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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텔지아, 영혼에 대한 근원적 그리움

  • 작성자 노스텔지아
  • 작성일 2025-12-17
  • 조회수 254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1983년작 <노스텔지아>는 그의 유작 <희생>(1986) 바로 직전의 장편작이라고 할 수 있다. <노스텔지아>와 <희생>을 모두 관람한 결과, 실은 둘 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비슷한 것은 사실이다. <노스텔지아>에서도 희생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 다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타르코프스키는 러시아 동방 정교회를 믿고 있는 감독이기 때문에, 주로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듯 하다. 솔직히 그쪽은 나도 잘 모르긴 하는데, 아무튼 타르코프스키는 희생을 좋아한다. 불쌍한 것은 타르코프스키에 나오는 주인공 혹은 주연급 인물들을 대부분 희생이든 죽음이든 겪는다는 것. 물론 타르코프스키 관점에서 이들의 죽음은 숭고한 ‘희생’에 가깝기 때문에 불쌍한 것은 아니다. 그저 관객의 1차원적 관점에서 불쌍해 보일 뿐이다.


<이반의 어린시절>에 등장한 주인공 이반은 가족에 대한 복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거울>에서의 주인공 또한 죽음을 맞이하면서 모든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리고 <노스텔지아>에서 도메니꼬는 로마의 광장 한 가운데에서 분신 자살을 하여 자신을 희생한다. <희생>에서는 제목에서처럼 주인공 알렉산더가 제 3차 세계 대전에서 인류 멸망 위기를 맞자, 자기 자신을 희생한다. 알렉산더의 경우에는 목숨을 잃는 희생은 아니지만, 마리아와의 동침, 그리고 자신의 집을 태우면서,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즉, 자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한 것이다.


<노스텔지아>에서의 첫 장면은 교회 장면이 등장한다. 배경은 시인 고르챠코프가 러시아 노예 출신 작곡가 파벨 소스놉스키에 대한 오페라 각본을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러 이탈리아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시인 고르챠코프는 여성 유제니아와 동행하게 되는데, 초반 유제니아는 아마 이탈리아어를 능통하게 하지 못하는 고르챠코프의 번역을 맡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초반 유제니아가 교회에 도착했을 때, ‘출산의 성모‘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면 소원이나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사제가 말한다. 그러나 유제니아는 무릎을 꿇지 않는다.


이는 유제니아의 성격을 말해준다. 적어도 유제니아는 세속적 욕망을 상징한다. 신성함을 상징하는 ‘출산의 성모’에 무릎을 꿇지 않으며, 영화 내내 시인 고르챠코프를 유혹한다. 이후 그녀는 책을 돌려준다는 핑계로 그의 방에 드나들지만, 고르챠코프는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그녀는 그의 태도에 답답해 하면서, 고르챠코프에게 질문한다. 


“자유는 이 나라에서 공기와도 같아요.”


그렇다. 이것이 핵심이다. 타르코프스키가 말하는 자유란 무엇인가? 진정한 자유 말이다. 표면적인 의미의 자유가 아니라, 그가 말하는 진정한 자유는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이 노스텔지아다. 



이탈리아는 자유의 나라이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는데, 영화 설정상 표면적 의미의 자유의 나라란다. 음악가 소스놉스키도 그렇고, 고르챠코프도 분명 이탈리아라는 자유의 나라에서 자유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노스텔지아, 즉 향수를 느낀다. 이것은 고르챠코프의 환상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자신이 살던 러시아 시골 집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약간 환상 혹은 과거를 구분하는 방법은 단순하다. 컬러면 현재, 현실이고, 흑백이면 그가 상상하거나,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이다. 


계속해서 자신의 아내 마리아가 나오고, 누군가 계속 등장하는데 그가 향수병을 느끼며 기억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여기서 오해할 수 있는 점!!!!! 이 영화는 향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긴 한다. 고향에 대한 향수병, 음악가 소스놉스키와 고르챠코프 둘 다 분명 고향인 러시아로 돌아가고픈 향수는 존재한다. 그러나 영화의 주제는 다른 향수를 의미한다. 자유도 표면적 자유가 아닌, 영혼의 근원적 자유, 향수도 표면적 고향에 대한 향수보다도 영혼에 대한 근원적 향수를 말하는 것이다.


노스텔지아, 한국어로 향수를 뜻한다. 향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다. 먼 타지에 있는 사람이라던가, 고향이 시골인 사람이 도시에서 생활하다 보면, 고향에서의 기억이 너무 그리운 탓에 향수병에 걸리기도 한다. 향수병은 생각보다 무서운 병이다. 향수병이 너무 심한 사람은 자살을 하거나, 우울증을 심하게 앓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도 예전에 영국 여행을 약 일주일간 갔을 때, 향수병 비슷하게 심하게 이질감이 느껴지긴 했다. 일주일 밖에 안되는데, 무슨 향수병이냐 하겠지만, 나는 애초에 해외여행을 처음 가보기도 했고, 대회 수상자들이랑 같이 간 것이라 가족도 없었다. 무언가 자칫 잘 못 하면 국제 미아 되겠다라는 생각만 백번 넘게 한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충격적 이었던 것은 나 빼고 모두 다른 인종이라는 점. 주변을 둘러보면 다 서양인이니, 참 그게 이질감이 컸다. 내가 말을 걸어도 당연히 나는 대화도 할 수 없을 것이고, 나를 지켜줄 사람이 없다 생각하니 너무나 두려웠다. 그 일주일간 나는 한국이 너무나 그리웠다. 물론 영국의 문화유산들을 보며 감탄하기도 했지만, 영화로만 보던 풍경을 실제로 보니 너무나 이질감이 크게 다가왔던 것 같다.


