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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의 사건들에 대하여

  • 작성자 기능사
  • 작성일 2025-06-22
  • 조회수 402

(멘토님은 끝부분 부터 보십쇼)

최근들어 벌어진 일련의 사건(분리해서 이해될 것도 아니지만 2개의 비슷한 현상이 간격을 두고 일어났으므로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은 글티너들에게 굉장한 충격이었다. 당장 뒹글귕굴은 이 사안에 대해 다양한 접근이 제시되고 있고, 개중에는 다소 공격적인 것도, 또 그 반대의 성격을 띄는 것들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문제가 정치적으로 실존하는 문제들과 비교될 수 있다는 점이다(그중 다수를 필자가 직접 제시한 바 있다). 필자는 이에 대해 여러 현존하는, 그리고 새로운 접근을 제시하고자 짧은 글을 남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 사건에 대해 파고들어보자. 2025년 6월 12일과 20일, 하루 최대 3-4개의 글이 올라오던 수필게시판에 10-20개 정도의 글이 올라왔다. 대체로 1000자 이하의 짦은 글이었으며 주제가 비슷했기 떄문에 조직적으로 올렸으리라 짐작이 되는 사건이었다. 실제로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계정중 일부가 소속 학교를 명시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추적한 결과 글틴을 교육과정중에서 활용했다는 것을 찾을 수 있었기 떄문이었다. 몇몇 글티너들은 분개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항의의사를 표했다. 글티너들이 이를 불쾌하게 여긴 수많은 이유중 하나는 (화자님의 논지를 인용하자면) 글틴을 학생들에게 강제했다는 것이었고, 이 외에도 멘토님에 대한 부담이나, 월장원에 대한 저평가등 중요한 이유들은 더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 사건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글틴에는 분명히 글틴의 홍보 차원에서 이 사건이 비단 부정적이기만 할 수는 없다고도 주장한다. 문학의 보급 차원에서 이는 어쩌면 문학이 더 대중화되고 있고, 또 이를 통해 더 대중화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멘토님에 대한 부담이나 문예위에서 멘토 인력을 확충하면 될 일이다. 역사적으로 가능했었음은 여러 군데에서 지적되었다. 이에 대해서 한가지 짧게 짚을 점은, 문학가로서 평범한 한 인간에게 문학에 참여하는 것을 권하기란 꽤나 난감한 문제라는 것이다. 문학은 잉여적 노동이고, 항상 그래왔으며, 또한 그런 부분에 대해서 소모적인 동시에 위선적이기까지 하다. 물론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한 진부한 공격이긴 하지만 필자는 예술의 본질이 아마추어리즘에 있다는 데에서 한치도 물러날 생각이 없다. 이에 대해선 후에 다루도록 하고, 문학을 권함에 있어 문학적 창작이 대중화 되는 것에 대하여서도 그것이 마냥 좋기만 한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좋은 문학은 문학가의 수가 아니라 문학가의 인간에 대한 통찰과 이해에 인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더이상 글틴이 ‘우리’의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생각해보자. 이번 건은 큰 충격에도 불구하고 그 실체를 찾아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다른 조직적인 움직임이 나타났음에도 그에 대해 분석할만한 다른 어떤 증거도 나오지 않는다면 그때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개인적 수준의 단순 도배가 여러 형태로 제지되고 있듯이 조직적인 형태의 단순도배도 제지될 수단이 있기야 할 것이다. 하다못해 관리자가 직접 지우는 식이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번에 올라온 글들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그들은 단순 도배가 아님을 넘어 심지어 몇몇은 좋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조직적인 움직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며, 또 어떤 논지로 규탄할 것인가? 일부가 말한 것처럼 멘토 인력 확충과 함께 불확실성을 줄이는 방향으로의 전환은 애초에 시스템의 성격상 어렵기도 하고(학교에서 글틴을 활용하는게 확산되면 글틴 이용양이 폭증함은 물론이거니와, 동시에 월별 이용량 차이도 커지게 되고, 애초에 학교만 이용하란 법도 없다), 현재의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지게 된다(일회성 글티너가 대다수가 된다면 멘토와 글티너, 그리고 글티너와 글티너간의 소통은 굉장히 힘들어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문제 해결에 앞서(애초에 필자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한가지 질문에 도달한다. 글티너는 도대체 무엇인가? 정의상으론 글틴을 이용하는 모든 이용자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익명성으로 엄격하게 보호받으며, 오로지 글과 기타 제한된 창구만으로 스스로를 표현한다. 이번 수필게시판 사건과 같은 일들이 일상화된 글틴을 가정했을 때, 상술한 정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리고 지금 당장 만나며 소통하고 있는 글티너들과는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카톡과 디코와 캠프와 뒹글뒹굴에서, 그리고 당연히 글속에서 만나고 대화하며, 서로 문학에 대해 토론하는 이들과 가끔 글을 클릭하지 않는 이상에야 평생 볼일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이는 평소 필자가 열렬히 비판하는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독자는 스스로 글티너임에 자부심과 소속감을 느끼는가? 이러한 질문에 필자는 스스로도 아니라고 대답하겠고 또 그 대답을 강권하겠으나 당연히 독자가 가질 각자의 대답을 존중하겠다. 