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와 불가해함의 상실
- 작성자 고래
- 작성일 2026-07-18
- 좋아요 0
- 댓글수 1
- 조회수 284
나홍진은 십 년을 침묵했다. <추격자>(2008)와 <황해>(2010)는 사실 그렇게 모호한 영화가 아니었다. 누가 살인을 저질렀느냐, 누가 누구를 배신하느냐 등 서사 초반부터 분명함이 존재한다. 이 두 영화의 냉기는 '진실을 모른다'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알아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무력감이었다.그러나 그 태도가 진짜 인식론적 모호성으로 도약한 것은 <곡성>(2016)에 이르러서였다. 외지인이 악마인지, 무명이 신인지 악마인지, 일광이 진짜 퇴마사인지 사기꾼인지
영화는 끝까지 답을 주지 않는다. <곡성>의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이 쥐고 나오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의심이었다. 그 물음에 답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 영화의 윤리였다.
그래서 <호프>가 십 년 만에 내놓은 답이 '외계인'이라는 사실은, 단순한 장르적 변덕으로 넘기기엔 석연치 않은 데가 있다. 나홍진이 <곡성>에서 정점에 달했던 그 모호성을 견디는 태도를 포기했다는 것이 이 글의 출발점이다.
<호프> 역시 소문에서 출발한다.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말은 외계인보다 먼저 등장하며, 세계를 다시 의심하게 만든다. 적어도 영화의 전반부는 그렇다. 그러나 <곡성>이 의심을 끝까지 연장했다면, <호프>는 중반부에 이르러 외계인이라는 해답을 제시한다.발단은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소문이다. 이 전근대적인,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이 설정은 지금까지 나홍진이 잘해온 것, 진실을 유예시키는 서사를 예고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후 영화가 중반에 다다랐을때, 마이클 패스벤더와 알리시아 비칸데르의 외계생명체라는 명확한 정답이 나온다. 그러곤 액션신이다. 그렇다고 난 이러한 새로운 시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장면이 공들인 티가 나고 미학적으로나 연출적으로나 완성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나홍진의 패기가 실현되는 곳이 모호성이었던 만큼 정답의 세계에서의 나홍진은 약간 아쉬웠던 듯 보인다.
영화 초반 외계인이 등장하지 않고 범석이 홀로 동네를 돌아다니며 호랑이라 추정되는 그것을 쫓고 있을때의 긴장감과 서스펜스는 크리처물에 정수라 해도 좋을만큼 완벽했다.
내가 기대한 크리처 호러의 미학은 설명되지 않는 공포에 있었다. 그리고 영화는 초반부터 불가해의 공포를 키워왔다. 마치 곡성처럼. 그러나 작중에선 범석이 바미기르라는 외계인이 마을 사람들 모두를 죽였건만 공감하는 듯한 장면이 나오고 마지막 엔딩엔 결국 불가해의 공포였던 외계인이 말을 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렇기에 나는 말하려 한다. 톤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불가해의 공포를 지닌 서사가 마치 <아바타>와 같은 공감에 서사로 바뀌는 전환이 이상하다. 우선 영화에서 범석은 바미기르를 총으로 죽일 수 있는 장면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총을 쏘던 도중 외계인의 눈물에 클로즈업을 한다 그때 관객들은 직감한다. 아 이거 불가해의 공포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 아니구나. 어째서 였을까? 적어도 <호프>가 초반에 구축한 공포는 대상의 내면이 닫혀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영화는 외계인의 눈물을 클로즈업한다
눈물은 가장 보편적인 감정 표현 가운데 하나다
관객은 그 순간 외계인을 이해하려 하기 시작한다.
이해의 대상이 된 존재는 더 이상 순수한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불가해의 공포를 끝까지 밀어붙일 생각이었다면 외계인을 공감의 대상으로 전환하기보다 이해 불가능한 존재로 남겨두었어야 했다. 아니라면 외계인을 더 심층적으로 다뤄야 했다. 외계인들은 거의 싸울 때만 관객들이 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외계인의 공포가 아닌 외계인의 공감을 사야 하는 영화였다. 그런데 1시간을 불가해의 공포로 연출하고 그 후로는 그저 액션에 향연, 그리고 마지막에 마이클 패스벤더와 알리시아 비칸데르가 대화를 나누며 알리시아 비칸데르가 울며 끝이난다. 영화는 외계인 가족의 상실과 인간 공동체의 생존을
동시에 비춘다. 그러나 어느 쪽에더 무게를 둘
것인지 끝내 결정하지 못한다.
두개의 대비 속에서 나홍진은 적절한 연출법을 만들지 못했고 그렇게 해서 영화는 그 두개의 대비가 섞여버린 채, 결국 두서사는 서로를 강화하지 못하고 끝난다.
외계인은 공포의 대상으로 등장하지만, 영화는 후반부에 그들을 이해와 연민의 대상으로 전환하려 한다. 문제는 그 전환이 충분히 축적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관객은 외계인의 내면을 이해하기 전에 이미 영화의 방향을 예측하게 된다. 공포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연민이 아니라 익숙함이다.
