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비처럼 - 김애란론
- 작성자 韓雪
- 작성일 2013-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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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갓집에서는 곡소리가 끊겨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렇다고 사람이 하루 종일 울 수는 없는 일. 상가에서는 전문적으로 우는 여자를 불러 대신 울게 했다. 곡비哭婢. 남을 대신해서 울어주는 사람.
사시사철 엉겅퀴처럼 푸르죽죽하던 옥례 엄마는
곡哭을 팔고 다니던 곡비哭婢였다.
이 세상 가장 슬픈 사람들의 울음
천지가 진동하게 대신 울어주고
그네 울음에 꺼져 버린 땅 밑으로
떨어지는 무수한 별똥 주워 먹으며
까무라칠 듯 울어 대는 곡소리에
이승에는 눈 못 감고 떠도는 죽음 하나도 없었다.
저승으로 갈 사람 편히 떠나고
남은 이들만 잠시 서성거릴 뿐이었다.
가장 아프고 가장 요염하게 울음 우는
옥례 엄마 머리 위에
하늘은 구멍마다 별똥 매달아 놓았다.
그네 울음은 언제 그칠 것인가.
엉겅퀴 같은 옥례야, 우리 시인의 딸아
너도 어서 전문적으로 우는 법 깨쳐야 하리
이 세상 사람들의 울음
까무러치게 대신 우는 법
알아야 하리.
-「곡비哭婢」, 문정희
옥례 엄마는 곡비였다. “이 세상 가장 슬픈 사람들의 울음”을 “천지가 진동하게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곡소리는 “이승에는 눈 못 감고 떠도는 죽음 하나도 없었”을 정도였다. 그녀가 없었다면 “저승으로 갈 사람 편히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옥례 엄마의 모습에다가 문정희는 조용히 시인의 모습을 포갠다. 시인이란 남을 대신해서 울어주는 사람이다. 곡비처럼, “이 세상 사람들의 울음”을 “전문적으로” “까무러치게 대신” 우는 사람인 것이다. 타자의 슬픔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가장 아프고 가장 요염하게” 우는 존재. 문정희는 시인과 곡비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쁘다, 나는.”
-『두근두근 내 인생』
문정희가 「곡비哭婢」라는 시를 통해서 곡비와 시인의 운명이 다르지 않음을 보였다면, 김애란은 이 문장을 통해 곡비와 자신의 운명이 다르지 않음을 드러낸다.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슬퍼할 수 있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라면서, 그녀는 오히려 그녀에게 주어진 곡비의 운명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모양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녀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타자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녹여내는 곡비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의 작품 곳곳에 녹아들어있는 언어 습득 모티프는 그녀가 타자의 슬픔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그녀가 “아주 작았던 시절”에 “몸은 말[言]을 몰라서 어제도 내일도 갖고 있지 않았다”고 고백한다.(「달려라 아비」) 이 말은 그녀가 “오래전 사라진 말[言]들을 알”게 될 때 어제도 내일도 알게 된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사랑의 인사」) 즉, 그녀는 언어를 배우면서 어제와 내일이라는 시대의 슬픔에 공감하게 된 것이다.
바람이 불면, 내 속 낱말카드가 조그맣게 회오리친다. 해풍에 오래 마른 생선처럼, 제 몸의 부피를 줄여가며 바깥의 둘레를 넓힌 말들이다. […] 어릴 때 온종일 말을 줍고 다녔다. 엄마 이건 뭐야? 저건 뭐야? 종알대며 주위를 어지럽혔다. […] 이제 나도 살아가는데 필요한 말은 거의 다 안다. 중요한 건 그 말이 부피를 줄여가며 만든 바깥의 넓이를 가늠하는 일일 것이다. 바람이라 칭할 때, 네 개의 방위가 아닌 천 개의 풍향을 상상하는 것. 배신이라 말할 때, 지는 해를 따라 길어지는 십자가의 그림자를 쫓아가보는 것. 당신이라 부를 때, 눈 덮인 크레바스처럼 깊이를 은닉한 평편함을 헤아리는 것.
-『두근두근 내 인생』
『두근두근 내 인생』의 도입부는 김애란이 언어를 배우면서 타자의 슬픔에 공감하는 장면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그녀에게 있어 낱말은 “제 몸의 부피를 줄여가며 바깥의 둘레를 넓힌 말들이다.” 그녀의 언어는 “제 몸의 부피”를 줄여가면서 타자의 언어인 “바깥의 둘레”를 향한 것이다. 즉, 그녀의 언어는 ‘나’라는 내부에 종속되기를 포기하고 끊임없이 타자라는 외부를 향한 말들이다. 그녀가 “온종일 말을 줍고” 다니는 과정은 ‘나’라는 내부에 매몰되지 않고 타자라는 외부를 끊임없이 더듬었던 과정이라 볼 수 있다.
끊임없이 바깥의 둘레를 향한 그녀는 이제 바람이라는 단어에서 “천 개의 풍향을 상상”하고 배신이라는 단어에서 “십자가의 그림자를 쫓아”가며, 당신이라는 단어에서 “깊이를 은닉한 평편함을 헤아”린다. 그녀는 언어를 습득하면서 단어에 담긴 깊은 속내를 터득한 것이다. “이제 나도 살아가는데 필요한 말은 거의 다 안다.”는 그녀의 고백은 그녀가 낱말의 깊은 속내까지 거의 이해했다는 의미이다. 이는 그녀가 자기 자신이라는 내부의 “부피를 줄여가”면서까지 타자라는 “바깥의 넓이를 가늠하”겠다는 의미이며, 타자의 깊은 속내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김애란은 언어를 배움과 동시에 언어에서 배어나오는 타자의 향을 이해한 것이다. “오래전 사라진 말[言]들을 알”게 되면서 어제와 내일이 지닌 현실의 슬픔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녀는 언어를 배우면서 언어 곳곳에 묻어있는 타자의 슬픔을 공감하는 작가다. 그렇기에 그녀의 소설을 가로지르는 곡비성은 언어와 연관시켜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
아버지는 어머니를 위해 한번도 뛴 적이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도, 보고 싶다고 했을 때도, 나를 낳았을 때도 뛰어오지 않은 사람이었다. (…)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미국에서 결혼을 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조금 놀랐다. 아버지가 애초에 가정을 원하지 않은 남자가 아니었다면, 어머니를 버린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몇 년 후 아버지는 이혼을 했다. 구체적인 이혼사유는 씌어 있지 않았지만 아마도 아버지의 무능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부인은 위자료를 요구했다. 한푼도 없던 아버지는 주말마다 부인의 집에서 잔디를 깎겠다고 말했다.
