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독후감
- 작성자 Ted
- 작성일 2025-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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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흔히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작품이자 그의 모든 사상과 철학의 집합체라고 말해진다. 말하자면 그의 ‘백조의 노래’인 셈이다. 그러나 사실 이 책의 내용은 이런 온갖 찬양들과는 상반된다. 이 책의 내용은 (오직 내용만 놓고 보자면) 언뜻 보기에 최소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고 불리고 찬양 받는 이유는 내용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이 책이 예술적인 이유는 (비트겐슈타인의 용어를 빌리자면)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상세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때로는 신비스럽게 때로는 차가운 이성으로 종교와 신, 자유와 인간의 본성, 그리고 사랑을 바라보며 그것들을 묘사한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이 마치 오페라와 같았다고 말하고 싶다. 사실 오페라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어쩔 수 없이 내용이 아쉽게 느껴진다. 하지만 과거는 물론 현재에도 오페라를 저급하다거나 세속적이라고 비판하지 않으며 차라리 아름답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오직 오페라 속의 아리아가 지니는 아름다움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아리아가 아니지만, 아름다움은 그 안에 있으며 우리는 아리아의 형식으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반박해선 안되는(반박은 말하는 것이다) 권위를 지니며 그 권위는 아리아에서 오페라, 한 극 전체로 확대된다. 이 책은 오페라처럼 아리아와 같은 몇몇 서술을 지니고, 또 그 서술은 ‘신비스러운 것’을 올바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닌 느끼고 알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오직 이 점에서 그의 책이 그런 찬양에 마땅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고 생각한다.
쓰다보니 서론이 길어지고, 또 혼잡해진 것 같다(내게 생각을 조금 더 잘 서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일단 그럼 서론은 접어두고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이번 글을 어떤 형식으로 전개할 것인지에 관해 약간의 설명을 해보고자 한다. 먼저 나는 내용은 가능한 한 간단하고 짧게 쓰고, 이 책의 아리아에 대한 감상을 적어보고자 하는데 그 이유인 즉 이 책은 내용보다는 메시지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1800페이지 책의 내용을 상세하고도 잘 요약할 능력도 시간도 내게는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이 책은 여러 심오하고 뜻깊은 주제를 다루는 만큼 철학적으로도 조금 더 풀어내보고자 하는데 왜냐하면 사실 이 책을 열심히 읽었던 이유 중 하나가 비트겐슈타인이 이 책을 좋아했었기 때문이었고, 또 이 책이 내가 니체의 사상을 더 잘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내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먼저 내용을 짧게나마 서술해보고자 한다.
이 책의 내용은 카라마조프 가문의 가정사이다. 그것도 아주 복잡한 가정사인데 일단 처음부터 시작해보도록 하겠다. 이 책은 카라마조프가의 가장 표도르 파블로비치와 그를 찾아온 세 아들 장남 드미트리, 차남 이반, 막내 알료셴카(보통 애칭으로 알료샤라 부른다)가 찾아오며 시작된다. 인물을 간단하게나마 소개하자면 먼저 표도르는 표독스럽고 호색한에 매우 세속적인 아버지이다. 물론 세 아들에게도 좋은 아버지는 못되었는데 자신의 두 아내가 죽은 후 아들들을 방치하여 아이들은 하인인 그리고리의 손에 길러진다. 다음으로 드미트리는 퇴역 장교로 그려지며 자신을 버린 표도르에게 큰 반감을 가지고 재산 문제로 끊임없이 표도르와 갈등을 겪는 인물이다. 이반은 계몽주의자이자 회의주의자로 그려지며 종교적 문제로 끊임없이 회의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마지막으로 알료샤는 매우 선한 인물로 수도사이며 모두를 사랑하고 포용하려 노력하는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는 매우 긍정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이만해도 충분히 불안정해보이는 이 카라마조프 가문은 3인물이 더 등장하며 더더욱 복잡한 갈등의 양상을 띄게 되는데 그루셴카와 카체리나라는 두 여성과 현재 표도르의 요리사로 일하지만 표도르의 사생아로 추정되는 스메르쟈코프가 등장한다. 먼저 카체리나는 드미트리의 약혼자로 드미트리가 그녀의 아버지의 치료를 위해 단순히 호의로 5000루블을 지불해준 데에 대한 고마움과 일종의 의무감으로 그와 약혼하지만 그녀에겐 의무감뿐이었고, 드미트리의 마음은 그루셴카를 향해 있었기에 그 약혼은 성사되지 못한다. 그루셴카는 표도르와 드미트리 둘 다 좋아하게 되는 여성으로 가뜩이나 표도르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던 드미트리와 표도르 간의 갈등을 절정으로 치닫게 하는 주된 원인이 된다. 스메르쟈코프는 이반을 누구보다 존경하는 사람으로 그의 이론인 ‘모든 것이 허용된다’를 받아들이고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지만 이반과의 대화가 영향을 주었는지 자신의 사상에 회의가 들었는지 끝끝내 목을 메고 자살하는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이 책의 가장 큰 사건은 표도르가 살해되는 사건인데 앞서 말했듯 범인은 물론 스메르쟈코프이지만 사람들은 항상 표도르를 죽이겠다고 떠들고 다니고, 유력한 알리바이를 가진 드미트리가 범인으로 몰리고, 그 과정에서 (스메르쟈코프의 고백으로)사실을 알게 된 이반은 자신의 사상에 회의를 품고, 살인 사건을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알료샤는 그런 두 형을 믿어주고, 위로해준다. 결국 드미트리는 억울하게 유죄를 선고받지만 카체리나와 이반의 도움으로 탈옥의 계획을 세우며 그나마 희망적으로 막을 내린다. 사실 제일 큰 뼈대가 되는 카라마조프가의 이야기만 하긴 했지만 사실 이 외에도 알료샤의 수도원의 수도사들과 조시마 장로의 이야기(이 부분은 대부분 조시마 장로의 대사이고, 조시마 장로의 죽음 외에는 큰 사건은 거의 없다), 알료샤와 2등 대위, 그리고 일류샤 등등 수많은 인물과 사건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일단은 내용은 이쯤에서 정리하도록 하고 이제는 이 책의 메시지에 집중해보고자 한다.
