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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통과하는 삶-손미 <<우리는 이어져 있다고 믿어>>를 읽고

  • 작성자 송희찬
  • 작성일 2026-03-09
  • 조회수 323

일기를 쓰는 것과 수필을 쓰는 것 그리고 그 외 서정과 산문을 쓰는 일은 많이 다르다. 일기는 말 그대로 저자만이 글의 유일한 독자라는 점에서, 정제되지 않고 날것의 문장들이 나와도 상관없으며 자유롭게 쓰이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와 비슷한 수필 역시 정의대로 라면, 자유롭게 쓴 글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글을 수필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수필이란 독자가 글쓴이 자신뿐만이 아니라, 타인도 있다는 점에서 글에 대한 정제와 객관화가 필요한 문학 장르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항상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물이나 자기 자신을 끝까지 응시하고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끝까지 글로 써내야 하지만, 이 과정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혹여 수필을 넘어 장르별 규격이나 필요 요소가 들어가야 하는 타 문학 장르에 자전적 이야기가 들어가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많은 작가가 자신에 경험을 가지고 소설, 수필, 시와 같은 문학 장르를 개척해 나간다. 이런 부분은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나의 문장 청소년 문학상 수상 작품들은 날 담으려고 했던, 공통점이 있다. 2024년 5월 시부분 월장원이자 20회 문장청소년 문학상 시부분 우수상인 <시간 무빙워크>와 2025년 12월 소설 부분 월장원이자 21회 문장청소년 문학상 소설 부분 장려상인 <한여름을 베어물며> 역시 출발점은 내 일상과 무뎌지지 않은 결핍들이 스스로 변주하면서 나온 응어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런 점들은 내 글을 읽는 글틴의 전현직 멘토들과 더불어 문장청소년 문학상 심사위원들도 똑같이 느꼈다. 21회 심사평을 맡은 양선형 소설가와 20회 심사평을 맡은 김이듬 시인의 심사평은 다음과 같았다.

 

“무빙워크를 통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함께 투시하려는 긍정적인 의지와 태도가 인상적이었습니다”-제20회 문장청소년 문학상 시부분 심사위원 김이듬 <시간 무빙워크> 심사평 中 

 

“자신을 위로하는 ‘스노볼’이라는 은유가 기억에 오래 남았습니다. 아픔과 상처와 정직하게 대면하려는 인물의 태도가 미더웠고, 세심하게 문장을 닦아내려는 노력 또한 소설의 큰 장점이었습니다”-제21회 문장청소년 문학상 소설 부분 심사위원 양선형 소설가 <한여름을 베어물며> 심사평 中

 

두 작품의 심사평에서 공통으로 언급된 부분은 ‘자세’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세는 상처와 결핍이 만들어낸 응어리를 어떤 방식으로 표현했고 바라봤는지 이야기한다. 나는 이 두 글을 쓸 때만큼은 어쩌면, 살아가는 순간마다 기침과 자퇴했던, 나 자신에게 여러 번 눈물을 보이기도, 분노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어루만져진 자세가 그저 마주였다. 

 

그 바라봄으로 쓴 작품은 늘 외롭다는 느낌을 받는다. 저자인 나 자신만 알고, 나의 세계에서 해소되지 못한 응어리 같아서, 그저 일기로 보일 때가 그러지 않을 때보다 많다. 이처럼 자신을 마주하면, 객관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문학으로 표현하는 일과 그 문학의 이야기가 타인에게 전파되는 갓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이는 상처가 다듬어지고, 견뎌지고, 일어날 수 있을 때 비로소 살아감의 언어로 사람들을 어루만질 수 있기에. 

 

만약 윗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자신을 마주하는 글을 쓰는 사람이거나, 자신을 끝까지 들여다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손을 건네주고 싶다. 살아냄의 언어를 잘 다루는 손미 시인의< <우리는 이어져 있다고 믿어>>를 들고. 살아가는 언어를 통해 위로받아 보라고 말하면서 옆에 있어 주고 싶다.

