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이해와 사상의 재정립 시도
- 작성자 Ted
- 작성일 2026-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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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05~2026.1.10
나는 이번 글에서 지난 일년간 나의 사유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는 단지 지금의 나로서는 지금까지 생각해온 사유에 대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을 정리함으로서 이런 종류의 주제에서 보다 자유로워지기 위함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세계와 존재의 정형성과 확실성의 의심에서 시작하여 일종의 유아주의적 세계, 즉 인식된 것들의 구조를 표현함으로서 가능한 한 모순이 없고, 그러면서도 정형적인 세계라는 환상 아래 어떤 관념들을 배척하지 않는 방향으로 세계를 이해하려 시도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런 지난 일년간의 사유를 정립하는데 있어서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인물과 그의 저서 논리 철학 논고에 대한 이해가(설령 완전히 잘못된 이해였더라도) 중심이 되었으므로 그에 대한 소개와 논고에 대한 나의 이해를 먼저 서술해보고자 한다.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사상, 그중에서도 소위 말하는 전기 비트겐슈타인 철학에 대해 소개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이 사상은 논리 철학 논고를 중심으로 소개되는데 이에 대해 지금의 나로서는 올바른 이해라 여겨지는 이해를 말하고자 한다.
논리 철학 논고(이하 ‘논고’)는 사실, 사태, 사물이라는 논리학적 개념을 제시하며 시작한다. 먼저 사물은 원자 명제로 더 이상 분해되지 않는 최소 단위의 명제, 즉 p, q, 사과, 빨간색(사실 일상 언어는 원래는 복합적일 수 밖에 없지만 예시를 들기 위해 넣음) 등지의 기본 단위라고 설명할 수 있다. 다음으로 사태는 이런 사물들이 이루는 관계 예를 들어 pRq(p와 q가 R의 관계에 있다), 사과가 빨간색이다(사실 사과R사과의 표면R…R빨간색 형식이라 일상 언어의 문장에는 무수히 많은 관계가 암시되어 있기에 일상 언어를 사물로 보기가 힘듦. 그래도 이 문장은 복잡하긴 해도 크게 봐서 pRq관계니까 사태임) 등과 같은 사물의 모든 가능한 조합이다. 이런 사태는 일단 조합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의미의 참 거짓 여부와는 관계 없이 형성이 가능하다. 가령 ‘사과는 파란색이다’ 같은 문장도 일종의 사태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 참인 사태는 사실이 되는데 가령 앞의 문장에서 ‘사과는 빨간색이다’는 사태일 뿐 아니라 사실이 되지만 ‘사과는 파란색이다’는 단지 사태가 된다. 여기서 참이란 현실과 사태의 모사 관계, 즉 논리적 구조를 공유하는 관계로서 제시된다. 여기서 제시되는 현실이란 개념의 모호성(다소 유아주의적 세계를 의미하는 듯 하지만 완전히 그런 종류의 세계는 아닌 세계)은 추후 프레게의 비판(사실과 사태의 구분에 대한 비판)과 논리 실증 주의적 오해(비트겐슈타인의 현실이란 단지 자연 과학적 현실일 뿐이라는 주장)의 원인이 되지만 그럼에도 현실이라는 개념은 논고의 축을 구성하는 중요한 개념이 된다. 이후 그는 사실의 총체로서의 세계에 대한 논리학적인 이야기에서 나와서 점차 사실의 총체로서의 세계, 그 논리학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의 밖의 것, 즉 그의 용어를 빌리자면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이란 논리학적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종류의 것, 즉 논리적 명증성으로서 체험되지 않고, 또다른 방식으로 체험되는, 그러나 그 체험 자체에 대한 표현이 불가능한 종류의 것을 말한다. 가령 윤리적 체험, 종교적 체험, 미적 체험(비록 그는 윤리학과 미학이 같다고 말하지만 굳이 구분을 하자면)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이런 모사로서의 논리적 세계에 대한 정의와 논리적으로 모사될 수 없는 것이 현실에 있다는 내용은 그가 논리학적 세계의 상을 명확히 하고 그로서 그 한계를 규정하게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를 읽으며 가장 흔히 발생할 수 있는 질문은 그가 말하는 현실, 즉 (사실의 총체로서의)세계가 모사한다는 그 현실에 대한 질문이다. 물론 이 글은 세계 밖의 것을 말할 수는 없다는 결론에서 끝맺었지만 모호하게 남겨진 현실에 대한 정의는 그것을 모사한다는 세계에 대한 이해 조차도 쉽지 않게 만들며 논리 실증주의적 오해와 같은 오해를 쉽게 불러올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나는 먼저 내가 이해한 그의 세계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일단 세계가 논리 실증주의에서 말하는 자연 과학적 세계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왜냐하면 비트겐슈타인의 사실에는 단순히 경험적으로 참임이 검증되는 경험적 명제뿐 아니라 수학적 명제, 논리학적 명제 또한 사실에 포함되기 때문이다(현실이 자연과학적 세계라면 이런 사실들은 현실에 대한 모사가 아니게 된다). 세계는 단순히 자연 과학으로서 고정되어 있는 하나의 현실에 대한 모사가 아닌 것이다. 이때 세계의 의미란 단순히 어떤 명확한 현실에 대한 모사가 아닌 말할 수 있는 것의 총체, 다만 그것이 어떤 방식(말하자면 하나의 현실로부터 다양한 방식의 모사를 통해 다양한 세계가 형성될 수 있다)으로든 현실을 모사하는 말할 수 있는 것의 총체가 된다(모사 가능 여부는 말하자면 제2의 의미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생기는 정의 상의 문제가 하나 있다. 