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이후의 계절 — 김이듬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났다」론
- 작성자 고래
- 작성일 2026-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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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듬 시인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났다>라는 시에선 그녀의 전작들이었던 『히스테리아』『명랑하라 팜 파탈』등의 관능적 전복적 화자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톤이 옅어졌다. 김이듬 시인을 지탱했던 원망과 원념이, 최승자 시인을 기억하게 했던 그 감정들이 어디 가고 이렇게 차분하고 초연한, 불가적으로 말하자면 해탈한 듯 보이는 화자가 만들어진 걸까.
이를 알아가고자 한다. 우선 이 시집이 김이듬 시인의 자전적인 시집이라는 점을 알아두었으면 한다.
1. 김이듬 시인의 본래 화자를 보자
히스테리아 김이듬
이 인간을 물어뜯고 싶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널 물어뜯어 죽일 수 있다면 야 어딜 만져 야야 손 저리 치워 곧 나는 찢어진다 찢어질 것 같다 발작하며 울부짖으려다 손으로 아랫배를 꽉 누른다 심호흡한다 만지지 마 제발 기대지 말라고 신경질 나게 왜 이래 팽팽해진 가죽을 찢고 여우든 늑대든 튀어나오려고 한다 피가 흐르는데 핏자국이 달무리처럼 푸른 시트로 번져가는데 본능이라니 보름달 때문이라니 조용히 해라 진리를 말하는 자여 진리를 알거든 너만 알고 있어라 더러운 인간들의 복음 주기적인 출혈과 복통 나는 멈추지 않는데 복잡해 죽겠는데 안으로 안으로 들어오려는 인간들 나는 말이야 인사이더잖아 아웃사이더가 아냐 넌 자면서도 중얼거리네 갑작스런 출혈인데 피 흐르는데 반복적으로 열렸다 닫혔다 하는 큰 문이 달린 세계 이동하다 반복적으로 멈추는 바퀴 바뀌지 않는 노선 벗어나야 하는데 나가야 하는데 대형 생리대가 필요해요 곯아떨어진 이 인간을 어떻게 하나 내 외투 안으로 손을 넣고 갈겨쓴 편지를 읽듯 잠꼬대까지 하는 이 죽일 놈을 한 방 갈기고 싶은데 이놈의 애인을 어떻게 하나 덥석 목덜미를 물고 뛰어내릴 수 있다면 갈기를 휘날리며 한밤의 철도 위를 내달릴 수 있다면 달이 뜬 붉은 해안으로 그 흐르는 모래사장 시원한 우물 옆으로 가서 너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
히스테리아의 표제작이다. 원망과 원념이 느껴지는 이 이유를 따지지 않아도 된다. 우리의 중요점은 지금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와 무엇이 다르다는 것이냐.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났다
김이듬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났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미움이 없어 분노가 없어 관심과 눈치도 없이 봄이 지나갔다 지나고 보니 봄이었다 올리브유로 비누 만들기만큼 쉽게 지나갔다
봄에 나는 죽어 있었고 내가 죽으면 애인은 어찌 살까 걱정하지 않았다 애인은 내가 죽기 전에 죽었으니까 나의 집은 황무지가 되었다 풀들이 불에 탔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나는 벽돌만 한 비누를 집어 던지지 않았다
자연은 좋겠다 폭풍이든 초대형 산불이든 지진이든 일으켜도 자연을 벌하지 않으니까 대부분 인재 사람의 잘못이라고 말하니까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유학 가기 전에 매일 다퉜던 동생을 사랑하게 되었다 동생이 공원 공중화장실에서 얼굴이 벌개가지고 울면서 나왔다
유머를 잃어버렸지만 나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을 보냈다 내 동생은 남자처럼 보이지만 여자다 키가 백팔십이고 머리를 허리까지 길렀다 이렇게 설명해 봤자 그 아주머니는 남자가 왜 여자 화장실에 들어오냐고 소리쳤다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내 탓이오라고 말하지 말라며 나는 동생을 다독였다 자연에는 암수 외에도 성이 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향기로웠다 봄이었다
시집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중에서
원망과 원념을 가진 화자였던 김이듬 시인의 시가 해탈한 듯 변했다. 정말 그런지는 재쳐두고, 우선 그 이유를 설명해보고자 한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미움이 없었고 분노도 없었는데 지나고 보니 봄이었다, 라는 1연에서 나오는 초연한 감정에 대해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본래 김이듬 시인은 폭력적인 사회와 가부장제,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을 향한 분노를 썼다. 일반화가 될 수 있지만, 그렇다. 그러나 이 표제작에선 미움이 없었고 분노가 없었다. 다만 지나고 보니 봄이었을 뿐이다. 미움과 분노 다음으로 자연을 뜻하는 봄이 왔다. 그 후 <자연은 좋겠다>라는 문장으로 여기서 화자의 관심은 개인의 상처를 넘어 자연이라는 존재로까지 확장된 듯 하다.
