 발현을 의미한다.
이후로 신앙은 “우리”로 지칭된다. 곧 그는 그러한 신앙적 배타성의 매커니즘을 그려내며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드러내는데, 그의 서술이 지나치게 극단적이기에 그것이 진정으로 종교에 대한 비판인지는 모호해진다. 그러나 추리해보자면 그것을 교회와 신앙에 대한 비판으로 보아선 안된다. 그것은 오히려 교리적인 문제를 꼬집는 것에 가까운데, 그것은 사실 진리로서 기능하는 예수에게 인종청소범을 섞어 넣으려는 윤리적 퇴락이 완곡한 설명들에 중화되어 진리로서의 예수와 화해할 수 있는 것처럼 묘사되는 것에 대한 순수한 분노를 그려낸 것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그의 혐오는 단순한 그 대상이 형이하하다고 할 수 없다. 그가 혐오하는 것은 서로의 배타성을 용인하고 배양하는 끔찍한 각 개인의 인지적 구조를 혐오하고 경멸한다고 보아야 한다(또한 기능사가 자주 밝혔던 궁극적인 사회론적 해체의 맥락에서도 그렇게 읽힌다).
그러나 기능사는 분명히 개인의 영생욕으로 환원되는 기독교의 구원관을 비판하며 시를 마무리한다.
기능사의 시는 그의 신학에 대한 이해없이는 완전히 무용하며 이해할 수도 없다. 이 글도 그가 사용한 복잡한 다층위의 기법들과 심층적인 관념론을 미처 다 설명하지 못할 정도다.
부디 기능사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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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긴 글을 적어보려고 한다. 내가 그간 혹자, 혹은 독자라 부르던 사람들에 대한 나의 애정과 존중은 너무 깊이 파묻은 탓인지 잠시 옆에 치워두고 싶다. 한국어에 대한 오랜 고민이 있었다. 내가 읽어온 한국어는, 특히나 문학에 있어서 의지의 표출이었다. 그것은 그것 자체로 본질이라기 보다도, 더 큰 맥락을 대표하기 위해 존재했다. 상록수와 수난이대를 읽던 내게 아몬드나 그 엇비슷한 표지들의 요즘 책들, 그러니까 말 그대로의 픽션들은 내게는 너무도 난해한 것들이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외계의 스토리들, 그리고 낯선, 그러니까 엉뚱하리만치 이상한 단어들을 가져와다 쓰는 서평들을 읽다보면 그 소설들은, 또 문학은 현실의 프라모델이라기보단 또봇이라거나 카봇이라거나 하는 대중적인 메카물의 피규어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즐기거나 즐기지 않건간에, 사유라거나 깊이라거나 하는 단어들, 그러니까 해설하자면 적어도 500쪽은 되는 책들에서나 기대하고 찾던 작가들 본연의 누적된 생각들은 뜨고 지는 사조들의 저편으로 이미 사라졌다고밖에는 내게 남아있는 결론이 없다. 예수가 말했듯 비판받기 싫다면 비판하지 말아야하므로 나는 나의 주장을 만듦에 있어 어느정도는 책임감을 느낀다. 한국어는 단지 문학의 필요가 전혀 없는 맥락이다. 한국 문학의 세련된 학풍, 그리고 여러 비평, 발문, 서평등으로 지껄여지는 공명은 한국어와는 완전히 무관하게, 또 괴이하게 스스로 발전하며 작동한다. 한국 문학의 고요하고 정제된, 말하자면 연구된 문장으로서의 문학은 어쩌면 고도의 완곡한 풍자극이 아닐까도 생각한다. 한국어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텍스트는 작가들의 불평불만은 고결하게 풀어낸 보여주기식의 자기고백이나 오덕들의 엔터테인먼트라고밖에 할 수 없는 픽션들이 아니라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다. 우리 백치들은 우리가 마치 이전 사조들보다 위대한 걸 건축해 낸 것 마냥 떠든다. 무슨 소설집이 넷플릭스보다 재밌다느니 토마토가 심장보다 단단하다느니 하는 모든 것, 또, 굳이 꺼낼 필요는 없겠으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싶다는 등의 모든 너무 자기의식적인 나머지 병신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비아냥으로까지 들리는 개소리들말이다. 말해왔던 바지만, 엔터테이너로서의 길을 갈 사람들을 응원한다. 열심히 해라. 사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선 차라리 작가 기획사를 차려서 사업을 하는게 훨씬 낫지 않을까도 싶지만 우리 백치들은 그럴 염치는 없는 것 같다. 물론 사업성이 떨어지는 것도 있고 말이다. 나는 문학의 구성요소로서의 메세지라는 개념을 싫어한다. 직접적으로 제시되는 것은 없지만서도, 은연중에 문학은 근본적으로 엔터테인먼트지만 중심적이며 추상적인 메세지가 있어야 여운이 남는다거나 더 완결적인 작품이 된다거나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쓴다면 쓰는 거다. 쓰는 것에 대해 연역적으로 선행하는 목적같은 건 있을 수 없으며 쓰는 것은, 그리하여 적히는 것 그 자체로 온전한 목적이며 메세지다. 기껏해봐야 로맨스물, 단순성장물 쓸거면서 페미니즘, 기후변화같은 것들을 찍먹하는 걸 나는 순수히