만약 사실의 참 거짓 여부(모사 관계의 성립 여부)가 제2의 의미로 밀리게 될 때 사태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사태란 단지 말할 수 있는 것, 그러나 모사로서의 의미는 고려하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할 생각이며, 이런 사태들의 총체는 논리 세계라고 부르고자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를 논리적 개념으로 한정하며 세계가 현실의 논리적 구조를 모사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논리의 한계를 명시하며 현실에는 세계 밖의 것, 즉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명시함으로서 세계와 현실을 구분한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현실이란 무엇일까? 그가 말하는 현실은 (사실의 총체로서의)세계와 그 밖의 것인 신비스러운 것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논고의 후반부에서 그가 논리적 모사 관계 또한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명시함으로서 그는 현실에 대한 이분법적인 정의, 즉 세계와 그 밖의 것으로 현실을 구분하는 식의 구조로부터 탈피한다. 논리적 세계 내부에서는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구분이 유효하지만 이런 식의 구분은 단지 논리적 세계가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는 단계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끝내 논리 세계 또한 그 근본적인 명증성자체가 말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줌으로서 논리 또한 다른 말할 수 없는 것과 다를 게 없음을, 결국엔 신비스러운 체험에 의해서만 그것이 인식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때 현실이란 말할 수 있거나 없는 구분 전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비트겐슈타인의 사다리(그는 서론에 자신의 이론은 단지 사다리이며 이 사다리를 밟고 올라간 사람이라면 이 사다리를 차버려야 한다고 말한다)를 타고 논리적 세계가 실은 현실을 전부 모사하지도 못할 뿐더러 별다른 특별한 의미조차 지니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할만한 지금 어떤 것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을까? 물론 우리는 그가 요구했듯 현실에 대해서 다만 침묵을 지킬 수도 있겠지만 비록 주제 넘은 일일지라도 현실에 대해서, 즉 그 신비스러운 것에 대해서 단지 어렴풋한 형상이라도 그려볼 순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현실이란 무엇인지에 관한 나의 생각을 전개해 봄으로서 도대체 현실이 어떤 모양새인지에 대해 가능한한 최소한의, 그러나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모양을 제시해볼 생각이다.
현실이란 무엇인가? 현실이란 일단 사실들이 모사하는 대상들을 포함하는 것이다(완전히 모사하진 못하더라도). 보통 사실이 모사하는 것은 외부 세계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일단 우리가 어떤 것을 모사할 때 그 모사의 대상은 당연하게도 밖에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이 모사하는 것을 보다 엄밀히 생각해보면 그것이 꼭 외부 세계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외부 세계의 투영된 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인식된 것을 모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인식된 것이 꼭 명확한 외부 세계의 존재를 가정한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논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투영된 상에서 그 투영된 대상이 온다는 것은 거의 명확해 보인다(가령 데카르트가 말했듯). 그러나 우리가 논리 밖의 현실을 논하고 있는 만큼 이런 논리적 필연성은 충분한 근거가 되지 않는다. 인식된 것이 그러한 논리적 의미를 언제나 지니고 있지는 않으며 오히려 인식된 것들의 전부인 현실은 말할 수 있거나 없는 구분 자체에 대해 그 이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이때 차라리 인식된 것 자체가 외부세계를 가정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현실은 일종의 유아주의적인 현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결국 사실이, 논리가 모사한다는 현실이란 인식된 것이며 그 이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자기 외의 모든 것들을 모두 일축시켜 버리는 그런 고전적 유아주의는 아니다. 그러나 논고에서는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하라”라는 결론 아래 현실에 대한 내용은 축소되고, 또 그 이상으로 생각할 것 자체를 금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현실의 유아주의적 특성은 어렴풋이 제시될 뿐이며 그마저도 그다지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설령 내가 제시하려고 하는 현실이라는 상이 아무 의미 없는 넌센스가 될지라도 현실에 대해서 그것이 말할 수 있거나 없거나 하는 구분 이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말해보고자 한다.
