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 서술하는 ‘남성적 언어’: <꽃처럼>을 읽고
- 작성자 방백
- 작성일 2025-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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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혐오: 사회학자 앨런 G. 존슨(Allan G. Johnson)에 따르면, “여성혐오란 여성을 여성이란 이유로 혐오하는 문화적 태도”이다.]
천손, 니니기노미코토가 하계에 내려온 일을 오오야마츠미는 기쁘게 여겼다. 대대로 미와 영속을 더불어 누리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는 천손에게 두 딸을 시집보냈는데, 나란히 니니기의 동반자를 자처한 이들은 꽃의 신 코노하나사쿠야히메와 바위의 신 이와나가히메였다.
그러나 니니기는 둘을 모두 아내 삼는 대신 미모의 코노하나사쿠야히메만을 취하고, 이와나가히메는 추하다는 이유로 곧장 돌려보냈다.
오오야마츠미는 진노하여 니니기의 어리석은 행동을 꾸짖었다.
‘이와나가히메가 있어 바위와 같이 영원하고, 코노하나사쿠야히메가 있어 꽃과 같이 번영할 수 있기에 나는 여식을 나란히 바쳤다. 만일 둘을 함께 맞아들였다면 천손은 피고 지지 않는 영광에 싸이었을 것이다. 천손의 선택으로 후생은 눈부시게 피어나되 찰나에 쇠하여 질 운명이다.’
이리하여 영원을 내친 천손 내리의 생은 그저 피고 지는 꽃을 닮게 되었다.
이것을 인간의 삶이 꽃처럼 덧없는 세계의 시발점이라고 한다.
-<꽃처럼>* 중 도입부
일본 신화, <고노하나노사쿠야비메>를 차용함
1. ’남성적 언어‘
일부다처제란 무엇인가?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하나의 제도로까지 자리 잡고 있었던 이 구도는, 단순히 부부간의 개인적인 권력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일부다처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사회에 만연한 성별 권력 격차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미 여성과 남성 사이의 권력 구도가 무너져있는 곳에서부터 이 기묘한 세계는 출발한다.
한 남성이 여러 여성을 거느릴 수 있는 일부다처제는 단순히 이것을 행하는 한 부부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균형을 무너트린다. 결혼과 동시에 부부 사이의 관계는 전혀 동등한 형태를 띠지 못하고, 성적, 경제적, 권위적인 지배권이 모두 남편에게 속하게 된다. 이때 여성은 배우자가 아닌, 남성의 재산 혹은 번식 수단으로 종속되고, 정립된 여성의 권위는, 그 사회의 모든 여성에게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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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처럼>에서 나오는 두 여성(꽃의 신, 바위의 신)은 천손의 동반자를 ”자처“했다고 서술된다. 하지만 오요야마츠미가 두 딸을 천손에게 “시집보“낸다는 표현과 “바친다”는 표현을 살펴보면 ”자처“라는 단어 자체가 모순적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소설은 두 딸이 아버지-남편으로 넘어가는 자리에서 가부장제 구도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여성들은 자신이 한 남성의 두 배우자로 들어가기를 ”자처“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자신들의 고유한 신적 성질(꽃과 바위의 성질)은 ‘아버지가 남편에게’ ‘넘겨줄 수 있는 것’으로 설정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친다”는 표현을 통해 아버지는 두 딸이 자신의 소유물임을 알고 있다. 천손 또한 두 여성을 인생의 동반자로 함께할 사이로 생각하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 꽃의 신은 천손의 배우자가 되지만, 그것은 천손과 같은 위치에서 생을 함께 살아갈 동반자적 관계가 아니다. 꽃의 신이 천손의 배우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취”했다고 서술되며, 이로 인해 부인은 그저 “취”해지는 존재, 남편에게 감상(특히 성적인 감상)을 줄 역할뿐인 하위 개념으로만 인식된다.