- 기능사
- 2025-11-20
우리 문학이 점점 짧아진다. 오랫동안의 사견이었으나, 단지 사견으로 끝날 주장이 아니다. 실제로도 그렇다. 당장 어느 서점에 가더라도, 대하소설은커녕 엄지손가락보다 두꺼운 소설들도 곧장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하소설은 대가 끊겼다. 2000년대 초에 나온 것 역작들만 옛 독자들이 알아볼 뿐이고, 등단 수십 년을 바라보는 옛 작가들의 추억 이야기가 이제는 정말로 대하소설의 일몰이라고 밖엔 볼 수 없다. 실제로 교보문고에서도 그러한 장편 중에선 (당연히 경장편들은 제하고) 조정래와 김진명, 무라카미 하루키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전부다하는 말도 나온다. 그러나 현대의 트렌드는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라거나 대중의 테이스트가 너무 스낵컬처에만 맞게 퇴화했다거나 하는 분석은 차치하고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대하소설, 더 나아가, (대하소설은 그 자체로는 그냥 플롯 구조가 완만한 거대한 소설이라는 뜻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총체 소설의 필요성을 알아야만 한다. 총체 소설은 사학이다. 역사를 재구함에 있어 기타 사료와 수량화된 자료들만큼이나 그 맥락을 증언하는 것은 문학의 존재다. 토지가 그러했고, 한강의 여러 작품이 그러했으며, 한국 문학의 원초를 거슬러가 본다면 역시나 같은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소설이므로 그것이 실체적인 진실이라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실체적인 진실은 사실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그 때문에 작가는 집필의 의지와 과거의 불확실성 사이에서 사투하고 공부하고 또 갈등해 나가야 한다. 또 그렇게 작품이 발표된다면 그것은 다시 공격받고 다른 매체, 어쩌면 다른 소설로서 반박될 것이다. 그러한 과정이야말로 역사에 기여하는 올바른 방법이다.총체 소설은 그러한 이유로 맥락을 충분히, 그리고 최대한 완전히 전달하기 위해 필요하다. 혹은 필요했다. 그러나 요즘의 사조는 그러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굳이 역사 소설이라 표현할 필요는 없을 듯싶다. 굳이 과거사만을 위한 총체소설일 필요는 없으므로) 소설의 필요성은 다양한 의미에서 무시된다. 짧은 가방끈으로 뭐라 할 말이 있겠냐마는 현대의 도그마는 역시나 개인이다. 더 나아가 사회의 대비로서의 개인이다. 집단의 안티로서의 개인, 수량화된 전체 속에서 억눌리어 살아가는 개인, 무채색의 수많은 ‘개체’들 간에서 억눌리어 살아가는 개인이다. 비단 캐릭터가 여러 명 등장하는 소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이야기는 오로지 개체에서 개인으로 정체화되어야만이 성립한다. 그런 과정에서 개인이 얕아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클리셰를 그대로 쓰는 작가가 어딨겠냐마는 독자들이 원하는 건 이해 가능한, 또 그렇기에 정상적인 형태로 감정적인 주인공이지 까발려진 타자가 아니다. 그러나 사학이기보다 엔터테인먼트로서의 길을 문학이 택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으로 남을 것이냐하는 걸 생각해야 한다. 우리 인간군(군체로서의 개체들, 나는 사회라는 개념을 싫어한다)이 고민해야 할 것을 고민하지 않은 세대로 남아도 되느냐고, 정말 그래도 되느냐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혹자는 사회가 정말 필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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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10
