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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해체의 휴머니즘

  • 작성자 기능사
  • 작성일 2025-07-03
  • 조회수 340

사람들이 바라던 말던 인류 앞에 서있는 질문은 명백합니다. 사람들에게 육체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무수한 고통을 안기는 애국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긴요하거나 고결한 것이 될 수 있는냐는 거지요.

-톨스토이, 존 맨슨의 편지에 대한 답변 중-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감동이 있다. 그것들은 대체로 거의 완벽히 일치하거나 어느 종합적인 선을 향한다고 확신된다. 그것들은 인간을 허무에서 구원하며, 목적성과 인간다움을 부여한다. 그것을 맛본 인간은, 대체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으나, 상황에 따라 죽을 수도, 죽일 수도 있으며, 살거나 살릴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 당장에도, 그 4가지 모두가 동시에, 그리고 온전한 확신에 힘입어 진행되고 있다. 
 감동이라는 단어가 좋은 문장에는 안 어울릴 것 같다. 초보적인 감상에나 어울릴 단어이니 말이다. 그러기에 여기서 정의하고 가는 편이 좋을 것이다. 감동은 수십억명의 인간이 2000년 전 어느 인간의 부활을 믿는 이유이자 또한 수십억명의 인간이 부모로서의 책임감을 옹호하며 이행하려는 이유이고 또한 이스라엘과 이란, 파키스탄과 인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인간들이 인간들을 정당하게 죽이는 유일한 이유이다. 그것의 역사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 역사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그 역사가 인류와 상존했었다는 것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또한, 대체로 그것에 대한 분석 자체가 모욕으로 여겨졌다. 생각해보라, 어느 양놈이 와서 우리 민족의 민족주의가 열등감과 식민지배에 대한 피해의식, 경제개발에 대한 허영심과(생각해보자, 나나 당신이나 경제 개발에 동참하기라도 했나?), 그리고 정부의 프로파간다 때문이라 하면 다 화를 낼 것 아닌가? 이처럼 그 감동은 직관적이고 단순하거나,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논리적 분석은 자연히 모욕적이다. 그러한 분석은 그런 감동을 피선동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어느 명확한 맥락 안에서는 가능할 수도 있지만, 깊이 들여다 보면 결국 인간 비하로 끝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감동이 얼마나 강하다는 건가? 단순히 눈물 몇방울 나오는 영화를 가지고 우리가 전 재산을 팔아버리고 어딘가로 떠나거나 군대에 입대하진 않는다(100년 전만해도 실제로 그랬다는 것을 상기하자). 그러나 보편적인 맥락에서 이해가 어렵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당장에 여러 종류의 독립운동, 그리고 남과 북의 여러 사상가들, 그리고 민주화 운동까지 우리 사회의 컨텍스트에서 감동들은 자주, 그리고 각 사건사건마다 주목할만한 위력으로 기능해왔다. 현재도 그렇다. 8년전의 박근혜와 지금의 윤석열을 탄핵시킨 힘은 바로 무엇인가? 그것과 동시에 왜 같은 민족의 또다른 사람들은 그 ‘힘’을 피선동자들이라 규정하며 윤석열을 자유민주주의의 투사라고 옹호하는가? 

