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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글틴의 논란에 관하여

  • 작성자 김백석
  • 작성일 2025-10-20
  • 조회수 1,122

 나는 여러사람들이 여러 의견을 가지는 것에 동의한다. 그 글(논란의 그 글)이 좋지 못한 글이라고 말하는 도덕주의적인 관점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그러나 도덕주의적인 관점을 지지하는 사람들 또한 탐미적인 관점을 존중해야 한다. 문학은 오답이 없는 학문이다. 누군가는 미성년자를 사랑한다는 상상도 할 수없는 글(롤리타)을 쓰고 누군가는 끔찍한 범죄가 있는 글(시계태엽 오랜지, 모래의 여인, 금각사)을 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글을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답을 없앴기에 아름답고도 인류로써 향유할 가치가 있는 예술을 이루었다. 

 그런데 지금의 움직임은 문학이 특정 이념 아래로 지배하려고 하는 듯 하다. 우리가 외부적 요소로 통해 어떤 글은 옳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은 군사독재 시절의 검열을 연상한다.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문학의 온당한 권리를 침해 받았던 그 시절 말이다. 

 나는 단순히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틀린 의견도 다른 의견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비록 그 문학이 싫어 보일지라도 우리는 존중해야 한다. 어떤 목소리도 담을 수 있다는 그 문학 특유의 포용력과 존중의 정신, 그것이 문학이 우리 세상에 아직도 필요한 이유이다. 부디 지금의 행동이 문학의 정신에 부합하는지 한번 더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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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거> - 시스템과 환경, 그리고 소비자들

영화 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신기하게도 한국 연극(항상 연극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건 아니지만)이 생각났다. 그 중에서도 (굉장히 정치적인) 참사에 관한 연극. 참사에 대해 명확한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려는 연극이 생각났다.디거의 큰 축 중 하나는, 시스템을 비판하는 연극마저도 시스템의 일부라는 것이랄까. 결국 내가 예술 작품을 소비- 생산하면서 가장 불편한 지점은 이 지점이었다. 예술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 예술가는 쓰레기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탁상공론과 끝없는 담론 생성밖에는.디거를 보면서 수많은 한국영화가 생각이 났다. 참사들, 한국사, 잊지 말아야 할, 사람이 죽고 다치는, 기후에 관한 영화, 돈 룩 업 등 말이다. 정말 개중에는 순수한, (디거의 케니 록웰처럼, 진심으로 반성하고 추모하는 기득권, 시스템처럼) 의도로 만들어지는 영화도 있을 것이고, 실제로 그런 서사들이 꽤 많다. 그러나 순수한 의도였건 아니었건(그리고 딱히 중요하지도 않다), 결국 그런 영화들도 시스템의 안주하게 만들고 안주한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다. 참사에 관한 극 기타등등 그것이 무엇이든지, 특정인에게 분노를 유발하고 그 유발된 감정을 특정 상징에 투사시켜 심리적 고어 포르노로 소비하게 만들고, 그리고 소비한다. 우리가 무슨 엄청난 세뇌를 당했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다. 또한 그들도 딱히 별 의도가 없다.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이러니한 지점이다. <Fossil Fools> 연극이 끝나고, 4단계 경보가 울린다. 사람들은 방독 마스크를 쓰고 거리로 나선다. 결국 현실을 비판하는 예술이, 비판을 예술이라는 비좁은 공간에 가두고 해소하게 만든다. 이를 진작에 알았던 20세기 마르크스주의자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러한 이유로 카타르시스를 반대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제 4의 벽을 깨는 여러 테크닉을 통해 몰입을 방해하는 소격 효과라는 이론을 만들었다. 이는 감정이 해소되지 못하게 해서 관객이 실제 현실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행동을 하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난 항상 서사예술과 정치성에 대하여 반대하는 사람이다. 서사 예술은 무언가를 강력하게(즉 정치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에게 맞지 않는다. 주장은 필연적으로 단순화와 납작함, 폭력 따위가 붙기 마련이다. 내 주장이 옳으려면 상대방의 무언가가 합리적이더라도, 공감 가능하더라도 무시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토론과 논쟁은 아무런 소용도 없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그런 것들을(주로 백분토론, 혹은 젊은 남성 정치인이 "논리적"으로 패는 "사이다" 영상이었다. 그들은 꼭 괄호 안의 용어를 필수로 넣어 제목을 지었다.) 소비하며 즐겼지만, 즐길 때는 몰랐지만, 지금도 즐기지만, 다만 지금에 즐김에는 결국 이 논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코카콜라는 여전히 팔리고, 24시 햄버거 가게는 어차피 값싼, 법적으로 최소한의 선만 지키면서 노동자를 뽑을 것이고. 그들의 건강은 안중에도 없을 것이라는, 기업인은 모에화되고 소수자는 악마화되고, 그렇게 우리는 힘 있는 자