-「달려라, 아비」
‘나’의 아버지는 위자료마저 내지 못해서 새남편이 있는 부인의 집에서 잔디를 깎을 정도로 무능한 사람이다. ‘나’의 어머니는 “박봉, 여자 기사에 대한 불신, 취객의 희롱”으로 힘들어하는 택시 기사이다. 이러한 부모의 모습은 도시 변두리에 속한 누추한 삶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아버지는 “어머니의 부풀어오르는 배를 보고 얼굴이 점점 하얘지다가, 아버지가 되기 전날 집을 나가 그후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부재라는 가족사적 결핍과 주변부적인 부모의 삶은 겉보기에는 비극적이다. 그 어떤 희망도 소설에는 남아있지 않을 것만 같다. 그럼에도 「달려라, 아비」는 명랑함으로 가득 차 있다. 가족사적 비극을 명랑함으로 극복해내는 것은 바로 어린 서술자의 언어다. 어린 서술자는 비극적 상황을 위트 넘치게 묘사해낸다. 서술자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그러자 어머니도 아버지가 가여운 생각이 들었고, 어쩌면 그 날만은 ‘평생 이 남자의 하중을 견디며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몰랐다.” 같은 표현으로 나타낸다. 또한 아버지가 죽었다는 비극적 소식을 전해주는 편지에 대해서도 “나는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자세하게 적어보낸 아버지의 자식이 도대체 어떤 자식인지 궁금했다. 분명, 아버지를 닮아 생각이 없는 게 분명했다.” 같은 문장으로 표현해낸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내가 상상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하나씩 떠올려봤다. (…) 그러다 나는 문득, 아버지가 그동안 언제나 눈부신 땡볕 아래서 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랫동안 나는, 아버지에게 야광 반바지도 입혀드리고, 밑창이 말랑말랑한 운동화도 신겨드리고, 바람이 잘 통하는 셔츠도 입혀드리고, 달리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상상해왔다. 그런데 그중 썬글라스를 씌워드릴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는 게 이상하게 여겨졌다. 아버지가 비록 세상에서 가장 시시하고 초라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 늘 눈이 아프고 부셨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밤 아버지의 얼굴에 썬글라스를 씌워드리기로 결심했다.
-「달려라, 아비」
어린 서술자의 역할은 명랑한 언어에서 끝나지 않는다. 어린 서술자는 어린이 고유의 투명한 감성과 청아한 상상력을 통해 쓸쓸한 공간을 반짝이는 공간으로 전이시킨다. 「달려라, 아비」의 마지막 부분에서 서술자는 “언제나 눈부신 땡볕 아래서 뛰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에다가 자신의 상상력을 통해 “아버지의 얼굴에 썬글라스를 씌워드리”는 데 성공한다. 무능했던 아버지의 쓸쓸했을 모습을 자신만의 감성을 통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서 그녀의 곡비성이 어떻게 빛을 발하는지를 정리해보자. 그녀의 곡비성이 일차적으로 포착하는 것은 바로 슬픈 현실의 모습이다. 소설집 『달려라, 아비』에서 그녀는 대개 부모의 주변부적 삶과 가족사적 결핍을 포착해낸다. 이는 어린 서술자가 배우는 언어가 전적으로 가족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어린 서술자가 가족의 언어를 습득하면서 공감할 수 있는 비극은 가족사적 비극이다.
그녀는 단순히 현실을 포착해내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만의 언어를 통해 비극적 공간을 희극적 공간으로 바꾸어놓는다. “천지가 진동하게 대신 울”기는 울지만 그 울음은 명랑함을 통해 정제된 울음인 것이다. 이 역시 어린 서술자의 언어를 사용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어린이 특유의 감성과 상상력을 통해 비극적 현실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런 김애란의 모습이 찰리 채플린과 겹쳐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채플린은 영화라는 장르를 통해서 현실에 고인 슬픔을 온몸으로 표현해낸 곡비였다. 그는 전쟁의 시대를 우스꽝스럽게 표현해냈고, 산업 노동자의 현실을 풍자적으로 표현해냈다. 그의 영화 세계는 그가 한 유명한 말로 집약될 수 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그가 비극적 현실을 위트와 상상력 넘치는 영상을 통해 극복해냈다면, 김애란은 비극적 현실을 위트와 상상력 넘치는 언어를 통해 극복해낸 것이다.
그녀의 채플린적인 곡비성은 또다른 대표작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에서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아버지의 여름은 어느 바다에서 시작된다. 아버지는 더벅머리에 빨간 사각팬츠를 입은 채 웃고 있다. […] 아버지는 감자를 우물거리며 어딘가를 계속 흘끔거린다. 저기 젖은 모래로 두꺼비집을 짓고 있는 아가씨들이다. 그녀들은 짧고 통통한 허벅지에 살풋 나온 어여쁜 아랫배를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아마도 그중에 한 처녀, 저기 저 넓고 시원한 이마를 가진 처녀에게 마음이 끌렸으리라. […] 사내들은 아가씨들과 합석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지만, 떠오르는 것마다 마땅치 않다. 때마침, 저쪽에서 아가씨 한 명이 운다. 크고 시원한 이마를 가진 그 처녀다. 아가씨들이 그녀를 에워싸고 웅성거린다. 아버지와 친구들은 궁금해진다.
[…]
두드러기는 더 붉게 커지는 듯하다. 모두가 어쩌할 줄 몰라 당황하고 있다. […] 아버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손에 쥐고 있던 감자를 그녀의 팔을 마싸지한다. 잠시 후 여자가 어머, 하고 외친다. 두드러기가 가라앉은 것이다.
“어머.”
아버지가 말했다.
“그게 네 엄마가 내게 건넨 첫마디였지.”
자신감을 얻은 아버지는 다소 과감하게, 마싸지의 범위를 넓혀간다. 그러나 손끝은 여전히 바들거린다. 아버지의 손이 지나는 곳마다 여자의 가려움과 붓기는 사라진다. 여자는 계속 감탄하며 외쳐댄다. 어머, 어머.
[…]
“첫날밤에도 네 엄마는.”
아버지가 쑥스러운 듯 말했다.
