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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론

  • 작성자 기능사
  • 작성일 2025-06-29
  • 조회수 297


23년 한해에 중국인  3만 4천명이 순유입됐다. 십삼만명이 들어오고, 십만명이 나갔다. 단지 그뿐만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중국은 꽤나  위협으로 인식되는 것은 분명하다. 당장에 정치권에서는 외교적인 결례는 차치하고 친중 여부를 가리는 것을 너머, 심지어 어느 인물이 화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말이 오가고 있다. 당연히 머릿수로만 영향력에 대해서 따질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눈여겨볼만한 자료임은 분명하다. 논리적 미흡함에도 불구하고 영향력을 머릿수로 치환하여 본다면, 사람들의 중국인과 중국에 대한 주의는 분명 대단하다. 3만 3천의 순유입을 감안하면 말이다. 그러나 그의 10배 가까이 되는 인구를 우리는 매년 맞아들이고 있다. 중국인들과는 다르게 우리는 그들을 기꺼이 보호하며, 각종 의무로부터 면제시키고,  억압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스스로를 정의할 의지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어느 누구도 그들을 정의내릴 최소한의 지식에조차 무관심하다. 

그들은 청소년이다. 

청소년에 대해서 말하고자하는 것은 무수히 많지만, 그러기 전에 청소년이라는 인식자체의 몇가지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청소년은 당연히 생물학적으로 필연적이며 인류사의 모든 부분에 대해서 상존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에서   있듯이, 대체로 청소년들은 ‘아녀자’로, 역사학자들에게는 소유물이자 대상으로 서술되었다. 그렇다고 자주 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좋게 나라가 망하거나 하면서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로 적혀있는  전부다. 청소년은 오랜 시간동안 소어른으로 인식되어왔다. 애초에 시민권이 확립되기 전이므로 권리를 동등하게 누린다기 보단 그저 발달과정에 대한 무지라 하는게 옳을 것이다. 그러나 차차 여러 동정적인 인권주의자들과 휴머니스트, 그리고 교육철학자들을 통해 청소년들은 ‘발견’’되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차 정부는 청소년들을 그들의 존재에 대한 좋은 명분이자 훌륭한 수단으로 보았다. 정부는 자기 조직과 권력을 재생산하고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공교육을 만들어내어 복종적인 군인과 노동자들을 만들어 내고자 했고,  많은 경우에서 그렇게 되었다. 그러고 정부는 자기가 하고 있는 훌륭한 역할에 대해 역설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것이 절대로 대체되어선 안되는  마냥 말이다. 여성또한 비슷하게 정부에게 이용당했다. 그러나 여성에게 노동시장을 허용한것은 점차 가부장적 질서의 해체로 이어져 여성은 여러 권리를 요구하고, 또한 쟁취하게 되었다. 세계 대전 들을 생각해보자. 남성의 노동력이 부족해지지 않았다면 여성들이 부엌을 떠날 수가 있었을까?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일이 청소년에게 벌어지지는 않았다. 청소년은 희한하게도, 부조리에 대하여 저항할 의지와 능력을 갖출 때쯤이면 이미 비청소년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세상에 스스로를 청소년으로 정체화 한 세력은 단 하나도 없다.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고, 앞으로 생기기도 요원해보인다. 


