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의 이면: 이승우 『생의 이면』 읽기
- 작성자 고래
- 작성일 2026-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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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년전 이승우 작가의 생의 이면을 읽었었다. 이승우 작가라는 사람이 가진 개인적 욕망이라던가, 이면을 제대로 조명하기 위해 파고드는 끈질김, 굉장히 재밌게 봤었다. 이승우 작가의 문장은 하나의 사슬처럼, 사유가 엮여 있는 것도 좋았다. 그러나 정작, 이 소설이 무슨 이면을 말하고 있는가. 생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것을 나는 저번 독서때 밝히지 못했던 것 같고, 그렇기에 재독을 실행했다.
내가 밝혀낸 생의 이면은 두 가지다. 존재의 이면과 구원의 이면. 소설은 어느 작가의 문장에서 시작된다. 그는 자신이 출판사 직원에게 2년전, 냈어야 할 단편을 제시간에 주지 못해 생긴 빚이 있었고, 그 빚을 갚기 위해 그 출판사의 작가탐구라는 시리즈를 쓰게 되었고, 그 작가탐구를 통해 조명되는 작가의 이름은 박부길이다.
작가탐구를 쓰는 화자는, 박부길의 저서를 찾아본다. 그렇게 박부길의 아버지는, 무극사라는 절에서 공부를 한다 했고 박부길은 큰할아버지댁에서 산다.
박부길을 보는 사람들의 겉, 이를테면 박부길은 기독교인이었다. 이것은 구원의 이면과도 연관되는 것인데, 박부길의 어머니는 집안에서 여러 시집 살이를 했었다. 어머니는 힘들어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다. 사실 교회라기에도 묘한, 다 쓰러져 가는 건물에 페인트 칠을 한 어떤 젊은 신학대의 학생이 외면만 구현한 것이지만 어쨌든 그곳은 박부길 신앙의 시작이었다.
어린 박부길은 호기심에 아버지가 있다는 무극사를 향한다. 그러나 마을 어른들은 가지말라고, 소리지르며 화낸다. 이때의 박부길은 어린 아이였다. 법관이 된다는 아버지의 저서, 집에 있는 문학, 그걸 잡다하게 먹어치워 머리는 비대하게 늘어났지만 외면은 여전히 어렸다.
그러다 뒤란으로 들어간 적이 있다. 뒤란에는 항상 감나무가 피어나는데, 박부길은 그것을 먹기위해 들어갔다. 그런데 또한, 그곳엔 괴물이 산다. 다리에 쇠고랑을 찼으며 털이 복실복실한 괴물. 괴물은 친절하다. 그러나 괴물은 무섭다.
그러나 그 후, 괴물이 죽었다. 괴물은 아버지라는 것이 드러난다. 아버지는 미치광이가 되었으며 아버지는 살인을 저지렀다는 것.
책은 박부길의 생애를 조명하며 다룬다. 짙게, 아주 명확하게. 박부길이 명확한 인물이었다기 보다 작가탐구를 쓰는 화자의 필력이 엄청났다. 그러나 괴물은 달랐다. 괴물은 초반,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는다. 괴물의 이면에는 아버지가 있었고, 어린 박부길의 이면에는 이미 어른이 자라 있었던 것이다. 묘하지 않은가? 박부길은 외피가 어렸지만 머리에는 이미 어른이 자라 있었다. 아버지는 모습이 괴물이었지만 그 안에 어른이라 부를 것이 숨어 있었다. 둘 다 외피와 내부의 진실이 어긋난 존재였고, 마을 어른들은 둘 다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것이 존재의 이면 아닐까. 본질은 늘 표면 너머에 있고, 그 표면 너머를 보는 일은 흔히 실패한다.
그래서였을까. 그 후 박부길은 불로 아버지의 무덤을 태운다. 마을로 불이 번진다. 그리고 도시로 간다.
아버지가 괴물이었다는 사실, 어른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은 박부길에게 세계의 외피 전체를 의심하게 만든다. 외피를 태워야 했다. 마을을 태운 것은 그래서 분풀이가 아니라 외피 전체에 대한 거부였다. 거부한 자는 새로 찾아야 한다. 박부길이 도시로 간 것, 거기서 구원을 갈망한 것은 잃어버린 외피의 자리에 무언가를 새로 세워보려는 시도였다.
도시의 살던 중 한 여자를, 교회에서 만나고 그 여자가 구원임을 깨닫는다. 그러니 이것이 구원의 이면일 것이다. (여기서 밝힐 것은 작가 이승우는 실제로 신학대를 나왔으며, 어렸을 적 아버지가 죽으셨다) 한 여자는, 주일학교 교사였다. 그랬기에 박부길은 주일학교를 나간다. 나가서 참여하는 박부길은 소심하다. 그 후 박부길은 그녀가 구원이라 생각하며, 사랑하고, 사랑하기에 그녀의 취향에 맞추려 신학대를 갔으며, 그러나 구원인 그녀는 박부길의 구원이 되어주지 못했다. 박부길은 그녀가 바람을 필까 두려워 집착한다. 어렸을적 아빠도 잃고, 엄마도 집안을 나간 박부길에게 잃는다는 것은 무서운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신이 아니었다. 신의 의무를 지닌 그녀는 박부길에게 인간 이상에 것을 강요 받았고, 그때 그녀는 성모마리아라는 상징이었지만,
그녀는 결국 구원으로서의 상징을 거부하며, 이별한다.
박부길은 구원의 이면속에서 구원은 커녕 아무것도 없는 인간을 봤다.
그러곤 어느 원룸에 틀어박힌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자신의 이면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아픔, 자신의 똑똑함, 자신의 회한.
그것을 알리기 위해 박부길은 글을 잡았으며,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쓰기 시작한 글이 지상의 양식인데, 그 소설을 미완성이다. 여기서 중요한점이 자신의 이면을 제일 잘알고 있을 박부길이 미완결을 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완결인데, 이면에는, 또한 이면이 있을 수 있다.
이는 구조적 한계라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작가탐구를 쓰는 화자가 박부길의 이면을 파헤쳐도, 박부길 역시 자신의 이면을 파헤치며 글을 써도, 이면을 끝내 전부 못 알아낸다는 것. 그렇기에 미완결이 되버렸다는 것.
그러하니, 이면은 결과론적으로 내가 말한 것또한 이면이 있을 것이다. 작가와 박부길과, 나도 모르는 그것, 오직 종이 위에서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그것. 그래서 박부길은 작가가 되어야만 했다.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모르지만 자신은 살아 있으며, 자신은 기댈 자리가 없으니 소설가라는 직업에 기댔고, 그게 이 소설에 진짜 무게라 생각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인은 과잉된 자의식에 갇혔으며 행동 대신 글로만 자기의 이면을 게워낸 인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박부길도 다르지 않다. 아버지에게서, 마을에서, 사랑한 여자에게서, 그가 구원이라 믿었던 모든 것에서 그는 자리를 찾지 못했다. 남은 것은 원룸과 종이뿐. 생의 이면은 한국판 지하로부터의 수기다. 외부 어디에서도 드러내지 못한 한 인간이 종이 위에서만 비로소 살아 있게 되는 이야기.
그렇기에 생의 이면이 박부길에게 뜻하는 것은 명확하다.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한 인간이 이해하려 갈구하며, 결국 이면을 들여보지 못했지만, 이면을 보다 현실에서 살아남는 법을 깨달은 상징.
나는 이승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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