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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영화가 나아가야 할 곳(포크너, 이창동, 하루키의 작품 중심으로)

  • 작성자 노스텔지아
  • 작성일 2025-12-20
  • 조회수 302

1) 이번 글의 동기 및 목적


1958년 미국의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는 [Barn Burning](헛간, 불태우다)이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을 발표한다. 그리고 1983년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納屋を焼く](헛간을 태우다)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한다. 마지막으로 2018년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이 개봉했다. 이 세 개의 작품은 같은 주제를 공유하면서도 문화적으로, 형식적으로, 서사적으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첫 작품인 포크너가 담고 있는 주제, 무라카미 하루키가 담고 있는 주제, 이창동이 담고 있는 주제가 모두 다르며, 이 소설의 공통점인 ‘불태우는 행위’라는 것도 모두 다른 것에서 파생되고 있다. 이 세 가지 작품은 로컬라이제이션, 트랜스 미디어 등으로 그 효과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처음 ‘헛간을 태우다’라는 하나의 행위가 버닝이라는 거대한 서사까지 어떻게 이어질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이어짐의 효과를 탐구해 보고자 했다. 


[버닝]은 트랜스 미디어의 최종적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 관객은 단 52만명이 그쳤다. 실제로 작품성을 크게 인정받았음에도 말이다. 2018년 칸 영화제에서 [버닝]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현지 분위기는 열광적이었다. <스크린데일리>는 역대 최고 평점(3.8)을 주었고, 다른 매체들도 폭발적인 리뷰를 쏟아내며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대중의 벽은 여전히 높다. 대중들은 여전히 오락적인 영화, 재미를 추구하는 영화를 찾고 있다. 그것은 대중의 문제가 아니다. 이전에도 그래왔고, 현재도 그런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애당초 독립, 예술 영화는 특정한 매니아들이 주로 관람했다. 그러나 이젠 그 매니아들도 이젠 사라지고 있다. 작품성의 이유도 있겠지만, 극장이 적자로 인해서 독립, 예술 영화를 상영하지 않는다. 대중들은 독립, 예술 영화 전용관이 줄어들수록 영화를 볼 기회를 잃고 있다. 이 글에서는 트랜스 미디어를 통한 분석, 더 나아가 영화계, 문학계의 수요가 하락하고 있는 2025년, 어떤 방식으로 대중에게 다시 예술을 선보일 수 있는지 탐구할 것이다.



2) 소설 줄거리 및 정보


2)-1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헛간, 불태우다]


윌리엄 포크너는 [Barn Burning]이라는 제목으로 1958년 단편작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미국 남부에 만연하던 대지주와 소작농의 계급 갈등을 다룬다. 주인공 사티의 아버지 애브너는 소작농인데, 늘 욱하는 성미를 참지 못하여 지주와 다투거나 송사에 휘말린다. 일말의 분노가 차오를 때마다 지주의 헛간(대규모 농장의 헛간은 저택만큼 크고, 값비싼 농기구와 수확물, 가축 등을 보관한다.)에 불을 지르는 애브너는 좀처럼 정착하지 못하고, 가부장에 짓눌린 가족들 역시 떠돌이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이렇듯 매사 무모하고 무자비하고 무법적으로 생활하는 아버지를 보며 아들 사티는 혼란(두려움과 수치심, 존경과 죄의식)에 사로잡히고, 마침내 결단을 내리게 된다. 아들 사티가 지주에게 아버지의 범죄를 예고해 주고, 도망간다. 어두운 숲길을 헤쳐 나가며 총소리가 들리고(아버지의 죽음을 암시한다.) 아들 사티가 밤길을 걷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은 단순히 말하자면 가족주의, 도덕적 갈등, 계급 갈등, 폭력과 저항에 대해 다루고 있다. 아버지의 폭력성은 단순히 우연에 의해서 나오게 된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아버지는 남부 백인 농사꾼으로 등장 한다. 왜 이런 인물이 나오게 되었느냐 하면, 당시 남부의 백인 농사꾼들은 대지주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소작농이다 보니, 거의 자유가 없다시피 되었고 대지주에게 억압당하며 살아왔다. 그로 인한 분노가 아버지가 헛간을 태우는 행위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그렇다고 이 행위가 옳다고 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아들 사티는 처음 아버지에 대한 재판 장면에서부터 이미 도덕적 양심과의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가족이라는 끈끈한 관계가 개인의 양심으로부터 무너지는 것은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현대에 오면서 나타나는 개인의 고독이나, 당시 사회구조에 맞서고자 하는 양심이 반영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2)-2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는 ‘나’, ‘그녀’, ‘남자’가 등장한다. 나라는 등장인물은 그녀에게 흥미를 가지게 된다. 그녀는 아버지가 죽고,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오는데, 그때 세련된 차림의 젊은 남자를 데리고 돌아온다. 이 일을 계기로 남자와 여자, 나는 다시 한번 그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때 남자는 나에게 자신이 헛간을 태우는 취미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심지어 이유도 없이, 그리고 ‘나’의 집 주변에 있는 헛간을 태우겠다고 예고한다. 대마초를 피우면서 말이다. 나는 자신의 집 주변에 있는 모든 헛간을 조깅하면서 확인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헛간이 탄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이후 다시 그 남자를 만났을 때, 그녀는 이미 연락이 두절된 상황이고 남자는 이미 헛간을 태웠다고 말한다. 나는 이후에도 매일 헛간을 찾아보지만, 불탄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포크너의 소설과 제목은 같지만, 사실상 포크너의 요소를 거의 다 제외했다고 본다. 1984년 출간 당시의 대목과 현 대목을 비교해 보자.


