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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해체의 휴머니즘 Op.38

  • 작성자 기능사
  • 작성일 2025-07-03
  • 조회수 818

사람들이 바라던 말던 인류 앞에 서있는 질문은 명백합니다. 사람들에게 육체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무수한 고통을 안기는 애국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긴요하거나 고결한 것이 될 수 있는냐는 거지요.

-톨스토이, 존 맨슨의 편지에 대한 답변 중-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감동이 있다. 그것들은 대체로 거의 완벽히 일치하거나 어느 종합적인 선을 향한다고 확신된다. 그것들은 인간을 허무에서 구원하며, 목적성과 인간다움을 부여한다. 그것을 맛본 인간은, 대체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으나, 상황에 따라 죽을 수도, 죽일 수도 있으며, 살거나 살릴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 당장에도, 그 4가지 모두가 동시에, 그리고 온전한 확신에 힘입어 진행되고 있다. 
 감동이라는 단어가 좋은 문장에는 안 어울릴 것 같다. 초보적인 감상에나 어울릴 단어이니 말이다. 그러기에 여기서 정의하고 가는 편이 좋을 것이다. 감동은 수십억명의 인간이 2000년 전 어느 인간의 부활을 믿는 이유이자 또한 수십억명의 인간이 부모로서의 책임감을 옹호하며 이행하려는 이유이고 또한 이스라엘과 이란, 파키스탄과 인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인간들이 인간들을 정당하게 죽이는 유일한 이유이다. 그것의 역사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 역사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그 역사가 인류와 상존했었다는 것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또한, 대체로 그것에 대한 분석 자체가 모욕으로 여겨졌다. 생각해보라, 어느 양놈이 와서 우리 민족의 민족주의가 열등감과 식민지배에 대한 피해의식, 경제개발에 대한 허영심과(생각해보자, 나나 당신이나 경제 개발에 동참하기라도 했나?), 그리고 정부의 프로파간다 때문이라 하면 다 화를 낼 것 아닌가? 이처럼 그 감동은 직관적이고 단순하거나,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논리적 분석은 자연히 모욕적이다. 그러한 분석은 그런 감동을 피선동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어느 명확한 맥락 안에서는 가능할 수도 있지만, 깊이 들여다 보면 결국 인간 비하로 끝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감동이 얼마나 강하다는 건가? 단순히 눈물 몇방울 나오는 영화를 가지고 우리가 전 재산을 팔아버리고 어딘가로 떠나거나 군대에 입대하진 않는다(100년 전만해도 실제로 그랬다는 것을 상기하자). 그러나 보편적인 맥락에서 이해가 어렵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당장에 여러 종류의 독립운동, 그리고 남과 북의 여러 사상가들, 그리고 민주화 운동까지 우리 사회의 컨텍스트에서 감동들은 자주, 그리고 각 사건사건마다 주목할만한 위력으로 기능해왔다. 현재도 그렇다. 8년전의 박근혜와 지금의 윤석열을 탄핵시킨 힘은 바로 무엇인가? 그것과 동시에 왜 같은 민족의 또다른 사람들은 그 ‘힘’을 피선동자들이라 규정하며 윤석열을 자유민주주의의 투사라고 옹호하는가? 