 그러한 힘이 생기는 것은 어느 합리적이고 건조한 진실이나 과학적 통찰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의 인지구조를 거치며 어떻게 기능하는 지에 있다. 인간은 이미 이것을 누구보다 더 잘안다. 일례로, 어느 바람직한 기독교 우파의 예시를 들어보자. 그는 분명 해방주의적 이데올로기들이 기독교와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의 상존 불가능한 적이라 볼것이다. 차별 금지법에 대해서도 불것은 있으나 그저 그가 특정 정파의 사람들을 싫어하고,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이 피선동자이기 때문이라는 데 주안점이 있으므로 그 정도 말해 두자. 그는 탄핵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종북 내지는 친북적인, 혹은 외교 실용주의라는 이름 아래 북한 의제를 기피하는 어느 특정 정파의 기득권적 소수에게 선동당했다고 말할 것이다. 차별금지법 찬성을 필두로한 진보주의자들에게는 차별금지법이 내재한 역차별적, 그리고 종교적 양심과 배치되는 규정을 문제삼을 것이다. 종교는 굉장히 중요하다. 기독교를 예시로 들자면, 기독교가 지금까지 스스로를 지켜온 모든 논지들은 그 감동에서 출발하는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활을 왜 의심없이 믿는가? 아니, 애초에 의심을 하는게 너무나 당연함을 넘어 예수가 부활을 하지 않은 것이 차마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 부활을 역사적인 사실로 믿는 것이 공식적인 입장이 될 수가 있는가? 그것은 그 부활이 지니는 감동과 의미 때문이다. 오직 그뿐이다. 기독교인이 지녀야하는 수많은 다른 믿음들도 비슷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성소수자와의 연대의식과 민주화 정신 또한 그와 같다는 것이다. 무엇이 진실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예수가 진정으로 부활하여 무덤에서 걸어 나왔는지, 대공분실에서 누가 죽었고 성소수자들이 어떻게 차별 받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그것들의 감동만을 우리는 받아들이고 믿기 때문이다. 부정선거와 광우병에 대한 여러 시위에 대해서도 궁금한 이들에겐 어느정도 생각해 볼만한 답이 되었을 것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이러한 분석이 비하적인 목적으로 자주 사용되는 것과는 무관하게, 나로서는 이 감동이라는 개념이 지니는 가치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가 없다. 아니, 애초에 감동은 가치의 근원이다. 감동없이 가치 납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며, 심지어 그렇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필히 후험적인 교육의 결과일 것이다. 어쩌면 혹자는 그런 가치들과 감동을 냉소하며 그런 감동과 가치를 삶에서 제거하려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가치들로부터의 해방은 필연적으로 불가능하다. 대체로 그런 경우는 에고이스트가 될게 뻔하며, 또 그런다 한들 그 이후의 허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인가? 설혹 생각하기를 멈추는데 도가 틀어서 정말로 자연 상태의, 가장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인간이 가능하다 해보자(물론 내가 직접 그려내기에는 무리가 있다. 자연 상태에서는 진화생물학적인 이기성과 이타성의 발현이 있는데, 이를 해석해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 아이히만보다도 무섭고 추악한 인간일 것이다. 물론 상황이 그리된다면 말이다. 
 내가 비판하고자 하지도 않는 감동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히 자아성찰의 필요성을 일깨워주기 위함만은 아니다. 그것은 그 감동이 어느 바보같은 개념에 점유당하고 이용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단 최근의 몇 세기들 뿐만 아니라, 어쩌면 진화생물학적 압력에 힘입어 인류와 거의 공존하다시피한 개념이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인간이 인간을 죽이고 싶게 만들고, 죽일 필요가 있게 만들며, 죽여야 겠다고 마음먹게 만들고, 죽이게 하며, 그 죽임을 옹호하게 한다. 오, 그러나 살인만을 주제로 볼것은 아니다. 살인이 빈번하지 않다고는 못하지만, 결코 보편적인 현상으로 두고 분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체성이다. 물론 정체성이 현대적인 용어지만, 그 이전의 역사에 대하여 사용하는 것이 역사주의적 오류이진 않을 것이다. 자의적인 자기 규정이 있고, 그 대상이 되는 집단이 명확하며 실존할 때 그것은 정체성이 되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자하는 바는 정체성의 여러가지 다른 해석들과는 다를 수 있지만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다고 본다. 정체성에 대해서는, 민족주의자의 페미니스트는 같다. 사실, 거의 같은 정도도 아니고 완전히 같다고 보아도 좋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 달아둔 에피그래프가 페미니즘은 물론이고, 다른 모든 정체성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주의나 페미니즘의 예를 들었지만, 민족주의자나 페미니스트가 정체성 그자체로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분명 그럴 때도 있지만, 더 본질적으로 그들은 정체성을 인식하고 수용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 예를 들어서 내가 한국 민족주의자라면 한국인이 다른 인종이나 민족과는 다르다는 걸 이해하는 것에서 부터 출발해야할 것이다. 물론 거기까지는 문제를 못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애초에 민족주의와 페미니즘이 여전히 우리의 정치적인 사고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지금부터 이야기할 모든 과정에 대해서 문제를 못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모두 반박할 생각이다. 

