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혜영이 잡은 연필에는 구더기가 묻어 있다
- 작성자 한라노
- 작성일 2025-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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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모두 살아 있다, 아니 죽어 있다
편혜영 작가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 <아오이가든>을 보면 편혜영 작가의 시선을 알 수 있다. 편혜영 작가가 현대 사회에 던지는 대담하고도 뚜렷한 질문 역시 읽을 수 있다. 인간은 살아있기도 죽어있기도 하다. 살아가는 것이기도 하고 죽어가는 것이기도 하며, 그 끝은 죽음뿐이다. 편혜영은 <아오이가든>에 실은 9개의 단편소설을 통해 인간을 이렇게 정의한다.
인간은 우월한가? 그렇다면 무엇에 비해서? 인간이 다른 종보다 우월한 이유를 사람들은 흔히 사고에 있다고 말한다. 인간일 수 있는 데에는 내면에 존재하는 이성 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편혜영 작가는 달리 말한다. 그녀는 작품 속에서 인간과 동물을 동일시하며 또한 죽음 앞에서 모두가 공평하다고 한다. 따라서 인간이 우월하다는 인간 중심적 사고를 비판한다.
(46p)
엄마는 널 서서 낳았어. 목을 빳빳이 세워 얼굴을 하늘로 치켜들고 비명을 질렀어. 척추는 곧게 폈지. 가끔 허리를 구부리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배 속에 든 네가 몸을 트는 게 보였어. 엄마는 계속 똑바로 서 있었는데 가랑이를 벌리고 서 있는 게 힘들어 보였어. 그렇게 조금만 더 버티면 죽겠다 싶을 때 네가 미끄러져 나왔어.
언젠가 나도 그런 장면을 본 적 있었다. 빳빳이 서 있는 기린의 엉덩이에서 피 묻은 양수에 둘러싸인 새끼가 미끄러져 나오는 모습,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였다.
이 장면에서 서술자는 엄마가 아이를 낳는 모습과 기린이 아이를 낳는 모습을 동일시한다. 또한 같은 단락에서 서술자인 ‘나’는 개구리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마술 피리’ 속에서도 인간과 동물을 동일시하는 표현이 드러난다. 마술 피리 속 ‘나’와 동생인 ‘미아’는 오랫동안 단백질 섭취를 하지 못한다. 서술자가 데리고 있던 루루라는 실험용 쥐 역시 단백질 섭취를 제한당해 ‘나’와 같은 처지다. 실험용 쥐 루루는 한 달을 버티지 못하고 단백질 결핍증으로 죽는데, 이때 ‘나’는 “단백질 결핍증을 견디는 동물은 없다”(229p)라고 말한다. 이것은 오랫동안 단백질 섭취를 하지 못한 ‘나’와 ‘미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며, 결말 속 죽음에 가까워지는 ‘미아’의 모습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똑같은 장면에서 우리는 죽음 앞에서 모두가 공평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단백질을 섭취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 당연히 죽음뿐이다. 결핍은 인간도 짐승도 그 어떠한 생물들도 전부 죽음에 가깝게 만든다. 각자의 이유로 단백질 섭취를 하지 못한 루루와 미아는 그 결핍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같은 처지인 ‘나’의 결말 역시 다르지 않을 테고. 죽음이 모든 것을 공평하게 만든다는 작가의 생각은 ‘마술 피리’ 말고도 ‘맨홀’, ‘시체들’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한 가지 더 예를 들면 ‘시체들’에서 서술자는 썩어가는 신체 일부를 보는 ‘그’를 향해 “그것은 그에게 인간의 몸이란 부패하기 쉬운 단백질 덩어리라는 사실을 각인시켜주었다”(241p)라고 말한다. 이는 죽음 앞에서 인간은 동물들이나 어떤 곤충들과 같이 훌륭한 단백질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인간이 우월하다는 생각이 오로지 인간만의 것임을 알 수 있기도 하다.
편혜영 작가는 환경을 통해 이러한 것들을 전하기도 한다. ‘저수지’에 등장하는 세 아이는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살고 있다. 벌레에, 쥐에, 쥐똥이 가득하고 사람들의 분뇨가 난자하며 구더기가 가득하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러한 환경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나는, 우리는 그런 환경을 열악하다고 말하지만 세 아이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집이자 세상 전부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대로 살았기에 감히 열악하다 말하지만, 그들은 그저 그들대로 살았을 뿐이다.
