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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하지 않았다는 말은 사랑했다는 말과 같다

  • 작성자 방백
  • 작성일 2026-07-30
  • 조회수 355

얼어붙은 호수의 경관은 새하얗고 텅 비어 보인다. 그러나 비었다는 것이 정말 텅 빈 것일까? 이 물음에서부터 김이듬 시인의 시집,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를 읽어볼 것이다.


 여기 생활의 흔적이 남지 않은 빈 방이 하나 있다고 치자.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우리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방, 혹은 생활의 흔적이 남지 않은 방을 보며 흔히 ‘빈’이라는 묘사를 붙인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비어’ 있는 게 아니다. 사물의 관점에서 다시 방을 보았을 때, 주름 지지 않은 이불과 고요한 침대, 먼지 쌓인 책상과 마룻바닥, 잘 개어진 옷과 닫힌 옷장 등 많은 물건이 들어찬 방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처럼 일상적으로 말할 때 우리는 인간을 세계의 주체로 두고 본다. 인간은 사물과 달리 권력을 잡고 있으며, 주류라고 칭해지기 때문이다. 세상은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의 언어로 설명되며, 이때 인간 아닌 ‘그밖의 것’들은 원래 없었던 ’ 같이 묻혀 버린다. ‘그밖의 것’들은 주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를 주류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그 안에 남아 있던 비주류는 ‘있으나 없는 것’처럼 지워진다.

 이 시집에서는 등장 인물이 ‘너’, ‘나’, ‘친구’ 혹은 일상적인 직업, 화자와 가까운 특징을 지닌 인물 정도에 그치는 여타 시집들에 비해 더 다양한 사회적 위치나 직업, 특징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또한 재해의 상황들을 언급하며 그 속에서 피해를 입은 인물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도록 만들고, 특정 사물과 비슷한 처지의 인물들을 연상시키도록 한다.

  “폭풍”/“기근”/“역병”/“전쟁”, “동남아”에서 온 “가사도우미”, “생리대/초콜릿 바/담배/술”과 같이 값싼 물건과 생활 필수품을 훔쳐 곧 “감옥”으로 “떨어지”게 될 “도둑”, “사람”에게 죽은 “사람”과 “자기 혈육”에게 죽은 “가족”과 “마스크”가 “없”어 “승차를 거부”당한 “누추하게 젖은 사람”, “몽골인 노동자들”, “죽어 있”는 “식물”에서 떠오르는 방치된 사람들과 “태어났고 평범하게 성장했고 온순했으며 살해당한 소녀”와 “식물이 죽고 나서야” “그 식물의 이름을 알게 되”는 세상의 무관심함에 놓여 있는 사람들, “거리 곳곳의 무장군인들과 탱크”, “고독사”, 태어나 자라기만 해도 “천벌 받아도 싼 존재”처럼 목이 베어지는 풀과 “애지중지하는 화초와 나무에게 피해만 끼치는” “잡초 같다는 얘길 듣곤”하는 “너”와 “숨을 데가 없어”져 “새”에게 쪼아 먹히는 “지렁이”의 처지와 같은 사람들, “지금이 가장 불행한 시절일 것도 같은” “노인”들, “가자지구에 억류 중인 이스라엘 인질”이나 “초강진 쓰나미에 침수된 항구도시”나 “거대한 화산재 기둥”과 “폭우”/“산사태”로 피해 본 지역, 화재 피해를 입은 “이재민”들, “잿더미와 폐기물로 남은 생활을 걱정”하는 사람, “자연에는 암수 외에도 성이 있다”는 말처럼 인간의 단어인 “남자”와 “여자”에 속할 수 없는 간성의 사람들, “반지하”에 사는 “너”, “집시”와 같은 사람, “극단적 선택을 앞둔 사람들”, “정교수”와 “부교수”가 아니라서 “아버지 장례식”에 “화환”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직업의 차이만으로도 사람들의 인정에 기댈 수 없어 냉대받는 “겸임교수나 강사”같은 사람들, “아픈 사람들”과 “암에 걸린 지인”과 “위궤양을 앓는 연극배우”와 “낙태 수술하고 온 아가씨”, “딸이 도망 중에 적에게 붙잡혀 팔려갈 위기”에서는 “딸을 죽이”는 게 더 낫다고 믿는 “아버지”와 자신의 “빚 때문에 남은 가족이 고통 속에 살게 될까 봐 걱정되어 가족을 죽이”는 사람과 “다리와 등, 머리, 눈, 손, 신장, 자궁, 그리고 혀까지 망가”졌음에도 “산 사람은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과 그럼에도, 세상 끝까지 몰려 있는 것 같음에도 아직 “사랑하는” 사람이 “도망치”기를, 죽지 않고 죽이지 않고 삶을 더 걸어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시집 안에 있다.*

 위와 같이 시집에서 다루는, 세상의 관점에서 ‘비주류’인 이들, 설 자리가 없는 이들을 이 비평에서 사회적 소수자(사회적 약자)라고 통칭하고자 한다.

