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의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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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5-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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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적인 제목이다. 그러나 내용을 크게 왜곡시키지는 않는다고 믿는다. 그저 이러한 논의가 일방적 주장에 묻혀 버렸을 뿐이지 역사적으로 근거를 찾으려면 어렵지 않다. 멀리보면 과거 로마 때부터 늙어서 자살을 택하는 건 미덕으로 여겨졌고, 가까이보면 일본이나, 우리나라에서도 자살을 구분하거나 특정한 형태의 자살에 대해(그러니까 충심에 의한 자결이라거나)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있었다. 일본은 애초에 할복이 보편적이었던 건 두말 할 것도 없다. 그러나 기독교 사회에선 어째선지 굉장히 강하게 배쳑되었다. 희한한 점은 복음서의 어떤 곳을 찾아봐도 예수가 자살을 언급한 적이 없고 다만 갸롯 유다가 자살한 것만 기록되었을 뿐이다. 자살이 죄악시 된건 역사가 깊지만, 기독교의 일방적 해석에 가깝다. 그리하여 자살은 생명 경시와 거의 동일하게 취급되었다. 신의 선물을 어찌 인간이 거절하고 살인을 저지르겠는가? 지금 스스로를 그리스도가 말한 교회라고 천명하는 사람들의 주장의 모순을 하나 하나 지적할 수도 있겠으나, 그다지 생산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교회들은 쇠약해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굳이 깊이 다루지 않겠다.
역사적으로 자살은 사회의 폭력에 의한 사회의 손실이라고 보았다. 30대 이하 세대의 제 1 사망원인이 자살이기 때문에 그런 점이 굳이 부각되는 듯 하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본다면, 십만명 중 일년에 수십명 죽는 것에 불과하다. 그냥 유족들이 힘들 뿐이지, 사회의 생산력에는 크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 사회의 생산력에 진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우울증이나, 그 주제는 사실 사람들의 관심도 없고 말하고자 하는 바도 아니기 때문에 건너뛰겠다. 오히려 젊은 세대의 자살보다는 노인 자살이 더욱 관련이 있을 것 같다. 노인의 우울증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노인층은 그냥 건강보험과 국민연금의 수혜만 계속 받는 세대인 줄 아는 경우도 물론 있겠으나, 기억하자, 전태일이 살아있었다면 지금 80을 바라보는 나이였을 거라는 것이다. 박정희 때에 모든 착취와 고통을 감내해가며(그들이 그것 때문에 정신장애를 얻었을 수도 있다) 박정희의 이름 아래 가려진 그 세대가 이 나라를 지어낸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희생했음에도 돌아오는 것은 월급이 떼인다는 젊은이들의 불만 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어쩌면 그들 탓 아닌가? 그들은 이 사회를 더 낫게 만들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에게 과제를 남겨놓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 그들에게 그들이 자연사할 때까지 우리가 그들에 대해서 보장할 수 있는 바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모두가 서민인 시대다. 모두가 스스로 약자이길 바라고, 모두가 더 약한 약자가 된 사람들을 질투하는 시대다. 우리가 뭔가를 공경하니 어쩌니 하기에는 당장에 우리의 시스템이 너무나 갑작스러운 이슈로 무너져버릴 것을 걱정해야한다(당장에 무역을 못하면 우리나라는 망한다. 불행히도 가장 큰 무역 파트너 둘이 싸우고 있음과 동시에, 둘 다 우리를 좋게보지 않고, 어느정도 굴종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피해의식과 불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남긴 것을 오로지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 볼 순 없고, 그저 그들은 그들이 살다 간 곳을 우리에게 남겼으며 앞으로 고통속에서 죽을 것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그들에게 자연사나 사고사를 권할 염치가 있는가? 노인 빈곤율은 나이가 들수록 높아지고, 자살을 결정할 능력과 의지도 똑같이 중대한 도전을 받으나, 그들에게 고통에서 도망칠만한 구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이 스스로의 인생을 계획하고 결정할 권리의 궁극으로서 자살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자기결정권이라 불리는 그 권리는 건강한 현대인에게 필수적이며, 거의 모든 시스템적 폭력에 대한하여 내린 인류의 결론이다. 이에 대해서는 두가지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첫번째, 인생의 종결로서의 계획된 자살은 무책임하고 방만한 자연사보다 모든 부분에서 낫다. 인류는, 특히 우리나라는 굉장히 급격한 형태로 은퇴라는 개념을 보편화하게 되었다. 우리는 노동없이 수십년의 마지막 생애를 보낼 것이라고 믿게된 것이다. 