“어머, 어머, 하고 미친 듯이 외쳤지.”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
‘나’의 어머니는 죽은 지 꽤 오래다. ‘나’의 아버지는 “돈을 아끼려고” “서툰 솜씨로 끙끙대며, 한 시간이 넘게 내 머리를 자르곤 했다.”「달려라, 아비」처럼,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 역시 가족사적 결핍과 주변부적 삶이 드러난다. 이런 암담해 보이는 삶을 극복해내는 것은 어린 서술자의 언어이다. 어린 서술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난 광경을 재치 있게 그려낸다. 서술자는 재치 있는 묘사를 통해 어머니의 빈자리를 메우는 데에 성공한다. “나는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아버지가 어떻게 이발병을 할 수 있었는지 의아했지만, 군말없이 아버지에게 머리를 맡겼다.”와 같은 표현을 통해서 주변부적 삶 역시 극복해낸다. 또한, 어린 서술자는 감성과 상상력을 통해 암담할 수 있는 현실을 희망적인 현실로 탈바꿈한다.
바람이 잘 새는 어느 집. 졸고 있는 한 아이를 본다. 좁은 등압선을 가진 바람이 몰고 오는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있는 저 아이를.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에 이제 아이는 스스로 이야기하려 한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만나는 이야기를.
어머니가 말한다. 당신이 보고 싶어질 때마다 온몸이 가려워지곤 했어요. 아버지가 말한다. 재밌는 거 보여줄까요? 아이가 하늘 위로 수백개의 숟가락을 집어던진다. 빙글빙글 돌며 비상하는 숟가락들이 폭죽처럼 반짝거린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껴안는다. […] 아이는 점점 작아져 씨앗처럼 움츠러든다. 끔뻑이는 복어들의 눈빛. 복어들의 헤엄. 북태평양의 바람. 그러니까 이건, 비밀이라고. 멀리 동이 터오고 있지만 누구도 정말이냐고 묻지 않고 누구도 거짓말이라고 대답하지 않는다.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
*
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에서 김애란은 채플린적인 곡비성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이러한 채플린적인 곡비성의 밑바탕에는 어린 서술자가 있다. 채플린의 우스꽝스러운 행동들은 모두 그가 어린이의 행동을 따라하는 것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김애란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어린 서술자의 언어를 따라간다. 어린 서술자의 언어는 가족의 언어다. 어린 서술자가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공감할 수 있는 슬픔은 가족사적 결핍일 것이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 역시 어린이 고유의 넘치는 감성과 상상력일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소설집 『침이 고인다』에 이르러 그녀의 서술자는 더 이상 어린 서술자가 아니다. 그녀는 채플린적인 곡비성에서 벗어난다. 그녀는 이제 막 사회에 진입하려는 사회 초년생들은 새로운 서술자로 전면에 내세운다. 사회 초년생의 언어는 어린 서술자와 달리 사회의 언어다. 그렇기에 초년생의 서술자가 공감하게 되는 슬픔은 어린 서술자가 공감하는 슬픔과 다르다. 초년생의 서술자는 사회적 공허감에 공감한다. 또한, 이를 극복하는 방법 역시 어린 서술자 고유의 감성과 상상력이 아니라 초년생 고유의 낭만을 통해 이루어진다.
내가 집을 떠나는 날, 아빠는 오토바이 ‘쇼바’를 잔뜩 올린 채 도로 위를 달리며 울고 있었다. 아빠는 오토바이 속도가 최절정에 다다랐을 때, 앞바퀴를 들며 “애들아 너흰 절대 보증 서지 마!”라고 오열했고, 비닐하우스 옆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속도위반 딱지를 뗐다고 했다. 벌금은 고스란히 만두 가게서 일하는 엄마 앞으로 전가됐다.
[…] 순간 ‘쇼바’를 잔뜩 올린 오토바이 한 대가 부르릉- 가슴을 긁고 사는 기분이 들었다. 오토바이가 일으키는 흙먼지 사이로 수천 개의 만두가 공기 방울처럼 떠올랐다 사라졌다. 언니의 영어 교재도, 컴퓨터와 활자 디귿도, 아버지의 전화도, 우리의 여름도 모두 하늘 위로 떠올랐다 톡톡 터져버렸다. […] 나는 편안하게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손끝에서 돋아나는 음표들이 눅눅했다. […] 물에 잠긴 페달에 뭉텅뭉텅 공기 방울이 새어 나왔다. 음은 천천히 날아올라 어우러졌다 사라졌다.
-「도도한 생활」
「도도한 생활」에서 볼 수 있듯이, 김애란의 곡비성이 포착하는 현실의 슬픔은 그 전과 상당히 다르다. 그녀는 더 이상 가족사적 결핍을 다루지 않는다. 그녀는 사회에 진입하려는 사회 초년생이 마주하게 되는 슬픔을 다룬다. ‘나’는 “서울권 대학에 합격했다.” 문제는, 이제 막 사회의 궤도에 오르려는 ‘나’의 가족에 “차압 딱지가 붙”고 말았다는 것이다. “신입생 환영회 때 부를 노래만 연습하고 있었”을 정도로 사회에 기대를 품었던 ‘나’의 삶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만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보증의, 보증의, 보증이 도미노처럼 꼬리를 물고 무너져 만두 가게 앞에서 멈춰 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저 너머 도미노의 끝을 상상할 수 없고, 원망할 수 없”다. 초년생의 서술자는 이런 현실 앞에서 극도의 허무를 느끼게 된다. 자신이 기대했던 사회와 실제의 사회 사이의 괴리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김애란의 곡비성이 새롭게 포착하는 것은 이런 괴리감 끝에 도달하는 공허감이다.
그렇다면 김애란은 어떻게 “여름도 모두 하늘 위로 떠올랐다 톡톡 터져버”리는 사회적 공허감을 극복해낼까. 이는 초년생 서술자의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초년생은 사회에 대한 기대감을 가진 상태로 사회에 진입하는 존재이다. 그 기대감을 초년생만이 지닐 수 있는 낭만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초년생 서술자의 언어 속에는 초년생만의 낭만이 들어있다.
당연히 초년생의 낭만은 어린이의 감성과 상상력보다는 투명하지도 청아하지도 않다. 그렇기에 「도도한 생활」의 서술자는 「달려라, 아비」나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의 서술자처럼 어두침침한 현실의 공간을 완전히 명랑한 공간으로 바꿔놓지 못한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낭만적인 공간으로 바꿔놓는 데에는 성공한다. “편안하게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하면서 “하나 둘 손끝에서 돋아나는 음표들”이 “천천히 날아올라 어우러졌다 사라”지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모습은 윤동주와 상당히 닮아 있다. 윤동주는 일제 강점기라는 현실과 자신의 이상 사이를 “죽는 날까지” “바람에 스치”우는 별처럼 끊임없이 갈등했다.(「서시」) 때문에 그의 시는 한결같이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그의 모습에서 “쫓기우는 사람” 같은 공허감을 찾아낸다.(「또 다른 고향」) 그 공허감을 그는 “별들을 다 헤일 듯”힌 시적 낭만으로 극복하려한다.(「별헤는 밤」) 그런 점에서 김애란이 『침이 고인다』를 통해 보여주는 세계는 윤동주적인 곡비성으로 점철되어있는 세계이기도 하다.
