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리는 머리카락과 인권
- 작성자 밥공기
- 작성일 2010-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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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수 220
- 조회수 76,010
많은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오가는 복도에 수많은 머리카락이 잔뜩 떨어져 있다.
선생님은 손에 가위와 바리깡을 들고 있다. 줄지어 서 있는 학생들은 금방이라도 울 거 같은 표정 짓고, 마침내 짧아진 머리를 감싸고는 퉁퉁 부어버린 허벅지 때문에 교복이 허벅지에 스칠라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 교실에서는 뜨거워진 허벅지를 식히기 위해 책상다리에 허벅지를 대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학교 또 다른 풍경이라 하겠다.
두발규제가 일제 강점기의 잔재라는 건 더 떠들면 입이 아플 정도로 다 아는 사실이다.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행해졌던 단발령을 학생에게 강요하는가?
일제 강점기를 우리 역사의 크나큰 치욕으로 남기면서 말이다.
당시 조선에게 강제로 단발령을 내려 칼을 들고 조선인의 상투를 자르는 일본 순사의 모습과 억울하게도 잘려나간 머리카락을 눈 앞에 두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조선인의 모습은 마치 지금의 그것과 흡사하지 않은가?
대체 왜 어른들은 학생의 머리에 그토록 집착하는가? 어디 변명을 한번 들어보자.
"학생들이 머리가 길면 학업에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들의 가장 흔한 변명이다.
매사에 논리적이고 냉철해야 하는 선생님들이 이런 발언을 하는 건 좀 우스운 일이라 하겠다.
머리가 긴 학생들이 공부를 못하고 머리가 짧은 학생들이 공부를 잘한다는 통계가 어디 있던가.
공부 잘하는 엘리트들이 많다는 '외고'는 상당수가 두발자유를 표방하고 있다.
또한, 학업에 집중할 수 없다고 하여 학생들의 머리를 자르는게 정당한가?
일부 선생님과 어른들의 생각은 인권보다 학업이 우선인가?
다른 무엇보다 우선시 되야 할 것이 인권이라 배웠다. 선생님들에게 말이다.
"학생은 학생의 본분에 충실해야 합니다,"
학생의 본분은 머리를 짧게 자르는 일인가?
학생의 본분은 공부인가? 라는 대답에 고개를 끄덕일수도 있다.
하지만, 공부와 머리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머리의 길이와 가방끈의 길이는 반비례 하지도, 비례하지도 않는다.
단지 머리의 길이는 머리의 길이일 뿐.
"학생들의 머리가 길면 학교의 위상이.."
많은 보수적인 어른들은 길거리에 머리가 긴 학생들을 보고는 혀를 끌끌 찬다.
예컨대 "학생이 무슨 머리가 저렇게 길어가지고 무슨 학생이람..쯧쯧" 따위 말이다.
학교는 어른보다 학생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학교는 학생들이 올바른 인성교육을 위해 다니는 곳이지 어른들에게 훈훈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신체 일부분에 불과한 머리카락 조차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다면 학생은 과연 국민이란 말인가?
헌법은 나라를 위해 존재하고, 나라는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교칙은 학교를 위해 존재하고, 학교는 학생들을 위해 존재한다.
학생들이 최우선시 되어야 할 학교에서 왜 학생들이 당연하지만, 간절히 원하는 일에 그토록 기를 쓰며 반대하는가.
"천부인권"이라는 말이 있던가.
인간이라면, 다른 조건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인간이라면 태어날 때부터 누구나 가지고 있는 권리이다.
살인자와 같은 범죄자의 천부인권도 지켜주는 세상이다.
학생들에게 천부인권은 어디로 갔는가? "학생"이라는 이름이 살인자라는 이름보다 큰 죄악을 지닌 이름인가? 대한민국에서 "학생"은 살인자보다 못한 존재인가?
흔히들 학생을 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기둥이라고 한다.
나라가 미래의 기둥에게 범죄자보다 못한 만큼의 인권을 주는데 어떻게 기둥이 버틸 수 있을까.
학생들이 빨간 머리에 폭탄 맞은 머리를 한다고 해서 그게 타인에게 어떠한 피해를 주는가?
학생들의 머리가 타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가? 그 이유 때문에 학생들의 머리를 규제하는가?
10대가 하면 죄요, 20대가 하면 무죄인가?
일부, 아니 대부분의 어른들과 선생님들이 가진 고정관념이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그들을 무참히 짓밟는다.
"폭력은 무엇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유난히 선생님들에겐 적용되지 않는 것 같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자신들의 교편에 대해 존중해주길 바란다면, 선생님들 역시 학생이기전의 하나의 개인에게 최소한의 인권 정도는 보장해주어야 수지타산이 맞지 않겠는가?