  • 김장르
  • 2026-10-06
죽을만큼 사랑한다?

죽을만큼 사랑한다는 건 "내 사랑을 당신에게 떠맡길게요" 와 같은 말이다. 우리는 커다란 그리고 유혹적인 세상을 두고 죽음이라는 삶의 끝을 직면한다 그러니까 우리, 만약 죽는다면. 죽어서 더이상 영혼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더이상 사랑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던 사랑은 사라진걸까? 사랑은 고스란히 상대방에게로 전해진다 기묘함 혹은 잊혀지거나 말해줄 수 없는 감정 이라는 것으로. 우리가 생전에 상대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전했다고 가정해보자. 상대는 어떠한 마음의 진동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해보자 어떤 감정이 드는가? 이건 즉.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함. 혹은 스쳐오는 과거의 고백들. 이제 우리는 생전에 상대에게 우리의 마음을 고백한 적이 없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에는 상황이 세가지로 나뉜다. 먼저, 고백하지 않았지만 상대가 마음을 알아차렸던 경우. 끙끙 어떤 마음으로 사랑을 앓고 있는 사람과 드러나지 않은 속을 알아차려버린 상대가 있다. 이 자체로는 마음에 요동이 조금이라도 존재한다. 그리고 사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죽었다고 해보자. 그럼 상대는. 여지라도 줄걸, 아쉬울까? 슬퍼해야 하는 건가, 의심할까? 좋아하는 마음이 컸을텐데, 울었을까? 상대는 모든 감정들이 합쳐진 마음이 파도처럼 쏟아진다. 이 때는 요동친 마음을 전해주고 싶어도 말해줄 수 없는 감정이다. 두번째로, 고백하지 않았고 상대도 알아차리지 않았을 때이다. (이 경우가 제일 슬플 것 같은데) 이 경우에는 사랑을 앓던 사람이 죽음과 동시에 자신이 감당하고 있던 사랑이 상대방에게 고스란히 라옮겨간다. 아무런 무게도, 크기도 없이 심지어 상대도 모르는 새 상대에게 전해진다. 즉, 그 누구도 기억하고 느끼지 않는, 잊혀지는 감정인 것이다. 마지막 경우는 고백하지 않았는데 죽고 난 뒤 주변인에 의해 마음을 알게 된 경우이다. 이 경우에는 흔히 예상할 수 있는 마음 아픈 일이 생길 수 있다. 상대도 사랑하고 있었는데 마음을 전해보지도 못하고 당사자가 죽은 것이다. 이 때에는 막심한 후회와 눈물, 안타까움 그리고 가끔가다 떠오르는 슬픈 기억이 생겨난다. 이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안타까움은 생겨날 수 있다. 평소 마음에 담지 않아두었던 상대가 죽었는데 알고보니 사랑하던 사람이 자신이었다는 것이. 놀라운 감정과 함께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우리는 깊은 사랑을 표현할때 "죽을만큼 사랑해" 라는 말을 하곤 한다 한 번쯤 깊이 생각할 만한 말이자 특별한 말이다.사랑할 수 없음으로 사랑이 존재한다 의 결론으로 글을 마무리 한다.처음으로 비평..?(이런것도 비평인가요?) 을 써봤는데 잘 못 쓴 것 같군요 피드백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뉴비
  • 2026-10-04
작고 귀여우며 무서운 - 『극장판 치이카와: 인어섬의 비밀』