3연을 자세히 보자면
<자연은 좋겠다 폭풍이든 초대형 산불이든 지진이든 일으켜도 자연을 벌하지 않으니까 대부분 인재 사람의 잘못이라고 말하니까>라는 표현을 쓴다. 실제로 김이듬 시인의 자전적인 시집인 만큼, 시집 곳곳에서 실제 일어난 일들이 드러난다. 경북 지역에 산불이 김이듬 시인의 자택까지 번진 것이다. 자연 역시 인간의 도덕으로 재단할 수 없는 존재라면, 인간 또한 증오만으로는 변화하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을 화자가 체감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후 6연에서도 이와 연결되는 문장들이 나온다.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내 탓이오라고 말하지 말라며 나는 동생을 다독였다 자연에는 암수 외에도 성이 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향기로웠다 봄이었다>
김이듬 시인에겐 동생이 있었다. 동생은 키가 컸고 머리가 길었지만 남자라고 오해를 줄곧 받는다 했다. 그 앞 연에서 아주머니는 남자가 왜 여자 화장실을 들어오냐 했다.
산불이라는 현상을 도덕적 심판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던 태도가, 동생의 젠더를 도덕적 심판의 대상으로 삼는 아주머니의 반응을 논리적으로 반박했을 뿐인 연이지만 본래였다면 있었을 원망이 없다. 히스테리아에서 보았던 사람을 물어뜯고자 하는 원망이 없다. 본래 김이듬 시인은 여성주의적인, 페미니즘적인 시를 썼고 그 범주 안엔 당연하게도 젠더 문제도 포함되었으며 그 또한 증오했지만, 자연을 증오해도 바뀌지 않는 자연을 보며, 품었던 체념의 감각이 인간에게로 확장되었다. 그렇기에 이 화자는 해탈한 듯 보인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그렇게 해탈했다고 보는 우리 앞에 벽돌만 한 비누가 등장한다.
1연의 <올리브유로 비누 만들기만큼 쉽게>라는 창조와 평온의 이미지가 2연에서 <나는 벽돌만 한 비누를 집어 던지지 않았다>는 비누가 무기가 될 뻔했다는 암시와 억눌린 분노를 느끼게 한다. 미움이 없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미워할 만한 힘조차 없거나, 미움을 참아낸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결국 해탈했다는 것은 인간이 아닌 자가 되어버린 부처의 얘기일 뿐, 김이듬 시인은 인간이었다.
더불어 처음의 봄은 '지나고 보니' 발견된 시간이지만, 마지막의 봄은 '향기로웠다'라는 감각으로 귀결되는 것으로 보아, 해탈처럼 보였던 화자는 사실 분노를 잃은 사람이 아니라, 분노를 견디면서 다시 세계를 감각하기
시작한 사람인 것이다.
『히스테리아』의 화자가 분노를 외부로 폭발시켰다면,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났다』의 화자는 그 분노를 견디는 법을 배운 사람처럼 보인다.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자면 — 이 화자는 해탈한 것이 아니라, 견디는 법을 배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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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기루
- 2026-07-30
이 시집을 읽기 전 내가 알고 있던 것은 많지 않았다. 시인의 집이 화재로 전소되었고, 그 이후 이 시집이 출간되었다는 정도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시집 역시 화재 이후의 상실과 회복을 담은 기록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화재라는 사건이 시집의 중심에 놓여 있고, 그 경험을 어떻게 견디고 지나왔는지가 주된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다.가장 먼저 읽은 것은 자서였다.> 오래도록 어둡고> 우울한 음악을 들었다> 그러다 거대한 불에 휩쓸렸다> 올해 봄날은 잿더미> 암흑세계였다> 생체발광할 수 있다면> 차가운 빛을 만들 텐데> 더듬어 시를 켰다> 절벽이 보였다처음 자서를 읽었을 때는 화재를 겪은 시인의 절망과 그 이후의 다짐을 압축해 놓은 글처럼 느껴졌다. 특히 ‘시를 켰다’라는 표현은 어둠 속에서 불을 켜듯, 시를 통해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미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생체발광’이라는 표현 역시 스스로 빛을 내고 싶다는 바람 정도로 이해했고, 마지막의 ‘절벽이 보였다’는 문장은 막막한 현실을 비유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물론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왜 ‘시를 썼다’가 아니라 ‘시를 켰다’일까. 왜 절벽은 ‘보였다’에서 끝날까. 하지만 처음에는 그 표현들을 깊이 붙잡기보다, 앞으로 읽게 될 시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장을 넘겼다.1부 ― 바깥을 오래 바라보는 시선1부를 읽으며 가장 먼저 받은 인상은 시선이 바깥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인은 사람을 관찰하고, 일상적인 풍경을 오래 바라본다. 특별하거나 극적인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평범한 장면 하나를 붙잡고 그 안에서 천천히 사유를 이어 나간다. 읽기 전에는 화재라는 사건이 시집 전체를 이끌어 갈 것이라 예상했기에 이러한 전개는 다소 의외였다. 