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새벽' 감상
- 작성자 김가연
- 작성일 2026-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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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수 413
고요한 새벽
어둠을 밀어내고
빛이 스며들 때
세상은 잠든 듯 고요하고
바람은 한 줄기의 속삭임처럼
새들의 노래가 하늘에 퍼지기 전에
별빛이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나는 그 순간을 가슴에 새긴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잠시 멈춘 듯
마음 속 깊이 여운이 남아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는
고요한 새벽
작가는 지금 현재, ‘어둠을 밀어내고/빛이 스며’드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시간은 세상이 ‘잠긴 듯 고요’하고 바람은 ‘한 줄기의 속삭임’처럼 들린다. 평소 외향적인 생활을 하는 작가에게 있어서 ‘고요한 새벽’이 아니라면 순수하게 자연물을 감상하기란 매우 힘들다. ‘고요한 새벽’이 아니라면 이러한 감성(새들의 노래, 한 줄기의 속삭임, 마지막 인사) 또한 자아내기 힘들다. 왜 이 ‘고요한 새벽’을 고집하는가? 작가는 3연에서 ‘고요한 새벽’이 특별함을 암시한다. ‘새들의 노래가 하늘에 퍼지기 전’, ‘별빛이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시간. 이 순간을 작가는 ‘가슴에 새’기고자 한다. 눈, 카메라가 아닌 가슴에 새기는 이유는 두고두고 보려고, 어른이 되고 순수한 그 마음을 잃어버렸을 때 먼지 쌓인 졸업 앨범을 찾아보듯 찬찬히 꺼내보고자 한다. 이 ‘고요한 새벽’은 작가에게 있어서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새로운 날의 출발? 자아 성찰의 시간? 이는 ‘작가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새벽은 사람이 감정에 취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대…./…./왜 그런지 이유를 생각해보았는데,/고요해서인 것 같다./…./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조용하기 때문에/내 감정은 시끄러울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새벽이 ‘고요했’기 때문에 이 시를 집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올빼미 같은 수면 패턴을 가지고 있어 일어나기도, 다시 잠들기도 애매한, 하루 중 가장 몽롱하고 이성적일 수 없는 ‘새벽’의 속성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작가는 ‘새벽’보다도 ‘고요함’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고요함은 마음속 그림자(타인에게 보여주지 않는, 보여줄 수 없는 마음)와 볕 드는 곳(타인에게 보여주는 마음)의 경계를 흐리게 만든다. 사회에서 우리가 아는 사람(타인에게 보여지는 이미지 혹은 인격)로 생활했다면, ‘고요한 새벽’ 한정으로 비로소 순수하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할 수 있는 ‘작가’로 변하는 것이다. 마음이 자신의 감정, 추억, 기억, 과거, 상처를 보관하는 주머니라고 치자. 고요한 새벽, 작가의 마음속에서 내면의 ‘소리’는 비로소 자신의 입지를 가지게 되며, 내면의 ‘소음’은 마이크를 가져다 댄 것처럼 ‘바람의 한 줄기 속삭임’보다도 더 커지게 된다. 이 모든 것을 품은 마음을, 작가는, ‘감정의 소용돌이’라고 정의한다. 썩 좋아 보이진 않는다. 작가의 감정을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자유와 혼돈(불안)을 모두 겪을 수 있는, 뒤숭숭한 ‘고요한 새벽’. 독자로써, 그리고 작가를 열심히 응원하는 짱팬으로써 나는 작가가 안쓰러우면서도 잘하고 있다 칭찬해 주고 싶다. 왜냐하면 당시 시를 집필한 날의 작가는 달려가다 넘어지고, 장애물에 부딪히면서도 일어서서 저 멀리 북극성처럼 빛나고 있는 이상을 좇는, 건강한 청소년이었을 테니까. 작품으로 다시 돌아가 마지막 연을 주목해 보자. ‘세상의 모든 소음이 잠시 멈춘 듯’이란 표현은 작가가 봤을 때 ‘고요한 새벽’ 풍경의 이미지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해석하고 한다. 작가는 세계를 독자적으로 살아가고 배우는 사람이기 때문에 작가의 세상 끝과 시작은 본인일 수밖에 없다. 즉, 작가의 세상은 작가가 살고 있는 세계(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비물질적인 것)가 아니라 작가가 알고 있는 세상(자신의 마음과 감정, 도덕적 규범을 포함한 모든 추상적이고 비물질적인 것)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뜻깊은 경험을 했을 때 ‘내 세상이 넓어졌다’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곧 세상의 중심이라고 정의한다면 과장한 것일까) 또한 여운의 사전적 정의는 ‘소리가 그치거나 거의 사라진 뒤에도 아직 남아 있는 음향, 운치’라고 한다. 이 두 개의 큰 근거를 토대로 4연 1행을 해석해 보자면 4연에서는 자가의 마음속 ‘감정의 소용돌이’가 사그라들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멈췄다고 서술했기 때문이다. 그 뒤로 작가는 ‘마음속 깊이 여운이 남아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는/고요한 새벽’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마음속 깊’은 여운은 분명 ‘감정의 소용돌이’의 잔해일 것이다. 소용돌이의 피해가 꽤 컸나 보다. 작가는 고요한 새벽을 관조적이고 요약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만약 작가가 시를 시간 순서대로 전개했다면 작가는 ‘고요한 새벽’의 시간을 견뎌냈다고 볼 수 있다. 작가의 고요한 새벽 감상을 끝으로 이렇게 시는 막을 내린다. 많은 시인은 보통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시를 쓴다고 한다. 어느 날, 작가가 집필의 방향성을 잃게 된다면 이 시를 다시 읽어보라고 조언하고 싶다. 작가의 건필과 앞으로 마주할 행복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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