먼저 우리는 현실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단 우리가 지금부터 생각하려 하는 이 현실에는 어떤 말할 수 있는 관계도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어떤 말할 수 있는 관계의 실질적 존재가 인정된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 관계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구성할 것이며 이때 말할 수 있는 관계란 언어적 표현이 가능하므로 이 세계 자체가 말할 수 있는 것이 되어버리고 결국 논리 세계의 일부로서 환원되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어떤 식의 관계(R)을 제시하더라도 일단 그것이 명확한 것이라면 그 관계로부터 일종의 가능 세계 가령 aRb, aRc, aRbRc 등이 있을 수 밖에 없으며 이 세계 자체가 결국 말할 수 있는 것의 일부에 불과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령 우리가 제시하려는 그 유아주의적 현실에 어떤 관계도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세계와 논리적 존재에 관한 강한 체험을 아예 부정할 순 없으며 애초에 논리적 관계가 존하지 않는 인식이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한 현실, 그 유아주의적 현실이 어떤 형태일지에 대해 논하는 방식으로 내 생각을 정리해 나가보고자 한다.
일단 어떤 관계가 있다면 그 관계의 조합으로 또다른 가능 세계, 즉 논리적 세계가 생길 수 밖에 없지만 우리는 자주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논리적 규칙이나 완전히 설명되는 논리적 세계의 환상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이런 까닭에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해선 침묵을 지킴으로서 또다시 논리 세계를 만드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도록 하라는 뜻에서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하여선 침묵하라’라고 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논고의 사다리를 넘어온 지금 우리는 현실에서 또다른 논리적 관계를 찾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인식의 구조에 대해 조금 더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부터 그 유아주의적 현실의 구성에 관해 조금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세계와 구별되는 현실, 즉 그 특수한 유아주의적 현실에서는 가장 먼저 인식이 대두된다. 유아주의에 있는 것들은 기본적으로 인식된 것들이며, 그것이 외부의 것의 투영인지 혹은 애초에 내부의 것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거나 외부는 그것이 세계인 이상 이미 그 한계가 뚜렷이 제시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확실한 최소의 것을 생각할 때 더 이상 주된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그것이 투영된 것이든 혹은 아예 외부 세계가 존재하지 않든 어쨌거나 인식된 것들이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인식이란 무엇일까? 인식은 말하기 이전의 것, 즉 사실이 모사하는 그것 자체이며 말하거나 말할 수 있다는 구분보다 심층적인 종류의 것이다(말할 수 있다는 특성조차도 체험의 일부인 까닭에 그런 말할 수 있다/없다의 구분 이전에 인식이 있다). 그리고 인식은 말할 수 있다/없다 보다 심층적이기에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어떤 관계도 인식된 것들 사이에서 지니지 않는다(만약 그런 관계가 실로 있다면 현실에 대한 논리 세계의 한계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인식된 것은 그 인식의 주체와 인식이라는 신비스러운(말할 수 없는) 종류의 관계만을 지닐 뿐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인식된 것을 관념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는 ‘인식된 것’이라는 표현 속에 내재되어 있는 그 인식의 대상에 대한 환상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이때 관념은 (사실의 총체로서의 세계와 달리)관념의 총체로서의 현실이 있을 수 없는 이상 관념의 구체적이고 명확한 집합으로서 현실이 있을 수 없고, 또 현실의 일부로서 관념이 있을 수도 없다. 말하자면 관념은 그 자체로 현실과 동등한 위치(단지 그 위치 관계를 설정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라도)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관념은 현실과 같이 말할 수 있거나 없다는 식의 구분 전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은 말하자면 에테르와 같은 것이다.