 우선 어느 정체성을 인지하고 그를 인정하며, 가장 중요하게는 그 정체성이 다른 집단과 상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 부분에서 퀴어의 프라이드와 기독교의 거룩함은 거의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항상 정체성은 다름을 강조하며, 그를 통해 구심적인 힘을 받는다. 그 힘은 자기 연민을 먹으며 자라나서, 결국은 스스로를 되먹이는 지경에 까지 이른다. 독일의 민족주의를 보자. 독일의 민족주의는 꽤나 합당한 이유에서 시작했다. 바로 나폴레옹말이다. 독일인들이 세운 왕국과 제국을 굴복시켜 왕을 모욕하고 황제의 딸을 취했으며 자신들을 느슨히나마 이어주던 신성로마제국을 해체시켜버린 그 나폴레옹 말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당연히도 자기 제국과 함께 무너져버렸다. 그들은 처음엔 스스로를 지키려고, 후엔 다시 그들의 제국을 세우려고, 그 다음엔 모욕받은 적들에게서 그들의 존립을 지키려고 총을 들었다. 그 가운데에 언제부턴간 ‘애국’이 도그마이자 패러다임이 되어 각 개개인은 가면 갈수록 더 강한 애국자가 되었고 종국엔 아무도 막을 수는 없게 되었다. 애국주의의 열광하던 청년들은 각각 관료와 장군들이 되어 타 혹은 아의 완전한 소멸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또한 실제로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대략 150년간의 간략한 독일 민족주의사다. 아와 타의 대결로서 독일의 사례는 어쩌면 가장 극단적인 예시일 것이다. 그들은 수백만을 잃고서 원하던 영광이나 제국은 커녕 오히려 땅을 잃었으니 말이다. 