 사회적 소수자를 칭할 때 소수자는 단순 숫자의 적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현 시대의 권력에서 밀려나 있으며, 차별적 대우를 받는 이들을 뜻한다. 세상의 관점에서 밀려나 있는 이들, 주류의 관점에서 보이지 않는 이들, ‘원래 없었던 것’ 같은 이들을 말하는 것이 이 시집이다.



  • 1.‘얼어붙은 호수’ 지나가기

      

 시집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며 설명하기 위해서 가장 마지막으로 수록된 시편인 <입동 무렵>을 먼저 살펴보려고 한다.


 폐쇄하고 싶었을 것이다

 일 년 중 며칠이라도


 문을

 닫아걸고 싶었을 것이다

 호수는


 수면이 온통 물이라서

 비가 오면 비를 받고

 바람 불면 물결치기 바빴다

 빵 부스러기나 쓰레기를 던져 넣어도 막을 수 없었다

 첨벙첨벙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새와 구름과 측백나무까지

 사방에서 투신하는 그것들을 사랑했다

 단지 얼비치는 그림자인 줄 모르고

 내부는 언제나 번잡했다


 찬란했던 수련 군락도 다정했던 청둥오리떼도 한때였다


 시에서 “호수”는 주류의 세상에서 밀려난 것들이 들어오는 외곽의 세상이자, ‘너’의 “내면”이다. “수면이 온통 문이라서”라는 말과 같이 이 호수의 표면은 물로 이뤄져 있기에, 누구나 들어오기 쉬운 ‘열린 문’과 같다. 하지만 화자는 이 ‘열린 문’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으며, 오히려 “호수는” “폐쇄하고 싶었을 것이다/일년 중 며칠이라도” “문을/닫아걸고 싶었을 것이다”라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호수에는 “비”가 오고, “바람” 불고, “빵 부스러기”나 “쓰레기”가 던져져도 “막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막무가내로 호수 안에 들어오고, “새와 구름과 측백나무”까지 몸을 던진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 밀려난 이 존재들은 “투신”하듯 ‘너’의 “내면”에 들어와 박히고 때문에 “호수”는 언제나 평온하지 못하며 “물결치기 바빴”다.

 이렇게 밀려난 존재들, 사회적 소수자들은 사실 ‘너’의 삶에서 ‘너’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은 아니다. 우리가 나 아닌 사회적 약자들의 소식을 어딘가에서 “다큐멘터리”로(<이 세상에 없는 것>), “뉴스”로(<에튀드>), 입담으로(<에튀드>  “할머니가 말한다/전쟁 중에서 결혼하고 피난 중에도 아기를 낳았다고”) 전해듣는 것처럼. 이 존재들은 ‘너’에게 “얼비치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이야기, 실제 존재가 아닌 “그림자”일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림자라도 ‘너’의 내부는 “언제나 번잡”해진다. “한때” “찬란했던 수련 군락”과 “다정했던 청둥오리떼”의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은 사라진 지 오래며, ‘너’는 외로운 “그림자”들을 너무 많이 마주했고 그것들을 ‘너’ 자신 안에 모두 담았다. 

 해당 시가 시집의 마지막 시편인 것을 고려했을 때, 시에서 말하는 ‘너’는 곧 김이듬 시인이자, 독자이고, 시집에 등장했던 시의 상황을 모두 겪은 화자라고도 유추해볼 수 있다. 그렇기에 호수에 던져지는 것들과, 비치는 그림자들은 세상에서 비주류이고, 방치되고, 열악한 환경에 노출된 사회적 약자들인 것이다. 


 문득 호수는 고마웠을 것이다

 몰아닥친 한파가


 그날 밤 호수는 얼어붙었다

 이튿날 폭설까지 쏟아져 호수는 새하얗게 뒤덮였다


 바깥에서는 전혀 호수 내부가 보이지 않았을 때

 호수는 투명하게 내면을 응시하는 듯했다


 비로소 무문관이 되어

 자기 안에 서식하는 침묵을 보았다

 스스로 수질을 살폈고

 시꺼매진 바닥에 기겁했다


  세상의 어둡고 슬픈 면을 오래 바라보며 너무 괴로워한 사람은 감정의 과부화를 막기 위해 무감각해지기도 한다. ‘너’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몰아닥친 “한파”에 “고마”워하며, 수면의 ‘열린 문’을 얼리고, 그 위에 호수가 있지 않았던 것처럼 ”새하얗게 뒤덮“는다. 그 모습은 세상의 이면에 상처받아 스스로의 내면을 걸어 잠그는 사람, 혹은 무의식적으로, 본능적으로 세상과 자신의 연결을 단절했을 때 이를 다행이라 여기는 상처 입은 사람 같다. 하지만 ‘너’는 거기서 머물지 않았다. 세상의 “그림자”까지 예민하게 감각하던 시선은 바깥으로 향한 “문”이 꽝꽝 얼어 닫힌 순간, 자신의 내면인 “호수”로 향하고, 그 안을 “응시”할 수 있게 된다. 미처 말하지 못한, 세상이 들어주는 목소리가 되지 못했던, 호수 아래 가라앉은 비주류의 이야기들은 “침묵”으로 차곡차곡 쌓여 “시꺼매진 바닥”과 “기겁”스러운 “수질”로 썩어갔다. 