그러니 <호프>는 외계인을 설명해서 실패한 영화가 아니라, 외계인을 예측 가능한 존재로 만들어버린 영화다.
결국 <호프>는 뛰어난 액션과 압도적인 스케일을 갖춘 작품이다. 그러나 나홍진 영화가 <곡성>에서 보여주었던 세계의 불가해함을 기대했던 관객에게는 가장 친절한 작품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어색한 작품일지도 모른다.
추천 콘텐츠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서문에 시가 하나 있다.오래도록 어둡고우울한 음악을 들었다그러다 거대한 불에 휩쓸렸다올해 봄날은 잿더미암흑세계였다생체발광할 수 있다면차가운 빛을 만들 수 있을 텐데더듬어 시를 켰다절벽이 보였다 화자는 차가운 빛을 만들고 싶어 한다. ‘차가운‘은 불에 반대되는 빛의 속성이다. 이 빛은 불이 만든 암흑세계를 비추는 역할을 한다. 화자는 스스로 이 빛을 내는 대신 시를 켜서 빛을 낸다. 다음은 시 ‘봄날 정경’ 의 일부다.…불타는 숲연기가 치솟는 마을재가 된 구름은 엉겨 붙지 않는다사람들의 불 연관 비유에나는 문제를 느끼지만체액이 끓어오르거나 그러진 않는다체험하지 않은 자들의 가소로운 엄살아름다운 무신경불타는 숲연기가 치솟는 마을타죽은 사람들… 화자의 마을이 불에 탔다. 인명 피해도 있다. 불길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은 대피소에 모여 있다. 화재를 겪고 나서 담담한 모습을 보인다. 불가항력의 일 앞에서 무기력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화자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바로 그 담담해 보이는 모습조차 ’시로 표현’하는 데에서 알 수 있다. ’시를 키는‘ 것이다. 무언가를 말하려고 애쓰는 시도가 시 안에서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비춘다. 문제를 느끼지만, 체액이 끓어오르거나 그러진 않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느껴지지만, 핵심은 화자가 체액이 끓어오르지 않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걸 시로 담아낸다는 것에 있다. 에서 확연하게 볼 수 있다.…가자지구에 억류 중인 인질이나 초강진 쓰나미에 침수된 항구도시나 거대한 화산재 기둥에 관해 쓰지 않는다… 시인은 ‘쓰지 않는다‘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생각의 물꼬를 터 준다. 이 방법은 인질이나 항구도시, 화산재 기둥에 대해 쓰는 것과는 다른 효과를 가져온다. 인질에 대해 쓰는 것은 인질에 주목하게 한다. 항구도시나 화산재 기둥에 대해 쓰는 것도 각각에 주목하게 한다. 그러나 ‘쓰지 않음’ 에 대해 쓰는 것은 심리적 거리를 현저히 좁혀 ‘나’에게까지 주목하게 한다. 재해뿐 아니라 재해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비추기 때문이다. 그들이 재해를 대하는 모습, ’쓰지 않는’ 모습을 보며 독자는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얻는다. 또한 화자는 과격한 감정표현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몇 걸음 떨어져서 재해를 이야기한다. 독자는 화자를 가깝게 느끼며 자신과 겹쳐 보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본인과 관련지어 생각하기에, 직접적으로 쓸 때보다 독자가 현실감 있게 재해를 의식할 수 있다. 시인이 이런 방식으로 시를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화재의 영향이라고 짐작해 본다. 어떤 문제 앞에선 미움의 힘이 강하다. 왜 미운지를 말하면서 대상이 가진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고, 얼마나 미운지를 말하면서 나의 생각을 보여줄 수 있다. 독자에게도 힘을 가져다준다. 독자는 시를 따라가면서 화자의 감정에 이입하려고 한다. 동시에 화자가 지닌 문제의식을 살펴볼 의욕을 준다. 그러나 미움으로는 불을 이길 수 없다. 불은 미움을 받지조차 못한다. 애석
- 신기루
- 2026-07-30
이 시집을 읽기 전 내가 알고 있던 것은 많지 않았다. 시인의 집이 화재로 전소되었고, 그 이후 이 시집이 출간되었다는 정도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시집 역시 화재 이후의 상실과 회복을 담은 기록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화재라는 사건이 시집의 중심에 놓여 있고, 그 경험을 어떻게 견디고 지나왔는지가 주된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다.가장 먼저 읽은 것은 자서였다.> 오래도록 어둡고> 우울한 음악을 들었다> 그러다 거대한 불에 휩쓸렸다> 올해 봄날은 잿더미> 암흑세계였다> 생체발광할 수 있다면> 차가운 빛을 만들 텐데> 더듬어 시를 켰다> 절벽이 보였다처음 자서를 읽었을 때는 화재를 겪은 시인의 절망과 그 이후의 다짐을 압축해 놓은 글처럼 느껴졌다. 특히 ‘시를 켰다’라는 표현은 어둠 속에서 불을 켜듯, 시를 통해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미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생체발광’이라는 표현 역시 스스로 빛을 내고 싶다는 바람 정도로 이해했고, 마지막의 ‘절벽이 보였다’는 문장은 막막한 현실을 비유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물론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왜 ‘시를 썼다’가 아니라 ‘시를 켰다’일까. 왜 절벽은 ‘보였다’에서 끝날까. 하지만 처음에는 그 표현들을 깊이 붙잡기보다, 앞으로 읽게 될 시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장을 넘겼다.1부 ― 바깥을 오래 바라보는 시선1부를 읽으며 가장 먼저 받은 인상은 시선이 바깥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인은 사람을 관찰하고, 일상적인 풍경을 오래 바라본다. 