2005년 가을, 사람들 틈에 끼어 서울의 불빛을 바라봤다. 그리고 노량진의 이름을 생각했다. 다리 량(梁) 자와 나루터 진(津) 자가 동시에 들어간 곳. 1999년 내가 지나가는 곳이라 믿었던 곳. 모든 사람이 지나가는 곳. 하지만 그곳이 정말 ‘지나가기만’ 하는 곳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7년이 지난 2005년 지금도 나는 왜 여전히 그곳을 ‘지나가고 있는 중’인걸까. 짧은 정차 후, 사람들이 물밀 듯 들어왔다. 한 여자가 내 발을 밟으며 소리쳤다. “밀지 마요!” 우주 먼 곳 아직 이름을 가져본 적 없는 항성 하나가 반짝하고 빛났다. 그리고 어디선가 아득히 ‘아영아, 내 손 잡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정신을 차린 뒤, 열차가 어디까지 왔는지 따져보았다. 벌써 집 근처에 가까워져 있었다. 차고 깊은 가을 밤, 지하철은 여전히 그리고 묵묵히- 서울의 북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자오선을 지나갈 때」
윤동주가 때때로 “나를 부르지 마오.”라면서 현실을 수용했던 것처럼(「무서운 시간」), 채플린적인 곡비성을 떠나 윤동주적인 곡비성에 도달한 그녀는 현실의 슬픔을 묵묵히 받아들이려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린 서술자를 통해 항상 현실의 슬픔을 뛰어넘으려 했던 『달려라, 아비』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오선을 지나갈 때」에서 서술자는 노량진이 “정말 ‘지나가기만’ 하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녀는 재수 생활에서 맛보았던 슬픔이나 구직에 “서른번째 낙방을” 하면서 맛보았던 슬픔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초년생만의 낭만을 통해 “이름을 가져본 적 없는 항성 하나가 반짝하고 빛”나는 것도 생각해보지만, 생각은 생각에서 그칠 뿐 더 나아가지 못한다. 김애란은 슬픔을 언제나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
그녀가 『달려라, 아비』에서 어린이의 언어로 가족사적 비극과 주변부적 삶을 보여주었다면, 『침이 고인다』에서는 초년생의 언어를 통해 사회적 공허감을 보여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보여주었던 두 세계가 한데 엉켜 태어난 작품을 바로 『두근두근 내 인생』이다.
『두근두근 내 인생』의 아름이는 조로증에 걸린 열일곱살 소년이다. 아름이의 겉모습은 “아버지보다 늙어버렸다.” “마음보다 몸이 빨리 자라서 그 속도를 따라가려면 마음도 빨리빨리 키워놓”아야한다는 걸 아는 그는 수도 없이 많은 책을 읽는다. 그는 어린 나이이지만 “주관적인 시간으로만 따지면” 여느 어른보다 성숙해있다. 때문에 아름이는 어린 서술자이면서 동시에 초년생 서술자이다. 그는 가족사적 결핍과 사회적 공허감을 동시에 이해하고 있으며 상상력과 낭만을 통해 이를 극복하려 한다. 『달려라, 아비』와 『침이 고인다』의 세계가 한 데 포개어지는 순간이다.
실제로 조로증에 걸려 세상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열여덟이 될지, 열아홉이 될지 알 수” 없는 아름이는 가족사적 결핍을 그대로 드러낸다. 또한 열일곱살에 그를 낳은 뒤, “죽을 때까지 월세에” 사는 것이 가장 두려운 부모는 주변부적 삶을 환기시켜준다. 그리고 아이를 낳음과 동시에 사회에 적응해야하는 부모의 이야기는 사회적 공허감을 보여준다.
하늘은 푸르고 잔디는 싱싱했다. 끝없이 펼쳐진 언덕 위에 엄청나게 큰 트램펄린 하나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내가 있었다. 나는 기구 위에서 깡충대며 놀고 있었다. 어쩌면 심장질환 때문에 숨이 가빠, 꿈속에서도 내가 운동중이라고 착각하고 있는지 몰랐다. 나는 퉁-하고 뛰어오른 뒤 시원하게 웃고, 다시 퉁-하고 날아오른 뒤 눈을 감았다. 공중에 머무는 시간은 꽤 길었다. 짧은 정지화면마냥, 몸이 떴을 때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그런데 그 풍경 위로 느닷없이 배경음악이 깔렸다. 어디서 들려오는 건지 모를 기타와 피아노, 드럼 소리도 연이어 울려퍼졌다. 나는 반주에 맞춰 계속 폴짝거렸다. 그러곤 하늘 높이 솟을 때마다 만세 자세를 취하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
나는 방방 뜨며 신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
[…]
“몇번이고?”
지나가는 바람이 되물으면,
“몇번이고.”
오고 있는 바람이 대답할 때까지 말이다.
소설 구석구석에서 아름이는 조로증 환자가 아닌 여느 열일곱살 소년처럼 행동한다. 다큐멘터리에 아름이를 내보는 걸 망설이는 부모에게 “그럼 나 입원 안 시켜줄 거예요? 진짜? 에이, 부모가 그럼 안되지. 엄마 아빠는 자식 키우는 게 진짜 쉬운 줄 알았나봐?”하면서 너스레를 떨기도 하고, “글 잘 쓰는 사람이 제일 멋지다”는 첫사랑 서하 때문에 소설을 쓰기도 한다. 이런 명랑함의 바탕에는 아름이만의 위트 있는 말투와 상상력이 있다. “사라질 것 같은 사람”인 아름이가 처한 가족사적 결핍을 극복해내는 것도 바로 이러한 위트이며 상상력이며 감성이다.