 삶 속에서 우리는 세상의 슬프고, 외롭고, 방치된 이들의 이야기를 많이 접한다. 그것을 “무신경”(<봄날 정경>)하게 여기거나 한 번 듣고 쉽게 잊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이를 자신의 일처럼 받아들이고 깊이 생각하게 되는 사람도 존재한다. ‘너’는 세상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럴 수밖에 없는 후자의 사람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괴로웠다. 하지만 반강제로 문이 닫힐 때, 그는 타인을 “살폈”던 다정한 시선을 스스로에게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다


 걸어왔다

 너는

 저만치 호수를 밟고


 그는 많은 일을 겪었지만, 스스로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림자”와 “얼어붙”은 “호수”에 얽매여 멈춰서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직시했고, 그 슬픈 내면의 호수를 그저, 걸어왔다.

 그것은 어떻게 이성적으로, 효율적으로, 요령껏 한 일이 아니다. “기억나지 않”을(<입동 무렵>) 정도로 힘들게. 하얗게 “잊어”버릴(<봄날 정경>) 정도로 묵묵하게 그냥, 걸어온 것이다. <봄날 정경>에서 “숲”과 “마을”이 “불타는” 힘든 상황을 경험한 뒤,  “삶을 각오하지 않”고서도 살아가는 화자처럼 말이다. 

 삶을 그저 걸어가는 태도는 <동경 게스트하우스>에서도 나타난다. “문 앞 침대에서 부스럭거리던 노인”이 문득 화자에게 묻는다. “이봐, 여길 나가면 어디로 갈 건가?” 그 대답에 화자는 “아무도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생각하면서도 “저는 갈 데가 있습니다”라 하며 이 너머를 기약한다.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 의심하면서도 살아가고 있다.

 그런 시편들을 지나, 마지막 시 <입동 무렵>에 선 ‘너’가 보인다. 썩은 바닥의 호수와, 바깥으로 열린 문을 걸어 잠그는 겨울의 “폭설”을 “저만치 밟고”서, 또 다른 방식으로 “너는” ‘너’인 채 “걸어왔”다.

 김이듬 시인은 이렇듯 삶을 각오하지 않고,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살아가야 하는 비주류의 사람들, 사회적 소수자들을 바라본다. 그들과 같은 위치의 시선을 보내며 그들의 삶을 담담히 써내리고 있다. 



     2. ‘끝에서’ 시작하기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의식주 중 하나인 주거, 집. 집은 그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 꼭 필요한 것이며,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든든한 “피난처”이자(<불탄 집 아래>)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 준다. 단순 몸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을 넘어 정신적 지주 역할을 맡아 주는 것이다.

 3부에서 전반적으로 등장하는 “집”과 집이 “불탄”다는 이미지는 사전적 의미의 화재민 뿐만 아니라 사회의 관심 안에 속하지 못한 채 힘겹게 살아가며, 마음 둘 곳 없는 사람들의 상황을 의미하기도 한다. 1, 2, 4부에 비해 3부에서는 노골적으로 피해 입은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의 이미지를 그려 가기 때문이다. 

 1, 2, 4부에서는 부정적 이미지가 3부에 비해 적으며, 나타나는 부정적 이미지들도 대체로, 화자의 감정과 깊이 이어지지 못하는 등 시의 지배적인 정서를 휘어잡진 못한다. 1부의 <에튀드>에선 “폭풍과 기근, 역병”이 등장하지만 “아무것도 깨지지 않았다”고 하며 부정적 이미지가 금방 사그라든다. “전쟁”, “피난” 등의 단어 이후에도 바로 “결혼”과 “아기를 낳았”다는 말, “살아 있으면 만난다”는 등의 미래를 기약하는 밝은 표현이 뒤따른다.


 리앤: 너무 귀엽지 않니? 쪼끄맣고 말라서 귀여워. 마닐라에서 왔대.

 조: 일은 잘해? 귀엽긴 하다.

 제이든: 쉿, 듣겠다.

 리앤: 쟤는 한국말 전혀 몰라. 그래서 편하잖아. 맘대로 얘기해도 돼.


 (......)


 일터에서 너는 영어만 쓴다. 너는 편하고 귀여워야 하니까.


 (......)


 다소 종속적이며 위협적이지 않은 대상에게도 “아, 귀여워” 그런다고. 내가 어디서 읽은 내용을 들려줬다.


 -귀여운 여인 


 “마닐라”에서 온 “가사도우미”인 “너”가 겪는, 은근한 무시와 미묘한 평가의 불쾌함 또한 ‘너’의 이야기로 그칠 뿐. 화자는 그것을 직접 체험하거나 진심으로 공감하진 못한다.