“비행기가 도착하자-비행기는 네 시간이나 연착했고, 그동안 나는 커피숍에서 윌리엄 포크너의 단편을 읽었다-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게이트에서 나왔다.” (1984년, 56쪽)


1990년 전집에서는 이 부분이 “주간지를 세 권 읽었다”로 바뀐다. 즉 포크너적 요소가 모두 빠진 것이다. 사실 소설에선 [위대한 개츠비]를 나타내는 부분이 훨씬 더 많다. 소설 속에 나오는 남자는 무역 일을 한다고만 말할 뿐,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돈은 매우 많은 사람이다. 이 소설에선 남자에 대한 평가를 확실하게 해준다. 즉 ‘나’라는 1인칭 시점에서 ‘남자’에 대한 평가를 꽤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꼭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돈은 많은 수수께끼의 청년들.”


이 대목에서도 하루키가 [위대한 개츠비]를 활용한 부분을 엿볼 수 있다. 위대한 개츠비를 활용하여 남자의 성격, 정보를 정의할 수 있는데, 추후 무기력한 현대인을 표현하는 장치에 개연성을 부여해 주기도 한다.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는 사실상 포크너와 헛간을 태운다는 하나의 행위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다. 또한 1980년대 버블 경제 당시에 경제적,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운 사회를 맞이했지만, 정서적인 공허함과 무기력함을 느끼는 현대인을 이 소설에선 표현하고 있다. 



2)-3 이창동의 영화 [버닝]

주인공인 종수, 해미, 벤이라는 세 인물을 중심으로 영화가 전개된다. 종수는 소설가를 지망하고 있는 청년이고, 해미는 아프리카로 여행을 가거나, 팬터마임을 배우는 등 여러 가지 경험을 하는 젊은이다. 벤은 개츠비와 같이 출처는 알 수 없지만, 돈은 많은 인물이며 일은 거의 하지 않고, 사람들과 이야기하거나 사교 모임에 많이 나가는 특성을 보인다. 이야기는 주로 하루키의 이야기와 비슷한데, 다른 점은 해미가 연락이 두절 되고 사라진 후로, 종수는 벤이 해미를 죽였다고 생각하게 되고, 결국 종수가 벤을 죽이며 마무리되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이외에도 하루키의 소설에는 나오지 않는 여러 메타포들이 존재한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에선 주로 한국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과는 비슷한 점이 많으면서도, 한국적인 정서로 이를 녹여냈다. 자세한 이야기는 본론에서 이어 나갈 예정이다. 