모든 것이 허용되는가? 이 책이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일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아마 그렇다고 답하고는 법이나 사회 계약 등의 주장을 하며 변명할 것 같다. 또 어떤 사람은 과학적으로나 이성적으로 도덕이 가치가 없고, 단지 인간이 만든 것일 뿐, 그 이상의 가치는 지니지 못한다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지금은 과학의 세계이고 개인은 그 시대의 포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 속 이반도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말한다. 이는 이반과 알료샤의 대화에서 나오는데(이 대화를 거의 100페이지 동안 한다) 거기서 이반은 자신의 서사시까지 읊으며 자신의 주장을 논증한다. 먼저 이반의 근거를 약간 써보자면 그는 먼저 신의 권리에 대해 논한다. 그는 과연 신은 모두를 설령 그가 죄인이라도 모두를 사랑하고 용서한다고, 또 그런 세상이 올 것이라고 말했지만 과연 그에게 그들을 사랑하고 또 그들을 용서할 권리가 있는지 이반은 알료샤에게 묻는다. 이반은 한 사례를 들며 아이를 죽인 악인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아이 뿐이며 그의 부모조차도 그로 인해 자신이 받은 무한한 고통에 대해서는 죄인을 용서할 수 있지만 아이에 대해서는 그 죄인을 용서할 수 없고 그건 신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또 그는 신이 가져온다고 약속한 그 이상적인 세계를 위해서 지금 이 순간에 조차도 수많은 피가 흘려지고 있고, 무한한 고통이 지불되고 있는데 신은 그것을 방치하고, 그 고통이 그저 구원을 위한 값으로 지불되어야 한다면 자신은 ‘그저 신에게 그 입장권을 극히 정중하게 반납’하겠다고 말한다. 사실 유물론이 말하는 불가지론과 지금 이반이 주장하는 공리주의적 회의주의는 매우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주장이 옳지 못하다고 적어도 지금은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논리에게는 윤리나 도덕, 종교(그 외 여러 말할 수 없는 것들)를 비판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논리는 윤리가 옳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그것이 거짓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윤리를 의심하려면 그 자신을 먼저 의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신비스러운 것들은 철저한 믿음 위에 세워지며 이 믿음은 그것의 논리적 타당성과 관계 없이 받아들여진다. 그렇다면 논리는 이들의 주춧돌이 되는 믿음을 회의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고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믿음의 근간에 대해 논리가 물을 때 이것은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논리도 믿음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시로 과학은 인식을 철저히 믿으며, 수학은 공리를, 철학은 사고와 주체를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논리는 스스로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물었던 것과 정확히 같은 것을 물어야 하고, 그때 논리는 물론 자기 모순에 빠진다. 그렇다면 논리학적 질문은 절대성을 잃지 않을 수 없는데 그렇기에 논리의 윤리에 대한 회의도 무의미해지지 진다. 어쨌거나 모든 것은 믿음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 더 타당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내 두 손의 존재와 목성의 존재 중 무엇이 더 타당한지는 선분 속 점의 개수와 자연수의 개수를 비교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무의미하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신과 도덕, 아름다움의 권위의 타당성도 내 손의 타당성과 비교할 수 없다). 그리고 오직 논리는 이 자기 모순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윤리에 대해 어떠한 회의도 제기할 권리를 논리적으로는 물론 윤리적으로도 가지지 못한다.
이후 앞서 말한 이반의 공리주의적인 주장에 대해 알료샤는 그렇지 않다고, 오로지 사람들을 위해 죽으려고 태어나 그렇게 무고한 피를 흘린 예수는 모두를 용서할 수 있다고 반론한다. 그리고 이반은 이후 자신의 서사시 대심문관을 말하며 예수가 사랑하는 방식이 옳지 않았다고 변호하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예수가 처음 나타난지 15세기 만에 다시금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다시 내려온다. 그러나 예수는 금세 대심문관이라는 당시 종교 최고 권위자에게 붙잡히고, 그는 바로 다음날 예수를 화형 시킬 것이라고 그에게 말하고는 예수와 대화를 시작한다. 대심문관은 예수는 사람들에게 기적이나 신비에 의한 구속이 아닌 진정한 자유를 선물했다고 말한다. 그는 예수가 힘의 세가지 원천인 기적, 신비, 권위를 모두 거부했으며 사람들이 어떤 것에 기대어서 살아가기 보단 자유롭게 그 자신을 따르기를 바랐었던 것이라고 예수에게 주장한다. 그러나 대심문관은 인간이라는 족속은 설령 수만명은 그 자유를 책임 맡을 강한 자들일지 몰라도 나머지 약한 수억명은 그 자유를, 그 책임을 스스로 지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천상의 빵이 아닌 지상의 빵에 무릎 꿇을 것이며 자신의 자유를 한시라도 빨리 다른 이에게 받치기를 바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대심문관은 예수에게 자신은 예수의 그 강한 수만명 대신 수억명의 약하지만 사랑하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의 자유와 죄와 책임을 모두 떠맡아 주고 그들의 양심을 권위, 신비, 기적으로 사로잡아 그들을 비로소 죄의 구속에서 벗어나게 했으며 그들에게 모든 것을 허용해 주고 그 죄를 자신이 대신 지어준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렇기에, 예수가 사람들을 그들에게는 너무 과분한 방식으로 사랑했기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덧붙여서도 안되며 그들에게 다시 자유를 가져다 주려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결말은 그다지 길지도 않고, 가장 중요한 부분이니 직접 인용하도록 하겠다.
“나는 그것을 이렇게 끝내고 싶었어. 대심문관은 입을 다물었을 때, 자신의 죄수가 그에게 무슨 대답을 해 주길 얼마 동안 기다리지. 그는 상대방의 침묵이 괴로웠어. 그는 수인이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줄곧 무슨 반박을 하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는 듯 그의 말을 조용히 꿰뚫을 듯 듣고 있는 것을 보았지. 노인은 상대방이 씁쓸하고 무서운 말이라도 좋으니 무슨 말이든 좀 해 주었으면 싶었어. 하지만 그는 갑자기 말없이 노인에게로 다가와, 아흔 살 먹은 그 핏기 없는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추는 거야. 자, 바로 이게 대답의 전부야. 노인은 몸을 부르르 떨지. 그의 입술 양 끝이 어쩐지 파르르 떨렸어. 그는 문 쪽으로 걸어가 문을 열고 그에게 말해. ‘어서 가라,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라…… 두 번 다시 오지 말란 말이다…… 절대로, 절대로!’라고. 그러고는 그를 ‘도시의 어두운 광장’으로 풀어주는 거야. 죄수는 그렇게 떠나가.”