글티너들은 이번 사건에 대해 각자 어떤 비슷한 감정과 함께 여러가지 형태로 의사표시를 했으리라 생각한다. 방금 질문에 어떤 대답을 했는지와는 무관하게 말이다. 뒹글뒹굴에서 볼 수 있는 글들에서 또 공통적으로 집히는 점이 있는데, 어떤 점이 우리 스스로가 글틴을 대변하게 하냐는 것이었다. 어떤 문제에 대해 규탄이든 지지든 하여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떠한 권리로 이해되는게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그 권리는 또 어떻게 생기거나 배분 돼야 하고, 또 어떻게 집행되어야 하는가? 물론 민주적으로 하는 것이 제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복잡한 것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다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애초에 글티너는 글틴의 이용자다. 우리가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상을 주는게 아니라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 뿐이다. 권리니 뭐니 운운하기에는 그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이상한 글 던져서 미안하다. 애초에 쓸 건 많은데 여기다 쓰기는 싫어서 다 짧게만 언급하고 끝난 것 같다. 고칠 것도 아닌데 못난 글 써서 다시한번 미안하고, 읽어주어 고맙다.
(성현아 평론가님께는 무한한 감사와 멘토링 스킵이 가능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저희가 뭘 하든 항상 멘토님께서 고생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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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바라던 말던 인류 앞에 서있는 질문은 명백합니다. 사람들에게 육체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무수한 고통을 안기는 애국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긴요하거나 고결한 것이 될 수 있는냐는 거지요.-톨스토이, 존 맨슨의 편지에 대한 답변 중-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감동이 있다. 그것들은 대체로 거의 완벽히 일치하거나 어느 종합적인 선을 향한다고 확신된다. 그것들은 인간을 허무에서 구원하며, 목적성과 인간다움을 부여한다. 그것을 맛본 인간은, 대체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으나, 상황에 따라 죽을 수도, 죽일 수도 있으며, 살거나 살릴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 당장에도, 그 4가지 모두가 동시에, 그리고 온전한 확신에 힘입어 진행되고 있다. 감동이라는 단어가 좋은 문장에는 안 어울릴 것 같다. 초보적인 감상에나 어울릴 단어이니 말이다. 그러기에 여기서 정의하고 가는 편이 좋을 것이다. 감동은 수십억명의 인간이 2000년 전 어느 인간의 부활을 믿는 이유이자 또한 수십억명의 인간이 부모로서의 책임감을 옹호하며 이행하려는 이유이고 또한 이스라엘과 이란, 파키스탄과 인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인간들이 인간들을 정당하게 죽이는 유일한 이유이다. 그것의 역사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 역사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그 역사가 인류와 상존했었다는 것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또한, 대체로 그것에 대한 분석 자체가 모욕으로 여겨졌다. 생각해보라, 어느 양놈이 와서 우리 민족의 민족주의가 열등감과 식민지배에 대한 피해의식, 경제개발에 대한 허영심과(생각해보자, 나나 당신이나 경제 개발에 동참하기라도 했나?), 그리고 정부의 프로파간다 때문이라 하면 다 화를 낼 것 아닌가? 이처럼 그 감동은 직관적이고 단순하거나,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논리적 분석은 자연히 모욕적이다. 그러한 분석은 그런 감동을 피선동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어느 명확한 맥락 안에서는 가능할 수도 있지만, 깊이 들여다 보면 결국 인간 비하로 끝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감동이 얼마나 강하다는 건가? 단순히 눈물 몇방울 나오는 영화를 가지고 우리가 전 재산을 팔아버리고 어딘가로 떠나거나 군대에 입대하진 않는다(100년 전만해도 실제로 그랬다는 것을 상기하자). 그러나 보편적인 맥락에서 이해가 어렵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당장에 여러 종류의 독립운동, 그리고 남과 북의 여러 사상가들, 그리고 민주화 운동까지 우리 사회의 컨텍스트에서 감동들은 자주, 그리고 각 사건사건마다 주목할만한 위력으로 기능해왔다. 현재도 그렇다. 8년전의 박근혜와 지금의 윤석열을 탄핵시킨 힘은 바로 무엇인가? 그것과 동시에 왜 같은 민족의 또다른 사람들은 그 ‘힘’을 피선동자들이라 규정하며 윤석열을 자유민주주의의 투사라고 옹호하는가? 그러한 힘이 생기는 것은 어느 합리적이고 건조한 진실이나 과학적 통찰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의 인지구조를 거치며 어떻게 기능하는 지에 있다. 인간은 이미 이것을 누구보다 더 잘안다. 일례로, 어느 바람직한 기독교 우파의 예시를 들어보자. 그는 분명 해방주의적 이데올로기들이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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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03
청소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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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29
백은별의 <시한부>를 읽고

