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 위해 사는 삶: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를 읽고
- 작성자 토우
- 작성일 202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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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저마다 삶을 견디는 방식을 품고 살아간다. 김이듬 시인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는 쓰는 일로 삶을 견디는 사람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행적과도 같다.
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의 차이는 뭘까
모두 끝났다고 말해도 될까
이 세상에 원래 없었던 것 같은
그것을 찾아 나는 어딜 이토록 떠도는 것인지
「이 세상에 없는 것」 에서
시집을 여는 첫 시의 마지막 구절부터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방랑하는 것과 같다. 이 시에는 순금을 되팔러 오는 아가씨가 있다. 그리고 시인은 가지고 있던 시계알을 구하지 못해 골동품으로 간직하라는 말을 듣는다. 항상 가치 있는 순금과는 달리 시인이 가진 시계는 구시대적이며 소모되거나 사라진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이 골동품이 다 되도록 품고 있던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겨우 고치기 위해 세상으로 나왔을 때 살릴 방법이 없다는 말을 듣고, 삶을 겨우 지탱해 주던 희미한 무게마저 떨어져 나간 것 같은 기분. 더 이상 갈 길이 없어 허망해져 버린 그의 슬픔.
그리고 시 전반에서는 결여되거나 결함이 있는 대상들이 자주 등장한다.
치유의 숲을 걸었다
붙여진 이름이
슬픔의 숲이었다면
걷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겠지
동백 숲길로 이어졌다
동백꽃은 없었다
시기를 잘못 맞추는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중략)
예술가가 없는 예술가의 집을 지나왔다
(중략)
선녀가 없었으므로 선녀탕이 있었다
「산책」 에서
대상이 결여되어 있는데 이름은 그것들로 붙여진 곳들을 지나왔다. 있어야 할 것이 있는 곳에는 사람이 없고, 없는 곳에는 사람들이 많다. 어딘가 배척당한 기분. 혹은 후순위로 밀려난 것들에 시인의 시선이 닿는다.
이러한 시선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마지막 눈이 왔다. 오후에 출근해 보니 식물이 죽어 있었다. 마치 태어났고 평범하게 성장했고 온순했으며 살해당한 소녀 같았다.
똑같은 식물을 사서 화분에 심어 두기로 했다. 아무도 모르게. 식물이 죽고 나서야 나는 그 식물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뿌리째 뽑아서 자루에 담아 천변 화원에 가져갔다.
「똑같은 식물이 아니다」 에서
죽어 있는 식물의 끝을 함께하고자 하는 열망이 드러난다. 특히 ‘식물이 죽고 나서야 나는 그 식물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에서는 식물에게도 장례를 치르는 듯한 시인의 모습이 보인다. 굳이 알고 싶지 않아도 장례라는 절차를 거치면 이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곧 대상을 향한 최소한의 관심이며, 식물에게는 열렬한 마음으로 가닿는 것이다.
그렇게 외부를 향한 관심과 애정을 확장해 가던 시인은 마침내 스스로를 향한 대화를 자처한다.
너는 유리를 깨뜨려야 꺼낼 수 있는 영정사진 속 얼굴 같다
「나의 이방인 2」 에서
유리를 깨뜨려야 꺼낼 수 있는 영정사진은 넣을 때 그대로 환한 미소에 멈춰 있지만, 아무리 닿으려 해도 유리 안에 갇혀 단절된다. 그 유리를 깨뜨리면 그 안의 얼굴이 결코 온전하지 않을 테고, 닿게 되더라도 그 얼굴이 결국 자신의 모습이라 무언가 단단히 어긋나 버렸다고 여길 것이다. 이처럼 이 시에서 시인은 내면의 또 다른 자아와 대화하지만 함부로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존재로 여긴다. 결국 슬프게도 ‘너를 사랑한다고 노래하게 되면 더 멀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이른다. 형체는 스스로 존재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단절된 듯하고, 어느 곳을 건드리면 똑같이 아파할 것이 분명해서 다가서지 못하는 마음이 연약하면서도 섬세해 나를 투영해 볼 수밖에 없게 만든다.