이러한 소설 속 배경에서 딸들이 “동반자를 자처”했다는 표현은, 시대의 피해자인 여성들의 피해를 부각하지 않고, 오히려 아버지/남편과 같은 책임(어쩌면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에서 오는 더 강한 책임)을 부여한다. 즉, 일부다처제가 만연한 기형적인 부부 관계에 윤리적 정당함을 부여하는 언어. 가부장제를 정당화시키는 언어인 것이다.
이처럼 여성혐오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이에 여성의 책임을 부각하고, 남성의 책임을 희미하게 하는 모든 표현들을 나는 ’남성적 언어‘라고 지칭하려 한다.
2. ‘남성적 언어’로 설명되는 세계
핵심은, 여성의 가치를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타자가 평가하고 선택할 수 있는 속성으로 환원하는 언어 구조가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은 스스로 관계를 구성하는 주체가 아니라, 비교/판단/소유의 대상으로만 위치 지어진다. 이 사고방식은 고전 서사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이후 역사와 사회 전반에 걸쳐 ’여성의 자리‘를 규정하는 틀이 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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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를 돌아다니거나 인터넷 서핑을 하다 보면 심심찮게 여성들의 미모에 관한 광고를 찾아볼 수 있다. 여성에게 아름다운 외모를 한계까지 강조하는 남성주의 사회의 강제력은 특히 성형, 의류, 화장이라는 분야에서 잘 드러나는데 이 사업들은 모두 여성 시장을 기반으로 거대하게 성장했다. 이렇게 성장한 사업이 또다시 여성들을 옥죈다. 비로소 나이대를 불문하고 여성을 착취하는 ‘꾸밈’은, 현대에 와 ‘꾸밈 노동’이라는 명칭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렇듯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에게 주어진 ‘미의 기준’은 여성 전체에 무수한 제약을 건다. 외모를 가꾸기 위한 경제적, 시간적 제약을 건다. 외모를 가꾸지 않은 여성들이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게끔, 그런 여성들이 사회활동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끔 하는 제약까지 건다. ‘미의 기준’은 ‘여성의 시선에서 결정되지 못한‘다. 여성들에게 ‘미’란, 이상적 성질이나 자신을 깔끔하게 가꾼다는 의미를 넘는다. 사회는 여성 자신이 도달할 수 없는 ‘미’까지 강요한다. ‘미’는 이미 ‘노동’의 한 종류이다. 그것은 곧 남성이, 여성을 휘두를 수 있는 위치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로 소설 속 일부다처제가 만연한 사회처럼 말이다.
천손 니니기노미코토가 꽃을 신을 아름답다며 “취하고” 바위의 신을 “추하다”며 내치는 것과 같이, 남성 중심 사회에서 외모를 기준으로 한 선택은, 여성을 향한 전형적인 ‘남성적 미의 기준의 강제’로써 작용한다. 이처럼 한쪽이 종속되는 형식의 불균형한 배우자 선택 시에, 여성을 ‘미의 기준으로 선택할 수 있다’고 자연스럽게 서술하는 것은 이러한 작용의 구조를 덮어두는 ‘남성적 언어’이다. 이 언어로 현실 세계는 재정립되고, 폭력은 재생산된다.
3. 그러한 세계 속 여성의 한계
초반에 설명했듯이 이 소설 속 여성들은 고유한 신적 위상을 지녔음에도 아버지-남편의 그늘 아래서 벗어나지 못한다. 본래 꽃과 바위는 자연 질서의 한 축을 이루는 고유한 신적 상징이지만, 소설 속 여성들의 신적 성질은 아버지가 바칠 수 있는 대상에 그치고, 천손의 아내가 되는 순간 남편의 운명 아래 흡수되어 버린다. 여성 홀로 고유하게 작용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이런 서술이 가족이라는 인연으로 묶였기 때문이라면, 여성들의 성질이 남성에게 속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성들의 성질 또한 여성의 운명에 속해야 한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는 그러한 작용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가부장제 구도는 더욱 강화되고, 여성의 한계가 명확해진다.