 그러한 힘이 생기는 것은 어느 합리적이고 건조한 진실이나 과학적 통찰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의 인지구조를 거치며 어떻게 기능하는 지에 있다. 인간은 이미 이것을 누구보다 더 잘안다. 일례로, 어느 바람직한 기독교 우파의 예시를 들어보자. 그는 분명 해방주의적 이데올로기들이 기독교와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의 상존 불가능한 적이라 볼것이다. 차별 금지법에 대해서도 불것은 있으나 그저 그가 특정 정파의 사람들을 싫어하고,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이 피선동자이기 때문이라는 데 주안점이 있으므로 그 정도 말해 두자. 그는 탄핵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종북 내지는 친북적인, 혹은 외교 실용주의라는 이름 아래 북한 의제를 기피하는 어느 특정 정파의 기득권적 소수에게 선동당했다고 말할 것이다. 차별금지법 찬성을 필두로한 진보주의자들에게는 차별금지법이 내재한 역차별적, 그리고 종교적 양심과 배치되는 규정을 문제삼을 것이다. 종교는 굉장히 중요하다. 기독교를 예시로 들자면, 기독교가 지금까지 스스로를 지켜온 모든 논지들은 그 감동에서 출발하는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활을 왜 의심없이 믿는가? 아니, 애초에 의심을 하는게 너무나 당연함을 넘어 예수가 부활을 하지 않은 것이 차마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 부활을 역사적인 사실로 믿는 것이 공식적인 입장이 될 수가 있는가? 그것은 그 부활이 지니는 감동과 의미 때문이다. 오직 그뿐이다. 기독교인이 지녀야하는 수많은 다른 믿음들도 비슷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성소수자와의 연대의식과 민주화 정신 또한 그와 같다는 것이다. 무엇이 진실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예수가 진정으로 부활하여 무덤에서 걸어 나왔는지, 대공분실에서 누가 죽었고 성소수자들이 어떻게 차별 받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그것들의 감동만을 우리는 받아들이고 믿기 때문이다. 부정선거와 광우병에 대한 여러 시위에 대해서도 궁금한 이들에겐 어느정도 생각해 볼만한 답이 되었을 것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이러한 분석이 비하적인 목적으로 자주 사용되는 것과는 무관하게, 나로서는 이 감동이라는 개념이 지니는 가치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가 없다. 아니, 애초에 감동은 가치의 근원이다. 감동없이 가치 납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며, 심지어 그렇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필히 후험적인 교육의 결과일 것이다. 어쩌면 혹자는 그런 가치들과 감동을 냉소하며 그런 감동과 가치를 삶에서 제거하려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가치들로부터의 해방은 필연적으로 불가능하다. 대체로 그런 경우는 에고이스트가 될게 뻔하며, 또 그런다 한들 그 이후의 허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인가? 설혹 생각하기를 멈추는데 도가 틀어서 정말로 자연 상태의, 가장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인간이 가능하다 해보자(물론 내가 직접 그려내기에는 무리가 있다. 자연 상태에서는 진화생물학적인 이기성과 이타성의 발현이 있는데, 이를 해석해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 아이히만보다도 무섭고 추악한 인간일 것이다. 물론 상황이 그리된다면 말이다. 
 내가 비판하고자 하지도 않는 감동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히 자아성찰의 필요성을 일깨워주기 위함만은 아니다. 그것은 그 감동이 어느 바보같은 개념에 점유당하고 이용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단 최근의 몇 세기들 뿐만 아니라, 어쩌면 진화생물학적 압력에 힘입어 인류와 거의 공존하다시피한 개념이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인간이 인간을 죽이고 싶게 만들고, 죽일 필요가 있게 만들며, 죽여야 겠다고 마음먹게 만들고, 죽이게 하며, 그 죽임을 옹호하게 한다. 오, 그러나 살인만을 주제로 볼것은 아니다. 살인이 빈번하지 않다고는 못하지만, 결코 보편적인 현상으로 두고 분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체성이다. 물론 정체성이 현대적인 용어지만, 그 이전의 역사에 대하여 사용하는 것이 역사주의적 오류이진 않을 것이다. 자의적인 자기 규정이 있고, 그 대상이 되는 집단이 명확하며 실존할 때 그것은 정체성이 되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자하는 바는 정체성의 여러가지 다른 해석들과는 다를 수 있지만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다고 본다. 정체성에 대해서는, 민족주의자의 페미니스트는 같다. 사실, 거의 같은 정도도 아니고 완전히 같다고 보아도 좋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 달아둔 에피그래프가 페미니즘은 물론이고, 다른 모든 정체성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주의나 페미니즘의 예를 들었지만, 민족주의자나 페미니스트가 정체성 그자체로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분명 그럴 때도 있지만, 더 본질적으로 그들은 정체성을 인식하고 수용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 예를 들어서 내가 한국 민족주의자라면 한국인이 다른 인종이나 민족과는 다르다는 걸 이해하는 것에서 부터 출발해야할 것이다. 물론 거기까지는 문제를 못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애초에 민족주의와 페미니즘이 여전히 우리의 정치적인 사고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지금부터 이야기할 모든 과정에 대해서 문제를 못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모두 반박할 생각이다. 