1) 작품간 유사성


1)-1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헛간, 불태우다]와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


영화 [버닝]에서는 포크너의 소설, 하루키의 소설 이 둘의 내용을 모두 반영하고 있는 편이다. 물론 [버닝]의 공식적인 원작은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가 맞지만, 결코 이창동 감독이 포크너의 소설을 하루키처럼 배제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먼저 영화 내에서 벤은 종수에게 직업을 물어본다. 종수는 자신이 소설을 쓰고 있다고 이야기를 한다. 벤은 종수에게 묻는다.


“종수씨는 혹시 어떤 작가를 좋아하는지 물어도 돼요?”


“아... 윌리엄 포크너요.”


“아, 포크너?”


“포크너 소설을 읽으면, 내 얘기 같다 싶을 때가 있거든요.”


이 대목을 통해서 이미 영화 [버닝]은 포크너 요소를 배제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아버지는 포크너의 소설처럼 재판을 받고, 종수는 아버지의 재판을 위해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여러 유사한 장면이 등장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이 장면들은 희미하게 희석되어서 표현된다. 즉 이창동이 포크너의 소설 [헛간, 불태우다]를 그대로 차용한 장면은 거의 없는 것이다. 다만, 은유적으로 나타나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종수가 마지막에 벤을 살해하는 장면이다. 이창동 감독은 종수가 벤을 살해하는 이유에 관해서 그것은 ‘필연적’이라고 말한다.


“종수씨는 무슨 소설을 쓰세요? 이런 거 물어도 되나?”


“저는 아직까지 무슨 소설을 써야 될지 모르겠어요.”


“왜요?”


“저한테는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요.”


종수에게 이 세상은 너무나 모호한 것이고, 그 모호함에 대한 ‘분노’가 그의 살해를 촉발시킨다. 그의 분노는 여러 이유로 나온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안감, 벤과 대조되는 자신의 신분, 아버지에 대한 분노 등 매우 다양한데,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에는 계급에 대한 분노가 아버지의 헛간을 태운다는 행위를 통해 발현된다는 점에서 만약 종수가 벤과의 계급 차이로 인한 열등감 때문에 살해를 했다고 해석한다면 두 행위(헛간을 태우는 행위, 벤을 살해하는 행위)는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두 행위는 인물의 분노가 표출되는 행동이었던 것이고, 인물이 겪었던 결핍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종수는 때로는 분노를 표출하는 포크너 소설 속 아버지 애브너의 면모를 보이기도 하면서, 때로는 아들 사티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 둘 모두 세상의 모호함에 대한 분노 혹은 불안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아들 사티가 간접적으로 한 아버지의 살해한 것은 종수가 마지막 벤을 죽이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 둘 또한 이 사회의 모호함, 부조리에 대해 내면 깊이 상처를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윌리엄 포크너, 이창동이 만든 두 작품에서 나타나는 공통 행위는 무언가를 태운다는 행위이다. 포크너의 소설에선 헛간을 태우고, 이창동의 영화에선 비닐하우스, 자동차를 태운다. 불태운다는 행위를 만약 하나의 주제로 잡아본다면,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소설에서 영화로 전환되어 세계관이 확장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포크너가 말한 헛간을 태우는 행위는 계급주의에 대한 저항, 혹은 분노이다. 대지주가 소작농의 자유를 억압하고, 탄압하는 당시 미국 남부 시골 사회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이창동의 영화 [버닝]에서 무언가를 태우는 장면은 두 번 등장한다. 종수의 어린 시절, 비닐하우스가 불타고 있는 것을 보는 종수의 모습, 그리고 마지막 종수가 벤을 살해하고 자동차를 불태우는 장면. 이 두 장면 중 종수가 자동차를 태우는 모습은 마치 계급주의에 저항하는 애브너의 모습도 보이지만, 버닝에선 추가로 한국적인 정서를 추가해 준다. 