청소년은 여러가지 특징점을 지닌다. 첫째, 정의상 국민으로 등록된 사람은 청소년일지라도 국민으로 여겨지나, 희한한 이유로 여러가지 권리들은 제한되며 또 여러가지 의무로부터 자유롭다. 우선 당연하게도, 청소년에겐 병역의 의무가 없다. 유엔 아동 인권 협약의 서명국으로서 사실 당연한 것이다. 또한 세금에서와, 사회복지적 부분에 대해서 특혜를 받는다. 그리고 청소년은 그 보호자에게 사회적, 법적, 금전적으로 종속적이다. 보호자는 청소년을 훈계하고 선도할 의무가 있으며 의무교육을 이수하게 하여야만 한다. 또한 노동법 상 청소년의 노동은 크게 제약이 되어있고, 사회적으로도 청소년의 노동 종사는 제약이 크므로, 청소년의 소득은 없다고 봄이 합당할 것이다.
그러나 위의 모든 문제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청소년을 위한 대의민주적 시스템이 전무하다는게 그것이다. 청소년의 선거권을 근본적으로 제한하는 이유는 청소년이 성숙하지 않았다는 것과, 이런 이유로 의사결정에 있어 스스로의 의견을 책임있게 가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라면 충분히 다른 요소들로도 일부 성인의 투표권을 제한하는 것 또한 합당할 텐데, 당연하게도 그런 일은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았고 일어날 수도 없다. 민주주의는 그런 논리에 대한 반항으로 일어난 움직임이다. 딱 떠오르는 예를 들어보자면, 브렉시트에 투표한 영국국민은 비성숙하고 책임있는 자기결정을 하기 부족한 유권자들이므로 통일주체국민회의로 돌아가야하는가? 필연적으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정견에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하고, 또한 때때로 틀린 선택을 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그러나, 적어도 민주공화국에서는 대의민주주의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권리가 그랬듯, 권리는 쟁취되고 고착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87년 헌법이후 선거연령하향이 한번 이루어지고, 학생인권조례가 일부 시도에서 제정되는 것 이외에 학생 인권 운동은 조금의 진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학생 인권 조례라는 건, 아직도 교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라며 반대하는 세력이 있지만, 그와는 무관하게 공교육 내에서의 학생 인권을 보장하는 데, 아니 보장하여 노력하는데 그칠 뿐이며, 여러 근로조건 감독의 문제와 같이 사립이나 학원 같은 곳에서의 인권은 여전히 열악한 것이 사실이다. 잠시 양해 구해 이에 대해 조금만 더 써보자면, 혹자는 학부모들이 교사를 고소하거나 법적으로 대응하는 일로 교권이 침해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법적으로 충분히 보완 가능한 문제임은 차치하고서라도 평균적인 학생과 평균적인 교사를 고려하여보았을 때 어떤 형태이든 학생이 교사보다 훨씬 더 폭력에 취약하다. 자의건 타의건 학부모의 힘을 빌려 교사에게 위해나 협박을 하는 경우에 (물론 이 경우에 필자는 부모가 미쳐있는 거라고 확신한다. 이에 대한 보편론은 아무래도 후에 글로 적는 것이 나을 듯 싶다) 학생이 받는 피해는 상상 이상이다. 당장에 교사 단체는 그 성향과 무관하게 비합리적인 교사에 대한 제재를 규탄하며 그 학생이 그러한 불명예를 어떤 형태로든 피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대체로 이런 일은 초등학교에서 집중되어 벌어지는데, 초등학교에서의 일은 후에 진학에 미치는 영향이 상대적으로 적어, 거의 무시할만 하기 때문이다. 중학교 이후로 올라가면 부모는 고소를 할 돈으로 차라리 학원을 더 보내는 선택을 한다. 또한 중학교 이후에는 교사가 가지는 절대적인 권력때문에 정말로 돈이 넘쳐나거나 자퇴에 준하는 각오가 있지 않는 이상에야 학생이나 학부모나 별것 아닌 일로 교사를 괴롭힌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학생 인권과 교권의 관계야 어찌됐든, 권리라 쓰고 의무라 읽는 의무교육의 명령하에 학교를 다니는 청소년들은 비청소년들의 탁상공론에 따라 이것저것 의무만 잔뜩 짊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교사 집단은 수많은 대의민주주의 조직에다, 수십명의 선출직 공무원을 배출하는데 반해, 현재 청소년들이 뽑을 수 있는 거라곤 고작 몇몇 엘리트 학생들 생기부에 학생회장이니 학생부회장이니 몇자 적어주는 것이 고작이며, 심지어 그것조차도 오로지 학교를 다니는 청소년을 위한 것 뿐만아니라, 실권은 전혀 없으며, 전국적인 조직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가 없다. 기껏 있는 아수나로같은 조직들은 각 시도 지부 회원 스무명 정도가 다고, 그마저도 대의민주주의는 커녕 퀴어축제나 가서 성소수자를 지지하거나 이마트에서 콘돔을 청소년들에게 안 판다 하면 가서 규탄서나 낭독하는게 고작이다. 

이쯤 되어서 필자는 굉장히 궁금하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이 진보하는 걸 막는단 말인가? 이 청소년들이 교회에 안나오면 화형을 당하는 시대에 살았나, 식민지인을 교화하는게 사명이라 선전하던 시대에 살았나? 당장 TV를 틀면 민주적으로 뽑혀서 일을 하는 정치인들을 볼 수 있고, 역사책이나 윤사 책이나 어느 책이든 펼쳐서 보면 자기결정권이 무엇인지는 별 어려울 것 없이 곧바로 알 수 있다. 대의민주주의는 어느 다른 별에서 온 뚱딴지 같은 소리가 아니다! 자기결정권 또한 악마나 말할법한 이단적인 개념이 아니다! 도대체 이 나라의 청소년들은 어디가 잘못되어서 자기가 한명의 시민으로서 기능할 수 있게 준비할테니 권리를 달라고 말하는 것을 못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필자는 꽤나 오랜 세월동안 대답하려 애써봤다. 그러나 어떤 선택지든 간에 필자는 엘리트주의로 귀결될 수밖에는 없었다. 