그해 겨울, 아버지의 스포츠용품점이 문을 닫았다. 거듭되는 적자에 빚까지 안고서였다. 아버지의 사업수완이 워낙 허술하기도 했고, 전국적인 경기불황에 시골사람들 씀씀이론 고가 브랜드 매장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마침 외할아버지가 풍으로 쓰러졌다. 평소에도 혈압이 높으셨던 분인데, 사람들은 사위가 가게를 말아먹었기 때문이라고 쑥덕거렸다. 아버지는 가게를 지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그래봤자 체고 동기들에게 택배를 보낸 뒤 ‘돈은 천천히 줘도 된다’라고 하거나, 중학교 후배들에게 전화를 돌리며 으름장을 놓는 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아름이의 부모는 열일곱살에 만나 아름이를 낳았다. 그들은 아이를 낳으면서 사회에 진입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그들은 초년생이 맛보는 사회의 슬픔을 느낀다. 이런 사회의 슬픔을 대면하는 것은 아름이가 지닌 낭만이다. 아름이는 “사건 위주로 짧게 대답하”는 아버지의 이야기와 “자신의 감상을 구구절절 보”태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모은 다음에, 자신의 낭만을 통해 “겹치고 어긋나고 어그러져” “폭발 직전의 우주가스처럼 아스라이 출렁이는” 사랑이야기로 바꾸어놓는다.
이런 어린이만의 상상력과 감성이 초년생의 낭만이 때때로 중첩되기도 하는데, 이 부분들은 소설 군데군데에 아련함을 남겨놓는다.
약하고 희미하지만 분명 거기 있는 소리였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파동 안에 머물렀다. 그 자장 끝 맨 나중에 그려지는 동심원이 토성 주위의 고리처럼 우리를 오목하게 감쌌다. 아주 오래전, 어머니의 뱃속에서 만난 그런 박자를, 누군가와 온전하게 합쳐지는 느낌을 다시는 경험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것과 비슷한 느낌을 줄 수 있는 방법 하나를 비로소 알아낸 기분이었다. 그건 누군가를 힘껏 안아 서로의 박동을 느낄 만큼 심장을 가까이 포개는 거였다. […] 오래전, 아무도 모르게 원망하고 서운해했던 기억도 굳이 헤집어내지 않았다. 이제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하나도 중요할 리 없었다. 어머니는 대답 대신 내 손을 꼭 잡았다. 나는 잠에 취한 사람처럼 느리고 아둔하게 말했다.
“아빠.”
“응?”
“그리고 엄마.”
“그래.”
그러곤 남아 있는 힘을 가까스로 짜내 말했다.
“보고 싶을 거예요.”
김애란은 어린이와 초년생 사이의 양자적인 서술자를 내세워 가족사적 결핍과 사회적 공허감을 마주한다. 그러곤 채플린적인 곡비성과 윤동주적인 곡비성을 통해 이를 극복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두근두근 내 인생』은 그녀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곡비성이 성공적으로 융합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어차피 눈에 보이지도 않고 땅에 닿자마자 금방 사라질” 눈[雪]의 아름다움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마음으로, 그녀는 일상에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았던 우리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끌어내는 작업을 마침내 해낸 것이다.
*
김애란은 채플린적인 곡비성과 윤동주적인 곡비성을 결합시켜 『두근두근 내 인생』을 만들어냈다. 그 후부터 그녀의 곡비성은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그녀는 상상력이나 낭만을 통해 비극적 공간을 희망의 공간으로 바꾸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절망을 희망으로 전이시키지 않는다. 그녀는 비극적 현실을 온몸으로 끌어안아 녹여내기 시작한다. 타자의 슬픔에 공감한다는 것은 동일하지만, 타자의 슬픔에 반응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70년대 도시 빈민의 삶을 문학에 녹여냈던 조세희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통해서 암탁한 현실을 생생하게 펼쳐낸 바 있다. 그의 글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건조하며, 현실의 슬픔을 숨이 막힐 만큼 정확하게 보여준다. 김애란은 『비행운』을 통해 채플린과 윤동주를 떠나 조세희적인 곡비성으로 무장한다. 이러한 곡비성의 변화는 그녀가 현실의 슬픔을 감성이나 낭만을 통해 우회하지 않겠는다는 뜻이며 현실의 슬픔을 직면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용대는 어려서부터 주위의 홀대를 받았다. 가족의 수치, 가계의 바보, 가문의 왕따. 어느 집안에나 꼭 한 명씩은 존재하는 천덕꾸러기. […] 제대 후 용대는 중국집 배달, 이발소 보조, 술집 웨이터, 아파트 경비 일을 전전했다. 대부분 형이 어렵게 주선해준 자리였다. 용대가 꾸준하게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툭하면 말도 없이 결근했고, 주인이 g나 마디 하면 열 마디 대꾸한 뒤 가게 문을 박차고 나왔다. 눈치 없이 손님들 대화에 끼어드는 일도 잦았다. […] 그저 보증을 서는 줄 알았는데, 용대의 선배라는 중개업자가 집을 두 사람에게 이중으로 팔아버리고 잠적해버린 뒤였다. […] 용대는 결국 집을 나왔다. 말 수 적고 점잖은 형이 ‘이 새끼가 하다 하다 별 지랄을 다 한다’며 용대의 귀싸대기를 때린 밤. 깡패들에게 상투적이고도 무시무시한 최종 협박을 받은 날. […] 서른일곱 때의 일이다.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인용된 부분에서 살필 수 있듯, 그녀의 글에서는 어린이 특유의 명랑함도 없고 초년생 특유의 아련함도 없다. 그녀는 건조하게 지금을 힘겹게 살고 있는 사회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의 서술자는 어린이와 초년생을 거쳐 사회인이 된 것이다. 사회인의 언어는 “빛을 잡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언어의 “손에 걸리는 거라곤 쥐자마자 이내 부서지는 몇 움큼의 강물이 전부”일 뿐이다.(「너의 여름은 어떠니」) 그녀는 사회인의 언어를 통해 사회인의 슬픔을 고스란히 글에 담아낸다.
용대는 더듬더듬 어색하게 중국말을 따라 한다.
“워 더 쭈어웨이 짜이날?”
“제 자리는 어디입니까?”
테이프가 철커덕 소리를 내며 저절로 뒷면으로 넘어간다. 짧은 사이. 명화의 목소리가 들린다.
“리 쩌리 위안 마?”
“여기서 멉니까?