 이는 이기심을 경계하라는 단순한 훈시가 아니다. 혹자는 이렇게 질문할 지도 모른다. 분명 좋은 정체성, 좋은 타자화도 있지 않겠냐고, 정체성 자체가 아집단과 타집단의 대결을 굳이 자연한 것으로 볼 필요는 없지 않냐는 것이다. 그러나 정체성이 스스로를 되먹여 결과적으로 적대적인 타집단을 설정하는게 모두 우연이라 할지라도, 정체성이 휴머니즘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상기해보자. 휴머니즘은 정체성을 초월하여 이루어지지, 아무리 휴머니즘적 동기에 의해서인들 집단적인 자기 연민이 휴머니즘적 실천으로 이어질 순 없다. 물론 그것들이 무조건적으로 반 휴머니즘인 것은 아니다. 페미니즘도, 기독교도 종합하여 보자면 인간 해방과 휴머니즘의 잣대에 있어 악영향에 비해 선영향이 압도적으로 더 크다. 그러나 그것이 정체성이 내재하는 반 휴머니즘적 잠재성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요소가 될 수는 없다. 잠재성이라 하기도 그런 것이, 그런 반 휴머니즘적 요소들은 살인과 같은 극단적인 형태가 아니더라도 곳곳에서 인간 소외와 인간간의 대결의 요인이 되고 있다. 기독교가 지금까지 해온 거짓말들은 결국 배타적인 교회와 배타적인 인간, 그리고 배타적인 갈등을 만들어 냈으며 페미니즘에 관해서는 두말할 것도 없다. 기독교는 신도들에게 예수의 휴머니즘에 대해 호소하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론을 내린다. 자신들이 예수가 베드로에게 세우라고 명령한 그 교회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고, 성서 어느 부분에도 목사에 대한 이야기가 없음에도 그들은 스스로에게 남을 단죄할 권위와 성경을 해석할 권한을 자임한다. 더 주목할만한 점은 여전히 세상이 반기독교적이며 교회가 아직도 사회에서 배척당하고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정상성을 포기할 용기가 없는 그들이 유일하게 예수와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피해자로서의 정체성 뿐이기 때문일 것이다.      페미니즘은 상황이 더 낫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더 잔인할 수 있는 것은 페미니즘 쪽일 것이다. 페미니즘은 젠더 정체성을 가정하는 사상 가운데 가장 유명한 한 부류다. 고로 이는 마냥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이기 보다, 젠더 정체성을 긍정하고 스스로를 어느 특정 젠더에 소속 시키는 모든 사상에 대해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페미니즘이 초창기에는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규정하기 어렵다. 서프러제트 이전의 페미니즘은 그저 남성 사회에 여성이 참여하는 것에 가까웠고, 서프러제트또한 참정의 보장을 요구하는 것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반면 현대의 페미니즘은 어떤가? 페미니스트들은 통계와 조사자료들을 들이밀며 여성이 남성에 비해 얼마나 차별받고 뒤떨어지고 있는지를 강조하며 혜택을 요구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은 비여성 개인들 중 똑같은 이유로 사회적 보장과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무시한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여성과 비여성, 그들을 대표하는 것들에 집중하지 거기에 가려진 개개인은 무시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사회학의 연구를 인용하는 것중 가장 비윤리적인 짓이라 생각한다. 인간에 대한 원초적인 연민과 사랑에 대한 개념을 최대한 끌어다 정체성과 연동시킨 후에 다른 필요없는, ‘대표되지 않은’ 것들은 배제시키고 소외시켜버리기 때문이다. 혹자는 원래 자기가 속한 곳을 우선하는 게 당연하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렇다, 바로 그런 생각이 아집단과 타집단의 대결로 스스로를 끌고가는 것이다. 세상에 어느 페미니스트가, 어느 기독교인이, 어느 민족주의자가 아집단과 타집단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걸 바라지 않겠나, 그러나 그 생각, 자기 소속 정체성을 우선한다는 그 생각이 인간을 살인자로, 그리고 억압자로 만드는 것이다. 혹자는 또 다시 질문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의 소속감을 없애버리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자면, 성평등주의자가 되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위험하긴 매한가지다. 모든 인간이 여성이거나 비여성이기 전에 인간이라는 사실을 망각케하며, 결국 여성과 비여성의 대표가 정체성 이전의 인간을 대체해버리기 때문이다. 일례로, 2차대전에서 ‘한국인’과 ‘일본인’ 모두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수많은 사람이 징용, 징병되어 끌려가 죽었으니 말이다. 이때, 똑같이 피해자이기만한 한명의 한국인과 한명의 일본인에 대하여 평등주의를 어떻게 적용해야하는가? 일본인은 일본인들이 한 일에 책임이 있으므로 피해를 덜 입고 고통을 덜 받는다고 생각해야하는가? 정체성간의 관계 때문에 일본인을 차별해야하는가? 

 그렇지 않다! 

 고통받는 인간은 고통받는 한국인이나 고통받는 일본인이나 고통받는 여성이나 고통받는 비여성일 수 없다. 그것은 오로지 고통받는 인간으로서 다루어져야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안티페미니스트나 인터내셔널리스트이기 보다는 포스트페미니스트이자 포스트내셔널리스트다. 물론 그러기 전에 휴머니스트가 되려는 수많은 사람가운데 하나이고 말이다.

우리는 정체성을 부정해야만 한다. 우리는 정체성을 해체해야만 한다. 나는 사실상의 항복선언을 요구하는 것이다. 어떤 것으로도 스스로를 대표시키지 않으며 또한 어떤 것으로도 남을 대표시키지 않는 것말이다. 어쩌면 참으로 희한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정상인이 아니라 휴머니스트가 되기 위한 용기를 내어야만 한다. 휴머니즘에서 나온 모든 감동들을 우리는 우리 각자가 속한 정체성에게서 되돌려 받아서 다시 휴머니즘에게 돌려주어야한다. 옳은 인간이 되는 길은 오직 그뿐이라 믿는다. 

그런 감동들은 정체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휴머니즘으로서 그 자체만으로 기능할 수 있다. 또한 당신은 그것이 이미 옳은 것을 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이야기만 꺼내보겠다. 항상 떠올릴 때마다 기분 좋은 이야기다. 내가 방금까지 신랄하게 비판했던 기독교의 이야기임에도 말이다. 