작고 귀여우며 무서운 - 『극장판 치이카와: 인어섬의 비밀』 진시황은 어째서 불로초나 수은도 마다 않고 영생을 희구했는가? 인생의 절정이라는 순간을 영원히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더 단순히는 죽음을 두려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이 정말 영원하고 무한한 삶의 추구과 직결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죽고 싶지 않다'라는 말은 '영원히 살고 싶다'로 치환될 수 있을까. 과연 인간은 영원을 제대로 감각하고 있는가? 애초에 감각할 수는 있는가? 『극장판 치이카와: 인어섬의 비밀』(이하 『치이카와』)은 이 같은 질문의 중심을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 순간을 극복하려다 영원의 함정에 빠져버린 자들이 그려낸 궤적으로 관통한다. 작고 귀여운 것들, 그 이면 '먼가 작고 귀여운 녀석들'의 줄임말인 먼작귀로 공식 번역된 치이카와의 극장판 캐치프레이즈는 '그 우정도/ 그 죄도/ 그 생명도/ 언제까지나'. 아무래도 수상쩍다. 줄거리를 보자. 인어섬에 간 치이카와 일행은 영생을 불러오는 인어 동료를 잡아먹은 범인을 찾으려 마을에서 흉포를 부리는 세이렌에 맞서 싸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마을 주민 히토바와 후타바는 사전에서 본 영생을 가져오는 인어를 낚으러 바다로 향하지만 세이렌의 실수로 사고가 나 후타바가 중태에 빠지자 히토하는 복수를 위해 납치한 세이렌의 잉어를 후타바에게 먹인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작고 귀여운' 얘기와는 거리가 멀지만, 문제는 다음이다. 후타바가 영생이 가져올 공포, 히토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죽고 없어지는 동안 홀로 남겨질 공포를 어렴풋이 감각하고는 히토하도 인어를 먹도록 종용하자, 재촉에 못 이긴 히토하도 인어를 먹은 뒤 이 사실을 비밀에 붙이기로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순간과 영원, 유한과 무한을 둘러싼 사유를 추출해낼 수 있다. 우선 후타바가 영생을 얻은 이유는, 그가 사경을 해메고 있었으며 죽음 아니면 영생이라는 극단적 상황에 처해있었기 때문이다(치료의 가능성은 묘사되지 않았으므로 논외로 친다). 히토하는 후타바의 죽음을 견딜 수 없었기에 그를 영원히 살리기로 한다. 고로 후타바의 영생은 도피 시도이며 동시에 일종의 도피처이다. 반면 히토하는 어떤가. 히토하가 영생을 얻은 이유는, 이미 영생의 운명이 정해져버린 후타바가 뒤늦게 영원에 수반되는 공포를 직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히토하의 영생은 후타바가 겪는 공포를 덜기 위해 불가피하게 선택되었다. 영생이 수단으로서 이용된 것이다. 이렇듯 두 인물의 영생은 세부적인 측면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영원이 순간적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순간과 영원, 유한과 무한 두 인물이 영생에 이르는 계기는 사소하며 지극히 순간적인 감정과 선택에 매여있다. 지금 죽음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지금 느끼고 있는 공포를 달래기 위해서 택해진 수단이 영생이라는 것은 농담에 가깝다. 이러한 농담이 하나의 실체로 구현되는 이유는 그들이 영원을 순간의 렌즈로 해석하여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 도두
  • 2026-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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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능사

    뜌땨

    • 2025-10-22 14:24:10
    기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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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틴지기

    안녕하세요. 글틴지기입니다. 앞서 올려 주신 방백 님의 글을 비롯, 이번 논의에 대해서는 방백 님에게 메일로 내용을 전달 받아 내용 파악 중에 있습니다.다만 이 게시판은 감상&비평 게시판입니다. 이번에 올려주신 글은 감상&비평에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되오니, 글티너 간 자유로운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자유게시판'으로 글을 옮겨 주시기 바라며, 게시판 성격에 맞지 않는 글은 게시 중단 조치가 될 수 있는 점 참고 및 양해 부탁드립니다.