나는 이 글을 읽으며 니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최근까지만 해도 나는 죄와 벌 속 라스콜니코프의 비범인 사상이 니체의 초인 사상과 유사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라스콜니코프가 아니며 만약 그가 죄와 벌을 읽었다면 라스콜니코프에 대해 단체의 광기라거나 위선적 도덕주의자라며 비판했을 것 같다. 처음 내가 니체의 책을 접했을 때 나는 그가 말그대로 기존의 종교와 신과 도덕의 모든 것을 둔중한 망치로 정신없이 내리치는 철학자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되돌아보니 표현이 다소 과격 했을 뿐이지 사실은 종교를 긍정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가 칼을 꽂고자 한 것은 하느님이 아닌 교황의 등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정말로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 것과는 달리 예수에 관해서 만큼은 매우 긍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리고 니체의 책을 둘러보고 사상을 둘러보면 신을 부정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을 정도로 기존의 도덕적인 죄를 비난하는데 거리낌이 없으며 이반과는 달리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라는 주장도 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는 (쾌락주의적인 현대의 관점에서) 극단적 보수주의자로 보이는데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는 쾌락주의자에 대해 영웅이 되려 했지만 실패하여 다른 용기 있는 사람들마저도 타락시키려는 악인으로 묘사하고, 관능적 쾌락을 긍정하는 자들을 순진무구함 조차 가지지 못하는 고로 완성되지도 못한 짐승이라며 매도하기도 한다. 또 선악을 넘어서에서는 우리 최후의 스토아주의자들이여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는 이 점에서 니체가 앞서 말한 서사시에서 (예수가 준) 자신의 자유를 견뎌낼 수 있는 강한 사람에 대한 긍정과 딱 서사시의 대심문관이 말한 것과 똑같이 말하는 종교(지금은 이 특징이 더 심해진 것 같다)에 대한 비판을 주장했다고 생각되었다. 그가 부정했던 것은 예수가 아닌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말하는 유물론자들과 종교는 그저 버팀목이고 죄를 사하여 주는 도구라고 말하는 성직자들(후자는 전자와 말하는 방식이 다를 뿐 본질적으로 같을 것이다)이었다. 그 점에서 그가 말한 초인은 자신의 이상을 위해 그 자신을 불사르는 스토아주의자들과 예수와 같은데, 더 나아가 그는 단순히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이상에 전념하는 ‘사상의 전사’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 즉 직접 자신의 사상을 만들고 그를 실천하는 자들이야 말로 초인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싶다. 이 점에서 나는 그가 용감히 자유를 견딜 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주장했고, 또 더 나아가 그것을 견디지 못한다는 자칭 약자들을 악인이라고 표현하며 그들에게 (실러의 표현대로) ‘눈물 흘리며 조용히 떠나가라’고 말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나는 이 점에서 나의 종교관을 조금 더 강화시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신이 논리적 참, 거짓과 관계없이 옳은 존재로서 더 나아가 옳은 것, 즉 도덕과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치 스피노자가 신이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세계라고 말했던 것처럼 마치 신을 신비스러운 것의 대명사로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도덕 명령은 이반이 말했듯 ‘오직 3차원적 공간에 대한 개념만을 지닌 인간의 머리’의 논리학으로는 증명과 반박을 해서는 안되는 절대적인 것으로서 받아들이고, 그것을 따라야 하며, 그럼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책임 맡을 수 있는 스토아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이 책은 앞의 두 문장으로도 알 수 있듯이 내 생각을 매우 많이 바꿔놓은 책이고, 또 새로운 여러 가치관을 만들 수 있게 해준 책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독후감이 상당히 책보다는 내 생각에 중점이 맞춰지고 있는데, 어쨌거나 모든 독서가 오독이라 하니 그냥 조금 특이한 오독이라고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소크라테스도 예술작품에 대해서는 창작자보다 감상하는 이가 더 많은 해석과 생각을 내놓는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럼 이제는 더 심도 깊게 가장 핵심적으로 이 책이 내게 끼친 영향을 몇몇 문장과 함께 서술하고자 한다. 이 책에서 내가 느낀 가장 중요한 점은 윤리학의 중요성과 그것의 논리학과의 관계이다. 먼저 윤리학의 중요성은 사실 비트겐슈타인과 연관하여 많이 생각해볼 수 있었는데, 그럼 먼저 여기서 근거가 될 유아주의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유아주의는 ‘세계는 나’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이론은 결국 존재하는 것은 내가 알고 느끼는 것뿐이라는 내용이다. 비상식적으로 들릴 지 모르지만 사실 매우 철저히 논증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데 왜냐하면 세계는 인식과 사고로서만 나에게 보여지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사물을 우리가 볼 때 우리에게 그 사물을 보여주는 것은 인식에 있기에 사물의 확실성은 그 자신이 아니라 인식에 있다. 그리고 인식은 결국 나의 일부이기에 세계조차도 나라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 세계의 경계에는 ‘나’라는 큰 울타리가 처지게 된다. 이때 세계에서는 감각정보가 감정보다 더 타당할 이유도 논리학이 윤리학보다 타당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이때에 윤리학의 중요성은 강화되는데 이 점은 논리 철학 논고 에서 인용하고자 한다.
행복한 자의 세계는 불행한 자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이다.
윤리학은 다른 데서 얻을 수 있는 쾌락과는 다르게 진정한 행복을 선사하는 몇 안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윤리학은 세계를 변화시킨다. 이 점에서 나는 논리 철학 논고의 또다른 문장:
6.422 “당신은 ……해야 한다”라는 형식의 윤리 법칙이 세워졌을 때 드는 최초의 생각은, “그런데 내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윤리가 통상적인 뜻에서의 상벌과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행위의 결과들에 관한 이러한 물음은 중요성이 없어야 한다. –최소한 이 결과들이 사건들이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어쨌든 그 문제 제기에는 무엇인가 올바른 것이 있음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일종의 윤리적 상벌이 존재하기는 해야 하지만, 이 상벌은 행위 자체에 놓여 있어야 한다. (그리고 상은 유쾌한 어떤 것이어야 하고, 벌은 불쾌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분명 선한 사람의 세계와 악한 사람의 세계는 다를 것이다. 그리고 그럴시 윤리학은 세계를 변화시킨다. 그리고 이때 선한 행동을 한 사람에게 쾌락이 따라오고 악인에게 고통이 따라야 할 이유는 없는데, 왜냐하면 이미 선자는 세계의 상을 받고 있고, 후자는 세계의 복수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 상벌은 이미 행위 자체에 있으며 유물론적인 무언가가 아닌 신비스러운 종류의 무언가일 것이다
다음으로 내 생각에 큰 변화를 준 것은 윤리학과 논리학의 관계인데 사실 나는 그동안 윤리학 없는 논리학을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실 윤리학이 없는 논리학은 위험한 것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둘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오토 바이닝거의 말도 조금이나마 납득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전에 과학을 좋아했고, 이후에는 진리에의 의지와 이성을 최고 가치로 생각하였다. 심지어 옛날에는 라스콜니코프가 만약 뉴턴이 자신의 이론을 발표하기 위해 수백명을 죽여야 했다면 그렇게 했어야 했다는 주장에도 어느정도 동감했었다. 그러나 그 위험성은 정말 끔찍한 것이라는 것을 지금은 생각하게 되었는데 가령 과거 죄책감도 없이 수만명을 학살한 볼셰비키즘은 신이 없는 곳에서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이반의 주장과 같은 회의주의와 함께 생겨난 것이었으며 만약 칼 세이건의 과학에 윤리학이 없었더라면 그는 푸른 점 지구 속에서 싸우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지를 말하지 않고, 차라리 그 조그만 점이 붉게 피로 뒤덮이든 그 속에 것들이 서로를 물어뜯든 아무런 일이 아니라고 냉소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것이 위험할 뿐만 아니라 확실하지도 않다는 것은 지금 돌아보면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나는 이 둘이 상호보완적인 존재라는 것을 그동안의 사고를 돌아보며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둘이 표상적으로는 달라 보일지라도 본질적으로는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물론 아까 말한 유아주의적인 세계관으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이 둘은 논리학이 친절히 집어 주듯 둘다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물론 이점에 있어선 모든 것이 그렇지만 그럼에도 둘은 믿음을 기반으로 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오랜 세월 동안 정교하게 짜였다. 뿐만 아니라 둘은 유아주의적으로 세계의 존재하는 다른 사실들에 비해 매우 중요하고, 세계 자체를 좌우하는 역할을 하는데 가령 윤리학은 앞서 말했듯 행복을 기반으로 세계를 바꾸고 논리학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듯 우리가 믿는 것을 바꾸기에, 세계 속에 존재하는 사실들 자체를 바꾸는 권한을 가지기에 세계를 바꾼다. 그리고 이점에서 윤리학과 논리학은 세계를 만들고 수정하기에 매우 중요한 두 학문일 뿐 아니라 둘이 하는 역할이 같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유아주의적인 관점에서 오토 바이닝거의 주장(윤리학과 논리학은 근본적으로 같다. 그것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일 뿐이다.)을 이해할 수 있었는데, 윤리학과 논리학, 신 등에 관한 무거운 주제는 이쯤 다루고 이제는 조금 더 가벼운 주제로 넘어가고자 한다.