 연천에 한 교회가 있다. 시골지역이지만 유리창문 여러개에 5층이 넘어가는 큰 교회도 있는 곳이다. 물론 내가 말하는 교회는 조금 떨어진 곳에 1층짜리 아담한 교회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배당 하나는 군부대 안에 있었지만 사실 군부대 안에 있는 교회는 같은 목사님이 운영하시기는 해도 다른 교회니 아무래도 민간교회만 다루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 교회는 특별한 교회다. 물론 설교가 특별하거나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목사님이 바둑을 좀 둘 줄 아신다. 그래서 바둑 교실을 여셨다(그래서 이름이 따로 있음에도 흔히들 바둑교회라 부른다). 문제는 교회와는 따로 운영을 하셨다는 점이다. 그래서 종교 상관없이 아이들은 교회에 드나들었다. 역시나 바둑은 게임보다 두뇌개발에 좋다는 인식이 있는지라 엄마들은 폰을 쥐여주는 대신 바둑을 가르치곤 했다(바둑도 사실 게임이나 다름이 없다는 사실은 꽤나 최근에 발견해 냈다). 그리하여 목사 부부에 장로 부부 하나씩밖에 없는 작은 교회는 주중에도 북적였다. 꽤나 어릴 적 이야긴데, 나는 그곳에서 바둑을 둘 때만큼 즐거웠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곳을 떠나고 나서야 목사님이 또 지역 복지사업을 운영하게 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교회가 나날히 번창하는데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목사님의 말씀도 함께 말이다. 

 소박하긴 하지만, 비록 구조에 갇혀서도 휴머니즘은 반드시 작동한다고 말을 하고 싶었다. 좋은 예시를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세상엔 좋은 목사님도 좋은 페미니스트도 좋은 민족주의자도 너무나 많다. 다만 우리는 더 직접적이고, 온전한 휴머니즘을 필요로한다. 

 긴글 읽어주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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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론

23년 한해에 중국인 이 3만 4천명이 순유입됐다. 십삼만명이 들어오고, 십만명이 나갔다. 단지 그뿐만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중국은 꽤나 큰 위협으로 인식되는 것은 분명하다. 당장에 정치권에서는 외교적인 결례는 차치하고 친중 여부를 가리는 것을 너머, 심지어 어느 인물이 화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말이 오가고 있다. 당연히 머릿수로만 영향력에 대해서 따질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눈여겨볼만한 자료임은 분명하다. 논리적 미흡함에도 불구하고 영향력을 머릿수로 치환하여 본다면, 사람들의 중국인과 중국에 대한 주의는 분명 대단하다. 3만 3천의 순유입을 감안하면 말이다. 그러나 그의 10배 가까이 되는 인구를 우리는 매년 맞아들이고 있다. 중국인들과는 다르게 우리는 그들을 기꺼이 보호하며, 각종 의무로부터 면제시키고, 또 억압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스스로를 정의할 의지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어느 누구도 그들을 정의내릴 최소한의 지식에조차 무관심하다. 그들은 청소년이다. 청소년에 대해서 말하고자하는 것은 무수히 많지만, 그러기 전에 청소년이라는 인식자체의 몇가지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청소년은 당연히 생물학적으로 필연적이며 인류사의 모든 부분에 대해서 상존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대체로 청소년들은 ‘아녀자’로, 역사학자들에게는 소유물이자 대상으로 서술되었다. 그렇다고 자주 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운 좋게 나라가 망하거나 하면서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로 적혀있는 게 전부다. 청소년은 오랜 시간동안 소어른으로 인식되어왔다. 애초에 시민권이 확립되기 전이므로 권리를 동등하게 누린다기 보단 그저 발달과정에 대한 무지라 하는게 옳을 것이다. 그러나 차차 여러 동정적인 인권주의자들과 휴머니스트, 그리고 교육철학자들을 통해 청소년들은 ‘발견’’되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차 정부는 청소년들을 그들의 존재에 대한 좋은 명분이자 훌륭한 수단으로 보았다. 정부는 자기 조직과 권력을 재생산하고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공교육을 만들어내어 복종적인 군인과 노동자들을 만들어 내고자 했고, 또 많은 경우에서 그렇게 되었다. 그러고 정부는 자기가 하고 있는 훌륭한 역할에 대해 역설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것이 절대로 대체되어선 안되는 것 마냥 말이다. 여성또한 비슷하게 정부에게 이용당했다. 그러나 여성에게 노동시장을 허용한것은 점차 가부장적 질서의 해체로 이어져 여성은 여러 권리를 요구하고, 또한 쟁취하게 되었다. 세계 대전 들을 생각해보자. 남성의 노동력이 부족해지지 않았다면 여성들이 부엌을 떠날 수가 있었을까?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일이 청소년에게 벌어지지는 않았다. 청소년은 희한하게도, 부조리에 대하여 저항할 의지와 능력을 갖출 때쯤이면 이미 비청소년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세상에 스스로를 청소년으로 정체화 한 세력은 단 하나도 없다.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고, 앞으로 생기기도 요원해보인다. 청소년은 여러가지 특징점을 지닌다. 첫째, 정의상 국민으로 등록된 사람은 청소년일지라도 국민으로 여겨지나, 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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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29
백은별의 <시한부>를 읽고

