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는 동력-『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를 읽고
- 작성자 양현서
- 작성일 2026-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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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수 261
이번 글틴의 여름방학 집중독서의 진행자 김태선 평론가는 내게 이런 말을 전했다. 과거 김이듬 시의 원천은 깊은 '증오'였다고. 이 점은 14년도에 출판된 김이듬의 시집 『히스테리아』의 뒤표지 글에서도 유추해낼 수 있다.
'뛰어들려 했다. 파도 속으로, 3백여 명의 피바다로, 살아남아서 광란하는 보통 사람들의 삶에 투신하여 단 한 편이라도 써야 했다. 부활의 시, 복수의 시.'
-『히스테리아』 뒤표지 글 중
대조적으로 2025년 12월 12일에 1판 1쇄가 발행된 이번 시집은 김이듬의 현재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중의 위치에서 '복수의 시'를 쓰겠다는 과거 시인의 강렬한 다짐과 대비되는 시집 제목이 눈에 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과연 11년의 시간 동안 김이듬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또 김이듬의 시 쓰기의 원천이 뜨거운 증오감에서 어디로 옮겨간 것일까.
표제작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에서 그 변화를 유추할 수 있다. 가령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자연은 좋겠다 폭풍이든 초대형 산불이든 지진이든 일으켜도 자연을 벌하지 않으니까 대부분 인재 사람의 잘못이라고 말하니까' 등의 구절에서 화자는 탓할 것을 찾지 못한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피해를 가했기 때문이다. 자연에게는 인간과 같은 의도와 악함이 없기 때문에 이를 증오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우리는 폭염으로 돌아가신 분들을 불쌍해하지, 태양을 비판하지 않는다. 아니, 비판하지 못하는 것에 가깝다. 이처럼 자연의 횡포는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고, 시를 쓰는 시인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4부에서 등장하는 아버지의 사망(을 암시하는) 시편들이 그렇다. 죽음은 자연의 탓이다.
조금 뜬금없다고 느낄 수 있는 '내 동생은 남자처럼 보이지만 여자다', '자연에는 암수 외에도 성이 있다'쯤의 문장에서는 아직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는 그녀의 자연스러움을 존중하지 않는 마음이 남아 있다. 다양한 성 스펙트럼이 존중받지 못하는 건 오로지 인간이라는 종에서만 그렇다. 이 지점에서 김이듬은 혼자가 된다. 대중을 위해 자연을 위반하는 방법이 자연스럽다고 수용되는 생식에 대한 거부라면 그것은 대중들에게 적대시 당한다. 하지만 그녀는 자연을 인재라고 말하고 싶어 하진 않는다. 책임과 의무가 없는 자연의 일을 인간은 평가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김이듬은 이 재해 속에서 시적 트랩에 빠져버린 샘이다. 따라서 이 표제작은 지금의 김이듬이 처한 상황과 문제점을 직시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시에서는 그 문제의 해결 방법을 제시한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이 구절은 시집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녀의 시 쓰기의 원천이 증오가 아니라도, 사랑과 회복의 방향으로 뻗힐 수 있음을 밝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가, 3부에서 마을에 난 화재나 4부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했을 때에도 시인은 담담히 시를 써내린다. 그것이 증오에서 기반하지 않았다-이성적인 사고방식으로 흘러간다-는 점에 집중해 보자.
...
땅(대지, 가이아)은
집이 불타서 좋기만 할까
나를 비웃고 싶었을까
확실하다
땅은 말하지 않았다
잿더미 속을 뒹굴며
나는 미쳐 가며
아무도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우긴다
지레짐작한다
-「불탄 집 아래」 중
땅의 비웃음을 들은 화자는 우선 대지를 증오한다. '뒤적거리던 작대기를 멀리 내던지며 바닥을 친다'. 그러나 땅은 말하지 않는다. 자연은 말하지 않는다. 자연은 조롱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김이듬은 벙찐 채로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을' 보내버린다. 4부에서 보이는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시 중에 하나를 더 보자.
폭우 내리던 밤,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작은아버지가 화환을 눈여겨 세어보셨다. 나를 돌아보았고 아무 말 없으셨다.