그러나 자연사를 전제로 한 은퇴 생활을 각 개인이 온전히 부담할 수 있는지는 아직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수명의 연장으로 인해 각 개인은 더 고독하고 힘겨우며 빈곤한 생활을 수십년간 이어나가게 되었다. 우리가 자살을 계획하는 사람을 말리면서 하는 레토릭은 많이 연구되고 거의 고착화 되어있는데, 그 중 절대적인 하나는 삶이 즐겁다는 것이다. 삶은 너무나도 즐겁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내가 글을 쓰며 계속 반복하는 한 가지의 개념이 있다. 삶은 그 자체로서 하이와 의존과 금단증상을 고루 갖춘 마약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노화를 극복하지 못했을 때, 그 삶이라는 마약은 더욱 악랄해진다. 굳이 현존하는 마약들과 비교하여 이해하자면 노년은 끝없는 금단증상과 계속해서 줄어드는 만족감으로 요약되지 않을까 한다. 그 마약을 끊어버릴려는 결단력은 모조리 잃어버리고 오지도 않을 인생의 하이만을 기다리다 자연사 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살에 대한 고민, 이르거나 늦거나, 명확하거나 모호하거나를 떠나서 고민 그 자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시스템적인 폭력에 대한 각 개인의 해방으로서 자살은 분명하게 논의의 가치가 있다. 이 경우에 대해서 자살이란 표면적 의미의 실천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만, 자살을 언제든지 선택할 의지와 용기 정도가 설명에 적합할 듯 하다.
인간간의 불평등과 착취는 왜 용인되는가? 나는 분명하게 말하겠다. 그것은 오로지 각 개인이 무언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각 가정의 가장이 일터로 떠나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돈을 벌어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는 그가 무언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참는것이다. 그리고 대체로 전통적인 어른에 대한 인식에서는 그 사랑의 대상은 가정으로 정해진다. 조금 더 대담한 예시를 들어보자. 왜 홍콩의 혁명은 식어버렸는가? 중국이 홍콩에서 완전한 평등과 합당한 재분배를 이루어냈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럼에도 왜 민중은 침묵하는가? 그것은 그 특정한 발언이 가져올 영향보다 자기 가족과 자기 목숨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중 가정에 대해서는 후에 성해방에 대하여 쓸 글에서 이야기 하도록 하겠다. 생명은 모든 의미와 가치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로 취급되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인간 해방의 본질적인 장애물로 작용한다. 생명경시를 옹호한다고 혹자는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자기 생명을 대상화하거나, 심지어 무기화한 인간이 어떻게 평가됬는지 찾기란 별로 어렵지 않다. 전태일이 가장 효과적인 예시이겠으나 분명 그를 고평가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기에 다른 여러 예시들을 들어보겠다. 역시나 전태일을 말하고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틱광득일 것이다. 그는 이 글에서 말하고자하는 바에 거의 완벽히 부합한다. 또한 예수나, 안중근도 스스로 형벌을 받아 죽는 것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고려하자면, 그들 또한 상술한 개념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접근이 인간해방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긍정하면서도, 여전히 그것이 생명에 대한 대상화, 무기화라는 점에서 굉장히 위험하기도 하다. 관련하여 한가지를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와하비즘 테러리스트나, 셰익스피어의 로미오는 어떻게 다른가? 최근에 든 생각이지만, 로미오로 대표되는 멋진 인간은, 사실 모든 살인의 원인이다. 무언가를 위해서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은 자신을 죽이는 것보다 훨씬 더 쉽게 죽일 수 있다. 이는 앞으로 차차 고민하고 또 관련하여 더 써보도록 하겠다. 그러나 이는 자살에 대한 실험적인 접근이므로 자살 자체가 본질적으로 위험한 것이라 할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자살은 여러가지 대안중 하나로 동시에 취급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극단적’ 대안으로 생각될 수도 없고 생각되어서도 안된다. 자살이 ‘극단적 선택’이라는 용어로 대체되어 사용되는 것을 보자면, 아마 그것은 시체를 예기치 못한 곳에서 발견한다는 점과, 애꿎은 사람들이 시체를 치워서 묻어야한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편안한 형태의 자살(흔히 안락사라 불리지만 본질을 회피한다 생각하기 때문에 비틀어 쓰겠다)에 대한 원천봉쇄적인 규제는 이제 사라져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모두 복지 실패에 대한 대안으로 여겨지고 접근되어선 안된다. 정부 시스템은 어디까지나 안전한 자살을 보호하는데 있어야하지, 자살을 이용하려 든다면 그것은 굳이 깊은 생각을 하지 않아도 디스토피아가 되리라는 걸 우리 모두는 알 것이다.
