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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로부터 비추어지는 '나'라는 거울의 고찰

  • 작성자 노스텔지아
  • 작성일 2026-03-02
  • 조회수 356

  •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

한 몇 달 전쯤에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거울>을 처음 본 것 같다. 솔직히 이해가 불가능한 영역이라 생각하고 나의 평점을 올려두지 않은 영화였다.

<희생>, <거울> 등 타르코프스키 영화에 나는 평점을 매기지 않았다. 아직 평가하기엔 너무 대단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즉 아직 내가 평가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타르코프스키 작품 중 내가 평점을 매긴 작품은 비교적 쉬운 작품인 <이반의 어린 시절>뿐이다. 그러나 나는 언젠가 시도해 보고 싶었다. 이 어려운 영화를 이렇게 완벽하게 해석하기는 거의 쉽지 않다. 나는 여러가지 해설책을 참고하고, 나의 옅은 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나만의 비평문을 완성했다. 워낙 철학적, 심리학적 개념이 많이 나오다보니 매우 어려웠다. 그럼에도 나의 해석에 성공해서 뿌듯하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해보겠다.



  • 타르코프스키의 의도는 무엇인가?

먼저<거울>이란 작품의 줄거리조차 정리가 사실상 어렵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럼에도 정리를 조금 하자면, 이 영화의 주인공의 이름은 알렉세이이다. 알렉세이와 그의 어머니 마루샤, 알랙세이의 아내 나탈리아, 그리고 주인공의 아들 이그나트까지가 주요 인물이다. 물론 중간 중간 중요한 인물들이 나오긴 하는데, 생략하도록 하겠다. 작품 장면 하나, 하나를 설명하기 전 알아둬야 할 것이 있다. 사실 타르코프스키는 장면 하나를 깊게 분석하는 것을 원치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르코프스키가 말하는 영화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이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다. 물론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이유는 저마다 다르지만, 타르코프스키는 영화관에 가는 이유를 이렇게 서술한다.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영화관에 가는가? 무엇이 그들을 두 시간 동안 스크린 위의 그림자 놀이를 쳐다볼 수 있는 컴컴한 방 속으로 몰아가는 것일까? 관객들은 영화관에서 만사를 잊고 즐거운 오락을 원하고 있는 것인가? 관객들은 혹시 특별한 종류의 마취제를 필요로 하는 것인가? 인간은 보통 잃어버린 시간, 놓쳐 버린 시간, 또는 아직 성취하지 못한 시간 때문에 영화관에 간다.

<봉인된 시간> 타르코프스키 79p

즉 영화를 통해서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하거나, 다시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폴 리쾨르라는 철학자는 미메시스 3단계라는 것을 제시했다. 1, 2단계는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한 이야기를 구성하는 단계이다. 그러나 3단계에 가서는 결국 독자가 그 작품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해야 한다. 결국 최종 목적지는 그것을 향유하고 시청하는 관람객에게 있는 것이다. 작가는 그저 그것에 연결다리를 제공할 뿐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책은 독자에게 전달되는 순간, 독자의 것이라고 이야기 하기도 한다. 독자마다 각자의 방법으로 책을 받아들이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필연적이다. 우리는 각자 다른 삶을 살아왔고, 다른 경험을 통해 살아왔기에 모두 다르게 책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거울>이라는 영화는 불규칙한 장면과 타르코프스키의 어린 시절을 무의식적으로 조합한 후 20번이 넘는 재편집을 거친 영화로, 일반 사람이 이해하기엔 당연히 어려울 수도 있다. 어쩌면 타르코프스키가 원한 것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하나의 무의식적 퍼즐을 관객이 자신의 방식대로 새롭게 맞춰주길 바랬을 수도 있다. 그래서 실제로 관객들 반응은 상반이라고 한다. 아예 이해를 못한 사람과 어쩌다보니 타르코프스키의 어린 시절의 기억과 자신의 삶이 유사하여 매우 공감하며 본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장면에 대한 해설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 장면에 대한 해설(주의: 현재 오류로 이미지가 뜨지 않습니다. 링크를 달아놓았으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타르코프스키는 텍스트보다도 이미지적 심상이 유명한 감독이기 때문입니다.)