4. 생략함으로써 완성되는 ‘남성적 언어‘
이러한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아버지라는 위상과 자식의 위상이 같을까? ’천손‘이라는 성질과 꽃, 바위의 위상이 과연 같을까? 그러니까 “바친다”던가 “취”한다는 등의 표현은 문제 삼더라도, 애초에 두 부류의 격차는 성별이 아닌 소설 속에서 상징하는 ’성질 자체의 한계‘에서 그치는 게 아닐까?
이 의문을 해결하려면 내가 정의하는 ’남성적 언어‘에 살을 덧붙여야 할 필요가 있다. ’남성적 언어‘는 단순히 혐오의 형태를 온전히 가지고 있는, 물질적인 표현으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본문에서 ‘남성적 언어’를 정립하기에 앞서, 여성혐오를 정의한 이유가 여기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차별이 ’직접적인 형태‘로 드러나야만 한다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남성적 언어‘는 ‘여성이 있어야 할 자리를 생략’함으로써 완성된다. 위계의 구조에서 분명한 상급 자리를 남성이 독차지한 것, 그런데 그러한 상위를 가진 또 다른 여성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바로 여성 혐오와 같다. 가부장제에서 여성의 역할을 유별하게 구분하는 문화와 이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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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 SF소설에서 유명한 작가를 손에 꼽자면, ’김초엽‘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만약 김초엽 작가의 소설을 한 권이라도 접한 사람은 그 이야기를 따라가며 어딘가 새로운 감각을 느낄 수 있을 텐데, 이 감각은 독자로 하여금 곧 기묘한 깨달음을 가져다준다. 소설 속 세계가 전부 여자 초과 사회라는 것이다.
지그재그(ZIGZAG)라는 쇼핑 플랫폼의 공식 유튜브 영상 중 김초엽 작가의 인터뷰**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모험 이야기나 SF 판타지를 되게 좋아하는 독자였는데 항상 이런 이야기에는 여성 인물들이 조연으로만 등장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물론 매력적인 인물이지만, 그 인물들이 항상 협력하는 존재, 혹은 주인공을 서포트하는 존재로만 등장하다 보니까 굉장히 재밌게 읽으면서도 살짝 미묘한 소외감 같은 걸 항상 느꼈던 것 같아요.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한 가지 원칙을 세웠어요. 대단한 게 아니고, 그냥 내가 어떠한 인물을 쓸 때 이 인물이 반드시 남성일 필요가 없다면 여성으로 설정하자는 원칙이었고요.“**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김초엽 작가의 소설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한국 문단에 앞장서고 있는 많은 여성 작가들의 소설을 읽어보면 독특한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다. ‘남성’의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구병모, 김초엽, 정세랑, 조예은, 천선란, 최진영을 비롯한 많은 여성 작가들의 소설에서 남성의 서사는 대부분 조연에만 머문다. 감정을 공유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여성이 주도한다. 이것은 단순히 한 작가만의 신념이나 같은 성별을 주인공 삼는 쓰기 방식이 아닌, ‘남성적 언어’에 소외받았던 여성으로서 일종의 저항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현재 젊은 여성 작가들은 소설 속에 페미니즘을 녹여낸다. 치열하게 글을 쓰면서 여성에게 겨누어지는 사회를 바라본다. ‘생략’을 거부한다. 여성들의 서사를 생략함으로써 가부장제를 공고히 해왔던 문학. ‘남성적 언어’를 답습해 온 기존 문학에 대한 반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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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여성 혐오적 신화를 도입부에 비판 없이 그대로 차용한 해당 작품의 중심 전개가, 남성주의 서사라는 것도 문제가 된다.