    • 2025-10-21 15:35:19
    글틴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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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자

    안녕하세요, 김백석님. 제목에 이끌려 들어왔네요. 본문에서는 어떤 논란인지 언급하진 않으셨지만, 저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글을 씁니다. 저 역시 장원 취소 요구는 과한 처사라고 생각하는 편이고, 아직 논란의 글을 제대로 읽지 않은 터라 부족한 근거에 의거한 논란의 물결에 동조하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기 때문에 아무 행동도 행사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백석님의 논지가 자칫 왜곡된 것처럼 보이는 듯 해서 말씀드립니다. 우선적으로 논지의 문제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백석님께서는 작품을 도덕주의와 탐미주의로 분류지으셨는데, 사실 작품은 어떤 ‘주의’나 ‘이즘’으로 단순하게 환기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논란 속 발화자는 특정 문장을 두고 ‘틀렸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잘못되었다’는 윤리적 지적이 어떻게 ‘틀림’으로 읽힐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글의 논지대로 문학에는 명확한 옳고 그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백석님께서는 ‘오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므로서 문학에 옳고 그름이 있다고 설정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윤리주의적 지적을 독재정권 검열에 빚대어 말씀하고 계신데, 조금 어긋난 비유 아닌가 싶습니다. 윤리주의는 외설성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영혼을 지적하는 작업입니다. 검열은 작품의 사회적 문란성을 살펴보는 작업이구요. 범죄자를 다뤘다고 무조건 나쁜 글인 것이 아니라, 범죄자를 어떻게 다루었고 바라보는가가 윤리주의를 끌어들이는 방식입니다. 이 차이를 명확하게 알아주시고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또한 저는 비평가의 업무가 ‘작품을 존중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작품의 위험성을 날카롭게 고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이라 과연 이 논란의 시작이었던 문제 제기가 적합한지 부적합한지 세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백석님께서 이렇게까지 글을 써야 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해요. 이 논란은 불필요한 논쟁이거든요. 문제 제기자가 당사자가 아니라는 점, 제기자가 감정적으로 행동했다는 점, 작품에서 문장이 논란될 정도로 구체적으로 서술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논의는 논쟁의 화두가 되기에는 너무 유치하고 부족한 논란들이에요. 문제가 될만한 건 작품이 아니라, 조롱으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는 작가의 답변 뿐이죠.

    • 2025-10-21 05:13:30
    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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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백

      @화자 안녕하세요, 화자님 해당 비평글에 대한 댓글 잘 읽었습니다. 다만 화자님의 일부 주장에 의문이 생깁니다. 현재 저를 포함한 여러 글티너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그 작품의 서술이 여성 혐오적인 표현을 그대로 답습하며 폭력을 재생산하고 있다는 데에서 옵니다. 그리고 저희는 장원을 취소해야 한다는 것이 아닌, *‘글틴 내부 사정에 맞는 선 안에서의 합당한 조치‘*에 더 요구사항을 두고 있으며, 장원 취소는 그 구체적인 예를 든 것뿐입니다. 또한 그 작품 자체에 대한 비판보다, *월장원 선정 및 멘토링* 시 *작품 속 폭력의 재생산을 충분히 지적, 고려해 주시지 못하*신 점에 있어 더 비판의 관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품에서 문장이 논란이 될 정도로 구체적으로 서술되지 않았“다는 점은 어디서 기인한 판단이십니까? 많은 독자들이 그 글을 읽고, 그 속에서 뿌리깊은 여성 차별의 구조를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논란이 “불필요”하다는 것, “유치하고 부족”하다는 것, ’문제가 될만하지 않다‘는 것은 너무 가벼운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남성들은 단 한 번도 성별의 위치에서 차별받아온 적 없으며, 기득권의 자리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여성이 철저히 남성 아래 종속되는 구시대적인 구조의 글을 읽으며, “유치하고”, “부족”하고, “문제가 될만하지 않다”고 함부로 얘기하십니까? 화자님께서는 여성의 삶이 어떤 삶인지 알고 계십니까? 여성의 삶이란, 당신을 아무리 동물 취급해도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박수쳐야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당신이 동물이라고 말할 때 다른 사람들이 그 이의 목소리와, 몸짓과, 표정을 이야기하며 칭찬하는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동물이라는 말에 이의를 제기하면, 그런 것은 목소리와, 몸짓과, 표정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다고 매몰하는 것입니다. 화자님은 여성의 삶을 아십니까? 그런데 어째서 이 논란을 그런 식으로 줄여 말하십니까? 화자님께서는 ‘문제 제기자’라고 언급하셨지만, 제가 그냥 확대 해석해서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제가 감정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때는 무언가 달라집니까? 제가 감정적인 것과 이 사안이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멘토님께서 ’동물‘을 지적해 주시지 않으신 점에 상처입는 글티너들이, 감정적인 우리의 잘못입니까?