원래 를 읽고 감상을 적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청소년 작가를 꿈꾸던 시절(다만 나의 작품들은 섹슈얼리티를 숨김없이 다루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내가 청소년 작가로 다루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베스트셀러였기에 추천을 받아 사서 쟁여 놓았을 뿐이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이 책을 읽으며 현대 문학, 아니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정정하자면, 현대 문학의 어느 정의하기 어려운 일부에 대해서 내가 단순히 그것들을 읽는 것 자체에 대하여 역겹다고 느낀다는 확신이 생겼다. 또한 그와 비슷하게 내가 작가로서 벌어먹고 사는게 불가능하겠구나하는 생각을 실제로 하였다. 가 나의 안티테제라 할 정도로 내가 그를 적대시 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는 나에게 굉장한 영향을 주었다. 순전히 이 책의 영향을 받아 나는 장편을 기획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글틴에 올리진 못할 것 같으나 언젠가는 볼 수 있길 바란다. 는 굉장히 감동적인 스토리와 심리전개로 고평가를 받았고,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베스트셀러로서 유명하며 대만등 해외로 번역까지(아시아인이 사는게 다 거기서 거기다) 되었다. 리얼리스트로서도 (뒤에서 다시 이야기할 테지만) 굉장한 실력을 갖추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구구하게 스토리를 다 설명할 만큼 작품을 존중해줄 생각은 조금도 없다. 요약하자면 친구가 죽고 슬퍼서 자살하려다 결국 안 한다는 얘기다. 필자는 어느정도 만드는 캐릭터와 스스로를 분리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아마 독자들도 그게 무슨 소리인지는 다들 알 것이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작가가 캐릭터에게 자신을 너무 녹여냈을 때 생기는 부작용이 크다는 것도 이해하기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가끔씩 작가들은 자기연민에 빠지기도 하니까. 자기연민에 빠진 글은 에둘러 설명할 필요없이 작가가 글을 컨트롤 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또 작가가 미성숙하단 뜻이다. 자기연민에 잔뜩 빠진 글은 간혹 굉장히 서정적으로 문장을 쓸 때가 있는데, 다른 독자는 몰라도 필자는 그 부분에서 독서를 포기한다. 작법서에도 어설프게 미문을 쓰려하지 말라고 되어있다. 너무 자주 등장하는 시적인 문장들은 임팩트도 없을 뿐더러 감정의 과잉, 곧 작가가 글에 감정적으로 매몰되었다는 것의 증거가 된다. 우리가 자주 감명을 받는 미문들은 딱 그부분만 떼어내어 보여주는 경우가 잦기 때문에 아주 조금, 중요한 곳에서만 사용하며, 아예 읽어내려가다 지친 독자에게 잠시 메세지를 건내거나, 그냥 속독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도록 해야한다. 자기연민을 조절하기를 포기한 글은 그냥 토사물같은 글이다. 실험적이라고 한다면 물론 실험적이기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고평가되질 않아 잘 보이지 않을 뿐이지 세상에 널려있어서 정말 잘 쓰지 않는 이상 발전시킬 부분이 아니라 극복해야할 부분이라 할 것이다. 를 읽으면서 글틴에서 자주 봤던 글들이 생각났다. 정말이지, 거칠게 말하면 문체가 똑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냥 백은별 작가가 글을 구조화하고 길게 쓸 의지가 있었을 뿐이지 필자로서는 그 이외의 차이가 아예없다고 느꼈다. 심지어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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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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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자