용대는 조그맣게 “리 쩌리 위안 마?”라고 중얼거린 뒤 엑셀레이터를 밟는다. 겨울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약속처럼, 나뭇가지에 끝끝내 매달려 있는 은행 몇 알이 방금 막 지나간 택시를 굽어보며, 떨어지지도 썩지도 못한 채 몸을 떨고 있다.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그녀는 사회인의 입장에 서서 “제 자리는 어디입니까?”라고 묻고 “여기서 멉니까”라고 다시 되묻는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떨어지지도 썩지도 못” 하는 사회인의 모습을 그녀는 덤덤하게 표현한다. 더 이상 그녀는 슬픈 현실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한 가족의 단란이 시시하게 망가지는” 현실의 슬픔을 더욱 부각시킬 뿐이다.(「하루의 축」)
저는 한 달에 3백만 원, 많게는 천만 웓도 할 수 있다는, 그렇지만 그전에 제가 먼저 물건을 8백만 원어치 사야 된다는 이상한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 제일 먼저 자물쇠가 채워진 신발장이 눈에 들어왔어요. 그래도 그땐 막연히 ‘신발을 도둑맞지 않으려고 그러나 보다’ 생각했어요. […] 솔이 잔뜩 흰 30여 개의 칫솔이 숟가락 통에 아무렇게나 꽂혀 있었고요. 집 안 가득 퀴퀴하고 기분 나쁜 냄새가 났어요.[…] 생필품을 팔았어요. 건강식품을 팔고, 사치품을 팔았어요. 천 원짜리 마스크팩을 20만원에 판다든가, 3만 원짜리 시계를 58만원에 넘긴다든가, 15만 원짜리 핸드백을 120만 원에 건네는 식이었어요. 그런데, 그런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가 팔고 있는 게 물건이 아니었더라고요. 제가 팔고 있던 건 사람이었어요.
-「서른」
「서른」의 서술자는 “대학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뭔가 창의적이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며 살게 될 줄 알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앞을 가르는 물의 세기가 가파르고, 돌다리 사이의 간격은 너무 멀어 눈에 보이지조차 않”은 위태로운 상태에 있다. 「서른」은 다단계에 청춘이 말라버린 사회인의 슬픔을 조망한다. 조세희적인 곡비성이 가장 뛰어나게 발휘된 작품이기도 한 「서른」은 역설적이게도 김애란 문학의 한계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그녀는 지금까지 “이 세상 사람들의 울음/ 까무러치게 대신” 울어주었다. 때로는 채플린식으로, 때로는 윤동주식으로, 때로는 조세희식으로. 문제는 그녀는 지금까지 “가장 아프고 가장 요염하게 울음 우는” 그 이상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들은 치열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지 않다.
채플린적인 곡비성과 윤동주적인 곡비성으로 가득했던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 『두근두근 내 인생』 구석구석에는 사회적 문제가 스며들어있다. 가령 「달려라, 아비」에는 택시 기사라는 삶의 고달픔이 녹아져있고, 「자오선을 지나갈 때」에는 주변부적인 삶을 헤매이고 다니는 청춘의 삶이 녹아져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사회적 문제를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않고 상상력이나 낭만을 통해 우회한다. 이제까지 그녀는 타자의 슬픔에 공감하고 슬픔에서 희망의 물줄기를 길어 올렸을 뿐, 그 슬픔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타자의 슬픔을 비교적 직시하려는 노력을 보였던 『비행운』도 이런 방향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그녀는 슬픔의 원인을 애써 탐구하지 않는다. 슬픔을 건조하게 보여주는 데에서 그친다. 물론 그녀는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나 「서른」을 통해서 이러한 문제의 원인이 사회에 있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기는 한다. 그러나 이는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서일 뿐이다. 그녀는 문제의 원인을 찾는 것보다 “천지가 진동하게 대신 울어주”는 데에 더 주목한다. 그녀가 타자의 슬픔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데에도 어딘가 한발짝 비켜서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
『비행운』 이후로 그녀의 곡비성은 또다시 새로운 도약을 맞는다. 드디어 문제의식을 글 속에 담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그녀가 담아낸 문제의식은 『비행운』처럼 간접적이지 않다. 그녀는 현실의 슬픔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파헤치고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그녀의 새로운 곡비성을 김애란만의 곡비성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녀는 채플린과 윤동주, 조세희를 떠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남을 대신해서 울어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곡비성의 근원이었던 언어로 되돌아간다. 지금까지 언어를 통해 타자의 슬픔을 이해했던 것처럼, 그녀는 언어를 통해 타자의 슬픔의 원인까지도 정확히 짚어낸다. 김애란만의 곡비성이 시작되는 지점도 바로 이 지점이다. 그녀는 자신의 태생이었던 언어로 회귀하면서 그녀만이 보여줄 수 있는 곡비성의 세계를 열어가는 것이다.
나는 이 세계에서 하나의 언어가 사라진 순간, 그 말(言)에서 빠져나온 숨결과 기운들로 이뤄진 영靈이다. 나는 거대한 눈(目)이자 입(口). 하루치 목숨으로 태어나 잠시 동안 전생을 굽어보는 말(言)이다. 나는 단수이자 복수, 안개처럼 하나의 덩어리인 동시에 낱낱의 입자로도 존재한다. 나는 내가 나이도록 도운 모든 것의 합, 그러나 그 합들이 스스로 지워가며 만든 침묵의 무게다. 나는 부재不在의 부피, 나는 상실의 미로, 나는 어떤 불빛이 가물대며 버티다 훅 꺼지는 순간 발하는 힘이다. 동물의 사체나 음식이 부패할 때 생기는 자발적 열熱이다. […] 나는 시원이자 결말, 미지未知이자 지知, 거의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노래다. 나는 이런 식으로밖에 나를 설명하지 못한다. 다른 부족의 몇몇 문법을 비려 말한대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는 뚜렷한 얼굴이나 몸통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안다. 그리고 그게 우리의 정체다.
-「침묵의 미래」
우선 그녀는 서술자를 “이 세계에서 하나의 언어가 사라진 순간, 그 말(言)에서 빠져나온 숨결과 기운들로 이뤄진 영靈”으로 설정한다. 서술자는 종말의 시원에 위치해 있으며, 죽음이라는 미지未知에 들어있고, 마지막 언어라는 데에서 의미가 부여된다. 동시에 그는 언어의 결말이며,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을 아는 지知이며, 사라졌기에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노래이다. 그렇기에 그는 태생적으로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다. “누군가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고, 눈 맞춰주고, 끄덕이며,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같이하는 건 몹시 오랜만’인 데다가 ‘너무 평범하고 친근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모국어로 뭐라 대꾸”해주기를 그는 바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언어의 죽음 근처에 있기 때문에 “‘응’이나 ‘그래’ 같은 아주 간단한 말” 조차도 모국어로 들을 수 없다. “해당 언어의 실제 사용자가 열 명 미만인” 소수 언어 사용자의 영靈은 절망과 외로움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김애란은 사라진 언어라는 서술자를 통해서 소수 언어 사용자의 슬픔을 대변한다.
