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 없는 당신 얼굴 앞에서 - 알랭 기로디의 <미세리코르디아>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5-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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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수 1,293
알랭 기로디의 2024년 영화 <미세리코르디아>는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보다 정확히는 자동차의 운전자)의 시점으로 시작한다. 카메라는 꽤 오래간 우측에서 직행하는 자동차의 시점에 놓여있다가 돌연 좌측에서 직행하는 자동차의 시점으로 옮겨가는데, 이 장면을 보면서 일차적으로 찾아오는 것은 다름 아닌 당혹감이다. 오른쪽에서 직행하던 카메라가 왼쪽에서 직행할 때, 180도 상상선이 파괴되고 영화의 규칙은 무너지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당혹감에 사로잡혀 영화를 더듬거리고 있을 때 즈음, 도로를 질주하던 자동차는 산골 마을의 작은 제빵소 앞에서 멈춰 선다. 이야기는 그 제빵소에서 시작된다. 조금 다르게 말해보자면, 영화는 규칙이 무너진 바로 그 상태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그렇기에 <미세리코르디아>의 첫 장면은 꽤나 도발적으로 다가온다.
사실 영화의 오프닝 씬에서 사용된 몽타주 -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카메라가 옮겨갈 때 - 는, 여느 영화에서 인물과 인물이 서로를 마주 보고 대화할 때마다 소비되어 왔던 보편적인 역쇼트처럼 기능한다.
다만 이 영화 속 시퀀스를 두고 ‘보편적’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분명 석연찮은 지점들이 있는데, 무수히 많은 영화 속에서 사용된 역쇼트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마주하는 ‘대응의 풍경’을 담아내는 반면, 이 영화의 역쇼트 시퀀스에는 서로를 마주보는 인물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속 자동차가 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 그곳에 놓여있는 건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쉼 없이 흘러가는 자연의 풍경이다.
그렇기에 고속도로 위에서 벌어지는 이 역쇼트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물질적인 존재(들), ‘얼굴과 얼굴의 대면’이 아니라, 도로 위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비물질적인 세계의 만남이자 대면’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세리코르디아>는 실체없이 서로를 마주보는 것들에 대한 탐구라고 볼 수 있다.
영화는 동성애자 제레미가 고향마을에서 친구 빈센트를 우발적으로 살해, 유기하고 자신의 범행을 은폐시키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과정에서 빈센트의 어머니는 제레미가 자신의 아들을 죽였다고 의심하며, 늦은 새벽 경찰에게 제레미가 머물고 있는 2층 방문을 열쇠를 쥐어주고, 그의 방을 수색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뿐 아니라 제레미가 자고 있을 때면 예고 없이 그의 곁으로 다가가 “네가 빈센트를 죽였니?”라고 속삭이듯 물어보기까지 한다. 그러다가 제레미가 잠에서 깨어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듯 태연하게 고개를 돌리고, 제레미가 경찰이 새벽에 자신의 방을 뒤졌다고 호소할 때는, "악몽을 꾸었구나"라고 맞받아 친다. 그녀는 자신이 제레미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애쓴다.
여기서 희한한 것은 제레미 역시 그녀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빈센트의 어머니는 제레미가 자신의 아들을 죽였다고 의심하고 있고, 제레미 역시 빈센트의 어머니를 의심하고 있다. 이 이중의심의 결속은 두 사람을 더욱 먼 곳으로 떨어트려 놓는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제레미는 막막한 어둠으로 뒤덮인 밤거리를 혼자 배회하고, 빈센트의 엄마는 영화에서 자취를 감춘다. 서로를 마주하게 되는 장면에서는 최대한 자신들의 본심을 숨긴다. 그 둘은 서로가 모든 것을 숨기며 대화하고, 모든 것을 가리며 행동한다. 마치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실체 없는 풍경들이 서로를 마주했던 것처럼, 그들 또한 실체 없이 서로를 마주한다.
여기에서 이 ‘실체 없음’은, 타자에게 상흔을 입히기 위한 교묘하고 영악한 술수가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기에 발생해 버린 하나의 윤리적 태도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빈센트의 어머니는 제레미가 상처받을까 봐 그에게 직접적으로 ‘너를 의심하고 있다’는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고, 그가 ‘수면’이라는 무의식 공간에 입회했을 때에만 조심스럽게 ‘빈센트는 어디 있니?’라고 물어볼 뿐이다. 제레미 역시 마찬가지다. 그 스스로 자신이 빈센트를 죽였다고 고백해버린다면, 빈센트의 어머니는 분명 실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녀에게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이처럼 죄책감이라는 구렁에서도 타자를 최대한 존중하고자 하는 노력이 영화의 전반에 펼쳐져있다.
이와 같은 윤리적 태도는 감독을 통해서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영화에서 알랭 기로디는 얼떨결에 살인자가 되어버린 제레미를 혐오와 질타의 눈으로 바라보기보단, 영화 전반에 걸쳐 사랑으로 보듬으려고 노력한다. 영화 속 신부의 말을 빌려보자면, "나는 모두를 사랑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알랭 기로디의 태도가 바로 그런 것이다.
여기서 '신부'는 감독의 태도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여겨볼만하다.
영화 속에서 신부는 제레미의 범행을 모두 깨닫게 되는데, 그는 제레미를 질타하지 않고 오히려 공범이 되기를 자처한다. 결말에 이르면 신부가 빈센트의 시체를 교회 앞에 묻어버리는 기이한 상황까지 도달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신부의 순결은 철저히 파괴되는데, 그 때문에 영화는 신부가 제레미를 보듬으려고 하는 순간부터 신부의 음부를 보여주고, 그에게 침을 뱉는다. 여기서 감독은 자신의 입장을 표방하고 있는 신부에게 무척 객관적으로 다가서고 있는 듯 하다. 또한 이 영화는 전적으로 제레미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도 불구하고 제레미의 시점 쇼트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영화가 결코 살인자의 시점에 놓여져서 편향적으로 그를 옹호하지 않으며, 모두의 시선과 사건을 존중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인물과 인물(또는 풍경과 풍경)이라는 개별적인 이미지들(쇼트와 쇼트)로 서로를 마주 본 상태로 대치한 채 존재하는 역쇼트가 아니라,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다듬고 가려버리려는 냉철하고도 따듯한 관성(과 서정성)이 담긴 롱 쇼트로 그들의 모습을 함께 포착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빈센트의 어머니가 제레미와 서로의 등을 토닥거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한 프레임 속에 담으며 끝난다. 다시 말해, 역쇼트로 시작했던 영화는 롱쇼트로 끝난다. 서로 대치하고 경계하던 것들이 한 곳에 놓인다. 이곳에서 서로를 향해 날카롭게 뻗어있던 의심의 칼날은 따스하게 녹아버리고, 모든 것을 보듬는 막연한 마음이 솟아올라 타자와의 경계를 지워버린다. ‘나’는 ‘우리’가 된다. 관객은 ‘신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고 했던 영화 속 신부처럼, 모두를 한곳에서 바라보며 보듬게 되는 것이다. 용서와 관용은 그렇게 찾아온다. 우리는 이 역쇼트 너머의 공간에서, 비로소 영화 속 신부가 보았을 ‘사랑’이라는 신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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