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치들을 다그침
- 작성자 기능사
- 작성일 2025-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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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긴 글을 적어보려고 한다. 내가 그간 혹자, 혹은 독자라 부르던 사람들에 대한 나의 애정과 존중은 너무 깊이 파묻은 탓인지 잠시 옆에 치워두고 싶다.
한국어에 대한 오랜 고민이 있었다. 내가 읽어온 한국어는, 특히나 문학에 있어서 의지의 표출이었다. 그것은 그것 자체로 본질이라기 보다도, 더 큰 맥락을 대표하기 위해 존재했다. 상록수와 수난이대를 읽던 내게 아몬드나 그 엇비슷한 표지들의 요즘 책들, 그러니까 말 그대로의 픽션들은 내게는 너무도 난해한 것들이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외계의 스토리들, 그리고 낯선, 그러니까 엉뚱하리만치 이상한 단어들을 가져와다 쓰는 서평들을 읽다보면 그 소설들은, 또 문학은 현실의 프라모델이라기보단 또봇이라거나 카봇이라거나 하는 대중적인 메카물의 피규어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즐기거나 즐기지 않건간에, 사유라거나 깊이라거나 하는 단어들, 그러니까 해설하자면 적어도 500쪽은 되는 책들에서나 기대하고 찾던 작가들 본연의 누적된 생각들은 뜨고 지는 사조들의 저편으로 이미 사라졌다고밖에는 내게 남아있는 결론이 없다.
예수가 말했듯 비판받기 싫다면 비판하지 말아야하므로 나는 나의 주장을 만듦에 있어 어느정도는 책임감을 느낀다.
한국어는 단지 문학의 필요가 전혀 없는 맥락이다. 한국 문학의 세련된 학풍, 그리고 여러 비평, 발문, 서평등으로 지껄여지는 공명은 한국어와는 완전히 무관하게, 또 괴이하게 스스로 발전하며 작동한다. 한국 문학의 고요하고 정제된, 말하자면 연구된 문장으로서의 문학은 어쩌면 고도의 완곡한 풍자극이 아닐까도 생각한다.
한국어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텍스트는 작가들의 불평불만은 고결하게 풀어낸 보여주기식의 자기고백이나 오덕들의 엔터테인먼트라고밖에 할 수 없는 픽션들이 아니라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다.
우리 백치들은 우리가 마치 이전 사조들보다 위대한 걸 건축해 낸 것 마냥 떠든다. 무슨 소설집이 넷플릭스보다 재밌다느니 토마토가 심장보다 단단하다느니 하는 모든 것, 또, 굳이 꺼낼 필요는 없겠으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싶다는 등의 모든 너무 자기의식적인 나머지 병신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비아냥으로까지 들리는 개소리들말이다.
말해왔던 바지만, 엔터테이너로서의 길을 갈 사람들을 응원한다. 열심히 해라. 사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선 차라리 작가 기획사를 차려서 사업을 하는게 훨씬 낫지 않을까도 싶지만 우리 백치들은 그럴 염치는 없는 것 같다. 물론 사업성이 떨어지는 것도 있고 말이다.
나는 문학의 구성요소로서의 메세지라는 개념을 싫어한다. 직접적으로 제시되는 것은 없지만서도, 은연중에 문학은 근본적으로 엔터테인먼트지만 중심적이며 추상적인 메세지가 있어야 여운이 남는다거나 더 완결적인 작품이 된다거나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쓴다면 쓰는 거다. 쓰는 것에 대해 연역적으로 선행하는 목적같은 건 있을 수 없으며 쓰는 것은, 그리하여 적히는 것 그 자체로 온전한 목적이며 메세지다.
기껏해봐야 로맨스물, 단순성장물 쓸거면서 페미니즘, 기후변화같은 것들을 찍먹하는 걸 나는 순수히 혐오한다. 그런 글들이 교환가치를 지닌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나는 카피 레프티스트가 되는 걸 고려하는 중이다.
우리 백치들, 글쓰는 이들, 좌익 지성인들(나는 이 단어의 사용만으로 내가 극우로 의심받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한다. 뭐라 할 말은 없으나, 내게 그런 오명을 소명할 기회를 한 번만 더 주길 바란다)의 실패를 이해하려면 한국어를 손수 찢어 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확언하건데, 비록 이 말은 여러 사람에게 도발적이겠지만, 한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이념도 페미니즘이고 가장 실패한 이념도 페미니즘이다.