내가 이 책을 읽고 가장 충격 받고, 동시에 존경스러웠던 것은 이 책이 그린 일종의 민족성이다. 이 민족성은 공간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시간적인 것인데, 그 점에서 아무래도 시대정신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내가 이런 생각을 처음하게 된 것은 드미트리 때문이었다. 앞서 간단히 설명한 내용을 보고 알 수 있겠지만 사실 총명한 인물이라기 보다는 약간은 우둔하고 특이하지만 그럼에도 선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내게 드미트리가 충격을 준 것은 이런 드미트리의 이미지와는 상반되게 알료샤에게 자신이 악인이라고 말하며 환희의 송가(실러의 시)를 외웠을 때이다(내 기억상으로는 독일어로 외웠던 것 같다, 참고로 드미트리는 러시아인이다). 이 장면을 읽었을 때 든 생각을 솔직히 말하자면 첫째로 놀랐고, 둘째로는 그 당시의 사람들에 비해 내가 얼마나 교양과 지혜가 부족할 지 실감하게 되었고, 셋째로 겨우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을 조금 더 잘 익혔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한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사실 드미트리한테는 미안하지만 당시에는 그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내가 상대적으로 그다지 지식이나 지혜의 면에서 많이 알고 있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고, 그것이 부끄러워졌다. 이 외에도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말을 할 때 시어를 자주 섞고, 독일 시에 경우 원문을 그대로 인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이쯤에서 누군가는 그것은 그저 치장이고 사치적일 뿐이고 존경의 대상일지는 의심스럽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나는 이것이 오직 현대에만 제기 될 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현대에는 언어의 가장 중요한 특성 중 하나인 예술성이 사라지고, 창조성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이것이 언어의 예술성을 실현할 뿐만 아니라 실용성에 대해서도 장점을 지닌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고차원적인 주제를 이야기할 때 불필요한 다량의 설명을 대신해 문맥 속에서 해석되어 함축적인 의미를 지니는 시어를 사용함으로서 감정과 의미를 빠르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주제에서 상당히 벗어난 듯 하다. 그럼 다시 우리의 시대정신을 논하기 위해 이 책에서 드미트리의 재판 속에서 검사가 한 말을 인용해 보고자 한다: 배심원 여러분, 저들에겐 햄릿들이 있지만 우리에겐 아직은, 일단은 카라마조프들이 있을 뿐입니다! 그는 재판장에서 드미트리로 시작해서 그의 주변인물을 차차 다루고 더 나아가 러시아 정신을 논하며 배심원에게 호소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저들(아마 영국이나 프랑스 등의 당시 선진적인 유럽국)에겐 햄릿들이 있지만 당시 러시아에는 카라마조프들이 있다고 호소한다(솔직히 현대의 러시아는 곰이 대표하는게 더 바람직할지 사람이 대표하는게 더 바람직할지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다 문득 그렇다면 현재 우리에게는 무엇이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사실 민족성을 논하는데 그 대상을 현대 우리나라로 한정 짓는 것은 벌써 세계화된 시대에 맞지 않는 해석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범위를 넓혀 현재 세계에는 어떤 시대적 정신이 깃들어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굳이 특정인물을 꼽자면 오스카 와일드를 고르고 싶다. 물론 그의 작품을 비판하고 싶은 마음도 그에 대해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그나마 비슷하다고 생각 되었다(물론 오스카 와일드가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망각해선 안된다). 왜냐하면 현대는 오스카 와일드가 그랬던 것만큼이나 오만하고 도덕을 거부하며 쾌락주의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차이점도 있는데 오스카 와일드와 달리 현재의 시대정신은 근거가 없다는 점에서 자격지심에 더 가깝고, 도덕을 오스카 와일드는 아름다움과 예술의 이름으로 거절했다면 현대는 유물론과 이성의 이름으로 거부한다. 지금은 모든 것을 인정한다는 가면을 쓰고는 모두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생각하는, 그러나 사실은 모든 것을 인정하기보다는 다른 모든 가치는 부수고자 하는, 말하자면 가장 볼셰비키적인 시대이다. 이점에서 지금의 시대는 정말이지 니체가 말한 쾌락주의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는데 본질적인 면에서 같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우월하지 않다는 이유로 모든 위대한 가치들을 평가절하하고 끌어내리고자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행위는 처음에는 이성적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일어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는 너무 많은 가치를 훼손한 나머지 시대가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은 돈이나 쾌락 같은 수단적 가치가 되어버려 모두가 목적을 찾지만 아무도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는 무한히 반복되는 챗바퀴를 돌리듯 무의미한 에너지 낭비만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자신의 열등성을 깨달은 시대정신은 마치 위대한 정신의 유산과는 공존할 수 없다는 듯 더 필사적으로, 더 격하게 모든 위대한 가치를 향해 무의미한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마치 나중에는 신의 사랑조차도 에로스, 그 중에서도 가장 관능적이고 저속한 사랑이라고 말할 기세이다. 그리고 이런 시대 정신의 오만함은 어린아이적인 오만함인데, 그러니까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듯 모든 것을 안다고 외치는 젊은이의 오만함이다. 이는 문화를 필두로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물론 지혜의 전달의 역할을 하던 문화가 현대에는 시대적 영향으로 지혜롭지 못한 자들에게 맡겨지며 오직 카타르시스적 쾌락을 제공하는 역할만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대의 시대 정신은 모든 것을 안다고 과학의 이름으로, 이성(사실 감각에 더 가깝겠지만)의 이름으로 선언한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는 정말로 많은 것을 알지만 이것이 알지 못하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 꼽자면 이 정신이 아는 것은 대부분이 가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다소 횡설수설로 말한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저들에겐 햄릿이 있었고 또 이들에겐 단지 카라마조프가 있었지만 우리에겐 오직 오스카 와일드와 비슷한 종류의 지혜롭지 못한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의 세계 정신이 바뀌지 않는다면 물리적 형식으로든 정신적 형식으로든 그 운명 또한 오스카 와일드와 같을 것이라는 것만큼은 나는 확신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주제는 이쯤 다루고 마지막으로 조시마 장로의 말을 인용하고 다음 주제로 넘어가고자 한다.