반면 시집에서는 특히 불과 같은 파괴적인 이미지가 잇따라 제시된다. 내면의 혼돈과 외부적인 상황, 시인이라는 작가로서의 숙명과 감내해야 할 고통 같은 것을 한데 모아 생각해 볼 수 있다.
불타는 숲
연기가 치솟는 마을
타죽은 사람들
나는 삶을
각오하지 않는다
(중략)
나는 내가 겪은 걸 토대로 언어의 텐트를 친다. 나는 안 겪은 걸 못 쓴다. 바로 지금을 쓰는 버릇. 타인들이 싫어하든 지겨워하든 나는 별로 돌려서 말하지 않는다. 너무 현실이라서 믿기 어려워하지.
나는 씻지 않는다
기분을 갈아입지 않는다
「봄날 정경」 에서
화재가 난 마을에서도 시인은 딱히 각오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기분을 세탁하지도 않고 그저 시를 쓸 뿐이다. 사람들에게는 낯설고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모든 감정을 배제하고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처럼 상당히 객관적인 태도를 취한다. ‘내가 겪은 걸 토대로 언어의 텐트를 친다’는 것은 대부분 시를 쓰는, 혹은 써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만한 구절이다. 경험을 토대로 각자의 언어를 만들어 소통하는 것.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에서 김이듬 시인의 시는 현실적인 쪽에 가깝다. 표현이 직설적이며 추상적인 환상을 그리지 않는다. 시를 읽을수록 시인 본인의 이야기를 한데 묶어 놓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그가 시를 대하는 태도는 다음 시에서 더 구체화된다.
너는 화가라는 업이 짊어져야 하는 짐처럼 여겨지지 않니?
그 작업이 놀이처럼 재밌니?
어떻게 하면 시 짓기가 다시 재밌어질까
「넌 아직 재밌니」 에서
너무나 좋아하는 것이라도 일로 하게 되면 짐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시인에게 있어서 시를 쓰는 행위도 결코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렇더라도 시는 기록이 될 수 있다. 불과 재난,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쓰기 위해 사는 삶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김이듬 시인에게 시는 그런 것 같다. 가끔은 헤매고 지치게 해도 결국은 붙잡고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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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서문에 시가 하나 있다.오래도록 어둡고우울한 음악을 들었다그러다 거대한 불에 휩쓸렸다올해 봄날은 잿더미암흑세계였다생체발광할 수 있다면차가운 빛을 만들 수 있을 텐데더듬어 시를 켰다절벽이 보였다 화자는 차가운 빛을 만들고 싶어 한다. ‘차가운‘은 불에 반대되는 빛의 속성이다. 이 빛은 불이 만든 암흑세계를 비추는 역할을 한다. 화자는 스스로 이 빛을 내는 대신 시를 켜서 빛을 낸다. 다음은 시 ‘봄날 정경’ 의 일부다.…불타는 숲연기가 치솟는 마을재가 된 구름은 엉겨 붙지 않는다사람들의 불 연관 비유에나는 문제를 느끼지만체액이 끓어오르거나 그러진 않는다체험하지 않은 자들의 가소로운 엄살아름다운 무신경불타는 숲연기가 치솟는 마을타죽은 사람들… 화자의 마을이 불에 탔다. 인명 피해도 있다. 불길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은 대피소에 모여 있다. 화재를 겪고 나서 담담한 모습을 보인다. 불가항력의 일 앞에서 무기력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화자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바로 그 담담해 보이는 모습조차 ’시로 표현’하는 데에서 알 수 있다. ’시를 키는‘ 것이다. 무언가를 말하려고 애쓰는 시도가 시 안에서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비춘다. 문제를 느끼지만, 체액이 끓어오르거나 그러진 않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느껴지지만, 핵심은 화자가 체액이 끓어오르지 않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걸 시로 담아낸다는 것에 있다. 에서 확연하게 볼 수 있다.…가자지구에 억류 중인 인질이나 초강진 쓰나미에 침수된 항구도시나 거대한 화산재 기둥에 관해 쓰지 않는다… 시인은 ‘쓰지 않는다‘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생각의 물꼬를 터 준다. 