...
내일 아침 열 시에 아버지 발인한다. 밤에 장례식장을 나와 반달 보며 서 있었다. 슬픔보다 고단함을 크게 느끼는 내가 한심했다. 작은아버지가 담배 피우고 있었다. 그는 나한테 소복이 잘 어울린다고 했다. 그리고
상주가 꽃 배달 업체에 적당한 화환을 주문하고 리본에 쓸 문구를 알려주는 방법도 있다고 했다. 다음에는 꼭 그러라고 했다. 비바람이 찼다.
-「상주의 지혜」 중
이 시를 중심으로 4부의 중심 사건은 아버지의 죽음이다. 아버지가 죽은 상황에서 화자(김이듬의 화자)는 장례식장을 엎지 않는다. 또는 꺼이꺼이 울지도 않는다. 한을 풀지도 않는다. 다만 소복이 잘 어울린다는 말을 듣거나, 다음 장례식 때는 꼭 할 만한 일을 예비한다.
이런 변화가 시사하는 점은 이것이다. 김이듬은 증오할 수 없는 것을 지나친다. 그것이 최선의 처사이기 때문이다. 미워할 수 없는 것을 미워하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유의미한 피해를 입히기 마련이다. 이런 피해를 완전히 무시할 순 없을 것이다. 손상이 있다면 김이듬의 시는 이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친구가 나를 툭툭 치며 마구 구겨지고 더러웠던 내 마음을 밟는다. 커다란 대야에 넣어 밟아 빠는 흰 광목천처럼 나는 너의 색깔을 담을 준비가 되었다. (「쪽에서 쪽빛을 얻기까지」중), '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의 차이는 뭘까/모두 끝났다고 말해도 될까/이 세상에 원래 없었던 것 같은/그것을 찾아 나는 어딜 이토록 떠도는 것인지 (「이 세상에 없는 것」 중)
'이 세상에 원래 없었던 것 같은' 것은 논리적으로 세상에 있어야만 한다. 사라진-손상된-것의 가능성을 포착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회복의 첫걸음이다. 김이듬은 '시를 켜'서 '절벽'을 본다. (시인의 말 중) 이 지점에서 그녀가 갈등 앞에서 고작 시를 쓰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사람으로써 그것이 최선의 방식이며, 그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시인의 의무이다.
이렇듯 시 쓰기의 원동력이 변하는 지점이 흥미롭다. 그것은 세월이 흐르며-지나가며- 생기는 시인의 원숙한 변화이기도 하다. 시 쓰기의 방법을 천착시키지 않고 상황에 맞춰 끊임없이 변이 시키는 것, 좋은 시를 쓰려면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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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서문에 시가 하나 있다.오래도록 어둡고우울한 음악을 들었다그러다 거대한 불에 휩쓸렸다올해 봄날은 잿더미암흑세계였다생체발광할 수 있다면차가운 빛을 만들 수 있을 텐데더듬어 시를 켰다절벽이 보였다 화자는 차가운 빛을 만들고 싶어 한다. ‘차가운‘은 불에 반대되는 빛의 속성이다. 이 빛은 불이 만든 암흑세계를 비추는 역할을 한다. 화자는 스스로 이 빛을 내는 대신 시를 켜서 빛을 낸다. 다음은 시 ‘봄날 정경’ 의 일부다.…불타는 숲연기가 치솟는 마을재가 된 구름은 엉겨 붙지 않는다사람들의 불 연관 비유에나는 문제를 느끼지만체액이 끓어오르거나 그러진 않는다체험하지 않은 자들의 가소로운 엄살아름다운 무신경불타는 숲연기가 치솟는 마을타죽은 사람들… 화자의 마을이 불에 탔다. 인명 피해도 있다. 불길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은 대피소에 모여 있다. 화재를 겪고 나서 담담한 모습을 보인다. 불가항력의 일 앞에서 무기력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화자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바로 그 담담해 보이는 모습조차 ’시로 표현’하는 데에서 알 수 있다. ’시를 키는‘ 것이다. 무언가를 말하려고 애쓰는 시도가 시 안에서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비춘다. 문제를 느끼지만, 체액이 끓어오르거나 그러진 않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느껴지지만, 핵심은 화자가 체액이 끓어오르지 않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걸 시로 담아낸다는 것에 있다. 에서 확연하게 볼 수 있다.…가자지구에 억류 중인 인질이나 초강진 쓰나미에 침수된 항구도시나 거대한 화산재 기둥에 관해 쓰지 않는다… 시인은 ‘쓰지 않는다‘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생각의 물꼬를 터 준다. 이 방법은 인질이나 항구도시, 화산재 기둥에 대해 쓰는 것과는 다른 효과를 가져온다. 인질에 대해 쓰는 것은 인질에 주목하게 한다. 항구도시나 화산재 기둥에 대해 쓰는 것도 각각에 주목하게 한다. 