자, 잠시 이야기가 논제에서 조금 벗어났는데, 아무튼 노스텔지아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러나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텔지아는 그 뜻이 조금 다르다. 플라톤의 관점에서 이는 해석이 가능하다. 플라톤은 이데아라는 원형, 영원불변의 실체가 있고, 그에 따른 그림자, 모방이 지금 현상계라고 했다. 우리가 보는 사물을 비롯하여 모든 것은 이데아의 그림자일 뿐, 동굴의 그림자일 뿐이지, 절대 그것이 원형, 실제라고 볼 수 없다. 우리는 즉 짜가만 보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데아를 우리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가? 그건 아니다. 이데아는 일단 철인만이 볼 수 있고, 애초에 영혼만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이데아의 모방으로 이루어진 우리조차, 이데아를 관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데아로의 상승은 즉 죽음으로의 하강이라는 역설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가 이데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죽음으로의 하강을 겪어야 이데아로의 상승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노스텔지아, 타르코프스키가 말하는 노스텔지아는 결국 이데아에 대한 향수이다. 이데아는 우리의 영혼의 고향이자, 원형이다. 우리는 이데아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림자도 결국 이데아의 원형에서 비롯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사제의 질문 "행복보다 중요한 것이 있는데..."에 대한 답을 우리는 이제 찾을 수 있다. 행복, 세속적 행복, 즐거움, 쾌락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구원으로 다가가기 위한 우리의 영혼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는 플로티노스 관점에서도 해석이 가능하고, 플라톤 관점에서도 해석이 가능해서 아무튼 해석의 가능성은 무궁무진 하다. 애초에 플라톤의 개념을 사용한 철학자들도 많기 때문에, 이데아 개념을 사용한다면 대부분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 나온 도메니꼬와 시인 고르챠코프는 이질감을 겪어왔다. 왜냐, 자신의 영혼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세속적인 곳에서 맴도는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치광이에 가까운 취급을 받는다. 유제니아는 우리의 관점과 비슷하다. 이탈리아에서는 자유가 공기와도 같이 곳곳에 퍼져있다. 그러나 타르코프스키, 소스놉스키, 고르챠코프, 도메니꼬와 같은 지성인, 철학자가 보기엔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진정한 자유란, 우리의 향수가 엃혀있는 영혼의 본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무엇이 진실이고,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유제니아와 마리아가 서로 포옹을 하는 모습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이는 아름다움의 원형, 즉 미의 이데아에 대한 노스텔지아라 할 수 있다. 유제니아는 아름다운 사람이지만, 그것은 모방에 불과하다. 유제니아는 미의 이데아의 모방이다. 그러나 그림자를 통해 우리는 미의 이데아를 느낄 수 있다. 마리아라는 노스텔지아와 유제니아가 합쳐보이면서, 미의 이데아를 그는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도메니꼬는 고르챠코프와 다르게 직접 자신을 희생하는 인물이다. 도메니꼬는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미치광이 취급을 받는다. 솔직히 이해는 된다. 이새기 세계가 종말한다는 이유는 가족들을 7년간 집에 감금하고, 아무튼 개소리 겁나 많이한다. 그가 자신을 희생한다는 이유는 로마의 광장 한 가운데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 분신자살을 하기 때문이다.


아, 결국 영혼의 본원,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둘 다 죽음을 선택한다는건 알겠는데,

글을 쓰다보니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게 맞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파악이 어려웠다.

그럼 우리 인간은 결국 세속적 즐거움을 벗어던지고, 죽음을 맞이하고, 희생을 해야 진정한 자유를 누린다는 것인가.


타르코프스키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희생 끝에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근데 이는 나에게 가장 이해가 안가는 질문이기도 하다.

물론 나는 타르코프스키 특유의 촬영법과 그의 예술론에는 매우 동의하지만, 희생 끝에 구원이라는 사실은 매우 불편한 이야기이다. 희생을 해서야만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희생을 해야한다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죽어서 이데아를 찾아야 한다는 것인가.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의 방법이 워낙 극단적이여서 <희생>에서도 이는 불편한 점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자꾸 세상이 비정상적이라는데, 정확히 좀 얘기를 해줬으면 좋겠다. 나도 세상이 비정상적인건 알겠는데, 환경문제를 이야기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욕망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솔직히 내가 봐도 7년동안 종말 온다고 가족 가둔 것에 대한 부분도 영화에 넣어줘야 관객이 납득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 비정상인을 받아들이려면 적어도 논리가 있어야 하는거 아닌가. 도메니꼬의 자살은 정말 이해가 아직도 안 간다. 플라톤의 철학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아무튼 두 주인공 다 죽음을 맞이하는데, 말하고자 하는 바가 조금씩 불명확하고 불편한 지점이 존재한다.


이는 나에게 또 다른 과제가 될 것이다. 아직 타르코프스키의 작품을 모두 보지 못 했다. <잡입자>, <솔라리스>, <안드레이 루블료프> 등 모든 작품을 본다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 동방 정교회를 나는 믿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그의 사상에 동의하긴 어려울 것이다. <희생>  또한 카메라 기법이나 구성은 훌륭하나, 많은 사람들에게 호불호가 갈리는 것은 사실이다. 누군가는 감독이 노망난 것이 아니냐고 말할 정도이다. 분명한 것은 그가 작품을 만들수록 작품의 완성도 만큼은 더욱 올라가고, 동시에 난해 해진다는 것이다. 난해하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다. 애당초 타르코프스키 영화를 보는  관객 대부분은 난해한 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파헤쳐보는 재미에 보는 것이 사실이다. 그의 작품이 매우 지루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영화를 보는 이유이다.

노스텔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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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스텔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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