그들에게는 과학이 있지만, 과학 속에는 오직 감각에 종속된 것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정신적인 세계, 인간 존재의 드높은 반쪽은 완전히 거부되어 증오마저 깃든 어떤 의기양양함과 함께 추방되어 버렸습니다. 세계는 자유를 선언했지만, 특히 최근에 더더욱 그러했지만, 그들의 이 자유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오로지 노예적인 굴종과 자살뿐입니다!
이 책에서는 (이반의 환영인지 실존하는지는 설명되지 않지만) 악마가 나와서 이반과 대화를 하는 내용이 있다. 먼저 몇 마디 인용해보고자 한다.
내가 결코 헤아릴 재간이 없는 저기 어떤 태곳적 소명에 의해서 나는 ‘부정’을 할 운명을 타고났지만, 사실 나는 진정으로 착한 사람이라서 부정에는 전혀 소질이 없다네. 안 돼, 어서 부정해, 부정이 없으면 비평도 없고 ‘비평 분과’가 없다면 무슨 잡지라고 할 수 있겠나? 비평이 없으면 그저 ‘호산나’밖에 없을 테지. 하지만 삶을 위해선 ‘호산나’ 하나만으론 부족해, 이 ‘호산나’는 회의의 도가니를 거쳐 나오지 않으면 안돼
바로, 한명이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 수천명을 파멸시키는 것이지
또 비트겐슈타인의 책, 문화와 가치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비극은 언제나 다음과 같은 말로써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하지 않았더라면, 전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나는 이 책에서 저런 부분을 읽고 최근에 비트겐슈타인의 책에서 위에 인용한 글귀를 접하며 사실 문명은 오직 비극 위에서만 있을 수 있고, 필연적으로 비극적으로 흘러갈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단순히 말장난이지만) 비극이 만일 …하지 않았더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로 시작된다면 일어난 모든 일은 비극의 시작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만약 인류가 불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많은 살육은 없었을 텐데’, ‘만약 문명이 화약을 발명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유럽인이 그렇게 많은 항해술을 발전시키지 않았더라면…’, ‘만약 인류가 증기기관을 발명하진 않았더라면…’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말장난에 불과하여 단순히 인용문의 비극이라는 단어를 희극으로 교체하는 단순한 농담으로도 반박할 수 있지만, 이것이 궤변이라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나는 비극성에 대해 혹시 문명에 있어서의 엔트로피 개념으로서 작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마치 엔트로피가 우주를 작동하게 하고, 우주의 작동에 따라 증가하기만 하듯 비극성은 문명이 그 위에서 세워지게 하고, 또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그 총량이 증가하기만 하진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 책 속 악마가 세계의 유지와 존속을 위해서 존재하듯 말이다. 나는 이런 비극성에 대한 개념을 여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먼저 시대가 시대인 만큼 공리주의적 해석을 적용해 보겠다. 먼저 이 해석에서 고통은 비극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고통은 그것이 아무리 작더라도 쾌락으로 매워질 수 없다. 왜냐하면 고통이 단순히 음수(-)의 정신상태인 것이 아니고 쾌락이 단순히 양수(+)의 정신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쾌락과 달리 고통은 상처를 남기고, 고통이 쾌락보다 더 강하다. 그리고 만약 인구가 증가한다면 그 고통의 총량도 필연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문명화에 따른 노예제의 생성과 사회로 인한 비자유 등의 변수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고통이 필연적으로 증가하고, 또 결국 그 비극성이 증가하지 않겠는가? 이제 단순한 쾌고지수 계산은 그만두고 정신적인 면을 살펴보자. 과연 인류의 정신이 나아진 적이 있었을까? 물론 인류가 문명화됨에 따라 이성도 함께 발달하긴 하였다. 이성은 분명 좋은 것이고 그것을 올바르게 활용함에 따라 인류는 짐승을 넘어서고 더 이상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순수함마저도 잃어버린 비완성적 짐승으로서 금수를 올려다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의 정신은 과연 구석기의 바보 이반에서 문명화됨에 따라 더 발전했을까? 고대 그리스나 르네상스의 유럽과 같은 지역적인 면에서의 예외는 있을 수 있겠지만 과연 인류의 정신적 면에서도 그 총량에서만큼은 더 비극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현대의 법이 과거의 도덕보다 낫지 않았고, 유물론은 자신이 믿음임을 인정했던 종교와는 달리 약간은 오만해보이기 때문이다. 또 가장 일상적인 사례로 한 아이의 초콜릿을 위해 수명의 아이가 고통을 겪어야 한다면 이는 비극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사실 쓰다보니 다소 염세주의적으로 읽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크라테스도 아름답게 행하면 아름답게 되고, 추하게 행하면 추한 것이 된다니 이 주제를 만약 이대로 마친다면 이는 염세적이게 행해진 추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조금 더 긍정적으로 해석하도록 노력해보자. 가령 이는 이 책 속 조시마 장로의 말을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조시마 장로는 책에서 이런 문장을 말한다: 스스로를 사람들의 이 모든 죄에 대해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만들도록 하라.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비극성에 대한 이론을 통해 이 문장을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가장 단순한 행동조차도 마치 나비효과처럼 어떤 종류이든 비극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 비극은 세계로 분산되어 우리는 모두에게 또 모두가 우리에게 가장 작은 정도일지라도 또 가장 간접적일지라도 비극을 선사했을 것이며 그렇기에 모두에 대하여 책임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컴퓨터를 이용하는 이 행위에 의해 이미 발생한 이산화탄소 수천억에게 단 수 킬로그램이라도 더했다면 나는 앞으로 발생할 모든 기후 난민과 지구 온난화의 피해자들에 대해 책임이 있을 것이다. 이렇듯 다소 억지스러워 보이고 전혀 의미 없는 양처럼 보일지라도 분명 이렇게 만들어낸 비극의 총량은 그것을 우리가 망각하고 있다 뿐이지 어쩌면 살인 보다도, 아니면 셰익스피어의 대비극보다도 더 비극적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만약 그 점에서 계산할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비극의 창시자로서 책임을 기꺼이 진다면 우리는 그때에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고, 떳떳해지며, 억울함이나 분노를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우리는 분명 이 세계라는 비극 속의 인물이고, 또 피해자일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우리가 그 속에 인물이라는 이유로 우리에겐 분명 그 비극 전체에 대한 책임이 있지 않을까?
형제들이여, 사람들의 죄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가 지은 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사랑할지니, 이는 하느님의 사랑과 최대한 닮은 사랑이야말로 지상의 사랑 중 으뜸인 까닭이다.