주변에 자살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꽤나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때로는 스스로 문학가가 되기도 한다. 필자 또한 자살에 대해 굉장히 자주 접했다. 여기서나, 개인적으로도 말이다. 그러나 필자가 발견했던 한가지 특이한 점은, 자살에 대해 말을 꺼내는 대부분의 작품과 사람들은 자살을 혐오하고 경멸하면서도 자기 혐오와 자기 경멸 때문에 스스로를 자살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자살에 대한 맥락이 읽히면 곧바로 사람들은 부정적이고 염세적이라고 읽고, 또 그렇게 믿는다. 놀랍게도 자살은 이제 너무 보편적인 주제가 되다보니 삶에 대한 의지가 조금이라도 약하게 느껴지면 작품이 지겹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조금 전향적인 자세로 생각을 펼쳐보았다. 물론 곧바로 공감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어느정도 감수해야할 것이라 생각한다. 노인 자살이라는 꽤나 생소하고, 또 너무 조금 소개된 개념을 예시로 들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점에서 부디 독자들이 결국 이 글이 독자들을 위해 쓰여졌고, 동시에 생명경시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할말을 마쳤으니 개인적인 스토리 하나를 꺼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졸업 파티에 갔다온, 꽤나 최근의 일이었다. 파티장은 교외 어느 산자락(사는 곳이 명산의 고장이라 언덕이라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에 있는 곳인데, 가까운 기차역까지는 꽤나 멀었다. 자정이 훨씬 넘어 쎈 술을 5잔 정도 마신 지친 몸을 끌고 내려오는 산길이었다. 양복을 입었었는데, 다행히 숲길이 아니라 차도로 내려올 수 있었다. 빛공해 때문인지 어두운 나무들의 실루엣이 보이는 걸 제외하면 아무 것도 안보여서, 얼마남지 않는 폰 배터리를 써가며 후레쉬로 천천히 걸어가는 중이었다. 옆에 늘어선 풀밭에서 소리가 날 때마다 약간씩 소름이 돋았는데(부끄럽지만 사실이다), 집에 타고갈 교통편이 그리 여유롭게 있지 않았던지라 그저 갈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든 생각이, 왜 내려가야 하는가 였다. 물론 지금이렇게 글을 썻으니 모종의 논지가 그를 반박한듯 하지만, 그냥 멀찍이 아래의 골짜기에서 한두대 차들이 지나가는 걸 앉아서 멍때리며 처다보면 안될 이유는 어디있단 말인가? 어쩌면 그냥 자버릴 수도 있다. 원하면 언제든 길을 벗어나 밤 깊은 숲을 탐험하러 가던가, 익어가는 밀 밭에 몸을 던지던가, 아니면 그냥 서서 구름에 가린 달을 보던가, 아니면, 정말로, 정말로…
자버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다른 누군가가 당신을 강제로 죽일 수 없는 만큼, 다른 누군가가 당신을 강제로 살릴 수도 없다.