 2부의 첫 시인 <첫눈은 매년 첫눈이 된다> 또한 그렇다. ‘나’의 “가방 안에는 새 마스크 한 장이 있”었음에도 화자는 “그것을 얼른 꺼내어” “승차를 거부” 당한 “그에게 주지 못”한다. <풀은 노래한다>의 “제초”되는 “풀”과 “잡초 같다는 얘길 듣곤”하는 “너”, “숨을 데가 없어”져 쪼아 먹히는 “지렁이” 등의 이야기는 2부에서 가장 부정적인 정서를 전달하는 시라고 할 수 있지만 사회적 약자인 인물들이 직접 등장, 언급되는 3부에 비하여 비유적이다.

 4부에서는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가는 <동경 게스트하우스>,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는 <상주의 지혜>, 아버지의 유해를 모신 “납골당”에 방문하는 <송년> 세 편의 시가 마치 하나로 이어진 이야기인 듯 읽히며, 연속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화자가 직접 경험하며 감정을 이입하게 되는 부정적 정서가 시를 지배하긴 하나, 이 또한 3부에 비하여 4부에선, 끝나지 않을 듯한 슬픔과 비애와 고통을 얘기하는 시의 수가 압도적으로 적다. 가족이 가족을 살해하는 등의 끔찍한 이미지들이 연달아 등장하는 <빌러비드>도 충격적인 이미지 속 화자의 목소리를 잘 들어 보면 “가족을 죽이지 마세요”, “아버지, 산 사람은 살 수 있다고요”, “도망치세요, 사랑하는 아버지”라 말하는 등 괴로움 다음의 새로운 미래를 기약하고 있다.

 반면 3부는 희망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시편이 부정적 정서가 장악하는 다른 시들에 비하여 훨씬 적다. 절망적인 현실에서 벗어날 도움을 받거나 줄 수 없으며(<봄날 정경>), 아이에 대한 책임을 여성 혼자 지고(<그때보다 지금이 나은지>), 세상에서 소외당하는(<오지의 건축물>) 등의 사회적 약자들의 모습을 반복해서 그려내고 있다. 고통과 힘듦을 견뎌내는 부정적 상황의 화자가 3부 대부분의 시편들을 강하게 끌고 가고 있다.

 이쯤에서 시집의 제목을 한 번 보자.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에서의 “미움”이 어디를 말하는 건지 알 것 같이 느껴진다. “타들어 가는 해마저 저주하다가/넘어져 울”게 되는(<봄날 정경>) 감정의 이름은 무엇일까? 절망적인 상황을 버티는 사회적 소수자들, 사회적 약자들의 삶에서 하나의 감정을 떼어낼 수 있다면 ‘세상을 향한 미움’이 보일 것이다. 3부를 읽어가는 동안 독자인 우리는 시집 제목의 “미움”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즐거운 사람에게 봄날이 오면>과 <불탄 집 아래>의 순서를 바꾸어 읽으면 그것이 더 명확해진다.

 <불탄 집 아래>의 ‘나’는 “그을릴 새도 없이 불타올라/산산이 부서진 세계”에서 “나의 피난처였던 해안 낭떠러지 끝 집”을 잃은 상태이다. 그런 ‘나’를 “땅(대지, 가이아)”인 ‘너’가 바라보며 “타인의 파멸에 상대적으로 쾌감을 느끼는 사람”처럼 “마구 웃”는다. 하지만 사실 “괄호 안에 묶”인 ‘너(땅)’의 대사는 “확실”히 “땅이 말”한 것은 아니다. 그저 집을 잃은 ‘나’가 그렇게 “지레짐작한” 것이다.

 

 타인의 파멸에 상대적으로 쾌감을 느끼는 사람을 쳐다보듯

 나는 땅을 치며 말했다

 그때 땅이 꿈틀거리며 마구 웃었기에

 하려던 말을 괄호 안에 묶었다


 (......)


 확실하다

 땅은 말하지 않았다


 잿더미 속을 뒹굴며 나는

 미쳐 가며

 아무도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우긴다

 지레짐작한다


 -<불탄 집 아래> 


  그렇다면 난해하게만 읽히던 3부의 첫 시, <즐거운 사람에게 봄날이 오면>도 조금씩 이해된다. 두 시의 화자를 같은 인물로 두었을 때, “더 많은 생명체”가 생동하는 “봄날” 모습과 반대로 화자의 집은 불탔으며, 화자는 힘겨운 계절을 보내고 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에 거의 “미쳐” 내가 이렇게 불행한 이유는 누군가 나의 “집”이 “불탄” 것을(<불탄 집 아래>) 바라고, “좋”아하는 게 아닐까 여기는 중인 것이다.

 한계까지 몰린 3부의 “세계”는 “산산이 부서”져 “겹겹의 잿더미"만(<불탄 집 아래>) 남은 듯 위태롭다. 모든 “집”이 “전소되어” “잿더미”만 남아 있는 “허허벌판”의 자리(<즐거운 사람에게 봄날이 오면>). 그러나 “땅(대지, 가이아)은/집이 불타서 좋기만 할까 나를 비웃고 있을까”?(<불탄 집 아래>)라는 질문이 남는다. 시는 미움으로만 향하지 않고, 새 방향으로 스스로 시선을 돌린다. 이라고 생각되는 그 자리에서 길은, ‘또다시 시작된다’는 시집의 단단한 목소리가 마침내 드러난다.



