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李箱)의 작품에서 나타난 허무주의와 초극의 미학
- 작성자 드시코
- 작성일 202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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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다. 내가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완전할 리가 만무하다. (그리고 완전함이란 것은 개개인의 관념적인 가치이다.)-
이상(1910~1937, 시인이자 소설가)의 시는 난해하다. 나는 그것들을 모두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띄어쓰기를 잘 하지 않는다. 전위적이고 형상화 기법을 사용한 독창적인 시를 썼는데 아래의 시를 보자. 전문이다.
역사(役事)를하노라고 땅을파다가 커다란돌을하나 끄집어내여놓고보니 도모지어데서인가 본듯한생각이들게 모양이생겼는데 목도(木徒)들이 그것을메고나가드니 어데다갖다버리고온모양이길래 쫓아나가보니 위험(危險)하기짝이없는 큰길가드라.
그날밤에 한소나기하얐으니 필시(必是)그돌이깨끗이씻겼을터인데 그이튿날가보니까 변괴(變怪)로다 간데온데없드라. 어떤돌이와서 그돌을업어갔을까 나는참이런처량(悽凉)한생각에서아래와같은작문(作文)을지였도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든 그대여 내한평생(平生)에 차마 그대를 잊을수없소이다. 내차례에 못올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는 꾸준히생각하리다. 자그러면 내내어여쁘소서」
어떤돌이 내얼골을 물끄러미 치여다보는것만같아서 이런시(詩)는그만찢어버리고싶드라
이상, -<이런 시>
인간은 모두 언젠가 죽는다. 만사가 무슨 의미일까? 내가 죽으면 무엇이 있을까? 거대한 無만이 남지 않을까, 모두가 잊지 않을까? 오늘도 병실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마지막 단말마(그런 것이 있나?)와 함께 죽고 차갑게 굳는다. 왜 사는 걸까? 삶은 이다지도 고통인데, 결국 끝은 죽음이라니.
내가 몹시 주관적으로 이상의 시에 공감하고 해석하자면 이 띄어쓰기의 거부는 다급함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나도 시를 조금 써본 일이 있다.) 시작(詩作) 중의 ‘우연‘을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의 불완전한 인간 존재의 비이성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나는 이런 생각이다.
너는 딸기야차라리나는 비겁한짓을할거야나-는비겁하고악한짓을할거야나는바보같이굴거야내머리에는무거운산이내려앉아있어나는이산이녹을때까지글을쓰지않으면안돼나는한탄하지않으면안돼아니이방향이아닌가봐틀어
나는보았어너를나는 또개도 보았어그건웰시코기야여기까지만말할게
나는우주에서두통을느끼며누워있어나는인간이야인간이란종은불쌍하다면불쌍하기도해너가딸기라고?인간은남을먹는딸기로비유하지웃긴일이야메일스토로베리쉐이크를먹는매장의에어컨은훌륭하지그러다보면시원한게여름의특징이되는거야어마마
나는누워있지나는본능에충실하지나는그저기록의욕구를해소하는거야그렇게되면아나의생각을아는사람이많아지고또영향력이라고불리는것을가방에넣을수있으니까그래서나는이러고있는거야그래서나는이일을하고있는거야나는나의존재를각인시키고싶은거야자이제거대한의문이풀렸네드시코는아무것도아니야그저욕망일뿐이지나는무얼하고있는걸까?
그렇구나그렇구나이제알겠다무얼하느냐면나를증명하는거야글은언어일뿐야난흉내를내고있어나는집착하고눈을부릅뜬채째려보지나는멍청하거든나는부족한점이많아서나는항상기대고있어그것도바보같아이건정말수치스러울만한데자립은인간이좋아하고필요로하는것이지사실좋아한다고하면안돼응그러면안돼
나는졸린눈으로그대들은생명의자취를더듬고있지활자너머로하지만그건사람마다달라아왜개는글을읽을수없나사람이라고하지않았으면어떨까
-드시코(본인이다.) <딸기> 중
이것은 내가 권태에 사로잡혔을 때 쓴 시이다. 이상과 흡사하게 되었다. 전연 의도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마지막 구절,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라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문장은 무엇인가?