 우선 어느 정체성을 인지하고 그를 인정하며, 가장 중요하게는 그 정체성이 다른 집단과 상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 부분에서 퀴어의 프라이드와 기독교의 거룩함은 거의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항상 정체성은 다름을 강조하며, 그를 통해 구심적인 힘을 받는다. 그 힘은 자기 연민을 먹으며 자라나서, 결국은 스스로를 되먹이는 지경에 까지 이른다. 독일의 민족주의를 보자. 독일의 민족주의는 꽤나 합당한 이유에서 시작했다. 바로 나폴레옹말이다. 독일인들이 세운 왕국과 제국을 굴복시켜 왕을 모욕하고 황제의 딸을 취했으며 자신들을 느슨히나마 이어주던 신성로마제국을 해체시켜버린 그 나폴레옹 말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당연히도 자기 제국과 함께 무너져버렸다. 그들은 처음엔 스스로를 지키려고, 후엔 다시 그들의 제국을 세우려고, 그 다음엔 모욕받은 적들에게서 그들의 존립을 지키려고 총을 들었다. 그 가운데에 언제부턴간 ‘애국’이 도그마이자 패러다임이 되어 각 개개인은 가면 갈수록 더 강한 애국자가 되었고 종국엔 아무도 막을 수는 없게 되었다. 애국주의의 열광하던 청년들은 각각 관료와 장군들이 되어 타 혹은 아의 완전한 소멸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또한 실제로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대략 150년간의 간략한 독일 민족주의사다. 아와 타의 대결로서 독일의 사례는 어쩌면 가장 극단적인 예시일 것이다. 그들은 수백만을 잃고서 원하던 영광이나 제국은 커녕 오히려 땅을 잃었으니 말이다. 

 이는 이기심을 경계하라는 단순한 훈시가 아니다. 혹자는 이렇게 질문할 지도 모른다. 분명 좋은 정체성, 좋은 타자화도 있지 않겠냐고, 정체성 자체가 아집단과 타집단의 대결을 굳이 자연한 것으로 볼 필요는 없지 않냐는 것이다. 그러나 정체성이 스스로를 되먹여 결과적으로 적대적인 타집단을 설정하는게 모두 우연이라 할지라도, 정체성이 휴머니즘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상기해보자. 휴머니즘은 정체성을 초월하여 이루어지지, 아무리 휴머니즘적 동기에 의해서인들 집단적인 자기 연민이 휴머니즘적 실천으로 이어질 순 없다. 물론 그것들이 무조건적으로 반 휴머니즘인 것은 아니다. 페미니즘도, 기독교도 종합하여 보자면 인간 해방과 휴머니즘의 잣대에 있어 악영향에 비해 선영향이 압도적으로 더 크다. 그러나 그것이 정체성이 내재하는 반 휴머니즘적 잠재성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요소가 될 수는 없다. 잠재성이라 하기도 그런 것이, 그런 반 휴머니즘적 요소들은 살인과 같은 극단적인 형태가 아니더라도 곳곳에서 인간 소외와 인간간의 대결의 요인이 되고 있다. 기독교가 지금까지 해온 거짓말들은 결국 배타적인 교회와 배타적인 인간, 그리고 배타적인 갈등을 만들어 냈으며 페미니즘에 관해서는 두말할 것도 없다. 기독교는 신도들에게 예수의 휴머니즘에 대해 호소하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론을 내린다. 자신들이 예수가 베드로에게 세우라고 명령한 그 교회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고, 성서 어느 부분에도 목사에 대한 이야기가 없음에도 그들은 스스로에게 남을 단죄할 권위와 성경을 해석할 권한을 자임한다. 더 주목할만한 점은 여전히 세상이 반기독교적이며 교회가 아직도 사회에서 배척당하고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정상성을 포기할 용기가 없는 그들이 유일하게 예수와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피해자로서의 정체성 뿐이기 때문일 것이다.      페미니즘은 상황이 더 낫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더 잔인할 수 있는 것은 페미니즘 쪽일 것이다. 페미니즘은 젠더 정체성을 가정하는 사상 가운데 가장 유명한 한 부류다. 고로 이는 마냥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이기 보다, 젠더 정체성을 긍정하고 스스로를 어느 특정 젠더에 소속 시키는 모든 사상에 대해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페미니즘이 초창기에는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규정하기 어렵다. 서프러제트 이전의 페미니즘은 그저 남성 사회에 여성이 참여하는 것에 가까웠고, 서프러제트또한 참정의 보장을 요구하는 것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반면 현대의 페미니즘은 어떤가? 페미니스트들은 통계와 조사자료들을 들이밀며 여성이 남성에 비해 얼마나 차별받고 뒤떨어지고 있는지를 강조하며 혜택을 요구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은 비여성 개인들 중 똑같은 이유로 사회적 보장과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무시한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여성과 비여성, 그들을 대표하는 것들에 집중하지 거기에 가려진 개개인은 무시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사회학의 연구를 인용하는 것중 가장 비윤리적인 짓이라 생각한다. 인간에 대한 원초적인 연민과 사랑에 대한 개념을 최대한 끌어다 정체성과 연동시킨 후에 다른 필요없는, ‘대표되지 않은’ 것들은 배제시키고 소외시켜버리기 때문이다. 혹자는 원래 자기가 속한 곳을 우선하는 게 당연하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렇다, 바로 그런 생각이 아집단과 타집단의 대결로 스스로를 끌고가는 것이다. 세상에 어느 페미니스트가, 어느 기독교인이, 어느 민족주의자가 아집단과 타집단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걸 바라지 않겠나, 그러나 그 생각, 자기 소속 정체성을 우선한다는 그 생각이 인간을 살인자로, 그리고 억압자로 만드는 것이다. 혹자는 또 다시 질문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의 소속감을 없애버리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자면, 성평등주의자가 되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위험하긴 매한가지다. 모든 인간이 여성이거나 비여성이기 전에 인간이라는 사실을 망각케하며, 결국 여성과 비여성의 대표가 정체성 이전의 인간을 대체해버리기 때문이다. 일례로, 2차대전에서 ‘한국인’과 ‘일본인’ 모두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수많은 사람이 징용, 징병되어 끌려가 죽었으니 말이다. 이때, 똑같이 피해자이기만한 한명의 한국인과 한명의 일본인에 대하여 평등주의를 어떻게 적용해야하는가? 일본인은 일본인들이 한 일에 책임이 있으므로 피해를 덜 입고 고통을 덜 받는다고 생각해야하는가? 정체성간의 관계 때문에 일본인을 차별해야하는가? 