첫 장면은 한 소년이 TV를 켜면서 시작한다. TV 속엔 청년과 그를 치료하는 여자 의사가 있다. 청년은 말을 더듬는 습관이 있고, 의사는 그것을 치료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말할 수 있다"를 의사는 외치라고 한다. 마치 최면술을 통해서, 치료를 하는 것만 같다. 이 장면은 상당히 난해하다. 일단 작품과 전혀 관련이 없어보이는데, 관련이 있는 매우 중요한 장면이다. 


실제 이런 연구가 있다고 한다. 정신병원에서 정신병을 불치병으로 생각하자, 실제로 치료가 되지 않았고, 의사들이 정신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게 되자, 그 긍정적 에너지가 환자들에게도 전달되어 실제로 병을 완치했다는 것이다. 이를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피그말리온 효과란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조각가 피그말리온이 자신이 만든 대리석 여인상을 사람처럼 믿고 대했더니, 정말로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즉 어떤 대상에 대한 기대나 믿음이 그 대상을 바꾸어 놓는 효과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라흐마니노프도 비슷한 치료법으로 이를 극복했다. 라흐마니노프는 당시 1번 교향곡 실패로 인해서 한동안 슬럼프에 빠져있었다. 너무나 큰 비난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작곡을 하지 못하던 상태였는데, 이때 최면술을 걸어 '자기 암시 기법'이라는 것으로 그것을 극복한다고 한다. 자기 암시 기법은 계속해서 반복, 주입하는 것이다. '앞으로 당신이 쓴 피아노 협주곡은 성공할 것이며... 등등' 그래서 실제로 라흐마니노프는 우울증을 극복하고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썼으며, 그것은 대성공을 거둔다.


이것은 라캉의 거울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라캉의 거울 이론은 어린 아이가 거울에서 확인한 자아란 자기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자아가 거울에 비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거울이라는 타자를 통해 구성된 자아(관념적 혹은 허구적인 자아)가 비쳐지는 것이다.


즉 나의 욕망이란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내가 욕망함으로써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쉽다. 우리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같이 명문대를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말 그 대학 자체가 좋다기 보다는 남들이 좋다고 그러니까 가는거다. 명품이나 학벌 이런 것들은 모두 사회나 여러가지 영향을 받은 거울이라는 것이다. 그 거울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그 자신은 결국 타자의 욕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거울은 결국 우리 안에 내재된 자아를 비추는 것 같지만, 그 자아는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우리가 욕망하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저것이 나 자신의 자아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서울대를 가는 것은 부모님의 바람인데, 사실은 내가 가고 싶은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진실'이다. 인간의 욕망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어떠한 영향을 미치며, 그럼으로써 새로운 진실을 만들어낸다. 이는 마지막 장면으로 이어지는데, 조금 이따가 이야기 하도록 하겠다.


앞서 말했던 최면 치료법들도 모두 이와같다. 타인이 나에게 바라는 욕망을 우리는 우리가 욕망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타자의 욕망과 나 자신의 욕망을 동일시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타자가 바라는 것을 우리도 바라게 된다. 그것이 거울의 핵심이자, 거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두 번째는 메밀밭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메밀밭은 실제 타르코프스키가 살았던 고향을 40년 만에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이는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앞에 앉아있는 여자는 주인공 알랙세이의 어머니 마루샤다. 그녀는 남편을 기다리면서, 담배를 피고 있다. 수상한 양복의 노인이 그녀에게 다가온다. 처음에는 길을 물어보는 것 같지만, 그는 점점 다가와, 그녀에게 사는 곳을 물어보고, 가방 문을 열 열쇠를 잃어버렸다며 못과 드라이버를 요구한다. 그러곤 자신이 의사라며 마루샤의 맥박을 재려고 한다. 그녀는 '남편을 부를까요'라고 말하지만, 그녀가 반지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남편이 없는 것을 안다고 말한다. 남자는 마루샤에게 담배와 불을 빌리고, 울타리 위에 앉는다. 그러나 울타리가 부러지고, 그 둘은 뒤로 자빠진다. 마루샤는 급하게 일어서고, 노인은 웃으며 말한다.