에테르적 관념이란 하나의 명확한 대상이 아니며(만약 관념이 하나의 명확한 대상이라면 현실의 모든 것은 논리학적 기호로 표현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명확히 나누어질 수 있어서도 안되고(명확한 하나의 대상이 아닌 이상 명확한 분할 또한 불가능하다) 다른 관념과의 관계도 있을 수 없다(관계로부터 논리 세계가 나올 수 있기에). 그러나 이때 중요한 문제가 발생한다. 어쨌거나 관념의 지위와 의미는 기본적으로 특수한 세계 내의 위치에서 발생하는데 어떻게 어떠한 세계도 존재하지 않은 체로 다만 관념만을 두고 현실을 논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문제, 즉 지금까지 제시된 관념이 말할 수 있는 것에서 벗어나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이루어진 보다 심층적인 체계를 논하는 데 있어서 세계에 대해서 지나치게 배척함으로서 생기는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세계와 대상을 관념을 사고하는 데 있어 가정된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말하자면 말할 수 없는 것인 관념을 말하기 위해서 대상과 세계를 관념 내부에서 가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그러나 이는 단지 이해를 위한 것임을 명시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상과 세계를 유아주의적 입장에서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먼저 논리 세계 내부에서 생각한다면 대상이란 기본적으로 명확히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까 대상이란 논리 기호로 표현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이때 존재란 무엇일까? 소위 존재란 완전한 세계로부터 오는 것으로 이미 그 세계 자체가 내부적으로 완전하여 나 자신의 인식이라든가 사유하고는 전혀 관계없이 다만 그렇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 세계는 보통 내부적으로 완전하여 어떤 명확한 잣대가 될 수 있는 것으로서, 즉 수많은 대상들과 그 유기적 관계로부터 스스로 완전한 체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대상, 즉 우리가 가장 일차적이고도 명확하게 고찰한다고 생각하는 대상은 그 성질을 존재로부터 보증 받고, 그 존재란 이 대상과 같은 선상에 놓여있는 유기적 관계를 이루는 모든 대상들이 그 대상 뒤에 분명히 있다고 생각할 때 그 거대한 체계의 일부로서 우리가 그 하나의 대상을 관찰한다는 가정에서 온다. 그러나 대상의 의미가 단지 그 구체적인 세계와의 관계로부터만 단면적으로 보여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확실해 보인다. 가령 완전히 논리적인 의미의, 즉 논리 세계의 일부로서의 의미만을 지니는 사물 p라는 것은 최소한 완전히 논리적인 의미로 인식한다는 생각이 함께해야 하는데 이 생각 자체는 말할 수 없는 것(모사관계 자체를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 완전한 논리 세계에 대한 믿음 자체, 즉 그 세계의 체험성은 그 자체로 이미 그 세계 내에 있지 않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세계의 절대성의 부정으로부터 유아주의적 현실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한가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세계의 절대성이 부정될 때 의미를 지니는 것은 주체와 직접적인 관계를 지니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뿐이라고 생각되는데 어쨌거나 대상의 의미는 세계와의 관계, 즉 존재로부터 온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의문은 세계를 유아주의적 입장에서 재해석함으로서 해결될 수 있다. 세계의 절대성과 무한성은 앞서 말했듯 체험 이상이 아니며 어떤 특별한 타당성과 권위를 갖고 있지 않음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세계의 무한성과 절대성은 단지 가정되며 또 그 가정 자체는 실은 유한하고, 상대적임을 알 수 있다. 가령 명제 p를 논리 세계의 일부로서 우리가 사고할 때 논리 세계 자체는 구체적인 사례들의 집합이 아닌 단지 일종의 (아웃 포커싱된)배경으로서 추상적으로 명제 p뒤에 그려진다. 이때 세계는 그 명확한 존재가 믿어지는 것이 아닌 일종의 신비스러운 것으로서 세계 또한 주체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지니게 된다. 세계는 말하자면 대상에 대한 관점이 된다. 그리고 세계가 실은 절대적인 전체가 아니라 신비스러운 관점일때 그 관점은 대상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이때 관념은 서술상의 목적으로 가정된 대상과 그 관점으로 나누어질 뿐 실은 둘의 명확하고 구체적인 구분이란 전혀 있을 수 없으며 인식된 것 자체로서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때 관념이란 밑의 그림처럼 나타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에 표기된 하나는 대상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 그림에서 대상은 인식 주체와 일차적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되는 것인 반면 이것의 의미를 보증하는 세계(관점)란 말하자면 대상 뒤에 위치하는 이차적 종류의 것이 된다. 이때 세계란 단지 가정된 대상에 대해 상대적 위치에 있는 점들의 집합이 되기에 각 관념들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세계라거나 정형적인 세계가 아닌 그저 관점이 된다. 