이는 조시마 장로가 한말로 사실 내가 이 말을 인용한 이유는 이 책의 핵심 용어의 하나인 사랑에 대해서는 읽으며 생각이 거의 없었는데 최근에야 이 인용문을 통해 잠깐 생각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사랑에도 이데아가 있다면 이데아적인 사랑은 무엇일까? 물론 신의 사랑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사랑 중 이데아적 그것과 가장 흡사한 가장 완성적인 사랑은 무엇일까? 먼저 이데아적 사랑의 원인은 신이 인간을 창조했기 때문일 것이며, 그래서 그 창조물에 대해 무한한 사랑을 느끼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가장 비슷한 창조물에 대한 사랑은 무엇일까? 나는 이것이 아가페적 사랑과 에로스적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설명을 약간 하자면 먼저 아가페는 부모가 자녀에게 느끼는 사랑과 같은 것으로 조건 없이 베푸는 사랑이다. 다음으로 에로스는 통상적인 의미에서는 ‘남녀 간의 정열적 사랑‘을 의미하지만 나는 플라톤의 단편 향연의 논리를 빌려 그것은 아프로디테적인 세속적 사랑이고, 에로스신적 사랑은 정신적 사랑, 가령 창작열, 진리에의 의지로 대표되는 사랑을 말하고 싶다. 이 점에서 나는 인간이 보다 신적이고 말하자면 니체의 초인처럼 되려면 이 두가지 사랑 중 하나를 행할 때만이 보다 초월적일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쓰고 보니 사랑을 이런 식으로 마치 순위 매기듯이 말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에 속하는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느껴져 모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것은 ‘말하기’가 아니라 ‘보여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비트겐슈타인의 삶과 관련하여 다시 한번 이 주제에 대해 논해보고 싶다. 그러기 전에 먼저 또 조시마 장로의 말을 인용해보고자 한다.
몽상적인 사랑은 어서 빨리 만족할 만한 위업을 달성하여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우러러봐 주길 갈망합니다. 그러다 보면 정말로, 그렇게 모든 이들의 시선을 받고 칭찬을 받기 위해서 목숨조차도 내놓을 것이지만, 다만 그것이 오래 지속되지 않고 마치 연극 무대에서처럼 어서 빨리 성사된다는 조건으로만 말이죠. 하지만 실천적인 사랑, 그것은 노동이자 인내이며, 어떤 이들에게는 말하자면 완전히 학문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이 책에는 지금 인용한 대목과 같이 사랑에 대해 논하는 대목이 자주 있으며 또 매우 깊이 있고, 진정성 있게 다뤄진다. 그리고 이 책의 거의 모든 인물이 사랑을 외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책에서는 사랑의 다양한 형태가 그려진다. 그러나 이런 사랑을 호소하는 인물들은 대부분이 비완성적인 사랑의 형태, 말하자면 몽상적인 사랑을 행하고, 그렇지 않고 진정한 종류의 사랑, 그러니까 실천적인 사랑을 행하는 인물은 고작 해야 조시마 장로와 알료샤 둘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잠깐 주제와 관련하여 이 책의 인물들이 어떻게 말하고, 또 행하는지 잠깐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드미트리는 언제나 자신이 그루셴카를 열렬히 사랑한다고 말하며 그녀를 위해서 충동적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돈을 써버리기도 하고, 표도르 파블로비치를 자신이 죽이겠다고 외치고 다니기도 한다. 그리고 이반은 다소 볼셰비키적으로 비록 신은 없지만, 그렇기에 모두를 더더욱 사랑한다는 식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모두를 향해 냉소할 뿐이었다. 또 표도르는 입으로는 사랑을 열중하게 호소하지만 그가 추구한 것은 언제나 쾌락이고, 순간적 허황이었다. 그 외에도 카체리나는 의무감에서 마치 자신에게 부여된 일과 같이 드미트리를 사랑했고(비록 진정한 것이었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루셴카는 후반으로 가며 생각을 바꾸긴 했지만, 초반부에는 오직 속물적인 이해타산 계산하에서만 사랑을 생각한다. 그리고 예외적 인물로 스메르쟈코프는 태어나서부터 버려져서 단 한 명의 사랑도 받지 못했으며 그래서인지 스메르쟈코프만은 작중에서 단 한번도 사랑을 호소하지 않는다. 그는 이반과 비슷한 사상을 가지지만 이반 이상으로 냉소적이다. 나는 이 책이 이런 여러 대목과 인물들을 통해 사랑에 대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크게 2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첫번째는 앞서 말한 실천적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고, 두번째는 무언가 톨스토이에게 더 잘 어울릴 법한 종류의 것, 그러니까 사랑의 가치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첫번째는 실천적 사랑, 가장 완성된 종류의 사랑에 관한 것이다. 보다시피 이 책의 인물들은 대다수가 각자의 불완전한 사랑을 보여준다. 물론 그들의 사랑은 조시마 장로가 말하는 실천적 사랑과는 거리가 먼 종류의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누군가는 인용문에서의 노동이나 인내와 같은, 그러니까 어쩌면 ‘실천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카체리나가 의무적 사랑의 불완전함을 설명할 수 없고, 이반의 볼셰비키적 그것이 그릇되었음을 정확히 서술하는데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만약 내게 이 ‘실천성’에 덧붙여 한가지 성질을 더 제시할 권리가 있다면 나는 ‘진정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이 성질에 대해 나는 오만함의 부정으로 존경을 제시하고 싶은데 왜냐하면 자신을 충분히 낮출 수 없었다는 것이 카체리나의 사랑을 의무감으로 바람직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이반의 사랑은 신을 넘어섰다는 데서 나오는 오만함으로 인해 옳지 못한 방향을 향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나는 이 책의 메시지가 가장 이상적인 사랑을 말한다고 생각하고, 그 조건으로서 ‘실천성’과 ‘진정성’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두번째, 즉 톨스토이적인 메시지는 그의 단편 제목이기도 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답이다. 이 질문에 대한 톨스토이의 답은 책에서 직접 제시되어 있는데, 그는 사람은 오직 사랑에 의해서 산다고 말한다. 이 책에 담긴 메시지도 톨스토이의 의견과 같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여기서도 사람은 사랑에 의해서 살 수 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살 수 있다’는 비유적으로 살 권리를 뜻하는 것이 아닌 살 능력을 뜻하는 것인데 이는 책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이 책 속 인물들은 앞에서도 여러번 얘기했지만 거의 모두가 그 종류가 어떻든, 또 완전하든 불완전하든 사랑을 외치고 또 그것을 행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그렇지 않은 스메르쟈코프가 있는데 자세히 묘사되지는 않았지만 그가 이 책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또 가장 고통 받은 인물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또 그는 삶 뿐만 아니라 죽음마저도 매우 안타깝다. 이 점에서 나는 도스토옙스키가 스메르쟈코프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은 사랑 없이는 파멸할 수 밖에 없음을 말했다고 생각한다. 이점에서 나는 이반이 비록 아직 하느님의 세상이 도래하지 않았고, 수많은 고통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말했음에도 이 땅이 어쩌면 언제나 신의 섭리가 철저히 적용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실러의 말대로) ‘비록 단 한 사람의 마음이라도 이 땅 위의 그를 믿는 사람’은 이 땅 위에 당당히 서서 환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눈물 흘리며 조용히 떠나’야 하고, 또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 즉 드미트리의 재판에서는 드미트리의 살인 혐의에 관한 대화 뿐 아니라 수많은 주장과 호소문이 오간다. 그 중 검사의 주장 중 나는 왜인지 그의 ‘카라마조프적’ 이라는 용어와 그 정의에 마음이 갔다. 그는 카라마조프적인 것에 대해 두개의 심연을 동시에 관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가장 고귀한 종류의 심연과 가장 저열한 종류의 심연을 관조한다는 것이다. 물론 약간은 비꼬는 듯한 말이긴 했지만 그는 이 말로 드미트리를 표현한다.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는지와는 관계없이 이 표현은 드미트리라는 인물을 가장 잘 묘사한다. 