종수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 짐을 나르는 택배 기사로 등장한다. 종수는 현대 한국의 청년 세대를 보여준다. 종수에겐 남은 것이 없다. 아버지가 그에게 남겨준 것은 농사지을 때 쓰던 소뿐이고, 어머니는 떠났다. 반면 벤은 부모님의 재력으로 거의 일도 하지 않고 있음에도 부유하게 살아간다. 또 해미와 같은 ‘창조자’들을 마치 서커스를 보는 것처럼 재미있고, 흥미 있는 것으로 치부한다. 단순히 해미가 하는 그레이트 헝거의 춤과 같은 것을 자신들의 항유거리로 즐기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해미는 팬터마임을 하며, 사라져 버린 삶의 의미를 찾는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춘다. 즉 해미는 창조자인 것이다. 없는 것일지도 모르는 의미를 창조하는 창조자인 반면, 벤은 파괴자이다. 벤은 영화 도중 자신이 요리를 좋아하는 이유를 말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만들고 먹어 치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그는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파괴자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종수는 벤의 모습을 보고는 큰 부조리를 느낀다. 이 세상의 모호함, 자신의 처지, 가난, 어릴 적 아버지의 폭력, 결핍 이것들은 모두 그의 분노로 이어지는 것이다. 종수는 벤을 살해하기 전, 해미의 집에서 소설을 쓴다. 이 점이 중요하다. 종수는 마침내 모호한 세상 속에서 자신의 결론을 내린 것이다. 마치 포크너의 소설 속 사티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아버지를 간접적으로 살해한 것처럼. 종수는 소설을 쓴 이후 벤을 살해한다. 그리고 자동차를 불태운다. 그것은 분노의 표출일 것이고, 파괴자인 벤이 마침내 자신까지 파괴하는, 모든 서사가 집결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종수가 살해하는 그 장면이 종수가 쓴 소설이라는 해석도 가능하고, 다른 다양한 해석도 가능하지만, 중요한 것은 포크너의 소설에서 나온 불태우는 행위, 즉 분노의 표출이 이창동의 영화에선 절대 변질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무엇이 추가된 것인가? 그것은 로컬라이제이션, 즉 현지화가 추가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아래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1)-2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와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


이 두 작품은 상당한 유사성을 보인다. 애당초 이창동 감독은 하루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두고 새로운 설정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나’, ‘그녀’, ‘남자’ 설정은 ‘종수’, 해미‘, ’벤‘의 설정으로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종수를 한국의 소설가 지망생으로 잡았다는 점 등에서 여전히 차이점이 보인다. 또 영화 내에서 해미는 우물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자신이 어릴 적에 우물에 빠졌었다고, 종수는 그 우물의 정확한 위치까진 몰라도 우물의 실제 존재 여부라도 알려고 하지만, 모두가 다른 말을 한다. 누구는 우물이 존재한다고 하고, 누구는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혼란을 준다. 이러한 설정들은 하루키가 아닌 이창동이 만든 설정들이다. 두 작품 모두 현대인의 무기력함과 계급사회를 다루고 있으며, [버닝]에선 구체적인 인물을 설정하여 보다 더 개연성을 부여한다.


2) 트랜스 미디어 관점에서 분석


2)-1 트랜스 미디어란?


트랜스 미디어는 ’매체를 초월한‘이란 뜻이며, 매체 간의 간극을 넘어서는 개념이다. 대표적인 예시로 ‘미생’이 있는데, 원작 웹툰의 미생이 이후 드라마로 제작된 것도 트랜스 미디어의 예시로 볼 수 있다. 즉 하나의 이야기나 세계관을 여러 매체(미디어)를 통해 확장하는 것이다. 해리포터 또한 원래 J.K. 롤링이 쓴 단일 매체 기반의 소설이었지만, 이후 영화나 연극, 게임, 테마파크 등으로 확장해 가며 트랜스 미디어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세계관 즉 IP라 부르는 것이 기반으로 되어 여러 줄기로 뻗어나가는 형태인데, 그것은 영화, 드라마, 게임, 웹툰 등 다양하다.