상호존중은 민주주의 사회에 큰 덕목이 아니겠는가. 왜 그토록 좋은 일을 선생님들이 기를 쓰고 막는지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나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타인의 권리를 먼저 존중해주어라. 라고 분필을 들고 칠판에 적었던 선생님이 생각난다. 수업이 끝난 후 분필이 아닌 바리깡을 들고 친구들의 머리를 잘라버리던 선생님 말이다.
왜 학생들은, 아니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범죄자조차 인정받는 인권조차 존중받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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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스텔지아
- 2026-09-16
인간은 자신의 삶을 어디까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가. 삶의 마지막 순간을 스스로 선택하는 문제인 안락사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과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적 책임이 맞부딪히는 지점에 놓여 있다. 안락사란 회복할 수 없는 질병이나 극심한 고통을 겪는 환자의 의사에 따라 인위적으로 생명을 종결하는 것을 말하며, 그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기결정권, 생명 보호의 문제를 함께 생각하게 한다.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씨 인사이드(The Sea Inside)』는 실제 인물인 라몬 삼페드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다이빙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한 남자가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고자 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아메나바르는 이 영화의 각본과 연출은 물론 편집과 음악까지 직접 맡았으며, 한 사람의 시선이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는 점에서 라몬이라는 인물의 내면을 다루는 작품의 성격과 잘 맞아떨어진다. 라몬은 사고 이후 오랜 시간 가족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지만,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영화는 이러한 라몬의 삶을 따라가며 인간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선택권이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 질문한다. 라몬의 선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말하는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라몬에게 죽음은 단순히 삶을 포기하고 싶은 욕망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에 가깝다. 영화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살 수 있는 자유’와 ‘죽을 수 있는 자유’라는 개념 역시 이러한 라몬의 생각을 대변한다. 이 개념은 대사로만 설명되지 않고 영화 속 단 하나의 상상 장면을 통해 시각적으로도 압축된다. 푸치니의 아리아 ‘네순 도르마’가 흐르는 가운데 라몬은 침대에서 일어나 복도를 달려 창밖으로 몸을 던지고, 카메라는 그의 시점이 되어 갈리시아의 들판을 가로질러 바다까지 날아간 뒤 훌리아와 입을 맞춘다. 영화 전체에서 라몬의 몸이 실제로 움직이는 것처럼 그려지는 장면은 이 순간이 유일하다. 실제로 아메나바르 감독은 이 장면을 라몬이 완전히 자유롭다고 느끼는 순간으로 설명했으며,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는 움직일 수 없는 그의 몸과 상상 속에서 자유롭게 날아가는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것이 오직 상상 속에서만 허락된다는 사실은 라몬이 되찾고 싶어 하는 자유가 걷고 뛰는 신체적 자유 자체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감각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선택을 인간의 자유로 인정한다면, 자신의 삶을 더 이상 이어가지 않겠다는 결정 역시 개인의 의사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라몬은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이후 자신의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되며 일상적인 행동은 물론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는 것조차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오랜 시간 이러한 삶을 살아온 라몬에게 고통은 단순한 신체적 불편함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행동으로 옮길 수 없고, 삶의 방향을 자신의 의지대로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 자체가 고통
- 시유레
- 2026-09-07