그러나 ‘쓰지 않음’ 에 대해 쓰는 것은 심리적 거리를 현저히 좁혀 ‘나’에게까지 주목하게 한다. 재해뿐 아니라 재해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비추기 때문이다. 그들이 재해를 대하는 모습, ’쓰지 않는’ 모습을 보며 독자는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얻는다. 또한 화자는 과격한 감정표현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몇 걸음 떨어져서 재해를 이야기한다. 독자는 화자를 가깝게 느끼며 자신과 겹쳐 보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본인과 관련지어 생각하기에, 직접적으로 쓸 때보다 독자가 현실감 있게 재해를 의식할 수 있다. 시인이 이런 방식으로 시를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화재의 영향이라고 짐작해 본다. 어떤 문제 앞에선 미움의 힘이 강하다. 왜 미운지를 말하면서 대상이 가진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고, 얼마나 미운지를 말하면서 나의 생각을 보여줄 수 있다. 독자에게도 힘을 가져다준다. 독자는 시를 따라가면서 화자의 감정에 이입하려고 한다. 동시에 화자가 지닌 문제의식을 살펴볼 의욕을 준다. 그러나 미움으로는 불을 이길 수 없다. 불은 미움을 받지조차 못한다. 애석
- 신기루
- 2026-07-30
이 시집을 읽기 전 내가 알고 있던 것은 많지 않았다. 시인의 집이 화재로 전소되었고, 그 이후 이 시집이 출간되었다는 정도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시집 역시 화재 이후의 상실과 회복을 담은 기록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화재라는 사건이 시집의 중심에 놓여 있고, 그 경험을 어떻게 견디고 지나왔는지가 주된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다.가장 먼저 읽은 것은 자서였다.> 오래도록 어둡고> 우울한 음악을 들었다> 그러다 거대한 불에 휩쓸렸다> 올해 봄날은 잿더미> 암흑세계였다> 생체발광할 수 있다면> 차가운 빛을 만들 텐데> 더듬어 시를 켰다> 절벽이 보였다처음 자서를 읽었을 때는 화재를 겪은 시인의 절망과 그 이후의 다짐을 압축해 놓은 글처럼 느껴졌다. 특히 ‘시를 켰다’라는 표현은 어둠 속에서 불을 켜듯, 시를 통해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미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생체발광’이라는 표현 역시 스스로 빛을 내고 싶다는 바람 정도로 이해했고, 마지막의 ‘절벽이 보였다’는 문장은 막막한 현실을 비유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물론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왜 ‘시를 썼다’가 아니라 ‘시를 켰다’일까. 왜 절벽은 ‘보였다’에서 끝날까. 하지만 처음에는 그 표현들을 깊이 붙잡기보다, 앞으로 읽게 될 시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장을 넘겼다.1부 ― 바깥을 오래 바라보는 시선1부를 읽으며 가장 먼저 받은 인상은 시선이 바깥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인은 사람을 관찰하고, 일상적인 풍경을 오래 바라본다. 특별하거나 극적인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평범한 장면 하나를 붙잡고 그 안에서 천천히 사유를 이어 나간다. 읽기 전에는 화재라는 사건이 시집 전체를 이끌어 갈 것이라 예상했기에 이러한 전개는 다소 의외였다. 오히려 시인은 자신이 겪은 일을 서둘러 이야기하기보다, 먼저 타인과 세계를 바라보며 자신의 시선을 가다듬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그 과정에서 나는 1부가 단순히 바깥을 관찰하는 장이 아니라, 아직 자신의 상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기 전 스스로를 천천히 위로하고 마음을 정돈해 가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화재를 외면한다기보다는, 그것을 곧바로 언어로 옮기기에는 아직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 과정은 어쩌면 화재라는 사건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를 천천히 위로하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특히나 1부의 첫 시인 「이 세상에 없는 것」은 이후의 시집을 읽는 내내 계속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의 차이는 뭘까> 모두 끝났다고 말해도 될까> 이 세상에 원래 없었던 것 같은 그것을 찾아> 나는 어딜 이토록 떠도는 것인지이 구절을 읽으며 처음에는 상실을 겪은 사람이 스스로를 다독이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미 쓰여 없어졌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혹은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는 걸까. 