내가 넘어질 때 여기 있는 다른 것들도 넘어졌어요. 뿌리, 관목들. 이런 생각해 본적이 있어요? 식물도 느끼고, 느낌을 가지고 있고 어쩌면 이해까지 한다는 생각을 해 보았어요? 어쨌든 나무들은 서두르며 돌아다니지 않아요. 우린 항상 바삐 뛰어다니죠. 안달하고 사소한 말이나 해 대며, 우리는 자연을, 그리고 우리들 내면을 믿지 않기 때문이에요. 우린 항상 뭔가 불신하고 항상 서두르죠. 생각할 시간이 없어요.

타르코프스키 <거울> 9분~10분 중

요약하면 인간의 내적 욕망이 자연에게까지 반영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단지 너무 바쁘게 살아가기에, 그것을 인지할 수 없을 뿐.


노인은 급하게 자리를 떠난다. 그때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들판에 바람이 그에서부터, 마루샤로 향한다. 이것이 바로 자연에 반영된 남자의 욕망인 것이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마루샤를 돌아본다. 그리고 가다가, 바람이 다시 불어오자 한 번 더 그녀를 바라보곤 자리를 떠난다. 타르코프스키는 역시나 은유와 메타포의 대가이다. 자연에 반영된 인간의 욕망을 바람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표현해낸 것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보다 이런 은유적 표현은 감탄을 자아낸다. 요약하자면 첫 장면과 두 번째 장면은 타르코프스키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외로움과 욕망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자 여기서 타르코프스키가 바람을 만들어낸 방식도 상당히 재밌다. 타르코프스키는 당시 헬기를 이용해서 인위적으로 바람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때는 1970년대이기 때문에 그렇게밖에 가능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이 바람 장면은 뒤에 멋있게 자리잡은 노을과 함께 인스타에서 종종 올라오는 명장면이기도 하다. 나 또한 인스타 릴스를 통해 타르코프스키를 처음 접했다. 그만큼 타르코프스키의 촬영 방식과 미장센은 일반 사람이 보기에도 너무나 아름답다는 점은 분명하다.


다음 장면은 화재 장면이다. 마루샤의 아들 알랙세이와 마리나가 화재가 났다고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아이들이 말을 반대로 알아듣는지, 그 말을 하자마자 화재를 구경하러 나간다. 마루샤도 그 화재 구경하러 나간다. 


다음은 꿈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주인공 어린 알랙세이의 꿈이다.


꿈에서는 어머니 마루샤가 머리를 감고 있는데, 공포 영화 한 장면 인줄 알았다. 그러고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마루샤는 거울을 쳐다보는데, 늙은 자신이 있고 등등...

여기서 말하는 바는 그녀의 자기 중심적 성격과 그로 인해 그의 남편이 떠났고, 그걸로 그녀는 외로워졌다는 내용이란다. 이 장면은 워낙 파편화되어 있고, 설명하기가 애매한 부분이 많아 자세한 해설은 생략한다.

꿈에서 깨어난 어른 알랙세이가 어머니의 전화를 급하게 받는다. 엄마가 묻는다. 


"너 목소리가 왜 그러니?"


"3일동안 말을 안해서 그래요."


그리고 뭐 사람이 느끼는 것은 모두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말은 부적절하다는 등의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자신들을 버리고 떠난 것, 헛간에 불이난 것이 언제냐고 묻는다. 마루샤는 1935년이라고 단답만 하고, 알랙세이가 꿈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사실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러고는 자신의 오래전 직장동료 리사가 죽었다고 말한다. (관객들은 정말 당황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대화가 맥락이 전혀 안 맞게 흘러가기 때문이다.)알랙세이도 어머니가 답답했는지, 


"왜 우린 항상 말 다툼을 하나요? 제 잘못이라면 용서하세요."라고 말하는 동안 전화를 끊겨버린다


이는 어머니 마루샤의 자기중심적 성격을 드러낸다. 이를 더 잘 나타내는 장면은 뒤이어 어머니가 젊은 시절 일했던 인쇄소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쇄소에서 교정본 것이 있는데, 잘 못 교정한 것 같아서 인쇄로로 급하게 뛰어갔던 것이다. 리사를 비롯한 회사 동료들이 자기 일 아닌데도, 막 걱정해 주면서 같이 따라가주었다. 정작 가보니 잘 못된 교정은 없었다. 그것을 확인한 마루샤는 같이 걱정해주려고 따라온 동료들은 무시하곤 혼자 당당하게 자기 사무실로 돌아간다.