    • 2025-07-07 19:10:05
    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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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자 댓글 잘 읽었습니다. 화자님의 주장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강조하는 바가 달랐다는 점은 알겠습니다. 다만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이 번 사건의 본질 자체를 겨냥하고 있지 않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우려한 바는 어디까지나 앞으로 있을 수 있는 잠재적인 문제들이고, 그에 대해 생각할 바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지 단지 지금 까지 있었던 이 사건에 대한 입장을 소개하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이 글의 완성도가 너무 떨어져서 올리는게 의미가 있냐는 따질 수 있겠지만, 글틴 또한 비평의 대상이 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모쪼록 더 깊이 생각하고 더 잘 써서 올리는 좋은 기능사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화자님 너무 매섭자나... 그냥 실험적이고 바보같은 비평으로 생각하자구)

      • 2025-06-23 02:54:38
      기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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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좋앙

    기능사님의 글에 너무 공감이 됩니다...근래 너무 수행평가를 목적으로 글을 올리는 것에 대해서 저도 안좋게 생각하고 있었기도 했고 아무런 말도 못하고 끙끙거리고 있었는데 이렇게 기능사님께서 글을 올려주시니 정말 묵었던 것들이 빠져나가는 느낌입니다.기능사님 이런 글을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2025-06-23 20:31:32
    역사 좋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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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좋앙 아니 화자님이 아래에 왜 올렸냐고 하셨는데 여기서 칭찬을 하시면 제가 뭐가 됩니까... 무튼 간에 감사합니다...

      • 2025-06-24 01:00:10
      기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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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해

    잘 읽었습니다. 뭔가 생각은 많지만 정리하는 게 쉽지 않네요. 왜, 나만 알았으면 하는 맛집 있잖아요. 글틴이 우리에게 그런 느낌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나만 알았으면 해. 여긴 너무 좋거든······ 그럼에도 좀 더 광범위하게, 미래를 본다면 이 글틴이라는 곳도 문을 활짝 여는 것이 맞겠죠. 우리가 겪어온 이 분위기가 사라진다고 할지라도요······ 분명 글틴의 활동이 늘어나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다만, 갑작스럽게 찾아와 많은 혼란과 갈등(저도 이 갈등에 의견 제시하고 나름 적극적인 사람으로서 할 말은 없습니다······.)이 생기고 있다는 점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우리의 글틴을 이용할 수 있을까요······ 두서 없네요. 쓰신 글과 얼마나 연관 있는 댓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원래 이런 사람이니 받아들이세요. 감사합니다. 고생 많으십니다.

    • 2025-06-23 03:42:42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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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능사

      @이해 나쁜글이 뭘 바라겠습니까 에휴... 제가 글을 잘써야지요... 도발적인만큼 글도 잘써야되는데...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 2025-06-23 04:54:06
      기능사
      0 /1500
    • 이해

      저는 잘 쓴 글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그러셔요······ 잘 읽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닙니다. 제가 말을 좀 조리 있게 하지 못해요. 그래서 그렇습니다.

      • 2025-06-23 10:05:32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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