소설에서 남성이 다채로운 이야기의 서사, 새로운 감정, 자유로운 배경을 간직할 때, 여성에겐 철저히 남성의 부속품이라는 한계밖에 그어지지 않는다. 이는 그동안 이어졌던 ‘남성적 언어’를 답습한 한계인 것이다. 폭력의 재생산으로만 소비된 여성은, 남성만이 등장하는 남성의 이야기에 밀려 단 한 번도 ‘또 다른 여성의 목소리’를 가지지 못한 채 사라진다.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여성이 없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것은 시대와 문화를 전반적으로 비평했을 시에 중요해진다. 그럼에도 이 작품의 남성주의 서사를 비판하는 이유는, 이 작품 속에서 여성은 남성의 부속품으로만 쓰이고, 그렇지 않은 여성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5. 작품에서 여성혐오를 비판하려면
또한 나는 이 소설을 남성 간의 의리와 우정, 즉 형제애의 한 형태를 아름답게 말한 소설이라고 읽었으나, 몰락하는 막부 시대(그중에서도 기득권을 유지하는 남성들)의 어리석은 문제를 비판한다고 읽힐 여지도 있다. 전자의 경우 더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만, 후자의 경우에서는 논지가 있어 보인다.
한번 이렇게 생각해 보자. 여성을 비판하면, 그게 무조건 남성에게 이득인가?
반대로 남성을 비판하는 것이, 여성의 차별 구조에 뭔가 영향이 있는가?
아니다. 그 둘은 부분적으로 이어져 있지만, 전혀 별개의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남성 비판이 빌미가 되더라도, 그것이 여성 혐오나, 여성의 부재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는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성‘ 비판을 넘어, ’여성 혐오‘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작품에서 여성이 단순히 가부장제 안에 종속된 표현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 왜 여성이어야 하는지, 왜 여성이 이렇게 가부장제 안에 종속된 형태로 소비되어야 하는지의 사회적 배경이 드러나야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은 독자는 그런 배경을 인지할 수 없다. 따라서 작품은 가부장제 언어를 통해 여성혐오를 재생산할 뿐, 여성혐오를 타파하거나 비판한다고는 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여성을 그런 방식으로 소비해 탄생한 가부장적 막부의 운명 자체를 비판한다(즉, 여성혐오를 비판한다.) 하더라도, 과연 그런 방식으로 충분히 읽힐 수 있느냐이다. 앞서 설명했듯, 소설 속에서 남성의 서사적 구조와 달리 여성의 서사적 구조는 너무나도 빈약하다. 따라서 가부장제적 서사를 재현하는 것만으로는 비판이 성립하지 않는다. 비판이 되기 위해서는, 그 서사가 작동하는 폭력의 매커니즘이 텍스트 내부에서 드러나고 해체되는 과정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여성을 남성 서사에 종속된 장치로만 기능하게 하고, 그 억압의 구조를 문제화하거나 전복시키는 서사적 전략을 마련하지 않기 때문에 비판적 효과에 도달하지 못한다.
6. ‘재현’의 책임
마지막으로 이 작품의 도입부는 <고노하나노사쿠야비메> 신화에 큰 변형을 거치지 않고 인용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창작자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작가에게는 재현의 책임이 존재하며, 그렇기 때문에 옛 신화를 차용하려는 창작자는 반드시 비판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재현 방식도 독자에게 무엇을 보여주려는가에 따른 작가의 윤리적 선택이기 때문이다. 사회 구조의 문제를 비판 없이 가져온 작품은, 작품을 넘어 사회 문제를 더 심화시킨다. 권력자의 언어에서 편하게 쓰여진 문학은 그저 폭력을 재생산하기만 할 뿐이다.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로써 바쳐지는 것, 취해지는 것, 추하다는 미의 기준이 정해지는 형태는 작품을 전반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고전적인 분위기 형성의 용도만 다하고 버려지지만, 그 분위기 형성의 ’언어‘가 여성을 수천 년 동안 차별해 왔다는 것을 인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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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글을 마무리하며, 이것을 단순히 ‘한 작가만의 역량으로 보아서 될까?’라는 질문을 남기고 싶다. 사실 이러한 글의 전개, 서사, 표현 방식 등은 너무 익숙한 구조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누군가 당신을 동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이의 웅변에 박수 친다. 당신이 동물을 지적해도, 그런 것은 목소리와 몸짓과 표정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다'고 매몰한다.