그가 숨을 거두기 전 모습이 떠오른다. […] 언젠가 너무 추워, 신조차도 살 수 없는 행성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그 별 둘레에는 지구에서 쏘아올려진, 누군가의 마지막 꿈과 비명이 메아리쳐 겹겹의 띠를 이루고 있다고 했다. 색이 다른 넓적한 고리 위에는 한 부족의 언어를 물감처럼 풀어 종이로 갓 뜬 듯한 영혼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고. 우리가 죽으면 그 속에 황색 먼지 또는 얼음 알갱이가 된다고 했다. […] 그런데 오늘, 내 마지막 화자를 떠나며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그 소문이 틀렸다는 것이다. 우리의 종착지는 신의 입김도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행성이 아니었다. 우리가 죽은 뒤 한 번 더 죽게 되는 장소는 ‘내세’도 ‘우주’도 아닌 ‘공장’이었다. 지옥처럼 뜨거운 데였다.
-「침묵의 미래」
그녀는 소수 언어 사용자의 슬픔을 껴안는 것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어디서 소수 언어 사용자의 슬픔이 비롯되었는가를 파헤쳐가는 것이다. 그녀는 “멸종 위기에 처한 세계 곳곳의 언어를 보호하고,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 소수언어박물관을 세웠다는 중앙을 주목한다. 사실, 소수언어박물관을 내세운 중앙은 소수 언어 사용자들을 “잊어버리기 위해 애도”했고, “멸시하기 위해 치켜세웠고, 죽여버리기 위해 기념했다.” 또한, 관리자들은 “공용어를 바탕으로 자기들만의 새 말을 만들어내는 게 두려”워 “각 언어의 고유성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타 민족끼리 말을 섞는 것을 금했다.” 심지어 그들은 죽어버린 언어마저도 “지옥처럼 뜨거운” 공장으로 보낸다. 소수 언어 사용자의 슬픔을 보듬던 김애란은 중앙이나 관리자, 공장으로 상징되는 문화 제국주의에서 그 슬픔의 원천을 발견해내고 드러내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그녀는 언어를 배워가면서 타자의 슬픔에 공감해왔다. 이제 그녀는 타자를 공감하는 것 그 이상을 추구하고 있다. 언어를 깊게 파헤치면서 타자의 슬픔이 생겨난 지점을 찾아낸 그녀가 문학이라는 방법을 통해 이를 비판적으로 담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침묵의 미래」는 김애란이 김애란만이 가질 수 있는 곡비성을 스스로 만들어내면서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어버린 작품으로 이해할 수 있다.
*
문학은 어떻게 태어났는가. 누군가는 재미 때문에 문학이 탄생했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문학이 탄생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문학이 태어난 이유는 교훈적인 내용을 보다 효과적으로 사람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 태어난 것일 수도 있고, 순전히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확실한 사실이 하나 있다면, 이런 이유들 사이에는 타자에 대한 공감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재미도, 비판도, 교훈도, 아름다움도 모두 타자의 슬픔을 대변하기 위해서이고 타자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서이다.
그런 점에서, 문학의 탄생 한복판에는 타자에 대한 위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곡비처럼, 문학은 남을 대신해서 울어준다. 세상에서 비켜선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 그것이 문학에게 주어진 임무이며 천명일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 문학은 김애란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한국 문학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곡비다. 그녀가 채플린적처럼 가족사적 비극을 노래했을 때, 그녀의 “까무라칠 듯 울어 대는 곡소리에/ 이승에는 눈 못 감고 떠도는” 슬픔은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언어를 바꾸어가면서까지 타자의 아픔을 보다 많이 끌어안으려고 했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의 몸을 뒤척이면서 타자의 슬픔을 껴안은 것이다. 채플린에서 윤동주로, 윤동주에서 조세희로. 마침내 그녀는 자신만의 곡비성을 만들어내면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냈다. 앞으로 축복처럼 쏟아질 그녀의 글이 기대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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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서 길을 잃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한다. 살인적인 열기의 낮과 극심한 추위의 밤. 인적 하나 없는 광대한 공간 속의 외로움. 그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메워지지 않는 목마름일 것이다. 그렇기에 문득 저 멀리에 호수가 보인다면 누구나 뛰어가기 마련이다. 희망을 가득 품고 허위허위 달려가 보지만 정작 있는 것은 모래밖에 없다. 신기루. 광학에서는 빛이 실제로 만나서 생기는 상을 실상이라고 하고, 빛이 실제로 만나지 않았음에도 생기는 상을 허상이라고 한다. 허상이 생기는 이유는 빛이 직선으로만 뻗어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미묘한 기온 차이에도 빛은 조금씩 꺾인다. 그 조금씩의 차이가 모여 나중에는 뒤집힌 허상을 만들어낸다. 우리의 눈은 실상과 허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우리는 나무가 뒤집혀 있는 것을 보고 호수에 나무가 반사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허상을 실상처럼 받아들이는 것. 삶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광활한 삶의 한복판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다 우연히 발견한 이상을 향해 달려가곤 한다. 사막에서 길을 잃은 자가 호수를 향해 달려가듯이. 마침내 이상에 도달했다고 생각했을 때쯤 우리는 허상을 바라보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우리 삶에 내재되어 있는 부조리일지도 모른다. 김영하는 부조리의 작가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 삶에 숨어있는 허상을 들춰내어 폭로해왔다. 앞서 그는 「오빠가 돌아왔다」에서 왜곡된 가족 구성원의 모습을 보여주며 행복한 가정이라는 허상을 파헤친 바 있었고, 『빛의 제국』에서는 서로를 속이고 있는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진실한 관계라는 허상을 파헤친 적도 있었다.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그가 천착하는 것은 바로 자아의 확실성이라는 허상이다. 그가 어떻게 자아의 확실성이라는 허상을 밝혀내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소설을 꼼꼼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다. 소설의 주인공 김병수는 은퇴한 연쇄살인범이다. 그는 “살인의 모든 과정과 느낌을 기록”하기 위해서 일지를 쓰겠다는 마음을 먹었지만 문장을 만든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시를 공부했고 어쩌다 등단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알츠하이머에 걸린 평범한 일흔 살의 노인일 뿐이다. 그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 이름은 은희. 그녀는 “농대를 나와 지역의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사실 그녀는 그의 친자식이 아니다. 그녀는 그가 마지막으로 죽인 여자의 딸이다. 여자는 자신의 딸만은 살려달라고 빌었고, 그는 그 약속을 지켜주기로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연쇄살인이 발생한다. “잇따라 여자 셋이 죽었”고 “세 여자 모두 이십대”인데다가 “밤늦게 귀가하다가 당했다”고 한다. 연쇄살인범으로부터 은희를 보호하기에는 그는 너무도 늙었고 심지어 최근 기억부터 없어질 위기에 처해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은희에게 밤길을 조심하라는 주의상황을 말하는 것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우연한 기회로 연쇄살인범의 단서를 찾는다. 나는 순간적으로 정차해 있는 놈의 차를 보지 못하고 그대로 추돌하고 말았다. 사냥용으로 개조한 지프였다.