2)-2 트랜스 미디어로 얻은 효과


트랜스 미디어에서 가장 큰 효과는 현지화, 즉 로컬라이제이션이라 할 수 있다. 로컬라이제이션의 예시로는 만약 미국에 치즈 베이컨 버거가 출시되었으면, 한국에 상륙하고 불고기 버거로 현지화되는 그러한 예시들이 있다. 트랜스 미디어와 로컬라이제이션이 동일한 개념은 아니지만, 트랜스 미디어가 되면서 로컬라이제이션이 따라오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이창동이 영화화하면서 로컬라이제이션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하루키에서의 ‘나’는 사실 큰 특징이라 할 게 거의 없는 인물이었지만, 이창동의 영화 ‘종수’에서 소설가 지망생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또 하루키에서는 남자를 아예 개츠비와 같은 인물이라고 화자가 평가를 해버리지만, 이창동의 영화에서는 왜 벤이 개츠비와 같은 인물인지, 종수가 벤을 뒷조사하는 장면을 길게 배치함으로써 벤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 시각적으로 잘 드러나게 해준다. 벤은 여러 전시를 돌면서, 노동자 착취를 의미하는 미술 작품을 감상하고, 그곳에서 가족과 식사를 하기도 한다. 또 벤은 여전히 서민들을 자신의 향유 거리로 여기며 재미, 흥미 그 이상으로 느끼지 않는다. 이 점도 소설에서 영화로 넘어가며 상당히 매끄러워지고, 한국적인 느낌이 더해진 것이다.


하루키뿐만 아니라 윌리엄 포크너에서 이창동으로 이어지는 부분도 상당히 현지화가 많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포크너가 그린 아버지를 한국적인 성격으로 묘사한 부분들도 보이고, 아들 사티의 모습을 종수에게 투영하기도 했지만, 사실 이 부분은 조금 희미한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이창동은 윌리엄 포크너의 요소를 많이 넣은 것도 아니고, 넣어도 희석되어 버리거나, 이창동이 중심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소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게 현지화된 부분을 찾아보자면, 바로 ‘헛간’과 ‘비닐하우스’라고 볼 수 있다. 이창동은 헛간을 태우다로 원작을 다루지만, 헛간은 이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이창동은 비닐하우스를 사용했다. 이창동은 왜 비닐하우스를 사용했을까? 일단 한국에선 헛간이라는 개념보다, 비닐하우스라는 개념이 더욱 익숙할 것이다. 그리고 시골에 버려진 비닐하우스가 많다는 사실은 더욱 헛간과 비닐하우스의 접점을 높여준다. 또 이창동은 헛간을 태우다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보다 무언가 한국적인 것, 좀 더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비닐하우스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비닐하우스는 작중 분위기와 아주 잘 맞아떨어진다. 영화는 시각화의 영역이다 보니, 한국에서 헛간을 태운다고 하면 약간 어색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을 것이지만, 비닐하우스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훨씬 더 실감 나는 소재로 재탄생했다. 종수는 종종 비닐하우스 안을 바라보는데, 비닐하우스 내부의 그 흐릿흐릿하고, 희미하게 보이는 그 시점은 마치 종수를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다.


트랜스 미디어로 얻은 또 다른 효과는 로컬라이제이션 말고도, 시각화의 효과가 있다. 본래 이창동 감독은 특이한 촬영 기법으로 유명한데,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서 등장하는 ‘딥포커스’ 기법도 이창동 감독의 놀라운 연출 중 하나이다. 하나의 연출이 영화의 메시지를 함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소설에선 텍스트를 통해 모든 환경을 연출해야 한다. 그렇다 보니 한계가 역시나 느껴진다. 작가가 쓴 배경 묘사 정도의 정보만 가지고 독자가 직접 상상을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독자가 주체적으로 소설을 해석하거나, 사고력, 상상력을 키우는 데에는 도움이 될 순 있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바, 미장센을 보여주기엔 어려울 수도 있는 것이다. 영화는 그 단점을 단번에 해소할 수 있는 열쇠와도 같은 존재이다.