리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남자 회사 동료가 마루샤를 위로하기 위해 술을 들고온다. 마루샤의 비를 맞은 얼굴을 보곤 허수아비 같다고 장난을 친다. 마루샤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동료들은 신경도 안 쓰고 갑자기 샤워를 해야겠다면서 빗을 찾는다. 친구 리사는 그 모습을 보고선 결국 참고 있던 화가 터지게 된다.

일생 동안 너도 '물 가져와, 신발 가져와' 했어. 그 결과가 뭐야? 겉으론 독립적인 여자 같지. 그러나 혼자서는 손가락 하나도 못 움직여. 싫은 게 있으며 못 본 척하거나 찡그리고 말지. 네 전남편의 참을성이 놀라울 뿐이다. 진작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갔어야 했어. 스스로 이런 상황을 만든 거야. 남편으로 하여금 네 철없는 자유분방한 행동을 인정하게 할 수 없었다면 그 사람이 제 때 도망갔다고 봐야겠지. 넌 아이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말거야.

-리사

마루샤가 자기중심적 성격을 가진 것이 결국 가족의 붕괴를 낳았다고 평가한다. 결국 아들과의 관계, 아버지와의 관계도 결국 그녀의 자기중심적 성격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조금 의문이 들긴 한다. 직설적으로 말하지는 못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장면, 장면으로 둘러서 이야기를 하다보니 아주 기본적인 이야기 맥락을 짚는 것조차 어렵다. 그것이 감독의 의도이니 일단 받아들이고 보아야 한다. 다만 나는 여기까지 보았을 때도 든 의문이 적어도 감독이 이 영화를 이렇게까지 이해하기를 바라고 만든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다음 장면은 주인공 알랙세이와 그의 아내 나탈리아가 나온다. 참고로 나탈리아는 알랙세이의 어머니 마루샤와 똑같은 배우다. 이 둘은 일단 다툼을 하고 있다. 


당신이 우리 어머니를 닮았다고 그랬잖아? 바로 그래서 우린 별거하기 시작한거야.

-알랙세이

아무튼 대화를 쭉 들어보면 알랙세이도 결국 엄마인 마루샤처럼 자기중심적 인간으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의 그런 영향이 리사의 말처럼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다. 알랙세이는 아내와 어머니에게 둘 다 미안한 감정, 죄책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녀와의 관계를 좋게 하지는 못한다. 심지어 그의 아들 이그나트도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다. 이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라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해석이 가능한데, 먼저 두 사람이 싸운다. 이 둘은 서로의 욕망, 이미지를 타자에게 강요한다. 하지만 둘 다 서로 강요만 하다보니 이 싸움은 끝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싸움은 누구 한 명이 죽거나 포기해야만 끝난다. 그 중 누구 한 명이 결국 타인의 욕망을 인정하고 자신의 욕망을 포기할 때,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성립한다.


어머니는 결국 주인이 되기는 하는데, 의미가 없는게 어차피 노예라 할만한 사람이 없다. 남편은 떠났고, 아들도 자기 중심적인 주인이 되버렸다. 즉 이 집안에는 노예가 없고 주인만 있는 그런 이상한 관계가 성립하게 된 것이다. 상대에게 인정받기 위한 '욕망의 거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 화해도 할 수 없고, 함께 살 수도 없는 것이다. 그저 죽을 때까지 싸우는 수 밖에 없다. 주인은 노예만도 못한 실존적 무기력에 빠져서 살아가게 된다.


여기서 라캉의 거울이론처럼 타인의 욕망에 대한 반영은 일어나는데,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성립되지 않는다. 


알랙세이는 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고 이는 어쩔 수가 없다고 말한다.