 

-

 

우리는 공간을 메우기 위해 계속 말을 했다

너와 나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사람이 지나가고

잔이 깨지고

피투성이 바람이 지나가고

 

우리는 멀어지는 시야를 메우기 위해

계속 말을 했다

말은 떠다니고

그러다

너는 박차고 일어나

걸어 나가고

 

말이 끝나면 정말 끝이 날까 봐

나는 계속 말을 했다

 

빈 의자는 입을 닫고

나는 계속 말을 했다

너와 나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메우기 위해 말을 했다

 

너와 나 사이로 

방금 발사된 우주선이 올라간다

하늘이 찢어지는 것을 보면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을 보면서

 

{중략}

 

나는 계속 말을 했다

공간을 다시 메우기 위해서

연고처럼 끈적한 말은

계속 계속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몸을 흔들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사람이

공간을 찢으면서 걷는다

 

다시 오지 않을 것들에게

멀어지는 것들에게

말을 걸면서

 

빈 곳을 메우기 위해

혼잣말을 한다

 

<혼잣말을 하는 사람> 中 32~34p

 

시 <혼잣말을 하는 사람>은 위 시집에서 독자를 품는 동시에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시 중 한 편이다. 시의 주요 시어는 제목에서 나왔듯 '혼잣말'이다. 평소 우리가 혼잣말을 하는 상황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로 다음과 같다. 상대방이 앞에 있을 때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속마음이 나오는 상황. 상대방 없이 혼자 있을 때, 나오는 내면의 목소리들. 두 가지 상황을 통틀면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말하는 화자. 즉 우리의 '속마음'이다. 속에서 끓고 있던 말이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던 언어로 표현되는 현상이 '혼잣말'이다. 그러나, 손미는 혼잣말의 개념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빈 곳을 메우기 위한 언어'라고.

 

그렇다. 여기서 빈 곳은 응어리이자 상처. 즉 내면의 빈자리를 뜻한다. 시를 쭉 읽다 보면 주된 정서는 '너'라는 타자에 대한 함께 있고 싶은 욕구이자 혹은 '우리'라는 공동체에서 느껴지는 외로움과 불안이다. 화자는 삼 연에서 이렇게 말하고 행동한다. " 말이 끝나면 정말 끝이 날까 봐 나는 계속 말을 했다"라고. 하지만, 여기서 '너'라는 타자는 시 내부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타자인 '너'는 화자에게 투영된 시인의 자아 같은 화자의 두 번째 자아. 즉 상처로 읽힐 수 있다.

 

타자인 '너'가 화자의 일부이자 시인의 상처라고 한다면 시의 해석은 다음과 같이 가능하게 된다. "너와 나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라는 1연의 부분을 보면, 화자는 '너'라는 타자 즉 자신의 일부와 너무 멀게 느껴진다고 이야기한다. 이어서 화자는 타자인 '너' 화자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을 묘사한다. 그 묘사에서 " 잔이 깨지고, 피투성이 바람이 지나가고"와 같이 부정적이고 음습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로 볼 때, 화자와 타자 둘 중 하나는 상처받았다는 것으로 해석되며 그 상처의 출처는 "지나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상처이자 결핍인 "너"는 "입을 닫고" 화자와 상처 사이의 거리를 "메우려고" 화자는 끝없이 혼잣말한다. 그렇다는 것은 화자 혹은 시인 손미에게 혼잣말은 내면과 외면의 거리를 좁히는 스스로의 위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위 시는 결코 내면의 위로에서 끝나지 않는다. "말이 끝나면 정말 끝이 날까 봐 나는 계속 말을 했다"라는 화자의 말처럼 위로는 끝없이 부드럽고 단정한 문장으로 쉽게 말하는 예쁜 문장으로 이어 나간다. 마치 시집의 제목인 '우리는 이어져 있다고 믿어'처럼. 

 

하지만, 시에 사용된 단어를 하나하나 분석해 보면, 결코 부드럽고, 단정하고, 위로를 막 심어주는 단어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위 시에서도 "공간을 찢으며"와 "피투성이"와 같은 단어가 그러하다. 이 종류와 같은 서정시에서 다소 그로테스크하고 날카로운 단어는 시의 분위기와 정서를 깰 수 있는데 위 시에서는 그런 깨짐 역시 미학으로 보이도록 만든다. 그 이유는 위 글이 '시'로써 하는 역할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대게의 시에서 위로를 전달하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위 시 같은 경우 상처와의 공존을 필두로 공감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위로를 전한다. 이는 결미 부분에서 화자의 행동으로 보이게 된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몸을 흔들고" "공간을 찢으면서 걷는다"처럼 화자와 시인은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쓴다. 글로 상처를 씀으로 제 상처를 쓰이게 함으로. 독자에게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위로를 완성 시킨다. 이는 시가 단순히 역동적이어서 혹은 정적이어서 가능한 위로가 아니다. 위 시는 정적인 자세로 역동적으로 상처를 표출하고 이겨내려고 하고 있기에 시 전체에 살아냄의 언어로 깨진 분위기와 정서를 묶어 버리며 이야기한다.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자세다. 시인이 자신의 상처를 정적으로만 바라보면, 그저 우울 시로 빠지게 되고, 너무 역동적인 자세를 취한다면 시의 분위기와 정서가 무너져 버린다. 하지만, 손미 시인의 <<우리는 이어져 있다고 믿어>>는 이런 위기를 매번 자신을 바라보고 혼잣말함으로써 대중에게까지 뻗어나가게 한다. 그리고 그런 시 중 가장 인상 깊게 자리 남은 시는 바로 이 시다. <역방향>