      • 2025-10-21 06:53:23
      방백
      0 /1500
    • 방백

      @화자 “부족한 근거에 의거한 논란의 물결”이라는 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많은 독자들이 그 글을 읽고, 그 속에서 뿌리깊은 여성 차별의 구조를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근거는 부족하지 않았고, 논란의 “물결”이 아니라, 이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많은 시간을 떨고, 울고, 다짐하고, 포기하고, 의지한 사람들에게 배신당한 감정을 곱씹고, 다시 울고, 떨고, 다짐하고, 용기내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월장원이 선정된 시점부터 떨고, 울면서 용기를 낸 사람들이 “부족한 근거에 의거한 논란의 물결”이라니. 이 문제 제기가 단순히 “물타기”처럼 보이십니까? 아닙니다. 지금도 문제를 인지하고 있지만, 용기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화자님이 모르셔서 그런 말을 쉽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열 명, 아니 다섯 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같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용기 내서 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물타기처럼 보이는 겁니다. +‘부족한 근거에 의거한 논란의 물결’ 앞에 ‘아직 논란의 글을 제대로 읽지 않은 터라‘라는 기존에 없었던 말을 수정으로 추가하셨네요. 그럼에도 가벼운 언행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논란의 작품을 읽지 않으셨으면 해당 사안을 “유치“하다는 게 아닌 더 조심스러운 단어를 사용하셨어야 합니다.

      • 2025-10-21 06:56:59
      방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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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백

      @화자 정말 너무하십니다. 힘을 더해주시지는 않으시더라도 그런 말까지는 굳이 필요 없었습니다. 화자님이 제 월장원 선정 비평에 의견을 남겨주신 순간부터 화자님을 많이 믿었습니다. 그런데 힘겹게 용기 낸 사람들이 여기 있는데 어떻게 물결에 추호도 동조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쓰십니까 정말 너무하십니다. 정말 물결이 언제였습니까. 수필 게시판에 글이 하루 30편 넘게 올라왔을 때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이 중대한 사건을 논란으로 만들고, 해결하고자 하던 방의 분위기가 기억납니다. 그때 과열되던 글틴 단톡방에서, 미숙하긴 하나 제가 가장 먼저 다른 의견을 내지 않았었나요? 나쁜 점도 있지만, 너무 그런 식으로만 생각하지 말자. 좋은 점도 있다, 물타기다. 제가 가장 먼저 다른 의견을 제시해서 그렇게 흐름을 바꾸지 않았었나요? 그 덕분에 나무위키에 학교 이름을 게시해서 글틴 논란을 기입하겠다고 하셨던 분이 생각을 바꾸고 비평까지 쓰지 않으셨나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말을 하십니까 정말 너무하십니다. 그 물타기는 열심히 타고, 지금 보니 이 논란은 “근거 없는 물타기”처럼 보여 그런 식으로 말하고 싶으신가요? 정말 너무하십니다. 정말 너무하십니다.