무리한 진단이겠지만 페미니스트들은 그들이 가진 어느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은 확신, 그러니까, 스스로는 파시스트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굳이 형언되거나 다루어지지도 않는 확신 외에는 따로 불러와 말할만한 것이 없다. 단지 그들은 명확히 잘못된 인문학을 하고 있을 뿐이다.
앞서 말한 한국어를 찢는다는 것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구분해야함을 의미한다. 물론 분리하여 생각할 순 없겠지만, 이해가 어렵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페미니즘도 마찬가지다.
젠더간 차별이라는 사회과학적 데이타를 어떻게 대의할 것이냐하는 질문의 대답으로 그간 페미니스트들은 수도 없이 많은 글을 써왔다. 그러나 그것들이 옳았거나 옳지 않았음을 판단할 기준을 말하기 전에, 그것들이 실패했다는 것은 분명히 짚어두어야 한다. 물론 페미니즘이 원체 모두를 설득하기 위한 사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정체성이 그 자체로, 혹은 또 다른 정체성에 대해 피해자라는 서사를 설득하는데 있어서 모든 남성과 모든 여성의 예를 종합할 순 없다. 또한 그런 이유로 페미니즘은 어느정도 여성을 대의한다기보다 여전히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일부를 대의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춰지는데, 그런 것들을 모두 고려하자면, 그러니까 발생가능한 모든 상호교차성을 무시하지 않고 수용하는 이상적인 페미니즘에 수렴한다고 가정했을 때 27세 경북 안동 출신 한발리파 수니 무슬림 베지테리안 여성 의대생(특히나 현실적으로는 정치적인 부분까지 고려하는 것이 옳다)을 만드는 것보다 차라리 사회를 개인으로 분해하는 것이 옳지 않겠냐는 이야기다. 만약 여성이 남성에 대해 피해자라는 아주 보편적이고 예외는 무시해도 좋을 도그마가 있다면 또한 무슬림과 비무슬림, 수니와 시아, 또 한발리파와 다른 수니 간의 관계에 대한 서사가 있을 것이고 더욱 세세히는 20대가 타 세대로부터 받는 차별, 혹은 심지어 27세가 28세나 26세 혹은 다른 연령그룹의 사람들에게 받는 차별도, 또 지역간의 차이내지는 차별도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 백치들은 풀지 못할 만큼 복잡해진다. 만약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 53세 광주 출신 한국 예장(합동) 장로교인 육식주의자 남성 은행원에게서 모종에 차별이나 폭력을 받았다면 그것은 그가 속한 어느 정체성 때문인가? 그가 53세이기 때문에? 혹은 그의 또한 백치같은 장로교 신앙 때문에? 진심으로 하는 말이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구축한 서사는 이중 어떤것도, 심지어 가장 작은 부분에 대한 가장 제한적인 시각도 설명하지 못한다. 당사자들도 명확히 스스로를 규명할 수 있다고도 볼 수 없으면서 발생한 차별과 폭력을 유한한 수의 이유를 들며 제삼자의 입장에서 당당히 설명할 순 없다. 그의 이슬라모포비아와 성차별주의를 어떻게 구분할 것이며, 또 어떻게 분석해내겠느냔 말이다. 누가 나와서 지역감정이 3%고 비칼케돈파 종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의거한 신앙중심적 이슬라모포비아가 49%며 성차별주의가 48%라고 대뜸 선언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사회과학은 좋은 학문이고, 또 필요한 접근법이다. 그러나 인문학이(그냥 우울한 27세나 안동 사람이나 한발리파 수니 무슬림이나 베지테리안이나 여성을 위로하겠다는 숭고한 목적의, 말하자면 또다른 형태의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의미를 잠시 제하자면) 사회과학에 대해 무얼 해야하는가, 또 그 관계가 무엇인가에 대해 충분한 사유가 없다면 인문학은 또다른 덫에서 스스로를 옭아맬 수밖에 없다. 다시금 생각해야하는 부분이지만 나치즘의 매커니즘이 실제로 이루어졌다면 인류의 유전자풀은 실제로 더욱 (물론 여기서도 일방적이고 편파적인 인종 미학관이 들어있지만) 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아름다워졌을 것이다. 그들이 인간 개개인에게 인종적인 혐오를 심은 것도 그러한 사회과학적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오만함 때문이다. 작가가 업이든 말든 인간 이해에 관한 우리 백치들의 무능력을 우리는 계속해서 상기하며 우리 감정의 근원적 원리가 어떻게 된 것인지 우리는 계속 탐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백치로 돌아가 인간 개인에 대한 우리의 감정을 재확인하자는 것은 특별히 극단적이지 않다.