나는 이 작품을 영화로 2번, 책으로 1번 봤다. 영화로 봤을 때의 감동이 더 컸기 때문에 영화로 비평을 쓰려한다. 마지막을 어기의 이야기로 장식하기 위해 누나인 비아의 이야기로 먼저 시작하겠다. 비아는 가족에 대한 서운함이 쌓여갔다. 그녀도 물론 동생을 아끼고 좋아했지만 온 가족의 관심이 안면기형을 갖고 있는 동생한테 쏠리는 데 불만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티 내지 않고 꿋꿋하게 참아냈다. 비아가 뭐라고 하면 가족들이 더 힘들어할 걸 알기에 짐이 되지 않으려 늘 노력했다. 비아도 아직 사랑받고 싶은 어린아이일 뿐인데 투정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그녀가 안타까웠다. 성숙하지만 아직 어린아이인데. 그렇지만 비아의 행동이 옳은 행동일까? 맞다, 아니다로 판단할 수 없는 문제지만 비아 혼자 그 모든 상처를 짊어지는 것은 가족도 원치 않았을 것이다. 짐이 된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면 그녀의 상처가 조금은 치유가 됐을지도 모르는데. 큰 문제는 비아의 친구 미란다와의 일이었다. 미란다는 비아와 어렸을 때부터 친구 사이였는데 그러다 보니 비아의 가족과도 잘 알고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미란다는 여름 캠프를 갔다 오더니 비아를 피하게 된다. 비아는 당황했고 나 역시 그녀의 태도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친했던 친구가 갑자기 그러면 누구든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이유가 나온다. 미란다는 부모님의 이혼 등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에 외로움을 느끼다, 캠프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비아의 따뜻한 가족(어기 포함) 이야기를 마치 자기 가족의 이야기인 것처럼 거짓말을 했다. 자신에게 동생을 위하는 희생적인 누나라는 프레임을 덧씌워 사람들의 동정을 얻으며 결핍을 채우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비아를 마주하기 부끄럽고 미안해 의도적으로 피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미란다의 행동이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미란다는 비아의 화목한 가족이 부러웠던 것이다. 자신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비아에게 약간의 질투를 느꼈다고 생각해봐도 좋겠다. 물론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도, 잘한 선택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비아에게 말하고 사과했으면 됐을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란다에게는 그 방식이 최선이었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 보면 어떨까? 미란다도 그저 가족의 사랑이 고팠던 미숙한 아이였으니까. 둘의 화해는 학교 연극에서 이루어진다. 미란다가 주인공을 맡고 그 대역을 비아가 맡았다. 미란다가 객석에 온 비아의 가족을 본 후, 비아에게 주인공 자리를 양보하며 무대에 서게 해 줬다. 비아와 그녀의 가족에 대한 미란다의 진심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미란다는 여전히 그들과 잘 지내기를 바란 것 같다. 자신을 가족처럼 대해주던 그들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과거, 친구의 가족을 소재로 삼아 주인공이 되고자 했던 미란다가 현재, 주인공이 될 기회를 포기하고, 자신이 한 번도 가족의 중심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비아에게 자리를 넘기며 그녀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이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 캔디
- 2026-08-30
서론1) 탐구 배경나는 왜 소설을 쓰는가?이 질문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질문에 한 번에 답할 수 없었다. 오래전부터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 묻는다면 머리가 아팠다. 사실 처음에는 그저 재밌어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라는 것 자체를 좋아했다. 그래서 역사를 좋아했고, 역사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알베르 카뮈의 소설을 읽었다. 카뮈의 소설은 정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했다. 알베르 카뮈처럼 나의 생각을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다면, 나의 철학을 구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그 욕망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남자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주위에 소설을 쓰는, 아니 글을 쓰는 친구를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나는 소설을 쓸 수 없었다. 노트북에 초고는 쌓여만 갔지만 그 누구도 읽지 않는 글은 무의미했다. 학교 내에서는 백일장을 포함하여 이러한 문예행사가 아예 진행되지 않았다. 나는 고립된 무인도에 갇혔다. 그때 쯤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소설은 나의 생각만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누군가와 문학에 대한 교류를 하지 못하여 외로움을 겪던 차에 나는 온라인 모임을 하나 만들었다. 인문학과 철학에 대한 토론을 할 수 있는 모임이었다. 약 100명의 사람들이 모였고, 나는 소설을 쓰기 보다는 작품을 많이 읽기 시작했다. 토론을 하던 중 어떤 사용자가 민음사 책의 표지 하나를 올렸다. 이름은 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파란색 표지에 그려진 한 외로운 노인과 안개. 나는 그 사진에 매료되었다. 그것이 김승옥과의 첫 만남이었다. 민음사는 원래 외국 문학 전집만 발행한다고 생각하고, 한국 문학도 나오는지는 몰랐기에 나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바로 구매했다. 그리고 첫 문장은 나의 마음을 점령하기에 충분했다.감수성의 혁명이라 불리는 그의 문체는 문체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던 나에게 모범답안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문체보다도 김승옥이라는 작가가 형성한 하나의 거대한 철학적 세계였다. 이라는 작품에서 드러난 '자기세계'의 개념 이후 현대인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그것에 따라 멸망해가거나 몰락하는 인물은 분명 무언가 그의 철학을 반영하는 것 같았다. 