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과 부조리와 예술
- 작성자 KDH
- 작성일 2026-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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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은 만들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본래부터 악인인 것인가. 이 문제는 생각보다도 훨씬 중요한 문제이자 지금 당장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일 것이다.
한국에서 일어난 범죄 사건 뉴스에 사람들이 쓴 댓글을 보면, 몇몇 사람들은 악인이 악한 일을 저지르며, 그러한 악행이 자신들과는 전혀 관계없다고 믿는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악의 씨앗은 모두의 마음속에 내재해 있다고 본다. 기독교적 세계관 내에서 이브가 선악과를 먹은 것은 처음으로 신의 말을 거역한 최초의 악을 상징한다. 기독교는 이 원죄가 모두에게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이 원죄는 조상의 죄라고 볼 수도 있지만, 죄를 짓는 인간의 속성을 의미할 수도 있다. 서구 문명의 근간인 기독교에선, 모든 사람이 원죄를 짊어지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고 본다.
본래부터 악인인 사람이 악한 일을 저지르는 것이라면, 나치 독일의 학살에 관여한 수많은 사람도 모두 본래부터 악인인 것인가? 그 사람들은 무사유를 통해 악인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악인이 악행을 저지른다기보다는 악행을 저지르는 자가 악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세상에는 선한 사람과 악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은 그사이 회색 지대에 있을 것이다.
한편,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해도 되는가 하는 문제가 있을 것이다. 악인이 저지른 악행과 악인의 배경은 떼려야 뗄 수 없다. 나는 적어도 언론은 악인의 배경을 다루기에 부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총체적이고 복잡한 개인의 삶을 다루기에는, 언론이라는 도구는 너무나도 단편적인 부분만을 포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술의 경우, 창작자는 악인을 다룰 때 비판적인 시선을 유지해야 할 윤리적 의무가 있다. 이를 지키지 못한 예술은 잘못된 예술이다. 하지만 그것이 예술이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면 안 된다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예술이 악인의 배경을 다루지 않으면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도 있다. 악인의 배경을 모른다면, 악이 어떻게 탄생하고 심화하는지 어떻게 알 것인가? 말했다시피 언론에서 악인의 배경을 자세히 다루는 것은 역할 밖의 일이다. 하지만 예술이 악의 배경을 다루지 않는다면 또 다른 악을 막을 기회를 스스로 잃는 것이나 다름없다. 왜 많은 프로파일러들이 존재하는가.
악인을 단순히 악인이라고 치부하고, 덮어두고 다시는 꺼내지 않을 책처럼 취급하는 것이 과연 맞을까? 토드 필립스의 <조커>를 보면, 명백하게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고 악인의 삶을 비추고 있다. <조커>가 윤리적 쟁점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억압받고 조롱받으며 항상 폭력의 대상이 되던 조커가 살인을 통해 존재 가치를 인정받으며 결말부에 이르러 영웅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조커를 향한 비판적인 시선을 담은 연출들도 있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은 조커가 살인을 저지른 후 춤추면서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조커는 처음에는 경쾌한 음악과 함께 춤을 추며 계단을 내려온다. 이때의 연출은 조커의 자유와 해방을 상징한다. 하지만 곧이어 조커의 춤은 슬로 모션으로 느려지고 경쾌한 음악 대신에 음울한 음악이 깔린다. 이러한 연출은 조커의 자유와 해방의 겉모습 뒤에는 광기 어린 분노와 슬픔만이 남아 있음을 암시한다. 결말부에 이르러 조커는 경찰차에서 탈출해 지지자들 앞에 서서 입에서 흐르는 피를 이용해 얼굴에 미소를 그린다. 하지만, 조커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이러한 연출을 통해, 지지자들의 영웅이 되는 순간마저 조커가 고통으로 얼룩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토드 필립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커를 악에 받친 비참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조커는 명백한 악인이다.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악이 탄생하였다고 해서, 그 책임은 모두 부조리한 세상에 있지도 않고, 반대로 모두 악인에게 있지도 않다. 부조리한 세상과 악인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도 선하게 살아갈 수 있고, 반대로 더 나은 환경 속에서도 악인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는 <조커>를 보며, 조커가 왜 탄생하였는지, 또 어떻게 새로운 조커를 막을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커>의 원조라고 볼 수 있는 마틴 스코세이지의 <택시 드라이버>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역한 뒤 뉴욕에서 택시 운전사로 생활하는 한 남자인 트래비스 비클을 다룬다.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한 트래비스 비클은 조커와는 달리 정의감과 영웅 심리에 사로잡혀, 베트남 전쟁 직후 정치적 의견 충돌과 히피 문화로 혼란에 빠진 뉴욕 길거리에 만연한 '악'을 처단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를 실행에 옮긴다. 먼저 트래비스 비클 스스로 더럽고 지저분하고 악한 사회를 만든 장본인이라고 생각하는 대통령 후보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하고, 대신 어린 소녀를 매춘에 이용하는 포주와 갱단원, 그리고 매춘을 즐기려던 사람을 총으로 쏴서 살해한다. 트래비스 비클의 상상일지도 모르지만, 일단 영화는 트래비스 비클이 뉴스 1면에 영웅으로 보도되며 끝난다.
한편, 이번엔 논픽션을 다뤄보겠다. 많은 사람이 잘 모르지만, 1965년부터 1966년까지 인도네시아 정권, 정치깡패, 조직폭력배들이 공산당과는 관련이 없는 수십만 명의 무고한 사람(주로 소수민족)들을 공산주의자라는 누명을 씌워 학살한 사건이 있었다. 이때 당시 학살을 주도한 사람들은 현재까지 국민 영웅으로 추대받고 있다. 그중 대학살을 주도한 안와르 콩고와 그의 친구들은 2012년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이 촬영한 <액트 오브 킬링>이라는 다큐멘터리에 실제로 출연해서 본인들이 자행한 학살을 흔쾌히 재현했다. 다시 말하지만, 안와르 콩고는 영화 속 배역이 아니라, 실존 인물이다. 안와르 콩고는 손자들에게 오리를 괴롭히지 말라고 교육하는 인자한 할아버지이다. 그는 본인이 직접 살인한 수많은 사람에 관해 설명하고 살인을 재현하며, 처음에는 떳떳한 태도를 보이며 본인은 해야 할 일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촬영이 진행되며 안와르 콩고는 자신이 직접 죽인 사람들을 생각하면 악몽을 꾼다고 말했으며 촬영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재현한 살인 영상을 보며 구토하였다.
동시에 같은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침묵의 시선>은 같은 사건의 피해자인 람리의 유가족이 겪은 고통을 비춘다. 람리의 동생인 아디는 50여 년 전 형을 죽인 사람들을 찾아가 사과를 요구했지만, 그들은 사과를 거부했으며 역으로 화를 내기도 하였다. 아디의 어머니는 학살에 가담한 자들에게 신이 벌을 내릴 것이라고 아디에게 말한다.
작년에 본 이 두 다큐멘터리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안와르 콩고는 자신의 행위가 떳떳하며 자신은 애국자라고 자기합리화하며 수십 년을 살아왔지만, 자신이 재현한 살인 영상을 보며 감독에게 자신이 정말 죄를 지은 것이냐고 물었다.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 비클과 <액트 오브 킬링>의 안와르 콩고. 한 명은 가상의 인물이고 한 명은 실존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둘은 닮아 있다. 둘 다 자신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살인을 정당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다 국민적 영웅이다.
이 두 명의 사람이 악인인지 아닌지 나는 평가하지 않겠다. 하지만 오늘 하루는 악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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