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속에서 '불가해'의 활용에 대하여-<크툴루의 부름>과 <솔라리스>를 읽고
- 작성자 용골자리에타
- 작성일 2026-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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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다 보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을 많이 맞닥뜨리기 마련이다. 예를 든다면, 우리는 어떤 수학 방정식을 보고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불가해'한 것이 아니다. 불가해는 인간의 인지 체계 안에서 전부, 혹은 부분적으로 해독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위 사례는 이해하지 못한 것일 뿐이다. 즉,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위 설명을 듣다보면, 불가해한 것은 분류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불가해와 분류불가능하다는 것은 완전히 동등하지 않다. 아무리 분류한다고 해도 그것이 가진 해독 불가성이 말소되진 않기 때문이다.
가령 예를 들어, '생물'과 '무생물'로 구분할 때, 어떤 것이 경계선이라면, '바이러스'같은 새로운 어휘로 분류하면 해결되기 때문이다. 사실, 분류라는 것은 무언가를 담기 위해 만든 새 단어이기에, 무한한 새 단어들을 통해 모든 것을 분류할 수 있다.
분류는 하나의 명명일 뿐이고, 불가해를 분류할 때도 단순히 하나의 새 단어만 만들면 되기 때문에, 이는 불가해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심지어, '불가해' 자체가 하나의 분류가 될 수 있단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이런 '불가해'는 문학에서 어떻게 활용될까?불가해는 과학적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기에 현실성을 추구하는 문학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반드시 현실적일 필요가 없는 장르의 작품들에서는 종종 활용되고 있다. 불가해를 다룬 대표적 작품을 살펴보면서 자세히 알아보자.
'괴이하다'라는 비정상적이고, 이상하다는 뜻인데, 이 괴이함은 공포를 유발한다. 괴이한 것은 당연한 상식과 작품 내 현실 사이에 괴리를 이루고, 이 인지부조화로 인한 공포가 유발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불가해한 것 역시 이 특징이 적용된다. 그래서, 처음 다룰 작품도 이를 이용한 공포 소설이다.
먼저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의 부름]을 살펴보자. 이 소설은, 유명한 공포 소설 작가인 러브크래프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인기를 끈 작품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크툴루로 인한 불가해한 사건들을 살펴보자. 대표적으로, 한 달 동안 예술가가 전부 기묘한 꿈을 꾸고, 그중 많은 예술가의 꿈이 일치한다는 사건은 이해되지 않는다. 게다가, 익숙한데 묘사될 수 없는 광기와 혼란의 외형이라는 것이 상상되는가? 심지어 바로 앞의 조각상에선 촉수 머리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 외에도, 사교 집단의 존재나, 4월 2일이 되자, 예술가의 정신병이 갑자기 낫는다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불가해한 존재를 등장시킨다.
이 소설의 공포는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사교 집단, 조각상, 사망으로 대표되는 기괴한 일들과 외형에서 오는 공포다. 또, 정보의 공백과 기괴함이 만든 분위기들도 있다. 역시, 이들도 분명 공포의 큰 축이고, 이는 기괴함에서 직접적으로 기인한다.
둘째는, 세계의 수용에 대한 것이다. 이는 이 불가해의 특이한 점에서 유발된다. 그것은 바로 크툴루의 존재가 과학적으로 완전 분류 불가는 아니란 것이다. 외계인이라는 분류도 이것에 대해 충분히 기능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분류가능 함이 불가해하지 않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실제로, 그것의 특성을 볼 때 그것은 이성적으로 저항할 수 없고 인간의 힘이 거의 미치지 못할 정도로 아득한 불가해적인 존재다. 즉, 크툴루는 과학적으로 분류될 수 있어도 설명되거나 완전히 포섭될 수 없다. 르리예 특유의 비유클리드성이 이를 증명한다. '처음에는 볼록하게 보였다가 다음에는 오목하게 보이는 조각된 돌', '예각임에도 마치 둔각처럼 행동하는 각도'.. 이것들을 설명할 수 있는 과학은 없다.
크툴루는 과학적으로 분류가 되는 불가해라는, 굉장히 복합적인 존재이다. 그렇다면, 과학으로 해설이 되고, 증언도 있으니, 이 역시 우리의 세계에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단순 신화나 이야기로 치부할 것인가.
과학에서는, 명확한 증거가 있다면, 당연히 전자를 택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생물은 분명 과학의 틀 안에 있는 것 같지만 세부 특징은 과학과 부합되지 않기에, 무언가 새로운 원칙이 필요하다. 분명 이 원칙은 우리의 세계를 뒤바꾸거나, 적어도 하나 이상의 기존 원칙을 더 이상 일반화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크툴루는 우리의 기존 세계관을 위협하는 존재이고, 이에 따라 우리는 공포에 직면하게 된다. 이 공포는 현실의 안정에 균열이 생기며 등장한다. 이것이 두 번째 공포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진 결과, [크툴루의 부름]은 굉장히 저명한 공포 소설로 자리매김했다.