자 이 어쩔 수가 없다는 운명론은 다음 장면들에 등장하는 전쟁 장면으로 이어진다. 영화에선 피난 장면이나 전쟁으로 폭파되는 것이 무작위로 등장하는데, 사실 처음 보았을 때는 더 영화를 난해하게 만든다. 나는 저쯤부터 잠시 해석을 멈추었다. 그저 느끼면서, 약간의 의미 파악만 해도 괜찮은 장면들이다.


그럼에도 전쟁 장면은 영화의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들의 아이러니한 비극의 관계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다음 장면은 소년 이사프예프가 군사 훈련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소년 이사프예프의 가족은 공습 때 숨졌다. 이를 통해서 전쟁이 개인에게 주는 비참한 운명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마치 타르코프스키의 첫 장편 <이반의 어린시절>에서 등장하는 이반의 처지와 유사하다. 개인을 전쟁 기계로 전락시키는 현실의 비참한 운명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것이다.(약간 헷갈리기는 한다. 이사프예프의 이야기와 앞서 나온 마루샤, 알랙세이의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저 장면은 1943년 소년 군대가 크리미아반도의 시바시 개펄의 건너는 비참한 장면이다. 비침하다는 정도로만 기억 해두자. 더 자세히 해석은 가능하지만, 작품의 주제와는 크게 관련이 있지는 않다.(관련은 있으나 생략해도 충분히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다.)

 소년 이사프 예프는 눈물을 흘리고 있고, 그 위에 새 한 마리가 날라와 그의 머리 위에 앉는다. 이어 1945년 소년군이 프라하를 해방시키는 장면, 

1945년 모스크바의 승리 행렬, 1945년 히로시마 원자 폭탄, 중국의 문화대혁명 장면 등이 등장한다.


영화는 여기서 희생하는 자의 승리를 나타낸다.


앞서 말했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역설적으로 주인은 노예가 되고, 노예는 주체적인 주인이 된다. 일단 주인은 남에게 자신의 욕망을 주입한다. 하지만 주입의 대상은 노예이기 때문에 사실상 큰 의미가 없다. 결국 주인은 더 큰 욕망을 품지만, 결국 그것을 충족할 수 없다. 그러나 노예는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한다. 영화 중에 나오는 차디예프에게 쓴 푸시킨의 편지를 보면 개인적 절망 속에서도 명예를 걸고 운명적 역사를 사랑하겠다는 내용이 나온다. 결국 앞서 나왔던 전쟁과 폭력은 모두 자기 중심적 국가들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결국 개인은 그 전쟁 속에 한 가운데에서, 처참하게 희생당한다. 하지만 그 희생이야 말로 실존적 무기력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삶을 역설적으로 창조해낼 수 있는 승리자이다. 그들은 자신의 운명의 주인으로서, 신분을 극복하고 진정한 만족을 얻을 가능성을 흭득하며 역사적 발전을 이룩하는 자인 것이다. 그들은 희생자이지만,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지금까지 마루샤와 알랙세이는 주인의 삶으로 살면서 사실상 노예, 그리고 실존적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전쟁 장면과 처참한 운명을 겪으며 살아가는 차디예프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제시해준다. 


'누구든 행복을 욕망하는 자는 바로 그것을 위해 하고자 하는 그 욕망을 초극해야 한다.'


행복을 욕망한다면 바로 그것을 위해 그것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역설적인 교훈이다. 자기중심적인자는 사실상 노예이며, 노예는 사실상 주인이 된다. 이는 성경에도 등장한다.


무릇 자기를 높이려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누가복음 14:!1

자기 부정을 통한 자기 긍정, 죽음에서 생명으로, 무덤에서 부활로.


오직 무덤이 있는 곳에서만 부활이 있는 것이다. 다가오는 종말론적 파국을 우리는 이러한 태도로 바라보아야 한다. 가끔 이상한 교회들에서 종말론적 파국이 곧 다가온다면서, 우리가 천국에 가야할 대비를 해야 한다는 이상한 개소리, 유사 사이비 행동을 보이는데, 진짜 종말론적 파국을 맞이하는 우리의 태도는 그것에 직접적으로 마주하여 우리 행복의 운명에 주인이 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자 이제 영화는 해결과 화해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비로소 이제부터 인물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다음 장면은 아버지가 다시 돌아오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희망적인 장면으로 해석 가능하다.