이창동 감독이 버닝에서 보여준 촬영 연출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첫 번째로 해미의 집에서 종수는 창문 바깥을 우연히 바라보게 되는데, 햇빛이 남산타워에 반사되어, 해미의 집으로 들어온다. 해미의 집은 항상 비교적 어둡다. 즉 해미의 집에 들어오는 그 햇빛조차도 실은 가짜이고, 이것은 해미의 가난함, 처지를 나타내주기도 한다. 진짜 햇빛조차 볼 수 없는, 남향집은 비싸서 살 수 없는 서민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두 번째로는 해미가 그레이트 헝거 춤을 출 때이다. 해미는 옷을 벗고,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추는데, 노을 빛에 그림자처럼 나타난 해미의 모습 또한 새로운 느낌의 시각적 경험을 안겨준다. 


세 번째로는 종수의 첫 등장씬이다. 종수가 택배 짐을 나르는 장면인데, 시끄러운 주변 인파들과, 흔들리는 카메라 설정은 그 번잡한 도시에 직접 온 것만 같은 느낌을 전달해 주며, 행인들과 부딪힐 뻔 하는 장면은 특히 그 장면의 현장성을 높여준다. 


이렇게 트랜스 미디어는 더욱더 넓은 범위의 내용을 다룰 수 있게 도왔다. 만약 포크너의 소설이 없고, 하루키의 소설만 등장했으면 어땠을까? 아마 이창동 감독은 종수와 아버지의 설정을 생각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하루키가 없었다면, 이창동은 아예 다른 영화를 만들었을 것이다. 영화 [버닝]이 특별한 점은 포크너의 요소, 하루키의 요소를 모두 한 영화에 담아냈다는 것이다. 사실 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두 작품 모두 시대도 다르고, 말하고자 하는 바도 다르고, 배경도 완전히 다르다. 그럼에도 이 둘을 적절히 영화 내에 배치하여 두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 일부를 담아낸 것이다. 거의 알려지지 않은 두 소설 [헛간을 태우다], [헛간, 불태우다]를 다시금 연결한 것도 눈여겨 볼만한 이야기다. 


[버닝]을 통해 한국 사람들은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 포크너의 [헛간, 불태우다]를 읽기 위해 문학동네 단편집 [반딧불이], 민음사 단편집 [헛간, 불태우다]를 읽고 리뷰를 쓰는 사람이 많아졌다. 즉 영화를 통해 전에 나왔던 원작 소설이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인데, 이를 ‘미디어 셀러’라고 부른다. 영화나, 미디어의 노출을 통해 홍보 효과를 얻어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다. 물론 이 두 책이 베스트셀러까지 오른 책은 아니지만, 버닝을 본 관객들은 원작까지 구매를 하거나, 포크너의 소설을 읽어보는 사례가 꽤 많아졌다.



3)-1 트랜스 미디어의 효과는 무엇인가?


트랜스 미디어를 통해 얻은 효과는 다양하다. 로컬라이제이션이라는 현지화로 문화적 맥락의 변화를 볼 수도 있고, 시대적 변화도 경험할 수 있다. 트랜스 미디어는 변화하는 시대, 다양함을 추구하는 시대에서 꼭 필요한 것이다. 하나의 세계관을 가지고 그 뿌리가 확장해 나가는 예시는 정말로 많다. 만약 해리포터가 그렇게 확장해 나가지 않았다면, 트랜스 미디어를 하지 않았더라면 현재까지도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세계관이 될 순 없었을 것이다. 버닝 또한 트랜스 미디어를 통해서 많은 메타포가 생겨났고, 이창동만의 철학, 한국적인 정서를 추가하여 더욱 작품성이 높은 영화를 만들어 냈다. 


3)-2 트랜스 미디어는 이제 어떤 방식으로 이용되어야 할까?


2025년, 한국 영화계는 대중영화, 독립영화 할 것 없이 큰 수요 하락을 맞이하고 있다. 이유는 다양하다. OTT의 등장도 있을 것이고, 코로나 이후로 오락적인 서사를 추구하는 한국 관객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한국 영화계는 어떻게 해야 다시 코로나 이전의 영화 수요로 돌아갈 수 있을까?