필자의 대답은 그렇다. 청소년 운동은 본질적으로 엘리트주의다. 사실 모든 사상이 그랬듯이 말이다. 모든 군대가 결국 전쟁을 위한것이고 모든 총이 결국 사람을 겨누기 위해서이듯이 청소년을 아무리 연구하고 분석한다 하여도 개선에 대한 자주적 의지가 없는 이상 의미가 있다하기 어렵다. 연구 자체 마저도 청소년학에 대한 변변한 이름조차 없다는 현실은 차치하고서 말이다. 

필자는 이 글이 크게 와닿기 보다는 독자들이 한번씩 청소년과 그 권리에 대해서 한번 쯤 돌이켜 보는 계기이자, 궁극적으로는 지금 생각하고 있는 무언가의 트리거가 되었길 바란다. 

긴 글 읽어주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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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03
백은별의 <시한부>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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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24
근래의 사건들에 대하여

(멘토님은 끝부분 부터 보십쇼)최근들어 벌어진 일련의 사건(분리해서 이해될 것도 아니지만 2개의 비슷한 현상이 간격을 두고 일어났으므로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은 글티너들에게 굉장한 충격이었다. 당장 뒹글귕굴은 이 사안에 대해 다양한 접근이 제시되고 있고, 개중에는 다소 공격적인 것도, 또 그 반대의 성격을 띄는 것들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문제가 정치적으로 실존하는 문제들과 비교될 수 있다는 점이다(그중 다수를 필자가 직접 제시한 바 있다). 필자는 이에 대해 여러 현존하는, 그리고 새로운 접근을 제시하고자 짧은 글을 남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 사건에 대해 파고들어보자. 2025년 6월 12일과 20일, 하루 최대 3-4개의 글이 올라오던 수필게시판에 10-20개 정도의 글이 올라왔다. 대체로 1000자 이하의 짦은 글이었으며 주제가 비슷했기 떄문에 조직적으로 올렸으리라 짐작이 되는 사건이었다. 실제로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계정중 일부가 소속 학교를 명시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추적한 결과 글틴을 교육과정중에서 활용했다는 것을 찾을 수 있었기 떄문이었다. 몇몇 글티너들은 분개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항의의사를 표했다. 글티너들이 이를 불쾌하게 여긴 수많은 이유중 하나는 (화자님의 논지를 인용하자면) 글틴을 학생들에게 강제했다는 것이었고, 이 외에도 멘토님에 대한 부담이나, 월장원에 대한 저평가등 중요한 이유들은 더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 사건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글틴에는 분명히 글틴의 홍보 차원에서 이 사건이 비단 부정적이기만 할 수는 없다고도 주장한다. 문학의 보급 차원에서 이는 어쩌면 문학이 더 대중화되고 있고, 또 이를 통해 더 대중화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멘토님에 대한 부담이나 문예위에서 멘토 인력을 확충하면 될 일이다. 역사적으로 가능했었음은 여러 군데에서 지적되었다. 이에 대해서 한가지 짧게 짚을 점은, 문학가로서 평범한 한 인간에게 문학에 참여하는 것을 권하기란 꽤나 난감한 문제라는 것이다. 문학은 잉여적 노동이고, 항상 그래왔으며, 또한 그런 부분에 대해서 소모적인 동시에 위선적이기까지 하다. 물론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한 진부한 공격이긴 하지만 필자는 예술의 본질이 아마추어리즘에 있다는 데에서 한치도 물러날 생각이 없다. 이에 대해선 후에 다루도록 하고, 문학을 권함에 있어 문학적 창작이 대중화 되는 것에 대하여서도 그것이 마냥 좋기만 한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좋은 문학은 문학가의 수가 아니라 문학가의 인간에 대한 통찰과 이해에 인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더이상 글틴이 ‘우리’의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생각해보자. 이번 건은 큰 충격에도 불구하고 그 실체를 찾아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다른 조직적인 움직임이 나타났음에도 그에 대해 분석할만한 다른 어떤 증거도 나오지 않는다면 그때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개인적 수준의 단순 도배가 여러 형태로 제지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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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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