환경이 만들어내는 차이가 이렇게나 분명하다. 정글 속에서 늑대가 키운 인간의 아이는 자라서 무엇이 될까? 인간의 언어가 아닌 늑대의 울음을 배우고, 두 발이 아닌 네 발로 걷는 법을 배운 아이는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인간이 가지는 우월감은 환경에서 나오는 것과 다름없다. 갓 태어난 동물들은 하늘을 올려다보지만, 갓 태어난 아기들은 수술실 천장이나 인큐베이터 뚜껑, 어쩌면 어느 집의 물 새는 지붕, 또 어쩌면 끼긱 소리가 나는 차량의 윗면을 본다.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출산하는 인간이 없듯(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있겠지만) 수술실 천장을 올려다보며 출산하는 동물도 없다(또 특별한 경우에는 달라지겠지만, 습성에 따라서는).
‘저수지’ 속의 세 아이도, ‘아오이가든’ 속의 하반신 성장이 멈춘 ‘나’도, ‘맨홀’ 속 뒷세계에서 사는 ‘나’와 ‘C’도, 선천적인 환경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고 그 어떠한 반감도 가지지 않는다. 이런 점만 보더라도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없다. 결국 인간도 환경에서 비롯되는 존재. 단백질을 섭취하지 못하면 실험용 쥐처럼 죽고, 자라지 못하는 몸이니 개구리가 되어 뛰어내리고. 결국에는 인간이라는 존재 전부가 그런 것이다. 편혜영 작가는 이 사실을 대담하게 말하고 있다.
그로테스크의 대명사 편혜영
<아오이가든>을 읽으며 느낀 것은, 이 작가 정말 거침없구나였다. 문장 하나하나가 무겁다. 그러나 거침없이 나아간다. 작가는 무거우면서 거침없이 나아간다는 그 어려운 것을 해낸다. 나열된 단어들이 뇌를 건너 가슴에 오기까지는 조금의 시간이 걸리지만 편혜영의 문장은 나의 뇌를 가슴처럼 뛰게 만든다. <아오이가든> 속 괴담과 악몽은 책을 덮었을 때 불쾌감을 남기지만 그만큼 나의 뇌를 오랫동안 뛰게 만든다.
편혜영이 묘사한 시체들은 전부 인간 같지 않았다. 서술 중에 그것이 인간이었던 무언가라는 힌트를 던져주지 않았다면, 시체에 대한 묘사만 보고 분명 짐승의 사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문득’ 속 시체에 대한 표현이 특히 그렇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런 잔인함과 단단함이 담긴 문장들이 편혜영 작가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편혜영은 작가의 말에서 죽은 채로 죽은 사람과 만난다, 라고 이야기한다. 편혜영의 그녀는 이미 죽어 있지만 죽은 상태로 편혜영을 만난다.
(284p)
종종 그녀를 본다. 그녀는 여전히 죽어 있다. 죽은 후에도 삶은 계속되는 모양인지, 그녀의 얼굴은 부쩍 늙어 있다.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다지 평온해 보이지 않는 얼굴이다. 평온해 보였다면 죽음이라는 게 대단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가끔은 나 역시 죽은 채로 그녀와 만난다. 살아 있는 나의 꿈속에서, 이미 죽은 그녀와 아직 죽지 않은 내가 죽어서 만난다는 것은 낯선 일이다.
이러한 작가의 말을 보면, 편혜영에게 인간은 살아있으면서도 죽어있는 존재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인간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 작품을 통해 전하려고 했던 의도와 의지가 명백해진다.
닫으며
첫 작품인 <아오이가든> 때부터 지금까지, 편혜영 작가는 인간에 대하여 말한다. 인간의 안에 있는 충족과 결핍 사이를 오가며 때로는 사랑을, 그리고 본능을 작품 속에 녹여낸다. 그리고 그러한 본능을 드러내는 데에 거리낌이 없고 과감하다. 거침없으며 전하고자 하는 것이 뚜렷하다. 시도 때도 없이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 아닌 본능에 따른 문체를 드러내는 편혜영 작가. 이러한 것들이 전부 그녀의 자아이자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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