짧은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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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9
원래 를 읽고 감상을 적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청소년 작가를 꿈꾸던 시절(다만 나의 작품들은 섹슈얼리티를 숨김없이 다루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내가 청소년 작가로 다루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베스트셀러였기에 추천을 받아 사서 쟁여 놓았을 뿐이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이 책을 읽으며 현대 문학, 아니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정정하자면, 현대 문학의 어느 정의하기 어려운 일부에 대해서 내가 단순히 그것들을 읽는 것 자체에 대하여 역겹다고 느낀다는 확신이 생겼다. 또한 그와 비슷하게 내가 작가로서 벌어먹고 사는게 불가능하겠구나하는 생각을 실제로 하였다. 가 나의 안티테제라 할 정도로 내가 그를 적대시 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는 나에게 굉장한 영향을 주었다. 순전히 이 책의 영향을 받아 나는 장편을 기획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글틴에 올리진 못할 것 같으나 언젠가는 볼 수 있길 바란다. 는 굉장히 감동적인 스토리와 심리전개로 고평가를 받았고,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베스트셀러로서 유명하며 대만등 해외로 번역까지(아시아인이 사는게 다 거기서 거기다) 되었다. 리얼리스트로서도 (뒤에서 다시 이야기할 테지만) 굉장한 실력을 갖추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구구하게 스토리를 다 설명할 만큼 작품을 존중해줄 생각은 조금도 없다. 요약하자면 친구가 죽고 슬퍼서 자살하려다 결국 안 한다는 얘기다. 필자는 어느정도 만드는 캐릭터와 스스로를 분리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아마 독자들도 그게 무슨 소리인지는 다들 알 것이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작가가 캐릭터에게 자신을 너무 녹여냈을 때 생기는 부작용이 크다는 것도 이해하기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가끔씩 작가들은 자기연민에 빠지기도 하니까. 자기연민에 빠진 글은 에둘러 설명할 필요없이 작가가 글을 컨트롤 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또 작가가 미성숙하단 뜻이다. 자기연민에 잔뜩 빠진 글은 간혹 굉장히 서정적으로 문장을 쓸 때가 있는데, 다른 독자는 몰라도 필자는 그 부분에서 독서를 포기한다. 작법서에도 어설프게 미문을 쓰려하지 말라고 되어있다. 너무 자주 등장하는 시적인 문장들은 임팩트도 없을 뿐더러 감정의 과잉, 곧 작가가 글에 감정적으로 매몰되었다는 것의 증거가 된다. 우리가 자주 감명을 받는 미문들은 딱 그부분만 떼어내어 보여주는 경우가 잦기 때문에 아주 조금, 중요한 곳에서만 사용하며, 아예 읽어내려가다 지친 독자에게 잠시 메세지를 건내거나, 그냥 속독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도록 해야한다. 자기연민을 조절하기를 포기한 글은 그냥 토사물같은 글이다. 실험적이라고 한다면 물론 실험적이기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고평가되질 않아 잘 보이지 않을 뿐이지 세상에 널려있어서 정말 잘 쓰지 않는 이상 발전시킬 부분이 아니라 극복해야할 부분이라 할 것이다. 를 읽으면서 글틴에서 자주 봤던 글들이 생각났다. 정말이지, 거칠게 말하면 문체가 똑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냥 백은별 작가가 글을 구조화하고 길게 쓸 의지가 있었을 뿐이지 필자로서는 그 이외의 차이가 아예없다고 느꼈다. 심지어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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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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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에 대해서 사회적, 철학적 등등 매우 다각도로 다룬 것 같아서 재미있었어요. 저도 여기서 말하는 '편안한 형태의 자살'이 국가에서 배척할 것이 아니라 복지의 형태로 제공되어야 하는 건 아닌지, 자살에 대한 사고 자체가 우리를 삶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진정한 자유의 형태가 아닐까 등등의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서 흥미롭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책 자유죽음이 떠오르기도 했고요. 어쨌든 생각할 점이 많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Ted 여윽시 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