여성혐오적인 서사로 전개되는 고전은 매우 많다. 하지만 현재까지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는 고전들 속에서, 차별적인 언어는 크게 다뤄지지 않는다.
여성들은 그러한 작품을 읽는다. 작품성이 뛰어난 문학을 읽고, 그 작품성에 감탄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삶을 산다.
내가 설명한 ‘남성적 언어’는 그동안의 문학에서 수없이 반복된 여성 차별적 서술을 재정립한 것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꽃처럼> 작품의 문제는, 우리 세상이 교본삼은 고전 소설들의 요소와 결을 같이 한다.
이때, 청소년 작가의 소설이 무비판적으로 혐오를 답습한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남성적 언어‘로 본 사회는 언뜻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듯 보이지만, 그 기저에 움직이는 거대한 문제를 작가와 독자는 비판적인 시선으로 읽어내야 한다. 뛰어난 문체와 우수한 전개, 설득력 있는 대사만이 문학의 전부라고 난 생각하지 않는다. 문학이란 과거부터 현재까지 시대에 변혁을 이끄는 수단으로 작용해왔다. 수많은 지식인이 문학을 통해 자신의 이념을 세상에 던졌다.
펜은 칼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다. 소수자를 위로하는 ‘언어’의 날카로운 힘이, 외려 짓밟힌 자들을 향할 때.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세상은 ‘남성적 언어’를 정확하게 짚어서 이야기해야 한다. 더는 ‘남성적 언어’의 재생산을 멈춰라. 그리고 말해라.
이것이 잘못되었고,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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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 소속 웹진 글틴, 지존 소설
**김초엽 소설 속 주인공이 여자인 이유 [Life is ZIGZAG] - 김초엽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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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삶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계속 변화할 것이라 믿는 사람이지만 기후 위기와 같은, 너무 거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언제나 가슴 깊은 곳에 덮어두기만 했다. 기후 위기는 개인의 처지에서 생각하기에 너무 거대하고 무섭다. 아니, 개인이 아닌 거대한 인류 공동체가 나서더라도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아 더욱 두렵고 불안하다. 세계는 전쟁에 불을 붙이고 있고, 나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인공지능 개발에 열을 올리며, 25년 1월 20일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파리 기후변화 협정에서 탈퇴를 선언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정말 있기는 할까? 하지만 그런 나에게 아직 반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올해는 많은 생각과 변화를 불러일으켰다.일렀던 4월의 체육대회에서 정수리가 타는 것 같은 태양 아래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지금도 오지 않는 장마는 장마철이라는 생각을 일부러 저편에 밀어두도록 한다. 이런 갈등으로 혼란스러웠던 상황 속, 학교 생기부 작성용 과제를 제출하는 과정에서 환경과 관련된 글을 쓰느라 나는 나와 세계를 마주 볼 수 있었다.사실은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내 마음은 불안함에 몸서리치면서 문제를 오랫동안 생각하지 않으려고만 한다. 하지만 산업화 이후 인류는 나와 같은 방식으로, 너무 편하게 세상을 살아왔다. 예정된 미래는 두려워하면서, 손에 쥔 편리를 놓지 않으려고 눈을 감는다. 당장 우리 앞에서 밟을 땅이 무너지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미약한 고뇌와 단상이나마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손 위에 힘을 더해주려고 이 글을 쓴다.1. 후진국과 개발도상국도 선진국처럼 환경 규제를 따라야 하는가?환경과 규제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제일 발목을 잡는 문제점이다. 현재 대부분의 선진국은 과거에 정치적으로, 자원적으로 후진국을 착취하며 성장했다. 