 그렇지 않다! 

 고통받는 인간은 고통받는 한국인이나 고통받는 일본인이나 고통받는 여성이나 고통받는 비여성일 수 없다. 그것은 오로지 고통받는 인간으로서 다루어져야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안티페미니스트나 인터내셔널리스트이기 보다는 포스트페미니스트이자 포스트내셔널리스트다. 물론 그러기 전에 휴머니스트가 되려는 수많은 사람가운데 하나이고 말이다.

우리는 정체성을 부정해야만 한다. 우리는 정체성을 해체해야만 한다. 나는 사실상의 항복선언을 요구하는 것이다. 어떤 것으로도 스스로를 대표시키지 않으며 또한 어떤 것으로도 남을 대표시키지 않는 것말이다. 어쩌면 참으로 희한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정상인이 아니라 휴머니스트가 되기 위한 용기를 내어야만 한다. 휴머니즘에서 나온 모든 감동들을 우리는 우리 각자가 속한 정체성에게서 되돌려 받아서 다시 휴머니즘에게 돌려주어야한다. 옳은 인간이 되는 길은 오직 그뿐이라 믿는다. 

그런 감동들은 정체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휴머니즘으로서 그 자체만으로 기능할 수 있다. 또한 당신은 그것이 이미 옳은 것을 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이야기만 꺼내보겠다. 항상 떠올릴 때마다 기분 좋은 이야기다. 내가 방금까지 신랄하게 비판했던 기독교의 이야기임에도 말이다. 