 

-

 

등으로 달려갔다 끝까지 널 응시하면서

잘 잊었으니 내게 상을 줘야 한다

 

뚫고 지나갔던 공기가 다시 모이고 뚫고 갔던 몸이 다시 온전해지기 전까지

 

세상의 모든 기차가 출발하고 있다

 

{중략}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행성을 뒤집어서 우리의 방향이 바뀐다면

마주 볼 수 있을까

 

나는 자주 너의 꿈을 꾼다

내가 잘못한 걸까

 

잘 살 수 있을까

없이,

너 없이,

없이,

우리 없이,

 

두 손은 언제까지 두 개일까

우리는 언제까지 상관있을까

 

등으로 달려간다

끝까지 마주 보면서 멀어진다

 

<역방향> 中 38~39p

 

시 <역방향>의 역은 逆{거스를 역}으로 상대방 혹은 타인과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시의 화자는 타자 혹은 독자와 반대 방향에 있어야 하며, 우리와 가는 길도 달라야 하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어야만 역방향이다. 이 행동을 시의 첫 연으로 보여준다. “ 등으로 달려갔다 널 끝까지 응시하며/ 잘 잊었으니 내게 상을 줘야 한다”라고.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잘 잊었으니 내게 상을 줘야 한다"라는 화자의 말로, 화자의 말이 다르다는 것이다. 만약 화자가 타자인 ‘널’ 잊었으면 너의 끝까지는 응시할 수 없다. 그렇다는 것은 화자는 타자인 ‘널’ 잊지 못했다는 것이 된다. 이를 뒷받침하듯 시의 결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등으로 달려간다/끝까지 마주 보면서 멀어진다”라고.

 

그러나 타자가 만약 화자 자신이라면, 타자라는 주체가 화자의 이중 자아로 보이게 되는데 “두 손은 언제까지 두 개일까”라는 구절이 이를 증명하며, 시에서 화자가 타자를 대하는 태도가 멀어짐과 이별 그러나 끝까지 마주 보는 미련이라는 정서로 일관되는 것으로 보아, 위 시 역시 타자는 화자의 상처라고 보인다. 

 

특히 “잘 살 수 있을까,/ 없이,/ 너 없이,/ 없이, /우리 없이,”라는 부분은 쉼표가 과잉된 상태로 사용되고 있다. 쉼표의 과잉은 마침표 하나도 의미를 가지는 시 안에서는 상당한 약점이 된다. 쉼표를 씀으로 독자는 그 쉼표를 해석하기 위해 읽는 흐름을 멈추게 된다. 이는 곧 독자의 집중력이 흩어지게 만들 위험이 있는데, <역방향>에서는이조차 화자의 정서로 쓰이게 했다. 과잉이 아닌, 한 사람의 중얼거림이자, 망설임으로.


만약, 여기서 쉼표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시의 정서는 망설임은 보이지 않고, 이탈로 인한 외로움의 정서가 가득했을 거다. 그러나 쉼표의 과잉 덕분에 위 시는 망설임이라는 기다림을 독자에게도 선물한다. 그 덕분에 시를 읽는 독자도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하며, 동시에 화자-시인-독자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진정성을 보여준다. 쉼표 하나를 찍음으로 창작자의 망설임, 화자의 망설임, 독자의 망설임까지. 그리고 이들은 서로 다른 방향에 있지만, 결국 서로를 마주 보게 된다.


 이는 <역방향>이라는 제목과 잘 맞닿아 있는 지점인 동시에, 시인 혹은 화자의 내면 상처와 독자 사이에서 시인은 끝까지 상처를 마주 보면서 나아가는 시인과 화자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덕분에 화자인 '나'이자 시인인 인간 손미의 '나' 그리고 타자인 '너'이자 읽는 독자인 '너' 사이의 거리감은 하나의 이야기 혹은 정서로 와닿는 부분이 생기게 된다. 그 거리감에서부터  시의 모든 이야기와 정서는 '우리'라는 이름으로 이어지게 된다.


