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라는 위조—영화 <마이클>론
- 작성자 고래
- 작성일 2026-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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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수 216
마이클 잭슨이라는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20세기 팝스타로서 전 세계 각지에서 사랑을 받는, 세계 제일의 월드스타라 봐도 무방했던 바로 그 인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삶을 제대로 알았던가? <마이클>이라는 영화는 퍼포먼스에 초점을 맞춰 그의 생애를 너무나 평면적으로 다룬다는 평론가들의 혹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이클 잭슨이라는 사람에 대해 무엇을 알던가. “마이클 잭슨이 무슨 사람이지?”라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성추행을 했다는 소문이 파다한 월드스타라기보다, 문워크를 한 사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마이클 잭슨이라는 사람이 정녕 영화화될 수 있던 사람이었는가라는 궁금증에 휩싸였고, 이렇게 글로 풀어나가려 한다.
우선 최근 들어 유행하는 몇 가지 예시를 가져오자면 숏츠와 틱톡이 있다. 짧은 영상으로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 그런 시대가 온 현대다. 나는 마이클 잭슨 또한 숏츠적인 인물이라 생각된다. 문워크를 하는 장면과 고개를 돌리는 쇼트, 빌리진 스텝과 스릴러 군무 등, 짧게 소비되는 순간과 밈화되는 동작 및 반복된 퍼포먼스로 사랑을 받던 인물이 바로 마이클 잭슨이었다. 마이클 잭슨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세계는 모두 그를 알지만 세계는 그를 모른다. 극소수의 사람만 안다. 사람들은 마이클 잭슨이라는 팝스타에 열광하는 것이지, 마이클 잭슨이라는 인간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이클 잭슨이라는 인간은 완벽주의적 성향을 띠는 인물이었다. 마이클 잭슨은 아버지 조 잭슨에게 엄하게 자랐고, 심한 체벌과 모욕, 외모 비하, 끊임없는 연습 강요를 당했다고 인터뷰에서 여러 번 밝혔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천재로 소비되며 쉬는 아이가 아닌 항상 결과를 내야 하는 아이였으며, 마이클 잭슨이 처음으로 들어간 기획사 모타운의 교육 방식은 표정, 동작, 인터뷰, 태도, 발성, 무대 매너까지 통제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한 마이클 잭슨은 <스릴러>를 통해 세계적 히트를 쳤다. 훗날 지인들은 그 후로 그가 완벽해지려 노력했다고, 수백 번에 걸친 녹음 반복, 끝없는 안무 수정, 작은 음정 차이에 대한 집착, 공연 연출 강박 등 완벽주의적 성향이 불타올랐다고 한다.
그의 완벽주의가 매체에서 드러나지 않을 리가 있을까. 마이클 잭슨이 매체에 남긴 흔적은 MTV, 라이브 편집, 뮤직비디오, 반복 재생, 클로즈업 — 모두 파편들이었다. 그러나 그 파편 너머에 진짜 이야기가 있었을까. 모타운의 교육은 ‘팝스타란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명제 위에 서 있었고, 마이클 잭슨은 완벽주의적 인간이었다. 완벽주의는 매체에서 깊이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파편화되어 사라진다. 그리고 그 파편이 곧 그였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마이클>이라는 영화가 잘 만들어진 영화라 생각된다. 숏츠와도 같은 그의 서사를 숏츠와도 같은 강렬함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나는 <마이클>이 좋았다. <마이클>은 분명히 그렇게 혹평받을 작품은 아니라고, 난 생각한다.
평론가들은 <마이클>이 비극을 외면했다고 한다. 학대, 의혹, 약물이 퍼포먼스 뒤로 흘러들어가 모습을 감췄다고. 그러나 마이클 잭슨의 존재 양식이 깊이를 대중에게 보이는 것이었던가. 깊이가 아닌 완벽이 아니었던가. 모타운에서 빚어진 표정, 무대 위 한 컷, 클로즈업과 반복 재생 아니었던가. 마이클 잭슨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파편이었다. 그 파편 너머의 진실을 알려줄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니 영화가 그를 깊이로 복원하려 했다면, 그것은 오히려 위조에 가까웠을 것이다. 비극마저 파편으로 비치는 것, 학대조차 한 컷의 슬로우 모션으로 흘러가는 것, 그런 장면이 하나 있다. 어린 마이클이 아버지 조 잭슨에게 벨트로 맞는 장면에서 마이클은 울지만, 컷은 곧장 무대 위의 어린 마이클로 되돌아간다. 학대는 한 컷이며, 무대는 한 시퀀스다. 이 비대칭이야말로 감독의 선택이라 생각된다.
마이클의 존재는 파편이었으며, 원본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타운이 빚은 표정과 무대 위의 한 컷 및 클로즈업으로 존재했다. 그는 부서질 본체를 갖지 않은 것이다. 적어도 대중에게 마이클은 조각상이었다.
시뮬라크르는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제시한 개념으로, 원본 없는 복제물이나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마이클이야말로 시뮬라크르가 된 인간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에 호응하는 <마이클>의 연출은 가장 정직한 영화적 응답이다. <마이클>의 평면성은 결함이 아니라 형식적 충실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존재 의의는 무엇일까? 밈화되어 소비된 마이클 잭슨이라는 인물을 어째서 영화라는 형식으로 다시 불러와야 했을까? 이유는 무엇이며, 단순히 돈 때문에 만들어진 영화라 할 수 있기에, 이것은 꽤 중요한 지점이다. 그렇기에 이유를 따져보자면 현재의 대중은 마이클 잭슨이라는 아티스트를, 그 시대를 겪은 대중보다 훨씬 더 파편화된 형태로 경험한다.
기존의 마이클이 완벽한 파편이었다면, 지금의 마이클은 더욱 파편화된 존재다. 모르는 사람도 많다. 영화는 그것을 정렬한다. 그것이 이 영화의 존재 의의가 아닐까.
신화화된 퍼포먼스, 문워크, 빌리진.
그 시대가 겪었을 마이클을 오늘날의 대중이 다시 느끼게 하는 것, 그리하여 MZ세대는 마이클이라는 팝스타에 궁금증을 가지게 되고, 그러다 여러 추문과 논란, 현실까지도 알게 된다. 나는 이것이 이 영화의 최종적인 존재 의의라 생각된다.
파편에서 존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느끼고 마이클을 느끼는 것. 물론 영화는 여전히 평면적이다. 그러나 마이클은 현대 시대의 인물이 아니다. 그는 20세기의 인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마이클을 완벽하게 살려낸다 할 수 있지 않을까.
파편화된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다시 아티스트를 느끼고, 인간을 느끼며, 존재의 감각을 되찾는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숏츠 시대에 가장 적합한 연출 방식이 아닐까.
마이클은 충분한 존재 의의를 가진 영화이며, 단순히 욕먹어야 할 영화는 아니라는 것이며, 영화의 평면성은 무능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마이클이라는 존재 방식을 충실히 따라간 형식일 수도 있다는 새로운 측면을 제시하는 것이다.
마이클이라는 인물을 바라볼 때, 우리는 종종 현실의 추문과 이미지 소비만을 반복한다. 그러나 <마이클>은 그러한 추문은 비추지 않고 퍼포먼스, 대중에게 보이는 파편들을 다시 배열하며, 잊혀 가던 하나의 아티스트를 현재의 대중 앞에 다시 불러온다.
물론 이 영화는 완벽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마이클이라는 존재를 오늘날 다시 감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충분한 의미를 가진 작품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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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비평문 때문에 마이클 보러 가야 하게 생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