 연천에 한 교회가 있다. 시골지역이지만 유리창문 여러개에 5층이 넘어가는 큰 교회도 있는 곳이다. 물론 내가 말하는 교회는 조금 떨어진 곳에 1층짜리 아담한 교회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배당 하나는 군부대 안에 있었지만 사실 군부대 안에 있는 교회는 같은 목사님이 운영하시기는 해도 다른 교회니 아무래도 민간교회만 다루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 교회는 특별한 교회다. 물론 설교가 특별하거나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목사님이 바둑을 좀 둘 줄 아신다. 그래서 바둑 교실을 여셨다(그래서 이름이 따로 있음에도 흔히들 바둑교회라 부른다). 문제는 교회와는 따로 운영을 하셨다는 점이다. 그래서 종교 상관없이 아이들은 교회에 드나들었다. 역시나 바둑은 게임보다 두뇌개발에 좋다는 인식이 있는지라 엄마들은 폰을 쥐여주는 대신 바둑을 가르치곤 했다(바둑도 사실 게임이나 다름이 없다는 사실은 꽤나 최근에 발견해 냈다). 그리하여 목사 부부에 장로 부부 하나씩밖에 없는 작은 교회는 주중에도 북적였다. 꽤나 어릴 적 이야긴데, 나는 그곳에서 바둑을 둘 때만큼 즐거웠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곳을 떠나고 나서야 목사님이 또 지역 복지사업을 운영하게 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교회가 나날히 번창하는데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목사님의 말씀도 함께 말이다. 

 소박하긴 하지만, 비록 구조에 갇혀서도 휴머니즘은 반드시 작동한다고 말을 하고 싶었다. 좋은 예시를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세상엔 좋은 목사님도 좋은 페미니스트도 좋은 민족주의자도 너무나 많다. 다만 우리는 더 직접적이고, 온전한 휴머니즘을 필요로한다. 

 긴글 읽어주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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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들을 다그침

오랜만에 긴 글을 적어보려고 한다. 내가 그간 혹자, 혹은 독자라 부르던 사람들에 대한 나의 애정과 존중은 너무 깊이 파묻은 탓인지 잠시 옆에 치워두고 싶다. 한국어에 대한 오랜 고민이 있었다. 내가 읽어온 한국어는, 특히나 문학에 있어서 의지의 표출이었다. 그것은 그것 자체로 본질이라기 보다도, 더 큰 맥락을 대표하기 위해 존재했다. 상록수와 수난이대를 읽던 내게 아몬드나 그 엇비슷한 표지들의 요즘 책들, 그러니까 말 그대로의 픽션들은 내게는 너무도 난해한 것들이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외계의 스토리들, 그리고 낯선, 그러니까 엉뚱하리만치 이상한 단어들을 가져와다 쓰는 서평들을 읽다보면 그 소설들은, 또 문학은 현실의 프라모델이라기보단 또봇이라거나 카봇이라거나 하는 대중적인 메카물의 피규어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즐기거나 즐기지 않건간에, 사유라거나 깊이라거나 하는 단어들, 그러니까 해설하자면 적어도 500쪽은 되는 책들에서나 기대하고 찾던 작가들 본연의 누적된 생각들은 뜨고 지는 사조들의 저편으로 이미 사라졌다고밖에는 내게 남아있는 결론이 없다. 예수가 말했듯 비판받기 싫다면 비판하지 말아야하므로 나는 나의 주장을 만듦에 있어 어느정도는 책임감을 느낀다. 한국어는 단지 문학의 필요가 전혀 없는 맥락이다. 한국 문학의 세련된 학풍, 그리고 여러 비평, 발문, 서평등으로 지껄여지는 공명은 한국어와는 완전히 무관하게, 또 괴이하게 스스로 발전하며 작동한다. 한국 문학의 고요하고 정제된, 말하자면 연구된 문장으로서의 문학은 어쩌면 고도의 완곡한 풍자극이 아닐까도 생각한다. 한국어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텍스트는 작가들의 불평불만은 고결하게 풀어낸 보여주기식의 자기고백이나 오덕들의 엔터테인먼트라고밖에 할 수 없는 픽션들이 아니라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다. 우리 백치들은 우리가 마치 이전 사조들보다 위대한 걸 건축해 낸 것 마냥 떠든다. 무슨 소설집이 넷플릭스보다 재밌다느니 토마토가 심장보다 단단하다느니 하는 모든 것, 또, 굳이 꺼낼 필요는 없겠으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싶다는 등의 모든 너무 자기의식적인 나머지 병신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비아냥으로까지 들리는 개소리들말이다. 말해왔던 바지만, 엔터테이너로서의 길을 갈 사람들을 응원한다. 열심히 해라. 사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선 차라리 작가 기획사를 차려서 사업을 하는게 훨씬 낫지 않을까도 싶지만 우리 백치들은 그럴 염치는 없는 것 같다. 물론 사업성이 떨어지는 것도 있고 말이다. 나는 문학의 구성요소로서의 메세지라는 개념을 싫어한다. 직접적으로 제시되는 것은 없지만서도, 은연중에 문학은 근본적으로 엔터테인먼트지만 중심적이며 추상적인 메세지가 있어야 여운이 남는다거나 더 완결적인 작품이 된다거나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쓴다면 쓰는 거다. 쓰는 것에 대해 연역적으로 선행하는 목적같은 건 있을 수 없으며 쓰는 것은, 그리하여 적히는 것 그 자체로 온전한 목적이며 메세지다. 기껏해봐야 로맨스물, 단순성장물 쓸거면서 페미니즘, 기후변화같은 것들을 찍먹하는 걸 나는 순수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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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20
잃어버린 총체소설에 관하여