      • 2025-10-21 05:41:04
      방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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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자

      안녕하세요, 방백님. 제 의견에 대한 댓글을 신중히 읽었습니다. 댓글의 특성상 장문의 글을 게재할 수 없다보니 불가피하게 빠진 문장과 단어들이 충분히 글을 오독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무협소설에 문외한인지라 논란의 글을 받아들이는데 대단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 논란의 글을 전부 읽고 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저의) 부족한 의견과 근거에 의거하여 동조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논지였는데, 잘못 전달된 듯 합니다. 그리고 방백님께서 논란의 글에서 문제로 삼고 계신 문장이 작가 본인이 쓴 글이 아니라 인용문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실질적인 윤리적 문제를 따질 수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물론 작품에 그 인용문과 관련한 중심내용이 있다면 당연히 그 문제를 살펴보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아직 작품을 전부 체화하지 못한 저로서는 문제제기의 적합성을 조금 더 조심스럽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칫 하면 마녀사냥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논란이 ‘불필요’하다는 말은, 본 비평문을 기재하므로서 ‘논란’을 ‘논쟁’으로 확산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제 성급한 발언에 상처를 받으셨다면 사과 드립니다. 논외로 수필 게시판 사건에 대해 말씀을 꺼내주셨는데, 당시 저의 문제제기는 매우 유치한 문제였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관련 글들을 일주일 채 안되어 전부 삭제하였습니다. 나무위키와 비평에 관련된 건 제가 아니라 다른 분에 대한 말인 듯 한데, 그 분의 글이 아직 남아있으니 모쪼록 피해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2025-10-21 22:56:16
      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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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님

    '현재 논란이 되는 글'을 비판하는 주 요지는 1) 그것이 여성 혐오적 관념을 재생산하는 글이라는 점, 2) 이에 대한 아무런 언급 없이 예술성 등만을 고려한 채 월장원으로 선정하였다는 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여성주의 등의 특정 이념 아래서 문학을 전적으로 지배하거나 통제하려는 시도가 아닌, 재생산되는 폭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자 저항입니다. 반면 언급하신 박정희 정부의 대중문화 통제는 외설이나 폭력보다 더 내면적인, 국가안보와 권력자의 정치권력에 악영향을 주는 요소를 검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둘을 비슷한 선상에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언급하신 문학 작품들은 (롤리타, 시계태엽 오렌지, 모래의 여인, 금각사) 모두 예술성과 도덕성 사이를 오가는 많은 논쟁과 토론의 중심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영향력 있는 사회적 담론의 장 역시 충분히 확대된 상황입니다. 그러나 '논란이 되는 글'은 글틴 커뮤니티에 비판점과 질문을 던질 영향력과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단지 예술성만을 논한 선정 과정에서 충분한 담론장을 얻지 못했습니다. 몇몇 사용자들이 댓글과 공감 표시를 통해 의견을 개진했음에도 돌아오는 해명은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방임적이고 기계적인 중립성을 띤 포용과 존중은 결국 강자를 두둔하고 약자의 소외를 방관하는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도덕주의 시각으로 예술을 바라보는 것은, 예술이 혐오적인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고 공고화 및 옹호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만든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글틴은 청소년이 문학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표현하며 타인과 건강하게 소통하는 공간이지, 구조적으로 답습되고 용인되는 폭력에 순응해야 하고 문학을 단지 수단 삼아 내면적 혐오를 분출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은 소수자가 자신을 표현하고 긍정하며 위로할 수 있는 수단으로 숱하게 이용됐습니다. 이번 일이 적절한 조치 없이 단지 예술의 상대주의적 해석 아래에서만 인식되지 않기를, 이로 인해 많은 청소년이 폭력에 저항하는 문학의 힘을 단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 2025-10-21 04:14:05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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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백