특별하거나 극적인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평범한 장면 하나를 붙잡고 그 안에서 천천히 사유를 이어 나간다. 읽기 전에는 화재라는 사건이 시집 전체를 이끌어 갈 것이라 예상했기에 이러한 전개는 다소 의외였다. 오히려 시인은 자신이 겪은 일을 서둘러 이야기하기보다, 먼저 타인과 세계를 바라보며 자신의 시선을 가다듬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그 과정에서 나는 1부가 단순히 바깥을 관찰하는 장이 아니라, 아직 자신의 상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기 전 스스로를 천천히 위로하고 마음을 정돈해 가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화재를 외면한다기보다는, 그것을 곧바로 언어로 옮기기에는 아직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 과정은 어쩌면 화재라는 사건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를 천천히 위로하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특히나 1부의 첫 시인 「이 세상에 없는 것」은 이후의 시집을 읽는 내내 계속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의 차이는 뭘까> 모두 끝났다고 말해도 될까> 이 세상에 원래 없었던 것 같은 그것을 찾아> 나는 어딜 이토록 떠도는 것인지이 구절을 읽으며 처음에는 상실을 겪은 사람이 스스로를 다독이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미 쓰여 없어졌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혹은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는 걸까. 시인은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고 계속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이 시는 화재 이후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이
- 미빈
- 2026-07-30
1. 삶은 부조리다 태어남은 선택할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선택할 겨를없이 내던져진 삶은 애초에 부조리라고 할 수 있다. 살면서 고통과 쾌락을 둘 다 얻을 수 있고 어찌 보면 고통보다 쾌락을 더 많이 누리는 삶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러한 도박에 불참할 기회가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이듬의 시집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의 1부 중 <한여름 저녁 한 시간 반>에서 화자는 누군가가 난데없이 맡긴 짐을 떠안게 되고 이 때문에 버스를 놓칠 상황에 놓인다. 그리고 화자는 자신 또한 이 짐처럼 누군가 ‘세상에 맡겨 두고 찾아가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한다. 화자의 이런 생각은 선택의 기회 없이 탄생함을 인식한 것이다. 또한 짐을 맡기고 찾아가지 않은 건 사실상 짐을 버린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화자가 삶이란 부조리 속에서 내적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이미 태어났고, 어떻게든 살아가야 할 텐데, 그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 부조리한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타인이다. 다른 이가 한 사람 인생의 의미가 된다. 그리고 김이듬은 타인을 내면화하는 걸 그 의미로 봤다. 김이듬에게 타인은 내면화가 가능한 존재다. 2부의 <나의 이방인 2>에서, ‘너’는 화자인 ‘나’와 대화할 수 있지만, ‘탄식을 주워섬기는 너는 내 안의 방랑자’, ‘내게도 절친이 있다고/텅 빈 의자 위의 네가/나였음을 증명할 수 있을까’ 같은 문장들은 ‘너’가 ‘나’에게 타자이면서도 내면화되는 대상이라는 걸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나’ 대신 분노하기도 하는 타인이지만, ‘나’ 안에서 내면 안에서 ‘나를 감시’하기도 한다. 이는 ‘나’는, ‘우리는 불화한다’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 화자는 ‘너’와의 틈을 인식하고 갈등하는데, (내면 속 ‘너’가 ‘나를 감시’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자기검열의 주체로 ‘너’를 삼고 있는 것이다. <한여름 저녁 한 시간 반>에서 화자는 다른 사람이 맡긴 짐 때문에 환승 버스를 타지 못하고 터미널에 계속 남는다. 시 속에서 화자가 누군가 맡긴 짐으로 스스로 생각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세상에 맡겨진 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다른 사람이 화자에게 짐을 맡긴 건 화자가 그 사람을 내면화했다는 은유이다. 한 사람에게 원했든 아니든, 내면화된 타인은 삶을 변화시키지 않고 유지할 의미라는 것이다. 2. 이해할 수 없는 타인 그러나 타인은 온전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당신이 타인에게 의미라고 해도 타인의 삶은 당신이 의미가 아닌 부분에서 계속해서 변화할 것이고 그것은 당신이 의미인 부분을
- 금안백
- 2026-07-30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