 <입동 무렵> 시에서 ‘너’가 자신을 들여다보는 계기는 시에 등장하는 “비로소 무문관이 되어”라는 구절에 이르러 알 수 있다. 무문관은 ‘문이 없는 관문’이란 불교 용어로, 극한의 수행 처소를 부르는 단어이자, 스님들이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작은 방에 홀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나오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 방식을 뜻한다.

 이런 단어의 의미에 따르면 <입동 무렵>에 나오는 “호수”의 “문”이 “한파”에 의해 닫혔을 때, 썩은 바닥과 함께 남아 있던 ‘너’가 ‘극한의 처소’에서 자신의 내면이 얼마나 곪아 있었는지 살피고 깨달을 수 있었다는, 그 과정이 수행과 같았음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무문관”의 의미는 이것이 다가 아니다.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에는 정해진 형상이나 일정한 길이 없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 “호수”의 수면, 즉 “문”이 닫혔을 때, 물리적으로 들어가거나 나올 수 있는 입구의 성질을 공유하는 “문”은 아니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문”이 열렸다는 앞선 해석이 강화된다. 문을 닫는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단절, 끝을 의미하지만 이 시에서 ‘문을 닫다’는 행위는 동시에 자신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새로운 형태의 문’을 ‘열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단절’은 ‘열림’이 되고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김이듬 시인의 이 시선을 붙잡고서 시집을 읽다 보면, 과연 이것이 시집을 관통하는 요소들 중 하나라는 듯 몇 몇 시편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새벽은 더 이상 푸른 절벽이 아니고/밤은 더 이상 미완의 종말이 아니다”라는 <에튀드>, “시위 ”이어서 “광화문 광장을 지나갈 수 없었”던 “버스”가 “매번 정차했던 버스 정류장에 멈추지 않”아 “언제나 똑같았던 노선을 이탈”해 “다른 길로 달”렸지만 “재밌”고 “해방된 것 던 “기사님”의 이야기가 담긴 <패터슨에게>, “끝인사 사양하고 가볍게 포옹하리라” “마지막 헤어짐이 마지막 만남이 되겠지” 말하는 <애프터눈 티>, “팔려갈 위기에 처해도” “빚 때문에 남은 가족이 고통 속에 살게” 되어도 “다리와 등, 머리, 눈, 손, 신장, 자궁 그리고 혀까지 망가”져도 “작업실이 불”타고 “빚 때문에 붙들려 가”고 “재투성이”로 살아도 “산 사람은 살 수 있다”고 말하던 <빌러버드>.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라고 생각했던 자리에서 새로운 길이 열린다는 것. 그것은 어느 세상에서나 통하는 ‘진리’와 같으며, ‘정해진 형상이나 일정한 길 없’는 ‘문’과 같다는 “무문관”의 단어와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끝이라고 여겨진 문, 닫힌 문, 절망적인 현실은 포기하지 않았을 때 “무문관”의 형태로 새 길을 열어준다.

 그럼 이제 시집의 가장 첫 번째 시를 들여다 보자.

 

 아버지가 차던 오메가 시계인데

 바람 부는 골목에 서서 네이버 사전을 찾아보니

 오메가란 그리스 말로 끝, 종말이란 뜻이라고 나온다


 (......)


 나는 약이라고 부르고 시계방 주인들은 알 혹은 배터리라고 부르는 이 작고 둥근 것을 매만진다 다 닳은 세계를 손바닥에 놓고 본다


 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의 차이는 뭘까

 모두 끝났다고 말해도 될까


 -<이 세상에 없는 것> 


 화자는 “아버지”의 “오메가 시계”를 들고 “시계 가계 주인”에게 찾아간다. “배터리”가 고장났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약(배터리)을 구”하고 싶었으나 “이제 어디서도 구할 수 없을” 거란 대답만 듣고 나온다. “오메가”란 “그리스 말로 끝, 종말”이란 뜻이다. 그러나 화자의 생각은 다르다. 모두가 고칠 수 없다고 말한 시계, 이름마저 “끝”이자 “종말”인 시계의 고장난 “배터리”를 두고, 화자는 “모두 끝났다고 말해도 될까”, 완전한 종말”을 생각해본 적이라곤 없는 사람처럼 말한다. 끝에서 끝이 아닌, 다른 시작을 바라보려는 시(<이 세상에 없는 것>)가 “비로소 무문관이 되”는 시(<입동 무렵>)로 마무리 되는 시집인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더 있다. 아버지의 유품인 “시계”는 “세계”와 형태도 발음도 비슷하여, 시 속에서 좋은 운율을 만들어 낸다. 언뜻 보았을 때 다 닳은 시계는, 다 닳은 하나의 세계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이를 넘어 한 가지 떠올릴 점이 있다면 “시계”의 본래 성질이다.