    시계태엽 오렌지, 모래의 여자, 금각사를 한 편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그저 떠돌아다니는 줄거리만 외우고 있는 사람의 글이네요. 인터넷에 각 작품들의 비평을 검색하시거나, 최소한 챗지피티에게라도 그 작품이 왜 고전으로 읽히는지에 대해 작품이 담고 있는 ‘비판적 관점’을 물어보세요. 김백석님께서 그 작품들을 오독하신 것 같습니다. 또한 롤리타를 읽고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으신 것 같네요. 롤리타가 “오답”을 없앴기에, 인류로서 “향유할 가치”가 있는 예술을 이루었다고요? 평론가들이 그 말을 들으면 놀라서 뒷목 잡고 쓰러지실 것 같습니다. 김백석님께서는 전자의 작품들을 예시로 들며, 문학에서만큼은 폭력의 재현을 ‘즐길 수단’으로 이용해도 된다고 주장하셨지만, 오히려 그 작품들엔 그러한 사람들의 관점을 철저하게 깨트리고, 비웃고, 비판하려는 작가의 열망이 담겨 있습니다. 문학은, 치열하게 사유하고,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자하는 자들이, 소수자의 목소리로 작은 틈을 두드리고자 만들어 낸 하나의 도구입니다. 군사독재 시절의 검열이요? 그 당시에 과연 어떤 글이 검열당했습니까? 김백석님께서 말씀하신, ”이념이 [문학]을 지배“한 작품이 검열되었지 않습니까? 그 작품이 과연 ”폭력적이어서“ 검열되었습니까? 그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념이 문학을 지배“하면 왜 안됩니까? 무수히 많은 작가들이, 그 서로 다른 ”이념“을 위해서 글을 쓰지 않습니까? 문학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문학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있으십니까? 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답을 듣고 싶습니다.

    • 2025-10-21 01:11:30
    방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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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두사랑

      @방백 나보코프가 직접 롤리타에는 어떠한 도덕적 교훈도 담겨있지 않다고 쓰지 않았었나요? 혹시 어떤 부분에서 작가의 비판하고자하는 열망을 느끼신걸까요?

      • 2025-10-21 06:01:09
      만두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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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백

      제가 처음 말한 작품이 시계태엽 오렌지, 모래의 여자, 금각사이고 다음 언급한 작품이 롤리타입니다. 전자의 작품이란 그 둘 중 전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 2025-10-21 06:46:45
      방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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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두사랑

      @방백 답변 고맙습니다! 본문기준으로 전자라고 생각해서 의아함에 질문하였던 것인데 다시 읽어보니 전자의 "작품들"이네요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 2025-10-21 07:01:11
      만두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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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백석

      @방백 일단 심심한 사과의 말 올립니다… 만약 제 글로 인하여서 기분 나쁘셨을 방백님께 정말로 죄송하다고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제가 이 글을 여기 비평 게시판에 올린 이유는 저의 글이 제 입장에서 지금 상황을 생각해보는 일종의 비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저는 방백님을 공격하기보다는 이런 의견도 있다는 생각해서 글틴의 논란은 글틴의 게시판에 써야 옳지 않을까? 라는 생각해서 글을 쓴 것이었습니다. 제가 글을 쓰다보니 저스스로도 감정이 격해진것 같습니다. 방백님이 틀렸고, 잘못됐다는 어조로 쓰인점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 또한 저의 이 글에대한 입장은 문학이라면 정답이 없어여지라는 생각해서 쓰인 것이지, 저는 양성평등과 페미니즘을 지지합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문학에서는 이러한 가치판단의 개입이 최소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방백님이 논란을 제기한 그 글의 경우 여성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 글이 쓰였다고 보기에는 신화적인 글을 쓰려는 형식상의 맥락에서 여성혐오적인 묘사가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생각에서 더더욱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방백님이 생각하시기에 그러한 글들고 충분한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 말들을 통해 기분 나빴을 방백님과 방백님의 의견에 동의하시는 분들의 기분에 깊히 공감하고 제가 여자라도 기분이 별로였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글이 어떤 선전의 형식이나 여성혐오를 정당화하는 글이라기에는 논란이 있는 부분이기에, 이렇게 주관적인 영역이 개입하여 글을 나쁘다고 단정 짓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에서 글을 쓴 것이지 비난하고 공격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이 점은 정말 죄송합니다.물론 글은 당연하기도 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쓰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단지 혐오적인 맥락이 있고 그 맥락이 수용 가능하다면 그것을 문제시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글을 통해 기분 나빴을 분들에게는 정말 죄송합니다.

      • 2025-10-26 01:54:13
      김백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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