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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노트 평론- 국가와 사회, 그리고 "왜?"

  • 작성자 泥花
  • 작성일 2009-10-02
  • 조회수 4,163

개인적으로는 만화가 더 낫다고 생각되지만 아무튼 만화든간 영화든간에 데스노트를 본 사람들이라면 그냥 엄친아같은 라이토가 멋져 보이는 사람은 제외하고서, 사회문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는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데스노트가 사회 변혁에 있어 참으로 유용한 도구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데스노트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복잡한 절차를 거칠 것 없이 사람을 바로 죽일 수 있는 도구라는 데 있다. 진시황을 암살하려던 형가의 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연나라는 그 보복으로 멸망당했지만, 만약 연나라의 태자 단이 데스노트를 지니고 있었더라면 그는 굳이 형가를 고용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암살이 실패해 나라를 잃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라이토가 사회의 변혁을 쉽게 가져올 수 있는 이런 유용한 도구를 정의를 위해서만 사용하였건만 왜 그는 경찰에 쫓겼고, 탐정에게 쫓겼고, 국가에 쫓겼던 것일까? 해답은 의외로 간단한 곳에 있다. 라이토가 데스노트를 가졌을 때는 모든 국가와 경찰이 그를 쫓았으나 L에게, 혹은 니아에게 데스노트가 넘어갔을 때는 그들 중 누구도 몰래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과 국가는 그들을 쫓지 않았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이미 해답을 알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 바로 "국가권력의 통제 범위 안이냐, 바깥이냐?"가 라이토와 L, 니아의 차이점이다. 국가에서 데스노트를 그렇게 찾아 봉인하려는 이유는 데스노트가 단순히 이야기 표면에 드러난대로 살인을 쉽게 하는 도구여서가 아니다. 정의를 위해서도 아니다. 궁극적인 이유는 국가의 통제 아래 있지 않으면서, 그 역할은 국가 공권력을 대체할 수도 있는 수단이 바로 데스노트이기 때문이다.

데스노트는 범죄자 처단이라는 국가 공권력의 역할을 혼자서 대신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에 일면으로는 사법적인 측면에서만의 대체수단이지만, 데스노트의 마성에 휩싸인 라이토가 '신'이 되길 원했던 것은 사법을 넘어 그가 행정과 입법이라는 다른 영역까지도 넘보려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실제로 라이토가 데스노트를 통해 행정과 입법까지 장악하려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에 행정과 입법도 한 개인이 대신할 수 있는 수단이 존재한다면, 그 때 국가의 존재의미는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국가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한 개인이 국가의 권력을 견제없이 행사할 수 있는 수단(데스노트)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한 것이며, 데스노트를 찾기 위해서 세계의 모든 국가가 협력했던 것은 아주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국가 공권력을 위협하는 존재에 대해서 국가가 이를 억압하는 것이 정당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현대까지도 국가가 개인을 억압하는 행위는 수도 없이 있었다. 때때로 그것은 엄청난 살상을 불러일으켰고, 역사의 과오를 방지하기 위한 시민교육의 영향 탓인지 사람들은 그 사례들만을 크게 인식하기 때문에 국가의, 사회의 체계가 지지되는 행위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것이 깨어있는 자세라고 생각하는 기류가 존재한다. 하지만 평소에 공기나 물의 중요성을 우리가 크게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런 의문에서 벗어나 실제로 국가와 사회체계를 무너뜨리고 데스노트처럼 한 개인에 의한 자유로운 권력행사가 가능할 때의 문제점에 대해선 우리가 실제로 체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단순히 사회 체계나 국가 권력행사의 억압성에 대해서만 문제삼으려 들고 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지만, 사회 체계나 국가 체계는 1~2년에 걸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에서의 시스템이라는 것은 시민들에게 퍼지기 위해서 적어도 몇 년의 세월이 걸리고, 그것을 완벽하게 변화시키려면 다시 몇 년 이상의 세월이 소요된다. 경찰조직, 군대조직, 교육체계... 몇 년이 걸려서 최적화 된, 혹은 최적화 되어가는 체계를 자주 바꾸는 것에 대한 부작용은 다른 예를 들 것 없이 입시제도 하나만 봐도 충분하다.

군조직에서까지 민주화를 바라기 때문에 계급에 관계없이 명령에 계속 "왜?"가 붙어다니면 인권의 측면에서는 좋을지 모르나, 과연 모든 일에 대해 일일이 따지는 군 조직이 실제로 전쟁이 발생할 때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교육제도에 대해서도 왜 학생들에게 원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고 국영수같은 것만 가르치냐고 하나, 학생들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기초지식을 가르칠만한 과목과 수단 방법이 몇 십년 이상 고안되어 정착된 것이 현재 교육체계임을 안다면, 그런 체계에 대한 한 순간의 "왜?"는 그 자가 다른 체계를 고안할 수 있는 천재가 아닌 이상 그냥 단순히 한 순간의 "왜?"에만 머무르게 될 것임이 확실하다. 그리고 그 한 순간의 "왜?"는 아무 해답을 내놓지 못한 채, 사람들의 불만을 증식시킬 뿐이다.

물론 "왜?"라는 의문까지 가지지 말자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너무나 민주화 되어서 사회체계의 펀더멘탈적 역할을 마치 공기나 물처럼 가벼이 여기고 있는 사회에서 "왜?"는 "왜?"라는 의문에서 그치거나, 혹은 체계변화의 아이디어에 참고하는 정도가 가장 좋을 것이다.

"왜?"라는 의문 자체를 마치 지식인의 상징인 양 내세워서, 의문을 갖지 않고 사회체계 안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타인들을 가르치려고드는 행위와 네오가 매트릭스를 부수려 하는 행위를 동일시하려는 것은 사람들의 오만일 뿐이 아닌가?