 “시계”는  인간의 기준에서 만들어 낸 ‘시간을 표시하는 도구’이다. 즉, ‘시간’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시계”가 고장나도 계속 흘러간다. 그저, 묵묵하게. “세계”는 “시계”가 고장났다고 해서 멈추지 않는다. 흘러간다. 그에 따라 계절은 다시 돌아온다. 그저, 묵묵하게. 멈추지 않고 계속될 뿐이다. “”은 진짜 끝이 ‘아니다’. <입동 무렵>의 ‘얼어붙은 호수’를  “걸어왔”던, ‘삶을 그저 걸어가는 사람’처럼 말이다.



     3.  ‘원래 없었던 존재’ 바라보기


 서두에 말했던 이야기를 떠올려보자. ‘빈 방’은 텅 비어 있지 않다. ‘얼어붙은 호수’는 텅 비어 있지 않다. 사물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빈 방’은 가득 찬 방이며, 눈 덮인 호수 내부엔 수많은 ‘비주류’가 고요히 썩어가고 있다. 주류의 시선에서 밀려나 “원래 없었던 것” 취급되는 존재들. 사회적 소수자들.


 “이 골목에는 출생 신고하지 않은 아이들이 많습니다.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고 나이가 차도 학교에 가지 않습니다. 유령처럼......“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아시아 저 골목은 여기와 닮았다 세상에 없는 사람들이 몸을 거래하는

 나는 약이라고 부르고 시계방 주인들은 알 혹은 배터리라고 부르는 이 작고 둥근 것을 매만진다 다 닳은 세계를 손바닥에 놓고 본다


 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의 차이는 뭘까

 모두 끝났다고 말해도 될까

 이 세상에 원래 없었던 것 같은

 그것을 찾아 나는 어딜 이토록 떠도는 것인지


 -<이 세상에 없는 


 시집의 첫 시에서 이미 말하고 있었다. 사회의 보호 바깥을 전전하는 ‘비주류’의 이들을 말이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보호받지 못하고, “유령처럼” “세상에 없는 사람들” 취급되고, 사회의 시선 아래서조차 몸 둘 데 없는 ‘사회적 소수자’들. 그러나 여기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정말 존재’한다. 이토록 가득 차고, 썩어 가라앉아 있기도 한 세계의 일부를 어떻게 ‘깨끗이 비워져 있다’고 설명할 수 있을까.

 “몸”은 “배터리”와 같다. “시계”가 작동한다는 것은 ‘실존하는 시간’이 ‘눈에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에 없는” 취급을 받는 사람들은 ‘실존하는 자신’이 ‘눈에 보이도록’ 하는 무언가, “몸”, 사회가 원하는 ‘껍질’을 찾아 헤매고(“거래하”고) 있다.

 이 시에서 “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은 같다. 실제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에도 “끝났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다 소모된” “배터리”를 가진 “시계”와 실제로 ‘존재’함에도 “끝났다”는 말을 듣는 주류의 시선에서 “사라진” “몸”을 가진 “사람들”인 것이다.


 하지만 김이듬 시인은 계속 얘기한다. “그것을 찾아 나는 어딜 이토록 떠도는 것인지”. 그 말대로 해당 시 이후의 시집은 온통,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사회적 소수자를 찾아 그들의 삶을 이야기하며 ‘떠돌아’ 다닌 길과 같았다.



     4. ‘미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랑했다’는 것과 같다

  

 모두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 늘, 시작되는 것을 찾아내는 김이듬 시인의 시선은 너무나도 다정하고 슬프다. 시집의 3부에서 유추해낼 수 있는 “미움”의 정서. 세상의 그늘진 부분을 바라볼 때 끓어오르는 “미움”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는  그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시작을 말하는 시집을 쓸 수 있었을까. 이 고통은 미움으로만 이겨냈다곤 설명할 수 없다. “내면”이 썩어드는(<입동 무렵>) 괴로운 바라봄을 끝까지 이어가고, 무너지지 않은 채 지속하여 “걸어”온(<입동 무렵>) 동력을 어떻게 미움뿐이었다고 말할까.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미움이 없어 분노가 없어 관심과 눈치도 없이 봄이 지나갔다 지나고 보니 봄이었다 올리브유로 비누 만들기만큼 쉽게 지나갔다


 (.......)