2019년 이전에는 [기생충], [시], [벌새] 등의 독립, 예술 영화가 어느 정도 수요가 있었지만 2019년 이후로는 현재 독립, 예술 영화의 흥행 기준이 10만명->2만명이 될 정도로 하락했다. 이것은 단순히 작품성의 문제를 떠나서 독립 예술 영화 전용관이 줄어들고, 각종 영화제 지원금 폐지도 영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 52만명으로 손익 분기점은 170만명이기 때문에 흥행에는 실패했다고 이야기한다. 이창동 감독은 주로 대중성보단 작품성을 중요시하기에 나온 결과임을 확인할 수 있다.


1930년대~40년대 할리우드는 ‘블록부킹’이라는 방법을 사용해서 위기를 극복했다. 당시 할리우드 영화계는 침체된 상황이었다. 현재 2025년 한국 영화계와 상황이 매우 비슷하다. 그때 할리우드에선 예산이 많이 들어가는 A급 영화를 만들었는데, 관객이 얼마 나오지 않으면 큰 적자가 생겨서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제작사들은 이때부터 B급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한다. B급 영화는 비교적 예산이 훨씬 적게 들어가는 영화이었기 때문이다. 제작사들은 A급 영화 한 편, B급 영화 한 편을 같이 엮어서 판매하게 되었고, 이것은 B급 영화라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과 함께 할리우드 영화계의 수요를 높여주게 되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추후 할리우드에 좋은 영향을 주었는지, 오히려 악영향을 주었는지에 관해서 논란이 있는 상황이다. 애당초 법원에서 독점 금지법으로 금지를 내렸기 때문이다. 독점을 하여 오히려 망한 제작사들이 있다는 의견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을 통해 위기를 극복해 냈다는 점이다. 한국 영화계는 어떻게 이것을 반영할 수 있을까?


당시 할리우드 영화계는 현재 한국 영화와는 큰 차이점을 보인다. 당시에는 OTT가 없었고, 극장은 단순히 영화를 보는 공간을 넘어, 소통의 공간이자, 데이트의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그리고 블록부킹 자체가 상업성을 위한, 오직 독점을 위한 스튜디오들의 전략이었으므로 현대에서 잘 못 이용될 경우 되려 양극화를 낳을 수도 있다. 즉 트랜스 미디어의 효과를 잘 보여주면서도 대중들에게 예술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3)-3 해결방안


과거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사용한 블록부킹의 방식을 차용하여 영화 [버닝]을 현대 한국식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방안을 고려해 보았다. 중요한 것은 작품의 내용을 바꾸거나, 감독의 기획 의도(애초에 대중성을 고려한 영화라 보기 어려움)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 1.블록부킹의 한국식 활용


2024년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상영했을 때, CGV에서는 관람하는 관객에게 특전을 지급해 주었다. 특전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본집 이었는데, 실제 영화의 명대사 일부를 책으로 소장할 수 있어, 관객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자리 잡은 바 있다. [버닝]도 이 방식을 활용하여,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 포크너의 소설 [헛간, 불태우다]에서 영화와 관련된 부분만 발췌하여 얇은 종이책으로 제작하여 특전으로 지급하는 것이다. 그 두 소설을 모두 합치면 책이 두꺼워지므로, 두 작품 각각 제작하여 랜덤으로 지급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관객은 영화를 보고 소설을 다시 읽음으로써 소설의 부분이 어떻게 영화에서 획기적으로 표현되었는지 상기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관객은 트랜스 미디어의 용어를 몰라도 트랜스 미디어가 가지는 이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설의 일부만 발췌하였으므로 추후 관객들의 소설 구매를 통해 미디어 셀러의 효과를 볼 수 있다. 여기서 미디어 셀러란 미디어, 영화를 통해 홍보 효과를 얻어 베스트셀러가 된 책을 의미한다. 영화 하나의 재개봉을 통해서 소설까지 다시 대중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공익성의 목적을 지니고 있다.