앞에서 본 <역방향>과 <혼잣말하는 사람>처럼 시인은 위 시집을 통해서 본인의 내밀한 이야기 위에 '우리'라는 독자를 쌓아간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시 문장들이 상처받은 영혼들을 치유하면서도 단어 선택은 매우 날카롭다. 마치 한 사람의 묵힌 상처가 한 사회의 묵힌 상처로 표현하듯이. 그리고 그런 시들 중 오랫동안 그리고 한 사람의 생을 담아 한 사회의 생을 담는 시도의 시가 많다. 그 많은 시 중에 위 시집의 정서를 응축한 시는 바로 <회복의 책>이라는 시다.


-

우리는 가까웠습니다


책을 덮으면 이쪽과 저쪽에서 

서로를 찌릅니다

첫 쪽에서 흐르는 피는

내 피입니다


이쪽과 저쪽은 

마주 보고 있습니다


{중략}


상처를 꾹꾹 눌러씁니다

책을 덮어서 지혈합니다


눈은 저쪽에서 내리는데

내게도 눈이 쌓입니다

어디까지가 저쪽일까요


저쪽을 찌르면 

이쪽에 열이 납니다


건강합니까

그쪽으로 전화할 수 없습니다


책장에 돌멩이가 있습니다

닫힌 책에서 빠져나온

그건 아직 나입니다


도망가지 않습니다

나는 나로 살 수 있습니다

저쪽에서 돌이 날아옵니다


이쪽과 저쪽

가죽을 관통해

아픈 문장이 이어집니다


<회복의 책> 中 96~98p


<회복의 책> 위 시는 제목과 내용을 보면, 책과 글에 대한 사유가 담겨있다. 특히 <회복의 책>에서는 시인이 시집 전반에 걸쳐서 전하려는 메시지가 들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상처에 대한 직조이다. 앞에서 본 <역방향>도 그렇고 <혼잣말하는 사람>도 그렇고. 위 세 작품에서 공통으로 드러나는 태도가 상처와 '마주 봄'이라는 것이다. <혼잣말하는 사람>에서 화자는 '빈 곳을 메우기 위해' 계속 '빈 곳'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화자가 있고, <역방향>에서는 '등으로 달려갔다 널 끝까지 응시하면서"라는 말처럼 화자는 계속 타자로 비유된 본인의 상처를 응시하고 있다. 


또한 <회복의 책>에서도 결국 "이쪽과 저쪽은 마주 보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회복의 책>의 결미에서 화자와 시인이 비로소 동일시 되어, 이렇게 말한다. "도망가지 않습니다 나는 나로 살 수 있습니다 저쪽에서 돌이 날아옵니다 이쪽과 저쪽 가죽을 관통해 아픈 문장이 이어집니다"라고. 즉 시인은 도망가지 않을 것이며, 꾸준히 살아냄으로 살아가고 있는 독자에게 손을 내밀겠다는 다짐과 그 다짐으로 살아가겠다는 또 다른 다짐을 시적 화자에 시인 자신을 투영하며 시를 완성시킨다. 그리고 시집을 완성하여 진솔하게 '시'라는 이야기로 뻗어나가게 한다. 즉 나와 너를 우리라는 축으로 묶어 위로한다.


 <<우리는 이어져 있다고 믿어>>의 시인의 말은 다음과 같다. "나는 세상 끝 벼랑으로 가 팔을 뻗었다 이어지는 것이 있다" 이 문장을 읽으면 간당간당한 낭떨어지 위에 있는 사람이 허공을 향해 손을 뻗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이 이미지와 시인의 진술들을 모두 종합해서 볼 때, 시인이 시집을 통해 전하고 싶은 것은 혼자가 아닌 함께이며, 자신의 내밀함과 부족한 부분을 끝없이 대면한 언어로 쥐여준. 나를 이루는 수많은 나와 나를 이루게 만든 수많은 너를 향한 응원이자 위로이다. 