나는 시를 접을 생각이다. 나의 시는 항상 사랑시가 되거나 아니면 아예 논설문이 되곤 한다. 특히나 내 시에 대해 조금의 이해도 하지 못하면서 단순히 내 시에 피드백을 해야한다는 기계적인 (금전적인이라 밝혀도 문제는 없겠다) 의지를 가진 독자 앞에선 더더욱 시를 쓰지 않을 것이라고 힘주어 밝혀두고 싶다.
그런 김에 또 말해두는데, 다 큰 어른들이 시를 피드백한다는 건 괴상한 일이다. 병신짓 아닌가? 자기는 얼마나 대단한 시를 쓴다고, 그러니까 술기운과 이별 같은 것들(인스타에 더욱 병신같은 시인들이 있다는 점은 기성 시인에게 있어 조금의 의미도 갖지 못한다)을 언어로 표현하는 데 있어 같이 시를 공부한 사람들이 가지는 어느 일련의 공통된 인상이 있고 또 그런 인상들에게도 좋고 나쁨이 있다는 것 같은데, 인상에 관한 것이면 인상에 관한 것이고, 또 시가 매체로서 기능한다면 매체로서 기능하는 거지 시에서 문법을 운운하며 시의 구조가 좋다느니 시가 메세지를 잘 보여준다느니 하는 것들은 다 시라는 신비주의가 내재적으로, 또 어느 정도는 배타적으로 점유하는 자위행위의 일종이다.
물론 위 문단은 전부 사견이겠다만, 생각해보라, 과학대중서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시론대중서라는 말은 없잖은가? 그렇다면 대중은 시와 그 의미를 100% 이견없이 이해한다는 건가? 병신같은 짓이다. 새삼 밝히는 바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시에서 인상을 받은 적이 없다. 그저 압축된 글이라 시간으로 오래 들일 필요가 없어 관념적으로 받아들였을 뿐, 몇몇 시인에 대한 개인적인 선호를 제하고는 시에 대한 나의 회의는 한 번도 걷힌 적이 없다.
이 시대 백치들의 소설은 사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다. 적는 것들은 고작 자기 일기장 교정하거나 판타지 웹소설에 주석붙인 거나 다름 없는 데 평론가라고 돈이나 처받고 일하는 것들은, 또 출판사의 득실대는 문창과 잉여들은 그것들이 마치 200페이지에 꾹꾹 눌러담긴 일리아드라도 되겠다는 마냥 호들갑이란 호들갑은 다 떤다.
전자의 경우에선 그냥 마저 먹던 떡볶이 다 먹고 변변한 직업이라도 찾아 가길 바라며 후자의 경우엔 솔직히 자기가 쓰는게 톨킨의 새끼 발톱만큼이라도 완결한 스토리인지 생각해 보길 겸손히 바래본다.
나는 살아있는 문학가를 본 적이 없으므로 문학이 죽었다고 표현하는 것은 내게는 과분할 것이다. 그런 말은 차라리 다른 나이 지긋한 교수라거나 하는 다른 백치에게 양보하겠다.
문학은 죽었다기보단 차라리 인간이라거나 사회라거나 하는 망상들, 어쩌면 우리 백치 스스로를 안다고 자부하던 열정내지는 자신감에 대해서 망각했다고 봄이 적절할 것이다. 우리는 지옥으로서의 타인을 그리는 법은 아예 까먹고서 이제껏 아무도 왜 까먹었고 왜 그걸 말하지 않았느냐고 묻지 않았다. 너무 섬세하고 연약한 우리 백치들은, 그러니까 펜을 잠시만 뺐어버리면 픽 쓰러져 뒤질 것 같은 우리 백치들에게 한국어는 조금의 필요도 없다. 니체와 까뮈를 백날 천날 읽고 문학 이론집을 뒤적여봐야 뭐하나? 뭐 이 마당에 페미니스트 혁명이라도 할 것인가?
문학의 침체는 이제 계간지들이 결사를 할 이유가 도저히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백치들은 굶거나 맞아죽어도 반드시 적어야 하는 글을 이제는 관념적으로도 이해하지도, 아예 다루지도 않게 되었다. 박경리의 시체는 이미 오래 썩었고, 민주들은(명사로서의 참주를 생각해보라. 민주또한 같은 차원에서의 명사다) 대충 지적허영심을 채워주기 위한 간단하고 따라하기 쉬운 엔터테인먼트를 원한다.