泥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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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7-08
대중 앞에 놓인 카타르시스성 폭력-드라마 '참교육'을 중심으로

대부분의 한국 고전 산문들은 인과응보와 권선징악을 띄고 있다. 당장 ‘홍길동전’과 ‘장화홍련전’의 결말을 두고 비교해봐도 그렇다. 두 작품 모두 악인은 벌을 받고 선인은 복을 받는 결말이다. 이러한 구성 방식과 결말은 한국 근대 이전의 소설들 속에서 주를 이뤘다. 그러나 권선징악과 인과응보는 한국 고전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도 상업 소설인 웹소설, 상업 드라마, 상업 영화 등 대중적인 이야기 플롯에서 자주 등장한다. 이는 일종의 모티프다. 이런 모티프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유지되기도 한다. 그중 인과응보, 권선징악이라는 모티프는 전 세대에 걸쳐 과거에서 현재까지 매체와 서술 방식을 변주하며 계속 나타난다. 특히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상업 드라마라는 이름으로 권선징악과 관련된 모티프가 자주 나타난다. 상업 드라마에서 권선징악, 인과응보를 보여주는 드라마 중 일부는 복수라는 장르를 내세우기도 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김순옥의 ‘아내의 유혹’, ‘펜트하우스’, sbs 시리즈 드라마 ‘모범택시’, ‘열혈사제’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복수극도 개인에 이야기만을 하는 드라마와 개인을 넘어 사회까지 유효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드라마로 나눌 수 있다. 이로 볼 때 김순옥의 ‘아내의 유혹’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복수로 그려진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모범택시’ 시리즈, ‘열혈사제’ 시리즈는 개인과 개인을 넘어 현실 사회 문제도 건드리는 복수극이다. 따라서 ‘열혈사제’와 ‘모범택시’ 시리즈는 각종 사회 문제를 시리즈별로 이야기하여 그려낸다. 반면, ‘아내의 유혹’은 구은재와 신애리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복수를 그려내고 있다. 이런 차이점은 각각 드라마의 결말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김순옥의 ‘아내의 유혹’은 악역인 신애리와 정교빈이 죽음으로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며 극이 마무리된다. 그러나 주인공인 구은재는 그들이 받은 벌을 보고도 행복해하지는 않는다. 구은재는 신애리에게 피해를 받은 피해자기도 하지만, 그녀에게 신애리는 친구이자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복수의 성공이 결코 행복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역으로 한때 악역이었던 애리를 용서하는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결말을 맺는다. 반면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 실현으로 복수를 진행하는 ‘모범택시’ 시리즈와 같은 드라마는 무지개 운수라는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집단이 사회 문제를 대표하는 사건을 해결하는 식으로 에피소드별 결말을 맺는다. 그 과정은 복수극과 복수 대행 서비스 안에 맞춰서 폭력적이고, 역지사지의 방식으로 진행되고 해결된다. 그 과정에서 시청자는 악인을 폭력으로 제압하고 벌하는 모습을 보며 고양된 감정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런 카타르시스 안에는 사회정의라는 이름에 감춰진 폭력이 존재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단어가 바로 ‘참교육’이다. 참교육은 본래, 참된 교육이라는 뜻으로 선생이나 어른이 진정으로 학생들을 위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가르치고 지도하는 일을 뜻한다. 현재까지도 교육 현장에서 교사들이 지향해야 하는 교육이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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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키즘.. 무정부주의였나..

    • 2009-10-12 21: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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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글에 반대하는 주장을 생각해보면 극좌나 아나키즘 밖에 없는데, 애초에 그들의 사고방식과 관념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소모적인 논쟁만 불러 일으킬 것이라 생각했기에 언급의 필요성을 못 느꼈습니다. 뭐 그래도 분명 지적하신 부분이 수긍은 가기 때문에 아무 말 하지 않겠습니다.

    • 2009-10-12 00:08:54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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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글을 주장할 때는 주장의 타당성을 판단할 때, 내적 논리체계의 엄정성과, 외적 논리의 적합성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내적 논리의 엄정성이 외적 논리의 적합성의 기초가 되므로 매우 신중해야 하겠지만, 글의 내적 논리가 탄탄하다 해도 관점을 다르게 보는 사람들에게 받을 수 있는 반론에 대한 충분한 대응을 하기 어렵다면 그 글에 대하여 온전히 수긍하고 넘어가기는 힘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의 경우에 부족함이 있다하면 정말로 수긍하기 어렵겠지요. 그래서 글의 내적논리 체계를 세워가는 방법에 대해 보완이 필요함을 밝혔습니다.

    • 2009-10-11 22:42:42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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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근데 사실 이 글이 약간 용두사미형이긴 하지만; 저는 이 글이 이번에 주장원에 뽑히지 못했다는 점이 잘 이해가 가질 않는군요. 뭐랄까 제 사견이지만 글 자체로만 본다면 ''단기에 대한 다소 불편한 진실''보다는 이 글이 더 낫다고 생각하거든요.

    • 2009-10-10 23:4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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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꿀 건 바꾸더라도 지켜져야할 기본적인 가치는 존재하는 것이고 또 그러한 것들이 존중되어야함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진보적 낙관론에 사로잡혀 그 동안 사회에서 누적되어 중요한 위치로 자리잡은 근본적인 체계마저 왜라는 의문을 갖는 것이 진짜 지식인들의 올바른 태도인가 저는 의구스러웠고, 중학생 때 데스노트를 읽자마자 문집만들기 수행평가로 이 글을 썼습니다.

    • 2009-10-10 23:30:37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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