상처를 이겨내는 글쓰기는 결코 한 사람의 일로 끝나지 않는다. 이는 사회와 세상으로 끝없이 확장해 나간다. 그때마다, 우리는 살아내야 한다. 그리고 계속 써내려가야한다. 내 상처와 네 상처가 결코 동일시되지는 못하겠지만, 하나의 글이 나와 너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계속 나아가게 하는 길이기에. 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글에 담는 사람들에게 손미 시인의 <<우리는 이어져 있다고 믿어>>를 건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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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백
    최고에요

    아 정말 잘 읽었어요. 저는 시집에서의 우리가 나와 타자와의 관계를 뜻하고, 또 계속 그걸 얘기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나와, 또다른 나와의 관계로 해석하다니! 그렇게 이해하고 보면 착착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떠올려지고, 위로받게 되는 시편들이 많네요. 나와 등을 맞대고 생강처럼 웅크려 있는 아이라든지... 역방향에서 쉼표의 역할에 대한 설명도 너무 너무 좋고 ㅠㅠ 특히 도입부 장르에 대한 말도 정말 좋구요. 회복의 책에서는 마주보지 못한 페이지(단편적인 경험/섞이지 않는 자아)들의 관계도 생각하게 되면서, 책을 관통하는 상처가 오히려 ‘나’라는 존재를 이어주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ㅎㅎ 삶을 대하는, 자신을 대하는 자세는 ‘마주’이다. 로 시작해서 마주보는 것으로 끝나는 게 정말 좋아요... 그런데 송희찬님의 비평을 읽으니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이 ’마주‘에 대해서 더 깊이 다루면 좋지 않을까요? 사실 시집에서는 마주본다고 하면서도 물리적으로 마주보지 못하고, 이어진다고 하면서 연결되지 못하고, 동시에 존재하고 서로를 인지하지만 바라보지 못하는 장면들도 많이 나오잖아요. 거리감에 대해 다루신 부분도 정말 좋았는데, 손미 시인님이 ’마주‘라는 감각을 오히려 반대되는 감각으로 표현하시면서 생기는 비약을 ‘거리감’과 이어서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를 어떻게 해석하시는지에 대한 송희찬님의 생각도 더 듣고 싶어요. ㅎㅎ 다음에 톡방에서 얘기할까요? 아님... 제가 후에 퇴고본을 기대해도 괜찮겠죠? 문장이 아쉽다고 말하셨는데, 저는 송희찬님 글에서 항상 정제된 문장을 읽고 감탄해요. 정말 담담하게, 또 핵심적인 어휘들로 잘 풀어내시는데 이렇게 쓰기까지 얼마나 노력했을까요? 저도 닮고 싶은데... ㅠㅠ 갈 길이 멉니다...... 정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시집 다시 읽어야겠네요. ㅎㅎ 위로 받고 가요 ㅎㅎ

    • 2026-03-26 03:21:35
    방백 최고에요
    0 /1500
    • 송희찬

      @방백 님 저도 퇴고하고 싶어요. ㅠㅠ 근데 시간이 너무 없어요. ㅠㅠ 창작 과제만 지금 세가지랍니다... 아마도, 두세달 뒤에나 퇴고 가능할 것 같아요.{지금도 과제로 <소년이 온다> 독서 에세이와 <모순>이나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 독서 에세이를 준비하고 있어요. ㅠㅠ{과제고, 성적에 들어가서 두 권 다시 읽고 좋은 작품으로 쓰기 위해서 지금은 <모순>과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중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아마 4월 글틴에는 앞에서 말한 두 작품 중 하나와 박서영 시인의 시집 비평이 먼저 올라갈 것 같아요...}항상 좋게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저도 더 이야기 나누고 싶은데, 카톡보다는 디코 음챗이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오늘 강의 끝나고 바로 병원을 위해 본가로 날아가서{병원이 27일인데 학과 MT가 27일이라 MT를 못가게 됐지만...} 빠르면 일요일 밤, 혹은 다음주 밤에나 디코에 들어갈 것 같아요.{노트북을 두고 갈 거라...} 괜찮으시면 다음주에 깊이 있는 대화 나누어요. 서로 읽은 것을 공유할 생각에 너무 설레고 기뻐요.^^ 암튼 다음에 올리실 방백님의 비평도 기대하고 있을게요. 방백님 고3 생활도 화이팅입니닷!!!{아, 그리고 가끔 알려줘요... 고등학교 생활, 고등학교의 추억이 없다보니-.-}

      • 2026-03-26 06:56:36
      송희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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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희찬

    아, 쓰다 멈추고를 너무 반복했어요^^; 자취 시작 후 처음으로 읽은 책이기도 하고, 시를 읽는데 많이 울컥해서 문장 정제적인 부분은 아직까지 아쉽네요. ㅠㅠ

    • 2026-03-09 22:27:47
    송희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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