우리 문학이 점점 짧아진다. 오랫동안의 사견이었으나, 단지 사견으로 끝날 주장이 아니다. 실제로도 그렇다. 당장 어느 서점에 가더라도, 대하소설은커녕 엄지손가락보다 두꺼운 소설들도 곧장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하소설은 대가 끊겼다. 2000년대 초에 나온 것 역작들만 옛 독자들이 알아볼 뿐이고, 등단 수십 년을 바라보는 옛 작가들의 추억 이야기가 이제는 정말로 대하소설의 일몰이라고 밖엔 볼 수 없다. 실제로 교보문고에서도 그러한 장편 중에선 (당연히 경장편들은 제하고) 조정래와 김진명, 무라카미 하루키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전부다하는 말도 나온다. 그러나 현대의 트렌드는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라거나 대중의 테이스트가 너무 스낵컬처에만 맞게 퇴화했다거나 하는 분석은 차치하고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대하소설, 더 나아가, (대하소설은 그 자체로는 그냥 플롯 구조가 완만한 거대한 소설이라는 뜻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총체 소설의 필요성을 알아야만 한다. 총체 소설은 사학이다. 역사를 재구함에 있어 기타 사료와 수량화된 자료들만큼이나 그 맥락을 증언하는 것은 문학의 존재다. 토지가 그러했고, 한강의 여러 작품이 그러했으며, 한국 문학의 원초를 거슬러가 본다면 역시나 같은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소설이므로 그것이 실체적인 진실이라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실체적인 진실은 사실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그 때문에 작가는 집필의 의지와 과거의 불확실성 사이에서 사투하고 공부하고 또 갈등해 나가야 한다. 또 그렇게 작품이 발표된다면 그것은 다시 공격받고 다른 매체, 어쩌면 다른 소설로서 반박될 것이다. 그러한 과정이야말로 역사에 기여하는 올바른 방법이다.총체 소설은 그러한 이유로 맥락을 충분히, 그리고 최대한 완전히 전달하기 위해 필요하다. 혹은 필요했다. 그러나 요즘의 사조는 그러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굳이 역사 소설이라 표현할 필요는 없을 듯싶다. 굳이 과거사만을 위한 총체소설일 필요는 없으므로) 소설의 필요성은 다양한 의미에서 무시된다. 짧은 가방끈으로 뭐라 할 말이 있겠냐마는 현대의 도그마는 역시나 개인이다. 더 나아가 사회의 대비로서의 개인이다. 집단의 안티로서의 개인, 수량화된 전체 속에서 억눌리어 살아가는 개인, 무채색의 수많은 ‘개체’들 간에서 억눌리어 살아가는 개인이다. 비단 캐릭터가 여러 명 등장하는 소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이야기는 오로지 개체에서 개인으로 정체화되어야만이 성립한다. 그런 과정에서 개인이 얕아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클리셰를 그대로 쓰는 작가가 어딨겠냐마는 독자들이 원하는 건 이해 가능한, 또 그렇기에 정상적인 형태로 감정적인 주인공이지 까발려진 타자가 아니다. 그러나 사학이기보다 엔터테인먼트로서의 길을 문학이 택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으로 남을 것이냐하는 걸 생각해야 한다. 우리 인간군(군체로서의 개체들, 나는 사회라는 개념을 싫어한다)이 고민해야 할 것을 고민하지 않은 세대로 남아도 되느냐고, 정말 그래도 되느냐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혹자는 사회가 정말 필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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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10
기능사 난해시 개론 -청소년기 무명작들을 중심으로-