왜냐하면 드미트리는 어떨 때는 누구보다 환희에 차서 원수를 위해서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듯이 행동하다가, 또 어떨 때는 겉잡을 수 없는 증오에 사로잡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외치고, 싸움을 일삼기도 한다. 이런 그에 대한 형용사로 카라마조프적이라는 표현은 정말이지 완벽히 적합하다. 그리고 검사는 여기서 더 나아가 드미트리 뿐 아니라 그 재판장의 모든 사람들에게, 또 러시아 전체에 대해 그들의 정신이 모두 카라마조프적이라고 외친다. 그러나 과연 19세기 러시아만 그랬을까? 사실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카라마조프적이지 않을까? 나는 그것이 단지 19세기 러시아의 정신이었을 뿐 아니라 우리 인류 전체의 정신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는 단지 그것이 드미트리처럼 극단적 형태가 아니었다 뿐이지 모두 고귀한 심연과 저열한 심연을 필여적으로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매우 뻔한 소리일 것인데, 왜냐하면 이미 누군가는 초자아와 이드의 대비로, 또 누군가는 이성과 육신의 대비로 인간의 정신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인류 역사상 가장 비열한 사람조차도 최소한의 양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가장 총명한 사람조차도 이성을 육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점에서 ‘거짓에서 진실이, 기만에의 의지에서 진리에의 의지가, 이기심에서 사심 없는 행위가, 정욕에서 현인의 순수하고 날빛 같은 눈빛’이 생겨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말한 니체의 말은 옳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잘못 표기한 것이 있다면 하나의 원인에서 나오는 두개의 결과를 마치 원인과 결과처럼 나열했다는 점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말한 진실, 진리에의 의지, 사심 없는 행위, 현인의 눈빛은 거짓과 기만, 이기심과 정욕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오직 인간의 카라마조프적인 정신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가 앙드레 지드는 이 책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고 한다.
렘브란트처럼 이야기를 그려 나가는 도스토옙스키의 초상화는 더할 나위 없이 강렬하며 또한 완벽하다.
나는 이 책의 특별함이 앙드레 지드가 지적한 바로 그 지점, 즉 세계를 그림처럼 모사한다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그림의 종류는 그가 말했듯 초상화에 가까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에는 수많은 심도 깊은 상징들이 그려져 있지만 어쨌든 그 중심에는 인물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은 정말이지 인간을 인간으로서 세밀하게, 그러면서도 그 인물이 책이라는 대상에 너무 얽메이지 않고 독립적이게 그려낸다. 사실 많은 책들이 인물을 그릴 때 자주 그 인물은 마치 책의 내용상의 전개나 메시지를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가령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어떤 인물을 악인으로 정하고, 그자에 대한 부정적인 서술을 하거나 그에게 부정적인 수식어를 붙이기도 하며 그 인물의 사상이 틀렸음을 어떤 식으로든 암시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만큼은 모든 인물이 그 자체로 목적으로서 그려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마치 진짜 인간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 이 책은 비판의 대상으로 보이는 이반의 사상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그리는 느낌보다는 (특히 이반의 주장에서는) 정말로 도스토옙스키 자신이 이반의 신념을 가졌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상세하고, 또 매우 철학적으로 논증한다. 이 책에는 그렇다 할 악인도 없고, 대신 각자의 입장이 있다. 설령 이 책에 악인에 가까운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를 증오하기보다는 연민할 수 밖에 없게 이 책을 그린다. 이렇듯 이 책은 인물을 목적으로서 인간으로서 모사한다. 또,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이 책은 카라마조프적이다. 누군가는 변덕스럽다고 말할 수도, 또 누군가는 지나치게 입체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카라마조프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마치 우리의 카라마조프적인 정신이 그렇듯 이 책은 변덕스럽고, 입체적이며 근본적으로 도무지 공존할 수 없어 보이는 것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이반에겐 볼셰비키즘과 신이, 드미트리에겐 욕정과 진실된 사랑이, 스메르쟈코프에겐 신이 된 듯한 자만심과 저주스러운 죄책감이 공존했고, 무엇보다도 도스토옙스키 자신에게도 책을 쓸 당시 삶과 죽음이 공존했다. 이렇듯 이 책은 작가 자신부터 인물 하나하나까지 카라마조프적이며 인간 정신의 극단적 표현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책이 인간의 정신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카라마조프적인 오페라’ 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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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가장 현대적인 시선을 가진 어떤 지식인, 그러니까 현대의 유물론적 지식에 자신의 최고의 열의를 다하느라 지혜와 도덕에게는 냉소 밖에 남겨놓지 않은 지극히 현대적인 지식인에게 ‘정신과 육체’에 대해 물으면 무어라 답할까요? 아마 그는 냉소적으로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정신은 실존하지도, 가치 있지도 않으며 전적으로 불가지한 것에 대한 맹목적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 혹 그가 최소한 정신이라는 단어를 인정한다면 이렇게 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신은 호르몬이나 신경과 같은 육체적 작용의 조화로 만들어지는 실존하는 현상에 지나지 않으며 육체와 구분되거나 우월할 수 없다” 그리고 저는 이번 시간에 이 가장 현대적이라 할 수 있는 오만한 유물론(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여기서 오만함은 유물론 일반에 대한 호칭이 아닌 대중의 것이 되어 오만해진 유물론을 말한 것임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에 반론하는 형식으로 정신과 육체에 대해 분석하고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유물론이 정신과 육체에 대해 어떻게 주장하는지 간단히 나마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미 앞에서 설명했다시피 유물론은 현대에 이르러 ‘정신의 패배’를 선언했다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정신을 단지 미신적인 영역으로 치부하고 육체의 객관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프로이트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 정신의 권위는 근현대에 이르러 세번의 타격을 받았다고 하는데, 우주론적 타격, 생물학적 타격, 심리학적 타격이 그것입니다. 먼저 우주론적 타격은 코페로니쿠스가 지구가 실은 우주의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서 이루어진 인간의 물리적 권위에 관한 타격이고, 생물학적 타격은 다윈이 인간이 단지 짐승으로부터 진화했다는 것을 밝힘으로서 인간과 정신의 특별성이 부정된 것을 뜻하며 세번째 타격은 프로이트가 정신이 실은 무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밝혀내며 정신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며 생긴 타격입니다. 이렇듯 근현대의 회의주의와 유물론은 과학을 발판으로 정신의 권위에 대한 부정을 당연시하고 있으며 육체를 우상으로 받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정신과 육체에 대한 유물론의 접근은 어떤 오류를 지니고 있을까요? 저는 그들의 이런 접근이 정신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부터 발생하는 모순이라고 주장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신에 대해서 오직 자신들의 방식으로, 즉 현상계 혹은 물질계라고 불릴 수 있는 세계의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그들은 신의 존재를 논하는 것은 유니콘의 존재를 논하는 것만큼이나 불가지하고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결국 그 근거는 ‘신의 존재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의 질량을 잴 수 없기 때문이다' 정도의 타당성 이상을 지니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그들은 오만하게도 (과학적 의미에서) 실존하는 우주 이상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결국 그 우주에 대한 모든 이론과 그 기초가 모두 실존하지 않는 개념과 기호들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며 결국 정신에게도 그들의 실존의 잣대를 대는 것입니다. 그럼 우