환경을 파괴하는 것에 아무런 죄책감이나 고민 없이, 무조건적인 개발을 추구했던 선진국은 기후 위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의 가장 큰 수혜국이라 볼 수 있다. 어쨌든 인류가 성장하며 개발을 통한 환경 파괴는 필연적인 과정이다. 하지만 그 필연적인 과정에서, 아무런 성장 없이 가장 피해를 많이 받은 국가와 반면 성장을 통해 가장 이득을 많이 취한 국가가 있다면, 이제 와서 선진국이 후진국에 환경 규제를 논하는 것은 ’사다리 걷어차기‘가 아닌가? 정치와 외교는 따지고 봤을 때 자국의 실리를 추구하기 위한 것인데, 환경이라는 한정적 자원을 후진국은 더 이상 빼앗기고 싶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환경 규제와 협약에 관해 논할 때, 과거의 선진국처럼 자원을 최대한 이용하고 싶다고 하는 개발도상국과 후진국의 주장에서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환경 문제의 규제와 책임을 너무 후진국과 개발도상국에만 떠넘기려고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인도가 아무리 탄소 배출량이 높다고 하지만 순위를 따져보면 (2023년 기준) 탄소 배출량 2위는 미국, 1위는 중국이다.반면 1858년부터 1947년까지
- 방백
- 2025-07-17
이 주제를 두고 오랫동안 글을 쓰고 싶었지만,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문장으로 엮어낼 수 없었다. 그리고 처음 본문을 쓰고자 다짐했던 날보다 지금의 나는 더 성숙해졌음을 느낀다. 세상이 더 멋지지 않다는 걸 하루 하루 인정해나갈 때는 정말 힘들었지만, 불확실한 세상에서 눈을 떠보니 생각보다 지구에는 다정한 마음으로도 강하게 살아갈 수 있음을 증명해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혐오자와 비관론자는 무수히 많이 모여 있지만, 바른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단 한 명이라도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세상이 아름답다고 믿었던 날보다 더 조심스럽고 단단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고등학교 한문 수행평가 시간의 주제였다. 우공이산을 두고 두 가지 관점으로 글을 쓰기. 우공이산,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뜻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라도 꾸준히 노력하면 이루어진다는 듯이다. 첫 번째 관점(A)은 이 성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고, 두 번째 관점(B)은 이 성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A 관점은 이렇다. 을 마주할 때 우리는 회의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단편적인 천장이 그렇게 가로막더라도 나는 우공이산과 같은 뜻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왜냐하면 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정한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포기하지 않음이 세상을 바 꿀 것이다'를 믿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불확실함과 어려움 가득한 세상의 벽에 가로막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두 세 문장, 두 세 단어로 이뤄진 편리한 혐오를 마주한다. 인터넷 상에서10초면 이루어지는 '편리한 혐오'에 아떤 사람들은 오랫동안 고통받는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쉽게 상처받고 깎여 분노하는 일 조차도 스스로를 갉아먹는다. "안 되는 건 과감히 포기하라"고 얘기하 지만 그것은 어떠한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서가 아닌 '체념해서'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세상은 바뀌지 않을까? '무모하게' 세상을 바꾸는 이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그들은 정말 바보일까? 아 니면 하늘에서 계시를 받은 성인이거나 진정한 지식인일까?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계엄령 이후 광장에 모여서 시위하는 많은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 거리에 나와 응원봉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평소에는 '무모한 짓 하지 마라'고 이야기하던 내 친구들도 시청 앞으로 갔다. 