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와 복원될수 없는 독서
- 작성자 용골자리에타
- 작성일 2026-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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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에 [복원되지 못한것들을 위하여]라는 책을 본적이 있다. 박완서의 이 소설에서, 여자는 스승이 납북된다고 알려져있지만 사실 사형당했다는 걸 알게되고, 이를 알리려하지만, 누구도 이를 정정하고 싶지않아한다. 즉, 여자의 스승은 복원되지 못한채 남은것이다. 그런데, 이건 비단 소설속의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 어쩌면 소설속 등장인물 뿐 아니라 소설 자체도 복원되지 못하는것 아닐까.
누구나 소설을 읽기전엔 기대한다. 기대의 이유는 다양하다. 영화에서 봤을수도, 서평을 읽을지도, 제목자체에 끌렸을지도 모른다. 어쨋든, 우리는 소설에 대한 상상을 키운다. 마치 여행을 떠나기전 여행에 대한 희망사항을 나열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우리가 읽는다. 그때, 우리는 소설, 그 거대한 강에 자신을 빠뜨린다. 예를들어 우리는 1984에서 윈스턴의 입장에서 처절해지고, 저항감을 태운다. 또, 어셔가의 몰락을 보며 무서워하고 플랜더스의 개를 보며 눈물을 흘린다. 내가 겪지못하고 , 혹은 심지어 생애동안 겪지 못할 세계에서 헤엄친다.
그러나, 소설을 다 읽으면 우리는 이제 그 세계를 벗어난다. 그 소설의 내용을 이제 다 알고, 저마다의 해석을 품은채
결국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읽기전의 기대를 잃어버리는 셈이고, 이것은 복원될 수 없다. 예를들어, [뱀의 말을 하는 사나이]라는 책이 있다. 아마, 이 책을 읽기 전 당신은 '뱀의 말'이라는 소재에 흥미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그 흥미는 독서이후 변화한다. 예를들어,기대의 대상이었던 '뱀의 말'이 "관습을 상징한다"는 해석으로만 기억에 남을 수 있다.
또, 때론 소설은 한 세계의 완결이다. 많은 소설은, 완전한 마침표로 끝을낸다. 우리가 그 마침표를 읽는 순간, 세계는 끝이난다.
[나니아연대기]라는 소설이 있다. 우리는 [최후의 전투]를 읽고 정들었던 나니아를 떠나보낸다. 앞선 장을 걸치며 우리를 환상으로 이끈 나니아는, 이제 다시 태어나 사라진다.
세계가 완결을 맺는 순간, 그 세계는 더는 복원될 수 없다. 우리가 그 전에 소설을 대충읽었던, 열심히 읽었던 간에 세계는 끝이 났고, 우리는 더는 그 세계에 상상할 수도, 기대할 수도없다. 그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에 잠겼을 뿐이다.
혹자는 뒷이야기상상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것이다.그러나 그것이 소설의 의도라 확신할 수 있을까?작가는 이미 이 세계를 끝냈는데 내가 굳이 이어간다는건 사실 완성된 건물에 불법증축하는격이라 생각한다.
물론, 불법증축이 항상 나쁜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이 독자의 해석으로 하나의 작품의 진정한 완성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마침표를 찍는순간, 작가는 자신이 할 말을 끝냈다. 더 이상 잇는 것은 작가의 정서,혹은 교훈 전달이라는 소설의 본 목적을 무너뜨리고, 소설을 단지 유희거리로 만들 수도 있다. 비록, 이야기를 잇더라도, 뒷 이야기의 주제의식이 달라진다면, 이는 완전히 복원된다고 보기 어렵다.
아까말한 [나니아연대기]를 다시 꺼내보자. 그 소설의 끝은, 사자(아슬란)이 나니아대신 '참'나니아로 나니아의 생명을 인도하며 끝난다. 이 소설내부에 포진한 기독교 알레고리(이를테면 죽었다 살아나는)를 생각해볼때, 이 부분은 요한계시록에서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소설의 뒤를 잇는 것은, 기독교의 구원 서사로 이 책을 마무리한 작가의 의도와 엇나가는게 아닐까?
결국, 소설을 읽으면, 그 전 기대는 사라지고, 이후 상상은 본 목적을 무너뜨릴 가능성이 있다. 이는 결국, 우리가 소설을 한번 떠나면 처음 진입했을 때와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소설을 읽는 행위는 사실 지식을 생성하는 행위일뿐만 아니라 잠재적으로 하나의 세계를 떠나보내는 행위이다. 그것은, 한 세계를 떠나보내는 일종의 의식(ritual)인 셈이다. 결국, 소설을 읽는 것은 의식이므로 한번 치르면 다시 하더라도,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그런데도, 소설을 대충 읽는것은, 우리가 세계에 불가역적인 변화를 만들면서도 정작 그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부를 수 있다. 즉, 마치 유적지에서 유물을 보면서, 핸드폰만 보다가 결국 대충 넘긴 것이다. 예를들어, 우리가 피라미드를 처음본다면, 그것의 웅장함과 그것을 지었던 고대 문명에 놀랄 것이다. 하지만-우리가 그것을 집중했든 안했듯, 이미 봤다면 다시 가더라도, 느껴지는 웅장함의 최대치는 처음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세계가 사랑받기를 기원한다. 자신의 생애와 삶의 이야기들을 보며 감명을 받기를 누구나 바랄 것이다. 그건 작가나 등장인물에게도 다르지 않다. 소설을 대충 읽는 것은, 결국 그 감명을 줄이게 된다. 예를 들어, 아까 말한 피라미드는 자신의 웅장함을 기념하고 싶던 왕의 염원이 담겨있다. 우리는 이 염원을 묵살해선 안된다.
그러므로, 소설은 복원될수 없는 유적이면서, 우리마음에 영원히 남을 양식이고, 그렇기에 우리는 소설을 집중해서 읽어야한다.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건넌 내 서고의 책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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