이 장면 다음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노간주나무 앞의 젊은 여인의 초상>을 비추는데, 이는 타르코프스키가 호감을 줄 수도 있고, 되려 혐오감을 줄 수도 있는 그림이라며 넣은 장면이라고 한다. 그 외에는 별 해석의 의미는 없어보인다.

이후 장면들은 매우 희망적으로 바뀌어 간다.


나탈리아는 알랙세이가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과, 어머니가 그에게 원하는 것이 없으며 그저 그를 사랑하고 보호해주고 싶어한다고 말한다. 나탈리아가 계속해서 알랙세이와 어머니의 화해의 언급하는 것은 아마 나탈리아와 알랙세이의 재결합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한다. 나탈리아와 마루샤가 동일 배우가 연기하는 것도 이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비로소 알랙세이가 자기 중심적 인물로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능동적 주체적으로 살아가기를 바랬다.

비유 하자면 자기 민족을 이끌고 홍해 바다를 건넌 모세를 보곤, 왜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가 아닌,

비로소 알랙세이가 무엇이든지 상대에게 요구하기만 하는 자기중심적 태도를 버리고, 모세와 같이 자기 가족을 이끌어주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다음 장면에서 마루샤는 알랙세이를 데리고 가서 자신의 귀걸이를 부인에게 판매한다. 

자기 중심적 인물인 마루샤가 자신의 귀걸이를 파는 것은 상당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부인은 수탉을 잡는 것을 시킴에도, 그것을 해내는 정말 자기 중심적 인물이라 하기엔 너무나 바뀐 사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때 남편을 떠올린다. 

자기 중심적인 부인이라는 거울로 자신을 다시금 바라보면서, 그녀는 자기 중심적인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을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이 나온다. 자신을 버리고 떠나려고 한 남편을 비로소 이해한 것일지도 모른다. 남편은 공중에 떠 있는 마루샤를 위로한다. 

괜찮아. 모든게  괜찮아질거라고 말한다. 이제 이들의 사랑과 화해의 가능성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알랙세이는 편도선염으로 죽어간다. 의사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모든 것이 그에게 달렸어요. 편도선이 부은 것은 아무 관계없어요. 이건 흔한 일이에요.

-의사

결국 편도선염은 그의 죄책감으로 발생한 질병인 것이다. 그의 죄책감과 자기 중심적 삶을 살면서 겪는 고통까지. 그는 행복을 욕망했기 때문에, 그리하여 자기 중심적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오직 그 죄책감으로 죽어간다. 그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그에게 원죄나 다름없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욕망을 초극해야 한다. 즉 그 욕망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불행은 욕망을 쫓으며 생긴다. 주인은 욕망을 쫓다가 노예가 되어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타자의 욕망이란 상대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고, 우리는 타자라는 거울을 통해 나의 욕망을 인식한다. 그것이 나의 욕망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은 타인의 욕망이다. 우리는 타자에게 또 욕망을 전달하고, 전달 받는다. 자기 중심적 인간은 자기 중심적 인간을 상대로 만나게 되고, 노예는 노예를 상대로 만나게 된다. 이들 서로는 욕망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기 때문에, 평생 행복해질 수 없다.


행복하고자 하는 욕망은 자신을 자기 중심적으로 만들고, 그것은 상대까지 자기 중심적으로 만들어서 이것은 죽을 때까지 싸워야만, 즉 둘 중 한 명이 죽어야만 끝이 나는 싸움이다. 그리고 잔여물인 죄책감은 덤이다.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그 거울이 보이는 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비로소 행복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나야 역설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 주인이 아니라 노예로서 사는 순간 우리가 주인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행복은 그것을 초극하는 순간 이루어진다.