이것은 그럼에도 인간의 마음에 울림을 주는 ’아름다움‘의 본질이다. 가장 원초적이고, 존재의 불안과 비관을 초극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아름다움이다. 이 문장을 읽을 때는 오롯이 조탁의 유려함만이 마음에 와닿는다. 또 이 시가 기억에 남는 까닭이다. 결국 미적인 것에 사람은 열광한다! 말없이 옅은 신음을 뱉는다!
시의 내용을 보면 한 돌에 관한 것이다. 돌에게 연서를 쓰고 있다. 그리고서 찢겠다고 한다. 이 우유부단함과 불완전함은? 바로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이것은 경험에서도 알 수 있다. 사람은 몹시 자주 흔들리고, 불안해한다. 이성이란 것은 허상일지도 모른다. 이 ’방황하는 듯한‘ 이야기는 이상의 <날개>에서도 등장한다. 작품의 주인공은 오랜 시간 집에서 빈둥대기만 하다 후에 백화점 옥상에 올라 날아 보자꾸나, 한다. 난다는 것에서 우리는 다시 불안을 비약하고 초극하려는 미학이자 이상(理想)을 재확인할 수 있다. 한줄기의 희망이 그럼에도, 어떤 가치에 대한 사랑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사실임을 부정할 수 없으니.)
이상의 다른 작품인 소설, <권태>에서는 이런 실존 의식이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이야기의 화자인 ’나‘는 한적한 시골에서 살며 죽을 듯한 권태, 지루함을 느낀다.
“마당에서 밥을 먹으면, 머리 위에서 그 무수한 별들이 야단이다. 저것은 또 어쩌라는 것인가?“
”그러나 여기 어디 불을 찾으려는 정열이 있으며, 뛰어들 불이 있느냐? 없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상, <권태>의 문장들.
죽음을 면전에 둔 사람에게는 무엇이 남을까? 우정도 사랑도 없이 홀로 병실에서 지내면 찾아오는 것은 커다란 외로움과 공허이다. 달이 빛난다. 왜 빛나는가? 무엇 하러 저곳에 있는가? 나는 살아있긴 한 것인가?
이 소설은 읽는 이 모두가 화자인 ’나‘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초극의 미학은 어디에 있는가? 물론 아이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장면의 멜랑콜리한 서정성도 인상적이지만, 내가 재미있다고 여긴 부분은 이곳이다.
소는 잠시 반추를 그치고, 나를 응시한다.
'이 사람의 얼굴이 왜 이리 창백하냐? 아마 병인인가보다. 내 생면에 위해를 가하려는 거나 아닌지, 나는 조심해야 되지.'
이렇게 소는 속으로 나를 심리하였으리라.
소를 의인화하고 그가 하는 말까지 가정하여 쓰고 있다. 이런 불가능을 너그럽고 자유롭게, 가지가 뻗듯 표현 해내는 문장에서 나는 즐거움을 느꼈다. 그럼에도 ’소‘에게 작은 애정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소가 편안하게 풀을 뜯고 있지 않은가. ’나는 조심해야 되지.‘ 귀엽지 않은가.
결국 논리의 비약(무시)은 사랑이다. 허무한데 왜 사는가? 죽을 것이라면 왜 살고 있는가? 보아라! 사랑이 존재함을! 이런 경우에 비관의 의식은 잠깐 잠에 든다.(하지만 그것도 항상 옳다고는 할 수 없겠다.. 세상은 참으로 이상해져가고 있지 않은가.. 사랑은 조금의 위안이 되지만 진정한 버팀은 스스로 찾아야 하리라. 그러나 무척이나 힘든 것이 아닌가.. 오히려 사랑이 안쓰러울 지경이다. 탁한 만사 속에서 스스로의 본성을 간신히나 지키고 그 광채를 발하니.) 시인 김수영(1921~1968) 또한 시작(詩作) 때의 ’사랑의 관대함‘을 경유해야지만 자유의 과잉(시를 짓는 것)이 시발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마치겠다. 시인 이상은 기존 사실주의, 전후 의식, 자연주의의 양상을 띤 기존의 한국 문학 작품들과 달리 인간의 불안과 권태, 외로움, 공허, 실존을 드러낸 몇 없는 작가이다. (내가 아는 바로는 그러하다. 아니라면 사죄드린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도 몹시 작은 아름다움 따위가 반짝거린다. (너무 작아서 현미경으로 보아야 해 정도의 크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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