우리는 알고 있다. 결심의 정도는 각자 달라도, 모두 분노한 것이다. 개인의 영달만 중시하는 것을 넘어 '안 되겠다'고 느꼈기 때문에 뛰쳐나간 것이다.그렇다. 우리는 변화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법의 정의는 언제나 시민보다 한 발짝 느리고, 국가는 사전에 많은 일들을 대비하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무모한 사람들이 만든 땅에서, 무모하지 않게, 당연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안 되는 건 과감히 포기하라"는 말을 할 수 없다. 누군가 '산을 옮길 수 없다'고 돌아갈 때, 삽 한 자루를 가지고 걸어가는 사람이 있어서이다. 삽 한 자루 와'우공'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이산'했을 때 산을 돌아가던 사람들도
- 방백
- 2025-02-28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이 글은 첨부된 이미지가 정말 중요한 글입니다. 파일 첨부가 안되어서 블로그로 연결된 링크를 달아 두었으니 꼭 이미지와 함께 읽어주시기 바랍니다.ㅡ최근 전세계에서는, ‘여성의 노출’이라는 주제가 계속해서 화제에 오르고 있다.2025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비앙카 센소리는, 전신을 꽁꽁 싸맨 칸예 웨스트 옆에서 안이 모두 비치는 망사로 된 옷을 입은 채 기자들 앞에 섰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은 시기 프랑스 파리에서는 ‘여성을 향한 전쟁을 멈춰라’는 구호를 가지고 상반신을 탈의한 여성 시위가 이루어졌다.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성적 외모 강박을 주제로 한 ‘서브스턴스’ 영화가 한국에서 큰 흥행을 이루었고, 일본에서는 여성을 성적대상화한 라면 광고에, 캐릭터를 남성으로 바꾸어 풍자하는 등의 추세가 번지고 있다. 이 모든 사건이, 다 지나가지도 않은 이번달에 이루어진 일들이다. 여성에게 성범죄란,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성폭행 피해자에게 ‘옷을 왜 그렇게 입었느냐’를 핑계로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경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흔하다. 그녀가 입은 옷, 그녀가 취한 태도, 그녀가 지나가듯이 한 한 마디로 인해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의 가해자는 너무나도 손쉽게 감형을 받는다. 사회는 범죄를 저지른 남성보다 범죄를 당한 여성에게서 먼저 잘잘못을 따진다. 사회는 단 한 번도, 여성을 위해 굴러간 적이 없다. 그것은 오랫동안 남성을 ‘인류(man)’로 기르고, 여성을 ‘여자’로 사육해왔다 며칠 전부터 X(구 트위터)에서는 연예인의 신곡 뮤직 비디오에서부터 시작된 갑론을박이 펼쳐지고 있다. 여자가 당당히 노출이 과한 옷을 입었을 때, 그것은 여성주의를 후퇴시키는 ‘섹스어필’인가, 아니면 여성의 권리를 신장시키는 ’노출할 자유‘인가?여론이 쏟아졌다 뒤바뀌고 서로의 다양한 발언이 정제되지 않은 채 흘러나오는 sns속에서, 나는 많은 고민을 했고, 이 글을 쓴다. 나는 솔직히 말해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노출에 회의적이다. 앞에서 말한 시위를 위한 노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미디어가 곧 ‘상품’이 되고, ’상품의 이미지‘가 유행이 되는 사회에서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든 유행을 오랫동안 가꾸어 여성을 세뇌시켜온 이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말이다. 여자 아이는 어릴 적부터 많은 것들을 보고 자란다. 여자에게만 주어지는 꾸밈노동, 면역력에 해가 될 정도로 밥을 줄이면서 얻는 다이어트 강박뿐만이 다가 아니다. 가족 손을 잡고 영화관을 간 소녀들은 아울렛, 지하철 쇼윈도에 전시된 형형 색색의 속옷을 본다. 누가 보아도 과하게 성적 어필을 하는 프릴, 무늬, 리본은 아이들의 뇌에 강하게 새겨지고 그게 ‘당연하다’는 인식을 가지게 된다. 어린이용, 청소년용 팬티와 브레지어에 달려있는 작은 리본과 프릴. 조금만 얇은 여름 옷을 입어도 리본이 거슬려 불편하다. 그러나 내 남동생의 속옷에는 그런 부속품이 없다. 과한 색상 또한 없다. 신체 특성에 맞추지 않아 딱 붙는 사이즈도 없고, 실제로 숨통을 조여오는 후크도 없다. 가슴 크기를 키우기 위
- 방백
- 2025-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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