2. OTT를 통해서 독립영화 제공


현재 왓챠와 같은 OTT 플랫폼은 여러 독립영화를 제공하여 흥행이 실패한 영화 일지라도 다시 관객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OTT에서 버닝과 같은 영화들과 적극적으로 계약을 맺은 후, 따로 독립영화 분류 창을 플랫폼 상단에 띄우거나, 사용자가 본 영화와 연관된 독립 예술 영화를 추천해 줌으로써 사람들에게 버닝뿐만 아니라 다른 영화들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


3)-4 마무리


영화 ‘버닝’과 소설 ‘헛간을 태우다’는 밀접한 연관성을 띄고 있다. 그 둘의 연관성을 살펴보면, 문화적 맥락에 따라 변화하는 양상, 시대적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양상 등 다양하다. 이는 모두 소설에서 영화로 전환되는 트랜스 미디어의 효과이며, 트랜스 미디어를 통해 영화 [버닝]에선 두 소설을 모두 반영한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영화를 창작해 냈다. 현재까지 [버닝]은 평론단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고, 버닝을 통해 소설을 구매하는 관람객도 일부 존재한다. 


[버닝]을 여러 방식으로 다시 재개봉 하거나, OTT 공개를 통해서 미디어 셀러의 효과를 확인할 수 있으며 비교적 관객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못한 [버닝] 관객은 재발견할 수 있다.


[버닝]은 역사를 기록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2010년대 한국 청년의 현실을 보여주고, 현재 한국이 가지고 있는 모순과 문제점을 수많은 메타포와 미장센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종수의 분노는 한국 청년의 분노에 대한 메타포로 느껴진다. 포크너의 소설 [헛간, 불태우다]는 미국 남부 시골 사회의 불평등과 억압, 도덕적 갈등을 보여주고,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회에서 현대인이 느끼는 무기력, 존재성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와 소설은 그렇기에 공존해야 하고, 보존되어야 한다. 그것은 중요한 결단이고, 2025년 한국은 소설과 영화의 소멸 속에서 생존해야 한다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 분명 영화 기관들과 정부, OTT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마치 버닝 속 종수가 마지막 해미의 집에서 소설을 써낸 것처럼, 그들은 이 수수께끼와 같은 모호한 예술이라는 경계에서 생존의 길을 찾아나가야 한다. 2025년 칸 영화제 장편 부문에서 한국 영화는 단 한 개도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 2025년 문학사상은 아직도 복간되지 못하고 있다. 이젠 영화, 문학 말할 것 없이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번 보고서를 통해서 다시 한번 한국 예술계가 어느 곳으로 나아가야 할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에 관해서 고민해 볼 수 있었다. 또 여러 가지 탐구해 보고 싶은 주제들이 떠올랐다. 한국의 독립 영화계와 프랑스의 독립 영화계의 차이를 탐구해 보고 싶었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독립영화전용관이 한국에 비해 훨씬 많아서, 여전히 독립영화시장이 활발하게 유지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또 일본, 30~40년대 할리우드 영화 시장 등을 현대 한국 영화계와 비교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과거의 사례나 다른 나라의 사례를 가지고 한국 영화의 생존 방향을 충분히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블록부킹처럼 말이다. 물론 하나의 방법으론 불가능할 것이다.


문학계는 어떠한 문제가 있는 걸까? 학교 내에 문예지는 이젠 볼 수 없고, 도서관을 가도 문예지는 보기 드물다. 영화로 치면 극장과도 같은 문예지들이 사라지는 이유를 한 번 탐구해 보고 싶어졌다. 트랜스 미디어의 핵심은 원천 IP가 있어야 한다. IP는 주로 소설과 같은 곳에서 탄생한다. 즉 원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설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마치 극장과도 같은 문예지가 사라진다면 소설도 사라질 것이고, 그렇다면 버닝과 같은 한국 영화가 또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악순환이 반복되어선 안된다. 이 점도 한 번 고민해 보고, 해결책을 탐구해 보고 싶어졌다.


트랜스 미디어는 변화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우리가 꼭 활용해야 하는 요소가 되었다. 미디어는 하루가 다르게 접근방식부터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기에 트랜스 미디어를 통해 콘텐츠를 기획하고, 구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젠 한국 문학계와 영화계가 자신들이 사용했던 옛 방식을 고집하기보다는 트랜스 미디어와 같이 새로운 방식에 발을 맞춰보고,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한 참신한 방식, 형식으로 다시 독자, 관객들에게 다가왔으면 좋겠다. 

노스텔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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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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