 나의 집은 황무지가 되었다 풀들이 불에 탔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나는 벽돌만 한 비누를 집어 던지지 않았다

 

 자연은 좋겠다 폭풍이든 초대형 산불이든 지진이든 일으켜도 자연을 벌하지 않으니까 대부분 인재 사람의 잘못이라고 말하니까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유학 가기 전엔 매일 다퉜던 동생을 사랑하게 되었다 동생이 공원 공중화장실에서 얼굴이 벌개가지고 울면서 나왔다

 유머를 잃어버렸지만 나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을 보냈다 내 동생은 남자처럼 보이지만 여자다 키가 백팔십이고 머리를 허리까지 길렀다 이렇게 설명해 봤자 그 아주머니는 남자가 왜 여자 화장실에 들어오냐고 소리쳤다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내 탓이오라고 말하지 말라며 나는 동생을 다독였다 자연에는 암수 외에도 성이 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향기로웠다 봄이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표제작) 

 

 해당 표제작은 3부에 수록되어 있다. 3부에서 묘사하는 “봄”은 전반적으로 화자에게 절망과 고통을 주는 계절이었다. 하지만 이 시와 <초봄 대피소>만큼은 3부에 들어가 있음에도 “봄”을 부정적으로만 묘사하진 않는다. 심지어 표제작의 화자는 스스로 “봄”을 긍정적으로 서술하기까지 한다.

 <불탄 집 아래> 시의 화자는 3부의 “봄날”에 집이 탔으므로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 하지만 후엔 진술을 바꾸어 “땅(대지, 가이아)은” “좋기만 할까”, “나를 비웃고 싶었을까”라며 상황을 제대로 바라본다. “미움”이 향할 대상은 “땅(자연)”이 아니라는 인식을 간직한 채, 다음 수록된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의 시로 넘어가는 것이다. 

 본래 탓하던 이(땅=자연)가 없어진 화자는 “자연은 좋겠다” “자연을 벌하지 않으니까”라고 생각하지만, 이전처럼 누군가를 “미워하”진 “않”는다. 그러자 “한 계절(봄)”은 “비누 만들기만큼 쉽게 지나갔”으며, “미워하지 않”았기에, “한 계절(봄)”을 지나가며 응어리진 감정의 “비누를 집어 던지지”도 “않았”다.

 기뻐야만, 웃어야만, 여유가 있어야만 “사랑하”는 중인 것은 아니다. 온 마음 가득히 “미워”하던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미움을 극복할만한 더 큰 힘, 더 크고 긍정적인 “사랑”이 있었다는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이었기에 미움을 넘어 기쁨을 찾을 정도로 여유가 있진 못했지만, 그래서, “유머를 잃어버렸지만” “아무도 미워하지 않”으며 분명 “사랑하”고 있었다.


 ‘간성’이라는 것은 선천적으로 염색체, 생식샘, 성 호르몬, 성기 등에서 전형적인 여성 남성의 신체 정의에 규정되지 않는 성징을 가진 사람이다. 이 때문에 여아 또는 남아로 신고되었으나 자라면서  호르몬 등 신체 특징이 신고된 성별과 다르게 드러나는 경우도 존재한다.

 “남자처럼 보이지만 여자”인 “동생”은 “키가 백팔십”인 등 일반적인 남성과 비슷한 체형을 지녔지만, 여성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외형 고정관념인 “머리를 허리까지 길렀”다는 구절에서 그가 사회 속에서 여성으로 신고되어 자랐구나를 유추해볼 수 있다. “자연에는 암수 외에도 성이 있”다. 인간이 정의한 “여자”와 “남자”의 단어로 규정할 수 없는 생식 특징 말이다. “아주머니”는 “남자처럼 보이”는 “동생”에게 “남자가 왜 여자 화장실에 들어오냐고 소리쳤”지만 그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화자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을 지냈다. 그 안에서 “봄”의 “향기로”움까지 느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사랑”의 힘이었다.

 시집의 제목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이다. 처음 이 제목을 본 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지나”가게 된 “한 계절”은 도대체 무엇일까 하며 “한 계절”의 의미에 집중했었다. 하지만 이 시집을 다 읽고 난 지금은 “한 계절”이 무엇인지 중요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봄”은 분명 힘들고 괴로운 시간이었으나, 그것은 “봄(자연)”의 잘못이 아니었다. “봄”은 그저 흘러가는 시간이었으며, 그 시간 속에서 화자는 “사랑” 또한 깨달았다. 내게 혹독했던 “한 계절”은 봄 아닌 무엇이든 될 수 있었기에, 내게 사랑을 일깨워준 계절 또한 봄 아닌 무엇이든 될 수 있었기에 “한 계절”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무슨 계절이든, 어떤 일이 있었든.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지나갔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지나갔다”고 말할 때 보통은 그 ‘지나간 것’에 신경을 쓰지만, 시집을 읽은 우리는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자리, 이미 도착한 그 계절 너머의 ‘다음 계절’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 시편인 <입동 무렵>을 지나쳐 마주한 겨울. 여기서도 우리는 결국 괴로워하고, 사랑할 것이다. 겨울을 지나가면 봄이 오고, 그럼에도 삶을 묵묵히 걸어갈 것이다. 