원래 를 읽고 감상을 적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청소년 작가를 꿈꾸던 시절(다만 나의 작품들은 섹슈얼리티를 숨김없이 다루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내가 청소년 작가로 다루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베스트셀러였기에 추천을 받아 사서 쟁여 놓았을 뿐이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이 책을 읽으며 현대 문학, 아니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정정하자면, 현대 문학의 어느 정의하기 어려운 일부에 대해서 내가 단순히 그것들을 읽는 것 자체에 대하여 역겹다고 느낀다는 확신이 생겼다. 또한 그와 비슷하게 내가 작가로서 벌어먹고 사는게 불가능하겠구나하는 생각을 실제로 하였다. 가 나의 안티테제라 할 정도로 내가 그를 적대시 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는 나에게 굉장한 영향을 주었다. 순전히 이 책의 영향을 받아 나는 장편을 기획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글틴에 올리진 못할 것 같으나 언젠가는 볼 수 있길 바란다. 는 굉장히 감동적인 스토리와 심리전개로 고평가를 받았고,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베스트셀러로서 유명하며 대만등 해외로 번역까지(아시아인이 사는게 다 거기서 거기다) 되었다. 리얼리스트로서도 (뒤에서 다시 이야기할 테지만) 굉장한 실력을 갖추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구구하게 스토리를 다 설명할 만큼 작품을 존중해줄 생각은 조금도 없다. 요약하자면 친구가 죽고 슬퍼서 자살하려다 결국 안 한다는 얘기다. 필자는 어느정도 만드는 캐릭터와 스스로를 분리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아마 독자들도 그게 무슨 소리인지는 다들 알 것이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작가가 캐릭터에게 자신을 너무 녹여냈을 때 생기는 부작용이 크다는 것도 이해하기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가끔씩 작가들은 자기연민에 빠지기도 하니까. 자기연민에 빠진 글은 에둘러 설명할 필요없이 작가가 글을 컨트롤 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또 작가가 미성숙하단 뜻이다. 자기연민에 잔뜩 빠진 글은 간혹 굉장히 서정적으로 문장을 쓸 때가 있는데, 다른 독자는 몰라도 필자는 그 부분에서 독서를 포기한다. 작법서에도 어설프게 미문을 쓰려하지 말라고 되어있다. 너무 자주 등장하는 시적인 문장들은 임팩트도 없을 뿐더러 감정의 과잉, 곧 작가가 글에 감정적으로 매몰되었다는 것의 증거가 된다. 우리가 자주 감명을 받는 미문들은 딱 그부분만 떼어내어 보여주는 경우가 잦기 때문에 아주 조금, 중요한 곳에서만 사용하며, 아예 읽어내려가다 지친 독자에게 잠시 메세지를 건내거나, 그냥 속독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도록 해야한다. 자기연민을 조절하기를 포기한 글은 그냥 토사물같은 글이다. 실험적이라고 한다면 물론 실험적이기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고평가되질 않아 잘 보이지 않을 뿐이지 세상에 널려있어서 정말 잘 쓰지 않는 이상 발전시킬 부분이 아니라 극복해야할 부분이라 할 것이다. 를 읽으면서 글틴에서 자주 봤던 글들이 생각났다. 정말이지, 거칠게 말하면 문체가 똑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냥 백은별 작가가 글을 구조화하고 길게 쓸 의지가 있었을 뿐이지 필자로서는 그 이외의 차이가 아예없다고 느꼈다. 심지어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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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24
근래의 사건들에 대하여