이 방법은 인질이나 항구도시, 화산재 기둥에 대해 쓰는 것과는 다른 효과를 가져온다. 인질에 대해 쓰는 것은 인질에 주목하게 한다. 항구도시나 화산재 기둥에 대해 쓰는 것도 각각에 주목하게 한다. 그러나 ‘쓰지 않음’ 에 대해 쓰는 것은 심리적 거리를 현저히 좁혀 ‘나’에게까지 주목하게 한다. 재해뿐 아니라 재해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비추기 때문이다. 그들이 재해를 대하는 모습, ’쓰지 않는’ 모습을 보며 독자는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얻는다. 또한 화자는 과격한 감정표현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몇 걸음 떨어져서 재해를 이야기한다. 독자는 화자를 가깝게 느끼며 자신과 겹쳐 보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본인과 관련지어 생각하기에, 직접적으로 쓸 때보다 독자가 현실감 있게 재해를 의식할 수 있다. 시인이 이런 방식으로 시를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화재의 영향이라고 짐작해 본다. 어떤 문제 앞에선 미움의 힘이 강하다. 왜 미운지를 말하면서 대상이 가진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고, 얼마나 미운지를 말하면서 나의 생각을 보여줄 수 있다. 독자에게도 힘을 가져다준다. 독자는 시를 따라가면서 화자의 감정에 이입하려고 한다. 동시에 화자가 지닌 문제의식을 살펴볼 의욕을 준다. 그러나 미움으로는 불을 이길 수 없다. 불은 미움을 받지조차 못한다. 애석
- 신기루
- 2026-07-30
이 시집을 읽기 전 내가 알고 있던 것은 많지 않았다. 시인의 집이 화재로 전소되었고, 그 이후 이 시집이 출간되었다는 정도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시집 역시 화재 이후의 상실과 회복을 담은 기록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화재라는 사건이 시집의 중심에 놓여 있고, 그 경험을 어떻게 견디고 지나왔는지가 주된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다.가장 먼저 읽은 것은 자서였다.> 오래도록 어둡고> 우울한 음악을 들었다> 그러다 거대한 불에 휩쓸렸다> 올해 봄날은 잿더미> 암흑세계였다> 생체발광할 수 있다면> 차가운 빛을 만들 텐데> 더듬어 시를 켰다> 절벽이 보였다처음 자서를 읽었을 때는 화재를 겪은 시인의 절망과 그 이후의 다짐을 압축해 놓은 글처럼 느껴졌다. 특히 ‘시를 켰다’라는 표현은 어둠 속에서 불을 켜듯, 시를 통해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미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생체발광’이라는 표현 역시 스스로 빛을 내고 싶다는 바람 정도로 이해했고, 마지막의 ‘절벽이 보였다’는 문장은 막막한 현실을 비유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물론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왜 ‘시를 썼다’가 아니라 ‘시를 켰다’일까. 왜 절벽은 ‘보였다’에서 끝날까. 하지만 처음에는 그 표현들을 깊이 붙잡기보다, 앞으로 읽게 될 시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장을 넘겼다.1부 ― 바깥을 오래 바라보는 시선1부를 읽으며 가장 먼저 받은 인상은 시선이 바깥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인은 사람을 관찰하고, 일상적인 풍경을 오래 바라본다. 특별하거나 극적인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평범한 장면 하나를 붙잡고 그 안에서 천천히 사유를 이어 나간다. 읽기 전에는 화재라는 사건이 시집 전체를 이끌어 갈 것이라 예상했기에 이러한 전개는 다소 의외였다. 오히려 시인은 자신이 겪은 일을 서둘러 이야기하기보다, 먼저 타인과 세계를 바라보며 자신의 시선을 가다듬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그 과정에서 나는 1부가 단순히 바깥을 관찰하는 장이 아니라, 아직 자신의 상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기 전 스스로를 천천히 위로하고 마음을 정돈해 가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화재를 외면한다기보다는, 그것을 곧바로 언어로 옮기기에는 아직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 과정은 어쩌면 화재라는 사건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를 