- 韓雪
- 2014-12-23
과학이란 무엇인가 이제 갓 태어난 아기를 생각해보자. 열달동안 어둠 속에 살았던 아기의 눈에 분만실의 환한 조명이 들어왔을 수도 있고, 수술이 끝난 의사의 안도한 표정이 들어왔을 수도 있고, 비로소 어머니가 된 한 여자의 얼굴이 들어왔을 수도 있다. 아기의 눈에 어떤 것이 보였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아기가 ‘너’라는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머니와 다를 바 없었던 시간이 끝나자마자 홀로 세상과 대면하기 시작하면서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기가 어떤 물건이든지 우선 입에 넣어보려는 행동은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아기에게 있어서 감각이 가장 발달된 기관은 입이다. 아기는 물건을 입에 넣어보면서 물건에 대해 파악해나가는 것이다.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곧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바뀐다. ‘너’라는 존재를 그토록 궁금하게 여기는 ‘나’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타자에 대한 의문이 자아에 대한 의문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결국 모든 인간은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두 질문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셈이다. ‘너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모든 학문의 근저에는 이 두 가지 질문이 있다. 다만 조금씩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조금은 말장난 같겠지만, 미학은 미학적인 방식을 통해 아름다움의 원리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려는 학문이고, 경제학은 경제학적인 방식을 통해 경제 행위의 원리와 경제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려는 학문이다. 그렇다면 과학은 무엇인가. 과학 역시 과학적인 방식을 통해 자연 현상의 원리와 그 원리를 따르는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려는 학문이다. 과학적으로 ‘너’와 ‘나’를 분석해 보려는 학문이다. 그렇다면 과학적인 방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도대체 과학적이란 것이 무엇이기에 우리는 과학을 절대적인 진리처럼 받아들이는 것인가. ‘과학적’이라는 단어를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몇몇 과학철학자의 생각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과학은 생각의 관성이다 ‘해는 동쪽에서 떠오른다’라는 지식을 우리는 어떻게 얻게 되었을까. 우선 우리는 매일 해가 동쪽에서 계속 떠오르는 것을 확인했었다. 지금까지 해가 동쪽에서 계속 떠올랐다는 것을 확인한 우리는 내일도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를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100년도 채 안 되는 삶을 바탕으로 내일도 그럴 것이라고 섣불리 판단해도 될까? 물론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져오는 역사책을 근거로 들면서 해가 동쪽에서 떠오른 것이 적어도 몇천년이 되었기에 확신할 만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신할 만한 것과 확실한 것은 분명히 다르다. 지금까지 태양이 매일 동쪽에서 떠올랐다는 사실과 내일도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를 것이라는 사실에는 어떠한 연관 관계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랜 기간의 경험을 절대적인 지식으로 처리해버린다. 태양이 내일 서쪽에서 떠오를 수 있는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지금까지의 경험을 미루어 보았을 때 동쪽에서 떠오를 것이라고 단정 짓는 것이다. 모두
- 韓雪
- 2014-07-13
당신, 사랑을 믿나요? 언젠가 당돌하게 소설의 첫 문장을 써본 적이 있다. 당신, 사랑을 믿나요. 거기서 끝이었다. 글은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원래 문장은 문장을 부르는 법이다. 문장이 제대로 들어서기만 하면 자연스레 그 다음의 문장이 들어선다. 나는 분명히 정확한 문장을 썼다. 주제를 함축하고 있는 문장이었고, 읽는 이의 관심을 끌만한 문장이었으며, 문법적 오류도 없었다. 그럼에도 글은 써지지 않았다. 어디선가 읽어본 듯도 했다. 제대로 문장을 썼는데도 다음 문장이 따라오지 않는다면, 그건 자신이 쓴 문장을 스스로 믿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 누구도,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설득시킬 수 없는 이야기를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당신, 사랑을 믿나요? 나는 이 문장을 믿지 못한 게 분명했다. 나는 사랑에 설득되지 않았다. 나는 사랑을 믿지 못했다. 한 줄만 써놓고 버렸던 원고지를 내가 다시 꺼내는 데에는 꽤나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 내가 사랑에 설득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느 순간부턴가 나는 사랑을 믿었다. 당신, 사랑을 믿나요? 이 문장을 믿을 수 있었다. 소설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문장은 문장을 따라왔다. 물론 첫 문장은 다른 문장으로 바꿨다. 퇴고를 하면서 첫 문장이 너무 감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소설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소설을 써냈다는 것이다. 그 문장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문장으로 말이다. 사랑을 믿지 않았던 나는 사랑을 믿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건 순전히 김연수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이 아닐까 싶다. 나는 김연수 때문에 사랑에 설득되었고 사랑을 믿었던 것이다. 세상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너’로. 자아와 타자. 세상은 그 둘로 구성되어 있다. 나와 너는 이분법적이다. 나와 너 사이에는 거대한 심연이 있다. 나와 너는 선천적으로 다르다. 나는 결코 너가 될 수 없다.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렇다. 나는 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너의 조그마한 움직임이나 바뀐 말투 정도로 너의 생각을 간신히 추측할 뿐이다. 나에게 있어 너는 철저한 미지未知다. 그리고 그건 너도 그렇다. 너는 결코 나라는 존재가 될 수 없다. 나와 너는 영원히 갈라서 있다. 사르트르는 말했다. 타자, 그것은 곧 지옥이라고. 너라는 존재는 나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는 내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너는 나를 끊임없이 간섭한다. 결국 너는 나를 꺾어버린다. 내 의지는 너 앞에서 비참하게 허물어질 뿐이다.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너란 존재는 나를 방해하는 존재일 뿐이며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일 뿐이다. 타자를 극복하려 했던 건 사르트르뿐만이 아니다. 철학사에 이름을 남긴 대부분의 철학자들 역시 타자를 극복해야 할 그 무엇이라고 규정했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이었다. 나라는 존재만이 유일하고 확실하며 절대적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유아唯我론으로 귀결된다
- 韓雪
- 201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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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