나는 당신 문학가의 절필을 요구한다. 문학의 가능성은 오로지 지금 그 펜을 부러뜨리는데 있다. 당신의 우울증 극복기라거나 페미니스트 장르소설이라거나 하는 것은 조금도 멋있지 않고 의미는 더더욱이나 없다. 문학은 괜찮지 않다. 평생 자연사와 사고사만 봐온 세대의 문학은 전혀 괜찮지 않다. 무엇이 지금 당장 반드시 적혀야하는지 사유하지 않은 문학은 이제 곧 범람하는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눌려 용해되어 버릴 것이다.
진정으로 한국어는 문학을 가질만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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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능사
- 2025-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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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3
출판문화협회가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의 특별공로상 수상을 취소했다. 많은 이들이 안도하는 분위기다. 펜을 잡고서 나이브하거나 두루뭉실하게 덮고 넘어가기엔 굉장히 민감한 문제다. 문학과 폭력의 관계가 말이다. 벌써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지 1주년이다. 직접 읽어본 적은 없지만 워낙 많이 다루어져 어느 정도 대중적인 소개는 이루어졌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문학은 모든 폭력의 반대편에 서는 것… 그녀의 말은 서정적이면서도 한의 감정을 보여주는 우리 문학의 한 단면을 잘 노정하는 듯하다. 실제로 우리가 사랑하는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그 고민과 사유의 흔적이 없는 사람은 없다(‘청소년 작가’가 진지하게 고민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관련이 없으므로–).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본다면 폭력이야말로 문학의 트리거이고, 그것은 문학의 형식에서도 드러난다. 플롯에 대하여 설명할 때, 갈등을 중심으로 사건들이 배치되고 의미가 부여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데, 그 갈등 또한 폭력이며, 캐릭터 간의 서사의 깊이감을 주는(적어도 준다고 여겨지는) 가장 큰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한 갈등의 플롯은 어느 정도 언어가 자극하고 이끌어내는 인간 본능, 그러니까 말하자면 폭력성에 대한 어필이라 볼 수도 있다. 가령 긴장감이란 요소를 든다면, 서사적 긴장감은 어느 정도 인간이 진화론적으로 폭력성을 발달시키며(창을 들고 은밀히 사슴에게 접근하는 네안데르탈인을 상상해 보라. 클라이막스 직전의 긴장감이 완전히 무관하다고는 못할 것이다) 생기는 부수적인 직관들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직관들을 유용함과는 무관하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폭력이 긍정적인 관점에서 제시된 경우는 드물다. 아니, 정상적인 문학 안에서는 없다고 확언할 수 있다. 문학가들은 외교관이나 기업가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안티테제로서, 그들이 초래한 모든 차악적인 관념들을 비판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문학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윙어의 강철폭풍 속에서가 특히나 그렇다) 그것들은 파시즘으로 규정되고 맥이 끊겼다. 그러나 문학이 폭력을 다룸은, 폭력을 다루지 않는 것보다 더 큰 문제를 가져온다. 창작자의 권리와 책임에 대한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문학은 때론 폭력을 호도하고, 편향시키며 왜곡이나 체리피킹이 당연히 무엇보다 잘 일어나나, 우리는 아주 원론적인 부분만 규정할 뿐 연속적으로 얽혀있는 민감한 문제에 대한 결론적인 해법은 주지 못한다.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예시를 들어보자면, 만약에 박유하가 아니라 어느 다른 사람이, 그러니까, 커티스 르메이의 도쿄 대공습이 현대적인 총력전에서 아주 적절한 방식이라고 칭찬한 어느 냉혈한 군사학자가 받았다고 생각해 본다면, 우리 사회가 아직 깊게 이야기해 본 주제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10만 명이 군사적인 목적으로 이유 없이 살해된 데에 있어 우리는 그 또한 비판해야 하고, 또 수상이 결정된 바가 있다면 또한 취소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다른 곳에 있다. 정확한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작가가 다룬 것이 그것의 당
- 기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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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소린진 모르겠다만 그냥 한마디 하자면, 정말 요즘엔 삶을 위한 삶 이상의 삶은 있을 수 없을 것처럼 여겨지곤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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