알랙세이는 결국 행복해진다. 자신이 죽음으로 말이다. 그는 죄책감으로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그것은 손에 들고 있던 새를 놓으면서 암시되어 진다. 그의 죽음은 그가 더 이상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 최종적인 해방, 자유, 그리고 행복의 단계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즉 그의 욕망이 초극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타르코프스키의 분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죽음을 촬영하면서 타르코프스키도 자신의 모순을 비로소 해결할 수 있었을까. 

뒤이어 나오는 장면은 어머니 마루샤와 그의 남편이 서로 사랑하는 시간에 대한 환상으로 이어진다. 그 둘은 행복해보인다. 남편은 묻는다. 아들이 낫겠냐고, 아니면 딸이 낫겠냐고. 이들은 더 이상 개인, 그리고 자기 중심적인 인물들의 대화가 아니다. 이들은 '우리'에 의해 대화한다. 이들이 목표하는 행복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타르코프스키는 관객에게 알려준다. 마루샤는 정말 행복해보인다.


아름다운 저녁 해가 언덕을 넘어, 이제 지고 있다. 마루샤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숲을 둘러본다. 타자로부터 이루어진 나의 거울을 깨고, 우리는 하나가 된다. 비로소 하나의 목표로 나아간다.



  • 결론

장면에 대한 해석을 모두 보았음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앞서 언급했듯이 온전한 이해를 감독조차 원하지 않는다. 그저 느끼고, 공감하고, 생각할 뿐이다. 

나는 타르코프스키의 예술관에 대해 매우 긍정한다. 영화를 보는 이유가 결국 나 자신의 새로운 발견과 성찰에 있다는 것, 나에 대한 이해를 한다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타르코프스키의 <거울> 또한

어쩌면 나 자신의 '이해'를 위해서 만든 작품이 아닌가 싶다. 영화 전반에 걸쳐 나오는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거울,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혐오와 다툼. 결국엔 죽음과 함께 아들은

이 모순을 극복하고, 어머니는 자신의 행동을 바꾸면서 주변 환경을 바꾸게 된다. 완전히 와닿지는 않지만 조금은 와닿기를 바란다. 


이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작품과도 상당히 유사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이 너무나 길어서 나도 전부 보진 못 했지만, 작가가 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로부터 돌아가서 시작하는 소설이다. 그 속에서 만나는 수 많은 사람과 삶에 대한 고찰을 전달해준다는 점에서 타르코프스키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바로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비평문에서 '거울'을 단순히 라캉의 거물 욕망 이론으로 설명했지만, 사르트르의 거울의 비유를 통해서도 설명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에 대한 시선, 그리고 그에 따른 책임과 불안으로도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아무튼 간에 '거울'이라는 소재는 상당히 흥미롭고 많은 철학적 사유를 나타낼 수 있는 좋은 은유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나 어려운 영화임은 사실이지만, 이런 영화도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비로소 나 자신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영화, 영화를 보고 나서도 깊게 여운이 남는 그런 영화 말이다. 타르코프스키의 모든 작품을 본 사람이라면 <거울>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반의 어린시절부터 시작된 그의 질문은 꼬리의 꼬리를 물고 거울이라는 나 자신의 성찰로 이어진다. 그리고 결국 희생이라는 결말에 도달한다. 이는 다른 비평문에서 더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글을 마친다.

노스텔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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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스텔지아

    https://www.youtube.com/watch?v=C7g-GfGswCU링크를 눌러도 사진이 보이지 않는 것 같네요 ㅠ 영화 풀버전이 유튜브에 있습니다. 링크 클릭하시면 해설과 대조하면서 보실 수 있습니다ㅠㅠ 많이 불편드려 죄송합니다.

    • 2026-03-04 01:11:22
    노스텔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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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댓글이 삭제 되었습니다.

      • 2026-03-04 23: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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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 어디서 들어봤나 했더니 옛날에 친구가 보다가 포기했다던 영화 이름이네요 글 읽고 유튜브로 영화 띄우면서 같이 봤는데 확실히 어렵지만 묘하게 재밌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2026-03-05 19:5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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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스텔지아

      @율 헐 영화 띄우면서 보셨다니 정말 기쁘네요ㅠㅠ 도전 하신 것만으로도 가치있는 일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2026-03-09 21:16:34
      노스텔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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