오히려 시인은 자신이 겪은 일을 서둘러 이야기하기보다, 먼저 타인과 세계를 바라보며 자신의 시선을 가다듬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그 과정에서 나는 1부가 단순히 바깥을 관찰하는 장이 아니라, 아직 자신의 상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기 전 스스로를 천천히 위로하고 마음을 정돈해 가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화재를 외면한다기보다는, 그것을 곧바로 언어로 옮기기에는 아직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 과정은 어쩌면 화재라는 사건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를 천천히 위로하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특히나 1부의 첫 시인 「이 세상에 없는 것」은 이후의 시집을 읽는 내내 계속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의 차이는 뭘까> 모두 끝났다고 말해도 될까> 이 세상에 원래 없었던 것 같은 그것을 찾아> 나는 어딜 이토록 떠도는 것인지이 구절을 읽으며 처음에는 상실을 겪은 사람이 스스로를 다독이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미 쓰여 없어졌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혹은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는 걸까. 시인은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고 계속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이 시는 화재 이후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이
- 미빈
- 2026-07-30
1. 삶은 부조리다 태어남은 선택할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선택할 겨를없이 내던져진 삶은 애초에 부조리라고 할 수 있다. 살면서 고통과 쾌락을 둘 다 얻을 수 있고 어찌 보면 고통보다 쾌락을 더 많이 누리는 삶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러한 도박에 불참할 기회가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이듬의 시집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의 1부 중 <한여름 저녁 한 시간 반>에서 화자는 누군가가 난데없이 맡긴 짐을 떠안게 되고 이 때문에 버스를 놓칠 상황에 놓인다. 그리고 화자는 자신 또한 이 짐처럼 누군가 ‘세상에 맡겨 두고 찾아가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한다. 화자의 이런 생각은 선택의 기회 없이 탄생함을 인식한 것이다. 또한 짐을 맡기고 찾아가지 않은 건 사실상 짐을 버린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화자가 삶이란 부조리 속에서 내적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이미 태어났고, 어떻게든 살아가야 할 텐데, 그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 부조리한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타인이다. 다른 이가 한 사람 인생의 의미가 된다. 그리고 김이듬은 타인을 내면화하는 걸 그 의미로 봤다. 김이듬에게 타인은 내면화가 가능한 존재다. 2부의 <나의 이방인 2>에서, ‘너’는 화자인 ‘나’와 대화할 수 있지만, ‘탄식을 주워섬기는 너는 내 안의 방랑자’, ‘내게도 절친이 있다고/텅 빈 의자 위의 네가/나였음을 증명할 수 있을까’ 같은 문장들은 ‘너’가 ‘나’에게 타자이면서도 내면화되는 대상이라는 걸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나’ 대신 분노하기도 하는 타인이지만, ‘나’ 안에서 내면 안에서 ‘나를 감시’하기도 한다. 이는 ‘나’는, ‘우리는 불화한다’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 화자는 ‘너’와의 틈을 인식하고 갈등하는데, (내면 속 ‘너’가 ‘나를 감시’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자기검열의 주체로 ‘너’를 삼고 있는 것이다. <한여름 저녁 한 시간 반>에서 화자는 다른 사람이 맡긴 짐 때문에 환승 버스를 타지 못하고 터미널에 계속 남는다. 시 속에서 화자가 누군가 맡긴 짐으로 스스로 생각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세상에 맡겨진 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다른 사람이 화자에게 짐을 맡긴 건 화자가 그 사람을 내면화했다는 은유이다. 한 사람에게 원했든 아니든, 내면화된 타인은 삶을 변화시키지 않고 유지할 의미라는 것이다. 2. 이해할 수 없는 타인 그러나 타인은 온전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당신이 타인에게 의미라고 해도 타인의 삶은 당신이 의미가 아닌 부분에서 계속해서 변화할 것이고 그것은 당신이 의미인 부분을
- 금안백
- 2026-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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