요즘 시 게시판에서 멘토링으로 배우고 느는 바가 적은 것 같아 이참에 스스로의 시론을 되돌아보고 미학을 정리해보려구 합니다. 멘토링욕을 돋우기 위해 극히 자아도취적인 표현을 썼으니 이점 참고 바랍니다. 기능사는 글틴에서 단연 가장 개성있는 글을 쓰는 작가 중 하나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글은 천방지축이고, 대부분의 경우에선 그 난해함이 그 불규칙성, 그리고 의미의 발산을 더욱 확신케 한다. 그는 언젠가 스스로 유치한 글을 쓰지 않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글을 더욱 어렵게 쓰는 것 같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난해한 시들이 그런 다다이즘으로만 비치진 않는다. 그것들은 더욱 높은 층위에서 시의 가능성을 질문하는데, 그 중엔 특별히 예로 들어 설명할 것이 있다. Ignorabimus Op.64저쪽 굴 끝엔 이그노라비무스*들이 삽니다 산다고 하긴 좀 뭐 하죠 아인슈타인**과 힐베르트***의 시체나 처리하는 게 전부인 한량들이니 토막 내어서 묻어버리지 않으면 아마 그들도 버티기 힘든가 봅니다 그들의 시체는 그러기보다도 단단한 번뜩이던 그들의 눈빛은 대단한가 봅니다 중절모를 썼을 땐 몰랐겠지만 백 년씩이나 그들을 잘라내고 있으니 그들은 굴밖을 나와서 은하수를 볼 자격 따윈 없습니다 그들은 울어야 합니다 그들은 충분히 울지 않았습니다 신이 되기에는 아무래도 그들의 우울증은 하이젠베르크****는 나치였고 괴델은 병신*****처럼 죽었다죠 YHWH는 금세 숨어버렸습니다 뿌옇게 떠버린 먼지 속으로... 칸토어******와 플랑크*******는 아무래도 몰랐을 겁니다 YHWH는 분명 그들이 신이라 불렀던 것을 두려워했겠죠 --- 아주 재밌는 꿈이 있습니다 제 신실한 아내에겐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야겠군요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걸 질색할 테니 말입니다 만약에 말입니다 세상이 마인크래프트같이 그저 물리엔진 속 세계이고 우리가 그저 컴퓨터라면 우리 머릿속에 또 다른 세계를 만들면 그 속의 인간은 우리를 인지할 수 있겠습니까? 아주 두렵습니다 YHWH의 상상일 뿐이라면 어쩌냔 말입니다 난 그를 비웃습니다 그가 인간이거나 아니기 전에...*19, 20세기에 존재했던 철학사조. 진리따위는 알 수 없을 거란 입장이 특징적이다.**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알것이다.****독일의 물리학자 불확정성 원리의 주창자다.*****오스트리아, 미국의 수학, 수리철학자. 불완전성 정리로 유명하다.******우리를 위해 칸토어가 만들어준 이 낙원에서 그 누구도 우리를 내쫓을 수는 없으리라*******새로운 과학적 사실은 설득을 통해 패러다임이 되기보다는 반대자들이 죽고 그에 친숙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며 기존의 원리를 대체한다.Ignorabimus는 그의 난해시 중에서 특기할만한 한쪽 끝에 있다. 특별히 이 시에 있어선 전에 기능사가 Ted에게 부탁한 설명문이 있다. 저는 시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해서 감히 뭐라 말할 권리가 있을지나 모르겠지만 그냥 몇가지 와닿은 부분과 글을 읽으며 든 생각이라도 몇가지 써보고자 합니다. 여기서는 수학

  • 기능사
  • 2025-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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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ed
    공감합니다

    니체가 한 말이 마침 이 글에 알맞는 것 같아 인용해보고자 합니다. "개인에게 광기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집단, 당파, 민족, 시대 등에는 거의 예외없이 광기가 존재한다." 언젠가는 집단의 일부가 아닌 독립적 주체로서의 인간들이 존재하는 세상이 오길, 그리고 여성스러움, 혹은 남성스러움, 흑인, 백인스러움 등이 아닌 오직 얼마나 인간스러운지만을 고려하는 세상이 오길 기대해 봅니다.

    • 2025-07-06 20:03:07
    Ted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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