(멘토님은 끝부분 부터 보십쇼)최근들어 벌어진 일련의 사건(분리해서 이해될 것도 아니지만 2개의 비슷한 현상이 간격을 두고 일어났으므로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은 글티너들에게 굉장한 충격이었다. 당장 뒹글귕굴은 이 사안에 대해 다양한 접근이 제시되고 있고, 개중에는 다소 공격적인 것도, 또 그 반대의 성격을 띄는 것들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문제가 정치적으로 실존하는 문제들과 비교될 수 있다는 점이다(그중 다수를 필자가 직접 제시한 바 있다). 필자는 이에 대해 여러 현존하는, 그리고 새로운 접근을 제시하고자 짧은 글을 남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 사건에 대해 파고들어보자. 2025년 6월 12일과 20일, 하루 최대 3-4개의 글이 올라오던 수필게시판에 10-20개 정도의 글이 올라왔다. 대체로 1000자 이하의 짦은 글이었으며 주제가 비슷했기 떄문에 조직적으로 올렸으리라 짐작이 되는 사건이었다. 실제로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계정중 일부가 소속 학교를 명시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추적한 결과 글틴을 교육과정중에서 활용했다는 것을 찾을 수 있었기 떄문이었다. 몇몇 글티너들은 분개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항의의사를 표했다. 글티너들이 이를 불쾌하게 여긴 수많은 이유중 하나는 (화자님의 논지를 인용하자면) 글틴을 학생들에게 강제했다는 것이었고, 이 외에도 멘토님에 대한 부담이나, 월장원에 대한 저평가등 중요한 이유들은 더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 사건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글틴에는 분명히 글틴의 홍보 차원에서 이 사건이 비단 부정적이기만 할 수는 없다고도 주장한다. 문학의 보급 차원에서 이는 어쩌면 문학이 더 대중화되고 있고, 또 이를 통해 더 대중화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멘토님에 대한 부담이나 문예위에서 멘토 인력을 확충하면 될 일이다. 역사적으로 가능했었음은 여러 군데에서 지적되었다. 이에 대해서 한가지 짧게 짚을 점은, 문학가로서 평범한 한 인간에게 문학에 참여하는 것을 권하기란 꽤나 난감한 문제라는 것이다. 문학은 잉여적 노동이고, 항상 그래왔으며, 또한 그런 부분에 대해서 소모적인 동시에 위선적이기까지 하다. 물론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한 진부한 공격이긴 하지만 필자는 예술의 본질이 아마추어리즘에 있다는 데에서 한치도 물러날 생각이 없다. 이에 대해선 후에 다루도록 하고, 문학을 권함에 있어 문학적 창작이 대중화 되는 것에 대하여서도 그것이 마냥 좋기만 한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좋은 문학은 문학가의 수가 아니라 문학가의 인간에 대한 통찰과 이해에 인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더이상 글틴이 ‘우리’의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생각해보자. 이번 건은 큰 충격에도 불구하고 그 실체를 찾아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다른 조직적인 움직임이 나타났음에도 그에 대해 분석할만한 다른 어떤 증거도 나오지 않는다면 그때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개인적 수준의 단순 도배가 여러 형태로 제지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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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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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ed
    공감합니다

    니체가 한 말이 마침 이 글에 알맞는 것 같아 인용해보고자 합니다. "개인에게 광기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집단, 당파, 민족, 시대 등에는 거의 예외없이 광기가 존재한다." 언젠가는 집단의 일부가 아닌 독립적 주체로서의 인간들이 존재하는 세상이 오길, 그리고 여성스러움, 혹은 남성스러움, 흑인, 백인스러움 등이 아닌 오직 얼마나 인간스러운지만을 고려하는 세상이 오길 기대해 봅니다.

    • 2025-07-06 20:03:07
    Ted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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