그 거대한 세계는 무엇일까. 마치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이 아닌가. 김승옥 작가의 소설이 더욱 매력적인 이유는 답을 절대 정해주는 소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철학만 하더라도 주로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질문만 던지지는 않는다. 실존주의도 인간이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 삶을 강조하고, 칸트도 인간 존엄성에 따른 의무를 부여한다. 그러나 김승옥은 항상 소설을 애매하게 끝낸다. 의 주인공 ‘나‘는 윤희 누나가 범죄에 연루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놓고서는 그저 마을 주위를 서성이며 여러 생각을 하며 끝이 난다. 소설 에서는 주인공의 욕망을 결국 실현하지 못한 채로 다시 고향에서 서울로 돌아간다. 김승옥은 이런 애매한 상황을 통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 노스텔지아
- 2026-08-23
유사한 소재와 다른 서술 조세희의 문학세계가 투쟁과 서늘함의 정서를 가지고 있다면, 윤흥길의 문학 세계는 다정함과 화해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결말부는 “꼭 죽여.”로 끝난다면 윤흥길의 『장마』는 “모든 걸 용서”하는 것으로 끝나니까. 또한 난장이의 딸은 철거민 입주권을 구매한 사람을 증오하는데,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철거민 입주 권리를 산 사람이다. 연작에서는 철거민 입주권을 구매한 권력자를 절대적 악인으로 상정하고 선과 악의 대립적 구도를 구성함으로써 권력의 폭압에 대한 정서적 충격을 불러일으킨다. 반면 윤흥길은 철거민의 광주대단지 입주권을 구매한 엘리트층의 권씨라는 인물이 경제적으로 몰락한 상황을 묘사한다. 권씨는 대학을 나왔다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과거의 영광을 기리면서 정장과 구두를 신고 공사장에 출근한다. 권씨가 자신을 도시빈민과 구별짓는 태도나 철거민의 입주 권리를 구매한 점에서는 전형적인 경제적 약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매일 구두를 닦는 그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인간은 모순적인 존재이며, 조세희의 작품들이 드러낸 사회적 모순은 결국 미시적 관점에서 보면 권씨처럼 연민하게 되는 개인들의 집합일 수 있다.조세희뫼비우스의 띠차차 알게 되겠지만 인간의 지식은 터무니없이 간사한 역할을 맡을 때가 많다. 제군은 이제 대학에 가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제군은 결코 제군의 지식이 제군이 입을 이익에 맞추어 쓰여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_30p.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살기가 너무 힘들다.”아버지가 말했었다.“그래서 달에 가 천문대 일을 보기로 했다.” (…)“아버지, 도대체 그런 일이 가능할 것 같아요?”“지섭이 미국 휴스턴에 있는 존슨 우주 센터에 편지를 써 보냈다. 그곳 관리인 로스 씨가 답장을 보내올 거야. 후년에 우주 계획 전문가들과 함께 달에 가게 될 거다.” _72p.(…)“로스 씨의 편지를 받기 전에 보여줄 것이 있다. 지섭에게 말해서 쇠공을 쏘아올려 보여주마.” 집이 무너진다는 것. 지금은 죽은 여자가 ‘나’를 좋아했다는 사실이 새겨진 채 굳은 시멘트, 오랜 시간이 걸려 손수 지은 집, 집이 부서지는 순간까지 숭늉을 먹는 식구들. 급속한 근대화로 인한 마을 공동체의 붕괴, 고유한 기억이 담긴 공간이 소멸하고, 빈터가 되고, 수몰되는 순간은 한국 문학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다. 현진건의 『고향』, 문순태의 『 징 소리』등 20세기 문학은 전통 사회가 거스를 수 없는 힘에 의해 해체되어야 했던, 서구화와 근대화를 국가적 차원에서 총력을 다해 추진하던 시대적 배경을 담고 있다. 그리고 21세기에도 여전히, 김애란의 『 침묵의 미래』는 집과 고향과 거기서 쓰이던 언어의 붕괴가 한국 사회를 넘어서 세계의 섬과 숲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로 시선을 확장한다. 그의 작품 세계는 고향과 언어를 ‘중앙’에게 빼앗기고 중앙이 만든 집에 살며 중앙의 언어를 쓰게 되는 것은 비단 소수 민족 사회뿐 아니라 도시적 삶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포착한다.남아
- Marllin Zero
- 2026-08-2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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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이 200개라니
너무 공감되네요...ㅠㅠ
이야댓글수봐라
댓글이 엄청나군요. 문제점을 제기하는 데에 공감하는 이들이 이토록 많다는 것은 생각하며 살아가는 친구들이 많다는 뜻도 되겠지만, 우리 학교현실이 너무나도 팍팍하다는 뜻도 되겠지요. 여러분의 비판과 한탄과 아픔에 공감합니다. 하지만, 비평글방에서는 ''문제제기''에서 그치는 글은 아직 반쪽의 날개밖에 달지 않은 아기독수리가 알에서 깨어나 바로 하늘로 날아오르겠다고 퍼득이는 모습과 같습니다. 댓글다는 친구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대책이나 제안을 3가지 정도 정리해 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앞으로 어떤 자리에서든 건의하지요.
모든 인간의 눈을 뽑아내야지 비로소 해결될 문제인 듯. 서대문 교육청앞에서 두발규제/교복 관련된 시위만 2년 넘게 했습니다. 글쎄요, 정권이 바뀌더니 더욱 씨알도 안 먹히는 신세네요. 겉모습이 그 인간의 모든 걸 내비친다고 생각하는 낡아빠진 어르신들때문에 대부분의 십대들은 6년이란 긴 세월을 억압받습니다. 지금이 언젯적 시대라고 아직도 애들 머리길이 옷길이 잡고 늘어지는지 참 선생들 보면 한심합니다. 학주는 애들한테 두려운 존재로 다가서는게 참 즐거운 모양인가보죠. 한국 중고등학교보면 우스워 죽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