그리고 세계를 구성하는 점이란 이런 것이다. 가령 명제 p에 대한 관념에서 대상인 p에 대해 상대적인 의미만을 지니는 점들로서 q, ~p(여기서 q, ~p는 그 자신에 대한 관념에서의 대상이 아닌 오직 p에 대해 상대적인 위치에 있는 단면적 의미만을 지니는 점들이다)등이 있을 수 있지만 이는 단지 세계라는 전체의 일부로서 추상적이고 단면적인 의미로서만 나타난다는 점에서 이 세계의 요소들 자체는 대상만큼 고차원적이지 못하게 된다. 만약 대상이 세계의 요소와 동등하다면 이는 대상을 세계에 환원시키는 것이며 말할 수 있는 세계의 절대성을 다시금 주장하는 것 이상이 되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대상이 세계에 선행한다는 식으로 말한다 할지라도 만약 관념이 단지 하나의 가정된 대상과 그에 대한 관점으로 이루어져있다고 말한다면 대상이 세계의 요소보다 의미적인 면에서 고차원적일 이유는 없어보인다. 그리고 또한 관념을 이런 식의 구성으로만 설명한다면 어쨌거나 이는 하나의 정형적인 세계를 만들어놓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의 (말할 수 있는)완전한 세계를 통해 말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기에 이런 설명은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무수히 많은 관점을 가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아래 그림과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그림에서 ‘하나’는 대상으로 이해하면 된다).

여기서 관념은 가정된 대상(중심의 구)과 그에 대한 무수히 많은 관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때 관념은 단순히 가정된 대상과 그에 대한 관점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입체적인 가정된 대상과 그에 대한 무수히 많은 관점들이, 대상이 관점을 구성하고 또 관점이 대상에 대한 각자의 면에서의 특수한 성질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유기적 관계를 이루게 된다(대상의 모든 점들은 여러 관점의 것으로 구성되며 모든 관점은 대상에 대해 각자의 상대적 위치에 놓인다). 그러나 여기서 관점이란 아까 하나의 관점과 하나의 대상만을 가정할 때의 그런 종류의 관점이 더 이상 아니게 된다. 이는 말할 수 없는 다양한 방식의 체험 자체를 각각 하나의 관점(각 관점은 단지 그 체험을 표현하기 위해 그려질 뿐이다)으로 표현한 것이며 그 까닭에 단순히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 한가지 방식으로 가정된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막연히 가정된 세계가 된다.
그리고 이런 무한한 관점과 그 대상 속에서 어떤 보편적 세계란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의 관념 내부에 무한한 관점과 단면적이지 않은 대상이 있음을 가정함으로서 관념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도 성립할 수 없음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때 하나의 관점 내에서 대상이 지니고 있는 고차원적인 성질은 그(하나의) 세계 밖의 의미로서(관점 내에서 말할 수 없는 것) 설명함으로서 먼저 제시된 오류를 해결할 수 있으며 또 하나의 관점 내의 대상이 불완전한 일부일 뿐임을,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하나의 관점이 보편적이라는 환상 속에서 말한다는 점에서 불완전한 일부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즉 논리 세계의 뚜렷한 한계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 일단 사다리를 올랐다면 그것을 차버릴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가정된 대상과 세계란 관념의 말할 수 있거나 없다는 식의 구분 전에 있는 체험 자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으며 실제로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할 수 있는 방식의 세계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실은 이젠 완전히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무한한 관점을 내포한다고 표현한 관념으로부터 관념 자체는 어떤 모양새가 아닌 에테르적 느낌으로 남게 되며 더 이상 이에 대한 논리적 사유는 요구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것이 나로서는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이라 생각하는 바이며, 이로서 이 글과 사고를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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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작년 말에 쓴 글인데 지금 다시 보니 읽기도 힘들고, 또 처음에 제시한 내용도 비트겐슈타인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쓴 글이네요. 사실 아직 잘 모르는 부분이 많은 체로 쓴 글이라 논리적 도약이나 용어 자체를 잘못 사용한 부분도 많네요. 변변찮은 글이지만 그래도 한번 올려봅니다. 제 생각을 나열한 글이니 그냥 가볍게 읽고 넘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