  또 상처를 받을 것이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계절을 겪어내다 보면. 주류의 시선은 비주류를 지워낼 것이고, 우리는  시집의 끈질긴 시선처럼 그들을 찾아내기 위해, 그들을 내면으로 받아들이며, 괴로울 것이다. 그러나 “미워하지 않”을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과 아픔 속에서도 “미워하지 않”을 만큼 “사랑”하기 때문이다. “살아남”았(<초봄 대피소>)으니까. 그리고 “반드시 손반죽해야 하는 이 피자처럼 내 삶의 두께도 내 손으로 만들어야 하기에”(<마르게리따>), “도망치세요”라고 “아버지”의 등을 떠미는 이유는 괴로운 삶과 죽음의 무게를 재고 있는 아버지라도 “사랑하“기(<빌러비드>)때문에. “여성”, “남성”의 한계 끝에서 새 길을 찾는 마음은 ‘미워하지 않는 사랑’(<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이니까.

 



 마을 사람들이 대피소에 모였다


 초봄 철창 너머로 바다가 보였다

 대형 풍력 발전기도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냐고 물었으나

 돌아보면 뭐하냐는 답변과 헛웃음뿐


 바람 부는 언덕 절벽에

 불탄 집을 두고 피신한 이들

 대부분이 노인


 지금이 가장 불행한 시절일 것도 같은데

 남은 날들이 별로 길 것 같지 않은데


 슬픈 농담인지

 고맙다

 행복하다고 한다


 살아남은 목숨들은

 생애 깊이 사무친다


 속절없이

 사랑한다


 -김이듬,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초봄 대피소>







*순서대로 <에튀드>, <귀여운 여인>, <덜 떨어진 사람>, <첫눈은 매년 첫눈이 된다>, <좋아하는 일>, <똑같은 식물이 아니다>, <조감도>, <나의 이방인2>, <풀은 노래한다>, <초봄 대피소>, <여름 야유회 준비>, <봄날 정경>, <오지의 건축물>,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넌 아직 재밌니>, <마르게리따>, <폭우가 우울을 부르지 않을 때>, <상주의 지혜>, <사월>, <빌러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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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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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빈
  • 2026-07-30
비극 속에서 타인과 춤추는 것

1. 삶은 부조리다 태어남은 선택할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선택할 겨를없이 내던져진 삶은 애초에 부조리라고 할 수 있다. 살면서 고통과 쾌락을 둘 다 얻을 수 있고 어찌 보면 고통보다 쾌락을 더 많이 누리는 삶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러한 도박에 불참할 기회가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이듬의 시집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의 1부 중 <한여름 저녁 한 시간 반>에서 화자는 누군가가 난데없이 맡긴 짐을 떠안게 되고 이 때문에 버스를 놓칠 상황에 놓인다. 그리고 화자는 자신 또한 이 짐처럼 누군가 &lsquo;세상에 맡겨 두고 찾아가지 않은&rsquo; 것 같다고 생각한다. 화자의 이런 생각은 선택의 기회 없이 탄생함을 인식한 것이다. 또한 짐을 맡기고 찾아가지 않은 건 사실상 짐을 버린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화자가 삶이란 부조리 속에서 내적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이미 태어났고, 어떻게든 살아가야 할 텐데, 그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 부조리한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타인이다. 다른 이가 한 사람 인생의 의미가 된다. 그리고 김이듬은 타인을 내면화하는 걸 그 의미로 봤다. 김이듬에게 타인은 내면화가 가능한 존재다. 2부의 <나의 이방인 2>에서, &lsquo;너&rsquo;는 화자인 &lsquo;나&rsquo;와 대화할 수 있지만, &lsquo;탄식을 주워섬기는 너는 내 안의 방랑자&rsquo;, &lsquo;내게도 절친이 있다고/텅 빈 의자 위의 네가/나였음을 증명할 수 있을까&rsquo; 같은 문장들은 &lsquo;너&rsquo;가 &lsquo;나&rsquo;에게 타자이면서도 내면화되는 대상이라는 걸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lsquo;나&rsquo; 대신 분노하기도 하는 타인이지만, &lsquo;나&rsquo; 안에서 내면 안에서 &lsquo;나를 감시&rsquo;하기도 한다. 이는 &lsquo;나&rsquo;는, &lsquo;우리는 불화한다&rsquo;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 화자는 &lsquo;너&rsquo;와의 틈을 인식하고 갈등하는데, (내면 속 &lsquo;너&rsquo;가 &lsquo;나를 감시&rsquo;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자기검열의 주체로 &lsquo;너&rsquo;를 삼고 있는 것이다. <한여름 저녁 한 시간 반>에서 화자는 다른 사람이 맡긴 짐 때문에 환승 버스를 타지 못하고 터미널에 계속 남는다. 시 속에서 화자가 누군가 맡긴 짐으로 스스로 생각되는 것처럼 &lsquo;다른 사람&rsquo;도 세상에 맡겨진 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다른 사람이 화자에게 짐을 맡긴 건 화자가 그 사람을 내면화했다는 은유이다. 한 사람에게 원했든 아니든, 내면화된 타인은 삶을 변화시키지 않고 유지할 의미라는 것이다. 2. 이해할 수 없는 타인 그러나 타인은 온전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당신이 타인에게 의미라고 해도 타인의 삶은 당신이 의미가 아닌 부분에서 계속해서 변화할 것이고 그것은 당신이 의미인 부분을

  • 금안백
  • 2026-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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