시인은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고 계속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이 시는 화재 이후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이
- 미빈
- 2026-07-30
1. 삶은 부조리다 태어남은 선택할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선택할 겨를없이 내던져진 삶은 애초에 부조리라고 할 수 있다. 살면서 고통과 쾌락을 둘 다 얻을 수 있고 어찌 보면 고통보다 쾌락을 더 많이 누리는 삶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러한 도박에 불참할 기회가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이듬의 시집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의 1부 중 <한여름 저녁 한 시간 반>에서 화자는 누군가가 난데없이 맡긴 짐을 떠안게 되고 이 때문에 버스를 놓칠 상황에 놓인다. 그리고 화자는 자신 또한 이 짐처럼 누군가 ‘세상에 맡겨 두고 찾아가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한다. 화자의 이런 생각은 선택의 기회 없이 탄생함을 인식한 것이다. 또한 짐을 맡기고 찾아가지 않은 건 사실상 짐을 버린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화자가 삶이란 부조리 속에서 내적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이미 태어났고, 어떻게든 살아가야 할 텐데, 그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 부조리한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타인이다. 다른 이가 한 사람 인생의 의미가 된다. 그리고 김이듬은 타인을 내면화하는 걸 그 의미로 봤다. 김이듬에게 타인은 내면화가 가능한 존재다. 2부의 <나의 이방인 2>에서, ‘너’는 화자인 ‘나’와 대화할 수 있지만, ‘탄식을 주워섬기는 너는 내 안의 방랑자’, ‘내게도 절친이 있다고/텅 빈 의자 위의 네가/나였음을 증명할 수 있을까’ 같은 문장들은 ‘너’가 ‘나’에게 타자이면서도 내면화되는 대상이라는 걸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나’ 대신 분노하기도 하는 타인이지만, ‘나’ 안에서 내면 안에서 ‘나를 감시’하기도 한다. 이는 ‘나’는, ‘우리는 불화한다’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 화자는 ‘너’와의 틈을 인식하고 갈등하는데, (내면 속 ‘너’가 ‘나를 감시’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자기검열의 주체로 ‘너’를 삼고 있는 것이다. <한여름 저녁 한 시간 반>에서 화자는 다른 사람이 맡긴 짐 때문에 환승 버스를 타지 못하고 터미널에 계속 남는다. 시 속에서 화자가 누군가 맡긴 짐으로 스스로 생각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세상에 맡겨진 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다른 사람이 화자에게 짐을 맡긴 건 화자가 그 사람을 내면화했다는 은유이다. 한 사람에게 원했든 아니든, 내면화된 타인은 삶을 변화시키지 않고 유지할 의미라는 것이다. 2. 이해할 수 없는 타인 그러나 타인은 온전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당신이 타인에게 의미라고 해도 타인의 삶은 당신이 의미가 아닌 부분에서 계속해서 변화할 것이고 그것은 당신이 의미인 부분을
- 금안백
- 2026-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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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우와 역시 되게 잘 쓰셨네요. 읽는 내내 빠져드는 느낌이었어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캔디 히히 빠져든다니 극찬 감사합니다..첫비평이라 긴장되네요