불가해가 쓰이는 또 다른 축은 SF이다. 일상이나 리얼리즘에서는 현실과 어긋나는 불가해가 쓰이기 쉽지 않다. 그래서, SF와 같은 일부 장르에서만 이해될 수 없는 외계생명체들을 등장시키는 방식으로, 이를 이용한다.
이 계열의 대표적인 작품은 [솔라리스]가 있다. 솔라리스에서는 바다가 나온다. 그러나 전부 읽은 후에도, '바다'가 뭔지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문물을 모방해 상호작용을 하다가도 갑자기 멈춘다. 주인공의 옛 여자 친구를 모사한 무언가를 만들기도 한다. 아니면 구조물을 만든다던가. 결론적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이 소설의 '바다'는 우리에게 진정한 타자성을 보여준다. 바다는 악의도, 선의도 없고, 관심도 불분명하다. 심지어 그것이 생명체인지도 불분명하다. 타자화의 과정 없이도 그것은 타자이다. 타자화는 다른 사람에게 느끼던 동질감을 지우고, 나와 타인으로 거리를 두는 것이다. 그러나 바다는 '다른 것'으로 타자화할 필요가 없다. 이해할 수 없는 것에는 동질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인을 타자화시킨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으로서 동질감이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바다와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또 이 소설은 인간 인식의 한계를 보여준다. 인간중심주의는 자연은 도구이고 인간은 중심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베이컨은 '인간은 방황하는 자연을 사냥해서 노예로 만들어 인간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해야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인간중심주의를 반박한다. 이 소설에서 바다는, 완전한 타자로서 현재의 지식과 인지 체계의 한계를 보임과 동시에, 지구에서 쌓은 지식은 이를 명확히 표현할 수 없음을 제시한다. 즉, 자연은 인간의 소유도 창조물도 아니기에, 모든 자연이 인간의 문명과 지식으로 완전히 설명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방문자'라는 설정 역시 흥미롭다. '방문자'는 바다가 주변 인물을 모방해 만든 것이다. 그들은 실제와 비슷이 상호작용을 하지만, 간혹 괴력 같은 예외를 보이고, 이 행성 밖으로 나가면 소멸한다. 이것은 환상이고 무의미한가, 아니면 현실이며 의미가 있는가. 이 역시 이 소설이 제기하는 질문들이다. 특히, 주인공은 뒤로 갈수록, 방문자와의 관계에만 집중한다. 사실상, 바다라는 타자보다 죽은 연인의 모습을 띤 방문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타자 이해가 아니라 타자와의 접촉에서 욕구해소 내지는 개인적 이익에 치중한다는 비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이 장치는, 타자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한 비판으로 작용한다.
결국, 솔라리스는 타자를 등장시켜 인간 인식의 한계, 진정한 타자,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를 서술한다. 즉, 이 소설은 일종의 이해되지 않는 대상을 가정한 반례를 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 예시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불가해한 존재가 완전한 타자라는 것이 의미 생성의 핵심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앞의 작품은 이 점이 정서적 효과를 만든다. 인간이 사람을 죽인다면, 그건 비도덕적 행위이다. 그러나 크툴루가 사람을 죽인다면, 그것은 전혀 해석될 수 없기에 공포의 대상이 된다. 즉, 현실성 부재가 오히려 작품에서 주제를 구축한 필수적 요소로 작용한 것이다.
솔라리스에서는 이 점이 소설의 핵심 논제를 설명한다. 고의로 이해되지 않는 것을 넣은 뒤, 그것을 기반으로, 인간 인식의 한계를 지적하는 식이다. 이 역시 의미 생성의 핵심 요소다.
이처럼 불가해는,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없음을 뜻하지만, 의미를 생성시키는 요소로 쓰이는 아이러니도 가지고 있다. 즉, 이는 단순히 현실성의 결여가 아닌 의미 구성의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현실성은 반드시 좋은 문학의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고, 필연적 요소도 아니며, 불가해는 때때로 소설에서 중심적인 역할이기도 하다.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마치 개연성의 부재같이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개연성은 작품 내부의 논리에, 현실성은 현실의 논리에 따르기에, 사실 이런 작품들에선 현실성을 따지는 것이 의미가 없다. 작품 내부 논리가 이미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개연성 만족을 위해 비현실성이 수반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실성이 반드시 좋은 문학의 기준이 되는것이 아닌 이유중 하나다.
오늘은 한번 불가해를 다룬 소설을 읽으며, 이해되지 않는 것을 이해해 보려 노력해 보는 것이 어떨까? 소통이 감소하며 상호이해가 부족해지는 현대에서, 이해할 수 없게 설계된 것을 이해해 보려 노력하는 건 좋은 경험이 될 것이며, 불완전한 타자인 서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좋은 귀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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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솔라리스가 타르코프스키가 영화화한 솔라리스인 것 같네요. 원작은 영화랑 많이 다르다고 들었는데 암튼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