천천히 위로하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특히나 1부의 첫 시인 「이 세상에 없는 것」은 이후의 시집을 읽는 내내 계속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의 차이는 뭘까> 모두 끝났다고 말해도 될까> 이 세상에 원래 없었던 것 같은 그것을 찾아> 나는 어딜 이토록 떠도는 것인지이 구절을 읽으며 처음에는 상실을 겪은 사람이 스스로를 다독이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미 쓰여 없어졌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혹은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는 걸까. 시인은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고 계속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이 시는 화재 이후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이
- 미빈
- 2026-07-30
1. 삶은 부조리다 태어남은 선택할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선택할 겨를없이 내던져진 삶은 애초에 부조리라고 할 수 있다. 살면서 고통과 쾌락을 둘 다 얻을 수 있고 어찌 보면 고통보다 쾌락을 더 많이 누리는 삶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러한 도박에 불참할 기회가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이듬의 시집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의 1부 중 <한여름 저녁 한 시간 반>에서 화자는 누군가가 난데없이 맡긴 짐을 떠안게 되고 이 때문에 버스를 놓칠 상황에 놓인다. 그리고 화자는 자신 또한 이 짐처럼 누군가 ‘세상에 맡겨 두고 찾아가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한다. 화자의 이런 생각은 선택의 기회 없이 탄생함을 인식한 것이다. 또한 짐을 맡기고 찾아가지 않은 건 사실상 짐을 버린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화자가 삶이란 부조리 속에서 내적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이미 태어났고, 어떻게든 살아가야 할 텐데, 그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 부조리한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타인이다. 다른 이가 한 사람 인생의 의미가 된다. 그리고 김이듬은 타인을 내면화하는 걸 그 의미로 봤다. 김이듬에게 타인은 내면화가 가능한 존재다. 2부의 <나의 이방인 2>에서, ‘너’는 화자인 ‘나’와 대화할 수 있지만, ‘탄식을 주워섬기는 너는 내 안의 방랑자’, ‘내게도 절친이 있다고/텅 빈 의자 위의 네가/나였음을 증명할 수 있을까’ 같은 문장들은 ‘너’가 ‘나’에게 타자이면서도 내면화되는 대상이라는 걸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나’ 대신 분노하기도 하는 타인이지만, ‘나’ 안에서 내면 안에서 ‘나를 감시’하기도 한다. 이는 ‘나’는, ‘우리는 불화한다’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 화자는 ‘너’와의 틈을 인식하고 갈등하는데, (내면 속 ‘너’가 ‘나를 감시’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자기검열의 주체로 ‘너’를 삼고 있는 것이다. <한여름 저녁 한 시간 반>에서 화자는 다른 사람이 맡긴 짐 때문에 환승 버스를 타지 못하고 터미널에 계속 남는다. 시 속에서 화자가 누군가 맡긴 짐으로 스스로 생각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세상에 맡겨진 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다른 사람이 화자에게 짐을 맡긴 건 화자가 그 사람을 내면화했다는 은유이다. 한 사람에게 원했든 아니든, 내면화된 타인은 삶을 변화시키지 않고 유지할 의미라는 것이다. 2. 이해할 수 없는 타인 그러나 타인은 온전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당신이 타인에게 의미라고 해도 타인의 삶은 당신이 의미가 아닌 부분에서 계속해서 변화할 것이고 그것은 당신이 의미인 부분을
- 금안백
- 2026-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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