- Ted
- 2025-07-08
만일 당신이 어떤 한 문화 전체의 서사시적 저술을 보고자 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이 문화의 가장 위대한 인물들의 작품들 속에서, 그러니까 이 문화의 종말이 단지 예견될 수 있었을 뿐인 시대에서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나중에는 그것을 기술할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이는 비트겐슈타인이 남긴 문구이다. 이를 인용한 까닭은 1900년대 당시의 예술이 이러한 가치의 종말에 대한 예언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2월 말 무렵 서울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전시한 그림 전인 ‘비엔나 1900’을 볼 수 있었다. 이 그림전은 1800년대 후반~1900년대 초반에 활동하던 빈 분리파 예술가들의 작품을 주로 다룬 전시였다. 앞으로 서술하겠지만 나는 이 전시를 조금은 분석적으로 바라보며 빈 분리파의 화가들이 말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인지,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의 ‘예언’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유행했던 미술 사조에는 인상주의, 큐비즘 등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로 활동한 화가들로는 이 전시의 중심 주제인 빈 분리파도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다양하고, 통일성이 없어 보이는 미술은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나는 그들의 공통점이 그 통일성을 타파한다는점 자체에 있다고 생각한다. 인상주의는 세계의 단순한 묘사에서 예술가의 눈에 비친 세계로, 큐비즘은 표상적인 사물에서 사물의 본질로, 빈 분리파는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기존의 예술에서 추한 것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예술로의 변화를 꾀하였다. 가히 그들의 그림은 혁명적이며 기존의 화풍에서 탈피하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그들의 혁명은 프랑스 대혁명이나 르네상스의 문화혁명과는 달리 역동적이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그들의 혁명은 열정이기 보다는 체념이며 환희가 아니라 차라리 심연의 고뇌이다. 이러한 점에서 내게는 이런 미술의 변화가 기술에게 그 가치를 위협받는 예술의 처절한 노력이자 앞서 인용문에서의 ‘종말에 대한 예언’으로 느껴졌다. 먼저 당시 미술 사조와 특징을 어렴풋이나마 분석해보고자 한다. 인상주의는 절대적인 세계의 사물 대신 상대적인 인식된 사물을 말한다. 사물은 빛과 보는 각도 등 여러 요인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상주의는 어차피 그것이 상대적이라면 눈에 포착된 바로 그 순간에 그리자는 발상에서 시작되었다. 한편 입체주의, 즉 큐비즘은 그 시작을 기술의 발달에 둔다. 왜냐하면 큐비즘은 그림의 사실 묘사의 기능은 발전된 기술의 산물인 카메라와 같은 기계가 더 잘 수행하므로 미술은 다른 목적, 즉 예술가의 자기 표현과 사물의 본질 파악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두 미술 사조가 예술가 자신의 눈에 비친 사물의 모습을 그리고자 했다는 점에서 예술가가 주체적인 실존자로서 세상의 복제품을 만드는데 만족하지 않고, 그림을 통해 세상에 대해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고자 한 실존주의적 철학이 담겨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게 되었다. 꼭 미술 사조가 아니더라도 당시의 유명한 미술가
- Ted
- 2025-04-08
이 책의 서문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에겐 여기서 전달된 사고들의 진리성은 불가침적이며 결정적이라고 보인다. 여기서 그의 주장은 지금껏 과학, 철학, 수학, 예술 등에서 알고자 했던 그 본질적 진리를 그 자신이 찾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의 작품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고, 지금도 내가 이 책을 읽고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에 관해서는 결코 확신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나는 다만(그가 정말로 그 문제들의 근본적 답을 찾았는지와는 관계없이) 그가 이런 진리를 찾는데 어쨌거나 철학을 사용했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해 보인다. 왜냐하면 지금껏 인류가 제시한 세계 해석 방식으로서의 거의 모든 학문들은 그 시작을 철학에 두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과학은 철학의 유물론적이고 경험론적인 한 분야가 분리된 것이고 심리학과 인문학은 최근에야 철학에서 분리되었으며 전혀 관계 없어 보이는 의학, 역사학 등도 고대에 철학에서 분리되었거나 적어도 고대 철학자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이 점에서 철학은 모든 학문의 시점이며 세계 해석 방식의 시초였다. 그리고 이후 많은 학문으로 나뉘어 지긴 했지만 자신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답이 다시금 철학적으로 발견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나는 이점에서 그의 주장이 진리에 대한 답이 충분히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비트겐슈타인은 머리말에서 아마 이 책 속에 표현된 사고들을-또는 어쨌든 비슷한 사고들을-스스로 이미 언젠가 해본 사람만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이 책은 그러므로 교과서가 아니다.-이 책의 목적은 이 책을 읽고 이해하는 어떤 한 사람에게 즐거움을 준다면 달성될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전에 그가 했던 사고들을 해본 적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도대체 하나의 문장도 그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다만 그러한 생각을 전에 해본 적이 없어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쨌든 그의 문장에 대해서 주관적으로 생각은 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내가 이 책을 읽으며 해본 생각들을 적어보고자 한다.이 책의 두번째 문장 1.1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 나는 이것이 세계가 절대적이지 않고 오직 인식 가능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그가 사용한 사물은 말하자면 물리적이고 실존하며 우리가 건드릴 수 없는 절대적인 물질이며, 사실은 그 절대적으로 ‘보이는’ 사물을 인식하여 사고되고 정의된 사물이며 상대적이고 인식에 의한 것이다. 만약 세계가 절대적이라면 우리의 인식(여기서 인식은 사고를 포함한 모든 세계 해석 방식이라고 할 때)은 그저 절대적인 세계를 옆에서 관망하는 것 이상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세계가 인식 가능한 세계로 한정될 때 인식은 세계에 앞서며 세계가 더 거대하거나 위대한 의미를 지니지 않으며 인식의 창조물일 수 있고, 설령 그것이 절대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우연이며 그 정당성은 또한 인식에 기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세계가 후자의 세계라는 것은 분명하다.
- Ted
- 202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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