출판문화협회가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의 특별공로상 수상을 취소했다. 많은 이들이 안도하는 분위기다. 펜을 잡고서 나이브하거나 두루뭉실하게 덮고 넘어가기엔 굉장히 민감한 문제다. 문학과 폭력의 관계가 말이다. 벌써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지 1주년이다. 직접 읽어본 적은 없지만 워낙 많이 다루어져 어느 정도 대중적인 소개는 이루어졌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문학은 모든 폭력의 반대편에 서는 것… 그녀의 말은 서정적이면서도 한의 감정을 보여주는 우리 문학의 한 단면을 잘 노정하는 듯하다. 실제로 우리가 사랑하는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그 고민과 사유의 흔적이 없는 사람은 없다(‘청소년 작가’가 진지하게 고민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관련이 없으므로–).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본다면 폭력이야말로 문학의 트리거이고, 그것은 문학의 형식에서도 드러난다. 플롯에 대하여 설명할 때, 갈등을 중심으로 사건들이 배치되고 의미가 부여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데, 그 갈등 또한 폭력이며, 캐릭터 간의 서사의 깊이감을 주는(적어도 준다고 여겨지는) 가장 큰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한 갈등의 플롯은 어느 정도 언어가 자극하고 이끌어내는 인간 본능, 그러니까 말하자면 폭력성에 대한 어필이라 볼 수도 있다. 가령 긴장감이란 요소를 든다면, 서사적 긴장감은 어느 정도 인간이 진화론적으로 폭력성을 발달시키며(창을 들고 은밀히 사슴에게 접근하는 네안데르탈인을 상상해 보라. 클라이막스 직전의 긴장감이 완전히 무관하다고는 못할 것이다) 생기는 부수적인 직관들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직관들을 유용함과는 무관하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폭력이 긍정적인 관점에서 제시된 경우는 드물다. 아니, 정상적인 문학 안에서는 없다고 확언할 수 있다. 문학가들은 외교관이나 기업가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안티테제로서, 그들이 초래한 모든 차악적인 관념들을 비판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문학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윙어의 강철폭풍 속에서가 특히나 그렇다) 그것들은 파시즘으로 규정되고 맥이 끊겼다. 그러나 문학이 폭력을 다룸은, 폭력을 다루지 않는 것보다 더 큰 문제를 가져온다. 창작자의 권리와 책임에 대한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문학은 때론 폭력을 호도하고, 편향시키며 왜곡이나 체리피킹이 당연히 무엇보다 잘 일어나나, 우리는 아주 원론적인 부분만 규정할 뿐 연속적으로 얽혀있는 민감한 문제에 대한 결론적인 해법은 주지 못한다.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예시를 들어보자면, 만약에 박유하가 아니라 어느 다른 사람이, 그러니까, 커티스 르메이의 도쿄 대공습이 현대적인 총력전에서 아주 적절한 방식이라고 칭찬한 어느 냉혈한 군사학자가 받았다고 생각해 본다면, 우리 사회가 아직 깊게 이야기해 본 주제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10만 명이 군사적인 목적으로 이유 없이 살해된 데에 있어 우리는 그 또한 비판해야 하고, 또 수상이 결정된 바가 있다면 또한 취소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다른 곳에 있다. 정확한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작가가 다룬 것이 그것의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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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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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사 본인이 설명해도 이보다 잘 하지는 못할 것 같네요.
기능사는 초기 작품만 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생애와 후반기 작품을 알고 난 뒤 초기 작품을 읽으면 그제야 모든 것이 맞춰지는, 일종의 층위적 구성이 매력적인 작가죠.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이주나 저는 개인적으로 묘비문에 적힌 글귀가 가장 취향이었어요.
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